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 뉴토끼 - 웹툰 미리보기 [622-74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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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2화 금의환향 (5)

파라브의 황금 고블린 상이 발동됐다는 것은 단 하나를 뜻한다.

‘분기점.’

곧 굉장히 위험한 일이 펼쳐질 것이고, 지금은 그 불행을 회피할 수 있는 유일한 분기점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소장 말이 사실이었던 건가.’

연구소장이 경고했던 반년이 되기까지 약 한 달이 남은 시기.

촌장섬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까지 고려했을 때, 지금이 마지노선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점은…….

“남작님… 당장 떠나는 게 어떨는지요? 아니, 떠나야만 합니다!”

“진정하고 자리로 돌아가라. 이 문제는 내가 잘 결정할 테니.”

“예? 아… 예! 대신 빨리! 최대한 빨리 하셔야 합니다!”

하급자의 마음가짐을 잘 갖추고 살아가던 이 녀석이 이렇게 말할 정도로 그 직감의 강도가 진했다는 것이다.

녀석의 말에 따르면, 아이스록에 끌려갈 때도 이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다던가?

‘…아이스록 원정 때보다 더한 상황이라니.’

이쯤 되니 나도 덩달아 조급해진다.

그도 그럴 게, 그 원정 때 대체 몇 명이 차디찬 그곳에 쓰러져 아스라이 사라졌던가.

그와 같은 일은 다신 겪고 싶지 않다.

“부사령관, 나는 잠시 위에 다녀오마.”

“…이렇게 급작스럽게 말입니까?”

“급하게 이곳을 떠나야 할 수도 있어서 말이다. 자세한 건 돌아와서 말해줄 테니, 일단은 나 대신 이곳을 지휘하고 있어라.”

이후 부사령관에게 나를 빼고 레이드를 돌며, 가능하면 떠날 채비도 갖추고 있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얼른 꼭대기의 관제실로 움직였다.

‘이게 맞는 건가?’

가면서도 고민이 끊이질 않았다.

당장 소장의 거래에 응해 자격을 받고, 이 섬을 떠나 출항을 하면 소장이 경고한 시일 내에는 촌장 섬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누구도 다칠 일 없을 테고.

가장 안전한 방법이란 건 나도 이견이 없다.

‘근데 여기를 다시 못 내려온다는 게 너무 아깝단 말이지.’

애초에 소장 놈이 왜 나를 이곳에 내려오지 못하게 하려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도 내가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하지만…….

‘고블린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그냥 무시하고 있을 수도 없고…….’

딜레마에 제대로 빠졌다고 해야 하나?

머리가 복잡하다.

다만, 그럴수록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우선 순위.

모든 결정은 무엇을 최우선으로 할 것인지부터 시작되는 법.

나는 관제실로 향하며 스스로를 되돌아봤다.

그러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거래에 응하자.’

지하 1층에 어떤 꿀단지가 더 숨겨져 있을지 모르지만, 이미 충분히 얻을 만큼 얻었다.

애초에 지하 1층은 존재조차 몰랐던, 보너스 스테이지에 가까운 느낌이었지 않은가.

무엇보다…….

‘당분간은 여기서 더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숨은 꿀단지를 더 찾고 싶다면, 지금 우리들의 스펙으로는 부족하다.

거인섬의 초대형거인도 그렇고.

아직은 불안한 요소들이 너무 많달까?

도서관섬에서 1등급 몬스터를 사냥하며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듯, 공략을 더 이어 나가려면 희생이 불가피할 것이다.

그래, 그러니까…….

[왔군.]

“그래, 왔다.”

거진 한 달을 넘게 발길을 끊었던 관제실에 천천히 들어선다.

[마침내 결정을 내린 듯하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화면 속에 떠 있던 소장은 내가 어째서 다시 이곳에 왔는지도 눈치챈 듯했다.

‘여러모로 이상한 놈이란 말이지.’

놀랍게도 소장은 첫 거래 제안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기다려주었다. 며칠만 며칠만 하며 벌써 몇 달이 흘렀음에도 재촉조차 하지 않았다.

어차피 결과가 바뀌지 않는단 걸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자, 말해보게. 자네의 결정을.]

그래서인지 이놈 생각대로 된 거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진 않다.

하나 결정을 내린 이상 감정은 빼야 했다.

내 결정에는 나 하나의 안위만이 달린 게 아니니.

“그 자격인지 뭔지를 줘라. 그럼 앞으로 여기엔 얼씬도 하지 않을 테니.”

[현명한 결정일세.]

“됐고, 얼른 달라니까. 아, 뭐 계약서 같은 거라도 써야 하나?”

[그럴 필요는 없네.]

이내 모니터에 떠오른 빛무리가 옆으로 길게 휘어졌다.

[이미 계약은 이루어졌으니.]

…이건 또 무슨 소리래.

이미 이루어졌다고?

‘딱히 변한 것도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업적 달성」

조건: 제7 기록보관소 진행률 15% 달성.

보상: 지하 1층, 기록 보관소의 출입 권한이 영구적으로 부여됩니다.

솨아아아아아-

오른쪽 손등 위로 책 모양의 황금색 각인이 떠오르며 빛을 내다가, 이윽고 피부에 스며들듯이 사라진다.

또한, 그와 동시에.

「차원 맹약이 맺어졌습니다.」

「캐릭터의 지하 1층, 기록 보관소 입장이 영구적으로 제한됩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딱히 보이는 것도, 어떠한 이펙트가 터져 나온 것도 아닐진대.

꽈악-

무언가가 심장을 살짝 움켜쥔 것만 같달까.

다만 그 기간은 몹시나 짧았고,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내가 잠깐 착각한 게 아니었나 싶었을 정도였다.

“…지금 내게 뭘 한 거지?”

[아무것도. 단지 맹약이 맺어졌을 뿐일세.]

“…맹약?”

[조금 특별한 맹약이라 생각하면 쉽네. 상호 간의 동의하에 미궁 내에서, 자네와 나 사이에만 적용이 되는 새로운 규칙이 생긴 것이지.]

아무튼, 소장은 거래가 끝난 내게는 볼일이 없는지 일방적으로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럼 이제 둘 사이의 용건은 끝이군. 바쁠 테니 어서 가보게. 내려가면 좋은 소식도 있을 테고 말일세.]

“좋은 소식……?”

[가보면 알 것이네.]

거, 끝까지 미스터리하기는.

마지막까지도 어딘가 당한 느낌이 들게끔 만드는 소장이었다.

[마르크스 자네도 잘 가게. 이렇게 잠시나마 다시 볼 수 있어 반가웠네. 이건 진심이야.]

이내 소장이 햄식이에게도 인사를 건넸고, 이에 햄식이가 짧게 웅얼거렸다.

[……아니야.]

[아니라니? 무슨 말인가?]

소장의 되물음에 내 어깨를 타고 있던 햄식이는 잠시간의 텀을 두고서 똑부러지게 말했다.

[마르크스가 아니라, 햄식이야.]

[…자네에게도 전에 말했지만, 그 이름은 마녀가 지어준 것일세. 기억을 잃기 전 자네에게는 너무나 의미가 컸던—.]

[그건 기억을 잃기 전의 나잖아.]

그 당돌한 말에 소장도 잠시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침묵을 지켰고, 한참이나 시간이 흘러서야 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래, 이 세계에서조차 영원은 없는 법이지……. 자네도 변한 거야… 나도 그렇고.]

여전히 기계적인 음성이었으나, 어째선지 나는 그 목소리에서 감정의 편린을 감지했다.

그것은 추억 같기도 하며 회한 같기도 했다.

[그게 자네의 선택이라면야. 알겠네. 무운을 빌지.]

이를 끝으로 소장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나는 햄식이를 업은 채 관제실을 벗어났다.

[야, 너 괜찮은 거야?]

밖으로 빠져나오자마자 햄식이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 맹약이란 거. 진짜 괜찮은 거냐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뭐, 당장은 별 이상 없어보이긴 하다마는.”

[너 없을 때 내가 매일 관제실에 가서 쟤랑 대화했던 거 알지? 조심해. 아무리 봐도 수상한 놈이라고.]

“그러마. 걱정해줘서 고맙다.”

[……친구끼리 당연한 걸.]

친구란 단어에 나도 모르게 입이 꾹 다물려졌다.

그야 정보를 얻으려 매일 관제실에 들락거리던 때 소장에게 들었으니까.

햄식이는 지하 1층을 떠날 수 없다.

그리고…….

‘이제는 나도 못 내려오게 됐고.’

서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우리는 일절 그 주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마치 그러한 사실이 없는 것처럼.

***

지하 공장에 도착하자마자 알 수 있었다.

소장이 말한 ‘좋은 소식’이 바로 이것을 뜻한다는 걸.

“아저씨! 얼른 오세요! 얼른요!”

“설마 저거… 그놈한테서 나온 거냐?”

“네! 축하드려요! 갖고 싶어 하셨잖아요!”

관제실에 다녀오는 동안 정수가 드롭됐다.

그것도 내가 원하던 녹색으로.

멍하니 걸음을 옮기자 눈이 마주친 레이븐이 어깨를 으쓱한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고 안 오면 시험관에 일단 담으려 했는데 다행히 때를 맞춰서 왔네요.”

“몇 분이나 지났지?”

“10분이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아직 시간 여유가 있음을 확인한 나는 착용 중인 넘버스 아이템을 전부 따로 빼두었다.

그야 이 정수는 먹기 전에 약간의 사전 준비가 필요하거든.

터벅, 터벅.

준비가 끝난 후엔 천천히 정수를 향해 다가갔다.

8레벨이 된 덕분에 벨라리오스 정수를 먹고 나서도 빈 자리가 한 칸 있는 상황.

시험관을 쓸 필요 없이 먹을 수 있다면 그 자리서 먹는 게 베스트다.

다만, 문제는…….

‘되려나?’

[던전 앤 스톤]에서 정수 중복은 불가능했다.

물론 일반 정수를 먹고서 수호자 정수를 먹는 건 가능했지만.

‘그럴 땐 그냥 일반 정수가 수호자 정수로 업그레이드 되는 식이었지.’

그렇다면 과연 이 경우에는 어떨까.

그 결과는 곧 알 수 있었다.

스윽.

허공에 떠오른 정수에 손끝이 닿는 순간.

‘…이럴 땐 아예 안 먹어지는구나.’

쭉 내밀어진 손이 그대로 정수를 통과한다.

마치 내 영혼 안에는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듯이.

“쩝.”

솔직히 기대를 했었다.

만약 중복으로 정수를 먹는 게 가능했다면, 그땐 실험도 해볼 수 있었을 테니까.

과연 동일한 스킬은 중복해서 사용이 가능한지.

‘여러모로 아쉽네.’

[거대화]에 [초월]로 ‘초거대화’를 하고, 거기서 [거대화]를 한 번 더 하는……

‘(진)초거대화’가 됐으면 진짜 대박이었을 텐데.

‘이 정수는 그럼 나가자마자 원래 걸 지우고 먹는 거로 하고…….’

이후 레이븐이 시험관에 정수를 담는 것을 끝으로 나는 정수에 대한 잡념을 지워냈다.

“부사령관, 떠날 채비는 다 끝났나?”

“예, 곧바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럼 됐군. 가자, 집으로.”

떠날 시간이었다.

***

연구소를 떠나 아예 사원 밖으로 나온 우리는 숲속을 지나쳐 한곳으로 향했다.

며칠 정도 이동하자 드넓은 호수가 나왔는데, 예전에 탐사를 진행하다 발견한 곳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개방한 곳이었다.

원래는 결계 같은 거로 막혀 있었는데 그 앞에 있던 초거대 드론을 박살내니까 진입이 가능했거든.

“모두 배에 타 각자 자리로 향하시오!”

참고로 이 호수에 배를 띄우는 것이 바로 이 무지개섬을 탈출하는 방법이었다.

뭐, 진짜로 실행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예전에 소장도 그렇다고 확실히 말해줬으니 틀리진 않겠지.

째깍, 째깍-

이후 초거대 드론을 박살내고 얻은 회중 시계를 작동시키고 초침이 한 바퀴 돌 때까지 기다리자, 이곳에 왔을 때처럼 찬란한 무지개 빛깔의 광채가 호수를 뒤덮었다.

번뜩-!

정신을 차렸을 때 우리는 힘겹게 우기를 보냈던 그 무풍지대로 돌아와 있었고, 나는 도서관섬으로 직행해 햄식이를 내려줬다.

“미안하다. 약속을 못 지켜서. 네 기억을 되찾게 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했는데.”

[…아직도 그걸 신경 쓰고 있던 거냐? 그런 표정 짓지 마라. 어차피 소장한테 들을 이야기는 다 들었으니까.]

“…….”

[잘가라.]

작별 인사를 할 뿐, 햄식이는 재회를 암시하는 말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내가 했다.

[또… 보자고……?]

“그래, 세상 일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거 아니냐. 나가서 어떻게든 다시 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 생각이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애초에 소장 놈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그래서고.”

[………흥, 그럼 또 오든가 말든가.]

“그때까지 잘 있어라. 낯선 사람들이 오면 절대 문 열어주지 말고.”

시간 여유가 그리 많지는 않았기에 햄식이와 작별한 뒤로는 곧장 촌장섬을 향해 직행했다.

항해 내내 속도를 최대한 올린 덕인지, 소장이 말했던 날까지 3일을 남겨둔 시점에는 촌장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섬이다아아아아아!”

배에서 내린 후에는 혹시 모른단 생각에 당장 마을로 달려가 차원 비석에 손부터 가져다댔다.

“포, 포탈! 포탈이 열렸다!”

“그, 그럼 이제 정말 돌아갈 수 있는 거야?!”

“얀델 남작 만세에에에! 만세에에에!!”

다행히 소장의 약속이 정말이었는지 여태까지 늘 묵묵부답이던 차원 비석이 작동하며 푸르른 포탈을 생성해냈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포탈을 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궁금하잖아?

[반년 안에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면 큰 곤경에 처하게 될 걸세. 그자가 나타날 시기니까.]

소장이 말했던, ‘그자’는 대체 뭐였을까.

마지막까지도 시원하게 말해준 게 없었기에 호기심이 더욱 커진다.

‘포탈이 잘 켜졌으니… 잠시 상황을 보다가 떠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런 생각으로 본대는 마을에 위치해둔 뒤, 스벤 파라브만 데리고 내륙으로 올라왔다.

“저, 저는 대체 왜…….”

“집중해라. 네가 위험하다고 하면 바로 포탈을 타러 가야 하니까.”

“그런 거라면, 저는 당장이라도 내려가고 싶습니다마는……. 애시당초 이제 곧 우기가 또 시작되지 않습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아직은 여유가 있는가 보군.”

“…….”

그렇게 하루, 이틀 시간이 흘러 소장이 말했던 날까지 한두 시간밖에 남지 않은 때였다.

솨아아아아아아아.

무언가가 슬슬 시작되려는 듯, 돌연 등 뒤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저… 이, 이제 그만 가면 안 되는지요?”

“많이 불안하냐?”

“예…….”

“하나만 얼른 확인해보고.”

나는 서둘러 절벽가로 가서 해안가 쪽을 확인했다. 무언가 강한 힘이 잡아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은빛의 바다가 격하게 물결치며 쭉 밀려나고 있었다.

“어, 얼른 돌아가는 게 어떻습니까? 진심으로 불안해지고 있단 말입니다……!”

저러는 걸 보니 이제 진짜 시간이 얼마 안 남긴 한 거 같은데…….

나는 마지막으로 지도만 확인했다.

‘바위섬이 있는 방향이네…….’

바람이 불고, 파도가 따라가는 그 방향에는 바위섬이 있었다.

[하나 만약 항해를 하던 중, 파도가 밀려오기 시작한다면 즉시 여정을 멈추고 숨을 곳을 찾게.]

혹시 촌장의 괴담 수첩에 적혀 있던 놈인 걸까?

알 수 없지만, 이쯤에서 스벤 파라브를 데리고 마을로 내려갔다.

그리고 한 명씩 순차적으로 포탈에 태웠다.

참고로 마지막 차례가 바로 나였다.

내가 연 포탈이기에 내가 사라지면 닫힐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는데…….

쿠우우우웅-!

막 포탈에 타려는 찰나, 마을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뭐야 이건 또.’

순간 게이머로서의 호기심이 피어나기는 했지만, 굳이 밖에 나가서 확인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래, 언젠가 다시 올 수 있으면 그땐 알아낼 수도 있겠지.

못 온다면 알 필요가 없을 테고.

「기록의 군주 레카르도가 층을 배회하기 시작합니다.」

그냥 관심 끄고 얼른 나가자.

후우웅-!

이내 나는 포탈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우기가 시작될 무렵엔 1층 수정동굴을 비롯해 미궁 전체가 폐쇄되는 것인데…….

‘그래도 다행히 포탈은 열렸지.’

포탈은 열렸다.

하면 이 포탈을 타면 어디로 갈 수 있는 것일까.

내 예상은 1층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지만, 이미 미궁은 닫힌 상황이지 않은가.

그런 내 의문의 해답은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

「캐릭터가 라프도니아로 이동합니다.」

미궁이 닫힌 상태라면 도시로 복귀한다.

뭐, 어쩌면 그냥 무조건 도시로 이동하게 되는 걸 수도 있고.

아무튼, 그건 중요치 않다.

“아, 아저씨…….”

우리가 아주 오래전에 미궁으로 들어설 때 이용했던 7구역의 차원 광장.

주변을 둘러보니 텅 빈 광장에 나와 함께 미궁에 진입했던 클랜 아나바다 멤버들만 우두커니 서 있다.

물론 여기까지는 딱히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탐사군은 다른 구역의 차원 광장을 이용했다고 들었고, 이는 아르민 탐사단이나 헥츠 클랜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래, 여기까지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심지어 사람들이 다 기다리면서 생환한 우리를 반겨주는 모습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과, 광장이 대체 왜 이렇게…….”

우리가 도착한 광장은 평소에 보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솨아아아아-

불어온 바람에는 매캐한 냄새가 실려 있었고, 늘 줄이 길게 늘어서던 검문소 건물은 완전히 박살이 난 채 무너져 있다.

마치 한바탕 큰 전쟁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없는 사이에… 뭔가 도시에서 일이 있었던 거 같군.”

주변을 쓱 둘러보던 아멜리아가 침착하게 현 상황을 분석했다.

그리고 그 순간.

“대장! 여기요 여기!”

저 멀리서 남성의 소리가 들리더니.

“여기서 방금 포탈 반응이 관측…….”

검문소 잔해를 타고 올라온 남성과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엥? 뭐냐, 너희들은?”

그리 묻는 남자의 상의에 새겨진 문양을 확인한 나는 헛웃음을 내지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지?”

어디서 나타났냐니?

오히려 이쪽에서 묻고 싶은 말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이렇게 노아르크 새끼들이 도시에서 활개치고 다닐 수 있는 걸까.

***

지하 1층, 기록 보관소.

어느 정도의 오차가 있기는 하나 이곳의 시간은 외부와 동시에 흐른다.

33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23화 33

623화 7구역 (1)

오랜 시간 미궁에서 함께 구르다 보면, 동료들과 눈짓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소통이 가능한 경지에 이르를 수 있다.

바로 지금처럼.

‘뭔진 몰라도 일단 잡고 보자.’

그런 내 눈짓을 받은 동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기를 꺼내 든다.

그리고 그 순간.

“순순히 답할 생각은 없다 이거군.”

공교롭게도 상대 리더 역시 나와 동일한 판단을 내리고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일단 제압해라!”

적의 숫자는 리더까지 포함해 열넷.

결속이 가능한 6의 배수가 아니라는 점 때문에 괜히 내가 다 불편했지만…….

뭐, 여긴 미궁이 아니라 도시 한복판이니까.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캐릭터의 체격이 커지며, 크기에 비례해 위협수치 및 육체 수치가 증가합니다.」

상대의 수준을 모르기에 우선 몸의 크기부터 키웠다. 다만 몸집이 커지고나니 뭔가 떠오른 게 있었을까.

갑자기 달려들던 놈들이 당황하며 멈춰선다.

“비, 비요른 얀델…?”

“……거인이다!”

“실종됐다던 놈이 어째서 여기에……?”

거, 알아봐주니 고맙긴 한데…….

“도, 도망쳐라!”

“지원을 요청해야—!”

이제 와서 어디 가려고?

***

폐허가 된 차원 광장에서 마주친 노아르크 무리를 전부 제압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뭐, 대신 그 과정에서 열넷이던 인원이 열둘로 줄어들긴 했지만.

아, 당연한 말이지만 놓쳐서 그렇게 된 건 아니다.

단지 도망치는 과정에서 뒈졌을 뿐.

‘생각보다 실력이 있는 놈들이었네.’

바퀴벌레처럼 일사불란하게 흩어지는 게 평소에도 자주 합을 맞춰 튀던 놈들 같았다.

그중 발재간이 빠른 두 놈은 생포를 하려다간 아예 놓칠 판국이었고.

“잘했다. 에르웬. 놓쳤다면 귀찮아질 수도 있었을 텐데.”

“…천만에요.”

아무튼, 제압도 끝났겠다 나는 무릎을 꿇고 있는 놈들 앞으로 다가갔다.

‘열두 명.’

확실히 아까보다는 훨씬 편안해지는 숫자.

“에밀리, 너는 죽은 놈들을 포함해 장비부터 벗겨라.”

시간이 얼마나 여유가 있을지 모르기에 우선 루팅도 하면서 심문을 하기로 했다.

역시 대화 상대는 이놈이 좋겠지?

“……읏!”

제압을 당하고나서부터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처박고 있던 리더의 머리통을 쥐어잡고 올려세웠다.

“야, 눈깔.”

내가 놈을 부르자, 옆에 있던 아이나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 비요른, 이놈과 아는 사이였냐?”

“모르는데?”

“엥? 근데 어떻게 이름을 아냐?”

“……뭔 소리냐? 그냥 눈깔이 마음에 안 들어서 눈깔이라 부른 건데.”

아니면 어떻게 사람 이름이 눈깔이겠어.

가만 보면 아이나르 얘도 참 편견이란 게 아예 없다니까.

“하하… 난 또…….”

아이나르가 무안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박박 긁었고, 나는 익숙하게 아이나르에게서 신경을 껐다.

“아무튼… 야, 눈깔.”

다시 한번 불렀지만 눈깔은 답하지 않았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놈에게 물었다.

“우리가 오랜만에 도시로 돌아와서 그러는데, 대체 너희들이 왜 여기에 있는 거냐?”

역시나 이번에도 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즉시 망치로 내리찍었다.

리더가 아니라…….

콰직-!

그 옆에 있던 부하 한 놈의 손을 대상으로.

“아아아악!!!”

갑작스런 공격에 크게 놀라며 고통 어린 비명을 내지르는 부하 A.

나는 놈을 시작으로 순서대로 망치를 내치리며 한쪽 손을 박살내 버렸다.

그리고 다시 리더에게 물었다.

“우리가 오랜만에 도시로 돌아와서 그러는데, 대체 너희들이 왜 여기에 있는 거냐?”

아까 전에 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부하 A부터 시작해 망치를 내리쳤다.

다른 곳이 아니라 이미 작살 난 손을 대상으로.

콰직-! 콰직-! 콰직-!

나는 한 번 더 리더에게 똑같은 질문을 반복했고, 이번에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

부하들이 눈을 질끈 감는 걸 보니 이번 심문의 규칙은 다들 이해한 모양이었다.

“이번에도 잘 잡아라, 아우옌.”

“예……!”

다시금 차례차례 기계적으로 내리치고 있자, 부하들 중 한 놈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제, 제가!”

“…응?”

“제가 답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 질문에!”

“오, 정말이냐?”

어느 정도 유도한 결과였기에 나로서는 놀랍지 않았지만, 부하 G의 배신을 지켜보던 리더 입장에선 좀 달랐을까.

“이 쓰레기 같은 새끼가……!”

내내 침묵을 지키던 눈깔이 부하 G를 향해 눈알을 부라린다.

다만 마초 사회인 노아르크 출신답게 부하 G도 만만치 않았다.

“씨발, 그럼 어쩌란 거요? 당신이야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끝이겠지만, 우리는 작살이 나는데.”

“…그런다고 저놈이 널 살려 줄 거 같냐!”

“아니겠지. 근데 뒈져도 덜 아프게 뒈지는 게 낫지 않소? 어차피 뒈질 상황에 충성을 다 해봤자 뭔 의미가 있는데?”

“배신한 게 알려지면, 마을에 있는 네 가족들도 절대—.”

“에라이! 퉤! 병신 새끼야. 넌 네 부하가 가족 없는 고아 새끼인 것도 몰랐냐?”

“…….”

내가 보기엔 부하 G의 압승이었다.

논리정연하고도 이기적인 그 말에 눈깔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물론 뒤늦게 뭐라 욕이라도 하려는 듯했지만…….

“이런 개자—.”

“조용.”

“커헉-!”

조무래기 싸움을 지켜보며 시간 낭비를 할 이유가 없어서 말이지.

“자, 됐으니 말해봐라. 대체 너희들이 왜 여기에 있는 거냐?”

이내 눈깔을 조용히 시키고 묻자, 부하 G가 우리가 없던 동안에 도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했다.

정리해보자면 간단했다.

일단 때는 약 두 달 전.

성벽 밖으로 나갔던 노아르크 잔당들은 옛날 주거지였던 지하 도시로 몰래 들어왔다.

라프도니아를 침공하기 위해서였다.

“침공이라고……?”

“……제정신이 아니군.”

얘기를 함께 듣던 동료들이 놀라고 아멜리아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지만, 사실 나는 크게 놀랍지 않았다.

그야 예전에 원탁에서 광대에게 들은 적 있던 얘기거든.

‘설마 이렇게 빨리 실행에 옮길 줄은 몰랐지만 말이지.’

광대가 이 얘기를 할 때 옆에 있었던 덕인지 베르실도 다른 동료들보다는 훨씬 더 침착해 보였다.

“그래서? 전황은 어떻지? 너희가 이긴 건가? 그래서 7구역도 이 꼴이 난 거고?”

“아뇨… 저희가 이긴 건 아닙니다. 지금은 잠시 소강 상태일 뿐이지요.”

“…자세히 말해봐라.”

“이틀 전, 하수도를 타고 도시로 올라와 라비기온의 몇몇 구역들을 기습적으로 침공했고, 하루 만에 점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틀 전……?”

이후 얘기를 더 들어보자, 오늘이 바로 미궁이 폐쇄된 지 정확히 하루가 지난 시점임을 알 수 있었다.

“일부러 탐험가들이 미궁에 들어가 있을 때를 노렸군. 왕가의 병력도 상당 부분 미궁으로 들어간 이후이기도 할 테고.”

“예, 그렇습니다…….”

여기까지 얘기를 듣고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나는 왜 이렇게 운이 나쁠까였다.

내내 잠잠하다가 겨우 돌아왔는데, 그때가 마침 도시 침공이 일어난 시기라니.

재수 없는 놈은 어디로 넘어지든 코가 깨진다 이건가?

“듣고 있으니, 멈추지 말고 계속 말해라.”

“아, 예…….”

이후 부하 G는 그간의 전황을 얘기했다.

미궁이 열리는 1일과 탐험가들이 돌아오는 2일 사이를 노린 것.

그 덕분에 구역 내 치안대를 쉽게 몰아내고 도시 점거에 성공한 것.

그리고…….

“어제 도시로 돌아온 탐험가들을 차원 광장에서 포위하여 한 번에 제압한 뒤, 이들을 인질로 잡고 왕가의 병력들과 대치 중입니다.”

마지막으로 현재 상황까지.

“왕가 입장에서도 일반 도시민들 목숨보다는 이들의 목숨이 귀한지, 쉽게 밀고 들어오지 못하더군요.”

“근데 너희는 왜 이곳에 있던 거지?”

“저희는 순찰 중이었습니다. 혹시나 왕가에서 침입자를 보낼 수도 있는 데다가, 숨은 잔당들도 찾아내야 하니까요. 그러다가 저희 순찰조의 마법사가 광장 쪽에서 뭔가 느꼈다고 하는 바람에…….”

“순찰조가 더 있나?”

“이 근방은 없습니다마는…….”

말꼬리를 흐리는 폼이 뭔가 할 말이 더 남았는데 주저하는 듯하다.

비장의 수를 쓸 타이밍이었다.

“괜찮으니 말해봐라. 도움이 된다면 살려 줄 용의도 있다. 아니, 반드시 살려보내 주겠다고 전사로서의 내 명예를 걸고 맹세하겠다.”

초창기부터 유용하게 써왔던 전사의 맹세.

이를 들은 부하 G가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속내를 털어놨다.

“곧 정기 보고 시간입니다. 만약 저희가 제때 보고를 올리지 않으면 다른 순찰조가 이곳으로 찾아올—.”

“이 개자식이……!!”

마지막으로 믿고 있었던 보루였을까.

부하 G가 술술 불기 시작하자 눈깔도 참지 못하고 발작을 일으켰다.

아오, 자꾸 귀찮게.

“정기 보고라는 거, 네가 할 수 있나?”

“예. 할 수 있습니다. 몇 번 해본 적도 있고요. 귀찮다고 제게 자주 떠넘겼습니다.”

“그래?”

“네 이놈! 내가 네게 그동안 얼마나—!”

그럼 얘는 이제 쓸모 없겠네.

콰직-!

눈앞에서 상관의 머리통이 박살 났지만, 부하 G는 잠시 움찔할 뿐 금방 평정심을 되찾았다.

“아까 가져가신 짐들 중에 메시지스톤이 있을 겁니다. 그걸 제게 주시면, 제가 다 해결하겠습니다.”

“이건가 보군.”

부하 G의 말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멜리아가 곧바로 메시지 스톤을 찾아서 건네주었다.

“자, 그럼 해봐라. 쓸데없는 짓은 할 생각도 말고.”

“예…….”

이후 메시지 스톤을 건네받은 부하 G가 이를 통해 상부에 이상 없다는 내용의 보고를 올렸고, 평소에 전적이 있어서 그런지 별문제 없이 마무리가 됐다.

고로, 이제 다시 대화를 이어나갈 차례.

“아무튼, 그래서 몇몇 구역이라 했는데 정확히 어디어디를 뜻하는 거지?”

“13구역과 7구역입니다.”

“하…….”

“왜, 왜 그러십니까……? 제가 뭔가 실수라도…….”

진짜 재수에 옮이 붙었구나.

그 많은 구역들 중 두 개를 침공했는데 그게 왜 하필 우리 7구역인 거야.

한숨이 하염없이 나오지만 이쯤에서 마음을 다잡고 대화부터 이어나갔다.

“됐고, 말해라. 성지는 어떻게 됐지?”

13구역엔 수인들의 성지가 있고, 7구역에는 우리 바바리안들의 성지가 존재한다.

바바리안의 부족장이기도 한 나로서는 성지 걱정이 먼저 될 수밖에 없던 것.

“성지는 현재 도시와 단절된 상태입니다.”

“단절됐다고?”

“저, 저는 말단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오래전, 왕가에서 만든 마법진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그… 이종족을 언제든 제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말도 있는데… 이건 저희끼리의 말이라 확실한 건 아닙니다.”

그리 말한 부하 G는 내가 바바리안의 부족장이란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는지 이렇게 말을 덧붙였다.

“그, 그래도 아예 단절시킬 방법이 있던 덕분에 성지 쪽에는 비교적 피해가 적을 겁니다.”

비교적.

그 단어에서 성지에도 피해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뭐, 그래 어쩌겠는가.

그냥 비교적 적다는 것에 감사해야지.

“13구역… 수인 쪽은 어떻게 됐는데?”

미샤도 고향이 걱정됐는지 껴들어 물었지만, 자세한 답변은 받기 어려웠다.

“거긴 구역이 달라서 저도 잘… 하지만 아마 그쪽도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일 겁니다.”

“그래… 그렇구나…….”

증오했던 가족들이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걱정이 되는지 입술을 꾹 짓무르는 미샤.

“얀델, 필요한 정보는 대충 다 얻은 듯한데, 우선 자리부터 이동하는 게 어떤가?”

“이동하자고?”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만약 이 자리에서 포위된다면 아무리 우리라고 해도 힘들어질 거다.”

아멜리아의 조언대로 일단은 자리를 뜨기로 했다. 정기 보고는 잘 넘겼다고 해도, 혹시 누군가 우리를 발견할 수도 있으니까.

“그럼 얘를 뺀 나머지는 정리해라.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그자는?”

내 지시를 들은 아멜리아가 부하 G를 힐끗했다.

그리고…….

“살려서 데려간다.”

내 대답에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는 부하 G.

“미, 믿고 있었습니다. 남작님! 맹세를 지킬 거라고!”

“웃기지도 않는군.”

지켜보던 아멜리아가 헛웃음을 내지었다.

하긴, 얘는 내가 맹세 따위에 어떤 가치도 두지 않는 사짜 바바리안이란 걸 아니까.

‘그래도 아이나르까지 있는데 너무 쉽게 어길 수는 없지.’

물론 아직 얘한텐 들을 게 더 남아 있단 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치이이이익-!

베르실의 마법과 아멜리아의 탐험 용품(?)으로 시체들의 흔적까지 말끔히 지운 후에는 최대한 기척을 숨기며 이동했다.

7구역 전체가 노아르크 놈들에게 점거당한 만큼 당분간 몸을 숨길 은신처를 찾아야 했던 것인데…….

“예전에 살던 집은 어떨까요? 여기서도 그리 멀지 않을 텐데…….”

에르웬의 의견을 따라 옛날에 담보 대출을 받기도 했던 그 저택으로 향했다.

담장도 높고, 지하실도 있어서 여러모로 적당한 장소라는 판단이었다.

다만, 전쟁터가 된 도시에서 그 집이라고 멀쩡할 리는 없었다.

“아, 안 돼……. 내 추억의 집이… 나중에 열심히 돈 모아서 다시 사려고 했는데……!”

다른 순찰조들의 눈을 피해가며 도착한 저택은 화염 마법이라도 명중했는지 2층이 무너져 있었고, 곳곳에 그을린 자국도 가득했다.

“그래도 나쁘지 않군. 겉만 이렇지 1층은 멀쩡해. 외관이 이런 것도 숨어 지내는 데 도움이 될 테고. 담장이 좀 무너지긴 했지만, 각도상 안이 들여다보일 정도는 아니다.”

이내 아멜리아로부터 적합 판정이 내려졌고, 우리는 조심스레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아우옌. 지금부터는 우리끼리 대화를 좀 하려는데, 그놈은 지하실에 가둬놔라.”

“예.”

지시를 받은 아우옌이 부하 G를 지하실에 가뒀다.

“햇빛은 들지 않지만, 밥은 잘 나올 거요.”

“……?”

“아마도.”

어째선지 굉장히 신나 보였다.

25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24화 25

624화 7구역 (2)

부하 G를 지하실에 넣은 뒤, 커튼까지 싹 쳐서 어두컴컴한 거실에 모여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상황이 좋지 않네요.”

가장 먼저 운을 뗀 것은 베르실이었다.

“좀 있으면 저희를 발견했던 순찰조가 사라진 걸 알게 될 거예요. 그렇게 되면 본격적으로 수색이 시작되겠죠. 우리가 이곳에 있는 게 들통나는 것도 결국 시간 문제예요.”

확실히 이 집에서 계속 지내는 건 위험하다.

아무리 우리라고 해도 놈들에게 포위가 되면 답이 없으니까.

아이스록 원정 때도 느꼈지만, 오르큘리스를 포함해 노아르크의 상위권 약탈자들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이후로도 8층을 계속 공략한 만큼, 그때보다 더 정예화가 되었겠지.’

나는 베르실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걱정 마라. 나도 여기서 숨어 지낼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최대한 빨리 탈출할 방법을 찾아야지.”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노아르크 세력이 점거한 7구역을 탈출해야 한다.

그런 목표가 명확하게 정해지고 나니 자연스레 이후 대화도 이를 중점으로 흘렀다.

“7구역만이 아니라 13구역도 동시에 점거 중이라면서요? 그 넓은 성벽을 그들만으로 전부 다 감당하긴 어려울 거예요.”

“틈이 있는 곳을 찾아서 뚫자는 뜻이군.”

“네! 일단 성벽을 넘기만 하면 그 너머에는 아군들이 있잖아요?”

에르웬의 강제 돌파.

“하수도를 이용하는 건 어때……? 길도 좁아서 설령 들키더라도 할 만할 거 같은데…….”

미샤의 우회.

“…귀찮게 이것저것 하지 말고 그냥 숨어 지내는 건 어떠냐? 며칠만 기다리면 왕가군이 구하러 올 것도 같은데…….”

투쟁심이 빠진 아이나르의 존버 전략.

그리고…….

“아우옌, 너도 말해봐라. 가만히만 있지 말고.”

“예? 저 말입니까?”

“꼭 정답을 말하라는 게 아니다. 그냥 자유롭게 너였으면 어떻게 하고 싶은지를 말하면 된다. 부담 갖지 말고.”

“만약 제가 힘이 있었다면… 사람들을 구하러 갔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

“예… 7구역의 탐험가들 대부분이 그들에게 인질로 붙잡혀 있다고…….”

너무나도 의외였던 항해사 아우옌의 의견까지.

“무, 물론 저는 그런 영웅과 거리가 먼 사람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 그냥 해본 소리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내 시선이 집중되자 아우옌이 당황해하며 뭐라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나쁘지 않군.”

아우옌의 의견이 인상 깊었는지, 아멜리아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얀델,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른다. 저들은 우리의 존재를 모르고 있으니까. 성벽 너머에 있을 왕가군만 경계하고 있겠지.”

“이때를 노려 우리가 내부에서 놈들을 치자는 말이군.”

“그래, 성공만 한다면 엄청나게 큰 공을 세우는 일이 될 거다. 무려 라비기온의 도시 두 개가 외부의 적에게 넘어간 상황이니. 어쩌면 철벽의 난 때 역천의 공작을 막아 냈던 귀족들 만큼 큰 공으로 인정받게 될지도 모르지.”

확실히 아멜리아의 말도 일리는 있다.

라프도니아의 긴 역사 속에서도 이런 대사건은 한 손으로 세도 손가락이 남을 정도이니까.

성공만 한다면 수많은 보상은 물론, 승작까지도 노려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가입해 있는 이종족 귀족 연합 멜베스에서 내 입지도 그만큼 격상할 테고.

“…일단 좀 더 얘기를 들어봐야겠군. 아우옌, 지하에 있는 놈을 데려와라.”

고민이 깊어진다.

***

지하실에 잠시 갇혔다가 풀려난 부하 G는 정말 우리 편이라도 된 것처럼 묻는 질문에 성심껏 답했다.

덕분에 우리도 7구역의 상황에 대해 이전보다 더 소상히 알 수 있었는데…….

“탐험가들은 여러 지역에 나뉘어서 수감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직업상 일반인들을 아득히 뛰어넘는 전투력을 지녀 평상시 도시의 상비군 역할을 하는 탐험가들이 갇힌 장소는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었다.

과거 나도 한 번 갇혀 본 적 있는 탐험가 지부의 지하 감옥.

삼신교 신전들의 지하 감옥.

그리고 7구역 치안청의 지하 감옥까지.

물론 셋인 것도 크게 나눠서 그런 거지, 작게 나누면 수십 곳은 된다.

7구역의 신전과 탐험가 지부만 해도 몇 개씩이나 있고, 치안청도 여러 하위 지부들로 이뤄져 있으니.

“인질로 붙잡힌 탐험가들의 숫자가 워낙 많은 탓에 이런 식으로 나눠서 투옥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다만,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좀 애매하다.

‘오히려 전력들은 분산되어 있어서 구출 작전을 펼치기 쉬울 거 같긴 한데…….’

반대로 몇 곳만 들러도 우리의 존재가 만천하에 노출될 게 분명하다. 아무리 빠르게 이동해도 각 감옥들 사이에 거리가 있으니.

“그래도 한 곳을 들를 때마다 전력이 강화된다는 건 긍정적이군.”

“예……? 서, 설마 그들을 구하시려는 겁니까……?”

“그걸 왜 네가 궁금해하냐?”

“…….”

아무튼, 이후로는 순찰조들의 영역.

그리고 성벽의 배치된 병력 규모에 대해서 들었다. 뭐, 말단 조무래기에 불과한 이놈이 정확히 다 설명해 줄 수 있던 건 아니지만…….

“아, 그리고 민간인들은 성벽 근처에 모여 있을 겁니다. 왕가의 압박이 점차 거세질 때마다 조금씩 풀어 주며 대치 중이라고 하는데…….”

간략하게라도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으니까.

“좋아, 그럼 다시 집으로 가라.”

“……집 말입니까?”

“아우옌이 안내해 줄 거다.”

이후 부하 G를 다시 지하실에 가둔 뒤, 우리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회의 시간을 가졌다.

“표정을 보니 이미 결정을 내린 듯하군.”

“……그게 보이냐?”

“어느 정도는. 그래서 어쩔 거지?”

정말로 모르겠어서 묻는 뉘앙스는 아니었기에 나도 질질 끌지 않고 바로 답했다.

“인질들을 해방하고, 함께 이 도시를 탈출한다.”

“방법은?”

내 말에 아멜리아가 짧게 되물었고,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지금부터 생각해봐야지.”

“…….”

“다 같이.”

해볼 만하단 판단이 들어 결정을 내렸을 뿐, 상세한 계획은 아직 세우지 못했다.

애초에 이런 디테일한 부분들은 나 혼자 정하는 것보다 여럿이서 머리를 맞대는 게 좋기도 하고.

“좋아, 그럼 시작하지.”

그렇게 계획을 세우는 회의가 이어졌다.

어느 감옥부터 노려서, 어떤 루트로 이동할지.

마지막엔 성벽을 넘는 게 좋을지, 하수도를 타고 이동하는 게 좋을지.

성벽을 택한다면 어느 지점이 최선일지.

그러한 것들에 대해 한참이나 의논했고, 서서히 윤곽이 잡혀가던 때였다.

“근데…….”

잠시 회의가 막히며 조용해진 시기에 미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조금… 이상하지 않아?”

주어가 빠진 중얼거림.

이에 에르웬이 못마땅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이상하다뇨?”

“그게… 노아르크 사람들은 대체 뭐를 원하는 걸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어서.”

“그놈들 생각이야 당연하잖아요? 우리 것을 빼앗고, 자기들이 세상의 주인이 되고 싶어하겠죠.”

“그건 그런데……. 이런 건 너무 무모하잖아.”

미샤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애초에 그 사람들도 알고 있을 거야. 인질극을 벌이며 버텨 봤자 시간 끌기에 불과하단 걸. 그런데 왜 이렇게 쳐들어왔을까?”

그 말에 에르웬도 이견을 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방금 미샤가 가진 의문은 우리 모두 다 어느 정도 갖고 있던 것이니까.

지금 이 구도로 노아르크는 절대 이기지 못한다.

설령 인질이 수십 배 더 있다고 한들, 왕가는 흐를 피가 무서워서 칼을 뽑지 못하는 족속들이 아니다.

그리고…….

‘노아르크라고 해서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지.’

패배라는 결말이 정해진 침공.

한데 노아르크 놈들은 왜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저질렀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못 미쳐서?

글쎄, 그럴 리는 절대 없을 것이다.

“두 구역을 동시에 노린 것도 좀 수상합니다. 하나만 노려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간당간당한 판에…….”

“심지어 7구역과 13구역 사이에는 비프론도 있어서 수성도 훨씬 힘들지.”

“……그러게요. 정말 왜 그랬을까요? 비프론에 뭔가 목적이라도 있나?”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목적이 있는 움직임이란 것만큼은 분명하다.”

암, 이쯤 되면 숨겨진 계획이 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그럼 인질극을 벌인 건요?”

“이후 계획을 이어가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한 거겠지.”

“그럼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야겠네요. 놈들에게 시간이 충분하게 주어지면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짐작도 할 수가 없으니.”

역시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고.

이렇게 모여서 의견을 나누고 있자니, 이렇게 제한 시간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뭐,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빨리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점만큼은 모두에게 각인됐을 테니까.

“……그럼 동선은 다 정해졌군. 모두 숙지는 끝났나?”

“아, 나는 아직—.”

“괜찮다. 아이나르. 너는 그냥 베르실 옆에만 있으면 되니까.”

“오! 그게 정말이냐!”

응. 어차피 이걸 외울 거라곤 기대도 안 했거든.

아이나르는 그냥 똑똑한 사람 옆에 붙여 두는 쪽이 베스트다.

“그럼 준비도 끝났겠다, 슬슬 나가보지.”

그렇게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나가려던 차였다.

딴 건 다 기억 못해도 맹세에 대해서는 절대 잊지 못하는 DNA라도 있는 걸까.

“비요르으은! 아래! 아래 지하실에 갇힌 그놈은 어쩌려는 거냐! 분명 살려 준다고 맹세했지 않나!”

어휴, 이런 건 왜 또 쓸데없이 기억해서.

내가 플레이어라는 걸 모르는 아이나르 앞에서 맹세를 쉽게 어기는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지만, 물론 그래도 큰 문제로 번지지는 않았다.

“뭐가 문제냐? 살려 줬지 않나?”

“……응?”

“그럼 내가 뭐 걔가 먹을 음식들도 다 챙겨주고 계속 데리고 다니면서 보살펴줘야 하냐?”

“어… 그건 아닌데…….”

“그럼 됐군. 내버려둬라. 알아서 하겠지. 굶어 죽으면 그게 그놈 운명인 거고.”

“오… 그런가?”

“아이나르!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얼른 베르실 옆에 가서 서라! 거기가 네 자리니까!”

“알았다!!”

오케이, 그럼 아이나르 설득도 끝났겠다.

끼이이익, 쿠웅-!

자, 가보자.

***

폐허가 된 옛 집에서 나온 우리들은 최대한 은밀하게 순찰조들의 눈을 피해 이동했다.

순찰조들의 움직임을 보아하니, 아직까진 우리에 대해 알려지진 않은 모양.

“이쪽으로.”

아, 참고로 길잡이 역할은 아멜리아에게 맡겼다.

은밀, 잠입 같은 분야에서는 얘가 전문가나 다름없으니까.

실제로도 지시에 따르며 멈출 땐 멈추고, 움직일 땐 따라 움직이고 있자니 계획을 세우며 예상했던 시간에 정확하게 맞춰 도착했다.

“들었던 대로 경계 병력이 그리 많진 않군.”

평소 자주 방문했던 레아틀라스교의 대신전.

또한, 오늘 탈출 계획의 시작점이기도 한 그곳.

건너편 건물 2층에서 몰래 살펴보던 우리는 본격적으로 계획을 시작했다.

뭐, 그래 봤자 난 그냥 기다리는 게 끝이었지만.

“다녀오지.”

은신기가 있는 아멜리아와 미샤.

그리고 원거리 암살이 가능한 에르웬까지.

이렇게 3인으로 이뤄진 별동대가 따로 뭉쳐 건물을 나섰고, 잠시 기다리자 신호가 왔다.

건물에서 내려와 정문으로 향하니 어느새 그 앞을 지키고 있던 놈들은 전부 다 쓰러져 있는 상황.

치이이이익-!

아멜리아의 탐사 용품을 이용해 깔끔하게 흔적까지 지운 이후 대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푸욱-! 콰직-! 피슉-!

아멜리아가 가는 대로 따라가며 해당 작업들을 반복.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었다.

“아무래도… 들킨 거 같죠?”

에르웬의 중얼거림에 아멜리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거 같군. 이렇게 소란스러워진 걸 보면.”

소란스럽다고 하는데 내 귀에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저 말을 안 믿는 건 아니지만.

“근데 대체 어떻게 걸린 거냐?”

“글쎄, 방법이야 많겠지. 신비한 능력을 가진 놈들은 어디에든 항상 있으니까. 질문은 나중에 하고 일단은 속도를 올리겠다.”

“그래라.”

쩝, 되도록이면 여기서는 조용히 끝내 시간 여유가 있기를 바랐건만.

“왕가! 왕가에서 쳐들어왔다!”

실제로 감옥이 있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 도착한 순간, 대신전에 주둔 중이던 병력들이 나타나 덤벼들었다.

전부 죽여 버린 다음에 내려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테지만, 시간을 아끼기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얀델, 여기는 우리가 맡고 있을 테니 내려가라.”

“알겠다.”

지상층 정리는 동료들에게 맡기고, 나는 서둘러 지하로 내려갔다.

지상의 면적보다 훨신 더 넓게 지어진 지하 감옥.

간수 역할은 교대로 한 명씩만 맡고 있는지 한 명 빼고 보이지 않았다.

“오, 오지 마!”

간수도 지상의 소식을 들었는지 무기까지 빼든 상태로 날 맞이해 주었는데…….

콰직-!

이내 망치로 간수놈의 머리통을 박살 내자, 갇혀 있던 탐험가들도 상황을 파악했다.

“구조대……?”

“왜 한 명이지……?”

“잠깐만… 어딘가 익숙한데…….”

“얀델 남작! 얀델 남작이다!”

“거인이 왔다……!!!”

소리가 울리는 지하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에 귀가 아플 정도였으나,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소리칠 기운이 있는 게 어디야.

차라리 이 틈에 호감작이나 하는 게 옳다.

“기다려라! 나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 너희를 구하러 왔으니!!”

“와아아아아아아아!!”

그렇게 은혜 각인이 끝난 뒤에는 아까 쓰러뜨린 간수의 허리춤을 뒤져 열쇠를—.

‘…열쇠가 없네?’

예상 밖의 상황이나,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없었다.

힘만 충분하다면.

으지직-!

적당히 힘을 주자 숟가락처럼 구부러지는 철창.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왕가에서 남작님을 보내신 겁니까?”

“실종되었다고 들었는데…….”

갇혀 있던 탐험가들이 그 사이로 빠져나오며 온갖 질문을 해온다.

호감작도 좋지만, 친절히 답해 줄 여유는 없었다.

“자자, 설명은 나중에 하고. 손이나 내밀어라.”

“아……! 예!”

일단 탐험가들이 차고 있던 구속구부터 맨손으로 호두를 까듯 풀어 주었다. 정수를 봉인시키는 마도구인 만큼 물리 내구도는 낮은 편이었다.

“풀렸으면 얼른 위로 올라가서 도와라. 길 막지 말고.”

“저… 혹시 제 장비가 어딨는지…….”

“그건 위에다 물어봐라. 나도 모르니까.”

“예!”

열쇠를 귀찮게 하나하나 찾을 필요 없이 힘으로 다 해결하자 해방 작업은 예상 시간보다도 훨씬 일찍 끝이 났다.

하지만…….

“아래! 지하 2층에 신관님들과 마법사들이 있습니다!”

오, 지하 2층도 있구나.

어쩐지 여기에는 전부 일반 탐험가만 있더라니.

“나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 너희를 구하러 왔다!!”

이후로는 지하 2층에 내려가서도 똑같이 호감작을 하며 구출 작업을 이어갔다.

작업을 모두 끝내고 다시 위로 올라왔을 땐 이쪽도 정리가 끝난 상태였다.

“아저씨, 고생하셨어요.”

“고생은 너희가 했지. 됐고, 그보다 신관! 주교급 이상의 신관이 있나?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나는 해방된 탐험가들 사이에서 신관들만 콕 짚어 한곳에 불러모았다.

다행히 장소가 장소인 만큼 주교급 이상의 신관이 열 명도 넘었는데…….

“……어디 다치기라도 했소이까?”

“그런 건 아니고, 다음 계획을 위해 너희의 도움이 필요하다.”

“아, 그렇구려! 온 힘을 다해 돕겠소이다. 한데… 우리가 무엇을 하면 되겠소이까?”

“우리를 위해 기도해줘라.”

“기도… 라고 하심은……?”

쌩뚱 맞은 말이라도 들은 듯한 신관들의 반응에 나는 씨익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정수를 지우고 싶다.”

“…….”

“지금 당장.”

암, 큰일을 하려면 우선 강화부터 해야지.

***

「캐릭터의 영혼에 스며든 [오크 히어로의 정수]가 제거되었습니다.」

「근력이 -70 하락합니다.」

「민첩성이 -35 하락합니다.」

「투쟁심이 -40 하락합니다.」

「물리내성이 -20 하락…….」

「······.」

「······.」

.

.

.

.

「캐릭터의 영혼에 [????의 정수]가 스며듭니다.」

34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25화 34

625화 7구역 (3)

정수 삭제.

주교급 이상의 신관이라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능력이나, 정수 삭제에는 한 가지 조건이 따른다.

반드시 ‘신전’ 내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인데…….

노아르크 놈들 중에 정수를 잘못 먹어 망캐가 된 놈들이 많은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정수를 한 번 지우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거든.

얼굴이 널리 알려졌다면 더더욱.

“후우…….”

이내 나는 살짝 비틀거리며 신관에게 받은 푸른색 단검을 돌려주었다.

항상 느끼지만, 정수를 지울 때마다 느껴지는 공허함이 상당했다. 단순히 스탯이 줄어들면서 생긴 현상은 아니었다.

말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내 영혼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감각.’

굳이 말하자면 이런 느낌에 가까울 것이다.

이 세계에서 MP를 영혼력이라 부르는 이유도 알 것 같고.

스윽.

빈 자리에 다른 걸 채워 넣으면 조금 나아질까 싶어 얼른 아공간에서 시험관을 꺼냈다.

아르벳과 우움달.

그리고 오크 히어로의 [거대화]가 합쳐진 맞춤형 정수.

마개를 열고 포션을 마시듯 입에 털어넣으면서도 조금 궁금했다.

게임 중이었다면 과연.

이런 합성 마물은 과연 어떻게 표기가 됐을까.

「캐릭터의 영혼에 [????의 정수]가 스며듭니다.」

음, 글쎄… 성의 없이 물음표로 띄워 주고 끝은 아니었겠지?

알 수 없으나, 이쯤에서 잡생각은 그만두고서 느껴지는 신체의 변화에 집중했다.

탐험가들 사이에선 ‘길들이기’란 은어도 있거든.

정수를 먹을 때, 몸의 변화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새 능력에 적응하는 게 훨씬 수월하다던가?

「근력이 +100 상승합니다.」

무엇이든 들어 올릴 수 있을 듯한 활력이 몸에 깃든다.

물론 근력만 보면 오우거에 비할 바 아니지만…….

「도약력이 +120 상승합니다.」

허벅지의 근육이 조여지고.

「물리 내성이 +80 상승합니다.」

안 그래도 질긴 피부가 더 튼튼해졌으며.

「청각이 +60 상승합니다.」

공기 중에 흩어지던 소리가 더욱 선명해진 것.

암만 집중을 해도 당장 느낄 수 있는 큰 변화는 이것 정도였다.

뭐, 그렇다고 이게 끝인 건 아니지만.

「어둠 저항력이 +40 상승합니다.」

「영혼력이 +50 상승합니다.」

「자연 재생력이 +80 상승합니다.」

「지구력이 +60 상승합니다.」

「골강도가 +60 상승합니다.」

「흡수력이 +60 상승합니다.」

오우거도 깡스탯이 굉장히 높은 축에 속하나, 합산 능력치로는 아르벳의 상대가 안 된다.

물론 아르벳은 그 대신 스킬이 함정이지만…….

지하 1층 시스템을 이용해 스탯만 정수에 담은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

“후…….”

슬슬 스탯 변화에 적응을 끝낸 나는 조심스레 아공간을 열었다.

참고로 현재 나는 장착 중이던 넘버스 아이템을 모두 아공간에 넣어 둔 상태였는데, 우움달의 패시브 스킬이 가진 특징 때문이었다.

[영혼 연결] - 처음으로 획득한 장비가 귀속되며 추가 능력을 얻습니다.

처음으로 획득한 장비.

인게임에서는 그렇게 표기 되어 있으나, 실제로 패시브가 작동하는 장비는 ‘넘버스 아이템’에 국한된다.

또한…….

‘잘못 연결하면 돌이킬 수가 없지.’

연결 자체는 1회만 가능하기에 우움달의 정수는 항상 취급하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풀템을 낀 상태로 먹으면 그중 하나가 무작위로 귀속되기 때문인데…….

스윽.

이내 아공간에 손을 집어넣고, 꺼낼 물건을 구체적으로 이미지하자 크고 단단한 ‘그것’이 손에 쥐어졌다.

‘No.87 크라울의 악마 분쇄기.’

···는 당연히 아니었다.

물론 악마 분쇄기도 고성능의 무기인지라, 이걸 골라도 충분히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패시브 한 칸을 쓸 정도는 절대 아니지.’

방패바바에 어울리는 패시브 스킬은 수없이 많다. 그리고 원래라면 그것들 중 하나를 넣었을 것이다.

당시 내 수중에 이게 없었다면 말이다.

「캐릭터가 No.3 아이기스의 장벽을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18,600 상승합니다.」

원래라면 한참 뒤에나 얻는 게 가능했을 최강의 방패.

「영혼의 이끌림.」

「No.3 아이기스의 장벽이 캐릭터에게 영구적으로 귀속됩니다.」

「귀속된 장비는 절대 파괴되지 않습니다.」

「귀속된 장비의 모든 효과가 10% 증가합니다.」

「마물 처치 시 귀속된 장비가 개별 경험치를 얻으며, 일정 레벨에 도달 시 장비의 고유 효과를 얻습니다.」

이 방패는 지금부터 성장형이다.

***

[영혼 연결].

넘버스 아이템을 쓸 때 시너지가 나는 방패 드워프를 키울 때 필수적으로 챙기던 스킬.

당연히 수많은 연구를 하였고, 상위 장비들 중 대부분은 고유 효과까지도 다 꿰고 있다.

‘고유 효과 부여가 9레벨이었지.’

물론 고유 효과를 개방하지 않아도 충분히 좋은 스킬이었다.

레벨 1당 장비 성능이 10%씩 상승하니까.

‘그래도 파괴 불가 옵션이 중복이라는 건 좀 아깝지만…….’

뭐, 사실 상위 넘버스 대부분에는 파괴 불가 옵션이 붙어 있기에 크게 아까워 할 일까진 아니다.

귀속 옵션도… 어차피 팔 생각이 없는 나에게 단점이라 볼 수는 없을 테고.

‘거대화.’

이후 액티브 스킬까지 잘 작동되는 걸 확인한 나는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슬슬 주변도 다 끝난 거 같았다.

그야 재정비를 해야 하는 게 나 한 사람이었던 게 아니거든.

「아멜리아 레인웨일즈의 영혼에 [????의 정수]가 스며듭니다.」

「미샤 칼스타인의 영혼에 [????의 정수]가 스며듭니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의 영혼에 [????의 정수]가 스며듭니다.」

맞춤형 정수가 하나씩 추가된 딜러 세 자매(?).

그리고…….

「아이나르 프넬린의 영혼에 [????의 정수]가 스며듭니다.」

「아이나르 프넬린의 영혼에 [????의 정수]가 스며듭니다.」

[맨들기름]의 ‘스머그’와 [야성제어]의 ‘비틀란’의 정수를 지우고, 맞춤형 정수를 무려 두 개나 슬롯에 박아넣을 수 있게 된 아이나르.

변화는 즉각적이었다.

‘두 정수 합쳐서 투쟁심이 100이었지?’

이론상 히프라마전트의 정수로 인해 줄어든 투쟁심을 완벽하게 커버할 수 있는 수치.

실제로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이나르가 원래대로 돌아왔음을 알아보는 것은.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

그래, 이게 전투 함성이고 이게 바바리안이지.

홀 전체가 울릴 만큼 힘차게 포효하는 아이나르를 보며 뿌듯한 감정을 느끼기도 잠시, 아멜리아가 내게 다가왔다.

“어떠냐 새 정수는? 마음에 드냐?”

“그 얘기는 나중에. 일단은 시간이 더 지체되기 전에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거, 새 정수를 먹었으면 좀 더 호들갑 떨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 줄 법도 한데.

“……알았다.”

“하… 마음에 드니까. 시무룩한 표정은 그만 지어라.”

“오, 그러냐?”

아무튼, 이럴 시간이 없다는 아멜리아의 말도 일리는 있기에 나도 서둘러 다음 계획으로 넘어갔다.

“모두 주모오오오오옥!!”

이들을 데리고 다른 감옥을 급습하기 이전에, 먼저 선행되어야 할 작업이 있었다.

“역사적인 순간이다!”

연설이 시작될 징조를 느꼈는지, 모두가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바라보았다.

딱히 지루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약간 흥분한 눈빛을 짓는 쪽이 훨씬 더 많았다.

“현재 라프도니아는 위기에 처해 있다. 지하에 살던 더러운 쥐새끼들이 기어코 우리의 도시를 넘보려 하는 중이지.”

바바리안으로 살다보니 알게 된 것인데, 내게는 연설의 재능이 있었다.

아멜리아가 말하길, 그냥 타고났다던가?

“그리고! 우리는 아주 운좋게 이곳에서 살고 있었다!”

“운이 좋다니……?”

“그 많은 도시 중 하필 우리 구역이 당했는데, 엄청나게 운이 나쁜 거 아닌가?”

이어진 내 연설에 군중들 눈빛에 물음표가 띄워진다.

전부 합당한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지금.’

적당히 분위기가 무르익은 즉시.

“아니! 우리들은 모두 행운아다! 적어도 기회를 얻었으니까! 위기에 빠진 도시를 구하고,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큰 공’을 세울 기회를!”

나는 연설을 이어나갔다.

긴 말은 이 자리에서 필요치 않았다.

애초에 이들은 전부 탐험가 아닌가.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나만큼 잘 알고 있을 사람은 없었다.

“또한, 지금 이 자리에서 약속하겠다.”

“모든 일이 끝났을 때, 나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 감히 왕가를 앞에 두고 말하겠다!”

“나 혼자서 해낸 것이 아니었다고.”

“이 도시를 구해낸 것은 모두 너희가 흘린 피와 땀 덕분이었노라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힘차게 주먹을 쥔 손을 들어 올리자, 기다렸다는 듯 함성이 터져 나온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명성이 높아져서인가?

아니면 하다보니 이 짓도 늘어서?

모르겠지만, 날이 갈수록 저런 함성을 유도하는 게 쉬워지는 느낌이다.

‘아무튼, 이 정도 퍼포먼스면 나중에 내 진심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겠네…….’

열정적인 연설과 달리, 냉정한 눈으로 군중들을 살피던 나는 다시금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다시 연설이 시작된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에도 입을 꾹 다물고 경청하는 자세를 취하는 탐험가들.

“적들은 강하다! 쥐새끼들은 우리 곳간을 훔쳐먹으며 크기를 키웠고, 놈들을 몰아내기 위해선 우리 역시 피를 흘려야 할 것이다!”

“상관없습니다!!”

“전부 죽여 버리겠어!!”

위험성을 강조하는 내 말에도 위기를 기회로 인식한 탐험가들은 들어처먹지를 않았다.

뭐,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닌데…….

나도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 때라서 말이지.

“크흠흠! 너희들의 용기와 기상은 알겠다. 하지만! 라프도니아의 귀족이자 한 사람의 전사이며 탐험가이고, 이 도시를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자로서 가능한 피가 덜 흐르기를 바란다. 너희가 되도록 살아서 가족의 품에 안기기를 바란다.”

애초에 연설은 그냥 지금을 위한 밑밥이었다.

“해서 나 얀델의 아들 비요른은 결심했다.”

“……?”

“지금부터 너희에게 정수를 나눠주겠다!!”

나눌수록 커진다는 유명한 말도 있지 않은가.

이번이 딱 그런 경우였다.

***

“……에?”

정수를 무료 나눔하겠다는 말에 탐험가들의 표정이 이상해진다.

하긴, 이해가 안 되겠지.

저 바바리안놈이 왜 잘나가다가 저런 미친 소리를 하는가도 싶을 거다.

심지어 동료들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수를 나눠주겠다고 한다면…….”

“지하 1층에서 얻은 것들을 말하는 거겠죠?”

“그 귀한 걸 대체 왜…….”

유일하게 아멜리아만 평정심을 지키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아멜리아는 알고 있거든.

이번 무료 나눔이 결과적으로 내게 큰 이득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당연한 말이지만, 잠재적 적대 관계인 왕가로 가는 전리품이 줄어든다는 점에서만 이득이라는 뜻이 아니다.

생각해 보아라.

‘여기서 막 정수를 풀어 버리면, 정수가 몇 개 남았는지 어떻게 알겠어?’

쉽게 말하자면, 구린 정수들을 탐험가들에게 막 풀어 버리는 것을 통해 가치가 높은 정수들은 뒤에서 꿀꺽하는 게 가능하다.

송사리들만 풀었단 걸 왕가에서 알아낼 방법은 없다.

이런 말을 하면 좀 쓰레기 같긴 하지만…….

‘전쟁 중에 희생자가 나오는 건 불가피하니까.’

그야 어떻게 조사를 할 건데?

이미 죽은 놈이 송사리를 먹었는지, 아니면 값비싼 장어를 먹었는지.

심지어 대의명분도 깔끔하다.

도시를 구하기 위한 투자였다고 말하면 그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암, 원래 전쟁 중에는 막 이것저것 사라지고 하는 거지.’

전문 용어로는 ‘슈킹’이라고도 한다.

참 신기하게도 일본어가 어원이랬던가?

아무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자자! 다들 이리 와라! 밀지 말고! 정수는 아직 많이 있으니!”

나는 본격적으로 나눔을 시작했다.

33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26화 33

626화 7구역 (4)

첫 타겟으로 잡은 레아틀라스교의 대신전을 급습한 후, 우리는 미리 짜둔 동선대로 움직이며 각 도시 시설에 갇힌 탐험가들을 구출했다.

그리고…….

“정수를… 주시겠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너희들이 조금이라도 더 강해져야, 이 도시를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겠나! 자, 어서 받아라!”

그렇게 탈출을 할 때마다 정수 나눔을 진행했다.

아, 물론 정말 아무에게나 막 퍼준 건 아니고, 탈출할 때마다 거기서 가장 등급이 높은 탐험가에게 하나씩 줬다.

그 정도는 해야 나도 왕가에 면목(?)이 서니까.

애초에 지하 1층에서 얻은 정수가 모두에게 줄 만큼 넉넉하지도 않고.

‘오케이, 그럼 이거로 정수 나눔은 끝.’

이내 동선상 네 번째 순서에 위치해 있던 7구역 치안청 서지부를 해방시키며 나눔용 정수가 모두 다 소모됐다.

“저… 그런데 어느 누구에게 어떤 정수를 줬는지 정도는 기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슈킹 계획을 전혀 알지 못하는 아우옌이나 다른 동료들은 내 파격적인 행보에 뒤늦게나마 그런 우려를 표했다.

“왕가의 재산인 만큼, 명분이 좋더라도 분명 확인하려 들 것입니다.”

뭐, 그거야 그렇겠지.

근데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보통 사람들이 이런 ‘실수’를 하면 굉장히 수상해 보일 수도 있을 테지만.

“에이, 그런 걸 뭐 하러 기록하나? 귀찮게.”

나는 바바리안이다.

그렇기에 바바리안식 일처리를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귀찮다면 지금에라도 제가 사람들에게 물어봐서 기록을…….”

“됐다! 이 바쁜 와중에 언제 그걸 하나하나 하고 있나?”

“그래도…….”

하, 이거 참.

걱정해주는 게 고맙긴 한데.

“아우옌, 그러니까 괜찮대도.”

이내 목소리를 깔고 딱 잘라 말하자, 아우옌이 아차하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꾹 다문다.

이제야 녀석도 내게 뭔가 숨은 의도가 있음을 눈치챈 모양인데…….

‘아직 내가 정확히 뭘 하려는지는 모르는 거 같네.’

하긴, 그 아멜리아도 내 계획을 처음 듣고서는 경악에 경악을 거듭했을 정도니까.

왕가를 상대로 이런 미친 짓을 벌일 사람은 이 세상에 나밖에 없을 거라던가?

“비요르으으은! 그래서 다음 목적지로는 언제 출발하는 거냐! 어서 싸우고 싶다……!! 우오오오오!!”

안 그래도 슬슬 다시 이동을 재개하려던 차, 아이나르가 그새를 못 참고 재촉을 해온다.

‘……투쟁심은 반만 넣을 걸 그랬나?’

투쟁심을 회복하고 나니 지난날의 흑역사가 수치스럽게 느껴졌는지, 아이나르는 어째선지 이전보다도 훨씬 더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반 정도만 넣었으면 보통 사람들 수준이 되지 않았을까도 싶지만…….

‘에이, 그럼 그게 무슨 창바바야. 그냥 창술사지.’

자고로, 바바리안이란 이래야 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바바리안 로드로서 아이나르가 호쾌한 모습을 되찾은 것이 몹시 기껍기도 하고.

그래서 아이나르의 포지션도 바꿔줬다.

원래는 베르실의 옆을 따라다니며 후방을 지키는 게 이번에 아이나르가 맡은 임무였지만…….

“울부짖어라, 아이나르.”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지금은 그냥 최전방에서 나를 따라다니며 보이는 대로 다 때려부수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신규 스킬까지 능숙하게 활용해가며.

「아이나르 프넬린이 [불굴의 혼]을 시전했습니다.」

「일정 시간 동안 육체 수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행동을 제약하는 모든 종류의 상태 이상 효과가 80% 감소합니다.」

새롭게 얻은 전투 버프는 아이나르를 전차처럼 돌진해 전장을 휩쓸게 해주었다.

비록 CC기 면역, 혹은 아예 풀어버리는 종류의 스킬은 아니지만…….

80% 감소에 항마력까지 감안하면 어지간한 CC기는 눈 깜짝할 사이에 풀려버리니까.

「아이나르 프넬린이 [일점사]를 시전했습니다.」

다만 창바바의 코어 스킬인 [일점사]는 아직까지 그렇게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다음 일격에 한해, 보유 중인 관통 계열 스킬의 모든 효과가 적용됩니다.」

그야 아직 관통 스킬이 [삼지창] 하나뿐이거든.

그래서 마나가 아까우니 되도록이면 지금은 쓰지 말라고 조언까지 해줬지만, 아이나르는 도무지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창에서 하얀 빛이 나는데 어떻게 참냐던가?

‘도시 문제만 해결되면 공격 스킬들도 얼른 사서 먹여야지.’

관통 스킬이 세 개 정도가 쌓이면 [일점사]는 5등급 스킬의 성능을 넘어서는 위력을 보인다.

뭐, 그래도 이 스킬의 진가는 따로 있지만.

‘어떻게 보면 이 스킬도 변환 계통 스킬이려나?’

[일점사]의 스킬 조건은 ‘관통 계열’이다.

때문에 활 같은 원거리 무기로만 쓸 수 있는 타 직업군의 스킬도 먹어서 활용이 가능하다.

애초에 그 점을 활용하기 위해 [일점사]가 창바바의 코어 정수로 채택된 거기도 하고.

“우오오오오오오!!”

아무튼, [일점사]를 제대로 활용할 수 없는 것과 별개로 아이나르는 전장을 누비며 폭검이라 불렸던 시절.

아니, 그 이상의 위상을 보여 주었다.

그도 그럴 게, 일단 이번 스펙업으로 깡스탯이 어마무시하게 높아진 데다가…….

「아이나르 프넬린이 공격 스킬을 10회 사용하였습니다.」

「패시브 스킬 [전쟁 병기]로 인해 일시적으로 받는 피해가 대폭 감소합니다.」

「아이나르 프넬린이 방어에 실패했습니다.」

「패시브 스킬 [인내력]으로 인해 모든 내성이 소폭 상승합니다.」

방어 계열 패시브를 챙긴 덕분에 전투 안정성도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푸욱-!

대미지는 이전보다 훨씬 더 올라갔다.

다수의 약한 적을 상대할 땐 이전이 훨씬 더 나았을지 모르겠지만, 단일 딜은 그냥 차원이 달라진 수준이다.

그야 신록거창은 일단 창 계열 종결급 무기니까.

대충 푹푹 찌르면 어지간한 갑주는 두부처럼 쉽게 뚫고 지나치는 것인데…….

“폭검이… 언제부터 창을 쓴 거지?”

“근데 검을 쓸 때보다도 더 강해진 거 같은데…….”

“……신창! 신창의 등장이다!”

그런 위상에 놀라는 탐험가들의 호들갑을 들은 아이나르가 내게 물었다.

“비요른, 신창이 뭐냐?”

“창을 잘 쓰는 사람이란 뜻이다.”

“우오오!! 나는 신창이다아아아아아아!!!”

아이나르에게 새로운 이명이 생겼다.

***

「아이나르 프넬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했습니다.」

「아이나르 프넬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했습니다.」

「아이나르 프넬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했습니다.」

「아이나르 프넬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

「······.」

***

지하 1층에서 돌아오며 아예 무기까지 바꿔 큰 임팩트를 남긴 아이나르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들도 뒤따르는 탐험가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저 방패는 뭐지……?”

“모르겠소이다. 하지만 보통 물건이 아닌 것은 확실하오.”

“보아하니 거인의 여인들도 더 강해진 듯한데.”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새 정수를 얻은 아멜리아, 미샤, 에르웬도 보다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며 수많은 탐험가들의 감탄을 받았다.

“…그곳에서 어떤 탐험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거인의 등에 날개가 달렸군.”

“이제 와서 놀랄 거 뭐 있소이까? 이미 명예의 돌에 이름까지 남긴 탐험가인데. 저 사람은 언젠가 죽어서도 이 도시에 전설로 이름을 남길 거요.”

조금 낯간지럽긴 하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이번 여정을 통해, 우리는 보다 멀리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을 얻었다.

아, 물론 그 전에 이번 일부터 잘 끝내야겠지만.

“……이번에도 또 비었군.”

동선상 아홉 번째 순서에 위치한 서부 탐험가 지부의 지하 감옥. 다만 우리가 도착했을 때 감옥 내부는 텅텅 비어진 상태였다.

“아무래도 마지막 전투에서 놈들을 크게 무찌른 게 큰 거 같군요.”

“다른 시설들도 비슷한 상황일 듯합니다.”

세 번째 시설부터는 노아르크 놈들도 우리에 대해 인지하고서 만반의 준비까지 하고 기다린 탓에 격렬한 전투를 해야 했다.

하지만 일곱 번째부터는 점점 전력이 약해지더니 이제는 감옥을 지키는 놈도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할 탐험가도 아예 싹 사라져버렸다.

물론 아예 예상하지 못한 결과는 아니었다.

그야 우리가 아무리 안에서 분탕을 쳐대도 놈들이 가장 경계하는 대상은 성벽 너머에 주둔 중인 왕가군일 테니까.

비상시를 대비해 성벽에 병력을 배치해야 하며, 우리를 잡겠다고 너무 많은 병력을 빼버리면 성벽 너머 왕가군에서도 이상을 눈치챌 가능성이 높다.

쉽게 말해, 놈들 입장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우리를 내버려 둘 수밖에 없는 것.

‘쩝, 왕가 도움을 받는 건 어렵겠네.’

사실 이번 계획에서 바랐던 최선의 상황은 따로 있다.

우리가 만들어 낸 빈틈을 포착한 왕가군이 총공세를 가하는 것이다.

지하 1층 원정대가 돌아온 소식은 이미 왕가에도 전해졌을 테니까.

우리가 7구역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 테고, 성벽의 병력이 빠지자마자 무슨 상황인지 눈치챌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하지만…….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겠군.”

어디 세상이 바라는 대로만 굴러가던가.

살아오며 수없이 느껴온 세상의 법칙인 만큼, 나는 빠르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다음 계획이라 하심은…….”

“이미 다 얘기해 뒀던 건데 왜 모르는 척 묻냐?”

“…….”

“우리 힘만으로 성벽을 뚫고 도시로 넘어간다.”

단원들 간에는 진작에 계획을 세우며 공유가 됐던 내용이었다.

하나 이제 갓 탈출한 탐험가들은 아니었을까.

“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아까 듣기로 성벽에 노아르크 놈들이 바글바글 하다고 하던데…….”

내 얘기를 훔쳐들은 탐험가들 사이에서 소란이 인다.

“우리만으로 되겠소이까?”

“심지어 우리는 장비도 멀쩡하지 않단 말이오!”

“아무리 공이 좋다고 하나, 이건 좀 무리가 아닐는지 조심스레 말씀을 올려보지 아니할 수 없는…….”

사실 이런 애들을 설득할 방법은 많았다.

우리 전력이면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하다.

또한, 우리가 먼저 치면 분명 왕가군에서도 눈치를 채고 서포트를 해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얼마나 다치든 성벽만 넘어가면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등등.

그런 말만 조금 멋드러지게 해주면 이들은 결국 설득되어 나를 따라 올 것이다.

하지만…….

“아오, 시끄럽게.”

“……?”

“다 큰 어른들이 뭐 그렇게 징징거릴 게 많은 건지.”

“……예?”

얼빠진 표정을 짓는 탐험가들을 보며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무서운 놈은 빠져라. 그럼 전부 끝나는 문제 아니냐?”

“…예?”

“뭘 그렇게 당황하나? 설마 내가 열심히 설득이라도 해줄 줄 알았던 거냐?”

“…….”

답이 없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런 듯하다.

거, 내가 자기네들 부모님도 아니고.

“출발한다!”

더 길게 대화를 나눌 필요 없이 그냥 바로 앞장 서서 출발했고, 그것이면 충분했다.

“…나, 남을 건가 자네는?”

“미쳤소? 따라가야지!”

“남작도 뭔가 생각이 있으니 저러는 것 아니겠소? 나는 남작을 믿으리라!”

내가 보기에 20분은 넘게 아꼈다.

***

내 고향이나 다름 없는 7구역인 만큼, 부서진 도시에서도 길을 찾아 이동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저 멀리 떡하니 성벽이 보이기도 하고.

다만, 문제는 성벽이 가까워지며 우리를 발견한 노아르크 본대가 다가오기 시작한 것인데…….

“적어도 우리의 스무 배는 되겠군.”

“문제는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거죠. 시간이 지나면 더 몰려들 거예요.”

심지어 마냥 숫자만 많은 것도 아니다.

우리를 막으러 나온 노아르크 본대에는 범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는 녀석들이 가득했고, 그중 한 명은 내게 너무나도 익숙한 인물이었다.

“기어코 거기서도 살아서 돌아온 모양이군요? 비요른 얀델.”

“…….”

“그냥 거기서 콱 죽어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멀리서 인사말을 던져오는 녀석을 보며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피싯.”

얘는 아직도 여전하구나.

25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27화 25

627화 7구역 (5)

시체 수집가, 아벳 네크라페토.

소수 정예를 추구하는 범죄자 집단 오르큘리스의 단원이자, 이제는 사라져 버린 원탁의 회원 중 한 명.

익숙한 인물은 녀석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저, 절규의 마녀다……!”

흑마법사, 리란느 비비앙.

“검붉은색의 갑주를 입은 노기사라면……. 저자가 바로 그……!”

오래전 왕실기사단장을 죽이고 달아나며 악명을 얻은 혈기사.

일전에 암흑 대륙에서 격전을 벌였던 놈들은 물론이고, 정보로만 알고 있었던 간부급의 범죄자들도 곳곳에서 눈에 띈다.

아, 물론 아예 낯선 놈들도 있었다.

오르큘리스의 단원들에 대해 나름 조사하고 공부도 했지만, 그럼에도 떠오르는 게 없는 정체불명의 여러 인물들.

‘…신입들인가?’

왠지 그런 느낌이긴 한데, 만만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아니, 실제로도 만만하진 않을 거다.

8층을 독점하며 다음 세대 육성에 많은 것을 투자한 게 노아르크였으니까. 심지어 그중 몇몇은 아이스록 원정 중에 직접 대적해보기도 했기에 그 힘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까다로운 계층 정수를 지닌 단장놈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 정도.

다만…….

“…….”

놈들과 마주한 순간 에르웬의 눈빛에서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솔직히 말해,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돌발 행동이 조금은 우려됐을 정도였지만…….

“괜찮아요. 저는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나를 안심시키듯, 살기가 옅어지며 정돈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날부로 많은 시간이 흘러서인지.

그도 아니면 흘러간 시간 속에서 여러 사건들을 겪어서인지.

에르웬도 이제는 당시의 감정을 능숙하게 컨트롤 할 수 있게 된 거 같았다.

“오늘이 아니어도… 언젠가 저놈들은 제가 다 죽여 버릴 거니까.”

“…….”

“그러니까 괜찮아요.”

뭐, 감정 자체가 옅어진 건 아닌 듯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은 사실이다.

따져보면 나라고 딱히 얘랑 다를 것도 없고.

사실 왕가놈들에게는 괘씸죄가 붙어서 더 안 좋게 보일 뿐이지, 원한의 정도로만 보면 이놈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용살자, 리갈 바고스.

그놈이 바로 저 오르큘리스의 단원이었으니까.

터벅.

조용한 대치가 이어지며 공기가 점점 더 무거워지던 때,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야 지금 몰려온 숫자를 보아라.

그래, 그러니까…….

“아, 혹시 벌써 자포자기 해버린 겁니까? 그러면 영 재미없는데……. 예?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보는 게 어떻—.”

기고만장하게 말하는 녀석의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피시싯, 그 잘난 입이 이제야 열리는—.”

“장난감 수집가.”

“…….”

마음 같아서는 이전에 암흑 대륙에서 등대지기를 잡았던 것처럼 무지성 돌진을 박고 싶지만, 당장은 그러기에 제약이 많다.

지금 우리의 목표는 탈출이니까.

애초에 놈이 작정하고 튀기만 하면 다가가는 데만 한 세월이 걸릴 게 분명하다.

‘……얼른 이동기도 구해야 하는데.’

따라서 놈을 참교육하는 것은 일단 보류.

“자, 장난감 수집가라! 뭐, 나쁘지 않겠습니다! 당신을 죽인 뒤에는 정말 장난감처럼 다뤄줄 테니!”

녀석은 내 인신 공격에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다는 것처럼 억지로 텐션을 올렸다.

거, 그런다고 어른스럽게 변하는 건 아니건만.

“너도 정수를 새로 구해보는 건 어떠냐? 세상을 잘 뒤져보면 국소 부위만 커지는 정수도 분명 존재할—.”

“그만.”

“……?”

“이 친구를 놀리는 건 그만두시게.”

한창 추가 딜을 박으려던 차, 한 사내가 대화에 껴들었다. 한데 저 자존심 강한 광대 녀석이 아무 말 안 하고 있는 걸 보니 꽤 직위가 높은 듯하다.

‘누구지?’

고민하던 중, 내 측후방에 서 있던 아멜리아가 짧게 속삭여주었다.

“롤런드 바노잔트. 오르큘리스의 부단장이다.”

워낙 외형이 평범해 바로 알아채지 못했지만, 굉장히 유명한 녀석이었다.

마안, 롤런트 바노잔트.

10년 전, 전대 부단장을 일격에 참살하며 이인자 자리를 꿰찼다는 이야기를 지닌 최상위 이능술사.

“진짜냐? 저놈이 전대 부단장을 죽였다는 거.”

“사실이다. 전대 부단장이 왕가와 내통하고 있단 게 밝혀지며, 놈을 처단한 게 바로 저자였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아무튼, 덕분에 걱정은 덜었다.

부단장이 7구역에 있는 걸 보면 분명 단장은 13구역을 맡고 있는 것일 터.

오늘 안에 단장을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부단장이 만만하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지만.

“얀델, 되도록이면 저자와 대화를 하지 않는 편이 좋—.”

그때 나와 녀석을 사이로 두고서 마력 파장이 느껴졌다.

“———!”

옆에 있는 아멜리아가 뭐라 말을 하고 있지만 들리지는 않는 상황.

‘소음 제어 마법은 아니고…….’

스킬이겠네.

나는 걱정하는 아멜리아에게 괜찮다는 손짓을 보내준 뒤 다시금 부단장을 응시했다.

“내 소개는 그 여인이 대신 해준 듯하니 말을 아끼지. 얀델의 아들 비요른. 자네에게 제안할 것이 있네.”

“제안이라…….”

일단 들어는 보겠다는 듯 말하자, 부단장도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곧 모든 것을 뒤삼킬 폭풍이 불어올 걸세. 그리고 구멍이 난 배로는 절대 그 폭풍을 이겨낼 수 없지.”

“혹시 구멍 났다는 배가 왕가를 말하는 거냐?”

“물론일세.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어떻게 이러고 있을 수 있겠나? 구멍 난 배를 버리고 우리에게 오게.”

부단장의 제안은 조금 아쉬웠다.

너무 뻔하다고 해야 하나?

무슨 제안을 하려고 하기에 소리까지 막는지가 궁금했는데.

“…혹시 시간을 갖고 고민해 봐도 되나?”

그런 내 부탁에 부단장은 피식 웃었다.

“거절이라는 뜻이로군.’

“아니, 왜 그게 그렇게 되냐? 고민을 해본다고 했을 뿐인데.”

“자네는 우리에게 있어 요주의 인물일세. 그만큼 자네에 대해서도 많은 조사를 했지. 자네에게 있어 고민을 해보겠단 말은 시간을 끌겠다는 뜻 아닌가.”

“어…….”

이 새끼 뭐야?

순간 당황해서 말문이 막힐 정도였지만,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는 상황은 아니었다.

야구 선수들도 투수들의 버릇을 분석하듯이.

이놈들도 내가 평소에 하는 버릇들을 분석한 거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제대로 조사하기는 개뿔.”

“……?”

“그도 그럴 게, 제대로 조사해 봤으면 이미 알고 있어야 할 거 아니냐?”

“…….”

“내가 무슨 대답을 할지.”

그런 내 비꼬는 말에도 부단장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똑같은 말투로 이렇게 짧게 되물을 뿐.

“그래서 대답은 무엇인가?”

“거절이다.”

“이유는?”

“글쎄? 그냥 그러고 싶은 기분이어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기에 그런 식으로 대충 답했다.

한데 녀석도 짚이는 게 있었을까.

“동료를 목숨처럼 아낀다는 말이 사실인가 보군.”

놈이 무덤덤하게 지껄인다.

“리올 워브 드왈키. 그자의 죽음이 자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가 있더군.”

이 미친놈이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하지만 그자를 죽인 것은 용살자였으며, 그것은 독단적인 행동이었네. 그리고 그자는 자네를 쫓던 중에 장미기사단과 부딪쳐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지.”

그것은 조소처럼 들리기도 했고.

“아, 자네는 모르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군? 이건 왕실 내에서도 극비로 다뤄지는 정보인 데다가…….”

어떤 부분에선 설득하는 것도 같았으며.

“들어 보니 당시 자네는 그냥 도망치기 바빴다는 모양이니 말일세.”

협박처럼 들리기도 했다.

“근데… 자네는 궁금하지 않나? 장미기사단이 왜 그곳에 있었는지.”

과연 이놈은 어디까지 알고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말의 진의를 알 수 없기에 설득이 목적인지 협박이 목적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아니, 어쩌면…….

‘이놈도 내가 어디까지 아는지 몰라서 떠보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그런 생각에 최대한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던 차.

스킬이 해제되며 주변에 일상적인 소음이 다시금 귓가에 잡힌다.

또한, 그와 동시에.

“자네는 여타 바바리안들과 달리 똑똑하지 않은가. 분명 언젠가 그 답을 알아낼 것일세.”

부단장이 모두에게 들리도록 내게 말한다.

“그러니 오늘은 보내 주겠네.”

그제야 나는 이놈이 내게 대화를 신청한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놈은 나를 설득하고자 했다.

그것도 아주 강압적인 방법으로.

“이대로 지나가게. 우리는 자네들을 막을 생각이 없으니.”

이놈은 내가 여태까지 만나 본 적들과는 전혀 다른 타입의 인물이었다.

‘하, 아까 그냥 보자마자 닥돌할 걸.’

우물에 독이 풀렸다.

***

이후 부단장이 뭐라 지시까지 내리자, 모세의 기적처럼 성벽까지 이어진 길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랐는지.

“아, 이래도 불안하다면 아예 멀리 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주겠네.”

아예 사라져 주겠다는 제안까지 해온다.

처음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침착하게 정리를 해보니 알 수 있었다.

“남작과 무슨 대화를 나눈 거지……?”

“갑자기 몇 마디 나누더니 길을 열어 주다니.”

“……속이고 뒤에서 기습하려는 건 아니겠소?”

“하지만, 아예 사라져 주겠다고도 하지 않습니까?”

제대로 망했다.

고려의 어느 외교관이 말 몇 마디로 군대를 막아 낸 것처럼.

이놈 역시 말 몇 마디로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자네는 여타 바바리안들과 달리 똑똑하지 않은가. 분명 언젠가 그 답을 알아낼 것일세.]

마지막에 이딴 의미심장한 대사를 남들에게 다 들리도록 한 것만 봐도 그렇다.

만약 이 상태로 누구도 피를 보지 않고 성벽을 넘어가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나다.

왕가는 나를 의심할 것이고.

사람들 역시 나를 의심할 것이다.

노아르크 세력이 우리를 그냥 보내 준 건 분명 뭔가 거래가 있었을 것이라고.

그동안은 나도 귀족인 만큼 명분 없이는 함부로 조사할 수 없었지만, 이번엔 필시 높은 수준의 조사가 들어올 것이다.

나를 포함해 내 동료들에게까지도.

그리고 그렇게 되면?

‘끝이지.’

눈에 선한 결말에 심장이 꽉 조여온다.

두근-!

아마 부단장은 내가 장미기사단의 존재를 알고 있는지, 아닌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확인해 보려 한 거겠지.

조사 중에 내가 알고 있던 게 밝혀지면 왕가에서 나를 대신 처리해 줄 것이고.

내가 몰랐다고 한다면, 내가 왕가에 적대감을 갖게 될 테니까.

어느 쪽이든 나쁠 게 없었으리라.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이라도 무지성 돌진 명령을 내려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던 때, 놈이 씨익 웃으며 내게 말했다.

“사람 눈이 많아 결정이 어려운가 보군. 그럼 우리는 이만 가보겠네.”

거, 끝까지 저러네.

“잠깐.”

나는 일단 녀석을 불러세우며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이놈의 계략엔 한 가지 모순이 있었다.

성벽을 그냥 터주는 것만으로 자기들이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건 충분히 알겠는데…….

‘고작 그것 때문에 이렇게까지 한다고……?’

솔직히 아직도 이해가 잘 안 된다.

왜 이렇게까지 7구역을 쉽게 포기하는 걸까.

정말 얘들 입장에서 나 하나에 그 정도 가치가 있어서?

대체 나한테 어떤 기대를 했기에?

그런 생각을 하던 어느 순간이었다.

“아.”

머리에 번개가 치듯 한 가지 가능성이 스친다.

만약에.

내게 엄청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반대라면 어떨까.

예를 들어, 내 가치가 높은 게 아니라 단지 여기 이 7구역의 가치가 낮은 거라면…….

그래, 그러니까…….

‘이 새끼들은 처음부터 7구역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 전제를 깔고 나면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

하면 이놈들 진짜 목적은 13구역이었던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직감에 의하면 거기라고 해서 7구역과 사정이 다르진 않을 듯하다.

따라서 남은 후보군은 단 하나.

“언제까지 고민을 할 생각—”

“비프론.”

“……!”

그래, 정답인 거구나.

씨익.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이제 알겠다.

26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28화 26

628화 버려진 도시 (1)

전에 동료들과 토론을 할 때 나온 얘기가 있다.

[두 구역을 동시에 노린 것도 좀 수상합니다. 하나만 노려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간당간당한 판에…….]

[심지어 7구역과 13구역 사이에는 비프론도 있어서 수성도 훨씬 힘들지.]

[……그러게요. 정말 왜 그랬을까요? 비프론에 뭔가 목적이라도 있나?]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당시 우리는 그 움직임에 뭔가 숨은 의미가 있으리라 추측했다.

그리고 그 추측은 들어맞았다.

바로 이렇게.

“……!”

비프론이 언급된 순간 감추지 못하고 드러난 당황해하는 표정.

“…이거야 원, 갑자기 무슨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

저런 식으로 뒤늦게 수습을 해봤자 늦었다.

이미 내 심증은 확신으로 바뀐 상태니까.

“역시 길은 비켜 주지 않아도 괜찮을 거 같다.”

나는 녀석의 말을 끊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게, 이미 정답이 나왔잖아?

도대체 이놈들이 비프론에 무얼 숨기고 있는진 알 수 없지만.

“우리는 비프론으로 갈 거니까.”

자고로, 적이 바라는 것에 반대로만 해주면 일단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법.

“…….”

내 발언에 갑자기 생각이 많아진 듯한 녀석을 보니, 역시 대화를 하는 거나 맞짱을 뜨는 거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전만 봐도 그렇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기습적으로 빈틈을 노린 게 아니었다면, 이 정도의 반응은 얻어내지 못했을 터.

“…….”

침묵의 시간이 길어진다.

갑자기 왜 비프론으로 가겠다는 거냐든가.

나보고 뭔가 이상한 오해를 한 거 같다든가.

그런 식의 변명은 일절 없었다.

녀석은 멀리서 가만히 나를 바라볼 뿐,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고 머릿속에서 고르고 또 고르는 듯했다.

거, 그래 봐야 이미 늦었구만.

“그럼 이제부터 돌아서 가려는데, 그래도 안 잡을 거냐?”

씨익 웃으며 말하자 부단장이 조용히 읊조린다.

“영리하다고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예상치 못했네만.”

뭐, 그렇게 따지면 나도 그렇다.

오르큘리스의 이인자라고만 했지. 이런 느낌의 지략가 포지션이란 얘기는 한 번도 듣지 못했거든.

“그래서 대답은?”

기세등등하게 묻자, 부단장이 코웃음을 치듯 즉답했다.

“자네 마음대로 하게. 비프론으로 가겠다고? 그럼 그리로 향하게. 우리는 막지 않을 걸세.”

…블러핑이겠지?

그런 의심이 가장 먼저 들지만 확신까지 이르진 못한다.

늘 모든 경우의 수를 열어놔야 하니까.

사실 아까도 비프론이란 단어에 당황했을 뿐, 우리가 그리로 향해도 얘네 입장에서는 곤란할 게 없을 수도 있다.

‘하… 여기서 또 심리전을 거네.’

머리가 아파온다.

아직 물리적인 다툼은 한 차례도 없었으나, 대화를 하는 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저놈이 호락호락한 적이 아니라는 걸.

“지금부터는 자네의 선택일세.”

“…….”

“자, 어쩔 텐가?”

어느샌가 다시금 평온한 말투로 돌아온 부단장.

뭐, 빼앗겼던 주도권을 되찾았다고 생각한 건가?

실제로도 선택지가 전부 열려 버리자 오히려 헷갈리기 시작하며 딱 하나를 택하기가 어렵긴 했다.

하지만…….

“부디 올바른 선택을 하게. 자네의 선택엔 많은 이들의 운명이 달려 있지 않은가.”

바바리안들에겐 선택 장애가 없다.

아무리 힘들고 위험해 보여도, 해야 하는 일이란 생각이 들면 망설임 없이 해내는 족속들이거든.

아, 물론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도 익숙하다.

“자꾸 뭐라는 거냐? 쫑알쫑알 시끄럽게.”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눈쌀을 좁히는 부단장을 보며 똑똑히 말한다.

“선택은 무슨? 아까 말했지 않냐? 우리는 비프론으로 갈 거라고.”

아마 저놈은 몰랐을 거다.

사람들 앞에서 날 이간질을 하려 들었을 때부터 성벽을 넘는다는 선택지는 내게서 사라졌다는 걸.

‘암, 이 상태로 어떻게 그냥 나가?’

기본 베이스는 악령.

아이스록 원정 당시엔 장미 기사단을 죽인 뒤 없던 일로 만들었으며, 가장 최근에는 왕가의 재산을 슈킹하기까지 시도한 정황까지 있다.

이 상태로 왕가에게 우리를 조사할 명분을 주면 나는 비프론으로 가는 것보다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한다.

따라서…….

“아무튼, 막지 않는다니 잘 됐군. 잘 있어라. 우린 이만 가볼 테니.”

“…….”

“설마 이제 와서 말을 바꾸려는 건 아니겠지?”

어깨를 으쓱하며 묻자, 부단장이 아무렇지 않다는 목소리로 화답했다.

“그럴 리가 있나.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네.”

“오, 보기보다 남자다운 성격이었군?”

“보기보다……?”

“하하! 그런 사소한 걸 신경 쓰는 건 남자답지 못하다!”

“…….”

“그럼 이제 눈앞에서 사라져주겠나? 뒤돌아서 비프론으로 가려는데 너희가 그러고 있으면 괜히 찝찝할 거 같아서.”

목소리를 깔며 말하자 부단장은 생각을 정리할 게 있는 듯 잠시간의 텀을 두고서 소리쳤다.

“전군! 성벽으로 다시 이동하라!”

우리와 대치 중이던 노아르크 세력들은 부단장의 지시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웅성거리기는 했지만, 부단장의 명령을 어기지는 않았다.

“진짜 가는군…….”

그들이 자리를 떠나 성벽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부단장의 마지막 표정을 떠올렸다.

등을 돌리기 전에 나를 바라보던 녀석의 얼굴은 날 비웃는 듯하기도 했고, 기뻐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걸 같이 보았기 때문일까?

“…정말 비프론으로 가려는 거냐?”

아멜리아가 걱정스럽다는 듯 내게 묻는다.

“…이게 잘하는 선택일까요? 오히려 우리를 그쪽으로 유인하는 거 같기도 하던데…….”

베르실도 조심스럽게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유인하기는 무슨.’

마지막에 표정을 보니 알겠구만.

나는 조금 남아 있던 망설임마저 털어내며 성벽 반대 방향으로 등을 돌렸다.

“뭣들 하나! 얼른 따라와라! 우리는 지금부터 비프론으로 향한다!”

뭔진 몰라도 가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대체 뭘 숨겨놨기에 우리가 간다는 말에 그토록 질색을 하는지.

***

오르큘리스의 부단장, 롤런드 바노잔트.

그는 어느새 텅텅 비어버린 성벽 아래를 보고서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로 갔군.”

그리 중얼거리던 그의 곁으로 고혹적인 옷차림의 여성이 다가왔다.

“부단장 오빠, 괜찮아요? 쟤네들 정말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보내버려도.”

리란느 비비앙.

한때 촉망받는 마탑의 인재였으나, 금지된 마법 연구와 실험을 거듭하며 흑마법사가 된 여인.

흑마법을 접하기 전부터 손속과 성정이 잔인해 말이 많았다고 하던데, 그가 보기에 그 성정은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줄어들진 않았다.

그 특유의 장난기 역시 말이다.

“그냥 가버려서 당황했죠?”

“…….”

“에이, 딱 당황한 표정인데 뭘. 맨날 머리 좋은 척은 다 하더니, 진짜 갈 줄은 몰랐나 봐요?”

바노잔트, 그는 이런 유형의 인간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혐오하는 축에 속했다.

하지만…….

‘아직 쓸모가 있으니까.’

그는 친절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여인을 바라보며 답했다.

“허허, 사람이 어찌 모든 걸 다 알 수 있겠나? 한데 그리 말하는 걸 보니 비비앙 양은 예상이라도 했던 모양이군?”

“아뇨? 그걸 어떻게 예상해요? 도시로 돌려보내 주겠다고까지 하는데 거기서 그런 결정을 내릴 줄.”

“…….”

“근데 지금이라도 따라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비프론에 갔다가 뭔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우리도 큰일이잖아요?”

바노잔트도 그 말에 씁쓸히 고개를 주억였다.

경박한 분위기를 풍기긴 하나 비비앙은 결코 멍청한 여자가 아니다.

그녀의 말대로 얀델 남작 같은 예측 불가의 인물이 비프론에 진입하는 것은 결코 긍정적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따라가는 건 오히려 더 위험하네. 성벽을 완전히 비워버리면 왕가에서도 눈치를 챌 테니까. 아직은 7구역을 내어줄 때가 아닐세.”

“그건 그런데,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보내주겠다 한 건 좀 아니지 않아요?”

비비앙이 비꼬며 말했지만. 바노잔트는 아무렇지 않게 웃을 뿐이었다.

“그러게 말일세. 나 역시 후회 중이네.”

“에이, 그러니까 제가 괴롭히는 거 같잖아요. 그냥 궁금할 뿐이라니까요? 똑똑한 우리 부단장 오빠가 대체 왜 그랬는지.”

어떻게든 대답을 듣겠다는 듯한 집요한 물음에 결국 그 역시 마지못해 답을 해주었다.

“비비앙 양, 보통 사람들은 그런 상태에서 그런 과감한 선택은 하지 못하네. 그처럼 잃을 게 많은 상황이라면 더욱더 그럴 테고.”

상황을 넘기려 대충 한 말이 아니다.

그는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봐왔고, 선택을 하는 과정도 수없이 많이 봐왔다.

아니, 정확히는 관찰했다.

‘마안’이란 이명이 생긴 것도 그래서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가 가진 이능 때문에 그런 이명이 붙은 줄 알지만…….

단지 어쩌다 보니 상황이 맞아들었을 뿐.

사실 처음 이명이 붙었을 땐 그런 이능이 없었다.

그는 그저 어렸을 때부터 타인의 생각을 읽는 데 능했다.

하지만…….

“우와, 우리 부단장 오빠도 이제 보니까 진짜 헛똑똑이였네요?”

그런 진지한 답변에도 비비앙은 조소를 내지을 뿐이었고, 이에 바노잔트도 불쾌한 티를 감추지 않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본인도 조금 선을 넘었다 싶었을까.

“그도 그럴 게, 보통 사람은 그런다면서요.”

“…….”

“근데 비요른 얀델이 보통 사람은 아니잖아요?”

빠르게 말을 이어붙인 비비앙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를 떠났고, 바노잔트는 조용히 헛웃음을 내지었다.

“보통 사람이 아니다라…….”

그가 ‘비요른 얀델’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그가 고블린 숲 전투에서 공을 세우며 준남작 작위를 얻었을 때였다.

그때는 그냥 특이한 놈이 나왔구나 하고 끝났다.

솔직히 말해, 당시에는 운 좋게 공을 세웠을 뿐 경계할 대상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결국 비요른 얀델은 왕국에 내로라하는 인물 중 하나로 성장했다.

또한…….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르겠군.’

어째선지 비요른 얀델은 자꾸만 부딪치게 된다.

용살자, 리갈 바고스 때도 그렇다.

녀석이 기억을 되찾은 뒤, 미로에서 만났던 게 그 비요른 얀델이었단 얘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던가.

심지어 그때는 명성을 얻으며 작위를 수여받기도 전이었다.

‘악연… 이라는 건가.’

미신을 믿는 편은 아니지만, 그는 직감했다.

앞으로도 비요른 얀델은 계속해서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우선 단장에게 보고를 해야겠군.”

이내 생각 정리를 끝낸 그는 연락 수단을 이용해 13구역에 있는 단장에게도 이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보고가 끝난 후에는 텅 빈 성벽을 보며 용살자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흐음, 비요른 얀델에 대해 말해달라고?]

급속도로 성장 중이던 탐험가였던 만큼, 그는 기억을 되찾은 용살자에게 이런저런 정보를 얻었다.

그중에서는 이런 얘기도 있었다.

[…아, 부단장.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당시에는 듣고서 별말을 다 한다 생각하며 듣고 넘어간 조언이었지만.

[되도록이면 놈과 대화 자체를 안 하는 게 좋다.]

이제는 조금 알 거 같기도 했다.

[대화를 시작하는 순간 모든 게 그놈 뜻대로 될 거다. 너도 모르는 사이에.]

그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28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29화 28

629화 버려진 도시 (2)

14구역, 수용소 비프론.

원래는 ‘라비기온’의 도시 구역으로 분류됐으나, 지금은 통행 금지 구역으로 지정되며 이제는 아예 차원 광장마저도 사라진 구역.

사실 이곳도 탈출 루트 후보 중 하나였다.

일단 비프론으로 넘어간 다음에, 비프론에서 4구역으로 넘어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니까.

“하지만 비프론엔 수호마법진이 작동 중이라 일반적인 방법으로 성벽을 넘는 게 불가능해요.”

“그 문제는 괜찮다. 하수도에 있는 비밀 통로를 이용하면 수호마법진이 있어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

“그런 게 있다고요……?”

“그래. 예전에 20일 동안 유배된 적이 있는데, 그때 우연히 알게 됐다.”

참고로 당시 통로에 대해 알려 준 게 바로 아멜리아였다.

“아! 그때! 기억난당! 엄청 걱정했었는데…….”

아무튼, 비프론까지 가는 방법이 있음에도 이 루트는 최종 채택되지 않았다.

그야 하수도에도 병력들이 바글바글했거든.

때문에 성벽을 노리는 게 차라리 낫겠다고 판단했다.

애초에 하수도를 뚫을 거면 비프론을 경유할 필요없이 그냥 도시로 향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무엇보다 비프론 자체에 문제가 있기도 했고.

“비, 비프론 말입니까?”

“……거기를 가는 건 너무 찝찝한데.”

“우리는 지금 해독약도 없지 않습니까!”

일단 탈출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병력들이 필요한데, 대부분의 탐험가들은 비프론 자체를 엄청나게 껄끄러워했다.

하긴, 나라도 방사능 지역에 방호복도 없이 들어가야 한다고 하면 저럴 거 같긴 하지만.

‘……여기서 사실 마녀의 독 같은 건 없다고 할 수도 없고.’

성벽 바깥이 멀쩡하단 걸 아는 나지만, 귀족이 된 자로서 이들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다.

그런 소문이 도는 거랑, 귀족이 공식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 확연한 차이가 있다.

‘…뭐, 생각해 보면 아예 없는 것도 아닐 테니까.’

바깥은 멀쩡하다.

한데 비프론에서는 매일 마녀의 독 때문에 병을 앓고 죽어가는 이들이 나온다.

하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왕가에서 독을 먹이든 뿌리든 한 거겠지.’

여하튼, 그러한 이유들 때문에 비프론으로 간단 계획은 철회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때와 상황이 달라졌기에.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

전투 함성을 내지르며 하수도를 내달린다.

천장이 낮아 [거대화]도 쓰지 못하는 탓에 모든 전력을 쏟아부을 수는 없으나, 크게 거슬리지는 않다.

지형의 영향을 받는 건 적들도 매한가지니까.

콰아아아앙-!

저쪽도 무너질 걸 우려해 파괴적인 마법이나 이능은 쓸 수 없다.

또한, 뻥 뚫린 지형이 아니라 수십 명의 공격을 한 번에 받아내지 않아도 된다.

어느 정도 스펙을 완성시킨 방패바바 입장에선 충분히 버틸 만한 것인데…….

그래도 조금 야속하긴 하다.

‘거, 비프론으로 가도 안 막는다더니.’

그 약속은 성벽에 주둔 중인 병력에 한해서였던 걸까. 아니면 서로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원할하게 돌아가지 않아 말이 전달이 되지 않은 걸까.

알 수 없지만, 하수도에 배치된 병력들은 우리가 아래로 내려가자마자 집요하게 우리를 공격했다.

“마, 막지 말고 물러서라! 거리를 유지해!”

“으아아악!”

비밀 통로까지 향하는 길은 나 혼자 도맡아서 뚫었으나 그럼에도 피해는 속출했다.

1층 수정 동굴 때와 비슷한 구도였다.

하수도는 개미굴처럼 얽히고 얽힌 지형이었고, 측면과 후면에서도 공격이 이어지다보니 뒤따르는 이들에게서 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멤버들은 아이스록 때처럼 한 명 한 명이 정예인 것도 아니니까.

3층 이하에서 활동하던 하위 탐험가들이 이런 대규모 전투에서 자력으로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두근-

생전 피워본 적도 없는 담배가 피고 싶어진다.

‘……몇이나 죽었을까.’

희생이 없을 수는 없다.

이 야만적인 세상이 그렇다.

하나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이런 결정을 내릴 땐 언제나 마음이 무겁다.

나쁜 건 전부 노아르크 새끼들이라고.

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그리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냥 길을 열어줬을 때 성벽을 타고 갔다면, 안 죽어도 될 사람들이었겠지.’

물론 내 결정 자체는 후회하지 않는다.

단지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싶을 뿐이다.

내가 조금 더 큰 사람이었다면, 그 무엇 하나 포기하지 않아도 됐을 테니까.

그래, 그러니까…….

꽈악-

방패를 어깨로 밀며 나아간다.

여태 수많은 고난을 겪으며 몇 번이나 반복한 일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조금 감회가 남달랐다.

쉬워도 너무 쉽다고 해야 하나?

“…이 무슨!”

“뒤로! 뒤로 가……!!”

아이기스의 장벽이 있는 이상, 일자형 통로에서 날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가드가 성공하는 순간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는 바바리안이 무식하게 돌진하는데 어떻게 막을 것인가.

“얀델! 멈춰라!”

이내 한참을 내달리던 나는 아멜리아의 외침을 듣고서야 질주를 끝냈다.

“도착했다.”

정신 없이 뚫느라 다 온 줄도 몰랐네.

***

비프론으로 이어진 비밀 통로 입구에 도착한 뒤로는 한결 쉬웠다. 통로엔 대기 중인 병력도 없었고, 추격은 아예 포기했는지 뒤따라오는 놈들도 없었다.

덕분에 속도를 낮추고 한결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는데…….

“현재까지 피해는?”

전반적인 인원 관리를 도맡던 베르실에게서 피해 보고를 들었다.

물론 베르실조차 피해를 정확한 숫자로 알고 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7등급 이하 탐험가들의 피해가 가장 컸어요. 비교적 안전한 곳에 배치한다고 했는데…….”

“그렇군.”

“그래도 얀델 씨가 길을 열은 덕분에 이 정도 피해로 그칠 수 있었어요.”

추산된 숫자만으로도 씁쓸한 감정이 올라온다.

이젠 무뎌질 법도 한데.

갱년기라도 온 것인지, 나는 점점 더 그 숫자들이 단순한 숫자로만 보이지 않는다.

“…얀델, 무슨 생각 중이지?”

“아무것도.”

“…….”

아무튼, 이후 비밀 통로를 타고 한참 동안 이동하고 있자니 비프론의 하수도 구역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리고…….

“얀델, 사람이다.”

해당 하수도 구역에 도착하자마자 낯선 인물들과 조우할 수 있었다.

다행히 노아르크의 병력은 아니고…….

“보, 보스?”

놀랍게도 내가 아는 인물들이었다.

“보스라니……? 너 설마?”

이내 당장 손을 뻗어 머리채를 쥐어뜯자, 가발이 벗겨지며 익숙한 해파리컷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이름이…….

“…징징이?”

“……예, 예! 접니다! 징카사르 펠쟈인! 보스의 충실한 오른팔!”

오른팔이나, 본명은 잘 모르겠고.

몇 년 전에 비프론에서 머무를 때 내 수발을 들던 그 녀석이 맞았다.

하지만 반가운 건 반가운 거고.

“그래서 너는 여기서 혼자 뭘 하던 거냐?”

“그…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비프론을 탈출할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하긴, 얘는 내 덕분에 비밀 통로 존재를 알고 있었으니까.

언제든 올 수 있으니 똑바로 살라는 뜻으로 존재를 알려준 건데, 막상 일이 바빠서 한 번도 오지 못했다.

아무튼, 일이 이렇게 되자 그게 떠올라서 혼자 막 찾고 있던 모양인데…….

“부하들은 다 버리고 혼자서만?”

한심하다는 듯 눈살을 좁히자 징징이가 손사레를 치며 항변했다.

“아니, 아니 그럴 리가요! 저도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음, 그런가?

확실히 예전보다 머리가 더 빠지긴 했는데…….

“애초에 저 혼자 살아서 뭐 하겠습니까? 이제 살 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통로만 찾으면 밖으로 나가 소식을 확인해볼 생각이었습니다!”

“아, 그런 식으로 달라졌다고…….”

“…예? 그럼 뭐가 달라진 줄…….”

“됐고, 몇 가지 물을 테니 답이나 해라.”

하수도에서 현지인을 만난 김에 재빨리 도시 사정부터 체크했다.

혹여 노아르크 놈들이 이쪽도 이미 침공했을 수도 있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노아르크… 말씀입니까? 아, 설마 이 소란이 다 그놈들 짓입니까?

징징이는 이번 사태가 노아르크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왕가 측에서 어떠한 말도 안 해줬다던가?

“그… 갑자기 소란이 일며 병사들이 검문소 문을 걸어잠그더니, 이후 대기하란 말을 끝으로 어떤 연락도 없었습니다. 한데 성벽 쪽에서는 막 싸우는 소리만 들리고……. 그래서 주민들이 엄청나게 불안해했습니다.”

아무리 비프론이라 해도 좀 너무한 처사였다.

전쟁이 났는데, 전쟁이 났다고는 말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래서군. 탈출이 아니라 소식을 들으려 바깥에 나간다고 했던 게.”

“예……. 저는 밖이 그런 상태인 줄도 몰랐습니다. 노, 노아르크가 침공을 했다니……. 어, 얼마나 심각한 상황입니까?”

“7구역과 13구역이 놈들에게 점거당했다. 우린 지금 그런 7구역에서 겨우 빠져나온 상태고.”

“그, 그런……!”

도시 구역 두 개가 함락됐다는 말에 징징이의 입이 떡 벌어졌지만, 놀라고 있는 걸 기다려 줄 시간은 없었다.

“일단 따라와라. 얘기는 가면서 하지.”

이후 나는 이동하며 징징이에게 정보를 들었다.

최근 나타난 수상한 놈은 없었는지부터 시작해 내가 떠난 이후 도시가 어떻게 바뀌었는지까지.

“비프론 말입니까……? 아! 일단 보스의 당부대로 배급소로 들어오는 물품은 모두 공평하게 나눠 갖고 있습니다. 어른이나 아이든 전혀 다를 게 없이요.”

“잘했군.”

“또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배급소에서 물건이 남으면 다들 한 마음 한 뜻으로 경비에게 부탁해 물품을 책으로 바꾸기도 하고…….”

“책으로 바꾼다고?”

“예……. 책이 아니더라도 각자 재주가 있으면 아끼지 않고 아이들에게 알려줍니다.”

“어째서?”

“…적어도 아이들은 도시에 들어가 살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야 뭐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그 말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징징이를 보았다.

“…이름이 뭐지?”

“지, 징카사르 펠쟈인입니다마는?”

“징카사르 펠쟈인. 너도 많이 변했군.”

징징이는 처음으로 이름을 불러준 것에 잠시 움찔하다 자조 섞인 미소를 내지었다.

“몇 년이나 지났지 않습니까…….”

“그랬지.”

“예……. 보스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얼마 전에 남작님이 되셨다고……. 아, 여기! 여기로 가면 바로 광장입니다!”

이후 현지인이 알고 있던 지름길을 통해 지상으로 빠져나오자, 익숙하면서도 뭔가 낯선 비프론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곳도 많이 변했군.”

훨씬 더 깔끔해졌다 해야 하나?

폐쇄된 여기 이 차원 광장만 해도 예전에 왔을 때는 정비도 제대로 안 돼서 폐허에 가까웠는데.

“다들 열심히 노력해 준 덕분이지요…….”

징징이는 그리 말했지만, 제일 열심히 한 게 이 녀석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펠쟈인 님!”

“와! 펠쟈인 아저씨다!”

“아저씨!! …어?”

광장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이 징징이를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를 해온다.

뭐, 그것도 뒤에 서있는 나, 그리고 7구역에서 온 수백 명의 탐험가들을 확인하기 전까지였—.

“무서워 하지 마라! 여기 이분이 바로 얀델의 아들 비요른, 바로 그 거인 남작님이시니까!”

응?

“와아아아, 정말요?”

“거인 남작이다! 거인 남작!!”

“와아아아아!”

어째선지 내 이름을 듣자마자 아이들이 더욱더 흥분하며 달려든다.

사실 낯선 상황은 아니었다.

도시의 어린 아이들은 ‘큰 것’과 ‘탐험가’를 전부 좋아하니까. 유명세를 얻은 뒤엔 도시 어디를 가든 이런 시선이 뒤따랐다.

하지만…….

“거인 남작님! 감사해요!”

이런 말을 들은 적은 처음인 거 같다.

“감사……?”

내 중얼거림을 들은 징징이가 머쓱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이들에게 보스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도시를 구한 영웅이라고…….”

“쓸데없는 짓을 했군.”

“아이들에겐 희망이 필요하니까요. 게다가 틀린 말도 아니지 않습니까?”

“……?”

“비프론이 이렇게 변한 건 보스 덕분이니까요.”

“……크흠.”

얘는 변했다더니 무슨 아부만 엄청 늘었네.

예전에는 이런 쪽으로는 영 별로였는데.

“전군 정지!”

일단 목적지에 도착도 했겠다, 나는 재정비부터 시작했다.

부상자들은 광장에 뉘여 신관들에게 치료를 받도록 했고, 여력이 있는 이들에게는 주변 조사를 부탁했다.

그리고…….

“펠쟈인, 너는 날 따라와라.”

나는 징징이만을 데리고서 4구역 검문소로 향했다.

점거당한 13구역과 7구역이 아닌 만큼, 여기를 통해 도시와 접촉이 가능할 수도 있단 판단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없군.”

이게 어찌된 일일까.

앞에서 소리를 내지르고 벽을 쾅쾅 두드려도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는다.

비프론 현지인인 줄 알고 무시하는가 싶어서 내 이름과 신분을 밝혀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이쪽 검문소는 폐쇄된 지 오래라…….”

“폐쇄된 검문소인 거야 나도 안다.”

“그런데 여긴 왜…….”

그야 상황이 상황이니까.

4구역 검문소가 평상시에는 폐쇄된 상태라 해도, 이런 상태에서는 사람을 두지 않았을까 싶었다.

“후우…….”

꽤 골치가 아파졌다.

비프론에 오면서 이 검문소를 타고 안전한 도시 구역으로 나가거나, 연락을 취하는 등의 상황을 기대하고 있었건만.

그런 쪽의 기대가 전부 빗나간 것이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단 말이지.’

애초에 왕가에서는 왜 이쪽은 그냥 방치만 하고 있는 걸까?

내가 지휘관이라면 4구역 검문소를 활성화한 뒤, 바로 비프론에 병력을 투입해 우회해서 7구역과 13구역의 전선을 최대한 늘렸을 텐데.

‘…게다가 노아르크 놈들은 또 어떻고?’

이해가 안 되는 건 이놈들도 마찬가지다.

이놈들은 7구역을 점거해 놓고서 비프론 쪽엔 병력을 전혀 배치하지 않았다.

마치 왕가에서 그쪽으로는 쳐들어올 일은 없다고 확신이라도 하는 것처럼.

“…….”

다만 의문이 커질수록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여기 이 비프론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떠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그래, 그러니까…….

툭, 툭.

지금부터 그걸 알아내야 한다.

24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30화 24

630화 버려진 도시 (3)

비프론은 버려진 도시다.

원래는 라비기온의 14구역으로 차원 광장도 있는 주거 구역이었으나, 오래 전 마녀의 독을 막는 수호 마법진이 고장나며 구역 전체가 폐쇄됐다.

그리고…….

‘수용소가 됐지.’

왕가는 도시 구역 하나를 버리는 게 아깝다 생각했는지, 14구역을 따로 떼어내어 ‘비프론’이란 이름을 새로 붙이며 다른 용도의 도시로 만들었다.

혁명을 꿈꾸는 몽상가.

진취적인 사고 방식을 지닌 사상가.

혹은 도시의 시스템 자체에 불만을 품은 자 등등.

왕가는 그런 ‘반동분자’들을 전부 비프론에 가둬 버렸고, 결과적으로 단순히 목을 매달아 버리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왕가 입장에서 불안불안한 상태겠지.’

노아르크 놈들이 성벽 밖으로 나가며 증명됐다.

나가는 순간 몸을 녹아내리게 하는 마녀의 독 따위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걸.

뭐, 일반 시민들이야 정보를 접하기 어려운 탓에 이를 괴담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지만.

아무튼.

“후…….”

당장 비프론에 대해서 아는 것은 이 정도다.

하면 무엇 때문에 비프론이 이렇게까지 중요해진 걸까.

왕가 입장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라서?

그래서 노아르크에서도 그걸 이용하려는 건가?

처음엔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지만, 고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건 또 아닌 것 같다.

그야 설명이 안 되거든.

그랬다면 왕가에서도 비프론에 병력을 보내든가 하며 어떻게든 지키려 들었을 테니까.

왕가에 멍청이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생각한 걸 걔네가 못 했을 리 없지 않은가.

‘……조사하다보면 뭔가 나오겠지.’

그런 의미에서 검문소를 떠난 후에도 비프론에 대한 조사를 이어나갔다.

수색대를 구성해 도시 곳곳을 살펴보도록 하고, 주민들에게는 구전 되어온 전설이나 그런 게 있는지를 확인했다.

또한…….

솨아아아아아아-!

이전에는 기사들 때문에 확인해보지 못한 성벽 위도 올라가봤다.

어쩌다 보니 동료들과 함께.

“와…….”

“어렸을 때부터 상상해 온 바깥이랑은 다르네요. 어둠만 가득하고 그런 땅일 줄 알았는데…….”

“으응. 뭔가… 되게 평화로워 보이네…….”

높디높은 성벽 위에서 내려다본 바깥 세상은 장관이라는 말로도 모자랐다.

무성한 수풀과 산, 계곡들은 보이지 않는 저 지평선 너머도 생명력 넘치는 자연이 펼쳐져 있을 것을 암시했다.

“아저씨, 그냥 우리 여기서 뛰어내려버릴까요?”

“뭐……?”

“그냥요. 저 바깥으로 나가면 뭐가 상관이 있겠냐 싶어서요. 노아르크든 왕가든…….”

실없는 소리… 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실 나도 저 성벽 아래를 보자마자 비슷한 충동이 들었거든.

정말로 그냥 저 바깥으로 나가면 어떻게 될까.

어차피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게 아니라면.

정말로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그럼 심연의 문까지 가겠다고 아둥바둥할 이유도, 눈을 세모나게 뜨고 날 주시하는 왕가가 무서워 악착같이 강해질 필요도.

나아가기 위해 무언가를 잃을 일도.

전부 없어질 텐데.

그런 마음이 피어남과 동시에 나는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아마 안 될 거다.”

“네?”

“수호 마법진이 작동 중일 테니까.”

“네? 하지만 비프론은 분명 마법진이 망가졌다고…….”

“왕가가 한 말을 어떻게 믿나?”

이내 바깥을 향해 화살을 쏴보라 말하자, 에르웬이 긴장한 표정으로 시위를 당겼다.

그리고…….

칵-!

이윽고 날아간 화살이 뭉특한 소리를 내며 허공에 부딪치고서 떨어진다.

“역시 멀쩡했군.”

“…그러게요.”

에르웬은 그 사실에 실망하면서도 천연덕스럽게 내게 물었다.

“근데 더 세게 쏘면 빈틈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해봐도 상관은 없는데 아마 안 될 거다. 수호 마법진은 최후의 대현자 가브릴리우스의 유산이니까.”

게다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애초에 나간다고 내가 원하는 삶이 펼쳐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도 그렇지 않은가.

성벽 밖으로 나갔던 노아르크 놈들이 왜 다시 이 도시로 돌아왔는데?

분명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다.

그리고 그것뿐만 아니라…….

‘도피하는 건 나랑 안 맞는단 말이지.’

바바리안의 삶을 살아가다 보니 이제 몸도 마음도 전부 다 물들어 버렸다.

중세 화전민들처럼 도망쳐 숨고 싶지 않다.

아니, 정확히는 그럴 바에는…….

‘다 뒤집어 엎는 게 낫지.’

도망칠 이유가 없어지는 쪽이 훨씬 낫다.

막말로 내가 다 때려 부수고 왕이 되면 굳이 허허벌판에 집을 짓고 살 이유가 없잖아?

뭐,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냐 싶긴 하지만…….

‘음…… 아예 못할 건 없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진짜 바바리안이 다 된 거 같다.

***

무작정 다방면으로 ‘비프론’이라는 도시에 대해 조사를 시작하고서 2일 차.

우연찮게 옛 인연과 조우하는 일이 있었다.

“많이 컸군.”

“안녕하세요. 남작님.”

내가 비프론에 유배됐던 날, 당돌하게 다가와 가이드 역할을 해준다며 100스톤만 달라고 했던 열 살배기 꼬마.

그 꼬마는 어느새 풋풋한 소년이 되어 있었다.

먼저 와서 인사를 걸기 전까지는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그때 네가 열한 살이었지?”

“그걸 기억하시네요…….”

“자격 증명이 가능한 건 열네살이라고도 했고.”

“네. 맞습니다.”

“근데 왜 아직 여기 있는 거냐?”

내 질문에 녀석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실패했거든요. 제 가치를 증명하는데.”

“…그랬군.”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했던 거 같아요. 노력이 부족했을 리는 없으니.”

“그래서 재도전을 노리는 거냐?”

“남작님은 정말 모르시네요. 자격 증명이 가능한 건, 딱 열네 살 때 한 번뿐이에요. 그때 나가지 못하면 평생 기회가 박탈되죠.”

오히려 무덤덤하게 말하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뭐라 할 말을 찾기 어려웠다.

조금 안타깝다고 해야 하나?

아, 그냥 이 심정을 솔직히 말하면 되겠구나.

“그렇다니 안타깝게 됐군.”

“아뇨. 지금은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해요.”

“……?”

“요즘엔 다른 동생들이 자격 증명에 통과할 수 있도록 돕고 있거든요. 걔네들이라도 나갈 수 있도록.”

“억울하진 않나?”

내 물음에 녀석은 그냥 싱긋 웃을 뿐이었고, 정말 인사만 하러 왔다고 기억해 줘서 고맙다고 말한 뒤 떠났다.

동생들을 교육하러 갈 시간이라던가?

혹시 몰라 붙잡아 비프론 내에도는 괴담이나, 미스터리한 장소가 있냐 물었지만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진짜 뭐 아무것도 없단 말이지…….’

조사가 이어질수록 조금은 조급해진다.

솔직히 말해, 작정하고 도시를 뒤지면 뭔가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베르실, 외부와의 연락은? 아직도 어렵나?”

“네. 쉽지 않네요. 수호 마법진 자체가 결과값만 봤을 땐 차원 단절 현상에 가깝다 보니…….”

“그렇군.”

“유일한 방법이 물리적인 수단을 통해 소통하는 건데, 성벽 위에서 아무리 깃발을 흔들고 해도 봐주지를 않아요. 어찌 된 영문인지 성벽 근처의 민가들도 싹 비워져서 거리에 사람도 보이지 않고요. 마치 전부 다 피난이라도 간 것처럼요.”

“피난이라…….”

시간이 지날수록 안쪽 상황보다 바깥쪽 상황이 더욱 궁금해진다.

후, 어떻게 소식을 얻을 방법이 없으려나.

커뮤니티 폐쇄만 안 됐어도 그때를 기다리며 이것저것 준비해 뒀을 텐데.

하루, 이틀, 사흘…….

그렇게 별다른 소득 없이 시간이 흘렀고, 나를 따라 비프론에 따라 들어온 탐험가들도 이곳에 익숙해졌다.

광장에서 잘 수 없어 주민들 집에서 자고 하다 보니 보답으로 허름한 집을 고쳐주기도 하고, 바깥의 물건들을 주고, 신관들은 병든 이들을 치료해주는 등.

그런 교류가 지속되다 보니 처음엔 이곳 주민들을 역병 환자처럼 꺼려했던 이들도 점점 그런 기색이 사라지고 있다.

한때 비프론을 지배했던 나로서는 굉장히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근-

그런 평화로운 시간이 이어질수록 어딘가 불안한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조사에는 진전이 없고.

그런 상황에서 왕가도 노아르크도 별다른 액션을 취하고 있지 않으니 이상한 생각만 많아진다고 해야 하나?

스으윽.

이내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외투를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몸도 뻐근하고, 눈을 감아봤자 잠도 오지 않으니 산책이나 좀 다녀올 생각이었다.

터벅, 터벅.

나름 깨끗해진 비프론이지만, 밤에 보는 거리의 모습은 여타 구역과는 달랐다.

일단 어두워도 너무 어둡달까.

자원이 압도적으로 부족한 비프론인 만큼 어쩔 수 없는 밤거리의 특징 중 하나였다.

‘뭐, 그래도 운치 있고 조용해서 좋긴 하지만.’

그렇게 밤거리를 쭉 걷고 있자니 어느덧 외성벽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딱히 여기에 오려고 했던 건 아닌데.

이쯤에서 다시 돌아갈까도 싶었지만, 왠지 밤에 내려다보는 성벽 바깥의 모습이 궁금해진 나는 아예 성벽 위까지 올라갔다.

솨아아아아아아아-!

청량하게 불어오는 밤공기.

다만 성벽에서 내려다 본 야경은 내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아무것도 안 보이네.”

그저 컴컴한 어둠만이 그 아래로 펼쳐져 있다.

내려다보고 있으면 무언가가 그 안에서 튀어나와 나를 끌어당길 것만 같은 기분이 들 정도.

‘…하늘도 그냥 까맣네.’

날을 잘못 골랐는지 별도 얼마 안 떠있다.

그래서 그냥 대충 바람이나 쐬다가 슬슬 집에 가려 발길을 돌리려던 차였다.

툭.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둔한 바바리안의 신경으로도 헷갈리지 않을 만큼 확실하게.

휙.

등을 돌리자 후드로 몸을 가린 정체불명의 인물이 유령처럼 성벽 위에 서 있었다.

“얀델 남작은 들으시오.”

상대가 누구인지 물을 필요는 없었다.

때마침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으니까.

솨아아아아아-!

벌어진 후드의 틈으로 경량 갑옷.

벨트에 채워진 단검.

그리고 여자라는 것까지.

“장미 기사단이 여긴 무슨 일이지?”

툭하고 떠보듯이 묻자 여인이 품 속에서 돌돌 말린 두루마리를 꺼내서 펼쳤다.

“왕명이오.”

허, 이게 야밤에 무슨 일이야?

***

달도 제대로 뜨지 않은 야밤에 돌연 찾아온 장미 기사단원이 전달한 왕명의 내용은 무척 간단했다.

그러니까 정리해보자면…….

“일시적으로 4구역의 검문소를 열 테니, 얼른 그 틈에 빠져나오라 이거군?”

“내 임무는 전달하는 것이오.”

“거, 딱딱하게 말하기는.”

농담스레 말을 던져 봤지만, 여인은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고 말을 아낄 뿐이었다.

업무 외적인 대화는 아예 안 하는 타입인가?

뭐,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왕의 말을 잘 전달하는 게 네 임무 아니냐? 그러니까 좀 대답해 봐라. 두루마리에는 나와 7구역 출신의 주민 탐험가들을 데리고 오라 되어 있던데…….”

“무엇이 묻고 싶은 것이오?”

“비프론의 주민들은 데리고 가지 않아도 되는 건가?”

“긍정.”

“어째서지?”

“이상한 질문이오. 그들은 애초에 생활 구역에는 출입 허가가 나 있지 않으니.”

“만약 데리고 가겠다고 한다면?”

“그런 가정은 의미가 없소. 방금 전에 말하였듯, 그들에겐 출입 허가가 나 있지 않으니.”

쉽게 말해, 어떻게든 막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문제는 이번 상대가 힘으로 억지를 부릴 수 있는 타입이 아니라는 거고.

“아니면, 왕명에 반기를 들 생각이오?”

“그럴 리가.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다.”

“그렇다면 되었소. 적혀 있던 시기에 7구역의 탐험가들을 이끌고 검문소로 오시오.”

이후로도 다른 질문을 해보았지만, 제대로 된 대답을 얻기는 힘들었다.

“4구역 검문소는 왜 아직도 폐쇄된 상태인 거냐? 비프론을 타고 7구역과 13구역을 공격해도 됐을 텐데.”

“모르오.”

“우리가 비프론에 있는 건 언제부터 알고 있었고?”

“모르오.”

“노아르크에서 비프론을 갖고 뭔가 장난을 치려 하는 거 같은데, 왕가에서도 알고 있나?

“모르오.”

“너는 다 모르는군?”

짜증이 나서 비꼬듯 말하자, 여인이 피식 웃었다.

다만 나는 지치지 않고 다시 물었다.

“그럼 네 이름은 뭐냐? 이름도 모르는 건 아니겠지?”

“모르오.”

허… 얘도 진짜 기가 세네.

만만치 않은 상대란 걸 직감한 나는 조금 더 도발적으로 말했다.

“만약 약속한 시기에 검문소로 가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아, 왕명을 어긴단 게 아니라 혹시 모르지 않나. 뭔가 일이 생겨서 가지 못할 수도.”

여인은 그런 내 말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단지 조금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저기 저 별이 보이시오?”

검지를 펼쳐 밤하늘을 가리켰다.

“……그런데?”

“아마 저기서 내려다보면 우리도 저렇게 작게 보일 것이오. 설령 그 대상이 거인이라 불리는 남작 당신이더라도.”

이 여자는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전혀 모르는 척 눈살을 찌푸렸지만, 사실 대충 알 것 같기는 하다. 왕가 입장에서는 나도 작디 작은 존재일 뿐이란 거겠지.

“남작이 알아야 할 것은 딱 하나란 뜻이오. 왕명을 어기지 않고 약속한 시간에 사람들을 이끌고 제때 검문소로 오는 것.”

보통 사람이라면 저렇게 선을 긋는 말에 꼬리를 말았겠지만, 나는 바바리안답게 머리를 갸웃했다.

“……그래서 못 가면 어떻게 되는데?”

네가 말이 통하지 않는 만큼, 나도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거든.

이내 내 집요함에 질렸는지, 아니면 단지 신기했는지. 여인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차갑게 말을 이었다.

“와야 할 것이오. 당신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 무엇도 설명해 주지 않는 고압적인 말.

다만, 그 마지막 말을 통해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딱히 근거를 댈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너희들…….”

“…….”

“설마 비프론을 통째로 날려 버릴 생각이냐?”

보통 이런 예감은 잘 맞더란 말이지.

27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31화 27

631화 버려진 도시 (4)

이름도 알지 못하는 무명의 장미기사단원.

그녀는 내 질문이 끝난 후 붙잡을 새도 없이 마치 유령처럼 눈앞에서 사라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번에도 어떠한 대답조차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두근-

전사의 심장이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하고서 세차게 뛰기 시작한다.

과연 이 추측이 사실일까.

아니면 내가 틀린 것일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왕가에서 비프론을 통째로 날려 버리기로 했단 계획엔 큰 의문점이 존재한다.

‘노아르크.’

노아르크는 이 계획을 인지하고 있는 걸까.

비프론과 이어진 성벽에 별다른 병력들을 배치하지 않은 걸 봤을 때.

분명 뭔가 알고 있기는 한 거 같은데…….

‘둘 다 대체 뭘 노리고 있는 거지?’

머리가 터질 거 같다.

하나 생각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간다.

그리고 얼마나 더 흘렀을까.

“하아…….”

모르겠다.

이러고 있으면 뭔가 기똥찬 생각이 불현듯 떠오를까도 싶었건만.

솨아아아아아-!

이내 나는 세차게 불어오는 밤바람을 등지고 성벽에서 내려갔다.

애석하게도 내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가 않았다.

그야 장미기사단원이 말해 주고 간 시일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

‘12시간…….’

이게 말이나 되는가?

이후 날이 밝고 정오가 지나면 도시 구역 하나가 폭발한다.

아, 물론 폭발은 아직 내 추측이긴 하지만.

툭.

시간이 부족하기에 어느 정도 성벽을 내려가다가 적당한 높이에서 아래로 점프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착지할 때 조금 큰 소리가 나기는 했지만…….

‘뭐, 어차피 다들 일어나야 하니까.’

집주인이 방 빼라는데 뭐 어떡하겠어?

얼른 빼야지.

챙길 것만 다 챙겨서.

***

역시 암만 생각해도 비프론에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

하지만…….

‘이쯤에서 포기하자.’

며칠간 조사를 해봤으나 이렇다 할 소득은 제로.

어떻게든 그 안에 뭔가 알아냈다면 얘기가 조금 달라졌겠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선택지가 없었다.

왕가의 지시에 따라 비프론을 떠나는 것.

다만, 여기서도 문제가 하나 있다.

[이상한 질문이오. 그들은 애초에 생활 구역에는 출입 허가가 나 있지 않으니.]

왕의 전언을 들고 온 장미기사단원은 말했다.

피난이 허락된 것은 오로지 7구역 출신들뿐이며 비프론의 주민들은 데려갈 수 없다고.

즉, 이미 한번 버려진 이 도시가 우리들에게 또다시 버려질 처지에 놓였단 뜻인데…….

‘쉽네. 이 문제는.’

해결책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따라서…….

“보, 보스? 이 시간엔 어쩐 일로…….”

성벽에서 내려온 나는 곧장 징징이의 집으로 찾아가 말했다.

“당장 비프론의 주민들을 모아라.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예……?”

“시간이 없으니 설명은 나중에 전부 모이면 하겠다. 얼른 모아라.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챙기지 말라고도 말하고.”

내 말이 이해는 되지 않지만 진심이라는 것 정도는 인지를 했을까.

“…떠나야 하는 겁니까?”

“그래.”

“얼른 모으겠습니다! 시, 시간 여유는 얼마나 있는지요?”

“오전 9시 전까지. 다만 빠를수록 좋다. 우리 쪽 사람들은 내가 모을 테니, 너는 비프론 출신 주민들만 모아라.”

“예!”

자다 깬 징징이는 정확한 시간까지 말해주자 알겠다며 외투를 걸쳐 입고 헐레벌떡 뛰어나갔다.

그리고…….

“장미기사단원이 네게 왔었다고?”

“그래. 정오쯤에 4구역 검문소를 열어 줄 테니 얼른 빠져나오라더군.”

“그것 말고 다른 건 없었고?”

“아, 비프론 주민들은 데리고 나올 수 없다고도 말했다.”

“…………네 성격에 그냥 알겠다고 하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

“아니, 그냥 알겠다고 했다.”

“……?”

“걱정 마라. 방법이 있으니까.”

조금 전에 있었던 대화를 동료들에게 공유한 뒤에는 7구역 탐험가들을 소집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약속 장소로 정한 차원 광장에 가서 기다리고 있자 소식을 들은 탐험가들과 비프론 주민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이, 일단 급하다고 해서 왔는데…….”

“무슨 일인지 아는 분 있소이까?”

“펠쟈인 씨는 어서 떠나야 한다고 하시던데…….”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한 만큼,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 광장이 어수선해졌다.

하나 차분히 설명하고 그들을 진정시키는 대신 정오 전에 해야 할 준비 작업을 이어나갔다.

그야 공감하며 걱정하며 시간을 소모하는 것보단 원인을 해결하려 노력하는 쪽이 낫잖아?

“종이! 깨끗한 종이를 다 모아와라!”

“글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은 전부 모여라!”

아무튼, 준비할 것이 많았던 만큼 나 혼자서는 부족해 닥치는 대로 인력을 모아서 부려먹었다.

아, 물론 글을 쓸 수 있는 게 전제 조건인 만큼 아이나르는 예외였는데…….

“아이나르! 너… 3년 전부터 글을 배우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

“……하, 하핫! 미샤! 원래 배움에는 끝이 없는 법이다!”

아이나르는 아직 읽는 것밖에 하지 못한다.

솔직히 말해, 읽는 게 되는데 왜 쓰지를 못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지만.

아무튼.

1시간, 2시간, 3시간…….

촉박했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서서히 날이 밝기 시작했을 때는 도시 내에 있는 모든 인원이 광장에 집합했다.

따라서…….

“모두 모이시오! 남작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 하시오!”

이제는 모두에게 현 상황을 설명해 줄 차례였다.

사실 아까도 말해 주려면 못 할 건 없었지만…….

똑같은 말을 굳이 두 번 반복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크흠흠.”

따로 단상을 준비할 필요도 없이 [거대화]로 몸을 키운 뒤 수천 명이 넘어가는 군중들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긴 말은 하지 않겠다! 지난 밤에 왕가에서 연락이 왔다!”

집중도를 올리기 위해 핵심부터 얘기한다.

“오오오!”

“왕가에서 연락이 오다니!”

“이제 여기서 나갈 수 있는 건가?”

역시나 예상한 대로 격한 반응을 보이는 군중들.

근데 진짜 이상한 게, 이런 연설을 하도 하다 보니 내가 원하는 반응으로 이끄는 게 너무 쉽다.

‘…다른 사람도 이러려나?’

알 수 없지만, 일단 당장은 사람들에게 연설을 하는 데 집중할 때였다.

“그렇다! 왕가에서 4구역 검문소를 열어 도시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했다!”

우선 핵심은 전부 얘기를 했으니…….

“오오오오!”

“사, 살았—!”

“하지만!”

이쯤에서 반전을 줄 타이밍이다.

원래 나쁜 소식을 먼저 들어야 좋은 소식이 더 좋게 들리는 법이니까.

“빌어먹게도 왕가에서는 모두가 함께 갈 수는 없다고 말했다.”

군중들의 환호를 뚫고 내뱉은 말에 일순간 광장이 정적에 휩싸인다.

“………?”

의문과 당혹이 맺힌 수천 개의 얼굴들.

문득 눈이 마주친 비프론의 주민 한 명이 나를 보며 물었다.

“모두가 함께 갈 수는 없다니……? 그,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 말대로다. 왕가에서는 7구역 출신들만을 받아 주겠다고 했다.”

“그, 그럼 저, 저희는 예외란 뜻입니까!”

“그래. 비프론의 주민들은 데리고 갈 수 없다고 말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이름표가 필요 없었다.

광장에 빼곡한 얼굴들의 표정만 보아도 누가 비프론 주민이고, 7구역 출신들인지 분간하는 게 가능했다.

“……!!!”

비프론의 주민들은 사망 선고나 다름없었을 내 확답에 눈이 크게 떠졌고.

“…….”

7구역 탐험가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 줄 몰라 하며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 그 정도로 군중들 사이에서 희비가 선명하게 갈렸다.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러면! 그러면 왜 우리를 부른 거요!!”

군중에 섞인 누군가가 분노를 토해내듯 외친다.

“어차피 버릴 거면! 왜 불렀냐고!”

말투도 더 이상 공손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뭐,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절벽 끝까지 내몰린 사람들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야 당연한 일이니까.

그래, 그러니까…….

“그야 나는 너희도 데려갈 생각이니까.”

전부 농담이었다는 듯 씨익 웃으며 말하자, 분노를 토해내던 남자의 눈빛이 멍해진다.

“………예?”

“귀 먹었나?”

“아,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왕가에서 분명 우, 우리를 받아 주진 않는다고…….”

아, 그거 말이지.

확실히 얘네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될 거다.

이 기괴한 도시에서 왕가의 말을 어긴다는 건 그만큼 말도 안 되는 짓이니까.

심지어 비프론은 왕가에 반항했을 때 어떻게 되는지를 직접 몸소 평생 겪어 온 이들이었다.

“그랬지. 그리고 나는 너희들을 데리고 갈 거라고 말했고.”

“……하, 하지만! 당신은 남작이지 않습니까!”

“남작? 맞는 말이지. 근데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이어진 내 질문에 남자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째서…….”

이내 남자가 떨리는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어째서 저희를 위해 그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참 아이러니하게도.

사실 나 스스로도 생각했던 의문이었다.

어찌 됐든 지금 내가 하려는 짓은 왕가의 눈에 곱게 보이지 않을 행동일뿐더러…….

이후 귀족 사회에서 입지를 다지는 데 어려움을 줄 선택이기도 하다.

한데 나는 왜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대체 왜 그렇게까지 쉽게 고민을 끝낼 수 있었던 걸까.

생각해 보면,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냥 그러고 싶었으니까.”

“예……?”

“왜 그러면 안 되나?”

“아,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아무튼, 그럼 이 얘기는 여기까지다. 제때 나가려면 준비를 해야 하니 다들 안내에 따라서 서류를 작성해라! 이상이다!”

이쯤에서 나는 공지를 끝냈고, 이후 주민들은 내 동료들의 안내에 따라 순차적으로 서류에 서명했다.

그리고 이게 다 끝났을 때쯤.

‘아슬아슬했네.’

약속했던 시간이 되며 검문소의 문이 열렸다.

***

끼이이이이이익-!

오랜 시간 닫혀 있던 검문소의 문이 뻑뻑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린다.

꿀꺽-!

검문소 앞에 모인 군중들이 긴장한 듯 침을 삼키고 이목을 집중한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철컥, 철컥.

왕가의 문양을 가슴에 짊어진 기사단이 쇳소리를 내며 걸어나와 검문소 입구에 진형을 치며 길을 만들어 낸다.

마치 뒤이어 나올 누군가를 기다리듯이.

“나, 나온다……!”

실제로 어느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울려 퍼지며 검문소를 지나 기사들 사이로 한 명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터벅, 터벅.

앞에 기사들과 똑같은 기사단원복을 입는 여자.

다만, 그것이 위장이라는 건 보자마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야 어제 봤던 그 장미기사단원이었거든.

“사람이…….”

이내 검문소 앞에 모인 여자가 천천히 인파를 쓱 둘러보다가 내게 시선을 멈췄다.

“예상보다 많구려?”

이게 무슨 수작이냐는 의미를 담은 눈빛.

다만 딱히 주눅이 들거나 할 이유가 없었다.

거, 내가 불법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왜 사람이 많은데, 어디 문제라도 있나?”

내 능글 맞은 물음에 여자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저었다.

“없소.”

“…….”

“어차피 허가 받지 못한 자들이 이 문을 넘는 일은 없을 터이니.”

예상 못 한 상황일 텐데도 전혀 흥분하지 않고 말하는 모습은 제법 오싹했다.

역시 만만히 볼 수 없는 여자들이라 해야 하나?

아, 그래도 방금 전 말은 딱 내가 유도한 대로이긴 했지만.

“그렇다면 잘 됐군. 어차피 허가 받지 못한 자들이 저 문을 넘는 일은 없을 테니.”

내가 씨익 웃으며 묻자, 이번에는 정말로 예상이 안 됐는지 여자의 미간이 좁혀진다.

“그게 무슨 뜻이오, 남작?”

대답 대신 준비해 둔 서류 중 한 장을 꺼내 들어 보여 주자 여자가 말꼬리를 흐린다.

“이건…….”

후후, 역시 이건 예상하지 못했—.

“이게 무엇이오?”

아, 이 서류가 뭘 의미하는지 아직 이해를 못 한 거구나.

하긴 나도 비프론에 숨겨진 뭔가를 알아내겠다고 이리저리 수소문하며 온갖 얘기들을 듣지 않았다면 결코 떠올리지 못했을 해결책이긴 하니까.

열네살 때 자격 증명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것 외에도, 비프론의 출신들이 출입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더 있었다.

씨익.

나는 승자의 웃음을 숨기지 않으며 이 서류가 의미하는 바를 여자에게 설명했다.

“고용 계약서다.”

“고용 계약서……?”

“쉽게 말해 지금부터 이들은 우리 얀델 가문의 가신이 되었다는 뜻이다.”

아, 참고로 월급은 없다.

25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32화 25

632화 재건 (1)

“가신이라…….”

이름도 알 수 없는 장미기사단원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남작은 이게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생각해 보면, 바바리안으로 살아가며 참 많이 들었던 질문.

내 대답 역시 그때와 달라질 게 전혀 없었다.

“엥? 말이 안 될 건 뭐냐?”

소지로 귀를 후비며 말하자 장미기사단원이 인상을 찌푸린다.

“무려 일만에 달하는 숫자—.”

“음, 정확히는 8,712명이다.”

“……그게 무슨 차이요? 도시에 내로라하는 대귀족가들조차 그만한 숫자의 가신을 두고 있는 일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없었소.”

“오, 진짜냐?”

나는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웃으며 외쳤다.

“그럼 내가 최초가 되겠군!”

혹시 이런 것도 명예의 돌에 따로 적을 수 없나?

다 들리게 혼잣말까지 중얼거렸지만, 저 눈물 한 방울 안 나올 거 같은 여자는 내 혼잣말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그리고…….

“얀델 남작은 사병을 양성할 생각인 것이오?”

숙달된 검객이 빈틈을 찌르듯 날카롭게 물었다.

이번엔 천연덕스럽게 넘어갈 수 없는 민감한 질문이었다.

‘사병? 안 될 거 뭐 있나!’ 라는 식으로 대답하는 순간 내 의도가 곡해되며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많으니까.

최악의 경우 반역 모의로 내몰릴 수 있다.

따라서…….

“그럴 리가. 사병을 양성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내 이름과 전사로서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지.”

이것 하나만큼은 그 무엇보다 확실하게 딱 잘라 말한다.

아, 물론 이 여자는 들은체도 하지 않았지만.

“맹세 대신 설명을 해보시오. 왜 그만한 숫자의 가신이 필요한 것인지.”

거, 깐깐하기는.

나는 뒤에서 혀를 차면서도 일단은 받은 질문에 답을 해주었다.

“뭐… 그야 가신이 많으면 좋지 않나? 나는 원래 북적북적거리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북적거리는 게 좋아서, 9천 명에 달하는 가신을 두겠단 뜻이오?”

“8,712명이다. 9천 명이 아니라.”

실없는 소리로 말을 끊은 나는 서둘러 말을 이어붙였다.

“그리고 단순히 사람이 많았으면 해서 들인 게 아니고, 정말 다 필요해서 들인 거다. 예를 들어, 여기 이 서류에 적힌 카이나 엘모시는……. 오! 주방 보조라고 적혀 있군!”

“남작, 우리가 그 말을 진심으로 믿을 거라 생각하고 하는 말이오?”

……뭐, 그거야 그렇겠지.

그 어느 누구도 믿지 않을 변명이란 건 나도 잘 안다.

근데 그래서 어쩌라고?

“믿든 말든 네가 신경 쓸 이유가 없지 않나?”

“…….”

“오히려 나는 갑자기 이러는 게 이해가 안 된다. 어제는 왕의 말을 따를 뿐이라면서? 이들은 내 가신이 됐고, 정당한 출입 자격을 얻었다. 그런데 왜 막겠다는 거지?”

아예 대놓고 뻔뻔하게 나가자 장미기사단원도 뭐라 반박을 하지 못했다.

슬슬 강하게 압박을 해줄 타이밍이었다.

따라서…….

“인간 여자, 하나만 해라.”

“……?”

“너 스스로 판단을 할 거면 판단을 하고.”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을 잇는다.

“말 거면 말라고.”

도구면 도구답게 굴라는 바바리안식 조언.

이를 들은 장미기사단원은 딱히 이렇다 할 표정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조언 자체는 귀 기울여 들어준 것일까.

“…….”

“…….”

검문소 앞에 선 기사들조차 눈알을 굴려대며 눈치를 보는 어색한 정적 속에서,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던 여자가 입술을 뗐다.

“남작은…….”

“남작은?”

“…오늘의 선택을 후회할 것이오.”

허, 뭔 말을 하려는가 싶더니만.

공교롭게도 이 역시 익숙한 레퍼토리였다.

다들 뭔가 잘 안 풀리면 이렇게 후일을 도모하는 말을 하더란 말이지.

“오, 기사가 아니라 점술가였나?”

마지막까지 살살 긁어주자, 여자는 분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더니 기사들에게 말했다.

“……다들 길을 내주어라!”

후, 일단 한고비는 넘었네.

***

상업 도시 컴멜비에 속해 있는 4구역.

원래 이곳은 어딜 가든 점포도 많고 지나다니는 사람도 많은 지역이었지만, 검문소를 타고 들어선 4구역의 모습은 평소와 완전히 달랐다.

가게는 전부 문을 닫았고, 지나가는 사람도 한 명 보이지 않는다.

“인간 여자, 여기는 대체 무슨 상황인 거지?”

“…4구역은 신민들의 안전을 위해 일시적으로 폐쇄됐소.”

“다른 구역들은 어디어디가 폐쇄된 거지?”

“폐쇄된 것은 오직 4구역만이오.”

일순간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얘기였다.

“…뭐?”

장미기사단원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노아르크가 점거한 13구역과 맞닿은 3구역.

그리고 7구역과 맞닿은 5구역은 폐쇄를 하지 않았는데…….

‘정작 비프론과 맞닿은 4구역만 폐쇄를 했다고? 안전을 위한단 이유로?’

쉽사리 납득이 되지 않지만, 자세히 물어봐도 제대로 된 답은 들을 수 없었다.

“남은 이야기는 재상에게 들으시오. 남작의 말대로, 나는 판단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

“재상? 지금 우리가 재상에게 가고 있는 건가?”

“그렇소.”

그 말을 끝으로 뭘 묻든 가서 직접 물어보라는 대답만 반복됐기에 대화는 이쯤에서 중단.

이후 4구역 광장에 도착해서는 비프론 주민들과 7구역 출신들을 위한 피난소를 꾸렸다.

우리의 처우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잠시 시간이 필요한데 그때까진 여기서 지내라던가?

“허어…….”

“…자유 광장이 이렇게 텅 비어 있는 모습은 내 난생처음 보는 듯하구려.”

뭐, 그래도 사람들을 보니 그런 왕가의 대접에 불편해하는 거 같지는 않았다.

그냥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달까?

“남작은 이리 오시오. 재상께서 기다리고 있소.”

“…다녀오마. 에밀리, 베르실. 여기는 너희가 잘 책임지고 있어라.”

광장의 상황이 정리된 후에는 장미기사단원을 따라 이동했다. 도착한 곳은 광장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고급 주택이었다.

그리고…….

“곧 기다리고 있으면 재상께서 연락을 하실 것이오.”

역시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방 안에는 재상 대신 화상 통화가 가능한 연락용 수정구가 놓여 있었다.

지이잉.

이내 장미기사단원이 떠나고 방에 혼자 남게 되자 머지않아 수정구가 진동했고, 수신 버튼을 누르자 수정구에 익숙한 얼굴이 떠올랐다.

[오랜만일세, 얀델 남작.]

“오랜만이다, 테르세리온 후작.”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직접 얼굴을 맞대지 못한 점은 부디 양해해주기 바라네. 전시 상황인지라 자리를 비우는 게 힘들더군.]

힘들기는 무슨.

황도 카르논에서 여기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심지어 군용 마법진도 자기 맘대로 타고 다닐 수 있는 인간이.

코웃음도 안 나올 정도지만, 입으로는 진심과 다른 말들이 바로 흘러나왔다.

“이해한다. 그리고 딱히 서운하지도 않으니 신경 쓰지 마라.”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그래서 지하 1층에 갔던 탐사군은 다들 제대로 복귀를 했나?”

[그들 모두 안전하게 도시로 귀환을 했고, 탐사에 관한 보고까지 모두 마친 상태네. 자네가 7구역에 있으리라는 것도 그들 덕분에 알아낼 수 있었지.]

“흐음… 그렇단 말이지.”

서론이 긴 건 좋아하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서론을 통해 얻을 정보가 많았기에 계속해서 이어나가기로 했다.

“그럼 우리가 비프론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지?”

[비밀리에 7구역에 잠입시킨 요원을 통해 들을 수 있었네. 모두 듣는 앞에서 비프론으로 가겠다고 선언하였다던데……. 어째서 그랬던 건가? 듣기로는 그들이 자네들을 그냥 보내 주겠다 하였다던데.]

예상 질문 중 하나였기에 나는 막힘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냥 보내 주겠다는 말을 어떻게 믿나? 게다가 대화를 나눠보니 놈들이 비프론을 이용해 뭔가 수상한 짓을 하려는 정황이 포착됐다.”

[수상한 짓? 혹시 그곳에서 뭔가 알아낸 게 있는가?]

“며칠간 조사해 봤지만 아쉽게도 알아낸 건 아직 없다.”

[그렇군……. 아무튼, 남작의 말인 만큼 노아르크 세력이 비프론과 관련된 암계를 꾸미고 있다는 정보는 전략실에 전달을 해두겠네.]

“오, 그렇다면 다행이군.”

내 말을 끝으로 잠시간 정적이 흘렀고, 나는 내심 궁금하던 것을 슬쩍 물었다.

“세인트레드는 어떻게 됐나?”

[세인트레드 경 역시 무사하네. 그의 독특한 이능 덕분에 무사히 깨어나 그곳에서 있던 일들을 전해 들을 수 있었지.]

그래, 촌장도 잘 살아서 돌아온 거구나.

뭔가 문제가 생겨서 그냥 콱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기네만, 세인트레드 경이 그렇게 되고서 탐사군을 이끈 게 남작, 자네라면서?]

“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일단 모두 다 살아서 나가야 하니까.”

[잘했네. 잘했어. 아주 큰 공을 세운 것이야.]

“오, 그럼 승작도 가능한 건가?”

[……그 얘기는 아직 나누기 이르네. 탐사군에 관한 논공행상도 언젠가 있을 예정이지만, 지금은 전시 상황 아닌가.]

쉽게 말해, 공적치 정산은 노아르크 침공 사태가 마무리된 다음에나 가능하다는 뜻.

다만 이 부분은 충분히 납득되는 사유인지라 별말은 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쯤이면 서론은 충분한 거 같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 차례였다.

다만 그런 생각으로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재상이 먼저 그 얘기를 언급했다.

[그나저나 말일세. 내 듣기로 비프론 주민들을 가신으로 받아들였다고 하던데…….]

서론을 좋아하는 이 할배가 이러는 걸 보니 확실히 몸이 달아오르긴 했던 모양.

[그들을 다시 돌려보낼 생각은 없는가?]

“돌려보내라니? 혹시 내가 법적으로 옳지 못한 짓을 한 건가?”

[아니, 그런 건 아닐세. 하지만… 우리들 입장에서 그들 전부가 밖으로 나오는 건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라네. 자네도 귀족이니 알 것 아닌가?]

귀족이니 알 것이다.

이 말을 해석하자면, 너도 이제 귀족이니 사사로운 감정은 버리고 왕가의 이득을 위해서 움직이란 뜻을 내포하기도 했다.

“글쎄, 그 말을 전에 들었다면 모를까 지금은 좀 늦었다. 이미 가신으로 받아들였는데 어떻게 하냐?”

[그거야 자네가 내쫓으면 되는 문제 아닌가.]

“미안한데, 나는 남에게 싫은 소리를 잘 못하는 성격이라 어려울 거 같다.”

[…자네가 말인가?]

내 답변을 들은 재상은 얼토당토않은 말을 들은 사람처럼 헛웃음을 터뜨렸다.

거, 내가 얼마나 섬세하고 내향적인데.

“아무튼, 불법이 아니라면 이 문제는 됐다. 그만 얘기해라. 이미 끝난 일이니까.”

[……남작, 자네를 걱정해서 하는 말일세.]

걱정하기는 개뿔.

내가 어디서 죽었다고 하면 가장 기뻐할 사람이 바로 자기일 거면서.

“걱정은 고맙지만, 내가 알아서 판단하고 감당하겠다.”

[…….]

“근데 그래서 비프론은 어떻게 할 생각인 거냐?”

후작 입장에서 주민들의 처분이 본론이었다면, 내게는 이 부분이 본론이라 할 수 있었다.

왕가에선 비프론을 어떻게 할 작정이었는가.

[군사 정보를 함부로 외부에 노출할 수 없네마는. 남작인 자네에게 숨길 이야기는 아니겠지. 자네도 어느 정도 예상을 했던 거 같기도 하고 말일세.]

“내가 예상을 했다고 한다면…….”

[맞네. 우리는 비프론을 통째로 날려 버릴 걸세. 노아르크 세력이 그 안에 숨어드는 순간 말일세.]

차분한 말투로 말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한없이 차갑고 잔혹했다.

비프론을 통째로 날려버릴 계획을 갖고 있으면서, 비프론 주민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라고 하다니.

‘……진짜 여기 사람들은 사람 목숨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새삼 야만적인 세계란 생각이 들지만, 결국 멀리서 보면 나도 비슷한 부류의 사람일 것이다.

게다가 지금 상황에 할 고민거리도 아니고.

“잠깐만, 노아르크를 유인할 생각이었다고? 놈들이 비프론에서 뭘 하려는 건지도 아는 게 있는 거냐?”

[우리도 모르네. 다만, 계속 압박을 하다 보면 그리로 도망칠 것이라 예상했네.]

후작은 모른다고 했으나 순진하게 믿을 생각은 없었다.

병력 운용을 봤을 때, 왕가든 노아르크든 정상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는 중이었으니까.

‘나한테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라…….’

이러면 괜히 더 궁금해진단 말이지.

[어쨌든, 그래서였네. 자네가 비프론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최대한 빨리 빼내려고 한 것도.]

애초에 이 부분도 솔직히 이해가 안 간다.

내가 후작 입장이었으면, 걍 노아르크 놈들이랑 한데 묶어서 터뜨려 버렸을 거 같은데.

대체 왜 나까지 구해내려 했을까.

그 의문은 공교롭게도 바로 이어진 대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해소될 수 있었다.

[아차, 그러고 보니 아직 이 얘기를 하지 않았군. 지하 1층을 탐험하며 얻은 물건들 대부분을 자네가 갖고 있다지?]

“아, 그랬었지.”

[그랬었지……?]

과거형인 내 말에 고개를 갸웃한 후작이었으나, 단순한 커뮤니케이션 오류라 생각했는지 되묻지 않고 곧장 말을 이어갔다.

[탐사에서 얻은 성과들은 이따가 나갈 때 이 방에 두고 가게. 그것들은 모두 왕가의 귀중한 자산이며, 추후 논공행상을 걸쳐 자네에게도 필요한 것들이 갈 것이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게, 지하 1층에서 획득한 전리품. 설마 이것 때문에 나를 구출하려 한 것일 줄은 몰랐는데…….

[……근데 갑자기 왜 고개를 숙이는가?]

그야 눈이 마주치면 표정 관리가 어려울 거 같아서 말이지.

“……미안하다, 후작.”

그거 내가 다 썼어.

34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33화 34

633화 재건 (2)

미안하다는 말을 끝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 후작이 되물었다.

[……미안하다니? 무슨 뜻인가?]

“…….”

[말을 해보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일세.]

말보다는 직접 보여 주는 게 빠르겠단 생각에 나는 지하 1층 탐사 중에 획득한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 방 안에 차곡차곡 쌓았다.

그리고…….

[왜 갑자기 멈추는가?]

“이게 끝이다.”

[무슨 소리인가? 보고를 들었을 땐 시험관에 담아온 정수만 해도 백 개가 넘는다고 들었는데.]

아, 그거.

“…그랬었지.”

[…….]

그제야 내가 아까 과거형으로 말한 이유를 깨달았는지 후작은 말이 없어졌다.

다만, 그래도 그 이유만큼은 궁금했을까.

[…대체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건가?]

“후작, 이제 보니 너는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종류의 사람이었군?”

[자네가 정말 곤란해질 수도 있어서 하는 말이니, 장난으로 답하지 말게.]

오케이, 놀리는 건 이만하면 됐고…….

나는 미리 준비해 둔 변명을 길게 늘어놓았다.

바바리안답지 않게 구구절절 말하기는 했으나, 한 줄로 정리하면 간단했다.

[…도시 탈출을 위해 전력을 늘릴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7구역 탐험가들에게 나눠줬단 말인가? 그 귀한 정수들을……?]

“그랬었지.”

[세상에… 어처구니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는군.]

“어처구니가 없을 건 또 뭐냐? 어차피 우리가 도시 탈출에 실패해 놈들에게 붙잡혔으면 전부 빼앗겼을 텐데.”

암, 적들에게 넘어가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런 말을 작게 중얼거리고 있자, 영상구 너머의 후작이 어지럽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입을 열었다.

[이 문제는… 왕가 회의에서 다시 다뤄야 할 것 같네. 남작이 7구역의 탐험가들을 구출해 온 것은 사실이니까. 공이 큰지, 실이 큰지를 의논할 필요가 있어.]

해석해 보자면, 내가 한 말들이 사실인지 아닌지 따로 조사할 시간이 필요하단 뜻이었다.

뭐, 조사해 봤자 나오는 증언은 똑같겠지만.

[그러니 부디 상황이 마무리 될 때까지는 사고 치지 말고 가만히 있게.]

아무튼, 마지막 멘트는 귀족어가 아니라 그냥 진심으로 하는 말인 거 같고…….

“알겠다. 가만히 있을 테니 걱정 마라.”

[……원하는 말을 들었는데, 어째서 더 불안해지는 건지 모르겠군.]

“음, 후작 네가 속이 좁아서 그럴 수도 있다.”

[……?]

아, 공감하며 위로를 했어야 하는 타이밍이었나?

그런 쪽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니기에 슬슬 새로운 주제를 꺼냈다.

“아! 그래서 지금 광장에 있는 탐험가들과 내 가신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그냥 계속 저기 광장에서 지내게 냅둘 건가?”

[불편해도 당분간은 그곳에서 지내게. 며칠 내로 사태가 진정될 터이니.]

“며칠 내로라…….”

말하는 걸 보니 정말 머지않아 이 모든 사태가 얼추 마무리 될 거라고 믿는 듯하다.

아, 물론 나라고 믿지 않는단 뜻은 아니었다.

왕가의 이인자가 저리 말하는 이상, 그만한 근거가 있다는 뜻일 테니까.

“알겠다. 그럼 우리는 돌아가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지.”

그렇게 그날의 대화는 마무리 지어졌고, 이후 광장으로 돌아와 사람들과 함께 길바닥 생활을 하고 있자니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다들 들었소? 왕가군의 압박에 노아르크 쪽에서 인질들 대부분을 석방했다는 모양이오!”

하루.

“7구역과 13구역을 점거한 노아르크 세력들이 왕가군에 의해 밀려나고 있다는구려!”

이틀.

“13구역 탈환이 끝났다 하오!”

사흘.

“땅개 놈들이 7구역에서도 밀려나 비프론으로 도망을 쳤다는군!”

“와아아아아아!”

나흘…….

긴박한 전황이 매일매일 갱신됐지만, 비프론 쪽에서 폭발음이 피어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드드드드드드드-!

닷새째 되는 날.

“뭐, 뭐야! 저거!”

우리들은 직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왕가의 계획이 무엇이었든 간에.

“비, 비프론의 수호 마법진이 검게 물들었다……!”

무언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게 분명하다.

***

최후의 성채 라프도니아.

이 거대한 도시 국가는 대현자의 유산인 수호 마법진이 도시 전역에 펼쳐져 있다.

마녀의 독도 거짓말이었던 마당에, 정말 수호 마법진이 실존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결국 진짜로 있었지.’

얼마 전에 에르웬이 쏜 화살을 통해 수호 마법진이 실존한다는 것은 증명됐다.

투명해서 육안으로 보이진 않지만, 그것은 굳건히 이 도시를 뒤덮은 채 여전히 성벽을 기준으로 바깥 세상과 도시를 단절시켜 주고 있었다.

‘이쯤 되면 수호 마법진이 아니라 감금 마법진이 아닌가 싶긴 하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혹시 아는 사람 있소?”

“마녀의 독 때문에 저렇게 된 건가?”

지면을 타고 전해진 진동과 함께 비프론을 뒤덮고 있는 수호 마법진이 검게 물들었다.

마치 외계인이 침공해 일정 구역에 돔을 씌우고 감금을 한 것만 같은 모습이라 해야 하나?

물론 이게 원래 왕가의 계획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얀델, 군 쪽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왠지 모르게 분위기를 보면 그게 아닌 거 같단 말이지.

“기다려 봐라. 내가 알아볼 테니까.”

위화감을 느낀 나는 후작과의 독대를 요청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반려됐고, 결국 연락이 닿은 것은 것은 또다시 며칠이 지나서였다.

“많이 수척해졌군.”

오랜만에 만난 영상구 너머의 후작은 상당히 바쁘게 지냈는지 몸무게가 몇 킬로그램은 족히 빠진 모습이었다.

“일이 잘 안 풀렸나보지?”

[…자세한 내용은 군사 기밀이라 말할 수 없지만, 일단은 그렇네.]

“아니, 조금이라도 말해봐라. 갑자기 비프론이 저 상태가 됐는데.”

[…조금 정리가 되면 자네도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걸세. 자네도 라프도니아의 작위 귀족이니까. 그래도 한 가지만 말해 주자면, 당분간 노아르크 세력들이 저곳에서 나올 일은 없을 걸세.]

“그렇다면 다행이군…….”

솔직히 자세한 속사정이 궁금해 미칠 거 같지만, 이 부분은 아무리 긁어봐도 알려 줄 거 같지 않아서 포기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계속 여기에 머무르고 있어야 하나?”

[그럴 필요는 없네. 4구역만 하더라도 내일부터 정상화가 될 예정이니까.]

“이제 우리도 자유라는 뜻이냐?”

[그렇네. 7구역 또한 개방이 끝난 상태이니 그리 가도 상관없을 걸세.]

“비프론에서 데려온 우리 가신들은? 그쪽도 아무 문제 없나?”

[아, 그 문제 역시 심도 깊은 논의가 있었네마는……. 일단 문제를 삼지 않기로 했네. 단, 자네가 그들을 가신으로 데리고 있는 한 말일세.]

“만약 가신이 아니게 된다면?”

[처형되겠지. 다시 비프론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말일세.]

가신이 아니게 될 시 처형.

그런 극단적인 수를 내밀긴 했지만, 그래도 보수적인 왕가의 결정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만큼 쿨한 승낙이었다.

뭐, 얘네들이라고 생각이 없는 건 아니겠지만.

[아, 그리고 도시 내에서 머무는 것이기에 그들 역시 앞으로 세금을 내야 할 걸세.]

후… 어쩐지 너무 쉽게 승낙을 해주더라니.

“얼마나 내야 하지?”

[일반 신민들과 동일하네. 미성년자의 경우엔 세금이 면제되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나마 듣던 중 다행인 얘기긴 했다.

뒤에 붙은 조건만 아니라면 말이다.

[아, 참고로 비프론 주민들은 군사 교육이 필요한 직업은 일절 가질 수 없네. 착각할까 싶어 말해 주는 거네만, 탐험가 직종도 포함일세.]

쉽게 말해, 재능 있는 녀석들을 탐험가로 만들어 소수가 절대 다수를 책임진다는 전략도 쓸 수가 없다는 뜻.

[오랜 시간 재상 자리에 있던 사람으로서 조언 하나만 해도 되겠나?]

“해봐라.”

[줄이게. 줄일 수 있는 만큼.]

“…….”

[그런 쓸모없는 인간들에게 무슨 가치가 있겠나?]

재상답다면 재상다운 조언이었다.

이 도시 자체가 세금을 내지 못하는 자는 한 명의 가치도 없다고 판단하는 풍조가 있으니까.

나라의 전반적인 재무를 담당하는 후작 입장에선 비프론 주민들이 쓰레기로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오, 조언 고맙다. 한 귀로 잘 흘려 듣겠다.”

이런 오지랖은 허용하지 않는 게 바바리안의 신념이라서 말이지.

[…….]

이후로는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눈 뒤에 후작이 바쁘다며 떠났고, 그것으로 오늘의 대화는 끝.

광장으로 돌아온 다음에는 길바닥 생활을 하던 7구역 출신들과 비프론 주민들을 이끌고 폐허가 된 7구역에 들어섰다.

‘…결국 여기로 이렇게 다시 돌아왔네.’

비프론으로 도망쳤다가 4구역에서 난민 생활을 이어가고 다시 돌아온 7구역.

‘아주 박살을 내놓고 갔네.’

왕가군이 몰아냈다는 소식이 허투가 아니었는지, 7구역의 상태는 우리가 마지막으로 있었을 때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처참했다.

폐허로 변한 대로변에 있는 건물들엔 혈흔과 전투의 흔적이 가득했다.

또한, 군인들이 사용한 듯한 막사들도 치워지지 않고 방치된 상태였으며…….

“아이고오오오! 내 가게……! 내 가게……!!!”

“어머니! 어머니! 여기에요! 여기! 무사하셨군요!”

7구역이 해방되며 피난을 갔다가 다시 찾은 주민들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저도… 살던 집이 멀쩡한지 궁금해서…….”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 죽는 날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남작님!”

이후 7구역에 도착하며 7구역 출신 탐험가들은 각자 자연스럽게 흩어졌고, 그렇게 내 동료들과 비프론 주민 8,712명이 덩그라니 남았다.

“…얀델, 지금 어디로 가는 거냐?”

“성지로 간다.”

“확실히… 너 입장에선 그곳도 확인을 해봐야 하긴 하겠군.”

아멜리아는 내 입장을 이해하듯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성지로 가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곳이 걱정되는 것도 맞지만…….

‘일단 오늘 밤 잘 곳부터 구해야지.’

정 안 되면 7구역에서 노숙을 해도 괜찮지만, 이왕 그럴 거라면 성지에서 노숙을 하는 게 낫다는 판단.

음, 그랬을 터인데…….

“비요른 니이이이이이이이이임!!!!”

성지에 도착하자마자 괜히 왔다는 후회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왜 이제야 온 거예요오오오오!!!”

“……오랜만이다. 샤빈 에무어. 잘 있었나? 일단 이것부터 놓고—.”

“안 놔요! 놨다가 또 몇 달 동안 안 돌아오려고!! 안 돼! 죽어도 못 놔!!”

우리 부족의 행정 총책임자 역할을 맡은 샤빈은 몇 달 동안 혼자 살림살이를 도맡았던 것도 모자라, 노아르크 침공이 시작되며 성지에 갇힌 일 때문에 스트레스가 극도로 쌓인 듯했다.

하지만…….

“일단 손은 놓고 얘기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네? 아… 네…….”

아멜리아가 업무적인 말투를 쓰며 강제로 손을 떼어내자 조금은 정신을 차린 듯했다.

보스전으로 치자면 일종의 그로기 상태.

경험으로 보건대, 얼른 사과를 박을 타이밍이었다.

“샤빈, 미안하다. 나도 이렇게 늦게 돌아올 줄은 정말로 몰랐다.”

“……사정은 저도 알아요. 그래서 걱정도 많이 했고요.”

“걱정시켜 미안—.”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로 나아가는 듯하던 때, 샤빈이 돌연 내 말을 끊으며 물었다.

“근데 그래서 뒤에 저 사람들은 대체 뭔데요?”

샤빈의 시선은 어느새 내 뒤에 뻘쭘하게 서 있는 8,712명의 주민들을 향해 있었다.

꽤나 난감했다.

“아, 어, 음…….”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아, 일단 주제부터 돌리자.

“그, 그래서 성지는 어떤 상태냐? 보, 보니까 많이 변한 거 같던데…….”

“비요른 님이 없는 동안 성지 개발 계획의 4분의 1은 완료가 됐어요. 덕분에 자금도 풍족해졌고요.”

“오, 자금이 풍족해졌다니 그것 참 다행이군.”

어쩐지, 지나오는 길에 도로도 깔리고 건물들이 쫙 들어섰더라니.

“그래서 저 사람들은 누군데요?”

“비프론의 주민들이다. 며칠 전에 우리 얀델 가문의 가신이 되었지.”

“저 사람들이 전부 다요……?”

이게 뭔 개소리냐는 듯한 눈빛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

무언가 불안한 낌새를 느꼈는지 갑자기 말이 없어진 샤빈이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그래서 왜 데려온 거죠? 저 가신이란 사람들을?”

“지낼 곳이 없어서 말이다. 당분간 성지에서 머물게 하려고 한다.”

“와, 그렇구나.”

이내 샤빈이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되물었다.

“그럼 저 사람들이 생활할 때 쓸 땅은요? 먹을 옷은? 예산은요?”

아, 그거 말이지…….

그거라면 경제부 장관이 도맡아 할 거다.

아, 그러니까 이쪽 말로 대충 바꾸면…….

“그거라면 행정사무총장이 도맡아 할 거다.

“……행정사무총장?”

그런 직책이 부족 내에 있던가 하는 표정을 지으며 샤빈 에무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툭.

그런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나는 말했다.

“그래, 행정사무총장.”

너 방금 승진한 거야.

20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34화 20

634화 재건 (3)

상관 A가 있다.

과중한 업무를 지시해 놓고 반년을 넘게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은 상관이다. 그런 상관이 오랜만에 돌아와 8,712개의 일거리를 갖고 돌아왔다.

이때 부하 직원의 마음은 어떨까?

위 문제의 정답은 지금 내 앞에 선 샤빈 에무어의 표정을 통해 알 수 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

분노에 의해 한곳에 고정된 시선.

그리고…….

‘살기……?’

어떻게 일반인이 이런 살기를 표출할 수 있는 것일까.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을 정도지만…….

“저… 이제 그만둘—.”

그 단어가 완성되기 전에 일단 서둘러 샤빈의 말을 끊었다.

“샤빈! 잠시만 진정해라! 네가 없으면 우리 부족은 망한다!”

“저 하나 빠진다고 망할 곳이면 진작 망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닌데…….

“우, 우리 사이에 왜 그러냐? 내가 지금까지 잘 해줬—.”

“그럼 저는 잘 해주지 못했다는 뜻인가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원래 가족 같은 문화는 중소 기업의 특징이기도 한 법.

다만 나는 의리로 설득하는 방법은 바로 폐기했다.

인력난을 겪는 중소 기업이 인력난을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가족 같은 문화에 질려 떠나려 하는 이들을 잡기 위해 필요한 것은 도의적인 말 따위가 아니다.

“두 배.”

“두 배?”

“그래, 지금까지 받던 월급의 두 배를 주마!”

파격적인 월급 인상 소식에 차갑게 굳어 있던 샤빈 에무어의 표정에 조금 균열이 생긴다.

“……그, 그런 거로 제 마음이 바뀔 거라—!”

연계기를 넣을 때였다.

“앞으로만 말하는 게 아니다!”

“……?”

“내가 없는 동안 네가 홀로 성지에서 고생한 시간들까지 두 배로 쳐서 지급을 하겠다!”

“……!!!”

맘 떠났던 부하 직원조차 눈이 번쩍 뜨게 만드는 파격적인 성과금 약속.

“…….”

본인도 멋쩍기는 한지 대답을 바로 하지 않지만, 표정을 보니 완전히 무장해제가 됐다.

따라서 나 역시 더 이상 보채거나 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며 시간을 주었고, 이에 샤빈도 천천히 입을 뗐다.

“…할게요.”

개미 기어가는 듯한 작은 목소리.

“뭐라고?”

“……맡겠다고요! 그 행정사무총장 자리!”

이내 샤빈이 결심을 끝마친 사람처럼 큰 소리로 외쳤다가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변명하듯 뒷말을 이어붙였다.

“그… 저도 이제… 결혼 준비를 해야 할 나이니까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유였다.

“어…….”

……준비할 나이가 아니라, 한참 늦은 나이가 아니고?

이제 몇 년 뒤면 마흔인 거로 알고 있는데…….

초혼이 늦어지던 현대 사회라면 모를까. 이 사회적 시대상으로는 역시 늦은—.

“하긴.”

그때 아멜리아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나이면 슬슬 생각이 날 때지.”

…아무 말도 안 하길 잘했네.

***

행정사무총장, 샤빈 에무어.

오늘로서 행정 및 사무 계열의 최고 권위자 위치를 손에 넣은 그녀의 실력은 진짜였다.

“내년에 팔려고 정리해 둔 땅이 있어요. 거기라면 이 인원도 수용은 가능할 거예요. 조금 비좁기는 하겠지만.”

퇴사를 결심했던 순간이 무색할 정도로 샤빈은 미리 준비해 두기라도 했던 사람처럼 8,712명의 난민들을 수용해냈다.

“지붕이 문제긴 한데……. 미리 준비해 둔 자재들이 있어서 간이로 설치하는 건 금방 끝날 거 같아요.”

“금방 끝난다고? 아무리 그래도 인원이 인원인데. 정말 가능하겠나?”

“물론이죠. 비요른 님은 오래 자리를 비워서 잘 모르시겠지만……. 바바리안들요, 진짜 선천적으로 타고난 일꾼이에요. 어쩌면 전사 일보다 이쪽 일을 더 타고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뭐?”

바바리안의 부족장으로서 어딘가 버튼을 누르는 말이었지만, 이어진 결과물에 나도 납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일당백의 전사임을 증명하듯.

“베헬—라아아아아아아!!”

거대한 통나무를 기합 한 번 내뱉으며 들어 올린 뒤 혼자서 나르는 전사들.

“거기 가운데! 가운데 기둥을 잘 박아놔야 집이 단단하다! 우리 근육처럼!!”

심지어 성지에 자기 집을 짓는 게 유행이다 보니 건축 기술도 보유하고 있다.

뭐, 드워프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거기! 삐뚤어졌다!”

“귀찮은데 그냥 세워라!”

“좋다!”

이게 바로 태생의 한계일까.

특유의 장인 정신으로 야금술과 건축술에서 만인의 인정을 받는 드워프들의 디테일은 따라갈 수 없었다.

하지만…….

“빠르죠?”

“그렇군…….”

성지의 바바리안들 모두가 달려들자, 작업 속도가 미쳤다는 말로도 모자랐다.

이 추세면 며칠 만에 난민들을 수용할 수 있는 간이 오두막이 전부 다 완공될 거 같달까.

‘뭐, 날림으로 지어서 1년이면 무너질 거 같긴 하지만…….’

그래도 덕분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바바리안은 가성비가 좋구나……!’

아니, 그냥 좋다가 아니라 이 정도면 그냥 미친 수준이다.

매우매우 저렴한 노동력.

그럼에도 혼자서 몇 인분이 가능한 신체 스펙.

또한 무엇보다…….

‘불만이 없어.’

싼 값에 부려져도 그냥 그려러니 하는 긍정적인 마인드까지.

타고난 일꾼이란 샤빈의 말에 괜히 자존심이 상하거나 할 이유가 없었다.

그야 오히려 그 말조차 모자랄 지경이었으니까.

단언컨대, 바바리안 전사들은 이 시대 최강의 일꾼이었—.

“얀델.”

새로이 발견한 가능성에 소름이 돋아나던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로트밀러?”

“오랜만일세. 진작 찾아오려 했는데, 바빠 보여서 말이지.”

“네가 왜 성지에 있냐?”

진짜 궁금해서 물은 것인데, 로트밀러는 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눈빛으로 이렇게 되물을 뿐이었다.

“얀델, 자네였지 않은가. 성지의 어린 전사들에게 탐색 기술을 전수해달라고 한 건.”

“아…….”

그랬었지.

나도 참…….

“미안하다. 요즘에 일이 너무 많아서 잠시 잊고 있었다.”

“충분히 이해하니 그렇게 사과하지 않아도 되네. 이번에도 큰일을 여러 번 겪지 않았나?”

“그렇게 말해주면 고맙긴 한데……. 아무튼, 그럼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성지에서 지냈던 거냐?”

“특별히 도시에 용무가 있는 게 아니라면. 어린 전사들에게 내 기술을 가르치는 일도 나름 뿌듯하고, 적성에도 맞더군.”

“오, 정말이냐?”

“빈말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일세. 내가 가르친 기술 덕분에 미궁에서 살아 돌아오고, 또 내가 알려 준 게 도움이 됐다며 보답으로 돌빵을 줄 때면 어찌나 가슴이 벅찬…….”

그때 돌연 로트밀러가 말꼬리를 흐리더니, 약간 무안한 얼굴로 헛기침을 뱉었다.

“크흠! 아무튼 나쁘지 않은 생활을 보내는 중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그, 그렇군……?”

“아, 그리고 요즘에는 내 업무를 마치고도 조금 여력이 남아 행정 쪽 일을 돕는 중일세.”

“행정 쪽 일을……?”

“에무어 양이 많이 힘들어해서 말일세. 나이도 어린 친구가 고생을 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기 어렵기도 하고…….”

“응? 샤빈 에무어가… 어려……?”

“몰랐나?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린데. 아아, 물론 나이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말일세. 두 살 어리다곤 해도 나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룬 여인이기도 하고…….”

그리 말한 로트밀러는 어딘가 자조 섞인 웃음을 내뱉었다.

그 모습에 불현듯 머리에 벼락이 쳤다.

‘……샤빈이 결혼 준비 어쩌고 한 게 혹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무슨 사이냐고 묻는다거나 하는 눈치 없는 짓은 하지 않았다.

둘이 알아서 하겠지. 어린애들도 아니고.

“아 참, 얀델… 비프론 지역은 어떻게 됐는지 혹시 아는 게 있나? 다들 티는 안 내지만 불안해하고 있네.”

“그거라면 나중에 알게 되면 말해 주겠다. 지금 당장은 나도 아는 게 전무해서.”

“그렇군…….”

이후로 30분 정도 로트밀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수다를 떨고 있자니, 샤빈 에무어가 나를 찾아왔다.

“비요른 님……! 어? 로트밀러 씨도 계셨네요?”

“반갑소이다. 에무어 양. 어제 부탁한 측량 작업을 마치고 잠시 지나가는 길에 얀델과 만나서 담화를 나누고 있었소.”

“앗, 정말요? 측량이 벌써 끝났어요?”

“미룰 이유가 없지 않소. 에무어 양이 바쁜 건 나도 잘 아는데.”

“네에……. 항상 감사해요. 로트밀러 씨…….”

로트밀러의 말에 입을 가리며 아가씨 같은 미소를 짓는 샤빈 에무어.

‘쓰읍, 이거 진짜 뭔가 있는 거 같은데.’

전사로서의 직감이 말하고 있지만, 내가 관여할 부분이 아니기에 그냥 주제를 돌렸다.

“샤빈, 그래서 난 왜 찾은 거냐?”

“아아, 내 정신 좀 봐. 오전에 서신이 왔어요. 그것도 세 개나.”

“세 개나?”

일단 샤빈이 건넨 편지를 받아 확인하자 발신인이 제각각 달랐다.

“하나는 왕가, 하나는 멜베스, 하나는…….”

뭔지 모르겠네.

이게 대체 뭐지?

고민하던 차 박학다식한 샤빈 에무어가 설명을 곁들였다.

“그 인장은 종족 공문을 뜻해요. 아마 시기로 보아 내용은 종족 회담 참여 안내문일 가능성이 높고요.”

“종족 회담이라…….”

그러고 보니, 이런 이벤트도 있었다.

여섯 종족의 대표자들이 모여서 회담을 갖는 자리.

사실 진작에 한 번 갔어야 했지만, 의도치 않게 지하 1층에 오랜 시간 갇혀 있느라 불참하게 됐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회담이 열렸나?”

“아뇨. 안 열린 거로 알고 있어요. 원래 전원이 참석해야지만 자리가 만들어지는 게 전통이라고 들었거든요.”

“…그렇군.”

의문이 해결된 나는 나머지 편지들을 차례차례 뜯어서 읽어 보았다.

공교롭게도 모든 편지가 다 공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하나씩 짧게 정리를 해보자면 이랬다.

1, 왕실 회의 참석 권한 부여 안내서.

2, 멜베스 정기 집회 참가 요청서.

3, 종족 회담 동의서.

부족장에 작위 남작까지 겸업 중이라서 그런가?

이런 편지들을 받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고위 정치인이라도 된 기분이다.

…엄밀히 말하면 틀린 말도 아니겠지만.

“와아아…….”

이내 발신인들의 면면과 편지 내용을 확인한 샤빈이 감탄한 듯 탄성을 내뱉더니, 나를 보며 묘한 말투로 중얼거린다.

“확실히 이런 걸 보면 정말 대단한 사람인 건 맞는데…….”

뭔가 칭찬인 것 같으면서도 맥이는 듯한 뉘앙스.

“지금 뭐라고 했냐?”

“아뇨. 아무 말도요. 단지 이런 편지를 받는 사람이 제 앞에 있다고 하니 신기해서요.”

“…새삼스럽게.”

괜히 뭔가 멋쩍어진 나는 다시금 편지의 내용에 집중했다.

“그래서 어쩌시려고요?”

“어쩌다니?”

“세 곳에서 초대 비슷한 느낌의 편지가 왔잖아요. 전부 가실 거예요?”

“아무래도 그래야지. 전부 공적인 일이니까.”

“그럼 어디부터 가시려는 건데요?”

아, 그거.

그건 애석하게도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음, 어디 보자 가장 빠른 게…….”

이내 나는 편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게 가장 빠르군.”

이종족 귀족 연합회, 멜베스의 정기 집회 초청장이었다.

***

오랜만에 도시로 돌아온 만큼,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을 꼽아보자면, 역시 이것일 것이다.

원래 예정에 있던 퀘스트는 아니지만…….

[바바리안 성지에서 생활 중인 난민들을 이용해 돈을 버시오.]

난민들은 모두 내 가신이 되었다.

그리고 왕법하에 귀족 가문의 가신들은 투잡을 뛰며 돈을 버는 일이 불가능하다.

뭐, 알게 모르게 하는 건 가능하겠지만…….

안 그래도 왕가에게 꼬투리 하나 잡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와중에 8,712명 전부를 투잡 뛰게 할 수도 없는 노릇.

‘내년 세금을 내려면 어떻게든 이익을 창출해야만 하는데…….’

이게 가장 큰 문제다.

내가 사업체를 갖고 있던 대귀족이라면, 그들을 그곳에 투입시키는 식으로 일자리를 줄 수 있었을 테지만, 나는 그런 게 아니니까.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한 고민의 실마리는 놀랍게도 생존 신고나 하려 출석한 멜베스 정기 집회에서 얻을 수 있었다.

“아아, 다음 안건은 7구역 및 13구역의 재건 공사 수주에 관한 건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왕실에서는 총 세 개의 귀족 사업체를 선정해 재건 공사를 맡기겠다고 공표를 하였습니다.”

“…….”

“막대한 이익이 걸린 만큼 수많은 귀족 가문들이 수주에 참여할 것이 분명한 바, 저희 멜베스에서도 가문 하나를 선정해 뒤에서 조력을 하려고 합니다.”

“…….”

“해서 건축 관련 사업체를 여럿 소유하고 있는 골드비어드 백작가를 주축으로 수주 입찰에 참가하려 하는데, 이의가 있는 가문이 없다면 곧바로 찬반 투표를—.”

나는 조느라 끼고 있던 팔짱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의 있다!”

반드시 우리 가문이 따내야 한다.

35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35화 35

635화 재건 (4)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나며 이의를 제기하자 집회에 참여한 각 가문의 수장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이의… 말씀이십니까…….”

오늘 집회 장소의 제공자이며 사회자 역할을 맡은 마리블랙 자작도 당황한 듯 말꼬리를 흐린다.

그야 그럴 것이다.

처음엔 생존 신고를 하러 와서 온갖 관심과 질문 세례에 당했던 나지만, 전부 다 대충 대답해 주고서는 구석에서 졸고 있던 게 바로 나니까.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뭔가 싶겠지.

“왜? 이의를 제기하라 해서 했는데, 문제 있나?”

“아뇨……. 그렇진 않습니다. 우리 멜베스는 모든 가문의 목소리를 존중합니다.”

“그럼 잘 됐군!”

이내 진행자의 허락도 받았겠다, 나는 거침없이 내 의견을 밝혔다.

“골드비어드 백작가는 이번 공사 수주에 있어 적임자가 아니다!”

“예……?”

마리블랙 자작은 물론이고, 다른 가주들도 모두 괴상한 소리를 다 듣는단 반응이었다.

뭐, 당연하다.

골드비어드 백작은 32개의 가문 중 하나뿐인 백작일뿐더러, 멜베스의 부회주 같은 포지션이니까.

그것만으로도 멜베스를 대표하기에 모자람이 없는데, 건축 관련 사업체까지 여럿 소유했으니 이번 일에 적임자란 것엔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어… 그럼 혹시 얀델 남작께서는 이번 공사 수주에 참가하지 말자는 입장이십니까?”

“아니! 당연히 참가지! 떼돈 벌 수 있는 기회인데 그걸 왜 손가락 빨며 구경만 하나?”

“하면 이번 의제를 반대하신 이유가…….”

“반대한 이유라면 간단하다! 골드비어드 백작가도 나쁘진 않지만, 내가 보기엔 더 알맞은 최적임자가 있으니까!”

“더 알맞은 적임자… 그것이 누구입니까?”

진심으로 짚이는 바조차 없다는 듯 묻는 마리블랙 자작의 물음에, 나는 뻔뻔하리만큼 당당하게 엄지로 나를 가리켰다.

“바로 우리 얀델 남작가다!”

“…….”

“…….”

뭐야, 왜 다들 아무런 말이 없어.

이 타이밍엔 그 자신감의 이유가 뭔지 들어나 보잔 식으로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어쩔 수 없이 혼자 자기 PR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뭐, 이러고 있자니 초등학생이 반장 선거에 나가 열심히 떠드는 모양새이긴 하지만.

“얀델 남작가가 공사에 참여한다면 모든 바바리안 전사들이 함께할 거다. 너희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우리 바바리안들은 드워프보다 타고난 일꾼으로—.”

그래도 열심히 어필을 하려고 하는데, 그때 누군가 코웃음을 내지으며 말의 흐름을 끊는다.

“풋.”

누군가 해서 잘 살펴봤더니 난쟁이 하나가 의자 위에 매달려 수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번 수주의 경쟁자 골드비어드 백작이었다.

“…왜 웃지?”

“아, 미안하네. 내 바바리안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네만… 그냥 조금 말이 재미있어서.”

“그러니까 어디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집요하게 묻자, 골드비어드 백작은 잠시 당황하는가 싶다가도 이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상남자스럽게 나를 보며 말했다.

“딱히 건축 분야가 아니더라도.”

“…….”

“바바리안들이 우리 드워프보다 나은 점이 있을 리 없지 않나?”

허허…….

이런 망할 레이시스트를 봤나.

순간 머리가 하얗게 물들었지만, 화를 내면 지는 거란 생각에 애써 평정심을 지키고 입을 열었다.

“엥? 나은 점이 없다니? 키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드워프들이 태생적으로 바바리안들에게 비빌 수 없단 것쯤은?”

작은 키는 드워프들의 역린이었다.

뭐, 자기들 딴에는 다른 재주가 있으니 괜찮다고 합리화하는 듯하지만…….

그렇게 합리화 하는 것부터가 스스로 약점이라 생각한다는 증거.

“…하하, 신체의 크기가 전부였다면 어찌 여태껏 귀족이 된 바바리안이 아직 자네 하나겠는가?”

태연히 웃고는 있지만 자존심이 단단히 긁혔다는 것은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약점을 조금 더 긁어 줄 차례.

“오, 그것도 참 신기하군. 그렇게 옛날부터 잘 먹고 잘 살았는데 왜 아직까지 키가 안 큰 건지.”

“……허허.”

“아, 백작 혹시 너는 안 그러냐? 나는 아직도 가끔 고블린과 드워프가 헷갈린다. 둘 다 워낙에 키가 비슷하다 보니……. 아차, 너는 미궁에 못 가봐서 모르려나? 너네랑 고블린이 얼마나 비슷한지?”

“…….”

“저… 얀델 남작님? 조, 조금만 진정을 하시는—.”

“진정? 진정은 저기 백작이 해야 할 거 같은데? 지금 저기 수염이 막 파르르 떨리고 있는데.”

“…….”

“근데 갑자기 궁금한 건데, 드워프들은 왜 전부 다 수염을 기르는 거냐? 수염을 기른다고 키가 커지는 것도 아닌—.”

아까부터 말없이 수염만 파르르 떨고 있던 백작이 탁상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의 무례는 참지 않겠네!”

아, 물론 자리에서 일어났음에도 눈높이는 별 차이가 없었다.

‘어휴, 쯧쯧. 이래서 난쟁이놈들한테는 의자를 다 압수해야 한다니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혀를 차는 반면, 일단 남자답게 자리를 뒤집어 엎은 난쟁이를 보며 나는 태연하게 되물었다.

“안 참으면?”

“…….”

“안 참으면 어쩔 거지? 결투라도 신청할 건가?”

당연한 말이지만, 이 치트키나 다름없는 물음에 저 녀석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야만적이긴.”

그저 내 수준 낮음을 조롱하며 회피하는 것.

근데 이것도 조금 웃기긴 하다.

“왜? 그런 놈이어서 너희들이 날 데려온 거 아니냐? 다른 귀족 놈들한테 무시받을 때 냅다 들이받으라고?”

“그때도… 나는 반대했네.”

“엥? 그때 투표할 땐 분명 만장일치였는데?”

“그건 이미 그 전에 합의가—.”

“아, 혹시 너는 남들이 다 그러자고 하면 자기 의견도 못 내는 거냐?”

“…….”

“하긴, 키가 작으면 그만큼 간도 작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비꼬려던 차, 누군가가 성난 황소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얀델 남작—!!”

이번에는 아무리 나라도 노빠구로 들이받기 어려운 상대였다.

멜베스의 회주 자리를 역임 중인 할아버지였거든.

이름은 타쿠오 웰베어트.

종족은 흑곰족이며 작위는 자작이다.

단둘이서 대화를 나눠 본 적은 몇 번 없지만, 만날 때마다 사람 좋게 웃으며 좋은 말만 해줬던지라 인상이 좋게 박혀 있다.

실제로 토끼 남작에게 듣기로도 멜베스 내에서 굉장히 많은 존경을 받는다고 들었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맨날 조용히 웃고만 있다가 화내니까 장난 아니네.’

항상 구석진 자리에서 바지 사장처럼 자리만 지키고 있던 회주가 고함을 내지르자, 나뿐만 아니라 골드비어드 백작 역시 움찔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보며 회주가 열혈남아처럼 호통쳤다.

“절대! 잊지 마시오! 우리가 한곳에 모인 이유를! 우리는 언제나 하나로 뭉쳐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오!”

어우, 목청도 좋아라.

하긴, 흑곰족이라 몸집도 나랑 크게 차이가 안 나니까.

“의견의 다름? 좋소! 하지만 우리끼리 싸우는 꼴은 결코 좌시하지 않겠소! 알겠소이까?”

“…내 잠시 흥분을 했구려. 미안하네, 회주.”

“어찌 얀델 남작께서는 답이 없는 것이오까!”

“…자중하겠다.”

이내 나까지 한 걸음 물러서자 회주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다시금 자리에 앉아 평소처럼 온화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럼 아까 하던 말을 계속 이어가도 되나?”

나 역시 능청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던 말이라 하심은…….”

“아까 중간에 훼방꾼이 끼는 바람에 말이 끊기지 않았나. 왜 우리 얀델 남작가를 선택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었는데.”

“아, 예……. 그랬지요. 발언 이어가십시오.”

이내 나는 PPT까지 미리 준비해 왔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바바리안족이 어째서 최고의 노가다꾼인지.

가성비와 물량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했고, 비프론 주민 8,712명도 인력으로 투입할 수 있음을 말했다.

“흐음……. 바바리안 전사들이 그렇게 집을 잘 짓는단 말이오?”

“물론 드워프처럼 정교하고 튼튼하게 짓지는 못한다. 하지만 빠르지.”

이쯤에서 겸손의 말도 해주며 골드비어드 백작을 바라보자, 난쟁이가 겸언쩍게 기침을 내뱉는다.

표정을 보니 칭찬 자체는 나쁘지 않은 모양인데…….

“크흠, 우리의 작업 속도 역시 절대 느리지 않소.”

굳이 한마디 붙이는 걸 보니 얼마나 지기 싫어하는 성격인지 알겠네.

“아무튼, 이번 재건 공사는 광범위한 면적을 빠르게 수복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왕가 자체도 그걸 바라고 있을 테고.”

“그거야 옳은 말씀이시오.”

“그런 의미에서 말한 거다. 왜 내가 이번 재건 공사에 최적임자라고 했는지.”

“확실히… 일리는 있소이만…….”

브리핑이 끝난 후 사람들의 반응은 애매했다.

내 설득에 제법 혹한 사람들도 많은 거 같긴 한데,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의심하는 거 같달까.

실제로 누군가는 의심의 말을 꺼내기도 했다.

“그런데 아직 얀델 남작의 말뿐이지 않소. 그들이 그토록 공사 일에 소질이 있다는 것은.”

“그럼 아예 대결을 해보면 되지 않나? 드워프들과 바바리안들을 불러놓고 건축 일을 시키고 결과물을 보고 점수를 매기는 거지. 만약 내가 진다면 깔끔하게 결과에 승복하겠다.”

술집에서나 오고 갈 법한 그런 주먹구구식 제안에 진행자는 당황하며 골드비어드 백작을 보았다.

마치 의사를 묻는 듯한 눈빛.

다만 아까 하는 짓이나 키를 보고도 느꼈지만, 역시나 이 녀석도 어른이 되기엔 글러먹은 놈이었다.

“좋네! 한판 붙어보세!”

그렇게 결투가 성립됐다.

***

결투 당사자들의 합의가 끝난 후에는 자연스럽게 모든 인물들이 한 명의 눈치를 보았다.

바로 구석에 앉아 있는 회주였다.

아까 우리 말다툼을 하였던 우리가 실질적으로 대결을 한단 것에 회주가 어떻게 반응할까.

모두가 이를 걱정했지만, 의외로 나온 반응은 아주 유쾌했다.

“하하핫! 그래, 차라리 이런 식이 좋지 아무렴! 자리는 내가 조만간에 만들어서 연락을 주겠네. 대신 패자든 승자든 깨끗하게 승복하겠다 약속하게.”

“전사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지.”

“나 역시 내 망치를 걸고 맹세하겠소.”

오케이, 그럼 이제 이 문제는 끝났고…….

초반부에 나온 의제에서 오랜 시간이 끌렸던 만큼 진행을 맡은 마리블랙 자작이 다시금 집회를 이어나갔다.

“그럼 수주 관련 논의는 이상으로 마치며, 다음 의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사실 이들 입장에서 공사 수주 관련은 그렇게까지 중요한 의제가 아니었다.

그야 어차피 돈을 버는 일인 거잖아?

신생 가문인 우리야 이런 거에 목을 매지.

수백에서 많게는 수천 년 가까이 귀족가를 유지한 이들인 만큼, 다들 돈은 충분히 많았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의제는 이번 노아르크 침공 사태와 비프론 점거에 관한 자유로운 논의입니다.”

새 주제가 나옴과 동시에 모든 가주들이 표정을 굳히고 자세를 고쳐 앉는다.

조금 전 수주 관련 안건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진지한 태도들이었다.

“이 논의는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정세를 분석하고 유추하는 것에 있는 만큼 모두가 자유로이 발언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내 회의가 시작되자 묵묵히 자리만 지키고 있던 가주들이 열의 넘치는 목소리로 각자의 의견을 꺼냈다.

“노아르크 침공 사태에 대해서 왕가가 미리 알고 있었다는 정황이 있소이다. 이는 매우 신뢰도 높은 정보원에게서 얻은 것으로…….”

“이는 확실하지 않은 정보임을 미리 말합니다. 노아르크 측에서 비프론에 있는 수호 마법진을 건드렸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허어… 대현자의 유산을 그런 무뢰배들이 어찌…….”

끝이 분명하게 정해지지 않은 논의인 만큼 회의는 계속해서 길어졌고, 당연히 그동안에도 나에게 수많은 질문이 날아 들었다.

“혹시… 얀델 남작은 아는 게 없으시오?”

“맞소! 그 사태가 벌어졌을 때 가장 가까운 곳에 있지 않았소이까!”

“7구역도 비프론에도 가본 사람은 남작이 유일하오.”

그들은 내게 기대를 하는 눈치였지만, 애석하게도 나 역시 아는 게 별로 없었다.

노아르크와 왕가의 움직임이 수상하긴 했는데.

아무런 근거도 없이 여기서 꺼내기에는 조금 그렇지 않은가.

“나도 잘 모른다.”

솔직하게 아는 게 없다고 말하자 실망을 금치 못하는 가주들.

다만, 그들도 어느 정도 납득하는 눈치였다.

“흐음, 그렇구려…….”

“하긴… 남작이라고 해서 뭔가 알고 있을 리가 없겠지.”

“분명 이번 왕실 회의에서 이 주제가 나올 텐데, 그쪽의 정보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겠구려.”

“하지만 결국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건 사소한 이야기들뿐이지 않소. 진짜 중요한 정보들은 우리에게까지 흘러 들어오지 않는단 말이오.”

“결국 또 이번 사태로 얻을 수 있는 과실은 그들이 독점하겠지.”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돌연 분위기가 어두워지며 다들 분한 표정을 내짓는다.

이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어… 그거라면 내가 며칠 뒤에 말해주지 못할 것도 없는데……?”

한데 내 말을 들은 가주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요, 얀델 남작?”

“말 그대로다.”

“하하, 말 그대로라니? 뭐 얀델 남작께서 왕실 회의의 참석 권한을 얻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구려?”

“어, 그랬는데?”

딱히 숨길 일도 아닌지라 그냥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한데, 이들에게는 그냥 스쳐 들을 수 없던 이야기였을까.

“…….”

“…….”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뭣이?!”

“남작! 그, 그게 사실인가?”

“……맙소사! 멜베스에서 왕실 회의에 참석 권한을 얻은 자가 나오다니!”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럽게 변했다.

“이거… 거의 600년 만 아니외까?”

얘네들은 무슨 몇 백년 동안 못 해본 게 이렇게 많은 거야?

솔직히 조금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지만…….

“남작! 남작! 말해보시오! 대체 어떻게 권한을 얻은 것이오?”

“지하 1층! 지하 1층 탐사 때문인가?”

“아니, 어쩌면 7구역의 탐험가들을 구출해 낸 공적 덕분일지도 모르오.”

타고난 승부사로 태어난 전사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남작! 뭐라도 말해—.”

“목이.”

“……응?”

“갑자기 목이 마르군. 시원한 거 뭐 없나?”

지금부터는 내가 갑이다.

49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36화 49

636화 재건 (5)

왕실 회의.

도시의 내로라하는 귀족, 그리고 현대로 치면 장성급 군인들이 참여하여 진행되는 이 회의에서는 왕국을 이끌어 갈 정책들이 수립된다.

사실상 귀족 권력의 핵심부라 볼 수 있는 곳인 셈.

당연한 말이지만, 들어가기가 엄청나게 어렵다.

이전에 라그나 페프로크 여백작이 귀족계에서 이목을 끌었던 것도 그래서였고.

기반이 없는 귀족가가 그렇게 단기간 내에 왕실 회의의 의석을 차지하는 일은 전례가 없었다.

뭐, 결국 그 뒷배에는 재상이 있었다마는.

아무튼.

‘멜베스에 왕실 회의 참여자가 한 명도 없을 줄은 몰랐네.’

솔직히 32개의 가문이 모인 멜베스 정도라면 한 자리 정도는 차지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설마 그게 아닐 줄이야.

어쩌면 이것도 은연중에 깔린 이종족 차별일지도 모르겠다.

아, 물론 나로서는 잘된 일이었지만.

“…….”

“…….”

목이 마르다는 내 물음에 조용해진 회의실.

모두가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구석에 있던 한 귀족이 입을 열었다.

“이보게, 나가서 차 한 잔 타오라고 전할 수 있겠는가? 빨리 시원해지게 얼음 좀 많이 띄워서.”

본인이 을임을 인정하는 의미를 담은 말과 행동.

그것으로 상황은 확실하게 정리됐다.

그야 말을 꺼낸 대상이 회주였거든.

“예? 아, 예… 회주님.”

회주 옆에 있던 남작 한 명이 회의실 밖으로 나가 사용인들에게 새로이 주문을 넣고 돌아왔다.

그리고…….

“저쪽에다가 놔주게.”

어찌나 사용인을 달달 볶은 것인지 정말이지 눈 깜짝할 사이에 얼음이 띄워진 차 하나가 내 앞에 놓여진다.

이 시대의 아이스 티였다.

PC방에서 먹던 달달한 그것과는 큰 차이가 있긴 하지만.

‘나쁘지 않네.’

한 입 크게 들이마시며 향과 시원함을 즐기고 있자니, 회주가 대표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자, 그럼 말해보시겠소이까?”

“음… 갑자기 그래도 뭘 먼저 말해야 할지를 잘 모르겠는데.”

“그러면 우선 이것부터. 남작, 왕실 회의에 참석 권한을 얻었단 게 사실이외까?”

“사실이다. 성지에서 쉬고 있는데 얼마 전에 성지로 이런 편지가 날아오더군.”

내친김에 보관 중이던 서신을 꺼내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자 사람들의 표정이 한 번 더 격동했다.

물론 이 중에서 내가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겠지만…….

“정말이군…….”

“왕가의 인장이 찍혀 있소이다.”

“자리를 보니… 아직은 말석이긴 하지만 말이오.”

그럼에도 증거를 직접 두 눈으로 보면 느낌이 조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묻고 싶은 건 이게 끝이냐?”

얼른 질문을 해보라는 말을 바바리안식으로 고쳐 꺼내자, 회주는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남작께서는 왕가의 손을 잡기로 한 것이오?”

“이상한 질문이군. 손을 잡고 말고가 뭐 있나? 우리는 모두 왕가의 신하인데.”

전혀 마음에 없는 말이었다.

근데 저런 식으로 물어보면 나도 할 말이 이것밖에 없잖아?

이내 회주 본인도 실수를 인지했는지, 얼른 질문을 고쳤다.

“…그러면 다시 묻겠소. 무례한 질문이라는 건 잘 알고 있으나…….”

“괜찮으니 해봐라.”

“남작께서는 이번에 도시 복귀 후 왕가와 따로 만나 어떠한 약속을 받으셨소?”

회주가 뭘 걱정하고 이런 질문을 하는지는 암만 눈치 없는 바바리안이라도 알 수 있었다.

인재 유출을 걱정하는 것이다.

내가 멜베스를 버리고 메인 스트림인 왕가의 심복이 되는 건 아닐까 불안불안했겠지.

이렇게 모두 앞에서 그 불안감을 표할 정도인진 몰랐지만.

“…왜 그렇게 생각했지?”

“오늘 회의에 참가하고 나서도 그랬지 않소. 의뢰 보수를 지급하고 지하 1층의 정보를 듣고 싶단 말에도 나중으로 미루기만 하였고.”

아, 그거…….

‘확실히 얘네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였겠네.’

나는 딱히 멜베스를 버리고 새 둥지를 찾을 계획이 없다.

이 집단의 성향 자체가 마음에 들기도 하고.

알게 모르게 배척받는 이종족들이 모인 집단이란 특징도 내게 있어 굉장히 유리하다.

다만 그럼에도 지하 1층 탐사에 대해 말을 아꼈던 건, 나중에 왕가 쪽과 어떠한 딜을 할지 모르니까 그런 거였다.

“뭔가 오해를 산 거 같으니, 이 자리에서 딱 잘라 말하겠다. 나는 왕가와 어떠한 약속도 맺지 않았다.”

“그럼 왕실 회의는……?”

“모른다. 그냥 언질도 없이 날아온 거라.”

이건 진짜다.

서신이 날아오기 전에 후작에게서 뭔가 따로 연락이 온다거나 하는 것은 일절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내 말을 믿어 준 것일까.

“그렇구려…….”

“궁금증은 해결됐나?”

“그렇소. 처음엔 걱정을 했소이만, 이제 보니 그저 왕가에서도 인정한 듯싶구려.”

“무엇을?”

“남작이 이미 도시 정세의 요추라는 것을.”

그리 말하며 나를 바라보는 회주의 눈빛은 뜨겁단 말로도 모자랐다.

이전까지 볼 수 없던 열정이 묻어난다 해야 하나?

절대 나를 놓치지 않겠다, 이런 의지가 엿보였다.

‘조금 부담스럽긴 한데…….’

냉정히 따져봤을 때, 굉장히 긍정적인 상황이다.

멜베스에 속한 다른 31개의 가문이 뒤에서 나를 든든히 받쳐 주는 것.

그게 멜베스에서의 이룰 수 있는 최종 목표—.

“그렇군.”

한데 그 말과 동시에 회주의 눈빛에 어려있던 열정의 불꽃이 확 식었다.

“질문은 여기서 끝이네. 마리블랙 자작, 논의를 마저 이어가게.”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이후 회주의 말에 진행자가 대화를 주도했고, 다들 나와 회주의 눈치를 보면서 소극적으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하나 그럼에도 회주는 이번 집회가 끝날 때까지 더 이상 내게 어떠한 말도 시선도 건네지 않았다.

‘…뭐지? 밀당이라도 하려는 건가?’

그 강렬한 눈빛을 잠시나마 받았던 나로서는 조금 떨떠름한 상황.

다만 회주가 애써 그 감정을 절제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그럼 본 집회에 귀한 발걸음을 옮겨 주신 가주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본 집회는 이것으로 마무리…….”

집회가 완전히 끝나고 이제 나도 슬슬 일어나볼까 싶던 차.

“남작은 잠시 남아주실 수 있겠소?”

“……?”

“마리블랙 가문의 차가 참 괜찮다오.”

잠시 얘기하자는 뜻을 지닌 귀족식 화법.

“뭐, 그러지.”

긍정의 답을 해주고 기다리자 집회에 참가했던 귀족들도 눈치껏 인사말을 생략하고서 회장을 떴다.

그리고…….

“차는 준비가 되는 대로 다시 올리겠습니다. 편히들 계시지요.”

이내 오늘 집회가 열린 저택의 주인인 마리블랙 자작마저 회장을 떠나며 독대 자리가 만들어진 순간.

“얀델 남작.”

회주의 눈빛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머리가 히끗한 나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 강렬한 욕망의 눈빛.

다만, 그런 감정을 숨김 없이 드러내면서도 목소리 하나만큼은 차분했다.

“얀델 남작은 멜베스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오?”

음, 시작은 간보기구나.

“그냥 좋은 곳이라 생각한다. 사람들도 괜찮고.”

“골드비어드 백작과 충돌이 있었는데도?”

“사람과 사람이 만났는데 어떻게 안 부딪칠 수가 있나? 다들 그러면서 지내는 거지. 딱히 그 일이 있었다고 백작이 싫거나 하진 않다.”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이구려.”

회주 쪽에서도 간을 한 번 봤으니, 이쪽에서도 한 번 발끝으로 두드려 볼 차례였다.

“회주, 너는 어떠냐?”

“……?”

“넌 멜베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냔 뜻이었다.”

내 물음에 회주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들었다는 듯한 표정을 내지었다.

“허허, 멜베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라…….”

회주는 이걸 어찌 대답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듣고 있던 바바리안조차 당황할 정도로 허심탄회하게 답해주었다.

“오합지졸이라고 생각하오.”

“……뭐?”

멜베스의 회주가 뱉은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파격적인 워딩.

“왜, 항상 하던 우리는 해낼 수 있다. 뭉치면 그 어느 누구보다 강하다. 그런 긍정적인 말을 바랐소?”

“그런 건 아닌데…….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답할 줄은 몰랐다.”

“사실 나 역시 이렇게 속내를 털어놓는 것은 얀델 남작이 처음이라오. 그 누구에게도 이런 말은 할 수도 해서도 안 되니.”

늘 사람 좋게 웃음 짓던 회주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보는 그늘이 져 있었다.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가 많았던 모양.

“그래서 오합지졸이란 건 정확히 무슨 의미냐?”

“말 그대로지 뭐 달리 있겠소? 수천 년이 지나도 이종족 귀족가는 늘지 않고, 정통 가문들은 날이 갈수록 위세가 커지고 있소. 남은 자들끼리 머물 곳이 없어 뭉치기는 했지만, 진실로 하나가 된 것도 아니지.”

회주는 한풀이하듯 억눌렀던 감정과 말들을 빠르게 토해냈다.

“무엇보다 다른 세력들과 우리들의 가장 큰 차이가 뭔지 아시외까? 바로 중심이 될 구심점이 없다는 것이오.”

“그거라면 회주 네가 하고 있는—.”

“남작이 보기에는 정말로 그런 거 같소?”

음, 글쎄…….

확실히 존경받고 그런 거 같긴 한데……. 이 할아버지가 뭐라 비전을 제시하며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고 했을 때, 31개 가문이 모두 다 자기 일처럼 따라줄 거 같지는 않다.

“…….”

그래서 그냥 입을 꾹 다물고 있자니, 회주가 피식 웃었다.

“지금 상태에선 가문들의 연대가 더욱 끈끈해지고 하나하나의 세력들이 커진다 해도 오합지졸이란 건 변하지 않을 것이외다.”

“아까 말했던 구심점이 없기 때문에?”

“바로 그렇소.”

옥수수 알이 아무리 많이 늘어난다 하여도, 열이 가해지지 않으면 영원히 팝콘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

이제 나도 회주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슬슬 알 것 같았다.

“사실 우리 멜베스는 얀델 남작을 품기에 아주 좁은 둥지일 것이라오.”

“…글쎄,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 한 명뿐일 거 같은데?”

“허허, 다들 내심 알고 있을 것이오. 사사로운 마음 때문에 아직 인정하지 못하고 있을 뿐.”

“그렇다기엔 난 아직 가문의 부지조차 없다.”

“하지만 이 도시 그 어느 누구보다 많은 가신들을 보유하고 있지. 내가 본 얀델 남작은 둥지를 찾는 새가 아니오. 둥지를 짓는 새이지.”

그리 말한 회주는 날 띄워주는 말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갔다.

“얀델 남작은 한 종족의 부족장이자, 작위 남작이오. 또한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탐험가 중 한 명이기도 하며, 소문에 따르면 이 세계의 최강자들과 자웅을 겨뤄도 모자람 없는 실력자이기도 하오.”

어… 틀린 말은 하나도 없긴 한데…….

“한데 얀델 남작께서는 본인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같소. 작위를 뺀다면, 과연 31개의 가문 중 어느 누가 하나라도 갖고 있을 거 같소?”

“…알겠으니 금칠은 그만하고, 하고 싶은 말을 해라.”

“멜베스에 합류한 지 얼마 안 된 남작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우습다는 건 나 역시 알고 있소. 하나 이 기회를 놓친다면 분명 수천 년 동안 또 무의미하게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겠지.”

이내 회주가 불타오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남작, 우리 멜베스의 구심점이 되어주시오.”

예상보다 훨씬 이르기는 했지만, 내가 원하던 최종 목표였다.

용의 꼬리가 될 바엔 뱀의 머리가 되어 이무기로 성장해 보겠다.

애초에 그 생각으로 다른 세력들의 오퍼를 무시하고 멜베스에 정착한 것이니까.

하지만, 일단 이것부터 물어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회주, 너의 소망이 뭐냐? 멜베스를 키워서 뭘 어쩌고 싶은 거지?”

사람을 상대할 때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하는 중요한 질문이었다.

이 사람이 바라는 소망이 무엇인가.

내 질문을 들은 회주는 너털웃음을 내짓더니 일말의 고민도 없이 즉답했다.

“내 소망은 언젠가 버르장머리 없는 인족 출신 귀족놈들을 보며 말하는 거요. 연약한 인족이면 인족답게.”

“…….”

“까불지 말라고.”

이 할아버지, 생각 이상으로 과격했구나.

***

본인의 극단적이면서도 급진적인 성향을 오픈한 회주 할아버지는 나에게 여러 가지를 제시했다.

“내 제안에 응한다면, 우리 멜베스, 그리고 우리 웰베이트 자작가는 얀델 남작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지원할 것이오.”

“전폭적인 지지란 말보단 구체적인 걸 듣고 싶은데.”

“이번 수주를 얀델 남작가에 맡기는 건 물론, 가문 부지를 구매하고 저택을 짓는 것도 도울 것이오.”

“그리고?”

“표를 던질 일이 있다면 31개의 가문 전부가 얀델 남작가가 던지는 곳으로 던질 것이며, 그외에도 얀델 남작이 하려는 일에 방해되는 것이 있다면 모두가 힘을 합쳐 방해되는 것을 치울 것이오.”

오, 이건 좀 많이 든든—.

“다만, 조건이 하나 있소.”

에이, 어쩐지 너무 올인을 하더라니.

나는 실망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조건에 대해서 물었다.

그리고…….

“조건이 뭐냐? 말해봐라.”

“상대가 어느 누구든 좋으니…….”

이어진 말에 일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혼사를 치르고, 얼른 후사를 보시오.”

……이런 조건은 예상치 못했는데.

48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37화 48

637화 정략 (1)

혼사를 치르고 후사를 보아라.

그 조건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평정이 깨졌지만, 생각해 보면 회주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충분히 꺼낼 수 있을 만한 조건이었다.

“얀델 남작이 몇 년간 이뤄낸 것은 그 어느 영웅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대단한 것이라오. 그건 나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소. 하지만.”

잠시 말을 멈춘 회주 할아버지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것은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지.”

얀델 남작가에는 아직 후계자가 없다.

쉽게 말해, 내가 죽는 순간 우리 남작가는 몰락 귀족가로 전락한다.

내가 듣기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야 나는 자식은 물론 친인척조차 없으니까.

“만약 지금 남작이 잘못된다면, 얀델 남작가는 그날부로 사라질 것이외다. 남작이 소유한 대부분의 것들이 국고로 환수되겠지.”

나를 본격적으로 밀어줄 계획을 구상 중인 회주 할아버지로서는 아무래도 가장 우려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최소한의 리스크 관리라 해야 하나?

내가 잘못된 순간 모든 계획이 크게 어그러지는 건 틀림없을 테지만, 그래도 남작가만 유지할 수 있다면 소속 가문의 숫자가 중요한 멜베스 입장에선 그나마 손실을 줄일 수 있는 것인데…….

“……당장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한다면?”

“하면 아쉽게도 이 제안은 보류해야 할 것이외다. 이 정도의 조건조차 성립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다른 가문들을 설득하는 것은 무리니.”

슬쩍 찔러나 봤는데 예상보다 강경한 답변이 즉시 돌아온다.

밀고 당기기를 하는 느낌은 전혀 아니었다.

“하나 그럼에도 우리 웰베이트 자작가는 남작을 지원할 것이오. 하나… 조금 전에도 말했듯 멜베스 전체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것은 한참 나중 일이 되겠지.”

“…그렇군.”

일단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회주 할아버지가 어르고 달래듯 말을 덧붙였다.

“또한 후계자는 바바리안이 아니어도 상관없소. 멜베스의 특성상 되도록 인족은 아니었음 하지만……. 그것까지 강제할 생각은 없소이다. 남작가 전체가 왕가로 넘어가는 일을 피하는 것이 급선무이니.”

해석을 하자면, 내가 정할 결혼 상대는 바바리안이 아니어도 좋다는 뜻.

“아, 물론 동족의 여인을 배필로 맞이하는 것이 최고의 선택이기는 하외다. 첫 아이가 피를 제대로 물려받아야 후사를 여럿 뒀을 때, 후계 다툼이 적을 터이니.”

머리가 히끗해질 때까지 귀족계에서 살아온 할아버지란 걸 알아서일까?

이런 말을 듣고도 오지랖을 부린다거나 하는 생각보단 정말 이성적인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피어난다.

하지만…….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제안을 받아들이겠단 뜻으로 알아들어도 되는 것이오?”

“생각은 해보겠다는 뜻이었다.”

언제든 도망칠 구석이 가득한, 바바리안답지 않은 회피형 화법.

“그렇구려.”

다만 회주 할아버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지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 상대가 없는 거라면 우리 가문의 손녀를—.”

거, 이 할아버지가 어디서 또.

“됐다.”

“수인족이 별로라면 다른 가문의 여식을 알아다 봐 줄 수도 있소이만…….”

“그러니까 됐다고 하지 않냐.”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하자, 회주 할아버지의 눈빛이 의미심장해졌다.

기대와 다른 답변에 실망한 눈빛과는 달랐다.

“상대가 있는 거구려? 제안을 들었을 때, 이미 마음속으로 생각해둔.”

이내 회주 할아버지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그것이면 충분하외다.”

……역시 연륜은 무시할 게 못 되는구나.

***

결혼 이야기가 일단락 지어진 후.

하나의 주제가 마무리 될 때를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며 사용인이 차를 내왔고, 우리는 차를 마시며 다른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남작, 혹시 7구역에 건축 중이던 얀델 남작가의 상태는 확인해 보셨소?”

“……봤다.”

다시 떠올려봐도 아주 끔찍한 현장이었다.

지붕까지 멋들어지게 올라간 게 한눈에 봐도 완공되기 직전이었거든.

처참히 박살 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어쩌다 보니 입주일이 또 밀린 셈인가…….’

대체 우리 얀델 남작가는 언제쯤 완성이 될까?

왠지 또 까마득해지지만,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첫 설계대로 완공됐다면 지금 상태에선 굉장히 비좁았을 테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근처 부지를 좀 더 사는 편이 좋겠구려. 의도치 않게 식구도 늘었으니.”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근데 애초에 아까도 내게 부지가 필요한 걸 알아서 땅을 사주겠단 약속을 꺼낸 거 아니었나?”

“허허, 얀델 남작의 생각은 읽는 게 쉽지 않아서 말이오. 확실하게 듣고 싶었소이다.”

“다음부터는 그냥 속 시원하게 물어봐라. 그러면 서로 편하니까.”

“오, 그렇다면야. 부지는 얼마나 넓기를 바라시오? 이 시국이라면 아주 합리적인 가격에 부지를 매입할 수 있을 듯하오만.”

이후로는 잡담을 나누듯 사소한 사항들을 의논하고 조율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생각이 정리되면 최대한 빨리 전해주시오. 성대히 혼사를 올리려면 준비할 것들이 많으니.”

회주 할아버지와의 독대를 끝마치고 나와 마차를 타고 성지로 돌아가며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결혼이라…….”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주제였다.

아니, 정확히는 몇 번인가 생각은 해보았지만 내 주제에 가당키냐 하냐며 생각을 끝냈던 주제였다.

물론 언젠가 딱 한 번, 정말 진심으로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결국 끝내 마무리는 좋지 못했다.

“하아…….”

머리가 복잡하다.

가슴이 답답한 건 아닌데, 어째선지 자꾸만 한숨이 나온다.

언젠가 넘어야 할 큰 산을 눈앞에 둔 것 같달까.

결혼, 결혼, 결혼.

뜬금없는 타이밍에 회주가 내게 남기고 간 그 두 글자의 단어가 자꾸만 뇌리에 맴돈다.

덜컹.

흔들리는 마차 위에서도.

“부족장이다! 부족장이 돌아왔다!”

전사들의 환대를 받으며 돌아온 성지에서도.

“…………해서 비프론 주민들은 잘 정착했고, 아직 별다른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어요. 다만, 그 많은 노동력을 놀게 두는 건 낭비인 거 같아서 내일부터는 성지 내 각종 작업들에 동원할까 생각 중인데 괜찮을까요?

사무실에서 행정사무총장의 업무 보고를 듣는 동안에도.

그리고…….

“헤헤, 아저씨. 이것도 더 드셔보세요.”

“고맙다.”

“…어때? 오늘은 레몬즙을 평소보다 좀 더 많이 넣어봤는데, 입에는 좀 맞아?”

“맛있다.”

“표정이 좋지 않군. 그곳에서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없었다.”

동료들과 모여 식사를 하던 그 와중에도.

자꾸만 그 두 글자가 목에 박힌 가시처럼 걸린 나는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결혼이라…….”

대체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하는 게 맞는 걸까,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할까.

정략혼을 한다든가 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자꾸 그런 생각이 든다.

“……!!”

“……?!!”

“……??”

어차피 지구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면.

그래서 이 세상에 계속 남아 살아갈 생각이라면.

결국 나도 언젠가 누군가와 결혼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자식도 보고, 손주도 보고. 오순도순 평생을 그렇게 살면—.’

음, 역시 그런 것도.

“…나쁘진 않으려나.”

나도 모르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은 때였다.

불현듯 정신을 차려보니, 어째선지 실내에는 이질적인 정적이 깊게 내려앉아 있었다.

“…….”

“…….”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진 않았다.

누군가는 멍하니 숟가락을 쥔 채로 굳어 있었고, 누군가는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히끅!”

또한 누군가는 사레가 들린 듯 딸꾹질을 뱉기도 하였으며—.

“………오?”

그 와중에도 음식물을 열심히 오물거리던 누군가가 목 안으로 꿀꺽 삼키고 알 수 없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비요른 얀델.”

“응?”

“…조금 전에 뭐라고 했지?”

재생 버튼을 누른 듯 잠시간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흘러간다.

“겨, 결혼! 결혼이라고 해, 했당?!”

어느새 내게 모인 시선 속엔 의문이 가득했다.

“나, 나쁘지 않다고도 했어요!”

뒤늦게 혼잣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나는 뭐라 답할지 할 말을 잃었고, 그때 옆에 있던 아우옌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확실히 짝을 찾으실 때이시기는 하시지요. 아니, 오히려 도시 모든 사람들이 왜 하지 않는지 의문을 가질 정도입니다. 한데…….”

“한데?”

“갑자기 그런 얘기를 꺼내심은… 혹시 사모님 되실 분이 생기신 건지요?”

총대를 메는 듯한 직접적인 질문에 같은 식탁에 앉아 있던 모든 이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뭐, 이해 못할 건 아니다.

세상 일이 어떻게 될진 몰라도, 지금 당장 우리들은 운명 공동체나 다름없는 관계였으니.

그래, 그러니까…….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낫겠지.’

나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탁자에 내려놨다.

그리고 조용히 숨을 가다듬은 뒤, 멜베스에서 들은 제안을 얘기했다.

사실 별로 길게 얘기할 것도 없었다.

혼사를 치르고 얼른 후사를 보아라.

그럼 멜베스 전체를 동원해 얀델 남작가를 도와주겠다.

혼인 상대는 바바리안이 아니어도 괜찮다.

이렇게 겨우 몇 줄로도 정리가 가능한 제안.

다만, 이를 들은 동료들의 반응을 정리하는 것은 수십 줄로도 모자랐다.

“아… 그, 그래서 그, 그랬구낭?”

“……늙은이가 주책을 부렸을 뿐인 이야기군.”

“그, 그래서요? 아저씨는 어쩌시려고요? 어쩔 수 없이 상대가 필요한 거라면…….”

“오오! 비요른의 아들이라니! 분명 엄청난 자질을 갖고 있을 테지! 내가 훌륭한 전사로 키워 주겠다!”

“아이나르, 그게 무슨 뜻이지?”

“네. 그냥 흘려들을 수 없네요. 아이나르 씨가 아저씨의 아들을 키우겠다니요?”

“응? 대체 뭐가 문제냐? 비요른의 아들이면 내 자식이나 다름없는데.”

“아니, 그러니까……!”

“그, 그만들 해랑! 아무래도 얘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 거 같으니까!”

“하아…….”

혼란스럽다는 말로도 모자란 상황.

다만 그 상황은 전혀 의외의 곳에서 진정됐다.

음… 엄밀히 말하면 진정이 아니라 잠시 소강 상태에 돌입했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그 제안을 승낙한 거냐……?”

아멜리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순간 장내가 조용해진다.

“…….”

“…….”

“…….”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게 익숙한 레크레이션 강사라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할 만큼 밀도 높은 집중.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이번에도 솔직히 답했다.

“일단 생각은 해보기로 했다.”

“……새, 새, 생각만?”

“어, 그래 생각만.”

“……근데 왜? 왜 생각만 하려는 건뎅?”

다시 생각해도 참 괴상한 질문이었다.

거, 바바리안이 자웅동체인 것도 아니고.

“그야…….”

“……그야?”

“상대방의 동의도 필요할 거 아니냐!”

그냥 홧김에 내지르듯 한 말에 한 번 더 식탁 위에 기묘한 정적이 내려앉는다.

1초, 2초, 3초.

그 침묵이 얼마나 더 이어졌을까.

“그… 그러면 앞으로 동의를 구하시겠다는 뜻인 겁니까……?”

“어…….”

“그… 제, 제 오해일 수도 있습니다만! 조금 전에 하신 말씀이… 마치 정해둔 상대방이 있다는 것처럼 들렸던지—.”

아우옌의 질문을 받음과 동시에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도 그럴 게, 전사로서의 삶이 내게 알려 주었다.

영리한 전사는 싸울 장소를 스스로 택해야 한다.

따라서…….

“배가 부르니 잠이 오는군!”

“…예?”

“나는 이만 자러 가보겠다!!”

바바리안식으로 안전한 내 방으로 돌진.

이후 곧장 방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에 누워 이불로 몸을 둘둘 감싸자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동료들에게 헐레벌떡 도망치는 모습을 보여 준 것이 조금 창피하기는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어떤 역경이라도 헤쳐 나가는 것이 전사이고.

아무리 솔직함이 미덕인 바바리안이라고 한들.

유교 정신을 영혼에 새긴 K-바바리안으로서 어찌 말하겠는가.

[상대가 있는 거구려? 제안을 들었을 때, 이미 마음속으로 생각해둔.]

암, 이건 절대 아무한테도 못 말한다.

‘정신 차리자, 한수야…….’

떠오른 게 한 명이 아니었다고는.

41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38화 41

638화 정략 (2)

결코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내진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이야기 속 영웅처럼 늘 정답을 찾아가며, 모든 역경을 멋지게 이겨냈다는 뜻은 아니다.

항상 최선을 다했으나, 후회할 거리는 늘 남았다.

나는 부족하고 완전하지 못한 평범한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 절대로 부끄럽지 않다.

하지만…….

“하아…….”

오늘만큼은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회주의 제안을 듣고 어째서 여러 명의 얼굴을 동시에 떠올린 걸까?

‘진짜 내가 미친 건가?’

나도 나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한참 동안 이불 속에 틀어박혀 생각을 해봤다.

‘미샤 칼스타인.’

뭐, 얘는 떠오르는 게 당연한 거 같다.

이 세상에 와서 그 누구에게도 벽을 넘고 다가가지 못하던 때 처음으로 정을 주고받은 사람이니.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

다만 에르웬의 경우엔 미샤와 조금 다르다.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미안함이 남아 있지만, 그 감정은 남녀 간의 그것과는 명백히 다르달까.

단지 얘가 나한테 가진 감정을 알기 때문에 ‘결혼’ 얘기가 나왔을 때 떠올랐을 가능성이 높다.

왜 가끔 그런 사람도 있지 않은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보다는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을 선호하는.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참 아이러니하게도, 약탈자 시절에 적으로 처음 만났던 아멜리아는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을 통틀어 가장 믿음직한 사람이다.

어느 상황에서도 든든하고 의지가 된달까.

그런 주제에 솔직히 말해 귀여운 모습도 있고.

다만, 문제는…….

‘왜 얘네 셋이 끝이 아닌 건데.’

레이븐, 현별이, 라그나.

그리고 아이나르—.

‘아니, 얘는 그냥 친구지.’

앞선 셋에 비하면 한참 짧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얘네들도 잠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친절하게 웃어만 줘도 손주 이름까지 상상하는 사춘기 소년처럼, 그들 하나하나와의 결혼 생활을 추상화처럼 그렸다.

놀랍게도, 그 어느 누구와 이어져도 즐거운 생활이 날 기다리고 있을 거 같았다.

‘……미친놈인가 진짜?’

나도 나 자신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그야 난 그들 모두와 이어지고 싶단 생각이 없다.

귀족이 되었기에 제도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나 스스로가 그러고 싶지 않다.

한데, 그럼에도 그때는 어째서 여러 명의 얼굴이 동시에 떠오른 걸까.

오랜 시간 고민에 잠겨 있던 나는 제일 정답에 근접한 듯한 답을 찾아냈다.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아직 나는 그 누구에게도 확실한 마음을 갖지 않았다. 미샤와의 일이 있은 후, 이런 쪽의 감정은 최대한 억누르고 묻어두었으니까.

그런 상황에 갑자기 결혼 얘기를 꺼내면 일단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먼저 떠올리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내 주변에 여자라고 하면 얘네가 전부잖아?

‘암, 내가 이상한 게 아니지.’

타인의 눈으로 본다면 합리화에 불과할지 몰라도, 일단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마음은 편해졌다.

따라서…….

드르렁! 드르러러렁!

나도 모르게 잠에 들고 일어난 다음 날 아침.

아무도 모르게 부족장 천막이 있던 곳에 세워진 건물(신축)을 몰래 빠져나갔—.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군.”

어…….

“하하, 산책 좀 할까 해서…….”

어색하게 웃으며 주변을 쓱 훑어보고 있자 아멜리아가 실소를 내뱉었다.

“걱정 마라. 다른 애들은 근처에 없으니까. 너를 기다리겠다는 걸 잘 설득해 다 돌려보냈다.”

“어어… 그러냐……?”

“언젠가 제대로 대답은 해야 할 거다. 모두가 네가 어떤 결정을 할지 궁금해하고 있으니까.”

아멜리아는 그 말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말이 끝나자마자 쿨하게 등을 돌렸다.

아, 쿨하게는 아닌가?

“그리고… 오늘 어디를 가려는진 모르겠지만, 너무 늦지 않게는 돌아와라. 외박을 할 거면 미리 연락을 주고.”

시크하게 돌아가다가도 잠시 걸음을 멈춰 세우고 저런 말을 하는 게, 마치 잔소리하는 엄마 같다.

뭐, 이것도 얘의 매력 중 하나일 테지만.

‘하… 결혼 얘기를 어쩌다 식탁에서 꺼내서…….’

이래서 사람이 평소에 입조심을 해야 한다.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을 수 있단 말은, 그 반대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뜻이었으니.

“부족장이다!!”

“부족장이 도시로 나간다!!”

“개문하라!!”

그냥 산책이나 하고 갈까 싶었는데, 어쩌다 성문에 도착하자 문이 열리는 바람에 7구역으로 이동했다.

아직 재건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못한 탓에 폐허나 다름없는 7구역.

무너진 집 앞에서 모포를 덮고 부랑자처럼 누워 있던 주민들이 날 보며 몸을 일으켜 세운다.

“거인……! 거인이다!”

“뭐? 남작님께서 오셨다고?”

“얀델 남작님……!!”

영웅이라는 명성 때문일까?

일반적인 귀족의 행차라면 겁이 나서 자리를 피하기 급급한 주민들이 나에게는 다른 태도를 보인다.

물론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그냥 지나가며 감사 인사나 축복의 말을 전하고 그런 건 좋지만, 전부 다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

“제, 제발! 저희 가족 좀 도와주십시오! 가게가 전부 무너져서 이대로면 내년 세금이……!”

애원을 하거나, 동정을 바라는 건 그나마 낫지만.

“남작님! 남작님! 저희 7구역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가요! 비프론은! 저 비프론은 어떻게 된 거고요!”

“왕가에서 7구역을 버릴 거라는 소문도 있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따지듯이 묻는다거나.

“뭐라 말 좀 해주십시오!!”

마치 맡겨놓은 물건을 찾듯 내가 대답하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이들도 사정이 좋지 않아 하루하루가 힘들고, 그런 와중에 제대로 된 소식도 듣지 못하니 갑갑할 터.

“남작님!”

“헛소문은 믿지 마라. 7구역은 곧 재건 공사가 시작될 거다.”

“남작님!”

“일단 이걸 받고 조금만 버텨라. 구호 물자가 더 많이 올 수 있도록 내가 힘써 보겠다.”

“남작님!”

“비프론의 결계? 그게 뭐가 그리 무섭나? 다들 걱정 마라! 이 도시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그들에게 화를 낸다거나 하기보다는 격려의 말, 그리고 그들이 바라고 있었을 대답을 해주며 거리를 나아간다.

그리고 얼마나 더 걸었을까.

‘……있으려나?’

여기까지 온 김에 마탑에도 방문했다.

안 그래도 벌써 성지에 편지가 몇 통이나 와 있었으니까.

이번 탐사가 끝나고 왕가에서 특별 휴가를 길게 내준 덕분에 마탑의 연구실에서 개인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고, 빠른 시일 내에 방문을 부탁한다는 내용의 편지들이었는데…….

‘난공불락은 무슨.’

이내 마탑에 도착한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긴 역사 동안 한 차례도 침입자들에 의해 정복된 적 없다고 하던데, 그 기록이 요 몇 년 사이 두 번이나 깨졌다.

한 번은 나.

그리고 이번엔 노아르크.

‘사실 난공불락이라기보다는 그냥 정치를 잘했을 뿐이란 거겠지.’

뭐, 그래도 입구부터 시작해 외관이 처참해진 것과 다르게 내부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다고 듣기는 했다.

침공이 시작되자마자 결계로 시간을 번 다음, 자료와 연구 설비들을 통째로 다 챙기고서 7구역의 고위 인사, 지역 유지들과 함께 순간 이동 마법진을 타고 구역을 떴다던가?

‘순간 이동 마법진이 박살난 것 외에는 멀쩡하다고 그랬지…….’

노아르크 쪽에서도 다 챙기고 떠난 것을 알았는지, 왕가에서 사용할 수 없도록 마법진만 부수고서 더 건들지 않았다고 들었—.

“왜 문 앞에서 그러고 있어요? 왔으면 그냥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지.”

그때 연구실에 도착한 내 뒤에서 레이븐이 나타났다.

“거, 인기척 좀 내고 다녀라.”

“…뭐래.”

“어허, 남작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지? 키도 쪼그마한 게.”

“아니, 왜 보자마자 시비예요? 오면서 뭐 짜증나는 일이라도 있었어요?”

“…….”

“뭐야, 진짜 있었던 건가?”

“없었다.”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짜증이 난다기보다는 내게 관심을 보내는 주민들 때문에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것에 가까웠으니.

***

“일단 들어와요. 안에서 얘기하게.”

“근데 너는 어디 갔다 온 거냐? 하도 바쁘다 해서 당연히 안에 있을 줄 알았는데.”

“멀리 간 건 아니고, 아는 분에게 잠깐 뭐 좀 빌리러 갔어요.”

“뭐를?”

“실험 도구인데, 자세히 말해줘요?”

“아니, 됐다.”

이내 연구실 안으로 들어가서 대충 자리잡고 앉자 레이븐의 연구실도 예전과 많이 달라진 게 보인다.

“난장판이죠? 이번 일 때문에 마탑 전체가 정신이 없어요. 제가 없는 동안에 스승님께서 다 챙겨서 나오긴 했는데, 찾아보면 없어진 것도 꽤 있고요.”

“그렇군.”

“뭐, 애초에 카르논에 있는 연구실로 이것저것 가져갔다보니 남아 있는 것도 많이 없었지만요. 마실 거라도 내다줄까요? 그래도 남작님인데.”

“물로 줘라.”

이후로는 레이븐의 연구실 플라스크(1.8L)에 담겨진 물이나 벌컥벌컥 마시며 근황 애기를 나눴다.

그야 지하 1층에서 나온 뒤에도 벌써 한참이나 시일이 흐른 데다가, 그사이에 굵직한 일도 하나 껴 있었으니까.

“얀델 씨는 어떻게 돌아오자마자 그런 일이 바로 생기는 거예요?”

도시로 돌아와서 겪은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하자 레이븐은 흥미진진한 눈으로 경청하다가도, 중간중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었다.

“가만 보면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 사고에는 항상 껴있는 거 같다니까요?”

슬픈 말이지만, 도무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내가 겪은 일들을 거의 다 알고 있는 만큼, 부정을 한다고 납득할 거 같지도 않고.

‘진짜 왜 온 세상이 나를 괴롭히는 거 같지?’

정말로 한수라는 이름에 마가 꼈나?

그 문제를 두고 진지하게 고민하던 때였다.

“그나저나… 많이 아쉽게 됐네요.”

진심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레이븐이 말을 이었다.

“왜, 지하 1층 탐사 중에 얻은 정수들을 전부 다 일반 탐험가들한테 줘버렸다면서요. 그것들을 연구만 해도 최소 몇 년 동안은 올해의 학술상을 독점할 수 있었을 텐데.”

“아, 그거…….”

“오해할까 봐 말하는 건데, 얀델 씨를 탓하려거나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에요. 저는 솔직히 말해서 그 결정을 듣고 얀델 씨답다고 생각했거든요.”

“…응? 나답다니?”

순간 이 정보만으로 사건의 진상까지 파악한 건가 싶기도 했지만, 결과만 말하자면 그렇지 않았다.

“얀델 씨는 도시, 그리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그런 결정을 내린 거잖아요? 현명하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저는…….”

레이븐이 쑥쓰럽다는 듯 시선을 옆으로 하며 나를 올려다봤다.

“그… 개인적으로… 멋있다고 생각해요.”

지금껏 함께하며 레이븐에게서는 처음 겪어보는 타입의 눈빛이었다.

존경심 비슷한 게 눈에서 느껴진다 해야 하나?

“어… 그, 그러냐?”

“네.”

“근데… 그 있잖냐.”

“……?”

레이븐이 너무 진지한 표정이이었던지라, 나는 평소처럼 장난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바로 정보를 정정했다.

“그… 너무 아쉬워하지는 마라.”

“네. 그래야죠. 대의를 위해서 그런 건데. 제 사리사욕을 채운다고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얀델 씨 입장에서는 조금 한심해 보일 수 있—.”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지?

내가 말을 잇기를 기다리는 레이븐을 보며 나는 그냥 남자답게 고백했다.

“사실…….”

“네, 사실은요?”

“쓸 만한 건 이미 전부 따로 챙겨뒀거든.”

“………네?”

한참이나 텀을 두고서 돌아온 되물음.

“챙겨… 뒀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말 그대로다. 정수를 막 뿌려 대면 왕가에서도 재고 조사를 제대로 못할 테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주 영리한 계책이었다.

그렇게 속으로 자찬하고 있자니, 레이븐이 현실 부정을 하는 사람처럼 뚝뚝 끊어지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왕가의 전리품에 손을 댔다고?”

“그런데?”

“제정신이세요?”

충분히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상황이라는 건 알지만, 그럼에도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새삼스럽게 왜 그러는 거냐?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닌데.”

우리들은 이미 지하 1층에서 뒷주머니를 찬 경험이 있다.

그래, 그러니까…….

“심지어 너도 그때 좋아했지 않냐? ‘고뇌의 화관’이란 멋진 이름까지 지어주면서.”

“그, 그, 그건 이거랑은 다르죠……! 아니, 애초에 그런 짓을 해놓고 왜 나한테는 다 솔직히 말하는 건데요!!”

어허, 어디서 발을 빼려고.

이런 태도가 조금 서운했지만, 다행히 나는 마법사를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야 나는 너한테 뭔가 숨기고 싶지 않으-.”

“이제 그거 안 통해요!”

“…그러냐?”

공부를 많이 하던 애라 그런지 배우는 게 빠르네.

“아무튼, 너무 뭐라고 하지 마라. 어차피 그거나 이거나 들키면 처형당하는 건 똑같지 않나?”

“아뇨! 아니거든요! 그건 우리 둘만 입을 다물면 끝이지만, 이건 너무 규모가 크다고요!”

음… 확실히 그건 그렇긴 하지.

“근데 그래서.”

“……?”

“연구 안 할 거냐?”

“그, 그건……!”

간식을 앞에 둔 강아지처럼 어쩔 줄 몰라하던 레이븐이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개미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하긴 해야죠.”

그래, 그럴 줄 알았다.

28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39화 28

639화 정략 (3)

사실 신종 정수들에 관한 연구는 대부분 지하 1층에 머무르던 시절에 끝이 났으나, 그럼에도 나는 갖고 있던 정수들을 전부 레이븐에게 넘겨줬다.

내가 봤을 때 마법사들은 전부 변태였으니까.

미지를 밝혀내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건 맞지만, 그들은 연구하는 과정 자체도 즐겁게 여긴다.

왜 껌도 그렇잖아?

단물이 다 빠지면 금방 뱉는 사람도 있지만, 씹는 행위 자체가 좋아 하루 종일 씹어대는 사람이 있다.

따라서…….

“그럼 이건… 제가 최선을 다해 연구해볼게요.”

추가 연구를 통해 뭔가 더 밝혀질 거라 기대하는 것보단, 그냥 레이븐에게 정수 보관을 맡겼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뭐, 그러다 연구 성과가 나오면 좋고 말이다.

바로 이렇게.

“아, 근데 편지에 적혀 있던 말은 뭐였나? 내게 알려줄 게 있다고 했지 않냐.”

“맞다, 내 정신 좀 봐. 아이나르 씨가 탐사 중에 획득했던 히프라마전트의 정수요. 아직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던 체화 이능, 제가 알아낸 거 같아요.”

“오, 그게 정말이냐?”

“도시로 돌아오고 나서 그때 얻은 수치 자료들을 토대로 다른 기존 자료들과 대조를 해보니 비슷한 게 있더라고요.”

“그래서 체화 이능이 뭔데?”

내 물음에 레이븐이 팔짱을 끼며 그래 봤자 작은 어깨를 활짝 폈다.

그리고…….

“3등급 마물, ‘라망시스’라고 아세요?”

한껏 득의양양한 목소리로 내게 묻는데, 솔직히 말해 이해가 안 됐다. 어떻게 저 작은 키로 나를 내려다볼 수가 있는 거지?

음, 어쩌면 의문의 해답은 한계까지 뒤로 젖혀진 턱에 있는 걸지도 모르—.

“아, 모르시는 것도 당연해요.”

얘는 또 뭐래.

“그야 ‘라망시스’는—.”

“9층 균열에서 나오는 희귀한 마물이니까?”

할 말을 빼앗겨 버린 레이븐이 어깨를 움찔했다.

“…어?”

왠지 아까보다 젖혀져 있던 턱의 각도가 줄어든 것 같기도 했다.

“알고… 계셨네요……?”

암, 알다마다.

하는 행동이 귀여워 피식 웃고 있자니, 레이븐이 다시금 원래의 톤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반만 알고 계시네요! 라망시스는 9층 균열에서도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찾지 못하거든요.”

“뭐, 그렇겠지? 균열 내에 숨겨진 가브릴리우스의 안배를 이용해야만 마주칠 수 있는 마물이니까?”

사회성 넘치는 바바리안답게 고개까지 끄덕이며 말을 주고받았다.

한데 이건 또 뭘까.

“…….”

어째선지 말 많던 애가 또 조용해졌다.

한계까지 젖혀졌던 턱의 각도도 훨씬 더 줄어들어 이제는 내려다보는 느낌은 아예 사라진 상태.

그 상태로 레이븐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얀델 씨는… 그 안배가 뭔지도… 아시는 건가요……?”

“그런데?”

뭘 당연한 걸 묻느냔 뉘앙스로 답하자 레이븐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 모습을 보며 알 수 있는 정보가 있었다.

“설마… 넌 모르는 거냐?”

“…….”

늘 그렇듯 침묵은 대답이 되어주었다.

“허.”

기도 차지 않았다.

뭐야, 그것도 모르면서 그렇게 날 내려다본 거였어?

“그, 그야! 모르는 게 당연하죠! 그런 고급 정보가 책에 남아 있을까 봐요……? 정수 능력에 대한 자료만 해도 얼마나 가치가 있는데! 게다가 이 정수를 가졌던 사람들을 찾아봐도 역사적으로 손에 꼽을 걸… 왜 저를 그런 눈빛으로 보는 건데요……?”

“흐음…….”

“…….”

뒤늦게 눈치챈 것인데, 어느샌가 우리 둘의 구도가 바뀌어 있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로 내려다보고 있고, 레이븐은 어딘가 의기소침한 사람처럼 땅을 내려다보는 구도.

다만, 그 와중에도 레이븐은 애써 힘을 내어 목소리를 쥐어짰다.

“그래서…….”

“……?”

“…………그게 그 안배가 뭔데요?”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 봐.

이 와중에도 그건 궁금한 거구나.

***

9층 균열에 숨겨진 히든피스에 대한 설명이 끝난 뒤, 레이븐은 그 보답이라는 듯 라망시스의 패시브 스킬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사실 나로선 이미 아는 이야기이긴 했지만…….

‘이 정도는 사회 생활이지.’

이번에는 눈치껏 말을 끊지 않고 레이븐의 설명을 경청했다.

“라망시스의 체화 이능은 [단짝]이에요. 이름만 보면 뭔가 싶겠지만, 살펴보니 굉장히 특이한 능력이더라고요.”

음, 글쎄…….

[단짝]은 특이한 능력이란 말보다 특이한 발동 조건을 가졌다는 표현이 옳을 거 같은데.

“일단 우리들의 추측대로 지원 계열의 이능은 맞아요. 주변에 있는 대상 한 명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아주 강력한 축복을 내려주는 능력이거든요.”

“오?”

“다만 이 체화 이능은 자의로 발동시키는 게 불가능해요. 평상시에도 활성화 되어 있지 않고요. 반드시 특수한 조건이 성립되어야만 하는데…….”

“하는데……?”

“자세한 조건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다만 역대 소유자들의 자료를 보면 남녀끼리 발동되는 빈도가 압도적으로 높았고……. 또 아주 오랜 시간 함께한 사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어요.”

뭐, 그럴 것이다.

[단짝]이 발동되려면 정수 소유자가 한 명의 대상을 상대로 호감도 MAX를 찍어야 하거든.

그래서 나도 이 정수가 나오면 여캐 동료에게 먹이고 매일같이 꽃 같은 걸 사다주면서 호감도를 올렸다.

아, 참고로 플레이어 캐릭터는 못 쓰는 정수였다.

시스템상 플레이어는 NPC를 향해 호감도를 가질 수 없게 되어 있었거든.

‘그럼 지금 상태에서는 이 정수도 직접 쓸 수 있게 된 거려나?’

게이머로서의 호기심이 오랜만에 발동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단짝]을 먹을 생각은 없다.

애초에 그걸 넣을 자리도 없을뿐더러…….

효율을 따진다면 역시 동료에게 먹이고 호감작을 하는 편이 훨씬 더 이득…….

‘……라고 하니까 너무 쓰레기 같은데?’

아무튼, 패시브 스킬을 알고 나니 계륵 같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걸 참 뭐라고 해야 할지.

일단 발동되기만 하면 등급 이상의 성능을 내는 좋은 스킬인 건 맞는데…….

‘터트리는 게 가능하긴 하려나……?’

게임 내에서 호감도 100%를 찍는 건 쉽지 않다.

아니, 일단 동성 간에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도 좋다.

호감도를 올리다 보면 무조건 90%에서 한 번 락이 걸리며, 이후로는 이성 간의 무언가 그런 간질간질한 이벤트들이 있어야지만 천천히 올라간다.

한데…….

‘아이나르가……?’

아이나르가 다른 남성과 그런 관계가 되는 모습은 전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날 포함해 정말 남사친들만 가득하다 해야 하나?

“그래서 남녀 간의 연인 사이끼리만 발동하는 게 아닐까 하는 게 제 추측인데……. 아니, 열심히 말하는 중인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 그냥 어떻게 해야 그 이능이 발동되려나 싶어서.”

“……그것도 그러네요.”

여러모로 고민이 되는 문제다.

스킬을 버려두긴 아까운데…….

그렇다고 내가 [단짝]을 발동시키기 위해 매일같이 크림빵을 사다주며 플러팅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건 그냥 없는 스킬이라 생각하는 게 낫겠네.’

따라서 그냥 [단짝]은 머릿속에서 봉인해두기로 결정했다.

애초에 패시브 스킬이 없어도 충분히 좋은 성능을 내고 있는 정수이기도 하고.

“아무튼, 고맙다. 레이븐.”

“고맙긴요. 결국 아무런 도움도 못 됐는데.”

“그래도 뭔가 부정적인 요소가 있는 체화 이능이 아니란 건 알아냈지 않나. 그것만으로도 한결 걱정을 덜었다.”

“음… 사실 그것도 그렇기는 하죠?”

얘는 대체 감사 인사를 듣고 싶은 걸까, 아니면 겸손을 떨고 싶은 걸까.

도무지 알 수 없지만, 첫 번째 용건이 끝나고서도 간단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이왕 온 김에 검사나 하고 가란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 예전에 자주 앉았던 그 의자에 앉아서 실험체가 되기도 했고…….

도중에 배가 고파 마탑 구내식당에서 식사도 했다.

“와,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이미 밖은 어두워졌겠어요.”

“창문이 없어서 못 보지만 말이다. 아, 그나저나 레이븐. 통신용 수정구 좀 잠깐 빌릴 수 있겠나?”

“누구한테 연락하려고요?”

“성지에 연락 좀 하려고. 이따 연락이 되면 네가 좀 대신 말해줘라. 오늘 연구 때문에 너네 실험실에서 자고 여기서 바로 내일 일정을 하러 가겠다고.”

내 부탁에 레이븐이 고개를 갸웃한다.

“……오늘 얀델 씨가 필요한 연구는 없는데요?”

하, 얘도 가만 보면 중요한 부분에서는 눈치가 없다니까.

“그래도 그냥 내 말대로 해줘라.”

“네? 네… 그건 어렵지 않은데…….”

말꼬리를 흐리던 레이븐이 호기심 충만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묻는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 건데요?”

결혼 이야기를 꺼내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기 싫던 나는 딱 절반의 진실만을 털어놓았다.

“그냥.”

“……그냥?”

“오늘은 집에 가고 싶지 않아서.”

“……………에?”

“자고 가게 해줘라.”

굳이 나가서 여관 잡기도 귀찮단 말이야.

***

대충 아무렇게나 깐 모포에서 잠 든 다음 날 아침.

실험실 한편에 있는 침대에서 잤던 레이븐이 먼저 깨어나 나를 발로 툭툭 밀어서 깨웠다.

“…일어나요. 언제까지 자려고요? 이러다 제때 못 가겠어요. 오늘 중요한 일정도 있다면서요?”

“아…….”

“자는 데 불편하진 않았어요?”

“전혀. 방바닥이 뜨듯하니 딱 좋더군. 어? 근데 너 벌써 씻었나?”

“……그럼 아침에 일어났으니 씻지, 더럽게 그냥 그대로 있어요?”

음……. 글쎄, 실험실에서 나올 때면 항상 며칠 씻지 않은 초췌한 몰골이었던 거 같은데…….

군인이 되더니 이런 데 민감해진 건가?

“아무튼, 하룻밤 신세 잘 졌다. 나중에 또 오마.”

“아뇨. 오지 마요. 괜히 피곤하기만 하니까.”

“엥? 피곤하다니? 너도 어제 일찍 잠들었던 거 아니냐?”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연구해야 하니까 얼른 가기나 하시죠?”

레이븐에게 아침부터 등쌀에 떠밀린 나는 내쫓기듯 마탑에서 나왔고, 이후로는 근처 승강장에서 마차를 타고 목적지인 황도 카르논으로 이동했다.

그야 오늘이거든.

인간, 드워프, 요정.

그리고 바바리안, 수인, 용인.

라프도니아라는 거대한 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여섯 종족의 리더들이 모여서 대화를 나누는 종족 회담이 열리는 날이.

‘어쩌다보니 여길 이제야 처음 와보네.’

부족장이 된 지 한참이나 되었으나 지금에서야 참석을 하게 된 종족 회담. 회담이 열리는 건물은 지나가면서도 몇 번이나 봤던 건물이었다.

여섯 개의 기둥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로마 신전을 연상케 하는 이국적인 건물은 아무래도 눈에 확 띄기 마련이니까.

‘…시간이 좀 남네.’

아침 일찍부터 내쫓긴 탓인지 시간이 남아서 근처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카르논에 위치한 식당인지라 밥값이 예상보다 훨씬 비싸 당황하긴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배고픈데 밥은 먹어야지.

‘식대는 따로 안 주겠지?

이내 식사를 끝낸 후에는 배를 두드리며 회담이 열리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비요른 얀델님, 혼자 오셨습니까?”

“그런데 문제라도?”

“아뇨… 없습니다. 들어가시지요. 다른 분들께서 기다리십니다.”

참고로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비들은 모두 다른 종족들로 이뤄져 있었는데, 어찌 된 게 바바리안만 빠져 있었다.

‘각자 데려온 사병들을 세워 두는 식인 건가?’

음, 그런 건 전대 부족장한테 못 들었는데…….

설마 이런 걸 까먹고 전달 안 했을까 싶지만, 그 아저씨라면 진짜 그랬어도 이상하지 않다.

“수고해라.”

이내 입구에 서 있던 경비들을 격려해준 뒤 안으로 들어가 걷자 어느덧 중심부에 모여 있는 이들이 보였다.

각 여섯 종족을 대표하는 거물들.

다만, 놀라운 건 그들 중에서 익숙한 얼굴이 둘이나 보였다는 것이다.

용인족의 수장인 용아저씨.

그리고…….

‘이번에 수인족에선 적묘족을 대표로 내보냈나 보네.’

적묘족의 적통 순혈 가문.

칼스타인가의 가주이자 미샤의…….

‘엄밀히 말하면 친아빠는 아니지?’

아무튼, 족보상으로 부친 자리에 있는 사내.

“오랜만이군. 그때는 자네를 이런 자리에서 다시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네만.”

“이해한다. 너희들 상상력이 부족한 건 옛날부터 잘 알고 있었으니.”

“……내게 앙금이 아직 남아 있는가 보군?”

“그럴 리가.”

실제로도 앙금 같은 건 없다.

그때 나는 아무것도 없는 애송이였으니까.

뭐, 이제는 이 아저씨가 아무렇게나 반말을 찍찍 쓸 수 없는 위치에 올랐지만.

“사적인 대화는 그만들 하시고, 얀델의 아들 비요른, 그대도 이만 앉으시겠소?

이내 요정족 대표의 말에 나는 천천히 주변을 쓱 훑어보았다.

거물들이 모인 자리지만 불편함은 없었다.

몹시도 간단한 이유였다.

‘여기도… 원탁을 쓰네……?’

커다란 원탁이 놓인 회담 장소.

천천히 내 자리로 보이는 빈 자리에 착석한 나는 한 팔로는 턱을 괸 채 검지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비록 이번이 첫 회담이긴 하지만.

툭툭.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솟기 시작했다.

44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40화 44

640화 정략 (4)

용인족의 용아저씨.

수인족의 칼스타인 가주.

이들 둘을 제외한 나머지는 이번이 첫 대면이었지만 소개 없이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핫, 어쩌다 보니 이제야 처음으로 보게 됐군. 티타나를 통해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자네에게 큰 신세를 졌다지?”

“신세는 무슨, 아쿠라바에게는 이쪽이 신세를 졌지.”

“하핫! 소문과 달리 겸손한 친구였구만!”

드워프의 두모카, 말라쿠 이조르.

아, ‘두모카’는 고대어로 판결하는 망치라는 뜻을 지녔는데, 그냥 부족장을 칭하는 명칭이라 보면 된다.

‘아무튼, 이 할아버지는 탐험가 출신이 아니랬지.’

말라쿠 이조르의 특이한 점 중 하나다.

이 자리에 있는 부족장들을 포함해, 역대 기록을 살펴봐도 대부분의 부족장들이 탐험가 출신인데 반해 이 할아버지는 오직 신망 하나로 저 자리에 올랐다.

‘말이 신망이지, 그만큼 정치 하나는 타고났다고 보는 편이 옳겠지.’

원래 이 세상에서는 사람 좋아 보이는 사람일수록 만만히 봐서는 안 된다.

화를 내거나 신경질을 내지 않고도 자기 자신을 지킬 능력을 갖춘 사람이란 뜻이니.

아, 저 까칠한 요정과는 다르게 말이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그대의 부재 때문에 몇 번이나 연기가 됐던 회담이오.”

“그런데?”

“오늘 회담에 늦은 사유에 대해 듣고 싶소이만.”

“아, 그거? 너무 일찍 온 바람에 요 앞에서 식사를 하다가 늦었다.”

“…식사?”

“왜? 너는 식사를 안 하냐?”

“…….”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말을 잃어버린 요정족의 족장… 아니, 족장이 아니라 ‘라그시안’이라 하는 게 맞으려나?

‘그러고 보면 바바리안만 빼고 다 그럴듯한 이름이 있단 말이지?

한데 왜 바바리안만 그냥 심플하게 ‘부족장’이라는 직책명을 쓰는 걸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딱히 중요한 건 아닌 거 같아 생각을 그만뒀다.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러고 나니 납득이 됐다.

‘…아, 이래서 그냥 계속 부족장인 거구나.’

하긴, 굳이 뭐하러 바꿔? 부족장이면 충분한데.

가장 직관적이기도 하고.

“그 아이는…….”

대충 기싸움은 이쯤 다 끝난 건가 싶던 때, 누가 봐도 훤칠한 미남인 요정족 대표가 말을 이었다.

“그 아이는 잘 있소……?”

“…에르웬을 말하는 거냐?”

“그럼 달리 누가 있겠소?”

허, 얘는 친절하게 생겨서 왜 이렇게 목소리에 날이 서 있는 건지.

“에르웬이라면 걱정 마라. 우리 성지에서 잘 지내고 있으니까.”

그래도 에르웬의 집안 어른이란 생각에 이번 대답은 착실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건 또 뭘까.

“그 다른 여인들과 함께 말이오?”

“다른 여인……?”

뭔 말인가 싶어 반문했더니 또 알 수 없는 소리만 돌아왔다.

“그 아이는 우리 일족 내에서도 특별한 아이요. 단순히 순혈의 계승자여서 그런 게 아니라, 모두가 그 아이를 아끼고 사랑하지.”

“…그런데?”

“그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나게 한다면, 그대 역시 각오를 해야 할 것이오.”

마치 예전에 있었던 전쟁을 되풀이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듯한 각오가 담긴 선언.

하나 딱히 열이 뻗치거나 하진 않았다.

다른 이유 때문이라면 모를까.

에르웬을 위해 저런 말을 하는데 들이받을 만큼 생각이 없진 않으니까.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라.”

“……그렇다면 되었소. 잘 부탁하리다.”

그제야 느낀 것인데 이 녀석이 나한테만 유독 차갑게 군 게 아무래도 에르웬 때문인 거 같았다.

내가 바바리안이라서가 아니라.

‘바바리안을 혐오하는 요정이었으면 잘 부탁한단 말 같은 건 하지도 않았겠지.’

한 차례 대화가 끝난 나는 한 번 더 시선을 움직여 마지막 인물이 있는 곳을 확인했다.

바로 인족의 대표가 앉은 자리였다.

“그나저나…….”

사실 아까부터 곰곰이 머리를 싸매고 있었는데, 오늘 인족 대표로 나온 저놈이 누군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바바리안답게 노빠구로 물었다.

“대체 너는 누구냐?”

정상 회담 비슷한 자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무례한 질문. 다만 인족 대표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답했다.

“맥시랜드 자작입니다. 운이 좋게도 인족을 대표해 이번 회담에 참가하는 영광을 얻게 됐지요.”

맥시랜드 자작이라면 기억에 있다.

재상파에 속하며 후작의 오른팔도 아니고, 한 왼팔쯤 되는 인물.

“아, 그랬군.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라 몰라봤다.”

“승작식 때 한 번 뵙기는 했습니다마는…….”

“그때는 하도 정신이 없어서.”

“이해하니 괘념치 마시지요.”

이내 신분을 듣고 나니 왜 다들 인족 대표 쪽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의도가 명확하네.’

인족에서도 급이 안 되는 인물을 참석시키며 뜻을 내비친 것이다.

우리는 이번 회담에서 뭔가 주도적으로 할 생각이 없으며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떠나겠다는 걸.

애초에 자작 본인도 그걸 알기 때문인지 얌전히 자리만 지키려는 듯한 스탠스였고.

“그러면 자리도 모두 채워졌겠다. 슬슬 회담을 시작하는 게 어떻소이까?”

아무튼, 그렇게 내 첫 종족 회담이 시작됐다.

***

처음으로 참석한 종족 회담은 내가 혼자 기대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논제를 정해두고서 심도 깊은 토론을 한다든가.

세계 정세를 논하며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든가.

그도 아니면 세계의 비밀을 다루는 그런 은밀한 대화가 오고간다든가.

그러한 것은 일절 없었다.

아직 초반부이긴 하지만, 내가 지켜본 종족 회담은 그냥 서로가 서로에게 점잖은 말투로 불만을 토로하고 싸우는 자리였다.

바로 이렇게.

“드워프족에서 노움트리의 땅을 매입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소이만. 혹시 농작 쪽에도 손을 대려는 것이오?”

“왜? 땅을 매입하는 데 요정족의 허락이라도 받아야 하나?”

“그럼 우리 일족과 수인족도 야금술 관련 사업을 시작해도 된단 뜻이오?”

아, 참고로 이런 사소한 분쟁들 속에 우리 바바리안은 철저하게 외부자 포지션이었다.

그야 도시 내에 우리 영역이랄 게 없었거든.

영역이 없으니 영역 싸움을 할 일도 없었던 것인데…….

“하… 걱정 말게. 자네들의 영역을 침범할 생각은 없으니. 노움트리의 대장간들을 좀 더 확장할 필요가 있어 땅을 매입했을 뿐이네.”

어찌 됐듯, 이런 오해 같은 경우에는 말 몇 마디로 풀고 넘어갈 수 있었으나, 그렇지 못한 케이스도 꽤 있었다.

“그보다 수인족이야말로 선을 넘은 것 아닌가?”

“우리가 무슨 선을 넘었단 뜻이오?”

“오호라! 흑곰족에서 그 배신자놈을 거둬 주었다는 소문이 있던데. 내가 잘못 들었다는 건가?”

“…….”

자세한 사정을 들어보니 드워프 일족 내에서 죄를 짓고 추방당한 드워프 장인 하나를 수인족에서 품은 모양이었다.

“두모카의 마음은 알겠네만, 개개인의 일까지 우리가 손을 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소? 보아하니 이전에 그자에게 빚을 진 적이 있다는 듯하더구려.”

“하하, 그럼 갈 곳 잃은 그놈을 받아들여 주는 척하면서 기술을 빼가려는 게 아니란 뜻이군?”

뼈가 실린 말이란 게 이런 걸 뜻하는 걸까.

“가주, 헛소리는 이만하면 됐으니 그 잡놈을 어서 추방하시게.”

난쟁이 두목의 눈에 실린 기세가 실로 대단했으나, 이를 받는 칼스타인 가주 역시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뭐, 별수 있겠나. 우리 역시 우리 나름대로의 대응을 해야겠지.”

“…….”

서로가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는 분쟁.

이럴 때엔 분란에 엮이지 않은 대표들이 나서며 중재를 해줘야 했다.

“기술 유출에 관한 문제는 제쳐두고서라도, 일족의 추방자를 타 종족에서 받아준 건 도의적으로 옳지 못한 듯하군. 나는 두모카의 손을 들어주겠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투표까지 간 결과, 이번 논쟁은 수인족에서 드워프 추방자를 다시금 내쫓는 것으로 결정됐다.

아, 참고로 나는 기권표를 냈다.

그야 드워프족 범죄자니 뭐니 딱히 내가 알게 뭐란 말인가?

‘지들끼리만 아는 얘기를 하니까 영 재미가 없네.’

그렇게 회담이 이어지며 이곳에 참여한 시간이 시시하고 지루해지던 때였다.

그냥 대충 턱을 괸 채 졸고 있자니, 돌연 갑자기 대화의 화제가 나로 이동했다.

“그나저나 부족장은 어떻소?”

“…응?”

“최근 건축 기술에 흥미가 많은 듯 보여서 말이오. 이렇게 만난 김에 조금 그 이야기를 들어보면 좋지 않겠소.”

아… 이 할아버지, 지금 나를 견제하는 거구나.

“그 이야기라면 나도 조금 흥미가 있네만.”

용아저씨는 진짜 순수 호기심인 거 같고.

“성지가 많이 변했다지?”

“뭐, 조금 많이 바뀌기는 했다. 언제까지 야만스럽게 살 수는 없는 거 아니냐?”

“그런 생각이 들었으면 말하는 방식부터 바꿔보는 건 어떤가?”

“음, 이건 우리들의 전통이라서.”

애초에 이 편한 걸 왜 바꿔?

왕 빼고는 전부 다 반말을 찍찍 뱉어도 되는 치트키 같은 문화인데.

아무튼, 다들 궁금해하는 거 같아서 건물들이 들어선 성지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대충 설명해주자 용아저씨가 신기한 눈초리를 보냈다.

“말로만 해서는 잘 상상이 가지 않는군. 그 짧은 시간에 그토록 많은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니.”

“짧은 시간……? 마지막으로 와본 게 언제였나?”

“…한 20년쯤 전일 걸세.”

용인들의 시간 감각은 우리랑은 완전 다르구나.

내심 감탄하면서 슬슬 우리 성지에 관한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던 찰나였다.

“하하, 바바리안들이 건축 기술을 배웠다니, 한 사람의 장인으로서 무척이나 기쁘오. 내 듣기로 이번 왕가 수주에도 참가하려 한다던데……. 사실이오?”

“아직 확정난 사안은 아니다.”

“그렇구려.”

난쟁이 두목의 말에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 수주 건이라면 불과 며칠 전 멜베스 집회 중에 나온 이야기였으니까.

얘네 정보력이 뛰어난 건지, 아니면 우리 중에 입이 싼 놈이 섞여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그냥 정보가 술술 새는구만?’

뭐, 이해 못할 부분은 아니다.

멜베스 자체가 이종족들이 모인 집단이니까.

거기서 하는 말들 대부분이 부족장들의 귀에도 들어가겠지.

그래도 이건 좀 예상외였지만.

“그보다… 내가 듣기로는 결혼을 한다던데?”

용아저씨가 은근슬쩍 내게 물었다.

살짝 움찔하며 주변을 휙휙 둘러보니, 놀랍게도 용아저씨만이 아니라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아아, 그거 말이군. 멜베스의 회주가 제발 결혼 좀 하라고 등살을 떠밀었다고 들었소이만.”

“하긴… 자식이 있어도 셋은 있을 나이지.”

……뭐야, 어떻게 다들 이것까지 알고 있는 거야?

회주가 어디 가서 이 얘기를 말하고 다니진 않았을 거 같은데.

‘무서운 놈들…….’

순간 소름이 돋았지만, 당황한 티는 내지 않았다.

수사자 가면을 쓰고 지내며 배운 것 중 하나였다.

일단 센 척을 하는 게, 만만해 보이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그래, 분명 그랬을 터인데…….

“마땅한 상대가 없다면 내 딸아이는 어떤가?”

이어진 용아저씨의 말에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물을 마시는 중이었으면 뿜었을지도 몰랐다.

“…딸아이?”

“아, 첫째인지 막내인지를 말하지 않았군.”

어… 나는 그런 의미로 되물은 게 아닌데.

“뭐, 나는 자네라면 어느 쪽이든 상관—.”

“상관이 왜 없소이까!”

그때 느닷없이 요정 대표가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고, 이에 용아저씨가 변명하듯 대답했다.

“아아, 오해를 살 발언이었군. 나는 순전히 이 친구가 마음에 들어서 꺼낸 이야기일 뿐, 일족 간의 연합을 위한 정략적인 의도는 전혀 없—.”

“그게 아니오.”

“……응?”

“태고룡께서는 아까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 나와 한 약조를 잊은 것이오?”

“…약조? 그런 게 있었던가?”

“그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부탁했고, 그는 이에 응했소. 심지어 내게 걱정하지 마라고 확답까지 주었지.”

“어… 그렇긴 했던 거로 기억하네만……. 그게 이것과 무슨 상관인가?”

용아저씨는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그때.

“다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니오?”

뜬금없이 제 3의 인물이 대화에 개입했다.

“내 딸은 이미 그자와 깊은 사이요.”

미샤의 아빠였다.

“확실히… 이전에 그런 소문이 돌기는 했었지.”

“……어떤가, 저 말이 사실인가?”

이내 요정 족장과 용아저씨가 나를 보며 물었고, 왠지 입술이 바짝 마른 나는 테이블에 놓인 물컵을 들었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

왠지 물만 마셔도 체할 거 같았다.

39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41화 39

641화 정략 (5)

적묘족의 수장, 알브레니브 칼스타인.

사실 이 아저씨가 이런 말을 하는 상황도 웃기다.

애초에 이 아저씨는 미샤와 사이 좋은 부녀 관계도 아닐뿐더러, 예전부터 나를 엄청나게 싫어했으니까.

‘한데 이 타이밍에 끼어든다라…….’

뭐, 이제 정략적으로 이용할 가치가 생겼단 건가?

분명 그럴 가능성이 높다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가주의 눈을 마주치기가 쉽진 않았다.

아니, 이는 비단 가주만이 아니라 용아저씨나 요정 대표도 마찬가지다.

“말해보게.”

“가주의 말이 사실인가?”

“그럼 내가 거짓말이라도 했단 뜻이오?”

마치 장인어른 셋에게 둘러싸인 느낌.

물론 딸들과 별 사이랄 게 없는 용아저씨는 그나마 좀 나았지만…….

가주와 요정 대표.

하, 근데 이 두 사람은 왜 이렇게 불편하지?

차라리 가시 방석에 앉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거 같다.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괜히 왔나?’

그렇게 슬슬 종족 회담에 참여한 것이 후회되려던 찰나,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곳에서 구원의 빛이 있었다.

“다들 조금 자중하는 게 어떻소?”

다그치는 듯하면서도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의 난쟁이 두목.

“내가 딸 가진 아비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오만. 누가 보면 이 자리가 중매 자리인 줄 알겠소이다.”

“…….”

“게다가 모두 이게 정략적으로 옳지 못하단 걸 알고 있지 않소이까. 인족을 제한 우리 다섯 종족은 깊은 교류를 피해왔고, 이를 통해 항상 균형을 이뤄 왔소. 한데 누군가 선을 넘기 시작하면, 이제 그 선은 어떠한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될 거요.”

난쟁이 두목 할아버지의 일침은 논리에서나 명분에서나 모자람이 없었다.

하지만…….

“흐음, 두모카가 말하는 선은 이미 한참 전에 의미가 소실됐다고 생각하네만.”

용아저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인지 곧장 반박을 시작했다.

“이미 이 친구는 한 종족의 대표이면서 왕가에 속한 작위 귀족일세. 지금까지 이런 경우가 단 한 번이라도 있었나?”

“그 문제는… 왕실에서 문제 삼지 말라고 딱 잘라 정리하지 않았소이까.”

대충 보아하니 난쟁이 두목은 내가 작위를 가진 부족장이 되자마자 왕가에 뭐라뭐라 불만을 토로했던 모양이다.

‘뭐, 난쟁이 출신이라 속도 그만큼 좁을 테니 납득할 수 없는 건 아닌데…….’

그래도 조금 괘씸해 별 필요도 없어 보이는 의자를 압수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

“그렇기에 더 이상 선을 지키는 게 의미가 없다는 걸세. 왕실에서 개입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균형은 무너진 것이니까.”

일단 욕구는 참고서 이어지는 대화에 집중했다.

그야 왠지 딱 봐도 중요해보이는 이야기였거든.

“왕실에서는 우리 다섯 종족이 화합하게 두고볼 생각이 없다… 라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하고 있네만, 자작의 고견은 어떠신가?”

일견 난쟁이 두목을 향하는 듯하던 용아저씨의 일침은 어느새 인족 대표 맥시랜드 자작에게로 향해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 질문을 위한 빌드업이었다는 듯.

“하핫, 제가 어찌 왕실의 생각을 알겠습니까…….”

다만 맥시랜드 자작은 실 없는 웃음을 내지으며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명색이 인족을 대표해 자리에 참석한 입장이면서 저런 말을 저렇게 뻔뻔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는데…….

“그럼 내 생각이 틀렸다는 뜻인가?”

“이번 회담에서 부디 저는 없는 사람이라 여기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마는. 어려울련지요?”

이런 부분에선 강하게 말을 하는 걸 보니, 맥시랜드 자작이란 사람도 만만히 볼 사람은 아니었다.

‘하긴, 그러니까 이런 자리에도 내보내졌겠지.’

이내 용아저씨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자 잠시 정색했던 자작이 다시 모지리처럼 웃으며 말을 잇는다.

“하하, 민망합니다마는. 제겐 첫 자리 아닙니까. 오늘은 배우는 입장으로 왔으니 과도한 관심은 너무 무겁습니다.”

“배우는 입장이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네. 왕실이 우리들을 어떻게 보는지 충분히 알겠으니.”

“…….”

자작은 알아서 생각하라는 듯 침묵을 지켰고, 이를 끝으로 이번 주제는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

“크흠. 그래도 내 생각은 변하지 않소. 부족장이 이종족과 혼인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오.”

난쟁이 두목이 구석에서 조용히 웃고 있는 자작의 눈치를 쓱 보며 말을 이었다.

“균형은 유지되어야 하오. 그것이 우리 이종족들이 왕가에 충성을 내보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

아무래도 난쟁이 두목은 이런 상황일수록 왕가에 어필하고 싶은 듯했다.

우리 난쟁이들은 유해 종족 같은 게 아니라고.

‘이 할아버지는 뭐 이리 소심해? 탐험가 출신이 아니라서 그런가?’

난쟁이 두목은 내가 아는 난쟁이들과 영 다른 모습이었지만, 책임지는 자리의 중압감을 잘 아는 나로서는 아예 이해 못할 행동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냥 허허 웃고 넘어갈 생각은 없지만.

“그럼 네 말은 내가 내 동족들과 혼인을 해야 한단 뜻이겠군?”

“그게 가장 좋은 상황이지만, 꼭 그런 뜻이지는 않네. 수인족이든 요정족이든, 평범한 여인이라면 어떠한 정략적 우려도 없을 터이니.”

쉽게 말해, 에르웬이나 미샤는 안 된다는 뜻.

“정략적 우려라…….”

일단 웃겨서 듣고는 있었는데, 점점 가만 있기가 어렵다.

“두모카,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는데 괜찮나?”

“무엇이든 해보게.”

나는 너그러운 선배처럼 답하는 난쟁이 두목을 보며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뭔데 자꾸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냐?”

“……?”

“네가 내 윗사람이라도 되나?”

그리 말하면서 내 눈높이에 맞춰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제스처를 취해준 건 덤.

당연하게도 각도상 난쟁이는 한참 아래 있었다.

“……불쾌했다면 사과하겠네. 단지 조언이었을 뿐이니—.”

“오, 그럼 나도 조언을 하나 해주겠다.”

나는 영문 모르겠단 표정을 짓는 난쟁이 두목을 보며 딱 잘라 말해주었다.

“나는 바바리안족의 부족장이며, 라프도니아 왕국의 작위 남작이다. 또한 우리 아나바다 클랜의 마스터이기도 하며—.”

사실 얘도 이미 다 알고 있는 얘기긴 하겠지만.

“무엇보다 한 사람의 전사다.”

왠지 진심으로 이해한 거 같진 않아서 말이지.

어딘가 기세에서 밀린 듯한 난쟁이 두목을 겁박하듯 내려다보며 말을 잇는다.

“그러니까 다시는—.”

“…….”

“나한테 명령하지 마라.”

아, 근데 이렇게 끝내면 조언이라 하긴 좀 그런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든 나는 마지막 말을 덧붙이며 조언의 마침표를 찍었다.

“나랑 결투하고 싶지 않으면.”

암, 이 정도면 조언이 맞지.

“…….”

저 미궁 한번 안 가본 난쟁이 두목은 말할 것도 없고.

“…….”

그때는 살기 한 방으로 날 꼼짝 못 하게 했던 칼스타인 가주든.

최강의 종족이라 불리는 용인족의 수장인 용아저씨든.

모든 정령의 사랑을 받는다는 저 요정이든.

누구든.

“다들 이해했나?”

이제 내가 질 거 같진 않거든.

***

애초에 생각해보면.

아니, 굳이 생각으로만 할 필요도 없지.

나는 강한 워딩에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난쟁이 두목을 콕 집어서 쳐다보며 말했다.

“애초에 이제 와서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웃기지 않나?”

그도 그럴 게, 지금까지 바바리안은 최약체였다.

실로 절망적인 생환률.

그 탓에 늘 인재들이 부족했고, 유용 자금은 항상 바닥을 기었다.

또한 태생적으로 정치, 사업 쪽으로는 재능이 전무했다는 점도 바바리안을 최약체로 만든 큰 원인이었다.

“그 긴 역사를 가진 라프도니아에서 바바리안 출신으로 귀족이 된 건 내가 최초였다.”

바바리안이라고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늘 농담스럽게 툴툴댔던 말이며 생각이지만, 아예 없던 것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다.

아무것도 없던 맨땅 시절.

그러니까 나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 약자의 입장에서 살아가던 시절.

“나는 이 도시에 깔린 바바리안들을 향한 멸시와 조롱, 차별을 수도 없이 몸소 겪었다.”

“도시 내에서 우리 전사들은 평범한 직업을 갖는 게 불가능했고, 미궁에선 심장을 노리는 약탈자들과 싸워야만 했다.”

“당시 우리들은 어린 전사들에게 제대로 된 신발조차 신겨 주지 못했지. 지원해 줄 수 있던 것은 무기 한 자루와 7일 치 돌빵이 전부였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때 너희들은 어땠나? 그때도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나?”

“그건—.”

“아마 아니겠지.”

나는 뭐라 변명하려던 난쟁이 두목의 말을 끊었다.

그야 들어 볼 필요도 없었거든.

“만약 그랬다면, 전대 부족장이 이 회담 자리에서 청했던 부탁을 그렇게 개무시하진 않았을 테니까.”

한때 오해가 있었지만, 전대 부족장이 몰락해 가는 바바리안족을 손 놓고 바라만 본 건 아니었다.

수완은 부족했으나 그 역시 나름 노력했다.

전사들을 위해 마탑의 심장 연구를 금지시키게 도와달라는 안건을 이 회담 자리에서 꺼낸 것도 그중 하나였고.

“……과연 그것이었나? 그날의 일이 자네로 하여금 우리에게 억하심정을 갖도록 한 것이야?”

난쟁이 두목은 이제야 날 이해할 수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어린애 달래듯 말을 이었다.

“하나 그날은 어쩔 수 없었네. 마탑과 바바리안 간의 분쟁은 피해야 했으니까. 자네 바바리안족을 위해서라도—.”

뭐라는 거야 자꾸.

내가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구만.

“뭔가 오해를 한 거 같은데.”

난쟁이 두목의 말을 끊고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말한다.

“물론 나도 알고는 있다.”

그야 나는 순진한 바바리안이 아니니까.

부족장이 되어 기록을 살펴보고 역사 공부를 하며 이면에 숨겨져 있던 뒷사정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성물 전쟁 때 중립을 지킨다던 너희들이 알게 모르게 뒤에서 요정족을 지원했다는 것도.”

“그 종족 회담 직전에 마탑의 마법사들과 너희들이 은밀하게 만남을 가졌다는 것도.”

“아주 먼 옛날, 바바리안들이 도시에서 평범한 일을 갖지 못하게끔 만든 그 소문의 시작이, 사실은 다른 이종족들로부터 비롯됐단 것까지도.”

이미 나는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억하심정 따윈 없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우리가 어려울 때 돕지 않았다고, 오히려 뒤통수를 쳤다고 해서 밉거나 서운하지 않다.

“단지 싫을 뿐이다.”

“…….”

“이제 와서 균형이니 뭐니 말하는 이중적인 태도가.”

그래, 그러니까…….

“부디 내 앞에서 다시는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화합이니 균형이니 하는 헛소리들은.”

부탁하듯이 말을 하고 난 뒤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그리고 나는 그 정적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늘 생각으로만 품고 있던 말들을 각 종족들의 대표 앞에서 마침내 털어놓을 수 있어서일까.

오히려 이런 정적조차 속이 시원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흐음…….”

애석하게도, 그 시간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그대의 말뜻은 이해했소.”

요정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자네가 누구와 결혼을 해야 한다고 강요할 생각이 없으며, 어떤 선택을 하든 자네를 응원할 걸세.”

용아저씨도 동의하는 듯 말을 받았고.

“한데 그래서…….”

마지막으로 칼스타인 가주가 총대를 메듯 물었다.

“자네는 누구와 결혼하겠단 건가?”

아, 체할 거 같네 진짜.

36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42화 36

642화 정략 (6)

남들 앞에서 내 이야기를 시시콜콜 말하는 취미는 없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눈 딱 감고 말했다.

그야 대충 넘어가면 계속해서 이 문제를 언급해 올 게 분명한 데다가…….

게다가 일단은 저들에게도 딸(친딸 아님), 그리고 딸 같은 아이의 일이기도 하니까.

“미샤 칼스타인과 지금 나는 그냥 평범한 동료 관계다.”

일단 첫 마디에 가주의 이마에 주름이 잡힌다.

그리고 내 딸의 혼삿길을 막아놓고 평범한 동료라고? 하는 눈으로 나를 응시한다.

반면 요정 대표의 표정은 밝아졌다.

물론 아주 잠시간에 불과했지만.

“오, 그렇다면—.”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 역시 마찬가지다.”

이어진 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표정을 굳히는 요정 대표.

“호오, 그럼 아직 상대가 없다는 뜻이군?”

이때를 놓치지 않고 용아저씨가 틈새 시장을 공략해왔지만, 이것도 칼같이 차단했다.

“그렇다고 내가 네 사위가 될 일은 없을 거다. 펜이든, 라비옌이든 이성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으니.”

“암, 이해하네. 남녀 사이의 정이란 중요하지. 아쉽게 됐군.”

의외로 용아저씨는 내 말에 손쉽게 수긍했다.

그리고 이렇게 되물었다.

“혹시 내가 자네에게 조언을 하나 해도 되겠나?”

“……들어는 보지.”

“자네쯤 되는 인물에게는 정략혼 같은 것은 필요치 않을 수도 있네. 자네는 홀로 일어서 그 많은 것을 이뤄냈으니까.”

“하지만 말일세.”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차를 홀짝인 용아저씨가 내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그렇기에 자네가 그 누구와 가약을 맺든 자네의 혼인은 정략적으로 이용될 걸세. 부디 그 점을 유의하게.”

지금까지 결혼 얘기를 꺼낸 게 전부 이 순간을 위한 빌드업이었던 것처럼 느껴질 만큼 자연스러운 조언.

어쩌면 정말로 용아저씨는 가주나 요정 대표의 반응을 통해 내게 알려 주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노아르크 침공이니 비프론 봉쇄니 뭐니, 그만큼 혼란스러운 시국이지 않은가.

산전수전을 다 겪었을 가주나 요정 대표가 정말로 딸 같은(?) 아이들을 위해 그렇게 밀어주려 한 건 아닐  터였—.

“아무튼, 딱 정해둔 상대가 없다면 신전에 자주 좀 놀러오게. 우리 막내딸이 자네를 보고 싶어하니.”

음… 갑자기 방금 들은 조언의 의도가 불순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지만 아무튼.

“……펜은 정말로 아니다.”

“오호, 그럼 언니 쪽은 괜찮고?”

“…….”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시선으로 빤히 바라보자 용아저씨가 진중한 얼굴에 맞지 않는 경박스러운 웃음을 터트린다.

“푸하핫! 농담일세, 농담. 그러니 자네들도 더는 이 친구한테 뭐라 하지 말게. 알겠나?”

이내 용아저씨가 크게 웃으며 어느 정도 굳어 있던 분위기가 확 유해지는 게 느껴졌다.

‘이런 게 연륜인가……?’

심지어 최연장자인 용아저씨가 이렇게 나오자 가주나 요정 대표에서도 더는 말을 꺼내기 어려운 분위기가 형성됐는데…….

“그보다 나는 이번 사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네마는, 자네들 생각은 어떠한가?”

여기에 자연스러운 화제 전환까지 이어지자, 일단 내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완전히 끝이 났다.

“이번 사태라면…….”

“노아르크 침공을 말하시는 거겠구려.”

내가 접하지 못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 이때부터 나도 귀를 열고 경청했지만, 아쉽게도 이렇다 할 소득은 없었다.

멜베스나 여기나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달까?

“노아르크에 대현자의 비전을 이어받은 마법사가 있다는 소문이 있소.”

“왕가의 신물도 없이 수호 마법진을 건드렸으니 그런 소문이 나올 법도 하지.”

“단지 헛소문이 아닐 가능성도 높다고 들었네만.”

“예……. 일전에 지하 요새에서 수만에 달하는 노아르크인들을 한 번에 순간이동 시킨 그 마법도 있었으니까요.”

대화가 이어지며 멜베스에서 듣지 못한 얘기들이 몇몇 나오기는 했지만, 이건 그저 시간이 좀 더 흐르며 밝혀진 것일 뿐.

두 집단의 정보력 차이는 딱히 없어 보였다.

그야 이종족 출신의 귀족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게 바로 멜베스였으니까.

종족의 수장이 알고 있을 정보라면 당연히 그들도 아는 게 자연스럽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뭐, 딱 봐도 용아저씨는 뭔가 알고 있는 게 있는 거 같지만.’

알게 모르게 대화에서 그런 느낌이 묻어난 탓인지, 다른 대표들도 위화감을 느끼고 용아저씨를 떠봤지만, 용아저씨는 뻔뻔할 정도로 무표정하게 상황을 넘길 뿐이었다.

“글쎄, 나도 아는 게 없어서. 추후 뭔가 알아낸다면 바로 알려 주겠네.”

흐음, 뭔가 알고 있는 게 확실한 거 같은데.

이따가 따로 물어보면 나한테는 살짝 귀띔이라도 해주려나? 알 수 없으나, 이후로도 회담은 별 영양가 없는 대화만 이어지다가 결국에 끝이 났다.

“유익한 자리였소. 그럼 다음에 또 봅시다.”

자리가 파한 후에는 다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회담 장소를 떠났는데, 입구에 다다르니 왠지 모를 박탈감이 느껴진다.

“…두모카, 고생 많으셨습니다.”

“라그시안, 마차를 준비해 뒀소이다.”

“성지로 모시겠습니다, 가주.”

드워프, 요정, 수인은 물론 자작도 자기가 데려온 사병과 사용인들이 마중을 나온다. 아, 참고로 용인족은 데려온 사람이 딱 한 명이었다.

“크흠……!”

나를 보자마자 만지작거리고 있던 뭔가를 빠르게 숨기는 백발의 할배 용인.

예전에 용의 신전에서 내 통찰력을 시험해본다며 고리 퍼즐을 문제로 내줬던 바로 그 인물.

“오, 다시 구할 수 없다더니?”

흥미를 느끼며 뒤에 숨긴 퍼즐을 보려 하자 용인 할배가 기겁을 하며 몸을 돌린다.

“이, 이건 그때 그것과는 다른 물건이오…….”

엥? 근데 이 할배는 말투가 또 왜 이래.

아… 내가 이제 귀족도 되고 부족장도 되고 하니까 예전처럼 말을 놓기 어려워진 건가?

“어디 한번 봐도 되겠나?”

내 물음에 용인 할배는 몸을 움찔 떨더니 옆에 있던 용아저씨를 향해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거, 누가 괴롭히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무슨 말을 못하겠네.’

예전에는 힘도 없고 지위도 딸려서 뭘 하든지 이런 가책은 없었는데, 이제는 그냥 갑질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됐다. 안 볼 테니 얼른 가라.”

“…고맙소이다.”

아니, 고맙기는.

진짜 누가 뺏기라도 한댔나?

“그럼 우리는 이만 먼저 가보겠네. 시간이 날 때 신전에도 한번 들르게. 자네라면 언제든 환영이니.”

“알겠다.”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나중에 독대를 하자는 의미를 알아챈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용아저씨는 이를 끝으로 쿨하게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럼 이만.”

아, 이 아저씨 용언이 공간 이동 계열이었지.

진짜 용인만큼 사기적인 종족이 있기나 할까.

‘그럼 나도 슬슬…….’

적당히 부산스러운 입구를 지나쳐 밖으로 나가려던 그때였다. 어디선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뭔데, 얘는?’

시선을 보내는 이는 요정족에서 데려온 여러 인물들 중 하나로…….

‘…응?’

나와 눈이 마주친 요정족 사내가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내뻗으며 다가오더니, 그대로 정체를 밝혔다.

“처음 뵙겠소, 얀델 남작. 벨레그 슈시아 디 테르시아라 하오.”

유명하면서도 친숙한 이름이었다.

“아, 바로 네가…….”

벨레그 슈시아 디 테르시아.

요정족 내에서도 손꼽을 정도의 위상을 지닌 상위 탐험가이자…….

“에르웬의 외삼촌이군.”

에르웬에게 남은 몇 안 되는 ‘가족’ 중 하나.

직접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이 남자에 대한 이야기는 에르웬에게 많이 들었고, 그에 따라 어느 정도 호감도 갖고 있다.

그야 용살자가 요정족 성지에 테러를 가했을 때, 에르웬 자매를 살린 게 바로 이 남자였으니까.

이후 에르웬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주기도 했고.

“반갑다. 언젠가 한번은 꼭 보고 싶었는데.”

“나 역시 마찬가지라오.”

“……응?”

반가운 마음으로 악수를 청했으나, 어째선지 상대편 손아귀에서 적지 않은 악력이 느껴진다.

그래서 처음에는 정말 이게 뭔가 싶었다.

그도 그럴 게, 이런 일을 당해 본 게 언제인지 까마득할 정도였거든.

‘음…….’

어떡할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냥 손에 힘을 주지 않고 기다렸다.

에르웬에게 있어 고마운 사람이기도 하고.

애초에 내가 힘을 줘서 얘를 이겨봤자 얻을 게 뭐가 있는가?

‘암, 그래 이게 어른이지…….’

그런 마음으로 허허 웃으며 가만 있자니, 저쪽에서 힘을 풀며 악수가 끝났다.

그리고…….

“역시 소문은 전혀 믿을 게 못되는구려.”

…응?

뭐지? 내 힘이 약하다고 생각해서 자신만만해진 건가?

고개를 갸웃하던 차였다.

“행실 자체가 조급함과는 거리가 멀고, 의미 없는 싸움엔 굳이 가치를 두지 않으니 더욱더 상대하기 까다로운 사람이란 뜻이었소.”

느닷없이 칭찬의 말을 늘어놓던 그가 진중한 얼굴로 내게 허리를 숙였다.

“덕분에 걱정은 덜었구려. 앞으로 그 아이를 잘 부탁하리다.”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만약 내가 악수에서 힘을 줘서 이겼다면 이런 평가가 나오지 않았을 테니까.

다만, 그런 애매한 기분도 잠시.

“그럼 이만…….”

이내 요정 대표의 눈짓을 받고 무리에 합류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또 다른 종류의 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벨레그 슈시아 디 테르시아…….’

왜 자꾸 어디서 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지?

***

종족 회담은 생각보다 맛볼 게 없는 자리였다.

또한, 전혀 예상치 못한 종류의 불편함이 가득한 자리이기도 했다.

‘……후, 딱히 한 건 없는데 엄청 피곤하네.’

이제 다음 미궁이 열릴 때까지 남은 스케줄은 이틀 뒤에 열릴 왕실 회의가 전부.

뭐, 긴 탐사를 이제 막 끝내고 나온 만큼, 이번 탐사는 한 번 스킵할 예정이지만…….

‘안 들어가는 거랑 별개로 궁금하기는 하단 말이지…….’

앞으로의 정세가 어떻게 변할까.

내 경험상 이런 시국에 미궁에 들어가면 꼭 안 좋은 일이 생기던데.

“에휴…….”

잠시 거리에서 고민을 하던 나는 카르논의 행정청 본부에 들러 성지에 연락을 보냈다.

외출한 김에 며칠 더 머무르다가 아예 왕실 회의까지 참석을 하고 돌아가겠단 내용이었는데…….

쿵-!

이내 행정청에서 나온 나는 곧장 마차를 타고 노움트리로 이동했다.

그야 용아저씨라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실제로 언제든 오라며 내게 무언의 사인을 보내기도 했고.

피곤하다고 쉴 시간에 용아저씨나 한번 독대하고 오는 편이 생산적이라는 판단.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헤어질 때 나도 같이 데려가 달라고 할걸…….’

그래도 늘 그렇듯 코를 골며 잠들어 있자니 어느덧 마차는 목적지에 도착했고, 마차에서 내려 용의 성지에 들어서는 과정에도 별문제는 없었다.

“얀델 남작의 방문을 환영하오.”

용아저씨의 언질이 있었는지 용인족 출신 문지기는 내 신원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고 문을 열어줬다.

그리고…….

‘도보로 가려니까 진짜 힘드네.’

한참이나 산을 올라간 나는 마침내 용인족의 성지, 그 가운데 위치한 용신전에 도착했다.

“흐음, 이렇게 바로 올 줄은 몰랐네만.”

“왜? 언제든 오라면서? 그냥 한 소리였나?”

“솔직히 말해… 자네가 날 찾아온다면 왕실 회의는 끝낸 다음일 거라 생각하긴 했네.”

“우리는 너희처럼 오래 살 수 없으니까. 매 하루를 충실히 살아야지.”

“하루를 충실히라……. 참으로 좋은 말일세.”

“아무튼 간에.”

길게 서론을 가질 만한 사이도 아니고, 서론이야 앞선 회담에서 충분히 나눴던 만큼 나는 만나자마자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혹시 내게 뭔가 알려 줘야 할 얘기가 있는 건가? 왠지 그런 눈치였던 거 같아서.”

“사실 아까도 말했듯, 나는 자네가 왕실 회의가 끝난 이후에 찾아올 거라 여겼네. 그때 자네의 생각을 듣고 조언을 구한다면 조언을 주려 했지.”

“……회의에서 뭔가 일이 벌어지는 건가?”

“일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겠다마는……. 어차피 자네도 곧 들을 얘기니 미리 말해주겠네.”

이내 용아저씨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게 총 두 개란 것을 먼저 밝힌 뒤에 말을 이었다.

“일단 첫 번째는 자네의 혼인일세.”

“혼인……?”

“왕실에서 자네와 인족 출신 귀족 여성과의 혼사를 추진하고 싶어하네.”

왜 다들 내 연애사에 그리 관심이 많은 걸까.

41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43화 41

643화 커밍아웃 (1)

왕실에서 인족 출신의 귀족 여성과 나를 혼인시키고 싶어 한다.

그 액션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순수한 사람이라면 왕가에서 나를 좋게 봐줬다고, 이제부터 밀어주려는 거 같다고 기뻐할 수도 있을 테지만…….

“라피르, 하나만 묻겠다.”

“해보게.”

“왕가에서 내게 목줄을 채우고 싶어 하는 건가?”

내 물음에 용아저씨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글쎄, 그것까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하지만……. 자네의 선택은 왕가 입장에서는 하나의 대답이 될 걸세.”

“인족과 혼인을 한다면 밑으로 숙이고 들어간다는 뜻이 될 테고…….”

“거절을 한다면 그 반대가 되겠지.”

용아저씨가 왜 나보고 어떤 여자랑 결혼을 하든 정략적으로 이용될 수밖에 없다고 했는지 알 것도 같다.

“라피르, 그때의 약속은 아직도 유효한가?”

“자네를 향한 용인족의 무조건적인 지지와 협력을 말하는 거라면 그렇네. 여전히 유효하네. 아, 물론 그때 얘기한 대로 왕이 개입하지 않은 경우라면 말일세.”

“그렇군…….”

“한데 너무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일단 최악을 먼저 가정하는 게 습관인지라.”

이 부분은 우선 나 혼자 생각을 더 해봐야 할 거 같다. 따라서 용아저씨에게 몇 가지만 더 묻고서 이 화제는 끝냈다.

‘왕이 개입했는지 아닌지도, 혼인 상대가 누군지도 모른다라…….’

그래도 미리 언질은 받았으니, 왕실 회의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혼인이 첫 번째라면, 두 번째는 뭐지?”

이내 나는 용아저씨에게 듣지 못한 두 번째 소식을 물었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미궁의 봉쇄일세.”

“…봉쇄라면?”

“말 그대로일세. 이유는 나도 잘 모르네만, 왕실 회의에서 미궁 봉쇄가 안건으로 나올 걸세.”

“확정난 이야기는 아니란 뜻인가?”

“그렇지는 않네. 형식상 안건으로 올려 이야기를 나눌 뿐, 이미 내부에서 결정이 난 듯하니까.”

“그렇군…….”

이후 봉쇄를 하는 일정 등 관련 상세 사항들을 물었으나, 용아저씨도 거기까지는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

그렇게 불편하게 서 있는 채로 고민에 잠겨 있자니 용아저씨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하나 더 조언을 해도 되겠나?”

“너라면 얼마든지.”

이내 고개를 끄덕이자, 내가 종족 회담에서 했던 말을 용아저씨가 똑같이 반복했다.

“자네는 바바리안족의 부족장이며, 라프도니아 왕국의 작위 남작이네. 또한 최근 급격히 성장 중인 아나바다 클랜의 마스터이기도 하지.”

무슨 말을 하려는진 이미 알 거 같았다.

“자네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건. 이제 한 사람의 전사로 살아갈 순 없는 것이네.”

성지의 전사들.

이제 우리 가문의 가신이 된 수천 명의 비프론 주민들.

그리고 내 동료들까지.

“책임질 사람들이 수없이 많지 않은가. 자네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든, 자네의 결혼은 자네 한 명만의 결혼이 될 수 없네.”

지금 용아저씨는 말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굉장히 부드럽게 혼을 내고 있었다.

“그들을 위한 선택을 하게. 자네를 위해서라도.”

뒤통수를 후려 맞은 거 같았다.

하기야 용아저씨 입장에서는 결혼을 미루는 내가 책임에서 회피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귀족들의 정략혼은 선택 사항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에게 사랑은 낭만이며, 시대를 불문하고 낭만은 언제나 비효율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

“여기까지가 내가 자네에게 해주고 싶었던 얘기의 전부일세. 너무 고깝게 듣지 않았으면 좋겠네.”

“……고깝기는. 틀린 말도 아닌데.”

어쩌면 나는 낭만주의자일지도 모른다.

현대인의 떼를 덜 벗겨냈다… 라고 하기엔 애초에 현대에도 꽤 그런 경우가 많았으니까.

재벌들 간에 정략혼 같은 게 아니더라도,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결혼은 현실이라고.

“부디 자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

“걱정 마라. 충분히 도움이 됐으니까.”

치레의 말이 아니라 진심이다.

덕분에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거 같거든.

***

“라비옌은?”

“글쎄, 그 아이는 요즘 성지에 잘 오지 않아서. 사실 나도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지 잘 모르네.”

“대화를 자주 나누지 않는 편인가?”

“자네도 자식을 낳아보면 알 것이네. 내가 원한다고 대화가 가능한 게 아니란 것을.”

“…그렇군.”

“어느 순간부터 필요한 대화가 아니면 잘 하지 않게 되더군. 라비, 그 아이도 어릴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툴툴거리는 용아저씨를 보니 뭔가 웃기다.

자식을 둔 부모는 다 저렇게 되는 건가?

아무튼, 용아저씨와의 대화가 끝난 다음에는 그의 제안으로 용꼬맹이 펜과 오랜만에 만남을 가졌다.

“왔네? 영영 안 오려는 줄 알았는데.”

“내 사정을 빤히 알면서 그러기냐?”

“다행이야. 살아 돌아와서.”

“…….”

용살자의 심장을 가져온 은인이기 때문일까?

틱틱거리던 태도도 이제는 거의 다 고쳐져 살가운 반응을 보인다.

“근데… 나 뭐 달라진 거 모르겠어?”

“모르겠다.”

“키가 컸다고, 이만큼이나!”

“오.”

그러고 보니까 키가 조금은 자란 거 같다.

뭐, 여전히 꼬맹이 같은 발육 상태이긴 하지만.

‘옛날에 용살자놈한테 저주를 거느라 그 대가로 몸의 시간이 멈췄었댔지…….’

아무래도 다시 몸이 회복되며 예전에 멈췄던 성장이 다시 진행되기 시작한 모양인데…….

“…좀만 기다려. 나도 금방 언니처럼 될 거니까.”

“어…….”

라비옌처럼 되겠다는 건 좀 욕심이 아닌가 싶다.

거진 1년 동안 겨우 요만큼 컸으면 다 커도 꼬맹이과에 속하는 건 그대로일 거 같거든.

물론 이제 건강해진 애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건 암만 나라도 무리였지만.

“그래, 그래. 응원하마.”

“아무튼, 온 김에 얘기나 해줘.”

이후로는 지하 1층 탐사 이야기를 해주며 시간을 보냈고, 그렇게 용의 신전에서 외박.

일어난 다음엔 용아저씨랑 펜이랑 셋이서 아침 식사를 하고서 일찍이 황도 카르논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귀족이 좋긴 하네.’

하루 일찍 왕실 회의가 열리는 지혜의 궁에 도착해 배정받은 귀빈실에서 놀고 먹고 하며 하루를 또 보냈다.

아니, 정확히는 보내려 했다.

하지만…….

똑똑.

어찌 알았는진 몰라도 입궐을 하자마자 자꾸만 귀족들이 찾아왔다.

“하하, 얀델 남작께서 일찍 도착했다고 해서 왔소이다. 잠깐 차라도 한잔 마시며 화담이라도 나누겠소?”

순수하게 사교를 목적으로 찾아온 자.

“얀델 남작에게 제안드릴 게 있는데, 어디 한번 들어보시겠소? 절대 손해는 보지 않으리라 내 장담을 하리다.”

사업가로 위장한 잡상인.

“혼인 상대를 찾고 있다는 얘기가 있던데…….”

자식팔이.

그리고…….

‘뭐야, 이건?’

방문 아래 틈새로 스윽 밀려 들어온 정체 불명의 편지까지.

[자정, 정원 분수, 조용히 올 것.]

밑도 끝도 없이 이 세 가지만 적혀 있는 편지에는 발신인 이름 같은 건 적혀 있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까 잠시 고민을 해봤지만…….

‘의문의 괴편지를 어떻게 참아?’

결국 밤이 되어 약속한 시간이 되었을 때, 나는 몰래 창문으로 나가서 약속 장소로 향했다.

미로 같은 형태의 정원 중심부에 위치한 분수대.

그 앞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머지않아 편지를 보낸 정체 불명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롬 세인트레드.”

백작 작위를 지닌 제1 왕실기사단장이자, 빛의 기사라는 이명을 지닌 왕국의 수호자.

아니, 정확히는 그런 신분을 가진 그의 몸을 빼앗은 고대의 영웅.

용기사, 코넬리우스 브륀그리드.

“편지를 보낸 게 너였을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은밀히 만나는 게 좋을 듯해서 말이네. 다행히 따라나온 쥐새끼는 없더군.”

“그래서 나는 왜 부른 거냐?”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묻자, 촌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건가? 아니면,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건가?”

아, 맞다.

나가서 템 돌려주기로 약속을 했었지.

이내 나는 서둘러 아공간을 열어 촌장이 내게 맡긴 카루이의 심장을 꺼냈다.

‘뭔가 조금 맘에 걸리긴 하는데… 그래도 약속이긴 하니까.’

애초에 선택지가 없기도 했다.

이걸 안 주면 촌장이 어떤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 알 수 없으니.

“…….”

물건을 건네받은 촌장은 다른 이상이 없는지 한참 세심히 살펴보더니, 이내 물건을 품에 집어넣었다.

“자, 그럼 이제 용건은 끝이냐?”

“일단 가장 중요한 용건은.”

“더 남았다는 말이군?”

오히려 지금부터가 진짜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에 정신 바짝 차리며 촌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왕실 회의에서 자네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걸세.”

“알고 있다.”

“그렇다면 얘기가 빠르군.”

어떤 말이 나오든 포커 페이스를 지키려 했건만.

“가급적이면 그 여성과 결혼하게. 왕실이 자네에게 던져주는 마지막 동아줄이니.”

“동아줄……? 대체 뭔 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

“말 그대로일세. 그들의 제안에 응하지 않는다면, 높은 확률로 자네와 자네 동료들은 무사하지 못할 걸세.”

이놈이 괴물로 살아간 기간이 너무 길어서일까?

평범한 바바리안인 나로서는 도무지 대화의 템포를 따라가기 어렵다.

“이해하기가 어려우니 조금만 천천히, 조금만 더 자세히 말해라.”

“왕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재상이 자네의 성장을 경계하는 중이네. 자네는 합법적으로 여러 부인을 둘 수 있고, 그럴 만한 여인들도 여럿 있지.”

적묘족 가주의 딸 미샤 칼스타인.

요정족의 순혈을 품은 에르웬.

그리고…….

‘용아저씨의 딸내미들도 있지.’

물론 내가 난봉꾼인 것도 아니고, 이들 전부와 결혼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결혼을 ‘정략’적으로만 보는 그들 입장에선 충분히 경계가 될 만하다.

나 스스로 말하기엔 좀 그렇지만.

바바리안족에서 나온 불세출의 영웅을 중심으로 이종족들이 똘똘 뭉치는 상황이 우려될 수 있을 테니까.

다만, 여기에도 한 가지 모순이 있긴 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근데 인족 출신 귀족이랑 결혼하는 게 무슨 상관이냐? 막말로 그런 다음에도 다른 여자를 들이면—.”

“그게 불가능하기 때문일세.”

“…응?”

내가 멈칫하자 촌장이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라프도니아 귀족법상, 작위 귀족이더라도 부인을 한 명밖에 둘 수 없는 경우가 존재하네.”

“……아.”

그제야 나도 잊고 있던 법률 하나가 떠올랐다.

“부인이 똑같은 작위 귀족일 때…….”

“알고 있었군. 엄밀히 말하자면, 배우자의 작위가 더 높을 때를 뜻하네마는……. 어찌 된 게 이런 법률은 수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가 않나 모르겠네.”

촌장이 나이 많은 티를 내며 뭐라 뒷말을 이어갔지만,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잠깐만…….’

라프도니아의 귀족가 중, 여성이 작위를 물려받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또한, 그 와중에 자작 이상의 작위를 가진 귀족은 더더욱 드물며…….

‘그중 아직 미혼인 여자 작위 귀족이 있던가……?’

내가 알기로는 없다.

……아니, 없었다.

적어도 내가 막 귀족이 되어 이쪽 공부를 열심히 했을 때는 말이다.

시간은 언제나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법.

“자, 자, 잠깐만…….”

현재 시점에서는 라프도니아에 딱 한 명 존재했다.

나보다 작위가 높으면서도 미혼인 여자 귀족이.

“혹시 라그나 페프로크 여백작인 거냐? 내 결혼 상대가?”

“정답일세.”

“…….”

후작, 이 새끼가 진짜 미친 건가?

25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44화 25

644화 커밍아웃 (2)

라그나 리타니옐 페프로크.

라프도니아의 재상, 테르세리온 후작의 사생아.

뭐, 지금 실제로 쓰는 이름에는 보모의 이름인 ‘리타니옐’이 빠져 있긴 하지만 아무튼.

“표정이 좋지 않군? 내 듣기로는 상당한 미인이라 들었네만.”

뭐, 그거야 알지.

근데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단순히 이번 혼담으로 친구 사이에 괜한 껄끄러움이 생긴다는 것보다도.

“페프로크 여백작은 재상의 사생아다.”

“그거라면 이미 확인했네. 재상이 강수를 뒀더군. 그만큼 자네의 성장세가 독보적이란 거겠지.”

“너는 그럼에도 내가 이 결혼을 해야 한다는 거냐? 결혼을 하는 순간 내 목에는 보이지 않는 목줄이 달릴 게 분명한데?”

“선택지가 없지 않은가. 재상이 본격적으로 자네를 견제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상상해 보게.”

견제를 했을 때라…….

깊게 상상할 필요도 없이 수많은 방해공작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번 7구역 재건 공사에 훼방이 들어오고.

그에 따라 비프론 출신 가신들은 세금을 내지 못해 내년이 되자마자 떼거지로 형장에 오르고.

어쩌면 바바리안족의 심장이 다시 연구 가능 물품으로 변경될지도 모른다.

또한, 우리 전사들에 한해 검문이 강화되며 이상한 누명을 쓰게 될 수도 있을 테고.

“…….”

이내 심각한 표정으로 인상을 쓰고 있자, 촌장이 날 설득하듯 말했다.

“결혼을 너무 신성시하지 말게. 일단은 굽히고 들어간 뒤에 힘을 키우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근데 얘도 좀 웃기다.

아까부터 말을 하는 걸 들어보면 좀 위화감이 느껴진다 해야 하나?

“근데 너는…….”

잠시 주저하긴 했지만, 그냥 늘 그랬듯 노빠구로 물었다.

“왜 아까부터 자꾸 날 설득하려 드는 거냐?”

“그거야 자네가—.”

“그러니까 내가 잘못되든 말든, 그걸 왜 네가 걱정을 하냐는 뜻이다.”

오지랖을 부리는 이유가 뭔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촌장은 잠시간의 텀을 두고서 입을 열었다.

“그야 걱정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

“내 소망을 이루기 위해선 자네가 필요하니까.”

딱 봐도 진심이 묻어나는 말이긴 한데, 이해하는 건 또 다른 영역이었다.

“소망을 위해 내가 필요하다고?”

대체 왜 자기 소망을 위해 나를 찾는 놈들이 이렇게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나도 좀 궁금하다.

얘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그냥 터놓고 말해봐라. 뒤에서 머리만 굴리는 놈들은 질색이니까.”

“자네가 그런 성격이란 건 알고 있네. 하지만 아직 시기가 아닐세. 다만 딱 하나만 말해주자면, 자네와 나는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할 가능성이 높네.”

“그러냐? 그럼 나도 네 의견은 걸러 들을 수밖에 없겠는데?”

이내 협박을 하듯 말했지만, 촌장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 평온한 표정이었다.

“자네 판단대로 하게. 내가 보기엔 여백작과 결혼하는 편이 훨씬 나은 선택인 듯하지만… 그건 결국 내 입장 아닌가. 미래에서 돌이켜 봤을 때 뭐가 정답인지는 그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으니.”

“…….”

“그보다 이제 시간이 늦었군. 더 있다가는 분명 누군가의 이목을 끌게 될 것이니, 오늘의 만남은 여기까지만 하는 거로 하지. 내 또 연락하겠네.”

이후 촌장은 정말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즉각 등을 돌려 정원 분수대를 떠났다.

솨아아아아아-!

불어오는 찬바람에 흩날리는 수풀.

그 속에서 나는 멍하니 분수대를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결혼이라…….’

결정을 내리는 것까지 오랜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아니, 애초에 결정 자체는 용의 신전에서 내렸던 것과 동일했다.

하지만…….

‘후작이 저런 강수까지 뒀으니…….’

맞받아치기 위해서는 나 역시 훨씬 더 강한 수를 준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진짜 그 방법뿐인 건가?’

정말이지 오랜만에,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했다.

***

다음 날 아침, 왕실 회의가 열리기 한 시간 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일찍부터 일어나 대충 몸단장을 끝냈다.

그리고 슬슬 나가볼까 하던 차.

똑똑똑.

아침 댓바람부터 방문객이 찾아왔다.

어제처럼 잡상인이나 사교꾼 같은 부류인가 싶어 무시할까도 싶었지만…….

똑똑똑.

똑똑똑!

시간 텀을 두고서 울려 퍼지는 노크 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

‘대체 누구야?’

일단 얼굴을 봐야겠다 싶어 문을 확 잡아당겨 열자, 전혀 예상치 못한 손님이 그 앞에 서 있었다.

“…흐악!”

갑자기 문이 확 열리자 놀란 듯 괴상한 소리를 내는 푸른 머리의 여인.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 귀족이오’ 하는 듯한 차림새였으나 어째선지 위엄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졸린 눈.

조금 있을 회의에서 언급될 혼담의 대상자.

“라그나……?”

“……!”

이내 눈이 마주치자 라그나가 어깨를 움찔 떨며 확 시선을 피한다.

대충 왜 저러는지는 알 거 같았다.

그야 나도 비슷한 느낌이었거든.

“…….”

“…….”

왠지 자연스럽게 눈을 마주치기가 어렵다.

그래서 골든 타임을 놓치기 전에 얼른 뭐라도 말을 꺼냈다.

“오랜만이다, 라그나. 진작에 한번 보러 갔어야 했는데. 요즘 이것저것 일이 많아서.”

“예……. 오랜만입니다. 그리고 보러 오지 않은 건… 괜찮습니다. 바쁘게 지냈다는 건 소식을 들어 알고 있으니.”

“그렇다면 다행이고.”

“…….”

“……일단 안으로 들어오겠나?”

계속 밖에 세워두기도 그래서 꺼낸 말이었으나, 어째선지 라그나가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친다.

그리고 그 행동을 이상하게 바라보자…….

“아, 아뇨! 이건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런 뜻이 뭔데?”

“다, 단지! 괜히 방에 들어갔다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곤란하니까 말입니다…….”

“아아… 그, 그것도 그렇군?”

결국 어떻게든 피하고자 했던 어색한 침묵이 나, 그리고 라그나 사이에 맴돈다.

다만, 고맙게도 이번엔 라그나 쪽에서 먼저 입을 열어 주었다.

“그… 사실 오늘 찾아온 건 미리 드릴 말씀이 있어서입니다.”

“내게 할 말?”

“그게…….”

라그나는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말꼬리를 흐렸고, 그 분위기를 통해 얘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나도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이번 회의에서… 조금 뜻밖의 얘기가 나올 텐데, 너무 놀라지 말았으면 해서 말입니다. 비요른 얀델, 당신과 저는 귀족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자리에 있다 보면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일이 진행이 되기도 합니다……. 아시지요?”

본인도 말을 꺼내기 어려운지 괜히 장황하게 늘어지는 말.

속 시원하게 정리하고 싶지만, 뒤에 있을 계획을 위해 지금은 모른 척하고 있는 게 최선이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지, 지금 당장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 아버님께서 뭔가 이것저것 막 진행을 하셨습니다. 그, 그러니 회의에서 무슨 얘기를 듣던 오, 오해를 하지는 않았으면 해서…….”

“알겠다. 회의에서 무슨 말이 나올진 몰라도 절대 오해하지 않겠다.”

“아! 물론 그렇다고 제 쪽에서 싫다는 그, 그런 뜻은 아닙니다! 아시겠습니까?”

“알겠다.”

“예… 그럼 다행입니다. 이따가 뵙지요…….”

이내 고개를 끄덕이자 라그나가 총총 걸음으로 빠르게 문앞에서 종적을 감췄다.

정말 혼자서 몰래 찾아온 것인지, 라그나의 수족인 현별이는 보이지 않았다.

‘슬슬 가야겠네.’

이내 시간을 확인한 나는 복도로 나가 사용인의 안내를 받으며 회의가 열릴 궁전 내부로 들어갔다.

‘…여긴 원탁을 안 쓰네.’

도착한 실내에는 아주 기다란 직사각형 모양의 탁상이 놓여져 있었는데, 자리는 거의 다 비어 있었다.

그야 이게 왕실 회의의 전통이거든.

참가자 전원이 번호를 부여받으며 그 번호가 해당 참가자의 암묵적인 서열이 된다.

그리고 나 같은 경우에는…….

“이곳이 오늘 얀델 남작님께서 국무를 보실 자리입니다.”

상석과 가장 멀리 떨어진 끝자리.

이내 내가 자리에 앉고 2분 정도 기다리자 문이 열리며 한 명의 귀족이 더 들어오며…….

툭.

내 바로 맞은편 자리에 착석한다.

나보다 서열이 하나 더 높은 귀족이었고, 거기서 또 2분 정도 기다리자 한 명이 들어왔는데…….

‘이게 뭔 개뻘짓인지…….’

그냥 한 번에 다 들어오면 될 것을. 2분 주기로 한 명씩 입장하는 걸 보면 속이 터져 죽을 것만 같다.

비효율의 극치라고 해야 하나?

‘왕실 회의의 총 정원이 50명이니…….’

이렇게 되면 말석은 거의 한 시간 반에 가까운 시간을 멍하니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기만 해야 한단 계산이 나온다.

뭐, 이 치욕스러운 말석 자리조차 누군가에게는 선망의 자리겠지만.

“…….”

“…….”

아무튼, 그렇게 회의실에 한 명씩 채워지기 시작했는데 몇 명이 채워지든 무거운 정적이 가득했다.

너무 심심해서 옆에 귀족에게 말을 걸어보기도 했지만, 내가 말을 걸자 화들짝 놀라며 정면만 바라봤기에 잡담은 포기.

‘그냥 좀 잠이나 자야지.’

이내 반쯤 목을 꺾고 졸고 있자니,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어느새 20번대 귀족들도 입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뭔데 얘는 또?’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웬 귀족 남자 하나가 걷는 것도 멈춘 채 나를 빤히 꼬나보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숫자를 세보니 이번 회의의 서열 27위에 해당하는 놈인 거 같은데…….

녀석은 내가 앉은 자리와 나를 보더니.

“풋.”

의미 모를 조소를 뱉으며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물론 그냥 참고 있을 내가 아니었다.

“어이, 잠깐만.”

“……어이?”

“아, 실례했다. 이름이 뭔지 기억이 안 나서.”

“그대라면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군. 반갑소이다. 휴테일러 백작이외다.”

“반갑다, 휴테일러 백작. 근데 방금은 왜 웃은 거지?”

“…문제라도 있소? 그냥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영웅을 보니 기분이 좋아서 웃은 것이오만?”

귀족어로 말과 행동을 해석해보자면, 유명세를 얻고 요즘 잘나간다 잘나간다 하는 내가 이곳에선 말석에 있는 게 보기 좋았다는 뜻.

‘뭐야, 그냥 평범한 머저리였잖아?’

의문이 풀린 나는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냐? 그럼 가봐라.”

혹시 뭔가 비열한 꿍꿍이를 감추고 있거나 한 놈이면 좀 떠보려 했는데, 그런 게 아니면 됐다.

관심을 주는 것 자체가 아깝다.

“얀델 남작, 선배로서 조언을 하자면—.”

“아, 알겠다.”

“…그런 태도는 이곳 왕실 회의에서는 버리는 게 좋을 것이오. 아니면 호되게 큰코 다칠 터이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소지로 귀를 후비자 휴머시기 백작이 별 미친놈 다 보겠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며 자기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슬슬 익숙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얼마 전에 종족 회담에서 만나기도 했던, 재상의 왼팔 25위, 맥시랜드 자작부터 시작해.

“…….”

나와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목례만 하고서 자기 자리로 향하는 21위, 라그나 페프로크 여백작.

터벅, 터벅.

반면 나랑은 눈도 마주치지 않으며 무뚝뚝하게 자기 자리에 앉은 14위, 촌장.

“여기서 보게 되니 아주 반갑구려.”

멜란드 카이슬란의 친형이자, 나름 큰 귀족 연합체의 수장인 11위, 카이슬란 백작.

“하하, 오랜만일세 남작. 소식은 들었네. 이번에도 큰 활약을 했다지?”

불편한 관계였지만, 나와 사진을 찍고 이제는 ‘오랜 벗’ 타이틀을 돈 주고 구매한 6위, 알미너스 백작.

그리고…….

“새로운 신성의 등장은 언제나 환영이지. 항상 다른 선택지도 있음을 기억하게나.”

나를 보자마자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지나가는 3위, 케알루너스 공작.

“…….”

반대로 눈인사도 하지 않으며 도도하게 자기 자리를 향해 착석한 2위, 재상 테르세리온 후작까지.

아, 참고로 서열 1위 자리는 공석이다.

그야 저기는 왕의 자리로, 저 자리만큼은 온갖 행사에서 왕의 대리인 역할을 맡는 후작도 앉을 수 없던 것인데…….

‘한 자리를 빼면 사실상 총원은 49인인 셈이네.’

아, 참고로 상석을 기준으로 케알루너스 공작과 재상이 마주보고 앉은 형국이었는데…….

상석 기준으로 오른편에 앉은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바쁘신 와중에 참석해주신 여러분께 마르타눅스 폐하를 대신해 진심 어린 감사의 말을 먼저 전하겠소.”

그런 인사말을 시작으로 재상은 자연스럽게 모든 귀족들을 일으켜 세웠고, 그다음에는 다들 아는 대로 공석 자리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한국으로 치면 국기에 대한 경례와 비슷한 예식.

다만, 귀족들이 모인 만큼 이후로도 딱딱한 서론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노아르크 침공, 비프론 사태 등.

최근 있었던 사건을 말하며 최근의 정세를 논하며, 그대들이 있기에 든든하다며 참석한 귀족들을 치하하고.

지하 1층 탐사가 성공적으로 끝난 것을 자축하며 이 모든 게 라프도니아의 가호라 말하기도 하는 등.

필요도 없는 얘기를 한참이나 이어가며 시간을 낭비한 후에서야.

“자, 그럼 첫 번째 안건부터 얘기를 해보겠소.”

마침내 첫 왕실 회의가 시작됐다.

113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45화 113

645화 커밍아웃 (3)

이종족 연합 멜베스.

그곳에서 왜 왕실 회의의 참석 권한을 가지고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는가.

그 이유는 회의가 시작됨과 동시에 알 수 있었다.

“첫 번째 안건은 노아르크 세력의 침공이오.”

종족 회담, 멜베스의 집회 등 여러곳에서 수없이 언급됐던 그 주제.

다만 담담하게 뱉어지는 후작의 말 속에는 그 어디서도 알 수 없던 정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예측보다 이르기는 하였으나 금월 초에 침공이 이루어졌소.”

이미 왕가는 그들의 침공조차 알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왕가가 완전히 전지전능한 능력을 갖췄단 뜻은 아니지만.

“하나 모두 알다시피 절멸 계획은 뜻밖에 변수로 인해 실행되지 못했지.”

모두 알다시피는 무슨.

바바리안은 사람 취급도 안 해주는 건가?

“…절멸 계획?”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혼잣말을 뱉자, 후작의 말이 잠시 멈춰지고 모든 귀족들의 이목이 내게 집중된다.

나를 향하는 시선들은 제각각이었다.

‘말석 따위가 혼잣말?’

대충 이런 느낌으로 서열 꼴등인 내가 회의 중에 후작의 말을 끊은 것 자체를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자도 있었고.

‘암, 저 꼴통이면 저럴 만하지.’

내심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자도 있었다.

케알루너스 공작, 알미너스 백작 등.

어떤 식으로든 나를 직접 겪어본 이들은 이런 거로 딱히 놀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 물론 후작도 포함이었다.

“그러고 보니 얀델 남작은 이번 회의가 처음이니 절멸 계획에 대해 알지 못할 수도 있겠군?”

내 혼잣말에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후작.

이에 나를 향하던 눈깔 중 하나가 더욱더 동그랗게 변한다.

아까 나를 비웃고 지나갔던 휴뭐시기 백작이었다.

뭐, 내가 이러면 후작이 호통이라도 칠 거라고 생각했던 건가?

알 수 없지만, 딱히 신경 쓸 부분은 아니다.

“절멸 계획은 노아르크 세력의 목적이 비프론이란 정보를 입수하고서 세워진 계획일세. 그들을 그곳에 몰아넣고서 한 번에 소탕할 속셈이었지.”

“하지만 그게 잘 안 됐던 거군?”

“애석하게도.”

그리 말한 후작은 이내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군중을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번 계획의 변수는 노아르크 세력에서 등장한 그 의문의 마법사로부터 시작됐소.”

전학 온 첫날 같은 느낌이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진도에 잘 따라갈 수 있었다.

‘의문의 마법사라면 역시 그 사람 말고는 없겠지.’

지하 요새에 있던 고대 마법진을 활성화하며 수만 명에 이르는 숫자를 단숨에 순간이동 시켰으며, 성벽 바깥에서 7층과 이어지는 포탈을 연 바로 그 마법사.

“그의 정체에 대해선 아직 노인이라는 것 외에 어떠한 정보도 얻지 못했으나……. 정보부에선 수호 마법진에 손을 댄 것도 그자일 거라 추측 중이오. 그는 수상할 정도로 고대 마법에 능한 듯보였으니.”

아무튼, 지금까지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아주 간단하다.

왕가에서는 노아르크 놈들을 비프론에 몰아넣고 한 방에 터트리려 했지만, 의문의 마법사가 수호 마법진을 발동시키며 실패.

“현재 외부에서 수호 마법진을 해제할 방법을 찾고 있으나, 그 의문의 마법사에게 많은 권한을 빼앗긴 탓에 당장은 진전이 보이지 않는 상태요.”

이런 자리에서 오피셜로 밝힐 정도면, 비프론에 들어갈 방법은 아예 없다고 봐야 할 터.

‘이걸 왕실이 무능하다고 봐야 하는지, 아니면 저쪽이 대단한 건지…….’

잘 모르겠으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왕가 놈들이 보통 지독한 놈들이 아니라는 것.

“정보부에서는 그 의문의 마법사가 이미 폐쇄된 비프론의 차원 광장을 활성화 시키는 일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소. 따라서…….”

이내 후작이 잠시 말을 멈췄다가 입을 열었다.

“이 자리를 빌어 공식적으로 미궁 폐쇄를 건의하는 바요.”

미궁 폐쇄.

이 라프도니아라는 도시 국가의 구조를 생각하면 너무나도 무거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하나 이 주제가 언급됨과 동시에 케알루너스 공작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받는다.

“확실히… 미궁을 아예 닫아버린다면 저쪽에서도 별다른 수가 없겠구려.”

공작 다음은 알미너스 백작이었다.

“제발로 밖으로 나오든가, 아니면 그 안에서 굶어죽든가 선택해야겠지요.”

다 짜여진 각본이었다.

애초에 이 사람들이 이 얘기를 여기서 처음 듣는 것도 아닐 테니까.

원래라면 대충 이렇게 여론을 조성한 뒤, 이후에 만장일치에 가까운 투표로 ‘미궁 폐쇄’가 결정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눈치라는 게 없는 바바리안.

“후작,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나?”

“…해보게.”

“무조건 미궁 자체를 폐쇄해야 하는 건가?”

내 질문에 27위 휴머시기 백작이 참지 못하고 내게 한소리를 뱉었다.

“생각을 해보시오.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후작께서 미궁 폐쇄를 이야기 했겠소?”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

근데 애초에 나는 다른 방법이 있는지가 궁금한 게 아니라서 말이지.

왜 이 방법밖에 안 되는지, 난 그게 궁금하다.

“정말인가?”

이내 휴뭐시기 백작의 말은 한 귀로 흘리며 후작에게 묻자, 후작이 귀찮다는 눈빛을 하면서도 친절히 답은 해주었다.

“미궁에 관한 차원 마법은 자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하네. 다만 간략하게나마 설명을 해주겠네.”

간략하게라고 말은 했지만, 실상은 굉장히 길고 지루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래도 일단 쉽게 정리를 해보자면.

미궁은 서버.

포탈은 로그인 수단이다.

하나 여기서 문제는 로그인 수단만 있으면, 왕가 쪽에서 이를 제어할 방법이 없다는 것인데…….

‘그래서 서버 자체를 잠시 닫겠단 거구나. 서버를 닫으면 로그인 수단이 있어도 입장이 안 되니까.’

“이해가 됐나?”

“조금은. 설명 고맙다!”

궁금증이 풀린 이후로는 나도 더 이상 나서는 일 없이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만 보았다.

미궁 폐쇄 후 탐험가들의 반발이 있지 않겠느냐.

올해 세금을 내지 못하는 탐험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 미궁 폐쇄를 한다면 얼마나 유지할 것인가.

그런 세부 사항들을 의논하는 시간이 있었고, 결국 마지막에는 후작의 입을 통해 정리가 됐다.

“오늘부로 미궁은 폐쇄될 것이며, 다시 개방하는 것은 이후 회의를 통해 결정할 것이오. 이에 동의하는 참석자께서는 주화를 뒤집어 주시오.”

여기서 조금 신기했던 점은 투표 과정이 철저하게 공개적으로 진행됐다는 것인데…….

사실 좀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거긴 하다.

익명성 같은 걸 존중하는 문화도 아닐뿐더러, 비밀 투표 같은 걸 하면 어떻게든 부정이 생길 수가 있으니까.

툭.

이내 참석자들이 하나둘 자신의 자리 앞에 놓인 황금색 주화를 뒤집어 왕가의 문양이 나오도록 했고, 머지않아 결과가 나왔다.

만장일치에 가까운 동의.

그러다보니 괜스레 또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모인다.

그야 내가 유일한 반대였거든.

“얀델 남작, 혹시 주화를 뒤집지 않은 이유를 들을 수 있겠나?”

“미궁이 폐쇄되면 다들 힘들 게 분명하지 않나. 뭐, 우리야 사정이 넉넉하니 얼마나 폐쇄를 이어가든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을 테지만 말이다!”

“흐음… 신민들을 위해 반대했다는 거로군?”

“굳이 따지자면 그렇다.”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는지, 후작은 대답만 듣고서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럼 이제 두 번째 안건으로 넘어가겠소.”

다시금 지루한 회의가 이어졌다.

***

아침부터 시작된 회의는 저녁까지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중간 중간에 휴식 시간이 있기는 했지만…….

‘뭐야, 이 하드코어한 일정은.’

정말 볼일 정도나 보고 올 시간을 줄 뿐, 식사 시간을 따로 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게 왕실 회의의 오랜 전통이라던가?

“하하, 그래서 이 자리에 참석하는 날에는 다들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나온다네.”

“대체 왜 그런 전통이 생긴 거냐?”

“이 자리에 참석할 정도면 다들 시간이 금 같은 사람들일 거 아닌가. 어렵게 모인 자리인 만큼 조금 불편해도 시간 낭비를 최대한 줄이겠다는 거겠지.”

음… 그럴 거면 그 빙빙 돌려 말하면서 미사여구를 섞는 화법만 빼도 훨씬 효율적일 거 같은데.

솔직히 말해, 바바리안들이 모여서 왕실 회의를 했으면 오전 중에 다 끝내고 점심을 먹으러 갈 수도 있었을 거다.

“에쿠, 다시 회의가 재개되려나 보군. 먼저 들어가 보겠네.”

이내 밖에서 마주쳐 잠시 노가리를 깠던 알미너스 백작이 떠나고, 나는 서둘러 먹던 육포를 입에 한가득 집어넣고서 회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다시 재개된 회의.

‘두 번째가 7구역이랑 13구역 재건 공사 얘기였고, 세 번째가 세금 관련, 네 번째가 악령 편입…….’

아, 참고로 악령 편입은 거론만 됐다가 수많은 반대표를 받으며 기각됐—.

“그럼 이제 아홉 번째 안건이구려.”

이내 회의를 주도하던 후작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나를 보며 시선을 멈춘다.

옆을 쓱 보니 라그나도 어딘가 부끄러운 듯한 표정으로 미묘한 시선 처리를 하고 있는 게 보인다.

덕분에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올 게 왔구나.’

아홉 번째 안건은 혼담이다.

그것도 다름 아닌 나와 라그나의.

“다만 아홉 번째 안건을 꺼내기 전에 참석자분들께 양해의 말씀을 먼저 드리겠소. 지금부터 조금 사적일 수도 있는 얘기가 오갈 예정인지라.”

“흐음, 사적인 얘기 말이오까?”

“굳이 구분하자면 그렇다 뿐이지, 이는 라프도니아 왕국의 중대사이기도 하오.”

“그렇다면 일단은 들어봐야겠구려.”

후작의 설명을 들은 케알루너스 공작이 고개를 주억였고, 그가 그런 제스쳐를 표한 이상 뭔가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저 할아버지도 이미 뭔 얘기가 나오는지 알고 있을 거면서 또 저렇게 연기하네.’

케알루너스 공작과 테르세리온 후작.

이 둘의 관계도 제법 신기하다.

라이벌 구도인 것치고는 협력이 필요할 땐 서로 티키타카가 잘 되는 느낌이랄까.

“얀델 남작,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나?”

“아무 생각도 안 했다.”

“그럼 지금부터는 조금 경청해주길 바라겠네. 앞으로 오갈 얘기의 당사자가 바로 남작 자네이니까.”

“응? 나 말이냐?”

아무것도 모르는 척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갸웃하자 후작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특유의 귀족 화법을 늘어놓는다.

“얀델 남작, 자네가 얼마나 바쁘게 살고 있으며, 그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어냈는지는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참석자들이 인정할 것이네.”

“…….”

“하나 위대한 라프도니아 왕가를 위해서라도, 자네 같은 인재가 그리고 한 가문의 가주가 홀몸으로 지내고 있는 것은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이제 짝을 찾아 안정을 이룰 때도 되지 않았나. 자네만 괜찮다면 페프로크 여백작과 자네의 혼사를 추진하고 싶네.”

그 말이 나온 순간, 잠시나마 회장 내에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허!”

“얀델 남작과 페프로크 여백작이……?”

이제 보니 이 혼담에 대해 모르고 있던 귀족도 꽤 있었던 모양인데…….

“페프로크 백작가 역시 얀델 남작가와 비슷한 사정 아닌가. 법률상 두 가문이 하나가 될 수는 없겠으나, 두 가문이 혼인으로 이어진다면 자네에게도 왕국에도 큰 복이 될 걸세.”

“…….”

“…라는 게 내 생각이네만, 자네는 어떤가?”

짧은 물음 속에 압박이 느껴진다.

뭐, 애초에 혼담을 사석이 아니라 이런 자리에서 꺼낸 것부터가 압박을 주려는 거긴 하겠지만.

아무튼.

YES와 NO.

늘 그렇듯 선택지는 이렇게 두 가지다.

혼담에 응한다면 후작 밑으로 들어가는 구도가 되며 어떤 식으로든 통제를 받게 될 테고.

거절한다면 수많은 견제를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물론 당장 결정을 내리라는 것은 아닐세. 생각이 정리되면—.”

이미 내린 결정을 뒤바꾸는 일은 없었다.

다시 생각해도 조금 끔찍한 결정이긴 하지만…….

‘니미럴.’

그래도 해야 하는 일이니까.

“싫다!”

“…응?”

“나는 결혼하지 않을 거다.”

말을 끊으며 당당하게 거절의 뜻을 내비친 순간.

“흐음…….”

후작의 눈이 살짝 좁혀진다.

제안을 거절한 나를 이제부터 어떻게 괴롭힐까 궁리하는 것만 같은 눈빛이랄까?

따라서 나도 서둘러 입을 열었다.

“페프로크 여백작은 물론이고, 나는 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을 거다.”

고민 끝에 내린 나의 맞수다.

후작이 경계하는 게, 얀델 남작가가 ‘혼인’이란 수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급격한 성장을 이룩하는 것이라면.

이런 독신 선언으로 받아치는 게 가능하다는 판단.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군. 그럼 영영 홀몸으로 지내겠다는 뜻인가?”

다만 후작은 내 말을 신용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대충 예상한 바였다.

이런 선언이야 내 마음에 따라 언제든지 뒤집을 수 있는 것이니…….

‘진짜 해야 하는 건가…….’

좀 더 확실한 액션이 필요하며.

그러한 액션도 미리 준비까지 해두었다.

하지만 문제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한숨이 나온다는 것인데…….

‘그래, 해보자.’

겨우 마음 준비를 끝낸 나는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후작!”

있는 힘껏 소리쳤다.

“미안하지만, 나는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

어째선지.

아니, 정말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뜨기 싫은 눈을 억지로 천천히 다시 떴을 때.

“……?”

“……?”

세상이 멈춘 듯한 정적이 장내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

멈췄던 시간이 다시금 흘러가기 시작하며, 경악의 시선과 말들이 나를 향한다.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니……?”

“아니, 잠깐만 그럼 설마……!”

“역겹군.”

누군가는 혐오의 감정조차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냈다.

뭐, 이해는 한다.

동성애는 죄악으로 구분되는 세상이니까.

그래… 그러니까…

“나는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다!”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아공간에 준비해 둔 인형을 꺼내 모두에게 보여 줬다.

“나는 이 인형을 사랑한다!”

“……에?”

“이 인형과 결혼도 할 거다!”

“……예?”

해야 하는 일이었다.

62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46화 62

646화 커밍아웃 (4)

옥단추 같은 눈.

비단처럼 매끈하며 하얀 피부.

붉은 명주실로 촘촘히 박아 넣은 듯한 입술.

“…….”

“…….”

장인이 땀과 시간을 쏟아부으며 만든 고급스러운 실사화 인형조차 아니다.

오른쪽 이마에 달린 리본만이 인형의 성별이 ‘여성’임을 의미하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어렸을 때나 갖고 놀았을 법한 싸구려 봉제 인형.

“그러니까… 얀델 남작은… 인형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는 뜻인가요?”

라그나가 조심스레 질문을 던져 온 순간, 수치심이 확 느껴지며 머리로 피가 쏠린다.

마치 실시간으로 머리털이 빠지는 듯한 느낌.

‘…죽고 싶다.’

참 이상한 일이다.

고블린숲에서도, 아이스록에서도. 그 어떤 역경이 닥친들 이런 생각까지는 한 적이 없었건만.

“그… 렇다.”

이내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자, 또 다른 귀족 하나가 감탄을 터트리듯 혼잣말을 뱉었다.

“어쩐지! 주변에 그 많은 여인을 두고서도 별다른 얘기가 나오지 않더라니……!”

그는 내가 아직 결혼하지 않은 게 진심으로 이 인형 때문이라고 믿는 듯했다.

뭐… 다행히(?) 그런 사람들은 소수이긴 했지만.

“조용히 하게.”

순진하게 그런 소리를 뱉던 이의 옆에 있던 귀족이 눈치 좀 챙기라는 식으로 핀잔을 준다.

내가 고급스러운 인형을 가져오지 않은 이유다.

진짜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든 걸 가져왔으면 저런 반응인 귀족들이 더 많이 나왔을 테니까.

아, 물론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후작의 반응이었다.

“…….”

이내 자그마한 인형을 한 손으로 꼭 쥔 채 후작을 향해 시선을 보낸다.

처음에는 다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머리가 띵한 것처럼 보였던 후작도 어느새 평정심을 되찾은 상태였는데…….

“인형을 사랑한다라…….”

인형과 나를 번갈아 보던 후작이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린다.

“자네답다면… 자네답군.”

인형을 사랑한다는 게, 나답다는 뜻에서 한 말은 아니었다. 단지 이런 식의 해결법을 꺼냈다는 것이 나답다고 생각한 거겠지.

‘…이제 어떻게 나오려나.’

후작이 내 말을 믿는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아니, 애초에 믿을 거라 생각해서 한 것도 아니고.

아까 케알루너스 공작과 테르세리온 후작이 대본을 읽듯 말을 주고받았듯.

모든 발언에는 정치적인 계산이 뒤따른다.

그리고 조금 전의 내 발언 역시 그랬다.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단 의지를, 이런 방법으로 에둘러서 표현했다.

“흐음…….”

문제는 그 노력이 후작에게 통했느냐는 것인데…….

침묵 속에서 가만히 대답을 기다리자, 이내 생각 정리를 끝마친 듯한 후작이 답변을 내주었다.

“인형을 사랑한다는 자네의 고백은 내게 있어 굉장히 충격적이었고 당황스러웠네. 하나 사랑에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방식이 있다고 생각하네.”

“…그래서?”

“자네의 선택을 존중하겠네.”

표면으로 나온 말들만 들었을 때는 일단 굉장히 긍정적인 답변이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뼈가 실린 말들이 이어진다.

“나라의 앞날을 밝히는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네가 허튼소리를 할 사람도 아니고 말일세. 뱉은 말에 어떤 책임이 따르는지 알 것이라 믿네.”

쉽게 말해, 만약에 내가 지금 한 말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책임을 물리겠다는 뜻.

“한데도 그만큼 진심을 보였으니, 응당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자네의 선택을 응원하는 게 올바를 터.”

다만 후작은 나를 너무 궁지에 몰아서는 좋지 않다 생각했는지 한 가지 중재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왕국의 재상으로서 부탁하건대, 언젠가 때가 되면 자식은 낳게. 자네의 가문을 이을 후계도 그렇고, 자네 같은 인재가 씨를 남기지 않고 떠난다는 것도 이 나라의 크나큰 손실이니 말일세.”

언젠가 때가 되면.

“보아하니 참한 여전사들도 있는 듯하던데.”

동족과 결혼해 자식을 보는 것은 용인해 주겠다.

그런 후작의 제안에 나는 답했다.

“…생각해 보겠다.”

말은 그러했지만, 사실상 알겠다는 뜻이었다.

그도 그럴 게, 여기서 갑자기 OK를 하는 것도 웃기잖아?

“자, 그러면 이 얘기는 여기서 마무리 짓고……. 다들 오래 기다리셨소. 지금부터 아홉 번째 안건을 마저 이어 가겠소이다.”

일단 이번에는 잘 넘긴 듯하다.

***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식의 독신 선언을 할 계획은 전혀 없었다.

다만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다는 것.

이 선택만큼은 결코 후작과의 분쟁이 두려워서 내린 것이 아니다.

겸사겸사라고 해야 하나?

이미 용아저씨와 대화를 끝낸 순간 나는 결정을 내렸다.

‘내가 무슨 결혼이냐…….’

이 도시에서 구축해 낸 내 입지와 그런 나를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배신 같은 결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누군가는 내게 아직도 벗어 낼 현대인의 때가 한참 더 남았다고 말할지 몰라도.

적어도 내게 있어 결혼은 굉장히 신성한 것이다.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언약을 내 마음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할 수는 없으며, 하물며 자식을 낳는다는 건 더더욱 그렇다.

‘애초에 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아, 물론 그렇다고 이러한 감정적인 사유로만 지금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다.

살아남는 데 집중하겠다는 것.

어쩌면 이 과정에서 ‘결혼’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터이나, 계산을 거듭한 나는 최종적으로 판단했다.

‘어차피 득만큼이나 실도 많아.’

정치적으로 도움이 될 상대와 닥치는 대로 결혼을 하면 언뜻 보기엔 좋아 보일지 몰라도, 결국 그만큼 적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내가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건, 반대로 내가 도울 일도 생긴다는 뜻과 같으니까.

“그럼 이것을 끝으로 금번 회의를 끝내겠소이다. 모두 귀한 걸음을 옮겨 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아홉 번째 안건도 금방 마무리되며 왕실 회의가 끝났다.

그리고…….

‘무슨 이번에는 또 역순이냐.’

한꺼번에 우르르 나가는 게 아니라, 상석에 가깝게 앉은 순서대로 한 명씩 회장을 빠져나간다.

그것도 2분 간격으로.

‘…진짜 별 이상한 거로 다 차별하네.’

정말로 이상한 게, 이런 차별을 받고 나니 별 관심도 없던 왕실 회의의 서열을 올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음, 그런 의미에서 잘 만든 전통이려나?

나조차 서열을 올리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는데, 저 권력 괴물들은 어떻겠어.

툭.

이내 모두 다 떠나고 텅 빈 회장.

나는 왠지 모를 설움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 회장을 나섰다.

그리고 이제 집에 가려는 차.

“…잠시만요.”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부른다.

“라그…….”

음, 누가 볼 수도 있으니 거리는 지키는 게 낫겠지?

“아직 안 갔나? 페프로크 여백작.”

“근처에 아무도 없으니 평소처럼 이름으로 부르셔도 됩니다.”

“그래도 이런 건 조심하는 게 낫다, 여백작.”

“…….”

암, 나도 언제 어디서 실수할지 몰라서 아직까지도 아멜리아를 에밀리라고 부르고 사는데.

“근데 그래서… 계속 나를 기다린 거냐?”

“예, 아무래도 할 말이 있어서 말입니다.”

“할 말이라면?”

“아까 그 인형.”

라그나가 어딘가 불쾌한 눈으로 그 인형을 언급하더니 이내 말을 잇는다.

“아, 물론 아까 한 말을 믿는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처음엔 오해할 뻔했지만… 아버… 아니, 테르세리온 후작께 들었습니다. 제가 아무래도 아직 정치 관련으로는 부족한 게 많다 보니.”

“아무튼, 그래서 하려는 말이 뭐냐?”

“그…….”

라그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한참이나 주저하더니, 내가 커밍아웃을 할 때처럼 눈을 꾹 감고서 입을 열었다.

“남작은… 제가 싫은 겁니까?”

“뭐……?”

“그런 치욕스러운 경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거절할 정도로 제가 싫은 거냐고 물었습니다.”

어…….

갑자기 이런 질문을 받으니 조금 당황스럽다.

하지만 일단 솔직히 답해 보자면.

“뭔가 오해한 거 같은데, 네가 싫다거나 한 건 절대 아니다.”

물론 결혼을 할 만한 관계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후작의 혼담을 거절한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인 문제 때문이다.”

“정치… 말입니까?”

“그래. 만약 우리가 결혼하면, 다른 귀족들은 가만있겠나?”

안 그래도 라프도니아 정계에서 혼자 우뚝 치고 나가는 중인 게 바로 후작파다.

한데 이 와중에 내가 합류한다?

케알루너스 공작의 세력이나 카이슬란 가문을 주축으로 한 귀족 연합, 중립을 표방하는 알미너스 백작가도 가만히 지켜보지는 않을 거다.

서로 동맹을 맺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려 들겠지.

“그런 건… 저희가 막을 수 있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런 이해관계에 껴서 머리 아프고 싶지가 않다.”

“그렇습니까…….”

“이해가 됐나 보군.”

“예. 이해했습니다. 제가 지금의 신분이 된 탓에 거절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 아닙니까.”

어… 그게 또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나?

뭔가 조금 뉘앙스가 이상한 거 같은데, 세세하게 짚어 봐도 딱히 틀린 말 같진 않고…….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비요른 얀델, 당신도 피곤할 텐데 어서 돌아가 쉬십시오.”

“그래, 만나서 반가웠다. 나중에 따로 보지.”

“예.”

이후로는 짧게 작별 인사를 나누고서 헤어졌다.

그리고 아예 궁에서 나와 마차 승강장으로 향하던 때.

“…응?”

불현듯 인기척이 나서 골목을 살펴보니, 어두운 그림자 속에 정체 모를 누군가가 가만히 서 있다.

170cm쯤 되어 보이는 신장.

호리호리한 체격.

다만 손에도 장갑을 꼈으며 두꺼운 로브를 눌러써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부가 드러나는 곳이 없다.

그 탓에 순간 누가 암살자라도 보냈나 싶었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된다.

다른 곳도 아니라 황도 카르논에서.

그것도 고작 암살자 한 명을 보내서 나를 어떻게 해 보겠다는 정신 나간 놈이 있을 리 없으니.

‘뭐야, 이 야밤에.’

상당히 수상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마저 가던 길을 가려던 찰나.

또각.

정체불명의 괴인이 나를 향해 한 걸음 내디디며 대로를 밝히고 있는 조명에 조금 더 가까워진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스르륵.

얼굴 쪽을 가리고 있던 로브를 뒤로 넘겼고, 이에 따라 나 역시 다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별다른 특징이랄 게 없는 흑색 가면.

다만 그 형태나 굴곡, 그리고 사람이 뿜어내는 분위기가 완벽하게 내 머릿속의 무언가와 일치한다.

‘…흑가면.’

다만 현재 나는 커뮤니티의 수사자도, 이한수도 아닌 비요른 얀델이기에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지키며 눈살을 좁혔다.

“뭐냐, 너는? 암살자냐?”

찰나 동안 내가 생각해 낸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

하나 내 질문에 정체불명의 가면인은 고개를 옆으로 내저었다.

그리고…….

“그럴 리가요.”

왠지 모르게 귀에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와 함께.

스윽.

가면이 벗겨지고 괴인의 얼굴이 육안으로 확인된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그리고 아시아인에 가까운 이목구비와 피부.

“하린 스에뷔.”

아니, 정확히는 하린 스에뷔의 몸을 강탈한 악령.

한국인 강현별.

그런 그녀가 나를 보며 말없이 싱긋 웃는다.

왠지 모르게 등줄기에 오한이 든 나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며 물었다.

“네가 왜 여기서 그러고 있던 거냐? 라그나가 보낸 건가?”

“아뇨?”

“그럼 대체 왜…….”

“저번에 말했잖아요. 저도 이제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라고. 그러니까 밖에서 보자고.”

물론 현별이가 마지막에 그런 쪽지를 보낸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일단 습관처럼.

“대체 그게 무슨 뜻—”

—이냐고.

그렇게 물으려던 순간.

“아, 그때는 이렇게까지 오래 기다리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예요.”

현별이가 내 말을 끊으며 갑갑하다는 듯 온몸을 가리던 두꺼운 로브를 벗었다.

그리고…….

“그래도 봤으면 됐어요.”

긴 다리를 이용해 한 걸음 더 다가온다.

‘어쩐지 예전에 봤을 때보다 키가 큰 거 같더라니.’

또각.

“비요른 얀델.”

또각.

“아니, 한수 오빠.”

얘는 대체 어떻게 안 거야?

46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47화 46

647화 커밍아웃 (5)

현별이가 내 정체에 대해서 의심하고 있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애초에 내가 없을 때 대놓고 이백호한테 이렇게 물어본 적도 있었고.

[그 자꾸 형이 비요른 얀델인 거 맞냐고 묻지 뭐예요?]

나중에 추궁해서 들은 현별이의 근거는 크게 셋이었다.

[…오빠가 여기에 온 시기를 저는 정확히 알고 있잖아요.]

시기.

[그 시기에 온 탐험가들 중에 두각을 보인 사람 중에 비요른 얀델만큼 크게 된 사람이 없어요.]

성장력.

[……오빠가 평소에 저한테 게임 얘기도 많이 했잖아요. 방패바바가 최고니 뭐니 하면서.]

방패바바.

많은 정황이 내 정체가 비요른 얀델임을 가르키고 있다던가.

하지만, 그래도 납득은 되지 않는다.

“왜 대답이 없어요, 오빠?”

‘비요른 얀델’을 직접 만나 저런 식으로 나오려면 보통 확신으로는 불가능할 테니까.

현별이는 어떻게 확신을 얻을 수 있던 것일까.

“뭐야, 위아래로 쓱 훑는 거 보니 또 도망칠 궁리나 하고 있나 보네?”

아니면 단지 떠보려는 건가?

그런 생각도 들지만, 현별이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럴 일은 거의 없을 거 같다.

‘아오, 그렇다고 악령은 머리통을 부숴야 한다면서 달려들 수도 없고…….’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란한 상황이 이어지던 때.

“그만한 단서를 줬는데, 아직 내가 누군지 모를 리도 없을 테고……. 내 앞에서 가면을 벗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이내 나는 결정을 내렸다.

솔직히 말해, 비요른 얀델이 악령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이제 한두 명뿐인 것도 아니고.

막말로 현별이가 못 믿을 사람인 것도 아니니.

터벅.

소리가 퍼져 나가지 않도록 한 걸음 다가가 현별이에게 밀착한 뒤.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야?”

얼굴 위에 쓰고 있던 보이지 않는 가면을 벗으며 궁금했던 점을 묻자, 현별이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사실 마지막까지도 확신은 없었어요.”

“…뭐?”

근데 그렇게 위험한 짓을 했다고?

나에 대해 조사해 봤으면 날 떠보다가 실려간 비밀 치안청 요원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을 텐데?

“한심하다는 듯 보지 마요. 그래도 가면도 쓰고 나름 준비를 한 거니까.”

“아, 맞다 그 가면은 대체 뭐였는데?”

“이미 눈치챈 거 아니었어요?”

“정말로 네가 블랙인 거야?”

“네, 맞아요.”

실로 충격적인 진실이다.

얘가 어떻게 원탁에 입장했는지는 제쳐두고서라도 나는 그걸 왜 여태껏 몰랐지?

“아무튼, 이 가면을 쓰고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할 줄 알았죠. 실제로도 그랬고요.”

“…내가 반응을 했다고?”

“네. 여전하던데요? 놀라면 일단 잠시 눈부터 감는 거.”

“어…….”

내가 그런 버릇이 있었던가?

알 수 없지만, 앞으로는 조심해야 할 듯하다.

“어쨌든 그 반응 덕분에 조금 더 용기를 얻었어요. 아니었으면 그냥 뒤돌아 도망쳤을지도 몰라요.”

“……아니,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데?”

“그럼 오빠는 왜 그랬는데요?”

“내가 뭘?”

“그때 막 나를 무섭게 다그치면서 물었잖아요. 내가 누구 아래서 일하냐고. 정말 누구 하나 죽일 듯한 기세로.”

어…….

그건 그랬지.

근데 그건 혹시나 내가 얘를 잘못되게 만들까 봐 그런 거였는데…….

“뭐, 그게 싫었다는 뜻은 아닌데요…….”

이내 현별이가 나를 올려다보며 단호히 말했다.

“그래도 선을 먼저 넘은 건 오빠예요.”

“…….”

이렇게 나오니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

이유가 뭐든 억지로 정체를 캐물었던 주제에 상대가 내 정체를 캐내려 들었다고 화내는 것도 좀 웃기지 않은가.

“하…….”

그러니 현별이를 질책하기보다는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하기로 했다.

그래, 예를 들자면.

“그래서 원탁에는 어떻게 들어오게 된 건데? GM 도움을 받은 거야?”

“네. 오빠 정체를 캐는 데 도움이 될 거 같다고, 어떻게 방법을 찾아내서 좀 껴달라고 부탁했죠.”

“그럼 원탁에서 나온 정보는? 그것도 다 GM에게 들은 거냐?”

“아뇨. 다 제가 직접 알아낸 것들이었는데요?”

이내 나는 흑가면이 원탁에서 뱉었던 정보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가장 임팩트가 큰 것은 두 개였다.

[심연의 문을 여는 것 외에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차원 마법이다.]

[아우릴 가비스가 지구로 넘어올 수 있던 것도 바로 이 방법을 썼기 때문이었다.]

아, 생각해 보니 이것 말고도 있기는 하지만…….

[비요른 얀델과… 미샤 칼스타인은……. 둘은 정말로 소문대로 사귀었던 사이인가?]

이건 정보를 뱉은 게 아니라, 마지막에 나한테 질문을 했던 거니까 일단 넘어가고.

‘…이미 이때부터 거의 확신을 하고 있었구나.’

아무튼, 탐험가도 아닌 현별이가 대체 어떻게 해서 저런 고급 정보까지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일까.

“전에도 말했잖아요. 페프로크 여백작이 나를 굉장히 신임한다고. 옆에서 전반적인 일을 모두 도우며 이런저런 정보를 얻을 기회가 많았어요.”

“…그랬군.”

신임을 좀 얻었다고 저런 정보를 얻는 게 가능한가 싶지만, 현별이라면 워낙 일머리가 좋으니 알아서 어련히 잘 했을 거 같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주억이며 납득하던 때.

“오빠.”

갑자기 현별이가 진중한 목소리로 내게 선언하듯 말한다.

“저는 이백호 같은 양아치들이랑 달라요.”

조금은 뜬금없게 들리는 말.다만, 이어진 설명에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는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저는 걔처럼 오빠한테 업혀 가려는 생각은 전혀 없어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사고치지 말고 얌전히만 있어요.”

이내 현별이가 나를 바라보며 박력 있게 말한다.

“내가 어떻게든 오빠를 데리고 돌아갈 방법을 찾을 거니까.”

듣기만 해도 든든해지는 말이 아닐 수 없기는 했다.

하지만…….

‘난 딱히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려나……?

***

결과만 말하자면, 말하지 못했다.

초창기라면 모를까,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는 현실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걸.

분명 말했다가는 귀찮은 일이 생길 거 같았다.

‘…나중에, 나중에 말하자.’

조금 미룬다고 해도 어차피 변하는 건 없지 않나.

어차피 내가 돌아가든 안 돌아가든, 현별이는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하는 입장이니까.

“근데 혼담은 어떻게 됐어요? 오빠 만난다고 기다리느라 그 안에서 있던 일은 아직 모르는데.”

“아… 그거 말이냐……?”

이걸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머리가 아파져서 그냥 결과만 말해줬다.

“혼담이라면 거절했다.”

“오… 정말요?”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걔한테 들어라. 보아하니 너한테는 다 말해주는 거 같은데.”

“확실히… 요즘은 심복보다는 친구에 가까운 포지션이긴 하죠?”

그리 말한 현별이는 이대로 여기서 오래 대화를 나누면 눈에 띌 것이라며 대화의 템포를 올렸다.

“일단 이것부터 받아요.”

“…뭐냐 이건?”

“우리 둘이 사석에서 따로 만나는 모습을 보이면 서로 좋을 게 하나도 없잖아요?”

“…그래서 이게 뭔데?”

“보는 편이 빠르겠네요.”

종이 하나를 반으로 나눠서 찢어 한쪽은 나에게 준 현별이는 남은 한쪽에 펜으로 뭐라 글씨를 적었다.

그러자…….

[이해 됐죠?]

저쪽에 쓴 글씨가 내 종이에도 쓰여진다.

“뭔가 비슷한 걸 옛날에 판타지 영화에서 본 거 같은데…….”

“사람 생각이 다 거기서 거기죠 뭐. 아무튼, 이건 한 번 적으면 하루가 지나야 지워지기 때문에 긴 연락을 하기에는 불편해요.”

“그럼 서로가 해야 할 얘기가 있을 때 만나는 시간, 장소 정도를 전달하는 용도로 쓰면 되겠군.”

“네, 맞아요.”

처음 보는 마도구인지라 신기해서 이름을 묻자, 현별이가 볼을 긁적였다.

“사랑 종이요.”

“…뭐?”

“아니, 진짜 이름이 그건데 뭐 어떻게 해요. 듣기론 어느 마법사가 연애를 할 때 쓰려고 만들었다는 모양이더라고요.”

“…그러냐?”

아무튼, 사랑 종이라…….

21세기 말로 직역하면… 러브장 정도가 되려나?

“그래서 줄 건 이게 끝?”

“네, 끝. 대신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할 게 있어요.”

“얼른 해봐라. 누가 올까 겁나니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재촉하자 현별이도 애간장 태우지 않고 서둘러 말을 이었다.

“페프로크 여백작이랑 너무 깊은 관계를 맺지 마요.”

“…응?”

“그 여자한테는 뭔가 아주 큰 비밀이 숨겨져 있어요. 단순히 후작의 사생아라는 것 말고도요. 어쩌면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고요.”

위험한 상황이라…….

“……일단 알겠다. 유의하고 있지.”

“그럼 오늘 용건은 끝.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요.”

이후로는 현별이가 먼저 골목길 안쪽으로 사라졌고, 나도 얼른 자리를 벗어나 성지로 향했다.

그리고 며칠 뒤.

“부족장! 부족장 앞으로 뭔가 물건이 왔다!”

내 이름으로 택배가 도착했다.

발송인은 쓰여 있지 않은 수상한 택배.

다만, 상자에 담긴 내용물을 통해 누가 보낸 것인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흑발에 흑안.

딱히 이목구비랄 게 없는 싸구려 인형이지만, 다리 부분이 검은색 물감으로 칠해져 있다.

“허…….”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뭐라고 말이라도 해보려 현별이에게 받은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솨아아아아-!

텅 비어 있던 백지에 라프도니아 주민이라면 결코 해석할 수 없을 상형문자가 쓰여진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죽고 싶다.

***

왕실 회의가 끝난 후 며칠이나 지났지만, 의외로 크나큰 파장은 일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장소가 장소였던 탓일까?

라그나와 내 혼담에 관한 이야기도.

그리고 그곳에서 있었던 나의 충격 고백도.

도시에까지 퍼져 나와 민간에 흘러드는 일은 일절 없었다.

뭐, 그래도 영원한 비밀은 없다고 소식은 천천히 퍼져 나가 언젠가 알 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알게 되겠지만.

‘오히려 그것보다 이쪽이 난리인가…….’

왕실 회의가 끝난 직후, 곧바로 미궁 폐쇄 정책이 시행되며 온 도시에 알려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탐험가들의 여론은 좋지 못했고 과격한 이들은 광장에서 시위를 하다가 체포되어 연행되기도 했다.

또한, 서민층에 속하는 라비기온 주민들의 공포도 전에 비할 수 없어졌다는 건 거리만 걸어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긴 노아르크 침공에 비프론 사태에… 이제는 미궁까지 봉쇄한다고 하니 당연한가?’

애초에 그게 아니더라도 미궁이 봉쇄되면 경제에 아주 큰 타격이 뒤따른다.

물건의 가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할 것이며, 사람들의 소비 역시 크게 위축될 터였다.

뭐, 그래도 신문을 보면 안심을 시키려고 세금을 줄여주는 정책이나 새로운 제도들을 왕가에서 연일 내놓고 있긴 하지만.

이게 얼마나 효과적일진 잘 모르겠다.

‘…나는 내 할 일이나 잘하자.’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성지에서 나와 멜베스의 회주 할아버지를 만나러 왔다. 단둘이 만나 왕실 회의에서 있었던 일들을 전부 다 말해줬다.

나야 알고 있어 봐야 활용할 방법이 거의 없지만, 멜베스의 다른 귀족 가문들은 상황이 다르니까.

“……고맙소. 오늘 남작이 말해준 정보들은 필시 앞으로의 혼란을 헤쳐 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요.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고 반드시 갚겠소.”

왕실 회의 참석자.

이 타이틀에 모든 귀족들이 목을 메는 것도 바로 이게 이유일지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그냥 참가해서 가만히 듣고만 나오는 것만으로도 일반 귀족들 상대로 영향력을 떨칠 수 있으며, 이는 곧 해당 귀족의 권력이 된다.

바로 이렇게.

“아, 그리고 아까도 말했듯이 결혼은 하지 않게 됐다.”

“그거라면 걱정 마시오. 솔직히 터놓고 말해서, 우리로서는 후작의 제안을 밀어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입장이니.”

“그러면……?”

“당장은 아니겠지만, 내 반드시 멜베스 전체가 움직일 수 있도록 하겠소이다.”

“흐음…….”

“걱정 마시오. 우선 이번 수주는 반드시 얀델 남작가가 맡을 수 있도록 처리할 터이니.”

조금 놀랍다.

왕실 회의에 다녀왔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순식간에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건축 사업을 하던 드워프 백작 가문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내가 차지하게 된 격이니.

아무튼, 이렇게 되면 말을 꺼내기 좀 편하겠네.

“그나저나 회주.”

“말씀하시오.”

“우리 얀델 남작가가 수주를 맡게 도와준다고 하니 하는 말인데… 그 요즘 정세가 혼란스럽다는 말로도 모자랄 정도이지 않나?”

“그렇소만?”

얼른 말해보라는 듯한 회주의 반응을 보며 나는 툭 까놓고 말했다.

“어차피 이제 미궁도 못 들어가서 시간도 많이 남는데.”

회사 생활을 할 때 주식 차트 공부를 하며 배운 세상의 법칙이었다.

“나랑 같이 크게 돈을 벌어 볼 생각 없나?”

위기는 때론 기회가 되기도 한다.

62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48화 62

648화 바바리안 비즈니스 (1)

너무 사기꾼 같은 말투로 제안을 한 탓일까.

“큰 돈… 말이오?”

회주가 떨떠름하다는 목소리로 눈살을 좁힌다.

만약 이 말을 한 게 내가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내쫓았을 것만 같은 눈빛.

“일단 한번 말해보시오. 어떻게 큰 돈을 벌겠다는 건지.”

그래도 들어는 보겠단 허락을 얻었기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커지기 전에 얼른 부연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 기회에 투자를 하는 거다.”

“…투자? 봐둔 상단이라도 있소?”

“아니, 상단에 투자하는 게 아니다.”

“그럼……?”

“7구역의 땅에 투자를 하자.”

“땅… 말이오까?”

회주는 이놈이 또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한 반응이었지만, 그리 놀라울 건 없었다.

어느 정도 예상을 했달까.

이 세계에서 토지 구매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아니, 정확히는 ‘투자 상품’으로 보자면 그렇다.

애초에 토지 구매는 ‘귀족’만이 가능하며…….

‘사실상 지속적인 ‘월세’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제태크 상품에 가깝지.’

여유 땅이 있는 귀족들 대부분은 땅과 건물을 빌려주고 세를 받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땅값이 올라서 얻는 시세 차익 따위는 전무하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다.

마석이 모든 자원을 대체하고 소비와 순환이 동시에 벌어지는 이 기형적인 도시에서는 화폐의 가치가 변동되는 일이 극히 드무니까.

그래서 라프도니아의 부동산은 항상 고점에서 오르지도 내리지도 않고 유지가 됐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지금 7구역의 상황은 최악이라는 말로도 모자라다. 만약 지금 매입을 한다면 헐값에 매입할 수 있을 거다.”

“그건 너무 단순한 관점이 아니겠소? 그들이라고 7구역이 수 년 내에 재건될 걸 모를 리 없을 텐데. 그 누구도 손해를 보고 팔려 하지 않을 것이오.”

뭐, 그거야 그렇지.

대부분의 귀족들은 존버를 택할 것이다.

보통의 상황이었다면 말이다.

“글쎄, 너야말로 너무 단순하게 보는 거 아니냐?”

미궁 폐쇄라는 거대한 이벤트가 발생했다.

한데 그 와중에 7구역은 노아르크 세력이 점거한 비프론과 맞닿은 지역이며…….

“내가 듣기로 요즘 여러 가문들이 돈을 쓰지 않고 최대한 모아두려고 한다던데.”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불안.

이를 잘 풀어서 설명한 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잘 찾아보면 분명 팔려는 귀족들이 꽤 있을 거다. 본격적으로 소비가 줄어들면, 귀족가들의 사업체에도 큰 타격이 올 테니까.”

“확실히… 돈이 급한 이들이 늘어나긴 하겠구려.”

회주도 이제 내 말에 수긍을 하는 듯했다.

뭐, 그렇다고 설득이 끝났다는 건 아니지만.

“한데 그러한 사정은 우리도 마찬가지오. 이 땅을 헐값에 살 수 있다고 한들 이 투자가 실현되는 것은 먼 시일이 지난 후이지 않소.”

“그렇지.”

“남작이 말했듯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시국에 그런 긴 시간을 지켜볼 여유가 없소이다. 나,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도.”

노련한 회주답게 예리한 지적이었다.

타 귀족가에서 돈이 급해 땅을 팔려고 하듯, 멜베스에 속한 가문들 역시 돈이 급한 건 마찬가지다.

따라서 미래를 내다보는 투자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정도면 거의 다 넘어온 거 같네.’

나는 씨익 웃으며 목소리를 줄였다.

“만약 땅을 사고도 당장 그 돈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어떻겠나?”

라프도니아에서 평생을 살아온 회주로서는 절대 납득이 될 수 없는, 한낱 바바리안의 망상이나 다름없게 들릴 물음.

반응 역시 예상대로였다.

“그건… 의미 없는 가정이지 않소.”

“그렇다 해도 일단 대답은 해봐라. 만약 그렇다면 어떡할 거냐?”

내 집요한 요구에 회주도 결국 어쩔 수 없이 답을 내놓았다.

“굳이 내게 물을 필요가 어디 있소? 그럴 수만 있다면야 그 어느 귀족이든 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텐데.”

“흐음, 그렇군?”

“하나 그런 일이 현실적으로 어찌 가능하겠소? 땅을 사고도 그 돈을 보전할 수가 있다니. 땅을 공짜로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닐진대.”

회의적으로 중얼거리는 회주를 보며 나는 단호히 말했다.

“있다.”

엄밀히 말하면 땅을 공짜로 얻는 건 아니지만.

그와 거의 비슷한 방법이 존재한다.

“그럼 말해보시겠소? 그 방법이 무엇인지?”

“땅을 임대해주고, 세를 받지 않는 거다.”

월세든 년세든 받지 않는다.

“뭐? 세를 받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허황된—.”

거, 말 끊기는.

“끝까지 들어라.”

나는 역으로 회주의 말을 끊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매입한 땅에서 세는 받지 않는다. 하지만 그 대신 땅값에 준하는 돈을 받고서 그들이 자유롭게 땅을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줄 거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진지하게 듣던 회주가 크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 지금 토지 대리 구매를 하겠다는 것이오? 그건 엄연히 왕국 토지법에 저촉되는 일이란 말이오!”

토지 대리 구매.땅을 갖고 싶은 돈 많은 상인이나 부유층 인물들이 남몰래 자주 하는 방식.

단속을 거의 하지 않기에 적발되는 일은 극히 드물지만, 누군가 작정하고 문제를 삼는다면 문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불법은 아니다. 대리 구매의 경우 토지에 대한 영구적인 권리가 계약서 내에 필히 명시되어야 하지만, 난 그런 조항을 넣을 생각이 없으니까.”

“…그렇다면 말한 대로 해석될 여지도 있겠소만. 한데 그럼 대체 누가 그런 방식으로 들어오려 하겠소? 그냥 월세를 내는 게 훨씬 싸고 좋을 텐데?”

“들어올 거다. 웃돈을 세 배 가까이 지불해야 하는 대리 구매와 달리 나는 웃돈을 아예 조금도 받지 않을 생각인 데다가…….”

“…….”

“받은 돈도 계약이 끝나면 그대로 돌려줄 거니까.”

“뭣이오?!”

아쉽게도 이 도시에서 평생을 살아온 회주는 내가 말한 새로운 개념에 대해서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받은 돈을 돌려준다니? 그럼 그들은 월세도 내지 않고 공짜로 땅을 빌리는 것이지 않소!”

‘음… 이게 그렇게 이해하기 어렵나?’

회주는 이 방식이 우리에게 손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고, 따라서 나는 설명하느라 한참을 더 시간을 써야만 했다.

“회주, 한 번만 말해줄 테니 잘 들어라.”

부동산에 관심 많은 한국인들조차 이게 좋은 제도인지 나쁜 제도인지 의견이 분분한 바로 그것.

‘전세’를 놓는 게 어째서 우리에게 이득인지.

***

내가 세운 계획은 아주 간단하다.

돈이 필요한 귀족가를 상대로 7구역의 땅을 매입.

이후 해당 땅을 상단이나 돈 많은 이들에게 고액의 보증금을 받고 무상 임대를 해준다.

그리고…….

‘그 돈으로 다시 또 땅을 사면 되지.’

똑같은 짓을 반복한다.

그게 잘 되겠냐는 회주의 의문이 중간에 있기는 했지만, 이어진 설득에 결국 이 할아버지도 인정했다.

“확실히… 무너진 땅에 제대로 된 건물만 올린다면 계약을 맺고 싶어 할 이들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오. 장기적으로는 훨씬 더 저렴할 테니까.”

전세는 큰 돈이 빠져나간다.

하나, 돈만 충분하다고 하면 전세가 훨씬 더 경제적으로 메리트가 있다.

‘그야 월세가 나가지 않으니까.’

어차피 은행에 돈을 넣어봐야 이자를 주는 세상도 아니잖아?

내 예상이 맞다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월세를 낸다치고 전세로 들어오는 이들도 있을 것인데…….

“이 부분은 은행장인 알미너스 백작과도 조율을 해볼 생각이다. 내가 돈을 돌려준다는 계약서를 담보로 일반인들이 대출을 받을 수 있는지—.”

“이, 이건… 말도 안 되오…….”

설명이 어느 정도 진행됐을 무렵, 회주가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다만, 아까와는 전혀 느낌이 달랐다.

전에는 허황된 얘기를 비난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감탄사 쪽에 가깝다.

“이번에 무너진 건물을 새로 올리는 비용도 왕가가 대부분 부담하기로 했지 않소이까!”

“그랬지?”

“이 계획이 잘 진행만 된다면… 작은 거리 하나 정도 살 수 있는 돈으로 7구역 전체를 살 수도 있는 거란 말이오……!”

현지인 출신이라 머리가 좀 굳어 있는 감이 없지 않아 있으나, 회주 또한 사업적 감이 뛰어난 인물이라 어느덧 내가 말한 ‘사업’을 이해한 듯했다.

뭐, 내가 보기에는 완벽하진 않지만.

“뭔가 오해를 한 듯한 모양인데 회주, 내 목적은 7구역 전체를 사는 게 아니다.”

“……?”

“7구역 전체를 사두고서 나중에 값이 올랐을 때 파는 게 목적이지.”

“……!!!”

이번 계획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도 그럴 게, 땅을 사서 다 전세로 내놓기만 하면 그게 나한테는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땅값이 오르지 않는다면 손해밖에 없다.

뭐, 반대로 땅값이 오른다면 엄청난 이익을 볼 수 있다는 거지만.

“회주, 너도 알지 않나? 상황이 진정되고 7구역이 정상화 되는 순간 다시 예전 가격으로 돌아갈 거라는 걸.”

이건 확실하게 먹는 게임이다.

재건 중에 노아르크 놈들이 성벽 바깥으로 나와서 우리 7구역을 다시 싹 밀어버리는 것만 아니라면.

‘어…….’

진짜 그렇게는 되지 않겠지?

말이 씨가 된다고 불안한 생각은 털어냈다.

“아무튼, 잘 생각해봐라 자작. 그때가 왔을 때 우리가 얼마를 벌었을 거 같나?”

“………내가 무얼 도우면 되겠소이까?”

‘오케이, 저 눈빛을 보니 이제 더 설득하는 과정은 아예 필요 없을 거 같고…….’

나는 솔직하게 필요한 것을 다 말했다.

애초에 이 계획은 이 회주 할아버지의 적극적인 도움이 없으면 나 혼자서 실행이 불가능하니까.

땅을 매각할 귀족 물색을 하는 것부터 시작해, 땅을 구입할 자금, 거기에 건물이 올라가고 세입자를 받을 때까지 버틸 자본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회주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인맥이 넓지 않은 나로서는 땅을 매각할 귀족을 찾는 것에서부터 막힐 테니까.

“한 번 더 말하지만, 싼값에 넘기려는 게 아니면 절대 사지 마라. 어차피 이 시기에 땅을 사려는 정신 나간 놈은 우리 말고 없을 테니까.”

“그 부분은 걱정 마시오. 그런 쪽의 협상은 살아오며 수없이 해온 것이니.”

그래, 바로 이거다.

수천 년 동안 이어진 가문, 거기서 오는 인맥.

그리고 오랜 시간 정치와 사업을 겸하며 어느 정도 발달된 협상 능력까지. 회주라면 내가 기대한 만큼의 일처리를 보여주리—.

“다만, 지금 당장 이러한 큰 결정을 내리기는 어렵구려. 내 좀 더 고민을 하고 연락을 주겠소.”

마지막에 회주가 슬쩍 발을 빼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나는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게, 이미 눈이 돌아간 게 보였거든.

“그래라.”

필시 근시일 내로 연락이 올 것이다.

**

라프도니아에 전세 제도를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은 확실한 이득을 내게 선사할 게 분명하다.

다만 유일한 걱정은 이런 자본주의적인 행보가 너무 악령스럽게 보이지 않겠냐는 것인데…….

‘딱히 특별한 기술이 들어간 것도 아니고 전세 제도 자체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거니까.’

물론 ‘전세’ 제도를 아는 한국인이라면 내 행보를 보고서 의구심을 가질지 모른다.

하지만…….

‘어차피 한국인은 우리 셋밖에 없잖아.’

이백호, 현별이, 그리고 나.

한데 어차피 이 셋 모두 내 정체를 이미 알고 있다.

뭐, 이 세상 어딘가에 숨어 지내는 다른 한국인이 더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정도의 리스크는 감당할 가치가 있다.

비밀 치안청의 악령사냥꾼들을 상대로 벌벌 떨던 예전의 내가 아니니까.

지금의 내게는 나 자신을 보호할 최소한의 수단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어느 정도 보험을 깔아두기도 했고.

“혹시… 이게 전부 다 얀델 남작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오?”

“그럴 리가! 우리 행정사무총장이 고안해 낸 방식이다! 성지에서 집을 짓다보니 그런 쪽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거 같더군!”

“행정원 샤빈 에무어 말이오까?”

“맞다. 얼마 전에 직급이 올랐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구려. 그런 인재들이 운 좋게 얀델 남작의 곁에 모이는 건지… 아니면 남작의 곁에 있었기에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건지.”

그리 말하는 회주의 눈빛에는 부러움 비슷한 감정이 섞여 있어 나로서는 조금 무안할 정도였다.

하나 노련한 전사는 어떤 기회든 놓치지 않는 법.

“글쎄, 어느 쪽일지는 앞으로 직접 확인해 보면 되지 않나?"

나는 씨익 웃으며 마무리 멘트까지 넣어주었다.

“너도 이제 내 곁에 있는 사람이니까.”

의외로 산전수전 다 겪은 어르신들한테는 이런 감정적인 말이 잘 통한다.

21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49화 21

649화 바바리안 비즈니스 (2)

회주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마친 후에는 오랜만에 난쟁이놈을 찾았다.

“히쿠로드 무라드.”

“비요르으으으은! 왜 이제서야……! 왜 이제서야 찾아온 겐가……! 내가 편지도 몇 통이나 썼는데……!”

재회한 난쟁이놈의 반응은 그 어느 때보다도 격했다. 그도 그럴 게, 얘네 대장간도 이번 사태를 피해가진 못하며 실직자 신세가 됐거든.

그래서 팔자에도 없던 컴멜비 여관 로비에서 얘랑 만나고 있는 거고.

“미안하다. 진작 오려 했는데 일이 바빴다.”

“바빴다니? 돌아온 지도 한 달이 넘었지 않나!”

“아, 바빴다니까?”

“…….”

사실 시간을 내서 보려면 언제든 볼 수 있었지만, 하루이틀 미루다 보니 어느새 지금이 되었다.

‘내가 맡긴 미스티움을 포함해 대부분의 재산은 온전히 보전했다는 모양이고 말이지.’

그렇게까지 위급한 상황은 아니라고 해야 하나?

편지에 적힌 내용에 의하면, 일이 터지자마자 그 혼란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중요 자산들은 모조리 챙겨서 피난을 떠나는 데 성공했다는 모양이었다.

뭐, 그래도 대장간을 잃는 건 면하지 못했지만.

“그래서 히쿠르드, 너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 거냐?”

“후… 일단은 상황을 주시하는 중일세. 인맥들을 총동원해 대장간을 보수할까도 싶긴 했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 상황에 대장간을 다시 연다고 장사가 될 리도 없지 않은가. 그래서 아예 컴멜비에서 새로이 시작할까도 고민 중이네만…….”

“그런데?”

“최근 들어 컴멜비를 포함해 모든 구역의 평균 월세가 훌쩍 올랐더군. 아무래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듯싶네. 아는 업자에게 들어보니 가게를 열려는 탐험가들도 엄청나게 늘어나는 추세라더군.”

오, 이건 내가 알지 못했던 정보다.

7구역과 13구역의 사람들이 다른 구역으로 흘러 들어가고, 미궁 폐쇄라는 악재까지 겹쳐서 그런가?

‘……땅 주인인 귀족놈들도 돈이 급한 실정이고 말이지.’

시대가 혼란스러울수록 죽어나가는 건 서민이라 하던가.

그 말이 딱이다.

“그래서 뭔가 결정하기 전에 자네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싶었네마는……. 혹시 자네는 아는가? 이 사태가 어떻게 될지…….”

…그나저나 난쟁이놈이 이렇게까지 작았던가?

은근하게 묻는 말투는 마치 주식 전문가에게 좋은 정보가 있으면 달라는 듯한 모양새였다.

하긴, 나는 귀족이니 뭔가 아는 게 있을 수도 있다 생각했겠지.

“사태가 언제 끝날지는 나도 모른다.”

“후… 역시 그런가…….”

“하지만 대장간을 다시 열 생각이라면 최대한 빨리 7구역에 열어라.”

“이유가 뭔가?”

“곧 재건 공사가 시작될 테니까. 철근과 삽만 만들어 납품해도 본전은 칠 수 있을 거다. 어쩌면 내가 너한테 일감을 몰아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이후 내가 멜베스를 대표해 수주 경쟁에 참가하게 됐음을 알리자, 난쟁이놈도 표정이 변했다.

그야 이 녀석도 아는 거다.

어느 세상이든 ‘정부’와 연관된 사업은 크게 돈이 된다는 걸.

“아! 그렇다면 서둘러야겠군! 믿어만 주게! 열심히 하겠네!”

“아, 그렇다고 지금부터 서두를 필요는 없다.”

“응……? 서두를 필요가 없다니?”

고개를 갸웃하는 난쟁이놈을 보며, 나는 내친김에 ‘전세’라는 방식에 대해서도 설명해줬다.

“뭐? 월세를 내지 않고서도 공짜로 임대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단 말인가?!”

“그래. 근시일 내에 땅을 매입하면 내가 말한 그 방법으로 계약을 맺으면 된다. 그러니 그 전까지는 건물을 어떻게 지을지나 고민하고 있도록.”

이내 그리 말하며 최근 마음 고생 많았을 녀석의 어깨를 토닥이자, 난쟁이놈의 눈에 물기가 맺혔다.

“비요른……! 아무리 우리가 친분이 있는 사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 큰 혜택일세……! 고맙네! 정말로 고맙네!”

…이 세상 사람들은 정말 순진하다니까.

***

난쟁이놈과의 대화는 이후로도 좀 더 이어졌다.

이제는 장사꾼이 되었다지만, 탐험가 출신이라 그런지 지하 1층 탐사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왔다.

아, 이건 딱히 탐험가 출신이 아니어도 이 도시 사람이면 전부 궁금해할 만한 이야기려나?

아무튼.

“지하 1층에는 은빛 바다가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미궁이 닫히며 버려졌던 물건들이 떠다니지.”

제법 가벼운 입을 가진 난쟁이놈인 만큼, 보안이 필요한 얘기들은 전부 빼고서 알려져도 상관없는 얘기들 위주로 대화를 채웠다.

다만…….

“은빛 바다라……. 그 친구가 봤다면 좋아했을지도 모르겠군.”

“딱히 바다가 아니었어도 좋아했을 거다. 워낙에 호기심이 왕성하던 녀석이었으니.”

“그랬겠지…….”

어느 순간 즐겁게 내 얘기를 듣던 난쟁이놈의 눈빛이 가라앉는다.

그리고 술을 마시며 젊을 날을 떠올리는 어느 취객처럼 멍하니 어느 곳을 바라본다.

“비요른, 자네는 어떨 거 같나?”

“어떠냐니?”

“만약… 그때 그 일이 없었다면, 내가 아직 탐험을 이어나가고 있을 거 같나?”

깊은 후회, 아쉬움이 물씬 묻어나는 목소리.

그 탓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잠시 망설여졌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장난스레 말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그렇다고 나랑 같이 탐험하는 일은 없었을 거다.”

“…응?”

“뒤처지는 동료를 억지로 끌고 갈 만큼, 나는 마음 약한 놈이 아니니까.”

그런 내 말에 난쟁이놈도 피식 웃었다.

“뒤처지는 동료라… 확실히 지금의 자네를 보면 반박을 못하겠군. 나라면 따라가기 역부족이었을 걸세. 그 친구라면 또 몰라도.”

“음, 냉정히 말하면 드왈키, 그 녀석보다는 네가 더 가능성이 있었다고 본다만?”

“하핫, 그런가? 아무튼, 어찌 됐든 그래도 우리는 자네를 따라갔을 걸세.”

“아니, 뭘 들은 거냐? 이쪽에서는 받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니까?”

“이 친구가 농담은. 자네는 동료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농담은 무슨.

실제로 나는 그 일이 터지기 직전에 팀 반푼이를 해체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후 그토록 후회를 한 것도 그래서다.

조금 더 일찍, 나는 그 선택을 내렸어야 했다.

“…….”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진 끝에 난쟁이놈이 먼저 새 주제를 꺼냈다.

“그래도 대장간이 전부 부서져버리니 어딘가 속이 후련하군.”

“후련하다니? 혹시 머리가 아픈 거냐?”

“아프기는. 단지 그 친구가 내 등을 떠밀어주는 것 같아서 한 말일세. 이제 지난 일은 털어내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잠시 숙연해졌다.

그러고 보면, 이 녀석이 운영하던 대장간.

‘원래 드왈키의 집을 개조한 거였지…….’

이후 난쟁이놈은 더 크고 최신 설비가 갖춰진 대장간을 지을 거라며 자신의 포부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또 얼마나 흘렀을까.

“자네를 만나면 왜 이렇게 항상 말이 많아지는지 모르겠군. 미안하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되겠나?”

“물론이다.”

“그 친구가… 지금의 날 보면 어떻게 생각할 거 같나?”

“……?”

“탐험가도, 대장장이도 아닌… 한낱 장사꾼이 되었는데, 혹시 한심하게 여길 거 같나?”

그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는 물음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진지한 와중에 이러는 게 좀 미안하긴 한데.

“확실히 한심하게 볼 거 같기는 하군.”

“…역시 자네도 그렇게 생각—.”

“그런 쓰잘데기 없는 고민이나 하는 걸 들으면 말이다.”

진짜 뭔가 해서 들었더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이제 시간도 한참 지났겠다, 나는 슬슬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 참, 그리고 이건 아직 알려지면 안 되는 건데.”

난쟁이놈의 귀에다 대고 말했다.

“용살자, 리갈 바고스.”

“……!”

그 이름이 들리자마자 트라우마라도 발동된 듯 몸을 움찔 떠는 녀석.

그 반응 덕에 조금 있던 망설임마저 지워졌다.

“그놈은 이제 신경 쓰지 마라.”

암만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지만.

이 녀석에겐 들을 자격이 있었다.

“이미 이 세상에 없으니까.”

어쩌면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내게 티만 내지 않았을 뿐, 속으로는 간절히 바라고 있었을 소망.

하나 그 소망이 이뤄진 것이나 다름없을진대.

“그렇군…….”

그럼에도 난쟁이놈은 그 말을 끝으로 침묵을 이어갈 뿐이었다.

그놈이 어째서.

내가 그 사실을 어떻게.

혹시 자네가?

그러한 말도 일절 없었다

내 사정을 헤아리기라도 하듯.

한참이나 정적이 이어진 끝에 녀석이 겨우 내뱉은 말은 단 한 마디.

“…고맙네.”

그 한 마디에 나는 어색하게 등을 돌렸다.

“………고맙기는.”

아직 되갚아줘야 할 놈들이 한가득이다.

***

예상대로 회주 할아버지에게 연락이 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나흘 정도 걸렸나?

사실 이 정도면 집에 돌아가서 혼자 최소한의 생각 정리만 후딱 끝내고서 연락을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내일부터라도 땅을 팔 귀족들을 알아보러 다닌다 했으니, 이 부분은 일임하면 될 테고…….’

회신이 온 다음에는 알미너스 백작과도 약속을 잡고 미팅을 가졌다.

“실로 천재적인 발상이로군. 샤빈 에무어라고 했나? 그런 인재를 왜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인지.”

우리 행정사무총장을 탐내는 것이야 어쨌든.

사이 좋게 웃으며 사진을 한 번 찍고 난 뒤, 백작은 내가 고안해 낸(?) 전세 계약 방식, 조항 등에 조언을 해주었다.

그리고…….

“지금 말한 조항들이 계약서에 필수로 들어간다면 좋네. 자네가 말한 ‘보증금’을 ‘담보’로 잡고 기존 담보 대출 상품과 같은 대우를 받도록 하겠네.”

오늘 방문한 목적에 대한 확답을 해주었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 떨떠름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순조로운 상황에 괜히 불안해졌다고 해야 하나?

그 탓에 이것저것 은근슬쩍 떠봤지만, 의외로 알미너스 백작은 숨김 없이 답해주었다.

“사업이 성공할 거 같냐라……. 사실 지금으로서는 반반일세. 요즘 같은 시기이기에 할 수 있는 사업이긴 하지만, 반대로 요즘 같은 시기이기에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지.”

“흐음…….”

“성공했을 때 큰 이익이 따르는 만큼, 반대급부로 실패했을 땐 큰 손실이 따르겠지. 현재 우리 알미너스 백작가에서는 그런 투자를 할 만한 여력이 없네.”

물론 여기까지만 들어서는 이해가 잘 안 됐다.

“그러면 담보 대출 승인도 해주지 않는 게 맞지 않나?”

알미너스 은행에서 담보 대출을 해주는 것.

사실 이것만으로도 알미너스 백작은 나와 동등한 리스크를 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데 어째서 알미너스 백작은 이런 선택을 했을까.

“거기까지는 손해를 볼 일이 없다고 판단했네.”

“…어째서지?”

“그야 자네가 있으니까.”

알미너스 백작의 눈빛은 나도 모르게 가슴팍을 양손으로 가리게끔 할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사업이 망하게 되면 자네는 내게 아주 큰 빚을 지게 되는 것 아닌가?”

“…….”

“단지 사업가의 시선으로 보고 판단했을 뿐이네. 자네라면 그 빚을 무사히 다 갚을 수 있으리라고.”

“…….”

“평생에 걸려서라도 말일세.”

마지막 말에 비로소 의문이 풀렸다.

“아…….”

돈은 잃을지언정, 나를 평생 노예처럼 부릴 수 있게 되니 할 만한 장사라는 거구나.

문득 등골에 한기가 돌았다.

하지만…….

“어떤가? 아직도 내 도움을 받고 싶나?”

“물론이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작이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역시 자네라면 그럴 줄 알았네. 한데 익숙해지니 생각보다 훨씬 편하군?”

“뭐가 말이냐?”

“이런 식의 대화도 말일세. 서로 속내를 감추고 질질 끌지 않아도 되니 시간도 아낄 수 있고, 심력 소모도 줄일 수 있으니 효율적이기까지 하지. 다른 이들도 다 자네 같으면 좋겠네만…….”

한평생 권모술수가 판치는 바닥에서 살아갔을 백작은 이런 바바리안식 비즈니스가 신선하면서도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다.”

“식사라도 하고 가지 않고?”

“다음 일정이 있어서!”

“하핫, 다음에는 일정을 비우고 오게. 익숙해지니 의외로 자네와 나누는 대화가 굉장히 즐거워서.”

“알겠다.”

이후 백작과의 미팅을 끝낸 나는 곧장 재상의 저택으로 향했다.

“얀델 남작님……?”

저택의 집사는 느닷없이 방문한 나를 보며 굉장히 당황한 표정이었다.

“실례지만, 후작 각하께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했습니다마는…….”

하긴, 이 귀족계에서 약속 없이 찾아오는 무뢰배가 나 말고 누가 있겠어.

그것도 이 나라의 이인자인 후작가를 상대로.

“언질받지 못한 게 당연한 거니 그런 송구한 표정 짓지 마라.”

“…예?”

“후작은 안에 있나?”

“추, 출타 중이십니다마는?”

“오, 그럼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면 되겠군. 안내 좀 부탁한다!”

“그…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후작 각하께서 국무로 바빠 언제 오실지 모르니, 새로 약속을 잡고 후일 재방문하시는 게 여러모로—.”

뭐래.

안 그래도 약속을 잡으려 했는데, 전부 다 무시를 당한 탓에 직접 찾아온 거구만.

“됐다! 나랑 후작은 그렇게 형식에 얽매이는 관계가 아니니! 그냥 편하게 안에서 기다리겠다!”

이내 어쩔 줄 몰라하는 집사를 밀치듯 저택 안으로 들어섰고, 일이 그렇게 흐르자 집사도 별다른 수 없이 나를 손님으로 맞이했다.

그리고…….

하루, 이틀, 사흘…….

음, 이렇게까지 오래 기다릴 생각은 없기는 했지만 아무튼.

제발 돌아가 달란 집사의 애원을 한 귀로 흘리고.

이틀 차부터는 식사도 주지 않아 갖고 있던 육포로 배를 때우며, 강제로 나를 쫓아내려던 기사들의 온갖 방해도 묵묵히 버텨낸 결과.

“후…… 시간이 없으니, 얼른 말하게. 대체 용건이 무엇이기에 이렇게까지 하는 건가?”

이내 후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28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50화 28

650화 바바리안 비즈니스 (3)

라프도니아의 재상, 테르세리온 후작이 나를 보자마자 한숨을 푹 내쉰다.

면전에 대고 이러는 건 귀족계에서는 예의가 아닌 행동이지만, 상대가 나라서 그런가?

이제 이 할아버지도 그냥 거리낌이 없네.

“말하지 않을 건가?”

“그 전에 먼저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

“어서 해보게.”

“그동안 왜 나를 피한 거냐?”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좀 구차한 대사긴 하지만, 만나면 꼭 직접 물어봐야겠다 싶었다.

“피하다니? 무슨 뜻인가?”

“만나고 싶다고 약속을 그렇게 잡으려 했는데, 후작 네가 내 연락을 다 무시하지 않았나.”

나를 의도적으로 피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면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행동.

하면, 후작은 어째서 그러한 것일까.

나랑 밀당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왕실 회의 자리도 내어주며, 자기 딸내미마저 시집을 보내려 관심을 보였으면서.

후작의 입을 통해 들은 진실은 몹시 간단했다.

“바빴네.”

“답장을 보내기도 어려울 만큼?”

“애초에 연락이 온 줄도 몰랐네. 최근 며칠 동안은 아예 왕궁 내에서 지냈으니까.”

그리 말하는 후작을 다시 살펴보니 눈 밑에 감출 수 없는 짙은 피로가 깔려 있었다.

한데 그래서일까?

후작의 목소리도 평소보다 더 예민하고 날이 서 있다.

“애초에 집사장도 자네에게 그렇게 설명을 했다고 들었는데?”

“어…….”

설명을 듣기는 했는데, 정말로 그게 변명이 아니라 진짜일 줄은 몰랐지.

왠지 무안해져 입을 꾹 다물고 있자 후작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나를 보았다.

“자네도 참 이상하군. 만나주지 않았다고 왜 피하냐며 찾아오다니. 너무 오만한 거 아닌가?”

“……응?”

“자네가 만나고 싶어한다고 모든 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시간을 내어줄 거란 생각은 말게.”

“알겠다. 이번 일은 내가 사과하겠다.”

“사과가 아니라 약속을 하게. 다시는 나를 이런 식으로 찾아오지 말게. 어느 정도의 무례는 문화의 차이로 용인할 수 있으나, 이는 나를 무시하는 행동이니.”

“……알겠다고 하지 않나.”

아쉬운 입장으로 찾아온 탓일까?

대놓고 정색하며 저렇게 말하니 무서워서 뭔 말을 못하겠다.

‘…요즘 왜 그렇게 바빴는지도 궁금한데 말이지.’

황도 카르논에서 출퇴근하는 후작이 무슨 일로 며칠 동안 왕궁에서 나오지도 못할 만큼 바빴을까.

못내 그 이유가 궁금했으나, 끝내 나는 입을 열어 묻지는 못했다.

애초에 저쪽에서 그럴 틈을 주지 않기도 했고.

“자, 그럼 용건을 말해보게. 금쪽 같은 휴식 시간을 더 낭비할 수 없으니.”

짧은 대화 속에서 후작이 몇 번이나 시간이 없고 피곤함을 어필한 만큼, 나도 군말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7구역 재건 공사를 우리 얀델 가문으로 선정해달라 부탁하려 왔다.”

한데 이렇게 뻔뻔한 청탁은 난생처음이어서일까.

아니면, 나라는 사람이 청탁 같은 걸 해올 줄은 예상하지 못해서일까.

“……허?”

어이 없다는 감정이 실린 탄성을 뱉어낸 후작이 이내 나를 보며 물었다.

“굳이 이렇게 할 필요까지 있나? 무슨 수를 쓴 건진 모르겠지만, 안 그래도 멜베스에서 자네를 대표로 선정했다고 들었네만.”

뭐, 그건 그렇지.

멜베스의 지지를 받는 만큼 정상적으로 수주 경쟁에 참여해도 크게 밀리는 건 아니다.

하지만, 원래 사업이란 게 그렇다.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는데, 그 방법을 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나.”

“그 사고 방식 자체는 동의하네마는…….”

이내 후작이 눈살을 좁힌다.

“맡긴 물건을 찾으러 온 듯하는 자네의 태도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군.”

지금까지 보지 못한 일면이었다.

앞에서 머리를 부숴버리겠다 농담을 했을 때도 이렇게 짜증을 내는 듯한 말투는 아니었건만.

‘하필 너무 바쁠 때를 골라 찾아왔나?’

뒤늦게 후회가 밀려들지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뭐 어쩌랴.

애초에 마냥 기다렸으면 이렇게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언제 성사됐을지 모르는데.

“말해보게. 내가 자네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일관성 있게 그냥 뻔뻔한 태도로 응수했다.

“독신 선물이라고 생각해라.”

“독신 선물……?”

생전 처음 듣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하는 후작.

거, 이래서 어르신들이란.

“왜 나는 앞으로 결혼도 못하는데, 선물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니냐?”

실제로 내가 이 세상에 끌려오기 전까지 우리 사회도 그런 케이스가 있었다.

그야 비혼 주의자들은 억울하잖아?

축의금을 낼 대로 내고 돌려받진 못하는데.

“…….”

그런 내 논리에 후작은 잠시 생각에 잠기듯 말을 멈추었다.

하기야 억지처럼 들리긴 해도 내 혼삿길을 막은 장본인으로서 그냥 흘려 들을 수만은 없었겠지.

“…자네 말도 일리가 있군.”

그래도 다행인 건, 후작도 기브 앤 테이크의 법칙을 잘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란 거였다.

“하나 국무에 관련된 사안을 내 멋대로 정할 수는 없는 노릇. 이걸 어째야 한담…….”

후작이 곤란하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지만, 사실 공감은 전혀 되지 않는다.

이인자의 자리에서 자기 멋대로 하고 싶은 걸 다하는 노괴가 바로 이 후작이었으니까.

앓는 듯한 말은 그냥 본론을 꺼내기 전 윤활제처럼 뿌리는 거라 생각하고 걸러 듣는 편이 옳다.

바로 이렇게.

“아, 그럼 이건 어떤가?”

역시 아니나 다를까.

머지않아 후작이 타협안을 제시했다.

“정당하게 경쟁할 수 있을 기회를 주겠네.”

“기회……?”

“실은 얀델가를 포함해 총 다섯 개의 가문이 유력 후보로 올라 검토 중에 있는 건 사실이네마는. 얀델 가문이 선택될 가능성은 한없이 낮네.”

뭐, 그건 예상한 바였다.

지금까지 얀델가에서 건축 관련으로는 어떠한 것도 보여준 적 없으니까.

필시 멜베스의 지원 사격이 없었다면 저 후보에 올라가는 일조차 없었을 것이다.

얌전히 기다리지 못하고 후작과 만나려 한 것도 그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기회를 준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이냐?”

“말 그대로일세. 판을 깔아줄 테니 자네가 스스로 자격을 증명해보게.”

대체 어떤 식으로 판을 깔아주겠다는 것일까.

쉬이 머릿속에 그려지지가 않아서 이후 후작의 설명을 들어보니 참으로 기가 막혔다.

“정리해보자면……. 다섯 가문끼리 모여 건축 시합을 벌이라는 거군?”

“시합이라 하기는 그렇고, 각 가문들이 뭘 잘하고 어떤 장점이 있는지를 사람들 앞에서 선보이는 시연에 가까운 자리가 될 걸세.”

그게 그거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어진 후작의 말은 제법 든든했다.

“내 체면이 망가지지 않게 어느 정도의 성과만 올리게. 그럼 이번 수주 건은 얀델 남작가에서 가져가게 될 터이니.”

왠지 기분이 묘했다.

어쩌다 보니 흐지부지되기는 했지만, 그러고 보면 원래 멜베스에서도 드워프 가문 하나랑 이 비슷한 걸 하려고 한 적도 있었는데.

“좋다, 시일이 정해지면 알려줘라.”

…노가다 대결이 이렇게 성립될 줄이야.

***

후작과의 대화를 끝마친 후 성지로 돌아왔을 때, 그때까지도 우리 행정사무총장은 불을 켜두고서 야근을 하고 있었다.

음, 아닌가?

“샤빈, 뭘 그리 열심히 읽고 있냐?”

“아… 그게… 서신이요. 알미너스 은행의 지점장이 저한테 이직할 생각은 없냐는데……. 이상하네요. 딱히 저랑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인데…….”

뭐지?

설마 알미너스 백작이 언질을 준 건가? 한번 만나서 스카우트 할 수 있으면 하려는 식으로?

‘이 할배가 진짜…….’

“그냥 무시해라, 틀림없이 사기꾼일 테니까.”

“……그러니까 갑자기 자존심이 확 상하는데요?”

“기분 탓이다, 기분 탓.”

“그래서 이 시간에는 무슨 일이에요?”

“내가 일이 있어야지만 오는 사람이냐?”

“네. 제가 뭐 시킬까 봐 평소에도 이쪽은 얼씬도 안 하시는 걸 제가 모를 줄 알고요?”

어… 이미 다 알고 있었구나.

왠지 무안해졌기에 서둘러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늘 재상과 대화를 나누고 오는 길이다.”

“…재상님이랑요?”

“왜 그렇게 보는 거냐?”

“그냥요. 이런 걸 보면 참 대단한 사람 같기는 한데…….”

찝찝하게 뒷말을 흐리는 샤빈이었지만, 어차피 오늘은 이런 얘기를 하러 온 게 아니니까.

이후 나는 후작과 나눈 대화를 샤빈에게 공유한 뒤, 내일 직접 우리 전사들의 노가다 능력을 점검하는 시간을 갖겠다고 선언했다.

“내일… 이요……?”

떨리는 샤빈의 목소리에서 왠지 살기가 느껴진 나는 서둘러 부연 설명을 이어갔다.

“많이는 부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 대신 평균을 볼 수 있게 잘 하는 녀석만 부르는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불러내라.”

“음… 그렇다면 어렵진 않기는 한데요.”

“너무 부담 가질 필요도 없다. 당장은 전사들의 솜씨가 어떤지 알아보고, 뭘 더 준비해야 할지 분석을 해보려는 거니까.”

“알았어요. 그렇게 준비해둘게요.”

오케이, 그럼 이건 내일 직접 보면 될 거 같고…….

용무를 끝마친 나는 샤빈과 부족 내 업무 이야기나 좀 더 하다가 임시 숙소로 몰래 돌아가 잠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오오오오오오!”

“일족 최강의 전사가 우리의 솜씨를 보러 왔다!!”

“내 실력을 보여줄 때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어째선지 아침 댓바람부터 불려온 바바리안들은 열성적인 자세로 시험에 임해주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지금 내가 싸우는 실력을 보겠다는 것도 아닌데.

‘언제 이리들 건축에 진심이 된 거지?’

궁금해서 아이나르에게 넌지시 묻자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 나왔다.아니, 정확히는…….

“행정사무총장의 세뇌 덕분이다.”

부족장으로서 흘려 들을 수 없는 단어가 등장했다.

“…세뇌?”

“행정사무총장이 말하길, 적당한 보상과 끊임없는 칭찬이면 고블린의 관념도 고칠 수 있다고 하더군.”

뭔 소리인가 싶어 마저 얘기를 들어보니, 전사들의 인식 개변을 위해 샤빈이 여러 방면에서 노력을 한 거 같았다.

작업을 끝마친 전사들에게는 소정의 보상을 주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엄청나게 추켜세워주며 명예욕도 채워주는 등.

‘인정 욕구를 채워주다니…….’

바바리안이 미쳐 팔짝 뛰는 부분을 정확히 짚었다 해야 하나?

애초에 전사들이 그토록 무력에 열광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무력이 생활 자체에 밀접한 연관이 있단 것도 이유겠지만…….

본질은 인정 욕구가 충족 되기 때문이다.

모두가 강한 사람을 인정해주기에, 우리 전사들은 매일같이 피와 땀을 흘린다.

“잘 모르겠지만 얼마 전엔 집 빨리 짓기 대화 같은 것도 했었다! 거기에서 우승을 하면 이성에게 인기가 많아진데서 나가봤는데 어렵더군!”

“…….”

“아쉽다! 나도 미궁에 들어가지 않고 건축일을 배웠으면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아이나르마저 본말전도가 된 말을 할 정도이니, 부족 내에서 건축술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을 테고…….

‘이게 잘 된 건지 아닌 건지…….’

부족장으로서 좀 걱정이 되지만, 되도록 긍정적인 부분을 보기로 했다.

건축술이 더 발전하면 전사로 살지 않아도 먹고 살 길이 생긴다는 뜻 아닌가.

선택지가 늘어나는 건 언제든 좋은 현상이었다.

‘…그나저나 이러면 기대를 해봐도 좋겠는데?’

이내 나는 멀찍이 떨어진 채, 샤빈 에무어가 준비해온 시범 건축 과정을 지켜보며 우리 전사들의 건축술에 대해 평가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철근 세 개를 옮길 수 있다!!”

“아니, 나는 네 개도 가능하다!!”

운반 능력 상.

“베헬—라아아아아아!!”

작업 속도 상.

“뭐 하냐! 거기에 대충 박아 넣어라!”

디테일 하.

“…뭬, 뭴카의 두 번째 아들 키리타! 여, 여기 창문이 들어가지 않는다. 어떡하면 좋나!!”

고난이도 작업 기술 하.

“다들 힘내라! 오늘 내로 다 지으면 총장이 1만 스톤씩 주겠다고 했다!”

인건비 하.

또한, 여기에 몇 가지 특이점을 꼽자면.

사각형 구조의 건물밖에 만들지 못함.

원형 지붕은 만들 줄 모름.

전반적으로 빠르긴 한데 실수가 잦음.

설계도를 아예 읽을 줄 모름…….

‘이 정도인가…….’

장점만큼이나 뚜렷한 단점들을 보며 나는 입맛을 다셨다.

“쓰읍…….”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24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51화 24

651화 바바리안 비즈니스 (4)

종합적인 평가가 끝난 후, 고민 끝에 골드비어드 백작가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도 그럴 게, 후작이 주최한 경연엔 내가 멜베스 대표로 참가하는 것이지 않은가.

굳이 바바리안들만으로 승부를 볼 이유가 없다.

실제로 수주를 따낸 뒤 공사 작업도 멜베스의 모든 건축 계열 사업체가 합심해서 움직일 거고.

‘문제는 그 아저씨의 자존심인데…….’

회주의 독단으로 멜베스의 대표가 바로 얀델 남작가가 된 상황.

그 탓에 혹시 모를 상황도 우려가 됐지만, 다행히 골드비어드 백작은 내 요청을 받자마자 당일에 전문가를 파견해주었다.

귀족답게 자존심보다는 실익을 챙기는 것이다.

어차피 주축이 얀델 남작가가 된다 한들, 부가적인 낙수 효과는 모두가 누리게 될 테니까.

“하하핫! 어떠냐! 이게 우리가 지은 집이다!”

“의외로… 나쁘지 않군……?”

파견 나온 건축 기술자들도 처음엔 야만인들이 무슨 건축이냐는 눈이었지만, 작업 속도나 결과물을 보고서는 감탄하는 얼굴로 바뀌었다.

“기술력은 조잡하지만, 다들 탐험가 출신에다가 강골이라 그런지 힘을 쓰는 일에서는 압도적일세.”

“기술이 필요 없고 시간이 오래 소요되는 단순 작업만 이들이 도맡아준다면…….”

“확실히 작업 시간이 비약적으로 줄어들겠군!”

파견 나온 기술자들은 어떠한 고민도 없이 역할 분담부터 시작했다.

단순 노동이 필요한 일은 바바리안.

건축 지식이나 손재주가 필요한 일들은 드워프.

전사들이 어깨 너머로 기술을 배우지 못하는 것은 부족장으로서 아쉽지만…….

뭐, 일단 이게 가장 효율적이기야 하겠지.

당장은 경연에서 이기는 게 급선무이니까.

“작업 속도 자체는 빠른 편이나, 힘에만 의지하는 면이 없잖아 있군.”

“며칠이면 모를까. 암만 자네들이라도 이런 식으론 절대 오래 버티지 못할 걸세.”

“교육이 필요하겠어.”

바바리안들의 가장 큰 문제를 파악한 기술자들은 곧바로 문제들을 고치기 위한 특훈에 들어갔다.

“잘 보게. 철근을 들 때는 여기 이 부분을 꽉 잡고 바로 여기 등 힘을 이용해서… 이렇게!”

“오……!”

“내려놓을 때는 이 각도에서 이 부분을 먼저 내려 놓는 걸세. 어떤가? 힘을 거의 들이지 않았는데도 부드럽지?”

“오오……!”

“기둥을 올릴 때는 무조건 두 명인 편이 좋지만, 불가피하게 혼자 해야 할 때는 이 자세를 따라하게.”

“오오오……!!”

공사판 짬에서 나오는 노하우들을 가르치는 드워프들과 이를 열성적으로 배우는 바바리안들.

내가 보기에 학습 속도는 나쁘지 않았다.

다른 부분에서의 습득력이라면 모를까. 몸 쓰는 것만큼은 타고났거든.

“거기가 아니라 여기 이쪽 힘을 써서—.”

“아! 이렇게 하면 된단 말이군?”

“…맞네! 바로 그렇게 하는 걸세……!”

그렇게 훈련 커리큘럼이 얼추 정해진 이후에는 기술자들과 의논하며 작업 방식에 대해서도 정했다.

결정된 방식은 드워프 기술자 하나가 십인장 역할을 맡고, 열 명의 바바리안을 현장에서 감독하는 형식이었는데…….

‘언젠간 우리 바바리안들만으로도 다 해낼 수 있는 때가 오겠지.’

원래 어딜 가든 기술판이 다 그런 거 아니겠는가.

허드렛일부터 하면서 하나씩 습득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전문가가 되는 거고.

“내일은 백작님께 말씀을 드려 더 많은 기술자들이 파견 나올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우리만으로는 이 많은 인원을 감당할 수는 없을 터이니.”

“그래, 고맙다.”

“그러니 재상이 주최한다는 경연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걸 알아야 맞춰서 준비를 할 수 있다 보니.”

이후 경연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열리는지를 설명해 줬고, 나는 그동안 드워프들이 보인 전문성을 믿고서 이번 경연 준비를 완전히 일임했다.

“…신뢰는 감사한 일입니다마는, 그 중요한 걸 우리끼리 준비해도 괜찮겠습니까?”

“그 중요한 거니까 너희에게 맡긴다는 거다. 이 분야에서는 너희가 최고의 전문가니까.”

“…남작께서는 들은 것과 전혀 다른 분이시군요.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대한 열심히 준비해 보겠습니다.”

“믿고 있겠다.”

얼핏 보면 내가 해야 할 일을 전부 드워프들에게 미룬 것 같지만, 사실은 덜어냈다는 표현이 옳다.

이게 아니더라도 할 일이 산더미였거든.

“샤빈, 그럼 나는 도시에 다녀오마.”

후… 이걸 언제 다하지?

***

라프도니아는 사람 목숨을 경시하는 야만적인 도시면서도 의외의 부분에서는 굉장히 현대적이다.

이자는 주지 않지만 은행이 있고.

도시 아래엔 거대한 상하 수도 설비가 존재한다.

마법이 실존하다 보니 과학으로도 불가능한 그런 일상 용품들이 있어서 간혹 놀라는 일도 있다.

아무튼, 이건 여기서 각설하고.

공권력이 막강하다는 특징을 지닌 라프도니아답게 사업을 시작하려면 일련의 준비들이 필요하다.

그냥 아무렇게나 땅을 사고 건물을 올리고 장사를 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하물며 나처럼 복합적인 경우엔 말할 것도 없고.

‘다행히 이번에는 승인이 났네.’

샤빈 에무어의 도움을 받아 준비를 하고서도 무려 두 번이나 반려가 됐던 사업자 신청이 오늘에서야 비로소 승인됐다.

신원이 확실한 작위 귀족이 이렇게까지 어렵게 승인받는 일은 드물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얀델 상단의 설립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다시 한번 설명을 드리자면, 등록 가능한 직원의 수는 최대 1만 명으로…….”

사업 시작 단계에서부터 이렇게 큰 규모로 진행이 되는 일은 거의 없었으니까.

당연히 검토할 것도 많았고, 제출해야 할 서류도 한가득이었다.

한데 그렇다고 작게 시작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일단 바바리안들을 작업에 동원하려면 직원으로 먼저 등록을 해야만 했거든.

드워프들이야 걔들도 회사가 있을 테니 협업하는 식으로 외주를 넣으면 그만이지만…….

우리 바바리안은 그런 게 아예 없다.

아니, 오랜 역사를 뒤져봐도 있었던 적이 없다.

‘바바리안이 세운 최초의 회사인가…….’

어쩌다 보니 또 새로운 업적을 남기게 된 셈이지만, 이건 별 중요치 않은 부분이니 넘어가고.

며칠에 걸쳐 전사들을 직원으로 등록한 나는 본격적으로 비프론 주민들의 케어에 들어갔다.

그야 이만한 인력을 내버려 두는 것도 낭비잖아?

이미 얘네들이 내야 하는 세금, 먹고 자는 데 쓰는 비용 전부를 내가 감당하고 있는데.

“샤빈, 오늘부터 젊은 남자들에게 전부 건축 일을 가르쳐라.”

“네? 지금도 그러고 있는데요?”

“…그러냐?”

“흔히 오는 기회가 아니니까요. 드워프 기술자들이 하는 일들을 유심히 지켜보고 배우라고 말도 해놨어요. 언젠가 그분들이 저 역할을 대신 수행할 수 있다면, 그게 최고이니까요.”

“그럼 여자들은……?”

“여성 분들도 현장의 뒷편에서 이미 일을 하고 있어요. 어제 배급된 식사들도 전부 그분들이 만든 거예요.”

그 말에 나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내가 하려던 지시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니.

“아 참, 그쪽에서 공부를 한 덕인지 어린아이들 대부분은 글을 읽을 줄 알더라고요. 여유가 생기면 제대로 교육을 시켜서 사무 쪽 업무를 맡기면 될 거 같아요.”

“……그, 그렇군?”

불현듯 이전에 회주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도무지 알 수가 없구려. 그런 인재들이 운 좋게 얀델 남작의 곁에 모이는 건지, 아니면 남작의 곁에 있었기에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건지.]

솔직히 말해 그때는 별 감흥이 없었다.

그야 ‘전세’ 제도를 고안한 게 사실은 나였으니까.

한데 이제는 진지하게 그 이야기를 돌이켜보게 된다.

과연 샤빈은 어느 쪽인 걸까.

후자일까 전자일까.

고민을 해봤지만, 나온 결론은 구분짓는 게 의미가 없단 거였다.

능력이 넘치는 샤빈을 만난 건 내 운이고.

그런 샤빈에게 직책을 주고서, 뭐든 할 수 있게 제한을 풀어준 건 나였으니까.

“저… 혹시 화나신 건 아니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때, 샤빈이 뜬금없는 물음을 던져왔다.

“응? 그게 무슨 소리냐?”

“아뇨, 표정이 굳었기에 혹시나 해서요. 제가 멋대로 일을 진행시켜서—.”

“그런 건 일절 없으니 걱정 마라. 애초에 표정이 굳은 것도 너를 데려오길 잘했다고 생각해서였고.”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내 솔직한 말에 멋쩍은 표정을 짓던 샤빈이 평소답지 않게 수줍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도 잘했다고 생각해요…….”

“…응?”

“바쁘긴 하지만, 이전 직장을 때려치고 얀델 씨를 따라오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요. 그… 좋은 사람들도 많고…….”

거, 어쩐지 소녀 같은 표정이더라니.

“예를 들면, 로트밀러 같은 사람 말이냐?”

피식 웃으며 말하자 샤빈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으엑? 어, 어떻게 알았어요?!”

“몰랐다. 조금 전까지는.”

“……!”

샤빈이 낭패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틀어막는다.

그리고 한참이나 말이 없더니.

“비밀… 지켜주셔야 해요……? 안 그러면 행정이고 사무총장이고 뭐고 다 때려칠 테니까.”

그 어느 것보다도 무시무시한 협박을 던져온다.

“무, 물론이다. 절대 비밀을 지킬 테니 걱정 마라.”

“그럼… 다행이고요.”

“그런데 굳이 비밀로 해야 하나? 보니까 로트밀러 그 녀석도 너한테 관심이 있는 거 같던—.”

“저, 정말요?! 로트밀러 씨가 저한테 관심이 있다고 말했어요?”

“말한 게 아니라, 느낌이! 느낌이 그렇다는 거다!”

“……뭐야, 사람 갖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이제 보니 단순히 기류만 흐르는 게 아니었다.

로트밀러는 어떤지 몰라도, 샤빈 얘는 아예 짝사랑 단계로 넘어간 듯한데…….

‘이런 모습은 또 처음 보네.’

생경한 모습에 낯설음을 느끼기도 잠시.

똑똑.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이에 샤빈이 빠르게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왜 그러는 거냐?”

“로트밀러 씨의 노크 소리예요!”

“…응?”

“……들어오시겠어요?”

이내 목까지 한 차례 가다듬은 샤빈이 꾸며진 목소리로 허락하자 천천히 문이 열리며 정말로 로트밀러가 들어왔다.

“얀델? 자네도 있었나?”

“아, 잠깐 일 때문에. 이제 막 나가려는 참이었다.”

“모처럼인데 얘기 좀 하다 가는 게—.”

“바빠서 말이다. 얘기는 다음에 둘이서 하지!”

이내 나는 도망치듯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둘이 알아서 잘 하겠지.’

암만 생각해도, 내가 남의 연애 사업에 감놔라 배놔라 할 처지가 아니다.

***

시간은 언제나 빠르다.

그도 그렇잖아?

내가 얼마나 바쁘게 살았든 한가하게 살았든, 이후 돌이켜보면 항상 순식간에 지나가 있거든.

이번에도 그랬고.

‘어찌 된 게 미궁에서보다 더 바쁘냐…….’

부동산 중개인으로 전직한 회주가 소개해 준 귀족을 만나고, 사업 내 조율이 필요한 부분 때문에 알미너스 백작에게 불려나가고.

후작이 주최할 경연에 참가하는 다른 가문들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조사하고.

만약 수주를 따낸다면 골드비어드 백작가를 비롯해 다른 협업 가문들과는 수익 배분을 어떻게 할지 정하는 등등.

“아저씨, 일어나셨어요?”

“얼른 씻고 나갈 준비해라. 이러다 늦겠으니.”

늦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일상이 이어지다보니 어느새 밝았다.

바로 그날이.

“아아! 오늘이 그날이지?”

“오오! 우리 전사들의 선천적 우월함을 온 세상에 알리는 날이다!”

이내 준비를 하고 약속 장소로 향하자 이미 공터에 삽을 들고 모여 있는 전사들이 보인다.

바바리안 90명에 드워프 10명.

경연 규칙에 의해, 우리 전사들 중에서도 엄선해서 선별한 100명의 최정예.

‘이 얼마나 든든하고도 늠름한 모습들인지.’

한 명 한 명 눈빛이 살아 있음을 확인한 나는 긴 말을 하지 않았다.

“뭣하냐? 다들 연장 챙겨라.”

한 번쯤 해보고 싶은 대사였다.

29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52화 29

652화 이벤트 (1)

개선식 날에도 듣지 못했던, 폭풍이 휘몰아치는 듯한 함성이 사방에서 터져나온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도대체 이게 몇 명이야?

동서남북 어디를 봐도 사람, 사람, 그리고 사람뿐이다. 그 탓인지 바바리안들도 어깨와 광배근에 힘이 과하게 들어간 거 같고.

‘이렇게 큰 이벤트가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규모가 많이 커질 거라는 후작의 말을 듣기는 했지만, 직접 와서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껴보니 실감나는 정도가 다르다.

‘장난 아니네.’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와 불안한 미래.

그 와중에 생긴 유희성 이벤트여서일까?

후작의 대대적인 홍보도 한몫을 했겠지만, 그런 것들이 겹쳐져 이번 이벤트가 대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뭐, 이벤트 자체가 흥미로운 것도 있고.

그도 그렇잖아?

그 고고한 귀족 가문들이, 공사 실력을 갖고서 경쟁을 하겠다는데 나라도 관심이 생길 것이다.

“잘생겼다!! 비요른 얀델……!!”

“꺄아아아아악!”

그래도 이렇게 축제 분위기일 줄은 몰랐어서 좀 어색하긴 하다.

뭐, 뻣뻣하게 목석처럼 있다가 갈 생각은 없지만.

「캐릭터가 [초월]을 시전했습니다.」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저 멀리 떨어진 관중석에서도 확실하게 보이게끔.

몸집을 한껏 부풀리고서 있는 힘껏 소리친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

만 단위의 관중이 토해내는 소음을 뚫고 우렁차게 무대 전체를 뒤덮는 함성.

예상대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거인님이다아아아아!!”

메아리치듯 돌아오는 열띤 환호.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 상승······.」

「······.」

음, 이 정도면 명성이 좀 더 올랐으려나?

시스템 로그를 읽을 수 없기에 잘 알 수 없지만, 설령 명성이 오르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이왕 광대가 된 김에 확실하게 팬서비스를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모두가 힘든 시기이지 않은가.

이런 즐거움이라도 있어야지.

“자, 그럼 이것으로 얀델 남작가의 기술자들까지 모두 입장이 완료되었습니다!”

이내 나와 기술자들까지 준비된 자리에 서자, 사회자가 자연스럽게 행사 진행을 시작했다.

다섯 가문에 대한 간략한 소개, 이번 경연의 취지, 그리고 이번 경연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까지.

‘제발, 쉬운 거로 나와라…….’

대략적인 설명이 끝난 다음에는 곧바로 추첨에 들어갔다.

이번 경연의 시험 주제를 두고서 각 다석 가문이 한 개씩 제비를 뽑아 결정하는 것이었는데…….

“첫 번째 함에는 오늘 지어야 하는 건물의 층수가 적힌 공들이 가득 들어가 있습니다만, 과연 그 결과가 어떨지……!”

애석하게도 첫 순서로 나선 키엠브로타 자작이 뽑은 공에 적힌 숫자는 4였다.

“4층! 오늘 경연에서 기술자들이 지어야 할 건물의 층수는 4층입니다. 시작부터 굉장히 난이도가 높은 설정이 나왔군요!”

5층이 최대였음을 생각하면, 별 4개짜리의 특징이 잡힌 것이나 다름 없는 셈인데…….

“두 번째 함에는 오늘 지어야 하는 건물의 주요 자재가 적혀 있습니다.”

석조 건물과 목조 건물.크게 나누면 이 두 가지가 전부지만, 세부 사항으로 들어가면 의외로 꽤 많은 자재들이 있다.

벽돌, 합성 진흙, 통나무, 나무 판자 등…….

“강화석입니다!”

“허……!”

이내 자재가 정해지자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나온다. 그도 그럴 게, 강화석이 다루기 가장 어려운 자재거든.

일단 중량부터 상당하고, 가공하는 것도 어려워서 물리적으로 다루는 게 어렵다.

하지만…….

‘우리한텐 잘 된 일인가.’

만약 시멘트와 비슷한 성질을 지닌 이 세계만의 건축 자재, 합성 진흙 같은 게 나왔다면 더욱더 곤란했을 거다.

바바리안들은 그런 섬세한 작업을 못하니까.

아무튼, 이후로도 추첨은 빠르게 진행되어 어느덧 시험 주제가 완전히 정해졌다.

강화석으로 만든 4층 건물.

“세 번째 함에서 나온 공은… 8입니다!”

층당 최소 유리창 개수는 8개이며…….

“주거용 건물! 주거용 건물입니다!”

건물의 용도는 상업용이 아닌 주거용.

그리고…….

“얀델 남작님께서 뽑을 공에는 지금부터 지을 건물의 예술 주제가 적혀있는데요. 참고로 공들 중에는 고상함, 부드러움, 위압적인 등 심사에 있어 주요 판단 항목이 될 특징들이 적혀……. 아! 지금 바로 공이 나왔습니다!”

건물의 테마는…….

“행복! 행복입니다!”

……쓰읍.

어째선지, 나랑은 제일 거리가 먼 주제가 나와버렸다.

***

이번 경연에서 주어진 총 공사 기간은 3일.

4층 건물이 걸린 걸 생각하면 너무나도 촉박한 일정이지만…….

‘오히려 그 정도는 돼야 평가가 되겠지.’

다들 프로인 만큼, 시간을 넉넉히 주면 전부 다 완성도 있는 건물을 지을 터.

그럼 결국 예술 평가나 하는 자리가 될 뿐이다.

‘중요한 건 단시간에 얼마나 그럴듯한 건물을 짓느냐 이건데…….’

“우선 땅부터 팝시다! 4층 건물이면 뭘 짓든 일단 토대 공사부터 해야 하니!”

경연이 시작됨과 동시에 전사들이 일단 땅을 파게 만든 뒤, 기술자들과 모여 잠시 상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준비해 온 이 도면을 조금 수정하는 식으로 하면 될 듯한데 다들 어떠시오?”

“나는 그보다 이 도면을 기초로 잡는 게 나을 거 같소이만.”

“주제가 행복이지 않소! 방 개수를 줄이더라도 방 크기를 넓히는 편이 낫지 않겠소?”

시험 내용을 두고서 빠르게 이루어지는 의논.

가만히 옆에서 듣고 있으면서 느낀 것인데, 다들 ‘행복’이라는 주제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냥 넓다고 해서 행복할 거 같소? 편안한 분위기를 풍겨야 하오!”

“에이, 그런 것보다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멋진 공간 구조를 만드는 게 낫지 않겠소?”

“아이! 아이의 방을 멋지게 꾸며봅시다.”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이란 제각각 다르다.

고로, 내가 느끼기에 저 고민은 부질 없었다.

‘애초에 예술 점수잖아?’

내가 보기에는 결국 해석하기 나름이다.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현대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은 설득력이라고.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이런 구조는 어떠냐?”

“……예? 이건 누가 봐도 행복과는 거리가 멀지 않소이까?”

내가 새로운 구조를 제안하자 기술자들이 고개를 갸웃한다.

하지만 내가 이런 구조를 선택한 이유와 예술적인 해석을 내놓자 다들 떨떠름한 표정을 내지었다.

궤변처럼 들리면서도 어느 정도 납득을 해버린 것.

“확실히… 예술 점수를 받지 못하더라도, 그런 방식이라면 높은 평가를 받긴 할 것이오.”

“애초에 멋진 건물을 짓는 게 이 경연의 목적도 아니고 말이지.”

“게다가 내가 듣기로는 마지막 날에 관중들의 평가도 들어간다고 들었소만……. 어쩌면 그때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려.”

어찌 됐든 이번 경연의 총 책임자가 나이기 때문일까?

내가 좀 더 세게 주장을 하고 나서자, 기술자들은 이게 맞나 싶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결정 자체에는 따랐다.

“…그럼 이 설계도대로 하는 거로 최종 결정을 하겠소이다?”

“그래라, 아주 마음에 드는군.”

약 1시간 동안 상의를 하며 설계도를 완성하자, 때마침 땅을 파는 기본 공사가 끝났다.

“전사들은 자재들부터 나르시오!”

“우리는 하수도 설비 작업을 하고 있으리라!”

“경연용이라 구조가 간단해서 금방 끝날 것이오!”

이후로는 드워프 기술자들이 하수도 공사를 시작하고, 그 시간 동안 바바리안들은 쉬지 않고 자재들을 날랐다.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열정적으로.

“저 큰 걸 한 번에 두 개나 든다고……?”

“저쪽! 저쪽은 세 개를 들고 있다!”

“저기는 아예 달리는데……?”

“오! 저기! 네 개! 네 개를 드는 사람도 있……. 아! 다 엎었네…….”

처음으로 받아보는 군중의 관심에 흥분한 것일까.

과할 정도로 무리를 한 탓에 우당탕탕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기도 했지만, 이는 대충 예상했던 바.

딱히 지적을 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좀 있으면 저러지도 않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공사가 시작되자 벌떼처럼 많던 군중들도 눈에 띄게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으니까.

“글피에 완성된 건물을 공개한댔지?”

“그때 다시 와야겠군.”

귀족이니, 경연이니 뭐니 해도 결국 본질은 공사판인 법.

“어어!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

“설마 우리가 못해서인가?”

“다섯 개! 이번에는 다섯 개를 도전해보겠다……!! 그러니 가지 말고 계속 봐라!!”

관중들을 붙잡기 위해 더욱더 오버를 하는 전사들이었으나, 오락거리가 떨어지자 즐길 만큼 즐긴 대부분의 관중들은 미련없이 발길을 돌렸다.

“아, 아… 모, 모두 떠났다……!”

“나, 나는 전사의 자격이 없다……!”

후, 얘네들은 또 갑자기 왜 이래.

의욕이 급격히 떨어진 전사들이었기에 나도 어쩔 수 없이 상황에 개입했다.

“원래 지금쯤이면 다 가는 게 정상이니 신경 쓰지 마라! 애초에 2일 차, 3일 차는 비공개로 진행되기로 했으니까!”

“오 그, 그럼 우리가 별로라서 떠난 게 아니라는 뜻인가?!”

“당연하다! 그러니까 열심히 해라! 4일 차 아침에 완성된 건물을 보여줄 때는 다시 관중들이 꽉 차 있을 테니까! 그들을 실망시킬 거냐?”

“아니다아아아아!”

“베헬—라아아아아아아!!”

오케이, 그럼 멘탈 케어는 이쯤 하면 됐고…….

이후로는 다른 가문의 공사를 구경하면서도 우리 공사에 있어 피드백할 것들이 생기면 즉시 조언하며 근처에서 대기했다.

한데 이건 또 뭘까.

“내 살다살다 바바리안이 건축 일을 하는 모습은 또 처음 보는군.”

“저러다 마지막 날에 무너지는 건 아니려나 모르겠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속닥거리는 타 가문의 인부들이 보인다. 그들의 눈에는 바바리안을 향한 짙은 멸시와 선입견이 가득했다.

“네 개!! 네 개를 동시에 드는 데 성공했다아아아!!”

다행히 우리 바바리안들은 본인 작업에 열중하는 중이라 듣지 못한 듯했지만…….

“쯧, 건축이란 힘으로만 하는 작업이 아니건만.”

“하하, 못 배워서 그런 것이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시오. 알고 보면 불쌍한 이들 아니오? 부족 내에 돈 벌 방법이 없으니까 여기까지 이렇게 나와서.”

듣고 있자니 점점 발언 수위가 올라간다.

다만 화가 난다기보다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뼈밖에 없는 놈들이 뭘 믿고 저러는지 모르겠네.’

이러다 어린 전사들이 듣고 삽자루부터 던지면 그땐 어떡하려고 저러는 거지?

사실 힘 같은 걸 숨겨두고 있는 건가?

자재 나르는 걸 보면 딱히 그런 거 같진 않은데…….

“크흠!”

이내 헛기침을 하자 뒷담화를 하던 인부들이 날 보고서 화들짝 놀라 자기네 자리로 돌아갔고, 이후 혹시 모를 사고라도 터질까 우려한 나는 다른 인부들이 근처에 오지 못하도록 경계를 섰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하루, 이틀, 사흘.

“종료입니다. 내일 심사가 있을 때까지 그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손을 대서는 안 되며, 부정이 발견될 시 즉각 탈락 조치가 될 거라는 후작님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3일 차 자정이 되는 순간 정확히 공사가 끝나며, 고된 일정을 소화해낸 인부들이 바닥에 널브러진다.

우리 전사들이라고 다를 바는 없었다.

그들은 사흘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않으며 열심히 노력했고, 그에 어울리는 결과를 얻어냈다.

“근데… 이제 와서 늦었지만,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싶기는 하구려.”

“남작님 지시 아니오? 우리는 그만 생각합시다.”

뭐, 드워프 기술자들은 아직 긴가민가한 얼굴이긴 하지만.

아무튼.

솨아아아아아아-

세찬 바람 소리와 스삿한 빗소리가 먼지 가득한 공사터를 적신다.

“다들 고생 많았소! 일단 저쪽은 우리가 확실하게 이긴 듯하구려!”

“설마 이렇게 큰 경연에서 저런 품격 없는 건물이 나올 줄은 몰랐소만…….”

“하하! 저게 저들의 최선이었던 것 아니겠소?”

우리 전사들의 노력이 담긴 건물을 비웃는 타 가문의 인부들에게 나는 어떠한 반박도 하지 않았다.

폭풍전야.

저들이 옳은지, 우리가 옳은지는 결과가 말해줄 것이다.

49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53화 49

653화 이벤트 (2)

지난 노력에 대한 심사가 이뤄지는 대망의 4일 차.

아침 댓바람부터 벌떼처럼 모여든 주민들로 모든 관중석이 채워진다.

관중석에서 내려다보이는 무대 중심부에는 사흘간 각 가문에서 지은 건물들이 거대한 천으로 가려진 채 사람들의 궁금증과 호기심을 자극한다.

“흐음, 얀델 남작의 건축물은 굉장히 크구려?”

오늘 심사를 받는 각 가문의 대표, 혹은 대리인 자격으로 나온 이들이 모인 자리.

내 오른편에 앉은 아저씨가 슬쩍 말을 걸어온다.

“굉장히 기대가 되오. 과연 그 역전의 전사들이 어떤 대단한 건물을 만들어냈을는지!”

말에서 비꼼이나 적대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날 경쟁자로조차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라, 단지 이 경연 자체에 그렇게까지 목을 매지 않는다 해야 하나?

그냥 이 기회에 나와 친분을 만들고 싶어 보였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나중에 우리 가문에 한번 방문해주시오. 그때 내 제대로 대접을 해드릴 터이니.”

“…언젠가 시간이 나면. 근데 키엠브로타 자작, 너는 첫 날 이후로 한 번도 오지 않았던 건가?”

“하하, 아무래도 용무가 바쁘다 보니 시간을 따로 빼내는 게 어렵더구려…….”

바쁘기는 무슨.

그냥 너희 입장에선 그리 간절하지 않았던 거겠지.

사실 얘 말고 다른 가문들 중에서도 대표가 직접 나와서 참관하는 걸 본 게 딱 한 번뿐이다.

뭐,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총관이 열심히 했다고 하니 내심 기대 중이오. 아, 물론 워낙 쟁쟁한 가문들이 참가한 탓에 큰 자신은 없지만 말이오.”

원래 얘네들은 아랫사람들한테 모든 걸 일임하는 게 습관이 되어 있다.

따라서 경연에서 지면 그건 자기 탓이 아니라, 아랫사람들이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 될 테고.

“키엠브로타 자작도 겸손하시구려. 아무리 그래도 일단 꼴등은 면했다 볼 수 있을 터인데.”

한데 우리 둘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거슬렸는지, 내 왼편에 있던 귀족이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이놈이…….

“랭글스턴 백작? 꼴등은 면했다니 그게 당췌 무슨 말씀이신지…….”

아, 맞다. 이거였지.

다른 가문 대표들 중 유일하게 현장까지 찾아오는 열정을 보였던 녀석이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내 건물도 보았다.

“왜 자작은 소식도 듣지 못했소? 얀델 남작가에서 시험 주제와는 영 거리가 먼 건물을 지은 걸?”

“…….”

자작도 해당 내용을 듣기는 했는지 입을 꾹 다문 채 불편한 표정만 짓고 있다.

하, 진짜 왜 가만히만 있어도 시비를 거는 놈들이 이렇게 많은 건지.

“…….”

그냥 무시로 일관하자 백작도 흥미를 잃었는지 별말을 더 하진 않았고, 옆에 있던 자작도 괜한 놈이 껴들어 초쳤다는 듯한 얼굴로 행사에 집중했다.

“자, 그럼 기대하신 첫 번째 건축물부터 지금 바로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경연에서 어떤 식으로 심사가 이뤄지는지에 대한 설명도 어느덧 끝나고, 사람들 앞에서 완성된 결과물을 선보이는 순간이 코앞에 닥쳐 있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이내 사람들의 환성 속에서 첫 번째 건축물의 가림막이 제거되고, 건축을 도맡은 전문 기술자가 나와 진행자와 티키타카를 하며 건축물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간다.

이 건물의 특징이 무엇인지.

어떤 걸 의도했고, 얼마나 디테일한 부분까지 손수 신경을 썼는지. 거기에 또한 현실적인 비용까지 제시하며 내실도 챙겼음을 어필한다.

그리고…….

“그러면 이제 심사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러한 과정이 끝나면 곧장 심사가 진행된다.

심사는 크게 세 가지 항목으로 나눌 수 있었다.

건축 전문가 평가 25%.

귀족 심사위원단 평가 25%.

무작위로 뽑은 100명의 시민 평가 50%.

각 항목의 평가는 이 비율을 토대로 적용되며, 모든 항목에서 만점을 받을 시 100점을 얻을 수 있는 방식이었는데…….

“총합 71점입니다!”

첫 번째 건물의 점수가 나왔다.

보는 것만으로도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으리으리한 집을 지어내며, 내심 가장 큰 경쟁자라 여겼던 상대였지만 점수는 예상보다 낮았다.

몹시 간단한 이유였다.

시민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못 받았거든.

“이해가 안 되는군! 이보시오! 내가 지은 건물이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들었기에 그런 점수를 준 거요?”

설계와 공사를 전두지휘했던 기술자가 성난 목소리로 따지고 들자, 맨 앞에 있던 시민 투표자가 당황하며 답한다.

“어……. 그… 멋진 건물이기는 한데……. 저랑은 너무 먼 나라의 이야기인 거 같아서……. 비싸기도 하고…….”

“……하! 웃기지도 않는군!”

기술자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혀를 찼지만, 여기서 시민들에게 더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본인도 아는 것이다.

이렇게 이목이 집중된 상태에서 더 까불었다가 윗사람들의 눈총을 받을 수 있다는 걸.

뭐, 지금 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추해보이지만.

“쯧. 시민 평가 비율이 저렇게 높아서야… 공정한 경쟁이 되기 어렵겠군.”

아무튼, 앞에 점수가 충격적이었을까? 두 번째 순번을 앞둔 백작이 혀를 찬다.

“저런 천한 것들이 무얼 안다고……. 재상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방식을 고안하신 건지…….”

글쎄, 나는 좋은 방식이라 생각한다.

시민 평가 비율을 높게 둔 건, 이 경연에서 오락 요소를 키우기 위해서였을 테니까.

사태가 터지고서 처음 있는 큰 이벤트이지 않은가.

왕가 입장에서는 공정한(?) 경연보다는 사람들의 민심을 달래는 게 더욱더 중요한 것이다.

‘아무튼, 나중에 후작을 만나면 말해줘야지. 쟤가 뒤에서 험담을 했다고.’

각 가문의 불만이야 어쨌든, 행사는 계속해서 진행됐고 차례차례 점수가 나왔다.

두 번째 순번이었던 백작이 현실과 적당히 타협한 실용적인 멋을 품은 주택을 선보이며 76점.

세 번째 순번이던 남작가가 71점.

그리고 네 번째 순번이었던 자작이…….

“69점입니다!”

최저점을 갱신하며 꼴등으로 내려오자, 백작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위로하는 척 나를 돌려깠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래도 다음 차례가 되면 체면치레는 할 수 있지 않겠소이까?”

마치 이미 내가 꼴등인 게 기정사실이라는 듯한 발언.

이전에도 그랬듯 반박은 굳이 하지 않았다.

결과로 증명하면 되니까.

“그럼 마지막 차례로군요! 모든 분들이 목이 빠지랴 기다렸을 바로 그분! 거인! 얀델 남작가의 건축물입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이번에는 특별하게도 기술자에게 소개를 맡기지 않고 남작님 본인이 직접 하신다고 하시는데요……. 열화와 같은 박수로 맞이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내가 직접 무대에 나선다는 말에 더욱더 세찬 함성과 환호가 밀려들고, 옆에 있던 백작은 무슨 광대라도 보듯 나를 보며 인상을 찌푸린다.

“귀족의 품위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온 것인지…….”

마치 이게 뭐라고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냐는 듯한 눈빛. 살다보니 느낀 것인데, 평소 가장 멀리 해야 할 부류다.

긍정적인 에너지라는 걸 받을 수 없는 부류거든.

“안녕하십니까, 남작님! 제가 듣기로 이번 건물에 얀델 남작님의 의견이 강하게 들어갔다고 하던데, 소개 전에 간단히 설명을 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행복에 가장 가까운 집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오! 그렇습니까! 정말 기대가 되는데요. 그럼 질질 끌것 없이 바로 공개하겠습니다. 보여주시죠!”

이내 사회자의 외침과 함께 끈이 풀리며 천으로 가려져 있던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와아아아아……… 아?”

건물이 공개됨과 동시에 일순 함성이 끊긴다.

그야 그럴 만하다.

앞서 선보인 화려한 집들과는 외관부터 거리가 멀었거든.

“하하……! 일단 겉보기로는 굉장히 단순하면서도 투박한 멋을 풍기는 건물이군요! 다만, 놀랍게도 그런 건물이 무려 두 채나 있습니다! 혹시 질보다는 양을 택한 전략이신지요?”

“그렇다.”

“아, 그렇다고 하시는군요! 확실히! 이번 경연의 결과를 통해 라비기온의 구역 하나를 통째로 맡을 수도 있는 만큼, 작업 속도는 심사에 있어서도 꽤나 중요하게 작용할 듯싶은데요……!”

뭐지. 이 사회자는? 왜 이렇게 실드를 잘 쳐줘?

혹시 내 팬인가?

아니면 후작이 일부러 따로 지령을 내린 건가?

그러한 합리적인 의심이 피어나는 것과 별개로, 사회자는 억지로 텐션을 올리며 계속해서 행사를 진행해 나갔다.

“하면 과연 안은 어떨는지! 지금부터 한번 다 함께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오! 1층부터 벌써 방문이 여러 개 보이는데요! 거실은 비교적 좁게 설계를 하신 듯 보입—.”

“미안한데, 거실이 아니라 복도다.”

“……예?”

“애초에 이걸 거실이라 부르는 것도 웃기지 않나?”

“예, 예… 분명히 그렇습니다마는……. 아, 그럼 지금부터 첫 방을 한번 보겠습니다!”

이내 영상 기록용 수정구를 이용해 실시간으로 내부 모습이 공개되자, 우레와도 같던 함성이 눈녹듯 사라져갔다.

“…하하! 굉장히 아담한 방이로군요? 구조도 아주 특이합니다. 보통은 이런 작은 방에 화장실이 딸린 경우가 없는데… 이런 구조를 택한 이유를 혹시 들을 수 있을—.”

“나중에 한 번에 설명하겠다.”

“…….”

아무래도 후작의 지시를 받은 게 맞는지, 내가 도움의 손길을 거절할 때마다 사회자는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다만,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났다 여겼을까.

1층, 2층, 3층, 4층…….

모든 층의 모든 방을 하나씩 확인하면서도, 사회자는 더 이상 억지로 텐션을 끌어올리지 않았다.

아, 물론 그래도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 저 의지만큼은 칭찬할 만했다.

“그, 그럼 이번에는 두 번째 건물인데요! 과연 저 안에는 어떤 놀라운 게 숨겨져 있을—.”

“아, 숨겨진 그런 건 없다.”

“예……?”

“아예 똑같은 구조의 건물이니 굳이 들어가 볼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그, 그렇군요.”

마지막 희망마저 무참히 짓밟히자 이제 아예 두 눈을 질끈 감는 사회자.

하나 그 와중에도 자신의 임무 자체는 망각하지 않았다.

“…그럼 나중에 해주시겠다고 하신 설명을 들어볼 수 있을는지요?”

사회자의 질문을 들으며 나는 천천히 주변을 싹 둘러보았다.

기대가 컸던 만큼 충격이 커 보이는 관중석.

그럴 줄 알았단 반응의 귀족들.

제발 더 사고만 치지 말아주길 바라는 듯한 사회자의 시선…….

툭툭.

딱 반전을 주기 좋은 분위기였다.

그래, 그러니까…….

“이 집은 좁다. 혼자 살아도 짐은 많이 쌓아둘 수 없고, 아이는커녕 배우자와도 함께 살기 어렵다.”

“…….”

“정원은 물론 바람을 쐴 수 있는 테라스도 없고, 주방도 비좁아서 요리를 해먹기 불편하지.”

약점을 보란듯이 오픈하며 관심을 돋군다.

그야 이렇게 나오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기대를 하게 되거든.

뒤에 무슨 말이 이어질지.

“하지만!”

나는 음성 증폭 장치가 없어도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크게 소리쳤다.

“단언컨대, 이 집은 행복에 가장 가까운 집이다!”

“…그리 말씀하신 연유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행복한 세상 따위는 없으니까.”

실제로 사회 구성원 전부가 행복해지는 사회 같은 건 현대의 기술력으로도 달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이 집은 행복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집이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인 목소리로 우리가 지은 건물에 대해 소개했다.

“당장은 가진 게 없어도 행복을 꿈꿀 수 있는 집!”

“…….”

“모두가 행복해질 수 없더라도, 미래에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 정도는 있기를 바라며 지은 집.”

4층 건물에, 무려 24세대가 들어간.

“이름하여, 행복주택이다!”

쉽게 말해, 원룸이다.

***

행복주택의 개념에 대한 설명이 끝난 뒤에는 본격적으로 자기 어필을 시작했다.

현실적인 단가와 추정 월세.

그리고 작아 보이는 원룸 공간이 사실 얼마나 1인 가구들에게 실용적으로 설계됐는지 등등.

“저 정도 값이면 어지간한 여관에서 장기 숙박을 하는 것보다 싸잖아?”

“그보다 벽이 아니라… 수납장이었다고……?”

“이럴 수가! 수납장에서 식탁이 나오다니!”

워낙 첫인상이 별로였어서 그럴까.

하나씩 장점들이 공개될수록 빠르게 여론이 반전된다.

그러나…….

‘이거로는 좀 불안하단 말이지.’

나는 미리 준비해 온 네거티브 전략도 개시했다.

그야 이것도 엄연히 ‘경쟁’이잖아?

마지막 순번이라 실질적으로 상대의 점수는 깎지 못하겠지만, 인식 개변을 시키는 것만으로도 내게 좋은 점수를 던지게끔 유도할 수는 있다.

따라서…….

“앞서 보여준 건물에 들어가면 몇 명이나 행복할 거 같나?“

"……대부분은 행복하지 않을는지요? 저도 마음 같아선 저곳에서 살고 싶을 정도입니다마는.”

“글쎄. 모르긴 몰라도 이 도시의 90% 이상은 불행할 거다. 매달 내는 월세에 허덕일 테고, 어딘가 몸이 크게 다쳐도 억지로 일을 나가 돈을 벌어야 하겠지. 세금을 내야 하니까.”

“아……!”

“심지어 구조도 봐라. 공간 낭비가 얼마나 심한지. 보기는 좋아도 살기에는 불편한 집들의 특징이다. 게다가 수납 공간도 없지? 이런 집들은 짐이 생기면 바로 지저분해진다.”

“…….”

“또 관리비는? 건물 외관이나 조명 같은 걸 깨끗히 관리하려면 비용이 추가적으로 들 텐데, 너는 그런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저런 집에 살고 싶나? 기둥도 몇 개 없어서 툭 치면 부서질 거 같은 건물인데?”

나름 논리적인 근거를 기반으로 앞선 건물들을 까내리자 여론이 뒤바뀌는 속도에도 가속이 붙었다.

“확실히… 저런 식의 건축물이라면 비용 절감도 크게 되겠구려.”

“어차피 우리가 살 집도 아니니 말이오.”

“천한 것들이라면, 저런 집에서야말로 행복할지도 모르겠지요.”

어느새 귀족 심사단들 여론도 움직이기 시작한 거 같고.

“내구력 테스트를 해봤는데, 상상 이상으로 견고한 집이오.”

“아까 설계도를 봤는데, 기본은 철저하게 잘 지켜진 건물이올시다.”

“지진이 나도 무너질 일은 없겠군.”

“외형적으로 화려하면 그만큼 약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저 건물에는 그런 게 없소이다.”

“관리만 제대로 된다면, 백 년은 끄떡 없겠구려.”

여론이 움직이다보니 건축 전문가들도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한다.

다만, 이 꼴을 그냥 좌시할 수 없었을까.

“대체 언제까지 시간을 주는 것이오? 이제 슬슬 심사를 시작합시다!”

백작의 민원에 사회자도 정신을 차리고 최종 심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겨, 결과가 나왔습니다!”

마침내 심사 점수가 합산되며 얀델 남작가의 총합 점수가 나왔다.

아직 발표된 건 아니지만.

두근-!

심장이 기분 좋게 진동한다.

공기는 시원하고, 마음은 평온하기만 하다.

그 어떠한 불안도 느껴지지 않는,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평정의 상태—.

“총합 72점으로 2위입니다!”

“……응?”

“이번 경연의 1위는 총합 76점을 받은 랭글스턴 백작가입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니미럴.

***

1등보다 가치가 있는 2등은 존재한다 믿는다.

그야 2등은 본인의 부족함을 그 누구보다도 확실히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니까.

‘시민 투표에서는 분명 내가 압도적이었을 거 같은데, 나머지가 문제였나 보네.’

심사위원을 맡은 귀족들과 기술자.

아무래도 이들에게는 내 철학적 소신이 가슴 깊이 와닿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원래 이런 사람들은 고집이 세거든.

“2등이라… 나름 열심히는 한 거 같소이다. 공동 3등과 불과 1점 차이긴 하지만.”

“…….”

“아무튼, 남작의 언변은 실로 놀라웠소이다. 물론 단순히 말하는 대로 된다면 그게 세상이겠냐마는.”

이내 랭글스턴 백작이 내 속을 박박 긁으며 단상에 나가 경연 1등을 한 것에 대한 상금을 획득한다.

속에서 열불이 날 거 같지만, 그래도 딱히 눈물을 흘릴 정도는 아니었다.

이미 목적은 초과 달성이라 해야 하나?

‘2등이면… 더 볼 것도 없네.’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는 저 백작에겐 미안하지만, 결국 7구역 수주는 내게 넘어올 것이다.

애초에 그 재상이 약속했으니까.

남들에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만큼, 어느 정도의 성과만 내더라도 우리 얀델 남작가가 가져갈 수 있게 해주겠노라고.

그러니까 결국 승자는 나란 뜻인데…….

“하…….”

근데 왜 이렇게 저놈이 얄밉지?

애초에 1등만 단상에 올려보내면 되지 왜 우리까지 부르는 건데?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후작 앞에 선 랭글스턴 백작을 노려보던 그때.

‘빛……?’

관중석 한 곳에서 빛이 크게 번쩍인다.

머리가 위화감을 느끼는 것보다 본능적인 신체적 반응이 훨씬 더 빨랐다.

두근-!!

위협을 감지한 심장이 먼저 크게 일렁이고.

‘…마법.’

그다음에서야 머리가 상황을 인지한다.

‘위험하다.’

내가 아니라, 저쪽이.

뭐가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막아야 한다.’

길게 판단할 시간은 없었다.

방패바바의 본능이 몸을 지배했다.

「캐릭터가 [탐욕의 비늘]을 시전했습니다.」

「캐릭터의 항마력이 500 이상입니다.」

「받는 모든 마법 피해가 50% 감소합니다.」

따라서 일단 스킬부터 써가며 앞으로 대시.

콰아아아앙-!

대상을 끌어안음과 동시에 터져 나온 폭발.

치이이이익-!

등 뒤에서 전해져오는 뜨거운 격통.

그리고…….

“…기, 기습이다!”

누군가의 외침을 기점으로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뒤늦게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모여들며 내 주변을 철통 경호했고, 나 역시 입 밖으로 참아왔던 신음을 흘렸다.

“아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통증.

이에 나도 모르게 안고 있던 팔을 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한 후작이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자네…….”

암만 봐도, 목숨을 건진 사람이 할 대사는 아닌 거 같지만.

“…어째서 날 구한 건가?”

나도 딱히 할 말이 없기는 했다.

“어…….”

그러게.

이걸 내가 왜 막았지?


18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54화 18

654화 이벤트 (3)

폭발이 터져 나온 순간.

“꺄아아아아악!”

관중들의 함성이 비명으로 전환된다.

“저쪽! 저쪽에서 마법이 날아왔다!”

“아무도 나가지 못하도록 통제해!”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주변에서 대기 중이던 병사들이 마법이 시작된 지점을 향해 달려들고.

“비, 비켜어어……!”

테러에 말려들까 싶어 자리를 벗어나는 군중들이 섞이며 혼돈이 찾아온다.

“……후작 각하! 다친 곳은 없으신지요!”

테러다.

이런 커다란 이벤트 속에서 대범하게도 한 나라의 재상을 목표로 한.

“……이런 상황은 몹시도 오랜만이군.”

의외로 이런 쪽의 경험이 많았을까?

잠시 넋이 나간 듯했던 후작은 금방 정신을 차리더니 옷소매를 털며 멀쩡히 일어섰다.

그리고…….

“나는 괜찮으니, 그보다 이 친구를 먼저 봐주게.”

왠지 평소보다는 훨씬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나를 바라본다.

그 말에 행사에 참석 중이던 신관이 나에게 달라붙어 치료를 시작했고…….

“어서 자리를 피하셔야 합니다!”

“잠시만 기다리게.”

기사들의 다급한 애원에도 후작은 내 상처가 어느 정도 회복될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내게 다가와 말을 남겼다.

그리 길게 감사 인사를 남긴 건 아니었지만.

“오늘 일은 고맙네.”

뭔가 굉장히 낯설다.

생각해 보면, 후작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던가?

‘…없던 거 같네.’

잘 찾아보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애초에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들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기도 하고.

“이번 일이 정리되면 내 따로 부르지.”

그 말을 끝으로 후작은 기사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떠났고, 나는 덩그라니 남아 조금 전에 있었던 일들을 복기했다.

감사 인사까지 받고 나서 할 생각은 아니긴 하지만.

‘……내가 왜 그랬지?’

솔직히 말해, 조금 후회가 된다.

그도 그럴 게, 후작이 뭐 예쁘다고 몸까지 던져서 구해줘?

심지어 드래곤 모드 상태인 나에게 피해를 입힐 정도의 마법이었지 않은가.

그냥 내버려뒀으면 후작이 죽는 거—.

‘아, 그건 아니었으려나?’

지난 날, 후작을 죽여 줄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이백호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 그건 좀······. 그 새끼는 죽여도 왕궁에서 부활해요.]

[···부활? 그건 뭔 소리냐?]

[아, 그건 모르시는구나. 게임엔 없던 물건이라 그런가? 아무튼, 그런 왕가의 보물이 있는데 그게 지금 후작 손에 있어요.]

내가 몸을 날리든, 뒤에서 구경만 하든 어차피 후작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음, 그렇게 생각하면 그리 나쁘진 않을지도?’

이번 일로 호감도를 쌓고, 나중에 뒤통수를 확 때려 버리는 거지.

원래 똑같이 뒤통수를 맞아도 믿고 있던 놈이 때리면 더 아픈 법이잖아?

‘……아무튼, 일단 달려들어서 막는 버릇은 좀 고치든가 해야겠네.’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은 것과 별개로, 나는 이번 사건에서 있었던 내 나쁜 습관을 똑바로 인지했다.

미궁에서 하는 일이 대신 처맞는 거라서 그럴까?

뭘 하든 내가 먼저 처맞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몸 깊숙이 배어 있는 듯한데…….

“고, 고맙소이다.”

“…응?”

뭐야 이건 또.

갑자기 누가 말을 걸어와서 보니까 이번 경연에서 1등을 한 랭글스턴 백작이다.

“제때 나를 밀쳐준 게 아니었다면, 나도 그 폭발에 휘말렸을 터. 얀델 남작이 내 목숨을 구했소.”

아… 그게 그렇게 해석도 될 수 있구나.

하긴, 내가 안 밀었으면 진짜 크게 다치긴 했을 거 같긴 하다. 마법이 날아들었을 때 이 아저씨는 후작 바로 옆에 있었으니까.

“무사해서 다행이다.”

대충 답해주자 랭글스턴 백작이 조심스레 한 가지를 물어왔다.

“한데… 외람된 말이오만, 어째서 나를 구해준 것이오?”

공교롭게도 후작이 물었던 것과 똑같은 질문.

나는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왜 구하면 안 되는 거냐?”

“그야…….”

말꼬리를 흐리던 랭글스턴 백작이 허심탄회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경쟁자이지 않소. 내가 없으면 얀델 남작이 1등이 될 수도 있었소.”

좀 어이가 없었다.

얘는 이번 경연을 무슨 배틀 서바이벌 같은 거라 생각하고 있나?

‘아니면… 그냥 귀족적인 사고 방식이 배어 있는 걸지도.’

“게다가 그게 아니어도… 남작이 나를 좋게 봐줄 이유가 하나도 없지 않소?”

해석하자면, 내가 아까 전에 너한테 못되게 굴지 않았냐는 뜻인데…….

솔직히 말해 이번 건 얻어걸린 것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얘가 감사 인사를 하러 오기 전까지 얘의 존재도 잊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굳이 곧대로 말할 필요는 없을 터.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다. 구할 수 있으니까 구했을 뿐.”

그리 말하며 호탕하게 어깨를 툭툭 쳐주자 백작이 묘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얀델 남작은… 정말 소문 그대로의 사람이구려. 이전의 내 무례를 진심으로 사과하겠소이다.”

날 싫어하던 사람한테 이런 말을 듣는 거.

……이거 의외로 뿌듯하네.

***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0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0 상승했습니다.」

「캐릭터의 명성 수치가 +10 상승······.」

「······.」

「······.」

***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던 건축 경연.

그리고 그곳에서 발생한 테러.

당연한 말이지만,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라프도니아에 존재하는 모든 언론사에서 대서특필 되었다.

후작을 향한 암살 시도와 이를 막아낸 영웅, 거인 얀델의 아들 비요른.

헤드라인은 제각각 달랐지만 결국 정리해보자면 이 내용이 주였으며, 그 외에는 굉장히 조용했다.

노아르크에서 보낸 암살자라든가.

정치적인 이유의 테러일 거라든가.

어쩌면 아들이 작위를 탐내 그런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등.

길바닥에서 수많은 루머가 양산된 것과 달리, 언론사에서는 그 어떠한 억측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어그로를 끌어 먹고 사는 3류 일간지조차 이 부분에서는 조용했을 정도였는데…….

‘후작 파워가 엄청나긴 하네.’

내 이야기가 등장할 때면 항상 공들인 개소리를 휘갈기던 언론사마저 저러고 있으니 좀 신기하다.

하긴 나라의 2인자가 얽힌 일이니 몸을 사리는 게 당연한가?

아무튼.

그 일이 있은 후로 사흘째 되는 날.

“우와… 이거 범인 아직도 안 잡혔구나…….”

오늘도 신문부터 열어서 소식을 확인하고 있는데 뒤에서 미샤가 얼굴을 들이민다.

“비요른, 너는 어디일 거 같은데? 노아르크? 정적? 아니면 그 짜증나는 아들내미?”

“글쎄, 일단은 노아르크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그보다 좀 떨어지는 게 어떠냐?”

“왜? 동료라기엔 너무 가까운 거리라서?”

“…….”

최근 느끼는 건데, 요즘 들어 미샤의 텐션이 부쩍 올라간 듯하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오랜만에 둘이 있는 김에 근황에 대해서 물었더니 금방 표정이 좋아진 이유를 들을 수 있다.

“응? 글쎄? 딱히 뭐 대단한 건 안 하는데……. 그냥 낮엔 아이나르랑 같이 운동하고……. 저녁 준비가 끝난 뒤에는 그림이나 좀 그리고…….”

“그림?”

“아, 얼마 전부터 취미로 한번 해보고 있다. 저번에 레인즈 씨랑 미술관에 갔다가 조금 흥미가 생겨서……. 아! 아직 절대 안 보여줄 거니까 보여달라 하지도 말고!”

아멜리아랑 미술관까지 같이 갈 정도면, 겉돌던 시기는 완전히 끝난 듯 보인다.

그러다 보니 옛날 성격이 돌아오는 거 같고.

‘쭈그리처럼 있는 것도 나름 귀엽긴 했는데 말이지…….’

이후 좀 더 대화를 나눠보니 아이나르나 아멜리아, 이 둘이 아니더라도 관계 개선이 나름 잘 된 듯하다.

“고울랜드 씨는 아직 친하진 않은데 그리 나쁜 사람 같지는 않고……. 에르웬은… 잘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더 잘못한 게 많은 거 같아서 얼마 전에 사과를 하긴 했는데, 자리를 피하더라고…….”

“그렇군.”

“그래도 에무어 씨랑은 엄청 친해졌당. 로트밀러에 대해 궁금한 게 엄청 많던데? 맞다, 이틀 전에는 히쿠로드랑 로트밀러까지 해서 다 같이 봤었당.”

“뭐? 근데 왜 나랑 같이 안 간 거냐?”

“음, 넌 그날도 바쁘다고 나갔으니까?”

이틀 전이면, 테러 관련으로 질문 몇 가지 할 게 있다고 해서 왕실 정보부에 다녀왔던 때다.

하… 저런 약속이 있을 줄 알았으면 뒤로 미룰 걸.

“그래서… 오늘은 뭐 하는데?”

“오늘?”

“응. 할 거 없으면 나랑 이따가 컴멜비에나 잠깐 다녀올래? 어제 보니 칼자루가 너무 헤져서 교체를 좀 하려는데…….”

“아… 같이는 못 돌아오는데 괜찮나?”

“응? 왜?”

“저녁에는 후작을 만나기로 해서. 아마 컴멜비에 갔다가 바로 카르논으로 넘어가야 할 거다. 음, 이럴 거면 그냥 나중에—.”

“아니, 그래도 상관없으니 신경 쓰지 마라! 어차피 칼만 맡기고 오는 건데! 지금 바로 준비하고 오겠당!”

그리 말하고 사라진 미샤는 정말 번개처럼 외출 준비를 끝내고 돌아왔고, 이후로는 바로 성지를 벗어나 컴멜비로 향했다.

그리고 대장간에 검을 먼저 맡긴 다음 근처에서 간단히 식사, 이후에는 이왕 컴멜비까지 온 김에 거래소에 들러 매물들 시세 파악이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으아! 다 왜 이렇게 싸진 거냐? 내가 돈만 많이 있었어도 다 사버리는 건데!”

“아무래도 미궁이 폐쇄됐다 보니 당장 구매하는 사람이 없지 않겠나. 너도 좀 더 기다려라. 탐험가들 장비 같은 건 계속 값이 내릴 테니까.”

“으응… 그래도 재밌었다.”

“나도 오랜만에 즐거웠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더 있고 싶은데…….”

“가야 하지?”

“아무래도 후작과 잡은 약속이다 보니까.”

“으응, 잘 다녀와…….”

이후 미샤와 헤어진 후로는 바로 카르논으로 직행.

약속을 잡고 온 것이기에 이번에는 입구에서부터 실랑이를 할 것도 없이 프리패스였다.

“얀델 남작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후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내 방문 예상 시간에 맞춰 집사장이 앞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것부터 시작해, 정원을 따라 들어서니 사용인들이 오와 열을 맞춰 나를 환영해 준다.

‘……진짜 귀족 가문은 다르긴 하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저런 사용인들조차 자연스레 기품 있는 인사를 할 정도가 되려면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하는 걸까?

아직 가택조차 없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스으윽.

이내 집사장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방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굉장히 화려하면서도 중후한 분위기를 풍기는 접객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대체 후작가에는 접객실이 몇 개야?’

그러고 보면 항상 올 때마다 접객실이 다르다.

왠지 손님에 따라 사용할 수 있게 접객실도 여러 개를 만들어 둔 것 같은데…….

‘왔던 곳 중에 여기가 제일 좋아보이네.’

슬쩍 봐도 내가 너를 엄청나게 대접하고 있다는 느낌이 물신 피어나는 방.

“왔는가.”

심지어 내가 방에 들어서자 후작이 직접 몸까지 일으키며 맞이해 준다.

참 감회가 새로웠다.

거, 예전에는 이 저택에 찾아오고서도 수정구 너머로 대화를 나눈 적도 있었는데.

“…앉아라, 다리 아플 텐데.”

“하하, 자네가 먼저 앉게. 손님이지 않나.”

“그렇다면야…….”

내가 먼저 자리에 앉고 나서야 후작도 나를 마주보며 착석했고, 이후로는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요즘 온통 그 얘기밖에 없던데, 그래서 범인이 누군지는 알아냈나?”

“아직일세.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단단히 준비를 했다는 게 느껴지더군. 만약 자네가 아니었으면 크게 곤욕을 치렀을 걸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곤욕이라…….

역시 나한테 부활 관련 아이템까지 밝힐 생각은 없다는 건가?

알 수 없지만, 나에 대한 칭찬은 계속 이어졌다.

“누구라도 할 수 있었다라… 글쎄, 그날 그 많은 귀족들이 있고 그 많은 기사들이 있었지만, 일이 터졌을 때 나를 위해 몸을 날린 건 자네뿐이었네.”

“그냥 후작 너의 운이 좋았을 뿐이다.”

“신문을 통해 랭글스턴 백작과 나눴던 대화에 대해서도 들었네. 구할 수 있으니까 구했을 뿐이라 답했다지? 그게 사실인가?”

“뭐… 사실이긴 한데…….”

이렇게 대놓고 얼굴에 금칠을 해주는 건 취향이 아니라, 빠르게 주제를 돌렸다.

“근데 그래서 오늘은 왜 부른 거냐?”

“일단 이번 사건에 대한 경과를 자네에게도 들려주는 게 도리라 생각했네. 아, 7구역 재건 공사를 얀델 남작가 맡게 되었음도 알려줄 생각이었고. 아마 곧 연락이 갈 걸세.”

오, 그렇게 됐다니 한시름 덜었—.

“하지만 이건 본론이 아니니 빠르게 넘아가도록 하겠네.”

“…응?”

이게 본론이 아니라면, 대체 뭐가 본론이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하던 때.

“자네의 성격을 아는 만큼, 내 솔직하게 말하지.”

후작이 방금까지 얼굴에 얹고 있던 부드러운 미소를 싹 지워내며 차가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

“나는 자네가 악령이라고 생각하네.”


24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55화 24

655화 이벤트 (4)

악령이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확정하는 듯한 말.

이에 뭐라 항변하려 했으나 후작은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물론 자네가 여기서 인정하는 듯한 발언은 할 수 없겠지. 함정인가도 싶을 테고. 그러니까 그냥 일단 내 말이 끝날 때까지 듣게.”

“…….”

“자네가 무슨 말을 하든, 나는 자네가 악령이라고 생각하네.”

“…….”

“그래서 자네가 귀족이 되었을 때에도 아무도 알 수 없게 뒤처리를 했네. 자네 같은 영웅이 악령이라는 게 알려지면 시민들의 인식에 부조화가 올 테니까.”

지난날, 아멜리아와도 얘기를 했던 주제였다.

어째서 나는 ‘검증’ 없이 귀족이 될 수 있었는가.

[왕가에서 알면서도 묵인해 줬을 수도 있겠군. 그때 너는 도시에서 영웅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정말 이게 이유였던 거구나.

“악령은 언제까지나 모든 주민들의 주적이어야 하며, 실제로도 그러하네. 우리들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가는 그들은 미궁의 어느 마물보다 두려운 존재이지.”

그리 말하는 후작의 목소리에는 보이지 않는 깊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

“자네가 미궁에서 죽었다고 알려졌을 때, 속으로는 기뻤네. 악령인 게 밝혀지지 않은 채 사라지는 게 이 나라를 이끌어야 하는 나로선 최고의 상황이었으니.”

여기부터는 나도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후작이 말한 최고의 상황은 머지않아 틀어졌다.

“하지만 한 녀석이 방해를 해오더군. 자네도 알고 있는 자일 걸세. 이백호라는 이름을 지닌 뻔뻔한 녀석이지.”

후작은 이백호에게 협박을 당해 비요른 얀델이 ‘악령’임을 공표해야 했고, 그 후에는 악령편입정책을 도마 위에 올려야 했다.

뭐, 워낙 큰 정책인 만큼 아직 실행되진 않았지만.

“그자는 내 가장 아픈 상처를 헤집었네.”

“…아픈 상처?”

“내 아들… 엘토라 테르세리온은 이미 죽었네. 지금 내 아들놈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건 이름도 모를 어느 악령이지.”

“……!”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처음 듣는 이야기여서가 아니라, 설마 이 얘기까지 솔직하게 고백할 줄은 몰라서.

“그 반응을 보니 정말 몰랐던 모양이군.”

“어… 예상도 못 했다.”

“아무튼, 그자는 내 아들의 정체를 갖고서 협박을 했네. 당장 아들을 처리할 수 없으니, 나로서는 그 협박에 응할 수밖에 없었지.”

그래서 후작은 지금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알 수 없기에 나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야 다 내가 알고 있던 얘기는 아니었거든.

“악령편입정책은 절대 이뤄져선 안 되네. 설령 악령이 된 것이 그들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여도, 만약 우리가 그들을 받아들인다면……. 몸을 빼앗긴 이들의 한은 그 누가 풀어줄 수 있겠는가?”

오늘의 대화에서, 처음으로 후작의 내면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네가 사라졌다 돌아왔을 때, 바로 변명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던 것도 그래서였네. 참 역설적이게도, 그자의 계획을 막기 위해서는 자네가 악령이어서는 안 됐으니까.”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군.”

“그렇네. 물밑에서 가짜 정보를 만들고 기록하며 있지도 않은 자네의 잠입 임무가 실제로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지. 그 누가 봐도 가짜란 걸 눈치챌 수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네.”

이제야 의문이 풀린다.

어쩐지 막 급조해 낸 설정이라기엔 케알루너스 공작쯤 되는 거물들도 의심 없이 믿는 듯하더라니.

설마 내가 없는 기간 내내 철저하게 준비된 계획이었을 줄이야.

“물론 원래는 때가 되면 해당 임무 중 사망했다고 알릴 셈이었으나……. 자네가 살아 돌아오며 이 계획도 무산됐지.”

이제야 후작의 의도가 전부 이해되는 한편으로 양주먹이 꽉 쥐어쥔다.

“그것 때문에… 우리를 아이스록에 보냈던 거냐?”

후작은 정말이지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이 쉽게 긍정했다.

“이제 와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들 이유는 없겠지. 그렇네. 그래서 보냈네. 그때 자네가 이름을 되찾기 전에 죽어 사라지면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생각했으니까.”

어떻게 사람이 이리도 뻔뻔할 수 있을까.

앞에서 나눈 진솔한 얘기고 뭐고, 맘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얼굴에 주먹을 욱여넣고 싶은 기분이다.

하지만…….

‘참기로 했으니까.’

그날, 차가운 얼음장 위에서 맹세했지 않나.

분노를 터트리는 건 지금이 아니다.

그래, 그러니까.

“그래서… 이제 말해봐라.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대체 뭐냐?”

최대한 평정심을 지키며 후작에게 묻는다.

일국의 이인자가 병신인 것도 아니고, 한 번 구해줬다고 해서 감정적이게 변할 리 없지 않은가.

물론 구해 준 게 아무런 영향도 없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데는 분명 합당한 이유가 있을—.

“혼란스럽기 때문일세.”

…응?

“자네가 나를 구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 자네는 오히려 내가 죽으면 죽기를 바랐지, 내게 잘 보이려는 부류의 인물도 아니지 않은가?”

음,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자네가 왜 나를 구하려 몸을 던졌을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네. 한데 생각해 보니 딱히 나만이 아니었더군.”

후작이 나를 보며 말을 잇는다.

“자네는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구해냈네. 다만 그 사람들을 구해내야 할 이유 같은 건 자네에게 없었지. 덕분에 결론을 내릴 수 있었네. 아니, 마침내 인정할 수 있었네.”

“뭐였지……?”

“자네가 비록 악령일지라도, 영웅의 성질을 지닌 사람이라는 걸.”

영웅이라…….

사실 저리 말해봤자 딱히 실감은 안 난다.

나는 단지 살아남으려 발버둥쳤을 뿐이니까.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악령이든 아니든 자네는 이 세상에 이로운 영향을 끼칠 사람일세.”

아무튼, 그런 내 감상이야 어쨌든.

직감적으로 이 뒤에 나올 말이 본론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자네에게 제안하겠네.”

이내 후작이 빛나는 눈으로 내게 말한다.

“우리의 편에 서게. 그리고 진정으로 이 세계의 주민이 되어 균형과 평화를 유지하는 데 자네의 힘을 써주게.”

빌드업을 착실히 쌓아두고서, 저렇게 힘차고 열정적인 목소리로 말해서 그럴까?

후작의 말에는 사람을 이끄는 듯한 힘이 있었다.

다만, 나는 알고 있다.

이런 힘을 가진 사람일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걸.

‘아오, 나도 모르게 넘어갈 뻔했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제안’을 들었을 때 그 제안의 좋은 점만 생각하며 희망 회로를 돌리는 부류와, 그 반대인 부류.

나는 언제나 후자이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힘을 써달라니, 이상한 말이군. 나는 지금도 충분히 그러고 있는데.”

애매모호한 답을 늘어놓으며 후작에게 패를 더 오픈하기를 요구한다.

“악령이니 뭐니 이해할 수 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원하는 게 있으면 속 시원하게 말하는 게 어떠냐?”

내 요구에 후작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태연하게 말을 이을 뿐.

“허허, 당연히 바라는 게 없는 건 아닐세.”

“그럼 말해봐라.”

“설령 자네가 지금 내 손을 잡는다 해도 자네를 믿을 수 있는 증거가 없지 않은가? 증거가 필요하네.”

거, 언제는 착한 악령이라 결론을 내렸다더니.

아주 그냥 손을 위아래로 뒤집는 게 자유자재인 양반이 아닐 수 없—.

“이백호.”

순간 공기가 차갑게 굳는다.

“이 세상의 균형을 어지럽힐 생각뿐인 그자를 죽여 주게.”

그래, 이게 진짜 목적이었구나.

“그럼 나도 자네를 온전하게 신뢰할 수 있을 것 같네.”

역시 아니나 다를까.

이 양반이 한 번 구해줬다고 저럴 리 없지.

***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후작은 나를 설득하듯 말을 덧붙였다.

“마음이 불편하다면 그냥 거래라고 생각하게. 자네가 이백호를 처리해준다면, 자네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든든한 후견인이 되어주겠네.”

뭐, 정말 말처럼 된다면 든든하긴 할 거다.

도시 한복판에서 내 입으로 직접 악령이라고 외치고 다녀도 무마할 힘이 후작에게는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의문이다.

후작이 이백호를 왜 죽이고 싶어하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으니 제쳐두고.

“왜 나한테 그런 일을 시키려는 거냐?”

어째서 후작은 직접 처리하지 않고 나에게 이런 일을 맡기려고 하는가.

“그게 가능한 건 자네뿐이니까.”

되돌아온 후작의 답변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미 수도 없이 시도해봤으나 모두 실패했네. 우리로서는 그자를 만나는 것조차 쉽지 않았네. 하지만… 자네라면 다를 수도 있겠지. 어째선지 그자는 자네에게 관심이 많았으니까.”

“…….”

“물론 이 자리에서 결정할 필요도 없고, 결정을 했다고 해서 내게 말할 필요도 없네. 그저 기억만 하고 있게. 자네가 그자의 목을 베어오는 순간 자네는 그 무엇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걸.”

“…….”

“부디 올바른 선택을 내리게. 자네는 이 세계를 사랑하지 않는가. 다른 악령들과 달리.”

그 말을 끝으로 할 말을 다했다는 듯 후작이 다 식은 차를 홀짝였고, 이로서 대화는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후작은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뿐 결코 먼저 말을 꺼내는 법이 없었고, 그럴수록 내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뭐라 대답을 해야 할까.

아니면 뭐를 따로 더 물어봐야 할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무슨 대답을 한들 후작의 생각은 바뀌지 않을 것이고, 어떤 질문의 답변을 듣던 나는 100% 신뢰할 수 없을 것이다.

지하 1층에서 만난 연구소장과도 그러했듯.

[타인을 통해 진실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믿는 것뿐일세. 따라서 내가 자네에게 길게 말을 이어가 봤자 시간 낭비에 불과하지.]

[그렇기에 거래라고 말한 걸세. 내가 누구인지가 중요한가? 내 제안을 받아들일지 말지, 자네는 그것만 보고 결정을 내리면 되는 걸세.]

언제나 중요한 것은 본인의 판단이다.

‘그래도 그냥 알고만 있으라고 한 정도니까…….’

부가 퀘스트 정도로만 생각해도 될 거 같다.

딱히 깨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는 없는 거잖아?

“네 제안은 생각해보겠다. 아, 물론 나는 악령 같은 게 아니지만.”

오랜 침묵을 깨고 말하자, 후작은 어떠한 미련도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하게. 그래도 보답은 끝났으니 이제 마음은 편해지겠군.”

“……무슨 뜻이냐? 생각만 해본단 뜻이었는데.”

“은원을 확실히 하지 못하면 잠을 잘 자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말일세.”

“아, 7구역 공사 건을 말하는 거—.”

“그걸 말하는 게 아닐세.”

이내 후작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올바른 길을 제시한 것. 이게 바로 자네가 날 구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네.”

“…….”

“자네가 믿을지 않을지는 모르겠네마는 말일세.”

쩝, 진짜 끝까지 사람을 찜찜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니까.

“…이만 가보겠다.”

“식사라도 하는 게 어떻나? 이대로 보내기에는 역시 마음이 불편한데.”

“오늘은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서.”

이 상황에 후작이랑 밥까지 같이 먹으면 머리가 터질 거 같았기에, 도망치듯 저택을 나왔다.

그리고 후작이 대여해준 마차를 타고 군용 승강장으로 이동하며 눈을 꾹 감았다.

여러모로 심력 소모가 큰 날이었다.

드르륵, 드르륵…….

부드럽게 굴러가는 마차의 바퀴 소리.

이를 배경음을 삼아 머리를 비우고 있자니 금방 졸음이 밀려왔—.

“형.”

…응?

뭐지 환청인가?

“그때 후작은 왜 구해줬어요?”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나는 눈을 번쩍 뜨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왜, 후작이랑 친구라도 하려고?”

아우, 깜짝아.

이 새끼가 왜 여기 있어?


21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56화 21

656화 이벤트 (5)

포마드 스타일로 짝 넘긴 백금발.

잡티 하나 없는 피부와 차가운 눈빛.

이것만 보면 귀공자 느낌으로 잘생겼다는 인상을 주지만…….

“읏차!”

저 경박한 몸짓과 말투, 표정들로 하여금 어딘가 엉뚱하고 천연덕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왜요? 무슨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이내 열린 창문 사이를 통해 마차 안으로 들어선 이백호가 내 맞은편 좌석에 앉고서는 뻔뻔하게 말을 던진다.

“오늘따라 많이 놀라시는데?”

그리 말하는 녀석의 입은 헤실헤실 웃고 있었으나, 눈은 그렇지 않았다.

“뒤에서 뭔가 구린 짓을 하다 걸린 사람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뿌려대며 뼈가 담긴 말을 뱉는 이백호.

뭐, 실제로도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솔직히 말해, 이놈을 보자마자 뒷담화라도 하다가 걸린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당황해서 얼 타고 있을 생각은 없지만.

‘…마부한테 목소리는 안 들리는 거 같고.’

여전히 앞만 보고 마차를 이끄는 중인 마부를 쓰윽 확인한 뒤, 나는 일상적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럼 안 놀라냐? 갑자기 나타나서 창문으로 들어오는데.”

“음, 그것 때문만이 아닌 거 같던데…….”

“아니긴 하지. 너는 대체 얼마나 마른 거냐? 밥 좀 잘 먹고 운동도 좀 해라. 어떻게 해야 남자가 저런 좁은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거냐?”

“……제가 마른 게 아니라 형님이 비정상적으로 큰 건데요.”

“거, 말대꾸는.”

어떻게 네가 여기에 있냐.

무엇을 하러 온 거냐.

그런 말을 하기보단 자연스럽게 훈계하듯 대화를 이끌어 나가자 이백호가 무안하다는 표정을 내짓는다.

그리고…….

“…….”

“…….”

불편한 정적이 잠시 이어진다.

사실 우리는 이렇게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눌 사이가 아니다.

그야 마지막이 최악이었으니까.

[……그래서 소생의 돌을 내게 쓰려 했다고?]

[네. 형이 먼저 끊어내질 못하니까. 제가 조금 도와주려 했죠. 어차피 집에 돌아가면 전부 필요없는 인연들이잖아요?]

고스트 버스터즈가 운영을 종료하는 날.

뒤에서 부리고 있던 수작질이 들통난 이백호는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날 선 말들을 내게 토해냈고, 이에 나는 다짐했다.

언젠가 다시 보게 되는 날, 반드시 이 새끼의 소원을 이뤄주겠노라고.

“그래서 떠나고 싶어서 날 찾아온 거냐? 네가 말했던 이 좆같은 세상에서.”

“에이, 형… 그 일로 아직도 삐져 있어요?”

내가 이놈과 얽히기 싫은 가장 큰 이유다.

무슨 소시오패스 같다고 해야 하나?

그런 일이 있었는데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저렇게 말하는 것도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아직은.’

당장 면상에 주먹을 꽂아넣기엔 아직은 이르다.

물론 지금 상태에서도 질 자신은 없지만.

반대로 이길 자신도 없다고 해야 하나?

이 영악한 녀석은 상황이 불리해지면 언제든 뒤로 몸을 뺄 테고, 그때는 내 주변이 위험해질 가능성이 높—.

“그냥요! 그냥 와봤어요. 뭔가 형이 뒤에서 구린 일을 하는 거 같아서!”

능청스럽게 말하는 놈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말이 좀 웃기지 않냐?”

“네? 뭐가요?”

“내가 아니라 너잖아?”

“……?”

“항상 뒤에서 구린 짓을 하던 놈은.”

서로를 마주보는 좁은 마차 안.

은은한 살기를 드러내며 놈을 주시한다.

한데, 이런 태도가 놈 입장에서는 신선했을까?

“…재밌네.”

짧은 그 말을 끝으로 이백호도 입을 꾹 다물고서 나를 응시한다.

누군가 칼만 뽑아 든다면, 그 순간 당장 전투가 시작될 것만 같은 살벌한 공기.

“그래서 후작은 왜 구해줬어요?”

그 공기 속에서 이백호가 차가운 목소리로 묻는다.

아까도 그랬지만, 이 질문으로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었다.

‘후작을 암살하려 한 게 이 새끼였구나.’

다만, 이 새끼가 마법을 쓸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니 필시 그 마법을 쓴 놈은 ‘파멸학자’였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둘이 늘 짝꿍처럼 붙어다녔으니.

‘어쩐지 아파 뒈질 거 같더라니…….’

그래도 한 가지는 위안이 된다.

암, 그 정도 되는 마법사가 흔하게 있을 리 없지.

“뭔 생각을 그렇게 해요? 왜, 말하기 어려운 이유라도 있나?”

“거, 보채기는. 네가 물으면 내가 무조건 대답하고 그래야 하냐?”

“그건 아닌데, 궁금하잖아요. 언제는 나보고 후작을 좀 죽여달라고 하더니, 이제는 죽이려 하니까 몸까지 던져가며 지켜주고 있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죽여달라 할 때는 못한다고 그러더니, 왜 이제 와서 그러고 있는 건데? 어차피 죽여봤자 왕궁에서 살아난다는 놈한테?”

역으로 되묻자 이백호가 침묵한다.

참으로 이기적인 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만 알아두세요.”

“그럼 그냥 나한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알아두면 되겠네.”

본인 패를 까기 전에는 내 패는 절대 까지 않겠단 의지를 담은 답변.

이백호는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후작한테 그 부활 아이템이 없어졌을 가능성이 있어서요. 일단 한 번 확인해보려 했어요. 죽으면 죽는 대로 좋은 거고. 살아나도 살아나는 대로 좋은 게 있기도 하고.”

“살아나면 살아나는 대로 좋다니? 횟수 제한 같은 건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그렇죠. 근데 살아나기까지 시간이 좀 소요되는 거 같더라고요. 그 시간을 잘 이용해보려 했죠. 대리인이 갑자기 사라진 격이니, 잘만 하면 개벽왕이 움직일 수도 있을 테고요.”

“개벽왕……?”

“네. 맨날 아프단 핑계로 공식 석상에는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는 바로 그놈요.”

“개벽왕을 왜 움직이게 하려는 건데?”

“숨기고 있는 게 너무 많아서요. 근데 일단 밖에 나와 움직이게 만들면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흘리고 그러지 않겠어요?”

모든 내용을 100% 말한 건 아니겠지만, 우선 거짓을 말하는 느낌은 아니다.

“자, 그럼 저도 말해줬으니 형도 말해줘요. 후작을 왜 구해준 거예요? 이제 아예 그놈 편에 붙기로 한 거예요?”

흐음,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말하기 싫다고 그럴까?

얘라면 먹튀를 해도 딱히 양심에 가책 같은 건 안 생길 거 같은데…….

‘그래도 이상한 오해를 하게 만드는 건 좋지 않겠지……. 냉정히 생각하면, 얘한테서도 이용할 수 있는 부분은 이용하는 편이 나으니까.’

판단을 끝마친 나는 그날 있었던 상황의 100%를 얘기했다.

놀랍게도 딱 한 줄로도 설명이 됐다.

“실수… 였다고요?”

그날 후작을 구한 건 실수였다.

***

당연한 말이지만, 이백호는 내 말을 쉽게 신용하지 못했다.

“습관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가서 대신 처맞았다고요? 그걸 저보고 믿으란 말이예요?”

“믿든 말든 그건 네 자유다. 하지만… 내가 기습을 미리 알고 있던 상황도 아니고. 생각하고 움직여서는 절대 막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다만 이어진 내 진솔한 말에 설득을 당했을까.

아니면 본인도 뭔가 이상하다 생각했던 부분을 콕 짚어 말해줬기 때문일까.

알 수 없지만, 이백호가 찜찜한 얼굴로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형님 말도 일리가 있기는 한데요…….”

“일리가 있는 게 아니라, 진짜 그랬다. 구하고 나서 내가 얼마나 후회를 했었는데.”

“근데… 그러면 오늘은 뭔데요? 후작 집에는 찾아가서 오래 얘기 나눴잖아요.”

“그거야 걔한테 감사인사도 듣고 했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냐. 아, 보상인진 몰라도 그 공사 수주를 나한테 맡긴다는 확답도 듣기는 했다.”

절반뿐이긴 하지만 틀림없는 진실이다.

물론 후작의 본론은 회유 제안이었으며, 그 조건이 무려 ‘이백호 암살’이었지만.

얘도 100% 솔직하게 다 오픈한 건 아니잖아?

“……진짜 그것뿐이에요?”

“그것만큼 의미없는 질문도 없는 건 아냐?”

“그렇죠. 제가 실언을 했네요.”

이내 이백호는 스스로 판단을 하겠다는 듯 잠시간 나를 바라보았다.

“모르겠네요. 진짜 모르겠어. 다른 사람들은 전부 쉬운데, 형은 왜 이렇게 어렵지?”

사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눈앞에서 저렇게 말하고 있는데도 잘 모르겠거든.

내 속내를 모르겠다는 지금 저 말이 연기인지 아닌지조차도.

“……그래서 이왕 만난 김에 말이나 해봐라. 너는 지금 대체 뭔짓을 하고 다니는 건데?”

“갑자기 친근해진 말투네요? 아까는 저를 막 때려 죽일 기세더니.”

“진짜 때려 주길 바라는 거냐?”

“그건 아닌데……. 그냥 형도 저랑 참 비슷한 부류란 생각이 들어서요.”

“그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리냐?”

“그렇잖아요? 감정은 순간의 감정일 뿐, 결국에는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본인 이득을 위해서 행동한다는 거죠.”

“…….”

“아, 보아하니 형은 가끔 감정에 지배당할 때도 있는 거 같긴 하지만요.”

뭔가 분석하는 듯한 말이 굉장히 짜증이 나면서도 마땅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실제로도 지금 당장 이놈을 때려서 내쫓는 것보단 조금 더 대화를 하면서 정보를 캐내고자 하는 마음이 훨씬 강했으니까.

“속셈은 알지만, 그래도 제가 형한테 잘못한 것도 있으니까 몇 가지 답은 해드릴게요. 어차피 정말로 제 근황이 궁금해서 묻는 것도 아닐 테니까. 뭐가 제일 궁금한 건데요?”

그래도 이백호가 이리 나와주니 훨씬 더 상황이 편해졌다.

다만, 다른 게 고민이었다.

질문, 질문, 질문…….

몇 가지라 말한 만큼 정말 중요한 것만 딱딱 물어봐야 할 거 같은데, 대체 뭘 묻지?

짧은 고뇌 끝에 나는 첫 질문을 택했다.

“그래서 아우릴 가비스는 만났냐?”

이 녀석에 대해 내가 아는 가장 마지막 근황은 ‘아우릴 가비스’를 만나기 위해 성벽 밖으로 나갔다는 것이었다.

하면, 과연 이 녀석은 그 목적을 이뤘을까.

“하하, 그 할아버지 말이죠……. 이걸 뭐라고 말을 해야 할—.”

“예, 아니오로만 답해라.”

“예. 만났어요.”

그래, 목적을 이룬 거구나.

왠지 모를 불안이 생기면서도 일단 추가 질문을 덧붙였다.

“커뮤니티 내가 아니라 실제로?”

“실제로 만났어요. 형도 원탁에서 만났다면서요?”

“그 늙은이가 그리 말하디?”

“뭐… 그런 거로 치죠……? 중요한 건 아니니까.”

음, 이렇게 애매하게 말하는 걸 보면 직접 들은 건 아닌 듯하다.

그럼…….

‘흑가면이 현별이고, 늑대는 아우릴 가비스가 보낸 놈이 거의 확실했으니까…….’

나비 가면이 이백호가 심은 첩자였나?

아직 뭐라 단정 짓기에는 이르지만, 커뮤니티가 지금에 와서는 딱히 중요한 것도 아니니까 이쯤에서 패스.

“성벽 밖에 나간 뒤에 지금까지 뭐하고 지냈던 거냐?”

이번에는 예, 아니로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라 포괄적으로 물었다.

놈은 정말 자기 근황이 궁금한 게 아니지 않냔 식으로 말했지만, 사실 나는 궁금하거든.

이놈의 근황이.

“그냥 이것저것 정신없이 지냈어요. 바깥 세상을 돌아다녀보기도 하고, 노아르크 애들이 지내는 캠프를 찾아 살아보기도 하고. 7층까지 이어진 포탈을 타고 미궁에도 가보고……. 아, 새로운 동료도 생기긴 했네요. 어쩌다 보니.”

대략적으로 답했음에도 느껴진다.

정신 없이 지냈다는 그 말에 숨겨져 있을 긴 이야기들이.

내가 지하 1층을 탐험하고 그러던 동안에, 이놈도 이놈만의 여정을 열심히 이어가고 있던 것이다.

“…새로운 동료?”

“얘는 아직 비밀이라 못 말해드려요. 근데… 이렇게만 말하면 제가 너무 양아치 같은데……. 이 질문은 개수에서 제가 빼드릴게요. 자, 그럼 마지막 질문이니까 잘 해보세요.”

“아깐 몇 가지라면서?”

“네. 몇 가지 맞잖아요?”

음…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긴 하네.

어차피 보너스 같은 느낌의 질문권이었던 만큼, 나는 미련을 버리고서 마지막 질문을 꺼냈다.

“노아르크 놈들은 대체 뭐가 목적이냐?”

이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궁금해할 질문이며, 참고로 이는 왕국의 이인자인 후작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면, 이 질문의 답을 이백호는 과연 알고 있을까.

그 답은 머지않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살아남는 거요.”

“……뭐라고?”

“사람 사는 목적이 다 똑같지 않겠어요? 다들 잘, 오래 살아보겠다고 그리들 열심히 사는 거지.”

장난스러운 말투로 한 답변이었으나, 나는 그 안에 숨겨진 진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소문과 달리, 성벽 밖에서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거군.”

“네. 쉽게 설명하자면 그런 거예요.”

성벽 바깥은 대체 어떤 곳일까.

이에 대해서도 좀 더 묻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질문 횟수는 이제 남아있지 않았다.

“음… 마지막 질문치고는 제가 너무 간략하게만 대답해 준 거 같아서 서비스 좀 드릴게요.”

…서비스?

이내 고개를 갸웃하자 이백호가 씨익 웃는다.

“앞으로 1년 동안 노아르크 쪽에서 뭔가 일을 벌일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 안심하셔도 좋아요.”

참 아이러니하게도 안심하란 말을 듣자마자 심히 불안해졌다.

그야 우리 같은 사람은 항상 말의 이면을 보니까.

‘1년 동안이라…….’

그 기간이 지나면 뭔가 큰 게 온다는 뜻이다.


18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57화 18

657화 아웃사이더 (1)

지난 시간 여행에서 톡톡히 느꼈다.

바꿀 수 없는 미래를 알고 있는 것은 저주에 가깝다.

하지만…….

“그… 1년 뒤에는 뭔가 생긴다는 뜻이냐?”

“네. 생길 거예요. 아주 재밌고 큰 이벤트가.”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부분은 있다.

이백호의 말이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1년 동안은 무탈하게 지낼 수 있다는 뜻 아닌가.

“어떤 이벤트인지는 말해줄 생각이 없는 거고?”

“형, 미리 알고 있으면 이벤트가 아니잖아요.”

“그럼 이거만이라도 말해줘라. 그 이벤트가 생기면 7구역이 또 박살나는 거냐……?”

“음, 그럴 일은 없을 걸요……? 말씀드린 이벤트가 그런 종류가 아니라서…….”

듣던 중 다행인 소식이었다.

이후 부동산 사업을 크게 할 예정인 나에게 몹시나 중요한 항목이었으니까.

‘근데… 그런 종류가 아니라면 대체 뭘 말하는 거지?’

혼자 조용히 머리를 굴려보고 있자니, 이백호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짓는다.

“아, 힌트를 너무 많이 줬나?”

힌트를 많이 주기는 개뿔.

아예 감도 안 오는구만.

“아무튼, 이제 할 얘기도 다 했겠다, 아시죠……?”

아냐니?

“…뭘?”

이내 고개를 갸웃한 순간, 이백호가 눈 앞에서 사라졌다.

“뿅.”

하… 진짜 빨리 더 강해지든가 해야지.

***

후작가에 다녀오고서 며칠 뒤, 본격적으로 7구역 재건 공사가 시작되었다.

우리 부족의 자랑스러운 노동 전사.

비프론 출신의 성인 남성.

그리고 골드비어드 백작가를 필두로 멜베스에 속한 다양한 가문들이 보낸 건축 계열 전문가들까지.

모두가 합심해서 철거 작업을 시작했고, 철거가 끝난 곳부터 바로 바로 건축을 진행했다.

수만 명의 인력이 들어간 만큼 공사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는데, 속도만 보자면 현대의 건설 현장보다도 나은 거 같았다.

그도 그럴 게.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중장비는 없지만 마법이 존재한다.

또한 설계부터 복잡한 고층 빌딩을 짓는 것도 아니며, 무엇보다 노동자의 스펙부터가 차원이 다르다.

“잠깐! 그렇게 들면 허리가 나갈 위험이—!”

“응?”

“……봐도봐도 놀랍군. 무겁지도 않나?”

“이 정도는 운동도 안 된다!”

장비를 동원해야 할 과정들을 맨몸으로 뚝딱뚝딱 해버리니 건설 속도에 있어 현대에 밀릴 이유가 딱히 없는 것인데…….

“테일란 남작가에서 값을 조금만 더 쳐준다면 7-2 상업지구 전부를 매각하겠다고 하더군.”

“상업 지구를 통째로 넘긴다고? 당장 매입해라.”

건설 작업을 해나감과 동시에 회주 할아버지가 중개해 준 귀족들에게 7구역 땅을 저렴하게 매입해 나갔다.

그리고…….

“7-2 상업지구? 거기는 한참 나중에나 작업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예정이 변경됐소. 얀델 남작님의 지시요.”

당연한 말이지만, 매입이 끝난 땅은 철거 및 재건 작업이 즉시 착수됐다.

그야 얼른 집을 만들어야 전세로 들어올 세입자를 구하고, 그 돈으로 또 땅을 살 것 아닌가.

“여기가 2년 동안 내가 머무를 집……!”

“좁긴 하지만 있을 건 다 있소이다!”

“비프론이 옆에 있는 건 불안하지만, 선택지가 없구려. 다른 구역들은 집값이 너무 올랐으니…….”

내심 갖고 있던 불안과 다르게 전세 세입자를 구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원룸으로 쪼개서 수십 명이 건물 하나에 사는 형태였으니까.

아무래도 부담이 적을 수밖에 없는 것인데…….

심지어 은행에서 낮은 금리로 대출 승인이 나고, 기존 7구역 주민들은 왕가에서 주거용 자금이 지급된 것도 사업에 있어 호재였다.

“이 정도 인구 밀집이면 가게를 차려도 망하지는 않겠다는 게 내 판단이올시다.”

또한 주민들이 입주할수록 장사꾼들도 관심을 갖게 되는 선순환이 이루어졌고, 그에 따라 사업도 순탄하게 확장됐다.

물론 그 과정에서 문제가 아예 없던 건 아니지만.

“크흠… 미안하지만, 이전에 팔겠다고 한 말은 잊어주시오.”

7구역이 빠르게 정상화 되고 있다 보니, 땅을 매각하려던 귀족들이 의사를 철회하는 일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저기 남작……?”

“아, 정말 바쁜데 왜 자꾸 찾아오는 거냐?”

“어째서 우리 가문의 땅만 공사가 이뤄지지 않는지 그 이유를 들어보려—.”

“재촉하지 마라. 다들 열심히 일하고 있는 거 안 보이나?”

“…그 문제가 아니지 않소이까! 주변에는 이미 다 건물이 들어섰는데, 왜 우리 땅만 허허벌판이냐 묻는 것이오! 설계 도면도 진작에 만들어서 넘겼고, 이제 바로 짓기만 하면 되는—!”

“아, 그러니까 기다리라고 하지 않냐, 누가 안 해준다 했나? 다 때가 되면 할 거다.”

“…….”

참고로 각 가문들은 다른 인부를 고용해 건물을 짓는다는 선택지가 원천 봉쇄되어 있다.

7구역 재건 공사는 무조건 우리 얀델 남작가를 통해 진행되어야 하거든.

“좋소. 매각하리다…….”

그런 내 노골적인 수작질을 버티지 못하고 백기를 꺼내드는 가문들도 많았지만, 끝까지 버티려는 가문이 더 많았던 것도 틀림 없는 사실.

‘얘네들은 제일 마지막에 공사를 시작하면 될 테고…….’

그렇게 한 달, 두 달, 세 달…….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가고, 사업도 궤도에 오르며 내가 신경 써야 하는 부분도 많이 적어졌다.

따라서 그때부턴 사업보다 다른 부분에 집중했다.

그야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본말전도가 되어서야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은가.

“드디어 한 식구가 되었군. 환영한다.”

“후…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줄은 몰랐소만.”

톱니 이빨 클랜의 부단장 제임스 칼라.

성기사 스벤 파라브.

귀족 장교 멜란드 카이슬란.

마도병단 출신 리리스 마로네.

각자 속해 있던 집단에서 빠져나와 이제는 완전히 일반인으로 돌아온 전 아이스록 원정대원들을 드디어 정식으로 영입했다.

“아쿠라바 씨는 합류하지 않는 겁니까?”

“아직 모르겠다. 만나고 싶다고 연락은 했지만, 회신이 돌아오질 않더군.”

“라비옌 님과 비슷한 경우인 듯하군요.”

“…쉬운 결정은 아니지. 그날 이후 시간이 많이 흐르기도 하였고.”

“그래도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저는 아직도 그 일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자는데……!”

“지, 진정하십시오, 마로네 양……. 그, 그분들도 다 사정이 있지 않겠습니까?”

글쎄, 사정이라기보다는 성향 차이라고 본다.

리리스 마로네 같은 인물이 있는 한편, 잊고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인물도 있으니까.

현실적으로 그게 훨씬 편하기도 하고.

“저… 근데 일단 입단하래서 하기는 했는데… 우리가 할 게 있습니까?”

“사실 나도 그게 의문이기는 했소이다. 미궁이 폐쇄된 지금 모여서 뭘 할 수 있을는지…….”

“혹시… 머지않아 미궁이 다시 열리는 겁니까?”

신규 단원들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미궁이 열린단 소식은 나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소식이 있었지.”

“소식이라 하심은…….”

“13월에 열리는 축제에서 큰 대회가 있을 거다.”

이는 나름 귀족 인맥을 동원해 미리 알 수 있던 고급 정보로 아직까진 아는 사람들이 많이 없다.

“대회라면 무슨 대회를 말씀하시는 건지 말씀입니까……?”

“자세한 내용은 변경될 수 있지만, 일단은 각 클랜들을 모아두고서 대결을 하게 할 거라더군. 우리의 일차적인 목표는 그 대회에서 우승하는 거다.”

“…아! 예전에 그런 대회가 몇 번 열린 적이 있다고 듣긴 했어요!”

“한데 하필 이런 시기에 그런 대회를 여는 건 저는 이해할 수가 없군요.”

“오히려 그런 시기니까 여는 것일세. 왕가는 늘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싶어하니까.”

“저… 그런데 일차적인 목표라면… 다른 목표도 있다는 건지요……?”

대회보다 이쪽에 더 관심을 보이는 스벤 파라브를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당연히 있다. 아직은 비밀이지만.”

“……예?”

“그런 표정 짓지 마라. 그냥 생각을 하는 단계라서 그런 거니까. 나중에 좀 더 구체화가 되면 그때 다시 말해주겠다.”

두 번째 목표에 대해서는 존재 정도는 언급했으니 이만하면 됐고…….

“따라와라!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

이후로는 신규 단원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 환영식을 시작했다.

기존 단원들과 신규 단원들이 섞여 앉아 술과 음식을 먹으며 자연스레 친분을 쌓는 자리.

“칼스타인 님은 얼굴이 많이 좋아지셨군요.”

“아,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

“확실히 좋아지셨소. 지하 1층에서는 어딘가 좀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였는데.”

“아하하……. 그, 그랬나요?”

지하 1층에서 같이 지낸 고블린이나 카이슬란의 경우엔 이미 모두 안면을 튼 상태지만, 오늘이 초면인 관계도 있었다.

“제임스 칼라! 만나서 반갑다!!”

“아… 반갑소이다. 얘기는 많이 들었소.”

“활을 쏜다면서? 한번 나한테 쏴 봐라!”

“지, 지금 말이오……?”

“원래 싸우면서 친해지는 거다!”

지하 1층 원정에 참가하지 않았던 제임스 칼라, 리리스 마로네는 아이나르와 미샤, 그리고 아우옌을 보는 게 오늘이 처음일 터.

“마로네, 인사해라. 여긴 미샤 칼스타인이다. 이쪽은 우리 항해사 아우옌 록로브라고 하고.”

“아, 네… 두 분 다 반가워요.”

과하게 나서지는 않고 서로 소개 정도만 해주고 자리를 비켜주자, 이 자리의 의도를 아는 세 사람은 알아서 도란도란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 물론 아이나르의 눈에 그 모습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 셋이서 뭔 대화를 그리 나누고 있는 거냐!! 우리도 껴줘라!”

“……네?”

“아, 맞다! 너희도 구경해 볼 테냐? 얘가 나한테 화살을 쏘기로 했는데.”

“……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소이다만?”

다들 아이나르로 인해 기가 빨리는 듯했으나, 나는 개입하지 않았다.

그도 그렇잖아?

원래 이런 자리에서는 극 외향인이 한 명쯤은 있어야 훨씬 더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는 법이니까.

“얀델, 잠깐 이리 와봐라.”

멀찍이 떨어져 아이나르가 있는 자리를 구경하고 있자니, 아멜리아가 인기척 없이 다가와 나를 으슥한 구석 자리로 이끌었다.

“무슨 일이냐?”

“네가 부탁했던 것에 대해 말할 게 있어서.”

나는 곧바로 목소리를 낮췄다.

“아, 혹시 알아낸 거냐……?”

“진위 여부는 확인해봐야 알겠지만, 일단 소득은 있었다.”

솔직히 말해 조금 놀랐다.

부탁하기는 했지만, 설마 이렇게 빨리 결과물을 갖고 돌아올 줄은 몰랐건만.

“아예 틀린 정보여도 괜찮으니 얼른 말해봐라.”

내 재촉에 아멜리아는 지금까지 알아낸 정보를 말했고, 이를 들은 나는 말없이 경청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그런데…….”

이내 설명을 끝마친 아멜리아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게 물었다.

“정말 하려는 건가……?”

부탁을 받아서 방법을 찾기는 했지만, 막상 내키지는 않는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지 않나.”

노아르크 놈들은 숨기는 게 많고.

왕가는 그보다 더하다.

이백호나 광대도 이렇다 할 정보는 꼭꼭 숨겨서 제대로 된 정보가 없다.

한데 그 와중에.

[그… 1년 뒤에는 뭔가 생긴다는 뜻이냐?]

[네. 생길 거예요. 아주 재밌고 큰 이벤트가.]

수면 아래서 무언가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내 성격상 그 꼴을 가만히 좌시하고만 있는 건 불가능하다.

탐험가에게 어울리는 선택지도 아닐 테고.

“에밀리, 너무 걱정하지 마라.”

“…….”

“결국 때가 됐을 뿐이니까.”

이제 성벽 바깥도 탐험해 볼 때가 됐다.


22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58화 22

658화 아웃사이더 (2)

수천 년이 넘도록, 마녀의 저주로 인해 그 어떠한 생명체도 살 수 없다고 알려져 있던 성벽 바깥.

그 너머에 대해서는 나도 아는 게 별로 없다.

왕가의 군대가 노아르크를 섬멸하고자 지하로 내려간 날.

돌연 나타난 의문의 마법사가 노아르크 세력을 구원하며 성벽 바깥으로 탈출시켰다.

그리고 바로 그날이…….

‘개벽 154년, 6월 2일.’

노아르크 세력에도 섞여 있던 플레이어들이 커뮤니티 내에서 처음으로 그 소식을 알렸고, 이는 금방 도시에까지 퍼져 나갔다.

다만, 여기서 의아한 점이 두 가지 존재한다.

1, 소문이라도 나길 바라는 것처럼 너무나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2, 한데 그런 와중에 알맹이가 있는 정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조직적인 정보 통제가 이뤄지지 않았는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 정황들.

또한, 입이 가벼운 광대조차 원탁에서 성벽 바깥에 대한 정보는 거의 풀지 않았다.

음, 그나마 하나를 꼽는다면 이 정도려나?

[도시 바깥으로 나와 여기저기 가보니 알겠더군요. 지형이나 구조, 거기에 약간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이 땅이 7층 암흑대륙과 쏙 빼닮았다는걸!]

광대의 말에 따르면 최후의 성채 라프도니아가 자리한 이 대륙은 7층 암흑대륙과 지형이 흡사하다는 뜻인데…….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 가설이 사실일지도 모르겠구려.]

[미궁이 다른 차원과 이어진 통로가 아니라, 누군가 만들어 낸 차원이라는 가설 말인가?]

[수정동굴도, 바위사막도… 어쩌면 실존했던 공간을 본떠서 만들어진 곳일지 모르오.]

이 얘기를 들은 원탁의 회원들은 제각각 의견을 말했고, 그 추측들은 일부 사실이었다.

그야 탐험을 통해 직접 밝혀냈으니까.

‘미궁 내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장소는 실존했던 장소를 본따 만들어졌다.’

모험에 가까운 탐험을 하며 수많은 심증과 물증을 직접 보았고, 이 전제만큼은 나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이상하단 말이지.’

고대 대륙 지도는 모두 소실되어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기록 자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중부식 작명을 고집하는 중인 몇 안 되는 가문 중 하나라서.]

[낯설게 느끼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저희처럼 동대륙의 피가 아직까지 이렇게 진하게 남아 있는 가문은 이제 이 도시에 얼마 없으니까요.]

[…남중부식 작명입니다.]

라프도니아 주민들 중에는 아직까지도 선조나 가문의 역사에 대해 기억하고 정체성을 지키려는 자들이 존재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바바리안만 해도 그렇다.

기록에 따르면 바바리안족은 대륙 북방과 남방의 험지에서 마물과 싸우며 살아가던 종족이었다.

다만, 문제는…….

‘북방에서 라프도니아까지 오는 데 2년이 넘게 걸렸다고 했지.’

기록에서 전해지는 거리다.

한데 미궁 내 암흑대륙의 경우에는 끝에서 끝까지 가는 데도 한두 달이면 충분하다.

그럼 이 괴리는 어디에서 발생한 걸까?

‘뭐, 사실 이 정도야 양반이지만.’

지하 1층에서 뱀파이어 아저씨는 내게 말했다.

[그 시대에는 인간밖에 없었다고……?]

고대 시절에 이종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이 진실이라면, 이 세계의 모든 역사와 기록은 조작된 것이란 뜻이 된다.

대체 뭐가 진실인 걸까.

이 세계에는 그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걸까.

지금까지야 나는 내 할 일만 하면 된다 싶어서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알아내려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노아르크 놈들이 죽기살기로 쳐들어와 성벽 안의 구역 하나를 점거까지 한 상황이지 않은가.

이를 대하는 왕가의 반응도 어딘가 석연찮고.

‘…이젠 알아야 돼.’

그들이 알고 있는 정보를 나도 알고 있어야지만, 앞으로 미래를 대비할 수 있다.

원래 게임을 할 때도 그렇잖아?

모르면 그냥 억울하게 맞는 수밖에 없는 것인데…….

“…얀델?”

“아, 미안하다. 생각을 좀 하느라.”

이쯤에서 상념을 끝내고서 다시금 사람들이 있는 자리로 향했다.

“으하하하! 봤나! 내 창이 화살보다 강하다!!”

“…다, 다칠까 봐 적당히 땡겨서 그렇소이다!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합시다!”

“어? 아저씨 어디 갔다가 오셨어요?”

그래, 오늘은 일단 쉬자.

***

밤 늦게까지 이어진 환영식이 끝난 다음 날.

해가 저물 무렵에나 깨어난 나는 세 명의 가이드를 이끌고 하수도로 향했다.

아, 참고로 가이드는 아멜리아와 에르웬, 그리고 베르실이었는데…….

“와… 하수도는 진짜 오랜만이네요. 근데 아저씨, 여기는 어떤 일 때문에 온 거예요?”

“찾아볼 게 있어서 왔다.”

“아하! 그래서 저희 셋을 부르신 거구나!”

아멜리아와 에르웬은 아나바다 멤버 중 수색에 가장 특화된 능력자이고, 베르실의 경우에는 하나뿐인 마법사다.

“저… 뭘 찾으시는 건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그걸 알아야 저도 주도적으로 도와드릴 수 있을 거 같아서.”

이내 베르실의 질문에 나는 이곳을 찾은 이유를 솔직하게 터놓았다.

“우리는 오늘 이곳에서 성벽 바깥과 이어진 길을 찾을 거다.”

“성벽… 바깥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취하자 짐짓 당황했던 베르실도 평정을 찾고서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성벽 바깥으로 나갈 계획을 갖고 계신 건가요?”

“그래. 한 번쯤은 직접 나가봐야 뭐가 진짜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을 거 같아서.”

“아…….”

“당장은 너희들만 알고 있어라. 알겠나?”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닐 인물은 아닌지라, 짧게 주의 정도만 준 뒤 계속해서 이동해나갔다.

그야 바깥 세상과 이어진 숨겨진 길이 부랑자들이 숨어사는 하수도에 떡하니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일단 하수도에서 더 내려가 (구)노아르크가 있던 지하 요새까지는 가야—.

툭.

그때 앞장 서서 걷던 아멜리아가 조용히 하라는 수신호를 하며 발을 멈춘다.

에르웬도 날 보며 작게 끄덕이는 걸 보니 동시에 뭔가 같은 걸 느낀 듯한데…….

‘천천히.’

‘뒤로 물러서서.’

‘이리로.’

이내 아멜리아의 수신호를 따라 샛길에 들어가 몸을 숨기자, 머지않아 둔감한 내 귀에도 인기척이 느껴졌다.

철퍽, 철퍽—

최소 두 명 이상의 누군가가 하수도를 배회하는 중이었고, 다가오는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부랑자인가?’

처음엔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으나, 만약 정말로 그랬다면 아멜리아가 몸을 숨기려 들지 않았을 터.

잠자코 숨 죽인 채 기다리자 마침내 그들이 우리가 숨은 곳을 지나쳐갔다.

‘……기사?’

심지어 보통 기사도 아니다.

특정 가문 소속이 아니라, 왕가의 문양을 가슴에 새긴 풀무장 상태의 2인조 기사다.

“에밀리, 뭐냐? 왜 저런 놈들이 이 시간에 하수도를 돌아다니는 거지?”

“아, 몰랐나? 몇 달 전에 그 일이 있은 후로 경계가 심해져 기사들이 주기적으로 하수도를 순찰 중이다.”

“그러고 보니 저도 신문에서 본 거 같아요. 덕분에 하수도에 살던 부랑자들의 씨가 말랐다고…….”

음, 요즘에 내가 신문을 너무 안 읽었나?

아무튼, 갑자기 기사가 순찰을 돌고 있어서 엄청 놀랐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혹시 우리가 여기 올 줄 알고 배치라도 해둔 줄 알았다.

“그럼 계속해서 이동하지. 하수도에 배치된 순찰 인력도 적은 편인 데다가, 그리 꼼꼼히 수색하는 것도 아닌 듯하니 어지간하면 도중에 들킬 일은 없을 거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순찰 중인 기사를 봤음에도 딱히 긴장이 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멜리아의 잠입 능력을 믿는 것도 믿는 거지만.

이제는 그 옛날과 다르다고 해야 하나?

뭔가 일이 잘못 되어도 기사 두 명 정도는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기사였던 것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사실상 잘못되기 싫으면 우리가 조심하는 게 아니라, 쟤네가 더 조심해야 하는 것인데…….

“오늘도 역시나 장치가 있군. 잠시만 기다려라.”

노아르크로 향하는 길목에 도착하자, 아멜리아가 입구 앞에 쪼그려 앉아 뭔가 손으로 만진다.

그리고…….

“이제 들어가도 좋다. 흔적이 남지 않도록 조심히 해체했으니.”

아, 장치라더니 그런 게 있었나 보다.

영화에서도 보면 뭐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문틈에 작은 종이 같은 걸 껴둬서 누가 들어왔는지 확인하고 그런 거.

터벅, 터벅.

이내 계단을 타고 쭉 내려가자 하수도와 다르게 용도를 알 수 없는 지하 공간이 나타난다.

천장의 높낮이도, 벽의 구조도 제각각이라서 마치 입체 미로에라도 들어온 듯한 공간.

‘그러고 보면 여기였지……. 그 카루이 사제랑 싸웠던 곳.’

이름이… 엘리사였던가?

오크 히어로 정수를 막 먹었을 무렵인, 너무 옛날 일이라서 잘 기억이 안 난다.

아무튼.

나름 강적이었지만, 나뿐만 아니라 팀 반푼이의 전반적인 스펙이 확 올라가며 잡을 수 있었는데…….

‘그때 같이 있던 사람이 아무도 없네.’

미샤라도 데려올 걸 그랬나?

그럼 그 얘기를 하면서 수다를 떨 수도 있었을—.

‘아, 생각해 보니 아멜리아도 있었구나.’

물론 그때는 동료인 관계는 아니었고, 오히려 적에 가까웠다.

뭐, 그래도 얘가 나름 착해서(?) 우리 모두 싸움에 지고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말이다.

“테르시아, 너는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지나?”

“아뇨.”

“그렇다면 다행이군. 나도 마찬가지다. 아무래도 여기부터는 순찰을 돌지 않는 듯하니 속도를 올리지.”

이후 본격적으로 이동 속도를 올리자 금방 미로 구간이 끝났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기가 바로 노아르크……!”

지하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드넓은 공동.

왕궁의 성문보다도 훨씬 더 거대한 석문을 보며 베르실이 감탄사를 내뱉는다.

“고울랜드 씨는 여기 오는 게 처음이에요?”

“이렇게 깊숙이 오는 건 처음이에요. 1차 토벌 때 참가하긴 했는데, 알다시피 그때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하고 물러서야 했으니까요.”

“아… 들었어요. 그때 엄청 많이 죽었다고…….”

둘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불현듯 커뮤니티에서 만난 캐나다 출신 플레이어가 떠오른다.

전투 중 목에 칼을 맞은 순간 커뮤니티에 끌려 들어왔던 녀석이었다.

‘돌아가면……. 소식 전해주기로 했었는데.’

참 웃기게도, 한동안 잊고 살았음에도 녀석이 알려준 주소와 남긴 말들만큼은 지금도 확실하게 기억난다.

워낙 인상 깊었어서 그런가?

“뭐 하나? 오지 않고?”

“아, 가겠다…….”

옛 기억에 잠겨 있기도 잠시, 이내 아멜리아가 거대한 문 옆에 티 나지 않게 자리한 쪽문을 열자 초행인 베르실이 고개를 갸웃한다.

“에? 저 문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문지기가 없으니 상관은 없겠다마는. 굳이 편한 길을 냅두고 그럴 이유가 있나?”

“…그건 그렇죠. 근데 문지기도 있어요 원래는?”

“있었다. 라프도니아까지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노아르크 내에서는 손에 꼽히는 강자 중 하나였—.”

그리 말하며 아멜리아가 먼저 쪽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으하하하하핫!! 본인을 그리 평해주시니 참으로 감사하구려!!”

느닷없이 뒤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온다.

“……!”

에르웬도, 아멜리아도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는지 화들짝 놀라며 등을 돌렸고, 이는 나도 매한가지.

“이런 곳에서 다른 객과, 그것도 이렇게 유명한 사람들과 마주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소이만!”

뒤돌아서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자, 바바리안만큼이나 다부진 체형을 지닌 사내가 보인다.

딱 봐도 은밀함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보이는 인상.

하나 그가 인기척 없이 이렇게 근처까지 접근할 수 있던 이유는 몹시 간단했다.

그야 [던전 앤 스톤]은 팀 게임이니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인사나 합시나! 노아르크의 전 문지기, 렉 아우레스라 하오!”

탱커 포지션이라 할 수 있는 최전방에 서 있던 사내의 뒤에 가려져 있던 동료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아, 그리고 여기는 내 동료들인데…….”

‘하나, 둘, 셋, 넷…….’

총 인원은 다섯.

숫적 우위는 저쪽에 있었으며, 질적 우위라고 해서 딱히 달라질 건 없을 듯하다.

우리 멤버로 후자에서 밀리는 게 말이 되는가 싶긴 하지만…….

두근-!

세상은 뭐든 상대적인 거니까.

“응? 백호! 오늘따라 왜 이렇게 조용하시오? 저기 저 얀델 남작이랑 친한 사이라고 했지 않았소이까?”

…설마 이놈들을 여기서 마주칠 줄이야.


32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59화 32

659화 아웃사이더 (3)

당연한 말이지만, 이백호에게도 팀이 있다.

그리고 나는 나름 녀석의 팀에 대해서 빠삭하다.

그야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한때 미샤는 그 팀의 일원이었으니까.

“아! 얀델 남작! 그나저나 칼스타인 양은 잘 지내고 계시오? 참 착한 수인이었는데 말이지! 우리한텐 좀 쌀쌀 맞긴 했어도!”

전 노아르크 문지기 렉 아우레스.

나와 같은 탱커 포지션이며, 과거에서 한 번 만난 것 외에도 나름 인연이 있다.

리헨 슈이츠로 위장 중이던 시절, 이백호가 내게서 받아간 ‘심해 거인’ 정수를 먹은 게 바로 얘다.

그리고…….

‘파멸학자.’

벨베브 루인제네스.

이백호 팀에 가장 먼저 합류한 마법사이자, 내가 언젠가 반드시 갚아줘야 할 대상.

꽈악-

혹여 섣부른 행동이라도 할까 싶어 에르웬의 팔목을 잡으니 격한 떨림이 느껴진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다.

“저 사람이… 언니를…….”

에르웬의 언니는 다리아는 죽었다.

파멸학자가 에르웬을 죽이려고 쏜 마법을 막다가.

“아직은 때가 아니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이내 짧게 읊조리며 잡고 있던 손을 풀자 에르웬이 잠시간의 텀을 두고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불구대천지원수나 다름없는 인물을 보고서도 어떻게든 이성을 되찾은 것인데…….

“흐음, 인상 깊군. 그사이에 이렇게까지 빛을 잃을 수 있다니.”

그런 에르웬을 멀리서 지켜보던 파멸학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중얼거린다.

“더 큰 운명을 지닌 이가 주변에 있어서 그런가?”

마치 사이비 광신도가 앞에 있는 것처럼, 어딘가 불쾌함이 느껴지는 중얼거림.

옆으로 시선을 옮기자 두 명의 인물이 보인다.

‘인상착의를 보니 저기 저놈이 미샤가 말했던 궁수일 테고…….’

남은 한 명은 로브를 입은 채 온몸을 꽁꽁 싸매고 있다.

체격을 보면 일단 남자인 거 같기는 한데…….

아무튼, 이백호가 말한 그 새로운 동료인 거 같다.

아직은 외부에 알려지면 안 된다는.

‘조합상 힐러일 가능성이 높을 거 같긴 한데…….’

물론 지금 당장 고민할 부분은 아니다.

때마침 놈도 정신을 차린 듯하니까.

“크흠흠! 오랜만이네요! 얀델 남작!”

어째선지 어색하게 들리는 ‘남작’이란 말에 귀에서 가시가 돋을 것만 같았지만, 그래도 이해는 된다.

지금 이곳은 우리 둘만 있는 장소가 아니니까.

애초에 가만히 있던 것도 잠시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서였겠지.

다만, 녀석의 동료들 반응이 좀 인상 깊었다.

“……백호, 뭐 잘못 먹었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문지기부터 시작해, 진심으로 깜짝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궁수까지.

“당신, 그런 말투를 쓸 수도 있던 겁니까……?”

평소에 얼마나 안하무인한 태도로 살아왔으면 높임말을 조금 썼다고 이런 반응일까.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지만, 저놈의 예전 모습을 떠올리면 납득은 간다.

아니, 예전 모습이라 하기도 그런가?

“아, 그리고 너도 오랜만! 그러니까 이름이… 이제 에밀리 레인즈인가?”

“…….”

“근데 참 신기하네. 냐옹이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내 동료들은 왜 다 우리 얀델 남작님 곁으로 가는 거지? 가만 보면 상도덕이 없단 말이야?”

상도덕이 없기는 개뿔.

애초에 미샤는 내 동료였구만.

들어 보니 아멜리아도 동료로 들어간 게 아니라 임무 때문에 스파이로 잠입했던 거였고.

“얀델 씨, 조심해요. 이백호라는 자, 굉장히 위험한 사람이에요.”

대치 상태를 유지하고 있자 베르실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내게 조언했다.

한데 그 거리에서 그 말을 또 들었을까.

“응? 너 나 알아? 초면인 거 같은데?”

“……초면 맞아요.”

“근데 왜 그런 나쁜 말 해?”

“…….”

“에라이, 쯧… 이래서 선입견이 무섭다니까. 한 번도 본 적 없으면서 자기는 다 아는 척…….”

이백호의 싸가지 없는 말에도 베르실은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고 눈을 피했다.

딱 봐도 겁을 잔뜩 집어먹은 상태인 듯한데…….

“뭐, 내가 너 죽이기라도 한대? 표정 좀 풀—.”

“거기까지.”

한 집단의 리더로서 좌시할 수만은 없었기에 말을 끊으며 개입했다.

갑작스러운 만남에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일단 서둘러 확인부터 해야 했다.

“이백호.”

“네, 말하세요.”

“우리를… 따라온 거냐?”

이백호의 의도가 과연 무엇인가.

숫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우리가 밀리는 만큼,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부분이었다.

자칫하면, 우리 클랜원들을 전부 데려오지 않았던 걸 후회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따라왔냐니, 그건 좀 자의식 과잉 아닌가?”

“그럼 그냥 우연이라고?”

“네. 엄청 놀랐다니까요. 우리 얀델 남작이 왜 이런 데 있지? 목격자도, 도와줄 사람도 한 명 없는 이런 으슥한 곳에?”

“…….”

농담처럼만 들리지 않는 뒷말에 소름이 살짝 돋긴 했지만, 결국 저것도 다 나와의 대화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디테일일 터.

싹 무시하고 주어진 정보만 가지고 판단했다.

솔직히 말해, 상황을 보면 정말로 우연일 가능성이 높아보이거든.

그러니까, 이쯤에서 두 번째 질문.

“그러는 너는? 너는 왜 이런 으슥한 곳까지 찾아 온 거지?”

어째서 이놈이 이곳까지 내려온 걸까.

이백호가 내놓은 답변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이었다.

“편의점 가려고요.”

어…….

“……뭐?”

“아! 맞다, 우리 얀델 남작님은 편의점이 뭔지 모르겠구나! 실수! 실수!”

진짜 얘는 미친놈인가?

정색한 채 바라보고 있자 이백호가 머쓱한 얼굴로 말을 잇는다.

“장난이고… 아마 같은 이유지 않을까요?”

“같은 이유라면…….”

“응? 남작님도 밖에 나가려고 온 거 아녜요?”

그래, 역시 너도 이것 때문에 온 거였구나.

“근데 조금 궁금해지네. 우리 남작님이 갑자기 왜 밖에 나가려 하는 건지. 나한테만 좀 귀뜸해 주면 안 돼요? 나만 알고 있을 게. 응?”

단둘만이 있는 자리가 아니어서 그럴까?

이놈과의 대화가 오늘따라 유독 더 피곤하게 느껴진다.

이놈이야 원래 남 눈치 안 보고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지만, 나는 그럴 수 없는 입장이니까.

“장난은 여기까지. 정말 우연히 마주친 거라면 먼저 지나쳐 가라.”

“음… 그러죠 뭐.”

이내 동료들을 이끌고 문에서 멀찍이 떨어지자, 이백호가 동료들과 함께 쪽문을 향해 먼저 노아르크 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근데 걔로 되겠어요?”

지나가며 툭 던지듯이 내게 묻는다.

무슨 뜻인지는커녕 누구를 말하는 것조차 알 수가 없어 잠시 침묵을 택하자, 이백호가 피식 웃었다.

“뭐야, 오늘이 처음이었나 보네? 어쩐지…….”

…어쩐지?

뒷 말이 조금 찝찝하기는 했지만, 놈과 더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빨리 꺼지기나 해라.”

“넵. 그럼 즐던요!”

…세상에 이보다 얄미운 놈이 있을까?

***

이백호는 따라오지 말라고 경고를 하거나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직선으로 쭉 나아갔고, 이 모습을 보면 예전에 한글로 손수 써서 보낸 편지에 적힌 내용이 거짓말은 아니란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솔직히 좀 긴가민가 했거든.

그래서 아멜리아에게 따로 알아봐달라 하며 더블 체크를 했던 것인데…….

‘아멜리아도 장소는 광장이 맞는 거 같다고 했지.’

실제로 빠르게 나아가던 이백호 팀이 멈춘 지점도 해당 지점이었다.

“놈들이 멈췄다.”

한때 약탈자들로 붐볐던 노아르크 광장.

번뜩-!

머지않아 짧은 섬광이 피어나며, 아멜리아와 에르웬이 동시에 그들의 기척을 놓친다.

“…사라졌어요.”

이에 우리도 서둘러 광장으로 향했고, 텅텅 빈 광장을 신속하게 훑던 에르웬이 베르실을 보며 묻는다.

“방금… 마법이었죠?”

“네. 다중 순간 이동 마법이에요. 마력의 잔향을 보니 여기 아래… 여기 광장 아래에 숨겨진 마법진을 발동시킨 거 같은데…….”

“걱정 마라. 마법진을 발동시키는 주문을 알고 있다.”

“네? 알고 있다고요?”

대체 어떻게?

그런 눈빛을 짓는 베르실을 보며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귀족이지 않나. 다 알아내는 방법이 있다.”

“아…….”

그도 그럴 게, 이백호에게 들었다고는 솔직히 말할 수는 없잖아?

“자, 그럼 시작하겠다.”

이내 광장 한가운데에 선 나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동료들을 내 근처로 모았다.

그리고 천천히 시동어를 읊었다.

사실 시동어라기에는 굉장히 시적인 내용인지라, 혼자 떠들기 뭔가 좀 창피했지만…….

어떡하겠는가.

그냥 고대 마법사들 감성이 이랬구나 하는 수밖에.

“내 몸은 검으로 이루어져 있다. 피는 강철이며, 마음은 유리…….”

물론 그래도 의문은 있다.

마법 주문인데 왜 검이 나오는 걸까?

도무지 이해불가였으나, 일단 또박또박 영창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 몸은 틀림없이 검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내 창피함을 무릅쓰고 시동어를 완창한 순간.

번뜩-!

소리가 나며 빛이 터져나오는 일은 없었다.

“……?”

“……?”

의문이 가득한 눈길로 나를 보는 동료들.

사실 가장 혼란스러운 건 나였다.

‘뭐야, 왜 아무 일도 없어?’

내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은 소요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깨달았다.

[뭐야, 오늘이 처음이었나 보네? 어쩐지…….]

아까 듣지 못했던 이백호의 뒷말이 무엇인지.

‘어쩐지, 화를 내지 않더라니.’

…당했다.

***

농락당했음을 깨달은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열렬한 분노가 치솟아 오른다.

다만, 화가 난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어…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정보였나 보네요! 그럴 수도 있죠!”

“…너무 자책하지 마라. 귀족이라고 항상 올바른 정보만을 얻는 건 아니니까.”

“…….”

동료들의 위로야 어쨌든.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방법을 모색했다.

“베르실, 혹시 네가—.”

“당장은 무리예요. 이런 고대 마법진들은 발동을 시키려면 수많은 조건들이 필요해요.”

“얼마나 걸릴 거 같지?”

“………이런 쪽 지식이 없어서. 전혀 모르겠어요. 얼마나 걸릴지조차도.”

이 망할 놈의 이백호 새끼.

[근데 걔로 되겠어요?]

아까 떠보듯이 한 말의 대상이 누구인지도 이제 알겠다.

안타깝지만 베르실도 그걸 눈치챈 모양이고.

“오늘은 뭔가… 분한 일들 투성이네요.”

분하다고 말은 했지만, 어딘가 체념보다는 납득의 감정이 더욱 크게 묻어나는 목소리.

심정이 이해되기는 했다.

현실적으로 파멸학자처럼 최상위권 마법사가 될 수 있는 것은 한 시대에서도 몇 명뿐이니까.

‘……혼자서 극복할 일이겠지.’

생각해 보면 로트밀러 때도 그랬다.

이런 종류의 감정은 옆에서 무슨 말을 하든, 결국 스스로 이겨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혼자서 조금 살펴봐도 될까요?”

“그래라. 우리는 아예 멀리 떨어져 있겠다.”

“네. 감사해요.”

이후 베르실의 요구에 우리는 자리를 비켜줬고, 남는 시간 동안 하릴 없이 노아르크나 한번 크게 산책했다.

사실 머리가 복잡한 건 베르실만이 아니었거든.

오히려 얘가 더 심하면 심했지.

“……에르웬.”

“네?”

“괜찮은 거냐?”

“……네, 괜찮아요. 단지 때가 아닌 것뿐이잖아요? 아직은.”

그렇게 애써 웃으며 말해도 도무지 안심이 안 되는 건 왜일까.

속으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옆에서 묵묵히 걷고 있던 아멜리아가 새 주제를 꺼낸다.

“그나저나 얀델, 이건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 편의점이라는 게 뭐냐?”

“아, 그거……?”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의도라는 걸 알았기에, 나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대답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들이 하는 것 같고 좋네요.”

다행히 에르웬도 서서히 기분이 풀린 거 같았다.

뭐, 자연광 하나 들지 않는 캄캄한 지하 도시를 걸으며 나들이 같다고 말하는 감성은 쉬이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러고 보면 아저씨랑 재회한 곳도 여기였죠…….”

“그랬지. 그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죄송해요. 그때는 너무 정신이 없었어서.”

“탓하려는 게 아니니 사과할 건 없다.”

아무튼, 뜻밖의 산책을 끝마치고 광장에 돌아왔을 때도 베르실은 열심히 바닥을 짚으며 뭔가 열심히 조사를 하고 있었다.

“잠시 쉬고 하는 게 어떠냐? 미리 일정을 비우고 와서 며칠은 더 머물렀다 가도 되는데.”

“아… 네.”

“…뭔가 알아낸 건 있나?”

이내 조심스레 묻자 베르실이 한참이나 정적을 지키다 개미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있어요.”

“오, 있다니 그거 참 다행—.”

“저로서는 몇 년을 줘도 아무것도 못 알아낼 거란 사실요.”

아…….

일순간 할 말을 잃었지만, 그래도 이어진 말을 들어보니 멘탈이 그렇게까지 나간 거 같진 않았다.

“사실 당연한 일이기는 해요. 전 이런 쪽으로는 제대로 공부한 적도 없고, 허구한 날 전투 마법이나 익혔으니까요.”

얘길 들어보니 합리화라고 하기에는 그렇고.

그냥 딱 현실을 받아들였다고 보는 게 더 적절해 보인다.

“그러니까 저는 그냥 포기요. 근성 없다고는 하지 말아주세요.”

“그럴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뭔가 굉장히 창피하기는 하지만, 뭐 어쩌겠어요. 죄송해요. 더 조사를 하려면 저보다는 훨씬 더 수준 높고 전문적인 마법사가 필요할 거 같아요.”

전문적인 마법사라…….

“추천해 줄 사람이라도 있나?”

“한 사람 있긴 해요. 그 사람이라면 파멸학자보다 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파멸학자보다? 그게 누구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자,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의 이름이 베르실의 입에서 나왔다.

“유르벤 하벨리온.”

유르벤 하벨리온.

“마공학자란 이명을 지닌, 한 학파의 수장이자 제조 계열 마법사들의 우상이기도 한 사람이죠.”

베르실의 설명은 틀림없었지만, 잘 살펴보면 가장 중요한 설명 하나가 빠져 있었다.

유르벤 하벨리온.

악령들의 커뮤니티, ‘고스트 버스터즈’의 GM.

‘……이번 기회에 한번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25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60화 25

660화 아웃사이더 (4)

GM, 유르벤 하벨리온.

Elfnunalove라는 나로서는 굉장히 꺼림찍한 닉네임을 쓰는 플레이어이자, 이 세계에서 최소 20년 넘게 생존한 올드 유저.

참고로 이놈의 정체는 베르실도 알고 있다.

[유르벤 하벨리온. 그게 GM의 이름이다.]

애초에 원탁에서도 밝혔던 내용이거든.

그래서인지 이 녀석을 추천한 다른 이유가 숨겨져 있을 것만 같단 생각이 든다.

“…마공학자라면 나도 알고 있다. 한데 현실적으로 그자를 불러내는 게 가능하겠나?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예리한 아멜리아의 질문에 베르실은 문제될 거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걱정 마세요. 친분이 있어서요.”

‘물론 안 될 수도 있기는 하지만요’라며 보험을 까는 베르실이었으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면, 어째서 이렇게 자신할 수 있는 걸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베르실이 정말로 그 은둔형 외톨이 같은 GM과 친분이 있을 리는 없으니.

‘쥐고 있는 약점을 믿는 거겠지.’

다만, 정체를 갖고 협박을 한다고 잘 될까 싶기는 하다. 보아하니 이놈 정체는 왕실에서도 알고 있는 거 같았거든.

쓸모가 있어서 서로 이용을 하는 관계랄까?

‘커뮤니티가 사라졌으니, 어떤 상황에 처했을지 좀 궁금해지긴 하네.’

사실 이 녀석에 대한 관심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섣불리 다가가기가 조심스러웠다.

명분이 없었다고 해야 하나?

허구한 날 탑에 처박혀 있는 놈을 대뜸 찾아가봤자 만나 줄 리도 없으며, 갑자기 왜 왔나 수상해보이기만 할 터였다.

하지만…….

“나쁘지 않군. 일단 진행을 해봐라.”

베르실이 도개교 역할을 해준다면 자연스럽게 만나볼 수도 있을 터.

“네. 그러면 돌아가서 바로 말을 꺼내볼게요.”

약간 걱정되는 부분도 있지만, 베르실 성격상 자기 정체는 드러나지 않게 잘 협박하리라 믿기로 했다.

“외부에는 비밀로 해야 하는 일이니 이 부분도 꼭 당부해두고. 만약 우릴 도와주겠다고 하면 약속도 잡아라. 그전에 한번 봐야겠으니.”

“네. 그럴게요.”

“그럼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여기에 더 있어 봤자 할 것도 없기에 일단은 이쯤에서 오늘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도시로 복귀했다.

그리고…….

“저는 마탑으로 가볼게요.”

마공학자에게 말을 꺼내본다며 베르실이 먼저 따로 떠나고서 약 사흘 뒤.

“됐어요. 마공학자가 한번 봐보겠대요.”

약속이 잡혔다.

***

마공학자와의 만남은 무척이나 조심스럽고, 비밀스럽게 진행됐다. 무슨 냉전 시대 첩보원이라도 된 거 같다 해야 하나?

‘여기서 좌회전을 한 다음에 앞에 보이는 빨간 지붕 옆 건물의 세 번째 문을 열고 내려가면……. 아, 여기네.’

골목길을 한참이나 돌고 돌아 도착한 건물.

그 아래에서도 지하 계단을 타고 내려간 뒤에 암시장에 입장할 때처럼 마법진을 발동시켜서 의문의 공간으로 진입했다.

번뜩-!

서재의 형태로 꾸며진 꽤나 널찍한 방.

다만 방 어디를 보든 출입구는커녕 창문조차 찾아볼 수 없다.

아무래도 오직 마법으로만 올 수 있게 만들어 둔 특수 공간인 듯한데…….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작님.”

소파에 앉아 있던 사내가 몸을 일으키며 내게 인사를 해온다.

‘이렇게 생겼었구나.’

도시에서 한번 만난 적이 있기는 했지만, 그때 이놈은 한스 I로 위장했던지라 얼굴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첫인상 키워드는 동안, 멸치, 안경 정도.

다만 외모 평가나 하러 온 건 아니기에 얼굴만 기억해둔 뒤 곧바로 대화를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조심스럽게 하는 이유가 있나?”

“번거롭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하나 최근 제 주위에 적이 많다 보니. 이해해주십시오.”

적이라…….

하긴 예전에 이백호만 해도 얘를 엄청 찾아다니고 그랬었지.

“아무튼, 반갑다. 유르벤 하멜리온.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이내 녀석과 짧게 악수를 한 뒤 내 자리로 보이는 소파에 앉았—.

콰지직.

후, 시작부터 바바리안 차별이라니.

“괜찮으니, 사과는 하실 필요—.”

…응?

사과를 내가 왜 해?

“다음부터는 더 튼튼한 의자를 사라. 이런 의자를 사면 차별 주의자처럼 보이니까.”

“예……? 아, 예…….”

“바바리안은 앉지 못하는 의자를 사는 것부터가 차별의 시작인 거다.”

“……하하, 꼭 명심하도록 하지요.”

나에 대한 인상이 실시간으로 떨어지는 게 보이긴 했으나,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놈과 대화를 할 때는 특히 더 주의해야 하니까.

절대 현대인처럼 보이지 않도록, 바바리안스럽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

조금 과해보일지라도.

툭.

완전히 내려앉은 소파를 옆으로 밀어내고 그냥 양반다리를 하고서 맨바닥에 앉는다.

놀랍게도 눈높이 차이는 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가 살짝 위인 듯한데…….

“어쨌든, 부탁을 들어준다 해서 고맙다. 설마 베르실과 친분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둘은 어떻게 알게 된 거냐?”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을 던진다.

그야 놈 입장에서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잖아?

베르실을 보내 협박한 장본인이 바로 나라고.

“하하… 둘 다 정식으로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이지 않습니까. 다 자연스럽게 친분이 생기고 그런 거지요.”

“오, 그러냐?”

“한데… 그래서 제가 뭘 조사해야 하는 것인지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고울랜드 양이 거기까지는 말을 해주질 않아서.”

“지하 성채에 있는 마법진을 조사하는 일이다. 아니, 정확히는 이걸 발동시키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내줬으면 한다.”

“마법진 말입니까……?”

“그래. 아주 고대에 그려진 마법진이라, 베르실 혼자로는 역부족이라 하더군.”

솔직하게 본론으로 들어가자, GM이 턱을 짚으며 어딘가 상념에 잠기더니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혹시… 성벽 바깥으로 나가려는 게 목적이신 겁니까?”

…그래, 너도 아는 게 있었구나.

어차피 도움을 받는다면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솔직히 답했다.

“맞다. 정확히는 나가서 놈들의 동태를 살피려는 거지만.”

“……그렇군요.”

“혹시 이미 알고 있는 거냐? 그 마법진을 발동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런 마법진의 존재가 있다는 것만 어찌 운 좋게 들어서 알고 있던 정도이지요.”

“너도 직접 가서 보기 전에는 뭐라 확답을 줄 수 없다는 거군?”

“예, 그렇습니다.”

그리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GM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일절 느껴지지 않았고, 송구하다는 느낌마저 자아낼 정도였다.

하지만…….

‘근데 왜 이렇게 밑밥을 까는 거 같지?’

대충 하고 상황을 모면하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은 나는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라. 설령 못 한다고 해도 너를 탓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아, 예… 그렇다니 마음이 좀 놓이는.”

“될 때까지 하면 되는 거 아니겠나?”

“……예?”

예는 무슨 예.

지하로 내려가서 마법진이나 한번 쓱 보고, 능력 부족이라 하면 내가 그러려니 할 줄 알았던 건가?

“몇 달이 걸리든 상관없다. 하다 보면 언젠가는 되지 않겠나!”

“…….”

“부탁하는 입장에서 널 혼자 두는 것도 예의가 아닐 테니 계속 옆에서 같이 있어 주겠다!”

해석하자면, 통조림에 가둬두고서 다른 곳에 새지 못하게 감시까지 하겠다는 뜻.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지금 바로 가보는 게 어떠냐?”

“…예?”

“듣기로는 어차피 맨날 탑에만 콕 박혀 있다고 하던대? 뒤에 약속 같은 것도 없을 거 아니냐!”

“그, 그래도 장비 같은 건 챙겨가야…….”

“걱정하지 마라! 말만 해주면 내가 베르실에게 시켜 가져오라고 할 테니.”

“제, 제가 직접 가져오겠습니다. 당장 그게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고, 말로만 전해선 찾기도 어려울 테니……!”

정말 이대로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목소리가 빨라진 GM.

“흐음… 그러고 안 나타려는 건 아니겠지?”

“……예?”

얼빠진 표정을 짓는 녀석을 보며 나는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핫! 농담이다 농담! 네가 안 나타날 리가 있겠나! 난 걱정하지 않는다!”

“아하하… 그, 그렇습니까?”

“그래! 뭔가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 나오지 못할 일이 생기더라도, 내가 찾으러 가면 되는 거 아니냐!”

“…….”

이후 마탑은 여러 번 가봐서 지리에도 빠삭하다고 말해주자, 지난 마탑 습격 사건이 떠올랐는지 GM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거, 걱정하지 마십시오. 1시간이면 충분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떠나간 GM은 정말로 한 시간이 딱 되기 전에 돌아왔다.

***

GM과 단둘이서 노아르크를 찾아 가는 일은 딱히 문제가 없었다.

일단 노아르크로 내려가는 길은 나도 빠삭하게 잘 알고 있는 데다가…….

처벅, 처벅.

하수도에서 순찰을 도는 기사들은 이 녀석이 갖고 있던 마도구로 해결이 됐거든.

순찰대도 나름 간파 계열의 마도구를 지닌 듯해 내심 걱정했지만, 결과적으로 기우였다.

‘…템빨이 좋기는 하네.’

과연 마공학자라 해야 하나?

기사들이 지닌 것보다 더 상위 판정을 갖는지, 바로 옆을 지나가는데도 기사들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직접 만든 거라고 했지? 이름이 뭐냐?”

“이름은 없습니다……. 애초에 팔려고 만든 것도 아닌지라.”

“왜 안 파나?”

“제작을 위해선 아주 희귀한 부산물이 필요한데, 성공 가능성도 무척 낮습니다. 그렇다 보니 만들어진 게 이거 하나지요.”

“오, 그러냐?”

그렇게 말하니까 더 탐나는데 말이지.

어떻게 뺏거나 할 방법이 없으려나?

속으로 고민하고 있자니, 그 욕망을 느끼기라도 한 듯 GM이 빠르게 말을 돌린다.

“그나저나 세상이 많이 변했다 싶군요. 하수도에 기사들이 돌아다니는 걸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러니까 밖에 좀 나가고 그래라.”

“하하… 그래야겠습니다.”

자리가 불편한지, 아니면 바깥에 나온 것 자체가 스트레스여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노아르크 광장에 도착할 때까지 GM이 먼저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내가 어떻게 툭툭 던져봐도 적당히 넘길 뿐이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가 없네.’

뭐, 성격이야 어쨌든 일만 잘해주면 상관없지만.

“자, 여기다. 뭔가 알겠나?’

“한번 봐보겠습니다.”

이내 광장에 도착하자 GM은 전문가적인 포스를 뽐내며 이런저런 장비를 꺼내놓고, 뭔가를 계속해서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저…….”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금 떨어져서 잘 하고 있는지 감시하고 있던 나에게 녀석이 총총 걸음으로 다가온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마는.”

처음엔 무슨 말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 끝났다고?”

“예. 여기에 마법진을 발동하기 위한 수식을 적어뒀으니, 이 방법만 따라한다면 4등급 마법사만 되어도 마법진을 발동시킬 수 있을 겁니다.”

그리 말하며 기품 넘치는 글씨가 적힌 양피지를 건네는 GM이었지만, 쉽사리 믿기지가 않는다.

이게 이렇게 빨리 끝나는 일이라고?

의심스럽다는 듯 눈길을 좁히고 위아래로 쓱 훑자 녀석이 변명하듯 말을 잇는다.

“…생각보다 쉬웠습니다. 고대 마법진은 제 전공 분야이기도 하고요.”

“그러면서 아까는 왜 확답을 못한다 한 거냐?”

“그건… 제 안 좋은 버릇입니다. 죄송합니다.”

음, 그렇다면 또 할 말이 없기는 한데…….

“저… 그럼 이제 일도 다 끝났겠다, 이만 가봐도 괜찮겠습니까? 되도록이면 저녁은 집에서 먹자는 주의여서…….”

솔직히 말해서 믿지 못하겠다.

뭐, 아무리 나라도 면전에 대고 그리 말할 수는 없었지만.

“일이 끝났다니 뭔 소리냐?”

“예?”

“잘 됐는지 아직 확인을 못했지 않나. 한번 직접 발동시켜봐라.”

나름 합당한 이유를 대며 붙잡자, GM도 거절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인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준비만 좀 할 테니 기다려주십시오.”

꺼내 놓은 장비들을 잘 챙긴 녀석이 다 끝났다며 나를 부른 건 5분 정도가 흐른 뒤였다.

녀석 옆으로 다가가자 녀석이 하나, 둘, 셋 하고 카운트를 외웠다.

그리고…….

번뜩-!

새하얀 빛이 우리를 감싸고, 이윽고 눈을 떴을 때.

‘여긴…….’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간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거대한 이무기가 지나갈 수도 있을 법한 넓은 원형 통로. 한쪽 벽면은 알 수 없는 문양이 그려진 채 막힌 상태였는데…….

“저게 이쪽에 새겨진 마법진입니다. 대충 살펴보니 발동 방법은 동일해 보이는군요.”

“…대충이라고?”

“그… 말이 헛나왔습니다. 틀린 정보는 아닐 테니 그 부분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아, 그리고 한 가지 주의를 드리자면……. 마법진이 파손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광장에 있던 마법진과 다르게 외부에 노출이 된 구조이다 보니…….”

“망가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영구적인 복원 마법이 설정되어 있어서 기다리면 고쳐지긴 할 테지만… 최소 1년은 걸릴 겁니다.”

“…그렇군.”

영영 못 돌아간다는 것보다는 낫지만 1년이라는 기간도 충분히 큰 리스크다.

“순간 이동 마법을 사용해 도시로 돌아가는 것도 안 되나?”

“예. 좌표 인식은 도시 아래로 되어 있으나, 이동 궤도 지정이 되지 않는 걸 보면, 현재 저희 위치가 수호 마법진의 바깥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도시 아래에 있긴 하지만 도시 전체를 뒤덮은 결계를 기준으로는 밖에 있다는 뜻.

역시 아무래도 영 미심쩍다.

물론 녀석이 말한 정보의 진위 자체에 의심을 갖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역시 수상하단 말이지…….’

마공학자 유르벤 하벨리온.

이놈이 재능 넘치는 마법사라는 건 알겠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쓱 보고 전부 다 척척 대답하는 게 가능한가?’

문외한인 나조차도 이상하다는 게 느껴질 정도다.

마치 이미 조사해서 알고 있던 걸, 모르는 척하며 푸는 느낌이라고 해야—.

“저 그러면 제 할 일은 이제 다 끝난 듯한데… 이만 돌아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GM의 요구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할 일이 끝났다는 데는 부정할 말이 없지만, 막상 이대로 보내주기엔 좀 아쉽다.

최소 몇 주는 걸릴 거라 생각하고 가만 있었을 뿐.

사실 조사하는 동안에 계속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좀 알아볼 생각이었거든.

그래, 그러니까…….

“여기까지 와봤는데, 너는 궁금하지 않나? 같이 가보도록 하지!”

“예?”

“그럼 허락한 거로 알겠다!!”

쉽게는 못 보내지.


28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61화 28

661화 아웃사이더 (5)

드넓은 원형 통로.

마법진이 그려진 벽면의 반대편 길을 따라 마냥 걷고 있자니 점차 통로가 좁아진다.

“저기… 저는 밖이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데…….”

터벅, 터벅.

“탐험은 다른 동료분들이랑 하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는 게 어떨는지…….”

터벅, 터벅.

“이, 이러는 게 어딨습니까! 놓아 주십시오!”

이대로면 답이 없다 생각했는데, 거진 납치당하듯 끌려오던 GM의 말투가 점차 험해진다.

아, 물론 바바리안 입장에서는 그것도 귀여웠지만.

병아리가 삐약삐약거리는 거 같달까?

“유르벤 하벨리온.”

잡고 있던 팔을 풀어 주며 녀석을 바라본다.

“……왜 그, 그렇게 보십니까?”

“며칠만 내게 시간을 내줘라. 이렇게 만난 것도 어찌 보면 인연인데, 서로 친해지면 좋지 않나?”

“사교 목적이라면 이런 게 아니더라도 언제든 시간을 낼 수 있습니다마는…….”

거, 언제든 시간을 낼 수 있기는.

돌려보내 준 순간 마탑에 콕 틀어박혀 안 나올 거면서.

“근데 좀 이상하군.”

“예?”

“왜 이렇게까지 돌려보내 달라고 징징거리는 거냐? 너도 명색이 마법사인데 밖이 궁금하지도 않나?”

“……전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것에만 의문을 갖습니다.”

꽤나 인상 깊은 철칙이었다.

가늘고 긴 삶을 추구한다면 눈을 닫고 귀를 막는 것만큼 쉽고 빠른 방법이 없으니까.

‘…얘가 이렇게 오래 생존할 수 있던 비결이려나.’

저 한마디를 통해 GM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한결 더 이해한 듯한 기분이다.

뭐, 그렇다고 그냥 놓아 줄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좀만 도와줘라. 응? 베르실을 봐서라도 말이다.”

얼핏 들으면 베르실과의 친분을 이용해 애원하는 듯하나, GM의 입장에서는 협박처럼 들릴 말.

“크흠…….”

“내가 약속도 하겠다. 뭔가 위험한 일이 생기면 이 한 몸을 던져서라도 반드시 막아 내겠다고. 응? 그리고 며칠 걸리지도 않을 거다, 잠깐 확인만 하고 돌아올 생각이니까.”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이내 당근까지 같이 제안하자 GM도 못 이긴 척 고개를 끄덕인다.

오케이, 그럼 이 문제는 이제 끝났고…….

“그럼 계속 이동하겠다.”

합의가 끝난 후에는 다시금 통로를 따라 걸었다.

조금씩 좁아지던 통로는 어느 지점을 기준으로 더 좁아지지 않았고, 그 상태로 한참을 더 걸어 나가니 통로가 점차 넓어지며 경사진 길이 나타났다.

그리고…….

솨아아아아아아아-!

언덕을 따라 쭉 올라가니 바람이 느껴지고, 서서히 빛이 새어 들어온다.

기분 탓인진 몰라도 도시에서 느끼던 자연과는 뭔가 조금 다른 듯한 느낌.

「캐릭터가 금지 구역에 진입했습니다.」

완전히 외부로 나온 나는 숨을 깊이 내쉬며 주변을 천천히 쓱 둘러보았다.

저 멀리 산맥에 반쯤 가려진 석양.

석양을 담아 붉게 물든 개울.

나무 위에는 새가 둥지를 틀어 놓고서 지저귄다.

그리고…….

“저기가 라프도니아겠군…….”

석양이 지는 반대편 저 멀리에 높이 세워진 거대한 성벽이 보인다.

높기는 또 얼마나 높으며, 옆으로 넓긴 또 어찌나 넓은지 만리장성을 보는 것처럼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는데…….

‘외관을 보는 건 또 처음이네.’

게임을 플레이하며 성벽 밖으로 나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이 각도에서 라프도니아를 보고 있단 게 굉장히 낯설—.

“하벨리온,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

“조금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글자가 보여서…….”

낯선 글자?

고개를 갸웃하며 우리가 조금 전에 빠져나온 동굴 입구로 다가가자, 맨들맨들한 벽면에 칼로 그어서 만든 듯한 흔적 하나가 보인다.

[왔다 감.]

[대한건아 이백호.]

하… 왜 내가 다 창피해지지?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뱉을 뻔했지만, 애써 참으며 짐짓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고대어는 아닌 거 같은데 특이하군.”

“예. 특이합니다. 어딘가 눈에 익은 거 같기는 한데…….”

아무래도 GM은 한글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듯한데,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나도 갑자기 히브리어 같은 걸 보면 어느 나라 언어인지 못 알아볼 거 같거든.

스윽.

그런 생각으로 이백호가 적어 둔 낙서를 보고 있자니, GM이 슬쩍 내게 조언한다.

“이름 같은 걸 남길 생각이시면 안 하시는 게 옳습니다. 밖에 나왔단 증거가 되니까요. 왕가에서 보면 반역이라 해석할 여지가 있습니다.”

“……할 생각도 안 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GM을 보며 나는 휙 등을 돌며 입맛을 다셨다.

“…….”

이게 뭐라고 나도 하나 남기고 싶어지는 거지?

***

광대의 말에 따르면, 성벽 바깥 세상은 미궁의 제7계층 암흑 대륙과 유사한 구조를 띠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의 위치는 어디일까.

일단 기준점으로 할 만한 것부터 찾아야 할 거 같은데…….

‘저게 용의 산맥이라고 하면… 여기가 대수림 근처려나?’

만약 그렇다고 하면 현 위치가 대략적으로 나온다.

대수림은 암흑 대륙 남동부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여기는 대수림에서도 동쪽으로 더 와 있는 거 같으니…….

‘대수림 동부 정도라고 보면 되려나?’

물론 이것도 다 추측일 뿐, 확신할 수 없다.

애초에 미궁이랑은 분위기가 아예 다르다 보니 잘 모르겠기도 하고.

‘아무튼, 이건 차차 알아보는 거로 하고…….’

“한데… 이제 어디로 가시렵니까?”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GM의 질문에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우선 도시 쪽으로 간다.”

“도시 쪽… 말씀이십니까?”

“왜 그런 표정이냐?”

“솔직히 남작님이라면 당장 숲으로 들어가자 할 줄 알았습니다.”

어… 솔직히 말하면 저 숲 쪽이 궁금하긴 하다.

다만 우리 둘이서 너무 멀리 나가는 건 리스크가 있는 데다가, 우선 성벽 주변을 둘러보며 확인해 보고 싶은 게 하나 있었다.

따라서…….

“탐지 마법은 그냥 계속 쓰면서 따라와라. 미지의 세상이니까. 뭐든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예. 혹시 모르니 좌표 기억만 해 두고 가지요.”

“오, 좋다.”

암흑 대륙의 ‘대수림’이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평화로워 보이는 숲을 뒤로하고, 우리는 동쪽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진짜 맵 한번 더럽게 크네.’

이미 석양이 산맥 너머로 아예 자취를 감추고 시커먼 밤하늘에 별까지 가득 떴지만, 우리는 아직 성벽에 도착하지도 못했다.

아니, 절반 정도는 왔으려나?

‘…몇 시간이면 도착할 줄 알았는데.’

우리가 있던 곳이 고지대였고, 성벽이 워낙 높다 보니 발생한 해프닝이었다.

신기루 같다고 해야 하나?

아무리 가도 가도 가까워지는 듯한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곳에서 하룻밤 보내고 내일 다시 움직이도록 하지.”

밤이 되며 성벽도 보이지 않게 됐기에 그냥 이쯤에서 야영을 준비했다.

혹시 엉뚱한 방향으로 이동했다가는 시간 낭비만 더 할 수도 있다는 판단.

“……모포에서 자는 건 무척 오랜만이군요.”

침낭 속에 들어가 별이 뜬 밤하늘을 보며 누워 있자니 옆에서 GM이 먼저 말을 걸어온다.

뭐, 밤이 되니 조금 감성적이게 된 건가?

자세한 심경의 변화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바라던 스몰 토크의 시작점이란 건 분명했다.

“예전엔 너도 탐험가였댔지?”

“예. 벌써 7년도 더 전의 얘기긴 하지만 말입니다.”

“…탐사는 어쩌다 그만두게 된 거냐?”

“그냥… 여러 일이 있었습니다. 저 스스로의 한계를 느끼던 시기이기도 했고…….”

‘여러 일’이라고 퉁치는 걸 보니 자세한 내용을 말하고 싶지는 않아 보인다.

아니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사정이던가.

‘탐험가를 그만두자마자 바로 마탑에 틀어박힌 채 7년을 보냈지…….’

GM의 사정은 알지 못하나, 그렇다고 GM이 살아온 흔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다.

그야 그 정도 뒷조사는 다 해 뒀으니까.

‘분명 은둔형 외톨이가 된 이유가 있을 텐데…….’

내 직감에 의하면, 원인은 저 녀석 본인이 아니라 외부에 있을 것 같다.

왕가라든가, 그도 아니면 이백호라든가.

“그래도 이렇게 누워 있으니 왠지 마음이 편하긴 하군요.”

“그건 또 무슨 심경의 변화냐? 아까는 무슨 지옥에라도 데려가는 것처럼 싫어하더니.”

“여전히 싫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것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요.”

“그게 뭐지?”

“그 어느 누구도 제가 이곳에 있는 줄 모르지 않습니까.”

그제야 나는 이 녀석이 어째서 마음 만은 편하다고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얘도 왕가에서 감시를 받는 거 같았으니까.

저번에도 잠깐 마탑에서 나왔다가 이백호한테 기습을 당하는 일도 있었고.

오히려 도시에 적이 더 많다고 해야 하나?

‘이러면 이백호가 밖에 나와 있다는 건 절대 말하면 안 되겠고…….’

불리한 진술은 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계속해서 가벼운 대화를 이어 나갔다.

“연인 말입니까……? 저도 나이가 있는 만큼 여자를 만난 적이 없지는 않지만… 모두 끝은 좋지 않았습니다.”

연애는 잘 하지 않는 성격에.

“제가 처음에 들어간 그 학파 말입니까? 실은…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의외로 거짓말을 하거나 대충 얼버무리고 싶은 상황에서는 정면 돌파를 택한다.

아니면 단지 저 사건이 얘한테는 역린이든가.

‘이건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네.’

녀석이 처음 몸 담았던 학파는 어느 사건으로 인해 통째로 공중분해 됐으며, 이후 녀석은 지금의 학파를 새롭게 창설한다.

다만 아쉽게도 ‘어느 사건’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모든 게 극비로 취급되고 있다 해야 하나?

내가 아는 것은 그 사건이 금지된 마법과 연관되어 있던 것 정도.

‘나중에 카일 아저씨도 한번 만나서 물어보든가 해야지. 금지된 마법에 대해서는 빠삭할 테니.’

이후로도 잠에 들기까지 시답지 않은 얘기들을 나눴고, 그런 자잘한 대화를 통해 새삼 깨닫는 부분들이 있었다.

나, 이백호 그리고 이 녀석은 여러모로 닮았다.

플레이어의 편도, 왕가의 편도, 노아르크의 편에 선 것도 아니란 점이.

***

그렇게 밝아 온 다음 날 아침.

“잘 잤나?”

“온몸이 뻐끈하군요.”

“자, 여기 물 마셔라. 그럼 좀 나을 거다.”

“……그게 뻐근한 거랑 무슨 상관입니까?”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마라.”

우리는 일어나자마자 대충 식사만 끝내고서 바로 성벽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드디어 도착했군요.”

“도착은 무슨, 이제 시작인데.”

다시 석양이 질 때쯤 성벽 근처까지 도착한 우리는 성벽 외곽을 타고서 쭉 이동했다.

그야 얼마 안 되는 문헌에도 나와 있거든.

대륙 끄트머리에 위치한 ‘라프도니아’는 무역을 주 수입원으로 삼는 영지였다.

그 말인즉슨.

라프도니아 근처에는 바다가 있어야 한다.

툭툭.

손으로 쳐서도 느낄 수 있는 외벽을 따라 형성된 투명한 결계.

이를 쭉 돌아서 밤새 이동한 우리는 날이 밝기 전에 라프도니아의 동쪽이라 할 수 있는 10구역, 9구역에 도착했다.

하지만…….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는군요. 곧 날이 밝을 테니, 그때까지 기다리는 게 나아 보입니다.”

“피곤할 텐데, 아예 그동안 눈이라도 붙이지.”

문제는 그렇게 한숨 자고 일어난 이후였다.

“남작님……? 일어나 보십시오! 저, 저게 대체 무슨…….”

“……일단 가까이 가 보지.”

잠에서 깨자마자 저 멀리로 보인 풍경에 넋을 잃기도 잠시, 우리는 서둘러 해당 지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

“…….”

우리 둘 모두 말을 잃었다.

다만 어떻게든 하나씩 현 상황을 정리해 보자면.

‘일단.’

바다는 존재했다.

대륙의 끝자락, 절벽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능선을 따라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하나 문제는…….

‘잿빛.’

바다가 잿빛이다.

아니, 바다뿐만 아니라 하늘도 그렇다.

찰랑거리는 파도도.

하늘에 새겨진 구름도.

협곡을 기준으로 저 너머의 모든 것이 흑백 사진으로 촬영한 듯 색을 잃은 채 멈춰 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며 GM이 중얼거렸다.

“……세상은 멀쩡해진 적이 없던 거군요.”


18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62화 18

662화 동행 (1)

고대 시절에 이 세상을 뒤덮은 마녀의 저주.

짧게 설명하자면 이 저주는 ‘방사능’과 유사하다.

저주 이후 대륙 전체가 어떠한 생명체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으로 변했고, 라프도니아만이 그 재앙을 피해갈 수 있었다.

……라고 세간에는 알려져 있다.

하나 성벽 바깥에 마녀의 저주는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우리가 알던 마녀의 저주는 없었다.

[지금 바깥은 정말로 멀쩡해. 식물들도 자라고 가까이 다가가면 풀잎을 먹는 벌레들도 보여. 야생동물들도 마찬가지고.]

고스트 버스터즈 게시판에 올라왔던 어느 노아르크 플레이어의 게시물처럼.

성벽 바깥은 죽음으로 가득한 땅이 아니었다.

‘뭐, 그렇다고 멀쩡한 상태는 아닌 거 같지만.’

절벽 끝에 선 채로 눈앞에 펼쳐진 잿빛 세계를 바라본다.

모든 것이 잿빛이었으나, 오직 저 멀리서 떠오르는 태양만이 붉게 빛나며 이질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세상은 멀쩡해진 적이 없던 거군요.”

GM이 중얼거렸듯, 누가 봐도 멸망한 게 확실해 보이는 세상.

다만 그럴수록 의문은 커진다.

그야 왕가가 했던 말 중에는 진실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방사능은 개뿔…….’

공기 중에 흩뿌려진 독 같은 건 없었다.

단지, 또 다른 방식으로 멸망한 세계가 있었을 뿐.

물론 왕가에서 어떤 이유로 이 사실을 숨겼는지는 짐작조차 되지 않는—.

“저는 왕가에서 왜 진실을 왜곡했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응?”

언제 꺼내들었는지도 모를 망원경을 내리며 GM이 말을 잇는다.

“그들이 성벽 내의 주민들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이 멸망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걸.”

“…그게 무슨 소리냐?”

“저 아래를 보십시오.”

GM이 가리킨 지점은 잿빛으로 변한 파도와 육지가 맞닿은 경계선이었다.

“육안으로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느린 속도지만, 조금씩 저 영역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이내 건네받은 망원경을 눈에 대고 해당 지점을 확인하자, 경계선을 기준으로 천천히 침식이 진행 중인 게 보인다.

“문제는… 이쪽만 이런 게 아닌 거 같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먼저 성벽 바깥에 나간 이들이 다시금 도시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분명 반대편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었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도시로 돌아올 이유가 있나? 어차피 네 말대로라면 도시가 먼저 멸망할 텐데?”

“뭐, 저희가 알지 못하는 정보를 알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음, 어쩌면 저 침식이 진행되어도 수호 마법진은 뚫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군요.”

얘기를 마저 들어보니 마법사답지 않은 아니면 말고 식의 추측이었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겠지.’

실제로 노아르크 놈들은 도시를 침공했다.

이는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 라프도니아 내에 있다는 뜻이다.

그게 정확히 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나머지는 직접 탐험하면서 알아봐야겠지.’

그런 의미에서 이후로는 GM과 함께 해안가까지 내려가서 이런저런 조사를 진행했다.

아쉽게도 알아낸 건 얼마 없었다.

하지만 그거라도 좀 정리를 해보자면…….

쿵!

일단 저 침식 지대는 말 그대로 죽음의 땅이다.

사물이든 뭐든 저것과 닿는 순간, 색을 잃고서 돌처럼 굳어버린다.

참고로 사람으로 실험은 못해봤다.

항마력이 높으면 버텨지는지 궁금하긴 한데, 진짜 실험할 용기는 없거든.

아무튼.

“시체… 군요.”

두 번째는 해안가를 둘러보다 발견한 동굴 내에서 해골을 발견한 것이다.

적어도 몇 년은 훌쩍 지난 듯한데, 주변을 수색해도 더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세 번째.

“이 속도면 10구역 외벽에 닿기까지 10년 정도 걸리겠군요.”

침식이 동일한 속도로 진행된다는 가정하에, 10년 뒤엔 도시에 도달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뭐, 도시를 감싼 수호 마법진이 침식을 막아낼 수 있는 거라면 별문제는 없을 테지만 말이다.

“수색은 이만하고 돌아가지.”

“아예 돌아가시는 겁니까?”

“언제까지 붙잡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너도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거 아니냐?”

피식 웃으며 말하자 GM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이렇게 정상적인 말을 하는 게 믿기지 않는 듯한 눈빛이라 해야 하나?

“왜 안 가고 싶—.”

“아뇨! 갑시다! 얼른!”

거, 서운할 정도로 기뻐하네.

이제 좀 친해진 줄 알았는데.

“그래, 가자.”

이후로는 해안가에서 나와 성벽 쪽으로 이동하며 대화를 나눴다.

“하벨리온. 근데 좀 이상하지 않나?”

“뭐가 말입니까?”

“이러한 사실이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 말이다. 10구역 성벽 위에서는 세상이 요지경이 된 걸 다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괴담 비슷한 것도 들어본 적이 없는 거 같아서.”

“혹시… 남작님께서는 성벽 위에 한 번도 가본 적 없으신지요?”

“가봤는데?”

이내 비프론의 성벽에 올라서 드넓게 펼쳐진 자연들을 감상했던 경험을 말하자 GM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비프론이 특이한 경우라 그렇습니다. 다른 성벽들은 환영 마법이 걸려 있는데, 도시 중에 유일하게 비프론만 그 마법에 뭔가 문제가 생긴 거로 알고 있습니다.”

“…오, 그러냐?”

“외부에서는 알 수 없는 내용이니 모르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아, 참고로 비프론의 성벽 위에서 근무를 하던 병사나 기사들은 성벽 바깥의 자연이 환영 마법으로 인한 것인 줄 안다더군요.”

이러한 얘기는 처음 듣는다.

확실히 높은 신분의 마법사인 데다가 살아온 짬이 있으니 아는 게 많구나.

“한데… 환영 마법이 걸린 건 성지도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아, 그거…….

“맞는데, 성벽도 그런 상태인 줄은 몰랐다.”

성지는 성벽 바깥에 위치해 있다.

역사서에는 왕가가 이종족들을 존중하여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독립적인 땅을 내주었다고 하지만, 실상은 차별이며 배척이다.

이번에 7구역 침공 사건만 봐도 그렇지 않나.

오래전 왕가에서 만든 마법진을 노아르크 측에서 발동시키자마자 성지는 완벽하게 도시와 단절되며 고립되었—.

‘생각이 딴 길로 빠졌네.’

아무튼, 성지에서 쭉 걷다 보면 보이지 않는 벽으로 가로막혀 더 나아갈 수 없는 구간이 나온다.

당시 그 너머는 숲이 펼쳐져 있었는데…….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

[전사야, 아직 그 너머를 궁금해할 시기가 아니다.]

생각해 보면 그때 주술사가 굉장히 의미심장한 대사를 쳤었는데, 과연 어떨까.

그때와는 비할 수도 없을 만큼 성장했는데.

이제는 성벽 밖을 궁금해해도 될 시기가 됐을까?

“하긴… 성지만 특별한 경우라 생각하실 수도 있었겠군요. 일단 명목상은 이종족을 배려해서 환영 마법을 건 거라고 알려져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갑자기 궁금해지는군. 실제로는 어떨지.”

“예……?”

“말이 나온 김에 한번 확인해봐야겠다. 어차피 지나가는 길이기도 하고.”

내친김에 살짝 동선을 틀어 성벽 쪽으로 붙어서 가는 루트로 이동했다.

“성벽 주변 전체가 숲지라서 굉장히 불편하군요.”

“툴툴대지 말고 얼른 발이나 옮겨라.”

얼른 집에 돌아가고 싶어하는 GM을 잘 토닥이며 데려가고 있자니, 머지않아 라프도니아에 존재하는 여섯 개의 성지 중 하나에 도착할 수 있었다.

툭.

더 이상의 접근은 허용할 수 없다는 듯 길을 가로막는 투명한 장막.

9구역에 위치한 요정들의 성지다.

일단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냥 숲밖에 안 보이네.’

성지의 최외곽부 경계선인 만큼, 요정들의 생활 환경이나 도시 경관을 보는 건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조금 신기하기는 했다.

‘엄청 크네…….’

바바리안의 성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무가 거대하고 정갈하다.

마치 수천 년 동안 공을 들여 관리라도 한 것처럼.

“……일단 가자고 해서 오기는 했습니다마는, 그냥 이렇게 기다리실 예정인지요?”

흥미롭게 안을 들여다보고 있자 GM이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순간.

“…응?”

결계 너머로 무언가 움직이는 게 보인 거 같은데.

“잠깐만.”

“…예?”

“조용히.”

이내 GM의 입을 다물게 하고서 숲속을 빤히 응시하자, 요정 하나가 수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포착됐다.

미성년자거나 갓 성인이 됐을 법한 앳된 얼굴을 한 은발의 남자 요정.

“이쪽으로 오는군.”

요정이 천천히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온다.

“보이는 건가……?”

너무 정확한 방향이라서 문득 그런 생각도 들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럴 가능성은 낮아보였다.

그야 결계 밖에 사람이 있는 걸 봤으면 저렇게 평온한 표정일 리가 없거든.

스윽.

이내 결계 앞에 도착한 요정이 손을 내밀어 보이지 않는 벽을 어루만지듯 쓸어내린다.

그리고 뭐라 중얼거리는데…….

“…….”

결계 때문에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한데 GM에게는 독순술의 재주도 있었을까.

“갑갑하다고 하는군요.”

“……눈으로 말을 알아 들을 수가 있는 거냐?”

“살다보니 익힌 잔재주입니다. 그리 어려운 단어도 아니었고요.”

겸손하게 미소 짓는 GM이었지만 나는 정말로 놀랐다.

그도 그럴 게, 우리는 플레이어 출신이니까.

말하고 듣는 데 문제가 없는 것과 입술을 읽어 말을 이해하는 건 다른 종류의 이야기였다.

“오, 지금은 ‘밖에는 뭐가 있을까…’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렸습니다.”

옆에서 말을 해석해 준 덕분에 요정이 어째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이해가 됐다.

“호기심은 사람이 가진 욕구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이지요. 어쩌면 언젠가 저 소년이 이름을 떨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는 감당할 수 있는 것에만 의문을 갖는다고 하더니?”

“예. 그렇기에 위대하다고 말한 겁니다. 저 같은 사람들은 그저 궁금해할 뿐이니까요.”

거,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 봐 말은 잘하네.

“그런 의미에서 남작님께서도 호기심이 다 풀리신 거라면 슬슬 다시 이동하는 게 어떨는지요?”

“그래, 가자 가.”

GM의 요구에 피식 웃어넘기기도 잠시.

나는 결계 너머의 은발 요정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한 뒤 등을 돌렸다.

‘쓰읍, 얼굴이 조금 익숙한 거 같기도 한데…….’

뭐, 인연이 있으면 언젠가 또 만나겠지.

***

늘 그렇듯, 돌아가는 길은 왔던 길의 역순이었다.

다만 며칠간 낯선 장소를 돌아다니며 친밀감을 쌓은 덕인지, 올 때와 달리 자잘한 대화가 끊기지 않았다.

얘도 이제 나를 그렇게까지 어려워하지 않는달까?

“그러는 남작님께서는 어떻습니까? 도시 내에는 수많은 염문이 들려오던데.”

“다 헛소문들이다.”

“흐음, 제가 듣기로는 딱 한 분은 진짜였던 거로 알고 있—.”

“……아주 편해졌군?’

“하하… 죄, 죄송합니다.”

가벼운 대화를 하는 걸 넘어 녀석도 그동안 내심 궁금했을 사적인 질문들을 툭툭 던져왔다.

“저… 남작님은 목표가 뭡니까?”

“시비 거는 거냐?”

“그,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궁금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항상 위험한 일에 앞서고, 바쁘게 지내시지 않았습니까.”

“……없다.”

“예?”

“거창한 목표 같은 건 있었던 적이 없다는 뜻이다. 나, 그리고 내 사람들이랑 같이 살아남는 것. 목표라 한다면 그 정도뿐이겠군”

물론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인 법.

나에 대해 솔직하게 답해준 만큼, 나도 녀석에게 사적인 질문들을 계속 던졌다.

“그러는 너는 목표가 뭐냐?”

“저 말입니까?”

“그래. 나한테 그런 걸 묻는 걸 보면 너는 명확한 목표가 있을 거 같은데.”

“저는…….”

목표에 대해 묻자 GM은 살짝 망설이는 듯하다가도 이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꼭… 언젠가 꼭 다시 한번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같은 플레이어로서 해석해보자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게 목표이며 그 동기가 바로 ‘누군가’라는 뜻.

‘가족이려나……?’

알 수 없지만, 나는 짐짓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누군진 몰라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겠다.”

“…감사합니다.”

“힘내라.”

이내 응원의 의미로 어깨를 팍팍 쳐주자, GM이 나를 피해 도망가다가도 웃긴지 피식 웃는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문화 차이’만 뺀다면… 얀델 남작님께서는 참 괜찮으신 분 같습니다.”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말을 던진다.

뭐, 이해 못할 건 아니다.

현지인들도 학을 뗄 정도이니 플레이어 눈엔 내가 얼마나 이상하게 보이겠는가.

‘그래도 좀 억울하긴 하네.’

자기들도 바바리안으로 스타트를 했으면 달랐을까 봐?

백이면 백, 나랑 똑같이 행동했을 거다.

……아마도.

“그럼 오늘은 여기서 하룻밤 쉬었다 가는 거로 하지.”

“예. 좋습니다.”

날이 적당히 어두워진 후에는 나무가 좀 적은 공터에 대충 모포를 깔고 누웠다.

‘이 속도면 내일 저녁 전에는 도시로 돌아갈 수 있겠네.’

눈을 꾹 감고 내일 일정이나 한 번 더 점검하던 때, 돌연 옆에서 감상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늘 말입니다.”

“……?”

“하늘은 어느 세상이든 똑같군요.”

사실 나도 야영 중에 자주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냥 밤에 누워서 하늘만 보고 있으면, 내가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겠거든.

다만 막상 뱉고 나서 아차 싶었는지 GM이 묻지도 않은 부연설명을 덧붙인다.

“아, 성벽 안이든 밖이든 말입니다.”

“그래. 정말 다를 것도 없군.”

“…….”

그렇게 잠시간 말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간이 이어졌다.

허구한 날 마탑에 박혀 살았던 탓일까?

녀석은 이렇게 밖에서 노숙하고 그런 과정 속에서 왠지 옛생각이 나는 듯했다. 녀석도 한때 미궁에 들락날락할 때는 이런 게 일상이었을 테니까.

“남작님.”

“왜 부르냐?”

“제가 처음 들어간 학파에 대해 궁금해하셨지 않습니까?”

“그랬지.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선을 긋는 바람에 자세히 묻진 못했지만.”

근데 왜, 이제 말할 생각이라도 든 거냐?

툭 던지듯 말하자 GM이 씁쓸하게 웃으면서도 딱 잘라 답했다.

“예, 그리 재밌는 이야기는 아니지만요.”

아무래도 녀석에게는 오늘이 그날인 거 같았다.

누구라도 좋으니 말을 하고 싶은 그런 날.


24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63화 24

663화 동행 (2)

“전 늦깎이 마법사였습니다.”

GM의 이야기는 그 첫 문장에서 시작되었다.

“스무 살. 사실 그 늦은 나이에 마탑에 들어선 것 자체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지요. 당연한 말이지만 적응하는 게 몹시 힘들었습니다.”

뭐, 그럴 것이다.

그도 그럴 게, 레이븐처럼 어렸을 때부터 마탑에 들어간 엘리트들은 저런 늦깎이들을 싫어하거든.

물론 늦깎이보다 더 싫어하는 게 바로 드왈키 같은 비전공 마법사들이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라…….

‘늦깎이였다고……?’

암만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데?

얘가 지금 나한테 구라를 치는 건가?

그도 그럴 게, 분명 과거 시절에 만났을 때 이놈은 1년 차에 ‘6등급’ 마법사라고 했었다.

[운 좋게 등급만 높을 뿐, 아직 마법도 제대로 못 써서 매일 긴장한 채 살아가지만요······.]

이런 말까지 덧붙인 탓에 나는 마법사의 몸에 빙의를 해 버린 탓에 생긴 문제겠거니 짐작했었다.

한데 그게 아니었다고?

‘일단 들어 보자…….’

만약 사실이라고 하면 정말 특이한 케이스였다.

나중에 고스트 버스터즈에서 플레이어들과 교류를 하며 알게 된 사실인데, 심연의 문을 넘을 때 마법사를 키웠던 애들은 대부분 마법을 익히고 있던 상태로 시작했으니까.

우리 클랜의 베르실 고울랜드만 해도 그렇다.

‘걔도 스무 살이 되기 훨씬 이전에 마탑에서 마법을 수련하던 신분이었지.’

그렇다면 GM은 어쩌다 마법사가 되려 했던 걸까.

법사 스타트가 아니면 그냥 탐험가가 되어서 정수를 먹는 게 훨씬 더 성장하기 편했을 텐데.

“한데 그 나이에 마법을 배운 이유가 따로 있나?”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실은 마법사가 될 생각은 없었습니다. 단지 탐험가가 되어야겠다 싶었지요. ”

“응……?”

“물론 위험한 미궁 내에서 마물들과 몸을 부딪치는 건 제 성향에 맞지 않아서 마법사가 제격이기는 했습니다마는……. 남작님께서도 이리 말할 정도니,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지 않습니까? 스무 살이 넘어 마법을 익히려 한다는 게.”

“…그렇긴 하지.”

“원래는 활을 배우려 했었습니다. 석궁 정도라면 저라도 잘 다룰 수 있을 거라 판단했었지요.”

희망 직업이 궁수였다라…….

더욱더 궁금해진다.

궁수를 목표로 하던 애가 어쩌다 법사가 됐을까.

“무일푼 신세에서 석궁 하나라도 사려면 돈부터 벌어야 했습니다. 성인이 되자마자 거리에 나와서 안 해 본 일이 없지요. 한 번은 대장간에서 일자리를 얻은 적도 있었는데…….”

놀랍게도 철을 두들기던 그 시절, GM의 마법사 루트가 개방됐다.

운명처럼 첫 학파의 마스터를 만난 것인데…….

“마스터는 제가 남는 시간에 만든 장난감을 보고 흥미를 느끼셨습니다.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다며 저를 따로 불러냈고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마스터는 GM이 만든 장난감 설계 도면의 정밀함.

그리고 상상력에 대해서 감탄을 거듭했다.

‘뭐, 그렇겠지. 얘는 현대인이니까.’

일종의 현대인 치트키라고 해야 하나?

가끔 소설 같은 거 보면 있잖아.

이세계에 떨어진 공돌이가 뭐 하나씩 만들 때마다 주변인들이 엄청나게 감탄하는 그런 거.

“그렇게 마법을 배울 수 있게 된 거군?”

“예. 마이레타 학파는 풍 속성 마법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학파였지만, 당대 마스터였던 스승님께서 마공학, 마법진 등에도 관심이 많았던 덕분에 제가 운 좋게 눈에 띌 수 있었지요.”

“…그런 사연이 있었군.”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할 자세를 유지하자 GM도 다시 이야기를 재개했다.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제게 마법이 딱 적성에 맞더군요. 스승님의 가르침 하에 정말이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실력이 늘었습니다. 덕분에 알게 모르게 미움을 많이 샀지요.”

GM의 성장 속도는 마탑 내에서도 유례없을 정도로 폭발적이었다.

“그야 20살의 나이에 입문해 1년 만에 6등급으로 승급한 경우는 마탑의 긴 역사를 살펴봐도 존재치 않았으니까요.”

허… 진짜 1년 만에 6등급을 찍었던 거야?

아니, 잠깐만 그럼 그때 ‘마법을 못 쓰는 반쪽짜리 마법사’라고 했던 건 뭔데?

공교롭게도 머지않아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이 GM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반쪽짜리 마법사였습니다.”

“……?”

“아십니까? 마법사들 간에는 분야가 너무나도 달라서 공격 마법 하나 외울 줄 몰라도 고등급의 마법사가 될 수 있습니다.”

GM이 바로 그 케이스였다.

마공학 및 마법진의 연구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인 GM은 화염구 마법 하나도 다루지 못하는 채로 6등급 마법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마법사들은 늘 제게 시비를 걸어왔고, 저는 늘 긴장하며 피해 다녀야 했습니다. 아아… 그 시절 마탑은 정말 야생 그 자체였지요.”

“한데 그럼에도 스승님께서는 제가 다른 마법을 익히는 걸 달갑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제 재능이 마공학에 있다며, 그런 곳에 낭비할 시간이 없다고 하셨죠.”

“제 거듭된 요청에 다른 마법들도 하나둘 익히기 시작했으나, 늘 주된 공부는 마공학이 됐습니다. 그 시기 동안엔 하루 2시간 이상을 자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힘들었지요.”

그래도 GM은 해냈다.

마공학이 재밌던 것도 있었고, 스승에 대한 감사함도 있었다.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때는 스승님이 제 아버지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없었거든요.”

가스라이팅을 단단히 당하던 GM은 탐험가의 길에서는 점점 멀어지는 듯했지만, 그럼에도 꿋꿋이 그 생활을 버텨 갔다.

그러나 ‘버틴다’는 건 언젠가 한계가 찾아온다는 것과 같은 의미.

“결국 제가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습니다. 동료를 직접 모집해 탐험가가 되었고, 그 뒤로는 학파에 돌아가지 않은 채 몇 년을 보냈습니다.”

단지 탐험에 도움이 되는 마법들 공부의 비중을 높였을 뿐, 그러면서도 GM은 마공학 공부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유르벤 하벨리온이란 이름을 가진 마법사가 탐험가로서도 나름 명성을 얻게 되었을 무렵.

“그때 그 사건이 터졌습니다. 어쩌면 남작님께서도 소식을 들어 보셨을지 모르겠지만… 제 스승님께서 금지된 마법에 손을 댔습니다.”

마법사들의 금기로 여겨지는 금지된 마법.

GM의 스승이 바로 그 마법에 손을 댄 사실이 발각되며 왕가군이 들이닥쳤고, 스승은 그 자리에서 사살당했다.

“학파의 모든 마법사들이 몇 달 동안 갇혀 지내듯 지내며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중에는 스승님과 오랜 시간 연구를 했던 제가 가장 많은 조사를 받았지요.”

조사실에 갇혀 매일매일 진술을 이어 가던 GM은 우연히 알게 되었다.

스승이 연구한 금지된 마법이 무엇이었는지.

“충격이었습니다. 믿기지 않았죠.”

“…대체 뭐였기에?”

“스승님께서는 ‘영혼 이식’과 관련된 마법을 연구 중이었습니다.”

사람의 혼을 사물에 불어넣어 마도구로 바꾸겠다는 목표로 진행된 마법 연구였다.

생물적 한계를 벗어난 의식 개체를 영원한 시간 동안 학습시킬 수 있다면 비약적인 발전이 있으리라 여겼다던가?

‘이거 완전 인공지능 딥러닝이잖아?’

그런 생각을 하며 신기해하고 있을 때였다.

“이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재능’이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이식될 영혼이 얼마나 총명한지에 따라 학습 속도가 정해질 거라 여겼고, 그에 따라 여러 후보들을 추려 놨더군요.”

그제야 나도 알 수 있었다.

GM이 어째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했는지.

“조사관이 보여 준 계획서에 적힌 후보들 이름 중, 제가 가장 첫 번째에 쓰여 있더군요. 등급이라도 매겨 놨는지 이름 뒤에 적힌 숫자도 제가 가장 높았고요.”

부모처럼 따르던 스승의 배신.

“이후로는 뭐… 그렇게 학파 전체가 사라졌고, 저도 어쩌다 보니 제 학파를 세우게 됐습니다. 학파가 점점 커지면서 일이 바쁘다 보니 직접 미궁에 들어가는 일도 줄어들었고요.”

이후로는 대충 어떻게 지냈는지 알 것 같다.

커뮤니티 관리나 하면서 학파를 키우고, 왕가랑도 비밀스러운 정치적 소통을 했을 테지.

이 지긋지긋한 세상을 떠나 돌아가겠단 목표로.

“그래서… 어떠셨습니까? 제 이야기는.”

이내 GM이 어딘가 후련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 짧게 답했다.

“확실히 재미없는 얘기긴 했다.”

“…아하하, 그렇습니까?”

누가 봐도 어색하게 들리는 웃음.

다만 그냥 공감하며 같이 슬퍼해 줘 봤자 괜히 분위기만 이상해질 뿐이다.

그게 상대방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 믿지 않고.

“그래도 잘됐지 않냐?”

“예?”

“널 배신한 놈이 깔깔 웃으며 잘사는 게 아니라 불쌍하게 뒈졌으니까.”

그 말에 GM은 일순간 얼빵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크게 빵 터졌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아하하하, 그렇죠. 예. 그렇게도 볼 수 있지요…….”

소리까지 내 가며 웃던 GM이 돌연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저도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었으면 진심으로 참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뭐… 사람 마음이 참, 말대로 되지 않기는 하지.

***

GM과의 진솔한 대화가 있었던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우리는 서둘러 지하 통로로 이어지는 동굴로 향했다.

그리고 날이 저물 무렵에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다만 문제는…….

“오랜만에 이런 시간을 갖는 것도 나쁘진 않군요. 탐험가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습니다. 감사합… 아니,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거, 그런 말은 도시로 돌아간 다음에 하는 게 국룰이거늘.

갑자기 저런 말을 하니까 뭔가 사건이 생길 것—.

“…멈춰라.”

이내 불안한 마음에 습관적으로 주변을 쓱 둘러보던 나는 즉시 이동을 멈추었다.

“왜 그러십니까……?”

“조용.”

목소리를 내리깔자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긴장한 얼굴로 지팡이를 꽉 쥐는 녀석.

‘왜 마법사들은 다 드왈키스러운 거지?’

불현듯 그런 의문이 들지만, 당장 중요한 건 아니니 동굴 입구를 살피는 데 집중했다.

[왔다 감.]

[대한건아 이백호.]

이전에 지나치며 발견했던 이백호의 낙서.

그 아래에 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흔적이 새겨져 있다.

[Rafdonia’s king, Mother fucker.]

고스트 버스터즈 내에서는 밈처럼 쓰이기도 했던, 커뮤니티 활동 경험이 있는 플레이어라면 결코 모를 수 없는 그 문장.

쓴 게 누구인지는 빤하다.

이백호, 그놈이 돌아가는 길에 심심해서 썼겠지.

“저, 저건……!”

“무슨 문자인지 알고 있는 건가?”

“…악령들이 쓰는 문자인 거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 보니 그 위에 적힌 문자도 그들이 쓰는 문자 중에 하나인 거 같군요.”

악령이라는 걸 밝힐 수 없기에 당황하며 변명의 말을 이어 가는 GM.

평소였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곤란할 질문을 던지며 놀렸을 테지만, 애석하게도 그럴 여유는 없었다.

“어찌 됐든 선객이 있었던 거 같군. 일단 이곳에서 멀어진다.”

“예……?”

“혹시라도 마주쳐서 좋을 게 없지 않나. 내가 밖에 나온 게 도시에 알려지면 곤란하니.”

“아…….”

실상은 이백호 놈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한 말이지만, 진상을 모르는 GM은 순순히 납득했다.

따라서…….

스윽.

의사소통이 끝나자마자 천천히 뒤로 물러선다.

왔던 길 그대로, 동굴의 반대편 방향을 향해.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빠르게 물러나며 이윽고 등을 돌리려던 찰나.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동굴 안에서 한 남성의 괴성이 들려온다.

그 괴성은 비명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씨바아아아아아아아알!!”

분에 못 이겨서 내지르는 소리에 가깝달까.

놀랍게도 메아리치듯 들려오는 그 괴성은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는—.

“들리냐? 너 근처잖아! 들리냐고!”

이내 동굴 안에서 한 사내가 눈으로 좇기도 어려울 만큼 빠른 속도로 빠져나오며 소리친다.

‘…이백호?’

역시나 소리의 주체는 이백호였다.

하나 여기서 또 문제는…….

“잡히기만 해 봐! 어? 잡히기만 하면 내가 아주 그냥—.”

동굴에서 빠져나온 이백호가 가속도를 붙인 그대로 크게 점프했다는 것.

그리고.

“…….”

“…….”

그 상태에서 우리 둘과 눈이 마주쳤다는 것이다.

툭.

이내 제트기처럼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던 이백호의 몸체가 맥없이 떨어지며 지상에 착륙한다.

“…어, 왜 남작님이 얘랑 있어.”

평소답지 않게 당황한 표정을 고스란히 내비치는 이백호.

다만 그 표정이 악귀처럼 변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설마… 둘이서 한 짓이에요……?”

둘이서 한 짓이라니……?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이백호가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소리쳤다.

“뭘 모르는 척이야! 돌아가는 마법진 부순 거, 둘 짓이냐고!”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25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64화 25

664화 동행 (3)

이마 위로 돋아난 혈관.

잔뜩 흥분한 호흡.

아랫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꽉 쥔 제스처까지.

누가 봐도 머리에 열이 바짝 오른 분노 상태의 이백호를 보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낯설다’였다.

“…응? 왜 대답을 안 하지? 진짜인가 보네?”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늘 안하무인에 하고 싶은 건 전부 해야만 되는 충동 조절 장애가 있던 이백호다.

한데 왜 화를 내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

곰곰이 생각하고 있자니 머지않아 답이 나왔다.

‘그러고 보면… 없었네.’

놀랍게도 이백호는 그동안 진지하게 화를 냈던 적이 없었다.

서로 죽이니 뭐니 투닥거리긴 했어도, 그건 일종의 역할 놀이였다고 해야 하나? 위협해야 할 이유가 있었기에 그리 행동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하, 진짜 이렇게 엿을 먹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번에는 그것들과는 조금 다르다.

이백호는 내가 본인을 ‘공격’했다고 인식했고, 이에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얼른 정신을 차려야 했다.

그야 내가 한 짓도 아닐뿐더러…….

“잠깐만.”

무엇보다 나도 서둘러 진상 파악을 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돌아가는 마법진이 부숴졌다고?”

이 말이 사실이라면 나도 큰 낭패가 아닐 수 없다.

마법진에 복원 마법이 설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복구까지 최소 1년이란 시간이 소요된댔으니까.

“…도망치다 잡혀놓고 오리발 내미는 것 보게?”

“도망치고 있던 게 아니다.”

“그럼 왜 멀어지고 있던 건데?”

이백호의 반문에 GM이 조심스레 껴들었다.

“그건 입구에 선객이 있는 흔적이 있어서 떨어지려 한 것일 뿐입니다. 저와 남작님이 밖에 있던 사실이 알려지면 안 되니.”

“……사실이야?”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정말 누군가 고의로 마법진을 파손한 거라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후… 그렇단 말이지?”

GM의 말에 이백호가 신속하게 흥분을 가라앉혔다.

저 한 마디에 진정할 거면 뭣하러 그렇게 화를 냈는가도 싶지만…….

‘아, 그러고 보니 얘는 거짓말 탐지가 되지.’

나한테는 통하지 않았더라도 GM에게는 그 이능이 똑바로 작동했을 터.

그런 생각을 하던 때였다.

“백호 씨, 저들의 말은 사실일 겁니다.”

이백호를 뒤쫓아나온 궁수가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의 무고를 지지한다.

“저 안에서 났던 향과 저 둘의 향은 전혀 달라요.”

“…그래?”

궁수의 말에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서는 이백호.

“저쪽으로 향이 이어집니다.”

“오케이, 접수.”

이내 궁수가 말한 지점을 향해 이백호의 신형이 고무줄처럼 튕겨져나간다.

화풀이 상대가 되었다가 제대로 된 사과도 받지 못한 격이지만…….

“우리도 가보지.”

“예……?”

일단 나도 GM을 집어들고서 이백호가 향한 지점으로 달려나갔다.

그야 우리도 같이 확인해야 할 거 아닌가.

어떤 개자식이 이런 짓을 벌인 건지.

타닷, 타닷-!

낼 수 있는 최대 출력으로 숲속을 내달리고 있자니, 어느새 금방 뒤따라온 궁수가 내 옆을 가로질러 추월한다.

근데 그냥 조용히 가면 될 것이지.

“…실례.”

싸가지가 없는 건 민캐들의 종특인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한참 달려나가고 있자니 어느 한 수풀가에 멈춰 있는 이백호와 궁수가 보인다.

둘은 허리를 굽힌 채 아래를 살펴보고 있었다.

“아주 작정한 놈들 같지?”

“예. 우리를 콕 짚어 노린 계획으로 예상됩니다.”

“씁, 그럼 우리 정보가 샜다는 건데……. 대체 누구지?”

“구 노아르크 성채에서 남작 일행과 마주치지 않았습니까. 어쩌면 그쪽에서 정보가 퍼져 나간 걸 수도 있—.”

“지랄 마. 딱 봐도 우리 쪽 문제니까. 남작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글쎄, 무슨 상황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누군가를 노린 거라면, 내가 아니라 이백호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아래는 뭐냐 대체?”

“아, 와서 보실래요?”

이내 이백호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가자 수풀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한 구의 시체가 모습을 보인다.

온몸이 녹아내려 거의 반쯤 뼈를 드러내고 있는 끔찍한 형태의 사체.

“…자결이겠군요.”

베테랑 마법사답게 시체를 보고도 별 미동도 않던 GM이 주변을 쓱 훑어보며 중얼거리자, 이백호가 옳다구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치? 역시 너도 똑같이 생각하는 거지?”

“…이런 식의 꼬리 자르기는 흔한 수법이니까요.”

“달리 알아낸 건 뭐 없고?”

“……일단 마법사는 아닐 겁니다.”

“그렇겠지. 골격 구조상 마법사는 왼쪽 늑골이 좀 더 튀어나오기 마련이니까.”

“예. 심장이 일반인들보다 훨씬 비대하기 때문에 생기는 특징이지요.”

둘은 상식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으나,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왼쪽 늑골이 크다라…….’

왜 그런지는 몰라도 기억은 해둬야지.

언젠가 혼자 있을 때 쓸모가 있을 수도 있으니.

“제 생각에는 함께 온 마법사는 돌아가고, 여기 이자가 마법진을 훼손했을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증거 인멸을 위해 여기까지 와서 혼자 죽었고?”

“예. 여기 나뭇잎에 묻은 황색 가루를 보니, 강염산 열매 가루를 사용한 듯하군요. 아, 참고로 강염산 열매 가루는 흔히 ‘푸른 저주’라 부르는 물건의 주요 성분 중 하나인데…….”

“알고 있어. 왕가에서 자주 쓰는 물건이잖아?”

순간 날이 선 듯 차갑게 내려앉는 이백호의 목소리.

“……정말 왕가가 배후인 거라면, 이 물건을 쓰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거야 모르지. 역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걸 노렸을 수도 있으니까.”

“…….”

어찌 됐든, 상황을 정리해보자면 간단하다.

이백호든, 나든.

여기 이 이름 모를 시체 아저씨는 우리를 골탕 먹이기 위해 마법진을 파손했다.

그 말인즉슨.

“하, 조졌네 이거. 할배 말로는 1년은 족히 걸릴 거라던데.”

우리들은 복구가 끝날 때까지 좋으나 싫으나 성벽 바깥에서 지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

“여기서 더 얻을 건 없어 보이는데, 우선 아까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게 어떨는지요? 저도 마법진을 한번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일단 GM의 요구에 우리들은 다시금 동굴 입구로 돌아왔다. 참고로 입구 앞에는 이백호의 동료들이 대기하고 있던 상태였는데…….

“할배만 따라오고 나머지는 여기에 있어. 오케이?”

“그래, 오케이올시다! 그 누구도 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할 테니 걱정 마시오!”

문지기를 포함해 궁수, 의문의 신입.

이 셋은 동굴 입구에서 대기하도록 하고서 나와 GM, 이백호와 파멸학자. 이렇게 2:2 구도로 동굴 안에 진입했다.

“흠, 어쩌면 우리가 이 친구의 운명에 휘말린 것일지도 모르겠군.”

사정을 들은 파멸학자가 의미심장한 말을 한 번 중얼거릴 뿐 말이 없었고, 나도 GM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

“…….”

거, 분위기 진짜 어색하네.

터벅, 터벅.

이백호도 뭔가 생각할 게 많은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중이었고, 결국 이러한 불편한 침묵은 마법진이 있는 곳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정말 철저하게 박살을 내버렸군요.”

다이너마이트라도 터트린 듯 곳곳에 파인 자국과 그을음이 남아 있는 현장.

“할배는 꼼짝없이 기다려야 할 거라던데, 네가 보기엔 어떻지?”

“…저 역시 비슷한 의견입니다. 복원력을 향상시킬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뭐? 방법이 있다고? 일단 말해봐.”

“현재 상태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한—.”

“아, 판단은 내가 할 테니까 일단 말해보라고.”

이백호의 강압적인 말투에 인상을 찌푸리기도 잠시, 이내 GM이 필요한 물품들을 하나씩 말했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는지 알 수 있었다.

엘더리치의 포스코어.

소울윈더의 마력핵.

구울로드의 생명석 등등.

말하는 모든 준비물들이 전부 다 미궁에서만 구할 수 있는 부산물들이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마석은 갖고 다니더라도 그런 부산물들을 챙겨 다닐 이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 어찌 된 게 전부 다 매니악한 것들밖에 없냐. 오우거 힘줄처럼 잘 팔리는 부산물은 많이 챙겨 뒀는데.”

“……그러니까 말씀드렸잖습니까. 지금 상태에선 사실상 불가능한—.”

“응? 그렇다고 아예 불가능하진 않은데?”

능청스러운 이백호의 말에 GM이 고개를 갸웃했고, 이에 파멸학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신 설명했다.

“하긴, 이번이 초행이라면 자네들은 아직 보지 못했겠군.”

“……못 보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성벽 밖에도 마물들이 존재하네.”

……이건 또 처음 듣는 얘기네.

***

성벽 바깥에 존재하는 몬스터.

얘기를 들어보니 이 몬스터들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1. 어째선지 라프도니아 근처에는 몬스터가 출현하지 않는다.

2. 처치 시 무조건 부산물을 드롭하며, 왜곡 마법을 걸고 사냥 시에는 정수 혹은 마석을 획득할 수 있다.

3. 몬스터들의 개체 수가 극도로 적은 대신, 지능이 미궁에서보다 월등히 높다.

큰 것만 정리하자면 이렇게 세 가지 정도 되는데, 내가 보기에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2번이었다.

“……처치 시 무조건 부산물을 얻을 수 있다고?”

“그렇네. 미궁과는 완전히 정반대지.”

성벽 바깥의 마물들은 생명이 꺼져도 빛으로 변해 사라지지 않고 육신을 그대로 남긴다.

그리고 이 특징 덕분일까?

“들은 것 중 몇 개는 그냥 귀찮아서 버렸던 건데. 하… 거기까지 또 언제 가냐…….”

이백호 역시 성벽 바깥 생활을 하며 수많은 부산물을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

다만 아쉽게도 자리 문제로 오우거 힘줄 같은 비싼 재료들만 루팅했다고 하는데…….

‘미친…….’

나는 그 말들을 듣고서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잡기만 하면 왜곡이 성공하는 사냥터?’

어느 면에서는 지하 1층의 정수 공장만큼이나 파격적이다.

그도 그럴 게, 여기서 사냥해서 부산물만 팔아도 경제적으로 엄청난 이익을 남길 수 있을뿐더러…….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노가다를 1트로 끝낼 수 있다고?’

내게 이 사실은 너무나도 매력적이다.

그야 바바리안은 마법사들만큼이나 ‘부산물’에 환장하는 종족이니까.

‘혼령 각인’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항상 몬스터의 부산물이 필요하다.

그 말인즉슨.

‘9단계 재료까지 날먹이 가능할 수도 있겠는데?’

성벽 바깥에 고립된 것은 불행이지만, 그래도 오랜 세월 정체되어 있던 혼령 각인 레벨을 올릴 절호의 기회임은 틀림없—.

“저기 남작님? 뭔 생각을 하기에 그렇게 실실거리고 있어요?”

“……아무것도.”

“자, 그러면 일단 나가죠? 이따 동료들 인사나 제대로 시켜 줄게요. 어차피 한동안은 같이 다녀야 할 거 같은데.”

같이 다녀야 한다라…….

“…알겠다.”

상대가 이백호인 만큼 불안한 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냉정히 따져보면 같이 다니는 편이 옳았다.

일단 바깥 세상에 관해서는 이놈이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을 테니까.

당분간은 따라다니는 게 훨씬 합리적이란 판단.

“할배랑 나, 그리고 여기 아우레스는 저번에 인사를 했으니 필요없을 테고…….”

이내 동굴 바깥으로 나온 이백호가 간략하게나마 동료들을 소개해줬다.

“여기는 우리 궁수. 이름은 레이튼 브라이엇.”

종족은 인간이지만, 실력은 어느 요정을 데려와도 밀리지 않을 것이라던가?

아, 물론 날 보더니 뒤에 말을 덧붙이긴 했다.

“아… 그래도 남작님네 요정 활잡이한테는 안 되긴 하겠네.”

암, 정령왕도 부릴 줄 아는 데다가 계층정수까지 먹인 애를 어떻게 이겨?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평소에 칼스타인 양에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 반갑다.”

브라이엇이 수줍게 내민 손은 그냥 싹 무시하며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그야 나도 이 궁수 놈에 대해서는 미샤에게 들은 게 있어서 별로 궁금한 게 없거든.

저 의문의 신입과 달리.

“아, 그리고 여기는 우리 팀 힐러인데…….”

“제 소개는 제가 할게요.”

이내 로브를 뒤집어쓴 신입이 이백호의 말을 끊으며 앞으로 나섰다.

얼굴을 보여 줄 생각은 없는지 여전히 로브를 푹 눌러쓴 상태였는데…….

‘…긴가민가했는데 역시 여자였구나.’

어쩐지 자그맣긴 하더라니.

“제이나예요.”

“……그리고?”

“끝인데요?”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어째선지 저 톡톡 쏘는 듯한 말투에서 레이븐이 떠오른다.

이건 뭐… 키 작은 애들 특징인가?

피식 웃고 있자니, 이백호 팀의 탱커 렉 아우레스가 호쾌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으하하하핫!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그간 잘 지내봅시다! 남작!”

……그나마 얘는 좀 친하게 지낼 수 있을지도.


23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65화 23

665화 동행 (4)

성벽 바깥에서 시작된 불편한 동행.

다만 그러한 동행의 장점도 분명하게 있었다.

그야 여정을 시작하기도 전에 꿀단지 같은 정보가 쏟아져 나왔거든.

“여기가 어디냐라… 음, 일단 저희가 만든 지도나 한번 보실래요?”

우리보다 훨씬 더 일찍 성벽 바깥에 진출한 이백호.

하나 애석하게도 녀석이 만든 지도의 퀄리티는 그리 좋지 않았다.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기 이전에 제작된 지도 같은 느낌이라 해야 하나?

뭐, 내가 직접 했다고 해서 퀄리티가 더 좋았을 거 같진 않지만.

아무튼.

“…여기 이 테두리 선은 뭐냐? 뭔가 눈에 익은데.”

현재 진행형으로 제작되는 중인 지도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테두리가 그어져 있었다.

마치 세계 지도에 표시된 국경 같은 느낌.

“아, 그거는 7층의 암흑 대륙이랑 일치하는 지형을 표시해둔 거예요.”

…어쩐지 테두리 선의 모양이 익숙하더라니.

암흑 대륙 모양이었구나.

“신기하죠? 원래 미궁에서는 여기부터 해안선이라 넘어가지 못하는 곳인데, 여기서는 그 너머도 땅이 이어져 있어요.”

‘신기하죠?’ 라는 말에 아무런 반박도 못할 만큼, 이백호가 보여준 지도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광대 놈은 바깥 세상이 암흑대륙과 꼭 빼닮았다고 했지만, 사실 그건 극히 일부에 불과할 뿐이었달까?

암흑 대륙은 대륙 남동부에 위치했고, 대륙의 북부 서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땅으로 가득했다.

“여기 동그랗게 표시해 둔 곳은 뭐지?”

“아, 그거요? 섬이요.”

“섬……?”

“6층에 그 섬 하나 있잖아요. 섬 중심부에 웬 알 수 없는 이상한 비석 하나 세워져 있는.”

“스타넬스 섬 말이냐?”

“아, 맞아 맞아 거기. 거기 섬이랑 지형이 굉장히 유사해요. 출현하는 마물도 일치하고.”

“그렇단 말이지…….”

기묘한 우연… 이라고 넘기기에는 뭔가 찝찝하다.

바다 한복판에 있어야 하는 섬이 대륙에 붙어 있는 것. 이것도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세계의 비밀과 얽혀있는 걸까?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점점 지식이 늘어간다.

“그럼 여기는 대수림 동부 지역이겠군.”

이백호가 ‘정확히는 대수림 동남부죠?’라며 깐족거리긴 했으나, 이는 그냥 한 귀로 듣고 흘리면 될 사소한 부분이었다.

“그래서 지금부터 어디로 가려는 거지?”

“여기요.”

이내 이백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지점은 암흑 대륙의 바깥에 있는 미지의 땅이었다.

“여기서 아까 쟤가 말한 재료 중 대부분을 얻을 수 있거든요.”

“얼마나 걸리지?”

“걸어서는 한 반년쯤?”

“……뭐?”

그럼 갔다 오면 이미 1년이 지나 있단 거잖아.

이게 무슨 헛짓거리야?

인상을 찌푸리며 쳐다보자 이백호가 장난스럽게 웃는다.

“걱정 마요. 중간에 포탈을 탈 거니까. 아마 한 달 안에는 도착할 걸요?”

“포탈……?”

이건 또 무슨 소리래?

“라프도니아에 있는 군용 승강장과 비슷한 그런 거예요. 특정 지점과 특정 지점 사이를 연결한 거죠.”

말 그대로 신세계라고 해야 하나?

바깥 세상 얘기는 들으면 들을수록 뉴비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든다.

마치 새로운 게임을 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자, 그럼 슬슬 출발해보죠. 오늘 밤에는 포탈까지 도착할 생각으로 움직일 거니까 다들 잘 따라오시고.”

…이러니까 무슨 버스라도 타는 거 같네.

***

[던전 앤 스톤]에서 ‘시간’은 매우 중요하다.

그도 그럴 게, 미궁에서는 각 계층마다 필드가 폐쇄되는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까.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면 자연스럽게 위층으로 올라가는 게 불가능해지는 것인데…….

후우우우우웅-!

어찌 보면 이것도 민캐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탐험가들은 포지션과 무관하게 자기만의 ‘이동 기제’를 완성해야 하는데, 민캐들은 대부분 자연스레 완성이 된다.

힘캐와는 다르게.

‘하… 나만 또 이렇지.’

쿠웅-! 쿠웅-!

육중한 소리를 내며 숲속을 내달리고 있자니 자꾸만 현자 타임이 찾아온다.

그야 나는 아직까지도 이동 기제를 못 맞췄거든.

뭐, 그래도 지구력이나 기력 수치가 높아서 쉽게 지치진 않는 게 장점이긴 하지만…….

쿠웅-! 쿠웅-!

이동 속도 자체는 타 직업에 비해 현저히 뒤처진다.

바로 이렇게.

후우우우우웅-!

[히이이이잉-!]

마법사인 GM만 해도 부유 마법과 여러 마법을 접목시켜 빠르게 비행 중이었고, 제이나라는 이름의 힐러는 탈것을 소환해서 편하게 이동 중이다.

그리고…….

‘……뭔가 되게 수치스럽네.’

나는 가장 뒤에서 겨우 따라가고 있는 실정이며, 딱 봐도 일행 전체가 더 속도를 올릴 수 있음에도 내게 맞춰서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암묵적인 배려를 받고 있다고 해야 하나?

“하하하핫! 이것 참 신기하구려! 나보다 몸이 굼뜬 사람을 보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오!”

……빌어먹을.

얘는 뭐 탱커라는 애가 이동 기제를 이렇게 빨리 완성한 거야?

그럴 시간에 더 단단해질 생각은 하지도 않고.

‘쯧.’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앞에서 탈것에 오른 채 편안하게 나아가고 있는 여자를 쓱 훑어보았다.

‘계약마라…… 역시 카루이의 사제가 맞았네.’

탈것을 보고 직업을 알아낼 수 있었지만, 사실 큰 의미는 없었다.

애초에 저쪽에서도 직업까지 감추는 건 어렵다 생각했으니까 이렇게 보여줬겠지.

“후, 그래도 아침 전에 도착하긴 했네.”

늦은 밤을 넘은 새벽이 되어서야 목적지에 도착한 우리는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오늘은 여기서 휴식. 예상보다 마력을 채울 시간이 부족하긴 한데…….”

“일정은 변경하지 않아도 되네. 이제는 하벨리온 군도 있지 않은가.

“오, 그러면 다행이고.”

“하벨리온 군, 이리 와보겠나? 미리 마력 파장을 한번 맞춰보는 게 안전할 듯한데.”

“예? 아, 예……!”

각자 알아서 쉬는 동안, GM은 파멸학자에게 불려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합을 맞췄다.

그리고…….

“잠깐 얘기 좀 할까요?”

소리 없이 다가온 이백호가 나를 외진 곳으로 따로 불러냈다.

“우리 진짜 인연 같지 않아요? 이렇게 형이랑 같이 돌아다니게 될 줄은 몰랐는데.”

“…….”

“아, 소리 새어 나갈 일은 없으니 걱정 마시고!”

“하아…….”

이내 주변을 쓱 둘러보던 나는 한숨을 뱉으며 이백호를 노려보았다.

밖으로 나가는 방법을 이상하게 알려줬던 것부터 시작해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았지만, 일단 당장은 꾹 삼켰다.

“그런데 형, 아까부터 확인하고 싶었던 건데요. GM은 형이 플레이어인 거 모르는 상태인 거죠?”

“그래. 모르니까 지금처럼 그냥 있어.”

“와, 형 정체 알면 쟤 표정 장난 아닐 거 같은데?”

음, 그건 나도 궁금한데 그것 때문에 확인할 수는 없으니 패스.

“나도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괜찮지?”

“네, 하세요.”

이백호의 쿨한 승낙에 나도 주저않고 묻고 싶었던 질문을 꺼냈다.

“노아르크 놈들이 도시 안으로 들어온 거. 그게 다 살아남기 위해서라고 했잖아.”

“그랬죠?”

“정확히 그게 무슨 뜻이냐?”

“아, 그거요…….”

“어차피 나도 이렇게 밖으로 나온 거, 솔직하게 좀 말해봐라. 응? 잿빛으로 변한 세상, 그것 때문에 그런 거냐?”

답답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내비치며 묻자, 이백호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잿빛 세상이라… 이거 되게 시적이면서도 딱인 표현인데요?”

“그런 건 됐으니까 답변이나 해봐라. 응?”

“사실 그건 별로 상관 없어요. 애초에 크게 위험할 일도 아니고.”

“…위험할 일이 아니라니?”

“아무튼, 그건 됐고… 노아르크 애들이 죽자고 도시로 돌아간 이유는 따로 있어요.”

이내 이백호가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본다.

거,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까지 뜸을 들—.

“괴물이 있거든요.”

……응?”

“진짜 진짜 무시무시한 괴물이요.”

그렇게 강조를 해서 말해도 도통 내용을 따라가지 못하겠는데.

얼른 부연 설명을 덧붙이란 시선을 쏘아보내자 이백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서식지는 없는 거 같아요. 어디로 가든 결국 나타났거든요. 한 번 등장할 때마다 아무것도 못하고 수천 명씩 죽는데…….”

“죽는데……?”

“지금까지 알아낸 건 딱 하나예요. 주변에 사람이 많을수록, 그리고 그 사람이 성벽 바깥에 오래 머물렀을수록 놈이 나타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

그 말을 듣는 순간 왠지 모르게 위화감이 들었다.

뭔가 알듯 말듯한 아리송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감각에 사로잡히게 됐을까. 그 이유를 고민하던 중, 이백호가 내게 물었다.

“형, 근데 되게 비슷하지 않아요?”

“……?”

“조건이 충족되면 나타나는 게 꼭, 계층군주랑 비슷한 것 같지 않아요?”

아, 그래.

바로 이거 때문이었다.

***

“그럼 지금도 위험한 거냐?”

“뭐,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죠. 근데 어쩌겠어요? 이미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막혔는데. 우리는 숫자도 적고, 도시에서 나온 지도 얼마 안 됐으니 그걸 믿어봐야죠.”

하…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불안이 가시지 않는다.

그야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확률이거든.

0과 1이 전혀 다른 숫자이듯이.

확률이 아예 0%가 아닌 이상, 확률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한다.

어차피 벌어질 일은 벌어지게 되니까.

‘차라리 안 들었으면 마음이 편했으려나…….’

불현듯 그런 생각도 들지만, 나는 모르고 맞는 것보단 알고 맞는 게 낫다는 주의다.

따라서 그 ‘괴물’에 대해서도 꼬치꼬치 캐물었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막 그렇게 엄청 파괴적이거나 포스 넘치는 그런 건 아닌데…….”

“아닌데?”

“딜이 안 박혀요. 아예 하나도.”

“…응?”

“정말 말 그대로요. 마법을 쓰든, 오러를 쓰든, 스킬을 박든. 전부 면역이에요.”

듣자마자 이게 말이 되냐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처치는커녕, 그 어떠한 방법을 써도 제지조차 할 수 없는 괴물이라니?

“그래서 그놈 별명이 사신이에요. 사신.”

일단 설명만 들어보면 굉장히 잘 어울리는 별명 같았다.

인간이 항거할 수 없는 존재란 점에서 특히나 더.

“그래……?”

“어때요, 좀 등골이 오싹해졌어요?”

음, 글쎄.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두려운 마음만큼 호기심도 무럭무럭 솟아난다.

게이머로서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쓰읍, 분명 뭔가 카운터 칠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그도 그렇잖아?

잡는 게 불가능할 거 같은 기믹을 지닌 몬스터도 결국 대가리를 박다보면 공략법이 생겨나거든.

뭐, 현실에선 무작정 대가리 박는 게 불가하지만.

그래도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생리 현상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인데…….

“잡으면 뭘 주려나……?”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한마디에 이백호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더니, 이내 입을 떡 벌렸다.

“와… 형도 진짜 미친놈이긴 하네요.”

…뭐래.

나만큼 멀쩡하고 건실한 바바리안이 어디 또 있다고.

“됐고, 그럼 그건 어떻게 된 거냐?”

“뭐가요?”

이내 나는 주제를 바꿔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때 1년 뒤에 뭔가 이벤트가 생긴다고 했잖냐.”

“아… 그거요……?”

“잘하면 그때까지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냥 말해주면 안 되냐?”

“안 돼요. 그 전에 돌아갈 수도 있으니까.”

이백호는 내 추가 질문을 딱 잘라 끊어냈다.

다만 그것을 통해서도 알아낼 수 있는 부분이 존재했다.

‘이것 때문에 빡쳤던 거네.’

마법진이 부숴졌을 때, 이백호는 크게 노하며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도시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이는 그 ‘이벤트’와 연관이 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내가 자세한 내용을 모르길 바라는구나.’

녀석은 내가 그 이벤트에 대해서 알면 어떠한 식으로든 방해가 되거나 할 거라 여기고 있다.

쉽게 말해, 해당 이벤트가 나에게 있어서는 안 좋은 이벤트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인데…….

“전 그럼 가볼게요!”

아니나 다를까.

대화가 불편해지는 즉시 이백호가 도망쳤다.

그리고…….

“오, 저 늙은이랑 뭔가 하는 거 같던데, 그건 다 끝난 거냐?”

“예. 파장을 맞춰보는 게 그리 오래 걸릴 일은 아니라서요.”

“그렇군.”

이내 할 일을 끝마치고 돌아온 GM이 조심스럽게 독대를 요청했다.

“혹시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는지요?”

그래, 이번엔 얘 차례구나.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따라가고 있자니 으슥한 곳에서 멈춰선 GM이 음성제어를 켜고서 바로 입을 열었다.

“저 실례되는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만…….”

“됐으니까, 편히 말해라.”

“이백호와는 어떤 관계이신 겁니까……?”

후, 이걸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하려나?


15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66화 15

666화 신세계 (1)

이백호와 무슨 사이냐는 것.

아마 GM 입장에선 지금까지 겨우 꾹 참고 있다가 꺼냈을 질문일 것이다. 아무래도 그동안엔 물어볼 타이밍이 없었으니까.

보니까 어떻게 말을 꺼낼지도 고민한 거 같고.

“그… 따지는 게 아니라, 단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아까 둘이서 얘기를 하러 나가시던데…….”

“그래서?”

“저 남자가 남작님에게는 꼬박꼬박 존대를 쓰는 것도 그렇고… 조금 신기해서 말입니다…….”

사실 이게 결정적이었을 거다.

어째서 그 안하무인인 이백호가 나에게만은 경어를 쓰면서 대우를 해 주는 걸까.

이게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겠지.

‘심지어 얘는 나랑 이백호가 어떻게 처음으로 만났는지도 알고 있고 말이지.’

이백호와의 첫 만남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당시 한스 I로 위장한 채 내게 접근했던 GM과 이백호가 격돌했고, 그때 나는 우연히 그 광경을 목격했다가 불똥이 튀었다.

‘그땐 진짜 뭐 이런 개또라이가 있나 싶었는데…….’

단지 궁금하다는 이유 하나로, 왕가의 기사들이 가득 깔린 곳에서 이백호는 나를 붙잡고 플레이어냐고 물으며 겁박했다.

‘이게 벌써 몇 년 전 일이구나…….’

새삼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걸 느끼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쎄? 딱히 좋은 관계는 아니다. 애초에 놈과 처음 만났을 때는 적이었으니까.”

“흐음, 적 말입니까……?”

“그래, 웬 이상한 놈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더니 나를 죽이려 들었지. 어찌 된 영문인지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졌지만.”

“…그런 일이 있었군요?”

내 진술을 듣고서 전혀 모르는 얘기라는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갸웃하는 GM. 왠지 그 모습이 조금 웃기면서도 티 내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다음에 만난 건 노움트리였지.”

“노움트리… 말입니까…….”

“그래, 동료들과 의뢰차 그곳에 방문했다가 우연히 그놈과 또 마주쳤다. 그러고 나서 이런저런 일이 있었고… 내 동료와도 얽힌 악연이 있었지.”

괜히 어설프게 거짓말을 했다간 모순점이 발견될 가능성이 높기에 나머지는 대충 뭉뚱그려 말하며 축약했다.

어차피 미샤 이야기는 얘도 알고 있을 테니까.

“동료 말씀이십니까…….”

“너한테 자세히 말하긴 좀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거래가 있었고, 지금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상태다.”

“정리가 됐다고 하심은…….”

“일종의 휴전 상태에 가깝다. 놈도, 나도 서로를 건드리면 피를 본다는 걸 아니까. 조심하는 거지.”

그런 내 말에 GM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이백호가?’라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설마 내 무력이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느낌도 있었다.

‘거, 서운하게.’

변명을 하기 위해 어느 정도 각색을 넣은 얘기지만 그렇다고 말 자체가 거짓말인 건 아니다.

일대일로 싸워서 이백호를 이길 자신은 없지만.

반대로 질 자신도 없거든.

아무튼.

“아까 무슨 관계냐고 물었지?”

내 질문을 받고 고개를 주억이는 GM을 보며 나는 그 무엇보다도 명쾌하게 나와 이백호의 관계를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내게 있어서 이백호는…….”

이번엔 딱히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은 서로 이용할 게 있어서 칼을 뽑아 들지만 않고 있을 뿐.

더 이상 헷갈릴 일은 없다.

“언젠가 직접 대가리를 부숴 버려야 할 놈이다.”

이백호는 적이다.

***

“궁금한 건 이게 끝이냐?”

“예……. 아무래도 위험한 자이니까요. 남작님과 그자의 관계를 먼저 인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냐?”

“그자와 한편이 아니라고 하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그자는 얽혀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 인물인지라……. 아, 물론 남작님도 아시는 거 같지만 말입니다.”

마지막에 내가 했던 선언에서 진심을 느꼈을까?

GM은 이백호를 향한 나의 적대감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고, 그 감정에 대해서도 만족해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하긴, 안심하는 것도 당연한가? 지금 여기서 내가 이백호랑 친하다 하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지는 거니까.’

어쨌든, 그렇게 녀석과의 이야기가 마무리된 후.

다시금 자리로 돌아오자 이번엔 이백호가 GM을 불러냈다.

“야, 너 잠깐 나 좀 보자?”

“저, 저 말입니까?”

마치 학교 일진에게 호명당한 듯 어깨를 움찔하는 GM.

녀석이 도움을 바라는 듯 나를 응시한다.

“내 동료는 무슨 일이지?”

“에고, 남작님, 걱정하지 마십쇼. 흠집 하나 안 낼 테니까. 얘가 있어야 마법진도 고칠 수 있는데 제가 그럴 거 같아요?”

뭐, 그럴 걱정은 하지 않는다.

단지 GM이 하도 저런 눈빛을 보내는 탓에 외면할 수 없었을 뿐.

“……보이는 곳에서 대화를 나누도록.”

“네. 그러죠, 뭐. 야, 그러면 됐지?”

“…….”

그렇게 상황이 정리된 후 GM은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놈을 따라갔고, 뭐라 막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중에 시간 나면 독순술이라도 좀 배워 볼까.’

소리가 차단된 탓에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

다만 일단 분위기만 보면 이백호가 뭐라 짜증을 부리고 GM은 어색하게 웃으며 뭐라 변명하고 있는 듯했는데…….

‘그러고 보면 얘네도 마지막이 좋지 않았지…….’

GM은 이백호를 커뮤니티에서 추방했고, 이 때문에 이백호도 녀석에게 앙심을 품은 적이 있다.

뭐, 그 이후로 저 둘이 따로 만난 적이 있는진 알 수 없지만.

‘생각보다 일찍 끝났네?’

의외로 저 둘의 대화는 금방 끝났고, GM이 어딘가 기운 빠진 얼굴로 돌아왔다.

“무슨 얘기를 나눈 거냐?”

“예전에 좋지 못한 사건이 있었어서… 그에 대한 해명을 좀 하느라… 하하하…….”

쯧, 알려 줄 수 없다는 거네.

이건 나중에 이백호한테 따로 물어보든가 해야지.

“그럼 얼른 자자, 이제 좀 있으면 아침이라 얼마 자지도 못하니.”

“예… 그럼 남작님도 쉬십시오.”

이후로는 별다른 일 없이 다들 짧게나마 눈을 붙였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는 바로 이백호가 말한 ‘포탈’을 작동할 준비를 시작했다.

“차원 비석……?”

“비슷하게 생겼죠?”

“혹시 이런 게 대륙 곳곳에 숨겨져 있는 거냐……?”

“글쎄, 더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애초에 이것도 그 의문의 할배가 찾아낸 거라고 해서……. 이거랑 연결된 포탈 말고는 아직 본 적이 없어요.”

의문의 할배라면, 분명 아우릴 가비스를 말하는 걸 텐데…….

“근데 생긴 것만 비슷할 뿐이지 미궁에서 보던 차원 비석이랑은 좀 달라요. 그냥 손대면 열리는 게 아니라, 무조건 마력을 집어넣어 줘야 하거든요.”

음, 그래서 마력 파장이니 뭐니 했던 거구나.

원래 여러 마법사들이 마력을 분담할 때는 평소에 합을 자주 맞췄거나, 미리 준비를 해야 한댔으니까.

“그럼 시작해 보세.”

“예…….”

이내 차원 비석 앞으로 다가간 파멸학자와 GM이 동시에 비석 위에 손을 올린 뒤 눈을 감는다.

그리고…….

후우우우웅-!

눈에 보일 정도로 밀집되어 형형색색의 빛깔을 뿜어내는 마력이 일렁거리더니.

솨아아아아아아아-!

흘러 들어간 마력이 점점 응축되며 평소에 자주 보던 포탈의 형체를 갖춘다.

“먼저 갈 테니 잘 따라 들어오세요. 이 포탈은 5분 정도밖에 유지가 안 되니까!”

포탈이 열리자마자 이백호가 첫 번째 순서로 뛰어들었고, 이백호의 동료들도 자연스레 그 뒤를 따랐다.

“어…….”

“뭐 하냐? 가지 않고?”

“예…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혹시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 일단 GM부터 포탈을 태워 보낸 뒤, 나도 서둘러 그 너머로 들어섰다.

그리고…….

번뜩-!

미궁에서 포탈을 탈 때와 비슷한 부유감이 들며 시야가 회복된다.

일단 신속하게 주변 지형지물부터 확인하려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멍하니 굳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첨탑 형태의 인공 조형물.

사람이 다니기 편하도록 평평하고 고르게 눌러진 흙바닥.

또한 통나무를 베어 만든 집들이 바둑판 배열처럼 열을 맞춰 세워져 있으며, 저 멀리로는 반쯤 무너진 목책이 보인다.

“마을……?”

“아, 말 안 했나? 여기가 바로 노아르크 애들이 정착했던 장소예요.”

노아르크 개척지였다.

***

나와 GM이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 이백호가 어깨를 으쓱하며 다가와 노아르크 개척지에 대한 소개를 시작했다.

“도시에 비할 수는 없지만, 나름 살 만해 보이지 않아요? 집도 있고, 마을 전체를 두른 목책도 있고, 우물도 몇 개나 뚫어 놔서 부족할 일은 없고. 저기 목책 밖엔 작물을 키우던 밭도 있어요. 큰 강은 아니지만, 동쪽으로 가면 강도 있고.”

내 예상과 달리, 노아르크 개척지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제대로 구색을 갖춘 상태였다.

나였어도 여기서 나름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거 같달까?

뭐, 문제는 전에 말했던 그 ‘괴물’이겠지만.

‘완전히 유령 마을이네…….’

마을을 빙 두른 거대한 목책은 반쯤 부서져 있으며, 세워져 있는 집들도 파손의 흔적이 여실하다.

또한 곳곳에서 검게 변색된 핏자국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는데…….

“아, 그리고 이거.”

이백호가 이제 포탈이 사라진 차원 비석을 툭툭 건드리며 말을 잇는다.

“이걸 어떻게 이용해서 미궁으로 가는 포탈도 열던데, 그건 그 의문의 할배만 가능하고 다른 사람은 못 해요. 우리 할배도 어떻게 하는 건지 감도 못 잡더라고요.”

“감도 잡지 못한 건 아니네. 시공간 계열의 마법인 것은 알아냈지 않은가.”

“거, 그게 그거지. 핑계는…….”

이백호가 파멸학자를 놀리듯 말했지만, 사실은 그 아우릴 가비스가 이상한 거다.

7층으로 직행하는 포탈을 연 것도 그렇고.

수만 명을 텔레포트 시킨 것도 그렇고.

뭔가 그 할배는 항상 자기 혼자 이 세상의 규칙을 마음대로 갖고 노는 듯한 느낌이거든.

“그런데 이렇게 마을까지 열심히 지었으면서 미궁엔 왜 그렇게 들어왔던 거냐?”

“그야 얘네도 먹고는 살아야 할 거 아니에요? 보니까 도망칠 때 식량도 제대로 못 챙겨 와서 여기 올 때까지 마물 고기까지 먹었다던데?”

“…밭도 있다고 하지 않았나?”

“에이, 그것도 나중에서야 만든 거예요. 그리고 애초에 밭이라고 해 봤자 시범용에 가깝던데요? 작물도 거의 자라지 않고, 그 많은 사람들이 먹기엔 턱없이 부족했대요.”

“그럼 마석이 필요해서 그랬다는 거군?”

“뭐, 아무래도 그 이유가 가장 크겠죠?”

“다른 이유도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

내가 은근슬쩍 묻자 이백호가 또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한다.

“그, 여기도 마물들이 나타나잖아요? 결국 정수를 안 캐면 언젠가 망할 수밖에 없는 구조예요. 그리고… 왕가가 자기들을 찾아낼지 모른단 불안도 있었을 테고.”

음, 확실히 그렇게 말하니 이해는 된다.

노아르크 개척지는 7계층에 속하는 암흑 대륙의 ‘회색 벌판’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까.

마주치는 몬스터들의 등급도 꽤나 높았을 터.

“아, 물론 그 괴물이 나타난 후로는 전부 다 의미가 없어졌지만요. 몇 번이나 와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니까 그 고집덩어리 성주도 그냥 성벽 안에 들어가자고 마음을 바꾸던데요?”

“그렇군…….”

“아무튼, 그럼 질문은 여기까지만 하는 거로 하고. 얼른 나가죠!”

이후 마을 소개를 끝낸 이백호는 우리를 이끌고 마을 바깥으로 향했다.

그리고…….

“…제가 알던 회색 벌판과는 영 다른 모습이군요?”

허리까지 올라오는 초록색 수풀이 가득한 벌판이 저 멀리까지 펼쳐진다.

“아! 확실히 미궁이 훨씬 더 세기말 분위기가 나긴 하지? 그래도 나오는 마물들은 다 비슷해. 지형 자체도 일치하고.”

“그, 그렇습니까……?”

혼자 중얼거린 말에 이백호가 친절하게 답변을 해 주자 역으로 당황한 듯한 GM.

“백호 씨, 전방에 마물입니다.”

그때 마을을 벗어나기 무섭게 궁수 레이튼 브라이엇이 센서에 뭔가 걸린 듯 경고를 뱉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크와아아아아아앙-!”

수풀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마물이 몸을 일으키며 위협하듯 하울링을 터트린다.

“바이테리온이군요. 등급은 3. 야수종에 속하는 마물입니다. 약점인 속성은 딱히 없으며, 물리 내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가급적이면 마법을 이용하는 편이 유리합니다.”

흡사 백과사전을 읽는 듯한 말투로 설명하는 GM.

얘가 옛날에 탐험가였을 시절에 어떤 느낌으로 지냈는지 대충 알 것도 같다.

‘편리하긴 하지만, 그래도 같이 다니면 조금 피곤했을 스타일이네.’

아무튼, 그래도 GM의 설명에 보충 설명을 더하자면 ‘바이테리온’은 회색 벌판에서만 가끔 발견되는 희귀 몹이다.

그리고…….

“운이 좋군.”

불사자 각인의 8단계 재료를 뱉는다.


18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67화 18

667화 신세계 (2)

불사자 각인에 필요한 재료는 수십 가지다.

물론 그중 대부분은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지만, 핵심이 되는 세 가지는 다르다.

무려 3등급이나 되는 마물의 부산물.

‘심지어 셋 다 정수 가치가 높아서 ‘왜곡’ 마법을 걸고 잡는 애들도 거의 없지.’

즉, 이놈들의 부산물을 얻으려면 직접 마법사를 데리고 ‘왜곡’을 걸면서 잡아야 하는 것.

다만, 난 아직 노가다를 제대로 시작도 못 해봤다.

그야 7계층이 노아르크가 절반 이상 점거한 탓에 몇 년간 그쪽에는 제대로 발도 들이지 못했으니까.

아무튼.

“으하하핫! 드디어 내 실력을 뽐낼 만한 상대가 나타났구려!”

3등급 마물이 등장한 즉시, 이백호 팀의 탱커 렉 아우레스가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우오오오오오오-!!”

세찬 함성과 함께 뼈와 근육이 빠른 속도로 부풀어 오른다.

마치 내가 [거대화]를 할 때처럼.

「렉 아우레스가 [거인의 피]를 시전했습니다.」

심해 거인이 지닌 변신기 액티브 스킬.

이 스킬은 몸집이 커딘다는 점에서 [거대화]와 몹시 흡사하다.

다만 [거대화]에서 ‘위협 수치’가 메인이라 한다면 [거인의 피]는 순수 육체 스탯 뻥튀기가 메인이다.

또한, 3등급 정수인 만큼 스탯 증가치도 훨씬 높다.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

몸이 커지기에 제대로 된 장비를 입을 수 없다.

물론 이건 [거대화]에도 적용되는 단점이긴 하다.

하나 [거인의 피]는 [거대화]와 달리 불사자 각인의 [합일] 효과가 적용되지 않는다.

“이래서였군요……. 팀에서 수호자 역할을 맡을 것 같은 분이 늘 상의를 벗고 다니셨던 게.”

어찌 보면 나와 굉장히 비슷한 방식의 육성이기에 열심히 살펴보자, 금방 익숙한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그토록 몸이 거대해졌건만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속옷 형태의 타이즈는 멀쩡하다.

‘늘어나는 마법 팬티.’

한때 나도 입었던 물건이다.

[합일]을 찍기 전엔 [거대화]를 켤 때마다 찢어졌고, 이후에도 [산성체액] 때문에 뭐만 하면 속옷이 녹아내렸거든.

‘역시 장비는 변신기를 쓴 다음에 아공간에서 꺼내는 식이네.’

이후 거대해진 아우레스가 허공에 손을 집어넣어 초거대 방패, 그리고 초거대 메이스를 꺼내드는 것을 보며 나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암, 방패에 메이스는 진리지.’

우리 같은 근력쟁이들은 날붙이보다 이런 무식한 몽둥이가 훨씬 더 효율이 잘 나오는 법.

“으하하하하핫!!”

어그로를 끌기 위함인지 당장 선두로 달려나가 메이스부터 머리에 꽂아넣는 아우레스.

퍼억-!

휘둘러지는 속도와 육중한 소리.

이것만 보면 5등급 정도 되는 몬스터는 단 한 방에 모가지를 꺾을 위력임을 알 수 있었지만…….

상대는 엄연히 3등급에 속하는 마물.

“크아아아앙!”

유효타로 작용하기는커녕 화만 돋운 듯 더더욱 흉포한 하울링을 터트린다.

뭐, 예상했던 일이다.

갑옷을 입지 못하는 만큼, 탱커 역할을 수행하려면 정수 세팅에서 깡스탯으로 물리 내성, 항마력을 챙겨야만 했을 테니.

‘아무튼, 이 정도 딜이면 퓨어 탱커라 봐도 되겠고.’

하면, 탱커로서의 수준은 어떨까?

이는 곧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바이테리온이 [물어뜯기]를 시전했습니다.」

이빨이 달려 있던 손아귀가 기괴할 정도로 커지며 아우레스의 어깨에 달라붙는다.

하지만…….

“흐하하핫! 마물 공! 이 정도는 간지럽지도 않소이다!”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은 듯 되레 쾌할하게 웃으며 레슬링을 하듯 바이테리온을 들어 올렸다 바닥에 내려찍는다.

콰아아아아앙-!

거, 그래도 명색이 3등급 마물이건만.

저 덩치를 들어 올릴 근력에 정통으로 물리고서도 생채기 정도만 생기는 견고함이라니.

‘…생각보다 수준이 높은데?’

감탄사가 나오는 한편으로는 납득도 됐다.

하긴 이 정도는 돼야 이백호랑 같이 다니려나?

솨아아아아아-!

어깨 쪽에 조금이나마 나 있던 생채기조차 힐러 제이나의 치유에 의해 금방 완치 됐다.

그리고…….

「벨베브 루인제네스가 3등급 공격 마법 [풍월]을 시전했습니다.」

초승달 형태로 날아간 마법이 마물의 팔 하나를 끊어내며.

「레이튼 브라이엇이 [봉인의 시]를 시전했습니다.」

언제 쏘아졌는지 모를 반투명한 화살이 마물의 몸에 꽂히며 빛을 뿜어낸다.

치치직, 치직.

이때 흘러나온 빛은 사슬의 형태로 변하며 마물을 휘감으며 온몸을 결박했는데…….

「일시적으로 바이테리온의 모든 이능이 봉인됩니다.」

와, 저 정수를 먹었다고?

이건 2등급 정수 중에서도 특히나 입수 난이도가 높은 건데?

‘미쳤네.’

3등급부터는 거의 레이드 몹 취급을 하는 게 일반 탐험가들의 인식이다.

한데 이렇게 손쉽게 3등급 마물을 상대하다니?

새삼 이들의 기량이 최정상임이 실감난—.

“남작님.”

그렇게 평가하듯 전투를 구경하고 있던 때.

“남작님이 마무리해 보는 건 어때요?”

이백호가 은근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어온다.

쉽게 말해, 뒤에서 구경만 하지 말고 나도 뭔가 좀 보여 주라는 뜻인데…….

하긴 내가 이놈들에 대해 궁금한 것처럼, 이놈도 나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을 터.

“좋다.”

다만 그런 심리를 알면서도 나는 쿨하게 앞으로 나갔다.

그도 그럴 게, 앞으로 한동안 같이 지내며 언제까지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을 수도 없을뿐더러…….

‘…당당히 전리품 요구를 하려면 어차피 기여는 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캐릭터가 [초월]을 시전했습니다.」

「다음으로 사용하는 스킬이 강화됩니다.」

[초월]과 연계하여 [거대화]부터 해준 뒤.

“비켜봐라.”

“아, 아… 그, 그러리다.”

누군가를 올려다보는 게 낯설 아우레스를 뒤로 물린다.

음, 이 정도면 한 1m 넘게 차이 나는 거 같은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무식하게 크기만 할 뿐, 고유 명사도 없는 평범한 메이스가 아니라, [합일] 효과에 의해 더더욱 거대해진 No.87 크라울의 악마분쇄기.

이를 어깨 위까지 높이 들어 올린 뒤.

「캐릭터가 [휘두르기]를 시전했습니다.」

이제 내 시그니처나 다름없는 스킬을 선보인다.

비록 휘황찬란하게 뿜어지는 빛도, 바람이 휘감는 이펙트도 없는 스킬이긴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그도 그럴 게, 이상하잖아?

휘이이이이익!

아무리 내가 탱커고.

이놈이 3등급 몬스터라고 한들.

콰아아아앙-!

이 정도 템빨에 스킬로 이능까지 봉인된 놈을 못 잡는—.

“크르륵…….”

뭐야, 왜 한 방에 안 죽어.

조금 머쓱해진 나는 서둘러 [휘두르기]를 서너 방 더 먹여주었고, 그제야 침을 흘리며 빌빌대던 마물이 움직임을 멈췄다.

“오.”

짧고 강렬했던 폭력의 현장이 마무리된 순간, 뒤에서 흘러나오는 의미심장한 감탄사.

“……이야, 탱커인데 저 딜이 나오네?”

다행히 칭찬의 뜻은 맞나 보다.

이백호가 저런 목소리로 동료를 놀리는 걸 보면.

“우리 전사는 스무 방을 쳐도 못 잡았을 텐데. 남작님 우리 팀 들어올래요? 쟤 내가 내쫓을게. 응?”

“…백호! 그런 게 어딨소이까! 난 백호 공만 믿고 따라와 이젠 성주에게도 배신자 취급을 받는데!”

덩치와 달리 여린 성격일까.

이백호의 말에 상처를 받은 듯 소리치는 아우레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름 사이가 좋네.’

나는 두 사람의 투닥거림은 대충 한 귀로 흘리며 움직임을 멈춘 바이테리온을 내려다보았다.

‘뭔가 어색하긴 하네.’

미궁에서는 사체가 빛이 되어 사라지는 게 처치 완료의 상징이다. 한데 그런 이펙트가 없으니 잡아도 잡은 거 같지가 않은 느낌이 든다.

왠지 금방이라도 다시 일어날 거 같달까?

‘이거 익숙해지려면 꽤 걸리겠는데.’

게다가 미궁에서와 달리 확인 사살도 제대로 해야 할 거 같다.

잡은 줄 알고 그냥 내버려 뒀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덤벼드는 일도 생길 수 있을 테니까.

여러모로 미궁보다는 불편한 것인데…….

‘뭐, 그게 단점이자 장점이지만.’

“하벨리온! 마물 도축은 할 줄 알겠지?”

“물론입니다.”

“그럼 얼른 돈 되는 부산물만 챙겨라. 발톱은 따로 빼서 나한테 주고.”

전투가 끝난 후엔 바로 GM에게 도축을 부탁했다.

참고로 발톱은 일반 짐승의 발톱 같은게 아니라, 손에 달려 있던 이빨을 뜻하는데…….

그때 이백호가 동료 놀리는 것을 멈추고 내게 말을 걸어왔다.

“발톱은 왜 남작님이 가져가요?”

그야 각인 8단계 재료 중에 하나니까.

…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건 조금 꺼려져서 잠시 머뭇거리자, 이백호가 음흉한 미소를 내짓는다.

“아, 각인 재료 때문인가 보네? 근데 이놈 발톱이 필요한 게……. 광전사랑 불사자뿐인데, 남작님이 광전사 각인을 받을 일은 없을 테니…….”

“…….”

“불사자 각인이겠네요? 이걸 구하는 걸 보니 아직 7단계일 테고. 아, 잠깐만 그럼 장비 입고 [거대화]를 쓸 수 있는 것도 각인 덕분인가? 그 5단계인가에 있는 [합일] 때문에.”

하, 이래서 게임하다 온 새끼들이 싫다니까.

***

애석하게도 이백호의 주접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야… 근데 그게 그런 판정이었구나? 신기하네.”

“…….”

“갖고 있는 정수도 대충 알고 있겠다, 아예 나중에 말 잘 듣는 바바리안 하나 구해서 남작님이랑 똑같이 키워볼까?”

“백호……? 그… 옆에서 내가 다 듣고 있지 않소…….”

“응? 귀 막아, 그럼.”

“…….”

내 레플리카를 만들겠단 말이 진심은 아닐 테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기분이 나쁘다.

정수와 정수, 혹은 아이템 간의 시너지.

이쪽 세상에서 그런 걸 갖고 괜히 ‘비전’이라 부르며 비밀시 하는데?

그것들이 전부 값진 재산이기 때문이다.

“하하, 남작님 농담이에요 농담. 아, 그리고 그 발톱? 그건 가져가세요 몇 개든.”

뭐, 그래도 불쾌한 것과 별개로 챙길 건 착실하게 챙겨넣었다.

‘어찌 됐든, 이제 두 개만 더 모으면 8단계 각인 재료는 다 모으는 셈인가?’

이백호를 응징하는 건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반드시 올 테니까.

저놈이 내 앞에서 감히 저런 농담을 꺼내지 못하는 때가.

“자자, 다들 뭐 하고 있어? 루팅 끝났으면 얼른 가자고!”

이후 노아르크 개척지를 나선 우리는 북서쪽으로 진로를 잡고 계속해서 이동했다.

그리고 한두 시간에 한 번 꼴로 마물을 만났다.

‘미궁보다 개체 수가 훨씬 적다더니, 여기에 오니까 확 체감이 되네.’

그렇게 전투 횟수가 쌓이다보니 이백호가 왜 성벽 바깥 마물들의 지능이 미궁보다 월등히 높다고 말했는지 알 거 같았다.

무슨 저마다의 사냥 방식이 있다고 해야 하나?

그냥 무작정 달려드는 게 아니라 지형지물을 활용하는 건 기본. 쉬고 있을 때를 노린다거나, 우리를 추격하며 간을 보다가 기습을 포기하고 등을 돌리는 놈들도 있을 정도였다.

아, 군집 생활을 하는 개체의 경우 우두머리가 전투 내내 전략적으로 지휘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진짜 야생 같은 느낌이네.’

정말로 무슨 하나하나가 ‘네임드’라 부를 수 있는 상위 변이종이라도 되는 거 같다 해야 하나?

개체별로 크기 같은 곳에서도 차이가 있고, 어떤 애는 흉터가 크게 나 있거나 심한 경우엔 후유증으로 절뚝이는 놈도 있었다.

전부 천편일률적인 미궁과는 다르게 말이다.

“그럼 오늘은 여기서 쉬고 가는 거로 하고! 각자 뭘 해도 좋으니 오전 7시까지는 여기에 와 있을 것! 오케이?”

그렇게 오늘의 여정도 마무리하며 이백호네 쪽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야영할 준비를 하고 있자니, 이백호네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온다.

“으하하핫! 제이나! 으하하하핫! 하하하핫!”

“…그만하세요. 아우레스.”

“뭘 그만하란 거냐? 귀한 음식을 다 태워놓고서! 크하하하하하!”

며칠 같이 다니며 지켜본 이백호네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친근하고 유쾌했다.

뭐, 그 배경에는 전사인 아우레스가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맡은 게 가장 크겠지만.

‘이백호 저놈도 실실 웃고 있네. 동료한테 정 같은 건 안 준다고 하더니.’

“…응? 어디 가냐?”

“그냥 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이내 야영 준비를 다 끝내가는 중에 GM이 내 옆을 이탈해 이백호네 팀 쪽으로 갔다.

그리고 나름 자연스럽게 섞여 들었다.

“식사를 많이 준비해서 남는데, 이거라도 드시는 게 어떻습니까?”

“오! 정말이오? 고맙소이다! 우리 주방장 때문에 뱃가죽이 등에 붙을 지경이었는데! 하하핫!”

은둔형 외톨이 같던 GM에게 이런 외향적인 면모가 있었던가 싶어 위화감이 들었지만, 이어지는 대화를 들어보니 그냥 정보 수집이었다.

“아하, 그렇군요. 전혀 몰랐습니다. 설마 노아르크 출신이셨을 줄.”

“하하, 그렇소이까?”

“아, 하지만 그래도 들어본 거 같기는 합니다. 노아르크의 성문을 지키는 무시무시한 전사가 있다는 이야기 정도는.”

“으하하핫! 그 정도는 아니올시다!”

텐션을 가볍게 유지하며 툭툭 떨어지는 정보를 열심히 받아먹는 GM.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궁금했던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됩니까?”

“무엇이든 물어보시오!”

“이 팀은 왜 5인 체제인 겁니까? 6인이 아니라.”

그 질문이 나온 순간,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싸해지며 정적이 찾아온다.

“…….”

“…….”

뭐지? 저게 저런 반응이 나올 정도의 질문인가?

그 이유가 도무지 짐작되지 않아서 더더욱 귀를 기울이던 찰나였다.

“응? 다들 왜 그런 표정이시오?”

이백호의 팀원인 렉 아우레스도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함과 동시에.

“맞지?”

“예, 맞는 거 같습니다.”

이백호와 궁수가 짧게 대화를 나눈다.

“마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30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68화 30

668화 신세계 (3)

사람이라고는 우리를 빼고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할 수 없던 성벽 바깥.

한데 사람의 기척이 감지되었다고 한다.

그것도 무려 팀 단위가 아니라…….

“상대는 단 한 명… 놀랍게도 숙면 중인 듯하군요.”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한 명이라는 사실에 나는 더욱더 큰 불안을 느꼈다.

여러 명인 것보다 훨씬 더 말이 안 된다 해야 하나?

3등급 마물들이 등장하는 이 위험한 땅에, 그 누가 대체 어떤 이유로 혼자서 다니고 있는 걸까.

“일단… 가봐야겠지?”

“예. 일단 주변의 변수는 모두 파악해두는 게 옳으니까요.”

이백호와 궁수가 신속하게 의견을 주고받고서 자리를 박차고 나선다.

“먼저 갈 테니 알아서 따라 와!”

대포알처럼 쏘아져 나가는 이백호.

도대체 얘는 겁이라는 게 없나?

나였다면 정체 모를 변수인 만큼 팀원들과 함께 천천히, 그리고 또 은밀하게 접근을 했을 텐데.

‘저 무조건적인 자신감…….’

어쩌면 이거야말로 이백호의 가장 큰 약점일지도 모르겠다.

“……배, 백호?!”

“아우레스, 우리도 얼른 가요. 저 남자가 위험할 일은 없겠지만… 혹시 또 모르잖아요.”

이내 남겨진 우리들도 서둘러 이백호를 뒤따라 이동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누, 누구신데 이러는 거요! 켁! 노, 놓아주시오!”

한 남자의 다급한 소리가 들려온다.

그것도 바로 저 아래에서.

“…이 아래인가 봐요.”

지진이 나서 넓게 갈라진 듯한 지면의 틈새를 내려다보자 그 아래에서 이백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다들 왔어? 내가 갈 테니 기다려! 여기 좁아서 어차피 다 못 들어와!”

그 말을 끝으로 잠시 기다리자 이백호가 절벽 아래에서 얼굴을 빼꼼했다.

위에서는 각도에 의해 잘 보이지 않지만, 저 아래에 숨겨진 공간이 있는 듯한데…….

“읏차!”

이내 높이 뛰어오른 이백호가 아저씨 같은 소리를 내며 우리가 있는 곳에 착지한다.

사냥감을 잡은 듯 높이 올린 오른손엔 어느 이름 모를 중년의 사내가 붙잡힌 채 발버둥치고 있었다.

몇 달은 족히 씻지 않은 듯 매우 비위생적인 모습이었는데…….

“뭐, 뭐야! 당신들은……! 놔! 놓으라—.”

우리를 발견하고서 더욱 심하게 몸부림을 치던 중년 사내가 어느 한쪽에 시선을 멈춘 채 동공을 확장한다.

“…아우레스 님? 문지기 아우레스 님 맞으시죠! 아우레스 니이이임!!”

“그, 그대는……!!”

…뭐야, 서로 아는 사이였어?

“………누구시오?”

“히익! 접니다 저! 노아르크 직속 경비대대 3조장 붉은 눈!”

“붉은 눈? 처음 듣는 이명인데……?”

아우레스가 고개를 갸웃하자, 모가지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잠시 풀어줬던 이백호가 눈길을 좁힌다.

“허, 그냥 아무 이름이나 대고 아는 척 한 거였어?”

“아, 아닙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붉은 눈! 붉은 눈 데일란!”

녀석이 다급하게 자기의 이름까지 덧붙이자 렉 아우레스도 뭔가 떠오른 듯했다.

“데일란? 데일란이면 메룬 선술집 할배 이름인데? 아… 너 설마 거기 아들내미냐?”

“예예! 맞습니다! 그게 바로 접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런 놈이 있었지! 으하하하! 반갑다!”

그제야 서로를 알아보게 된 두 사람.

이에 이백호도 뭔가 김이 빠졌는지 잡고 있던 사내를 짐짝처럼 바닥에 던졌다.

다만, 그렇다고 아예 관심을 잃은 건 아니었을까.

“데일란이라고 했지?”

“예, 예……! 그렇습니다!”

“말이나 해봐. 너 혼자 여기서 뭐 하고 있던 거냐?”

“그게…….”

“솔직하게 말 안 하면 뒈지니까 참고하고.”

저 강압적인 태도는 이백호가 가진 무서운 점 중 하나였다.

도리 같은 건 싹 무시한 채 늘 힘으로 찍어 누르며 대답을 강요하는데, 그런 주제에 또 거짓말 탐지 기능까지 달려 있거든.

‘나도 그때 돌아버리는 줄 알았지…….’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알을 굴리며 쪼그라든 남자를 보니 불현듯 옛 생각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뭐, 과거는 과거일 뿐이지만.

“빨리 말해보라니까? 뭔 헛짓거리를 하려고 여기서 이러고 있었냐고!”

이백호가 한 번 더 윽박을 지르자, 사내가 눈을 질끈 감고서 답했다.

“…타, 탈영을 했습니다!”

“탈영……?”

“그… 라프도니아를 침공한다는 계획이 너무나 허무맹랑하게 느껴져서……. 우리 같은 사람들은 괜히 꼈다가 의미없이 죽을 게 뻔하지 않습니까!”

“헤에… 그래서 남들 다 돌아갈 때 너는 몰래 빠져나왔다 이거네?”

“저만 그런 게 아닙니다! 처음에는 저랑 똑같이 생각한 사람이 훨씬 더 많이 있었습니다.”

“응? 근데 왜 지금은 혼자인데?”

“그… 마물 때문에 중간에 흩어지게 돼서…….”

사정을 들어보니 처음엔 백 명도 넘는 인원이 함께 바깥 세상에 남아 돌아다녔다고 한다.

힘을 합치면 이곳에서도 충분히 행복하게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던가?

그런 말을 입에 달고 다니던 그들이었지만, 그 약속은 강력한 마물을 마주친 순간 의미가 없어졌다.

그도 그렇지 않은가.

애초에 본신의 안위만을 위해 집단에서 빠져나온 놈들인데, 위급한 상황이 닥쳤을 때 제대로 힘을 합칠 수 있을 리가.

“그래서 흩어진 뒤에는 숨을 만한 곳을 찾아다니며 조심히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이곳에 정착을 하게 된 건데…….”

“아까 그 절벽에 난 토끼굴 같은 곳에?”

“예…….”

“거기 살게 된 지는 얼마나 됐고?”

“그… 정확한 시간은 모르지만, 이제 두 달 정도 됐을 겁니다…….”

“이야, 대단하네. 근데 너 똥오줌은 어디서 쌌냐?”

“그게… 실은… 절벽 끝에 가서 쪼그려—.”

“그만해요! 더러운 얘기는.”

이내 힐러인 제이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뭐라 잔소리를 하자, 이백호는 궁시렁대면서도 피식 웃으며 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이 타이밍이라 여겼을까?

“근데… 공자님은 누구십니까?”

녀석이 당돌하게 이백호를 상대로 질문을 던진다.

“나? 내가 왜 궁금한데?”

“그… 아니 다름 아니라… 도시에서 오신 거라면 혹시 알고 계신가 해서……. 성주의 계획이 성공한 건지…….”

거, 이제 와서 따라가지 않은 걸 후회하는 건가?

만약 도시에서 온 거라고 하면 도시로 돌아갈 때 자기도 데려가달라고 할 기세다.

물론 이백호가 그런 요구를 허락할 리 없지만.

“그건 네가 알 것 없으니 일단 조용.”

“…….”

“후, 그럼 요놈을 어떡할까? 어차피 내버려둬도 금방 뒈질 거 같긴 한데…….”

그 말에 사내의 표정이 훨씬 더 급해졌다.

하기야 이해 못할 건 아니다.

오늘 저녁으로 뭘 먹을까 고민하는 듯한 말투로 저러고 있는 걸 보면 내가 다 소름이 돋을 지경—.

“자, 잠시만요! 드릴 제안이 있습니다!”

“응?”

“도시로 돌아갈 때 저도 좀 데려가주십시오! 그럼 제가 쓸모 있는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필사적인 기색이 역력한 거래 제안.

다만 이백호는 심드렁한 표정을 내지을 뿐이었다.

“음, 별로 안 궁금한데…….”

진심으로 관심이 없다는 듯한 목소리였으나, 나는 그게 연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숨 쉬듯이 자연스러운 협상이랄까.

상대가 저자세로 나오면 그에 맞춰서 주도권을 잡는 게 바로 이 녀석의 버릇이었으니까.

“뭐, 그래도 말해봐. 정말 쓸모 있으면 고민은 한번 해볼 테니.”

이백호는 철저하게 갑의 위치에서 무엇도 하나 내주지 않은 채 말했고, 이내 사내의 입을 통해 전혀 예상치 못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차원 비석……! 차원 비석이 어디에 또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흐음……?

***

사내의 이야기는 아주 짧고 간결했다.

집단에서 떨어져 나온 뒤, 안전한 곳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한참이나 돌아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때 우연찮게 발견하고 말았다.

노아르크 개척지에 있던 것과 동일한 생김새를 지닌 차원 비석을.

“뭐야… 진짜네?”

거짓말 탐지기를 지닌 이백호가 이리 말할 정도니 일단 진위 여부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테고…….

“보통 사람들은 절대 갈 생각도 않는 험지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제, 제가 아니면 절대 찾지 못하실 겁니다!”

확실히… 절벽 아래에 나 있는 작은 굴을 찾아서 살던 놈이 저리 말하니 정말 상상도 못한 곳에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그게 어디 있는데?”

이내 차원 비석의 존재가 아주 매혹적이었는지, 이제는 심드렁한 척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백호.

사내도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딜을 걸어왔다.

“말씀드리는 건 어렵지 않은데… 그…….”

“좋아, 약속을 원하는 거지? 약속할게. 말썽 안 피우고 잘 따라다니면 도시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사내는 이백호가 거짓말인지 아닌지 살펴보는 듯했으나, 결국 별다른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믿겠습니다…….”

“자, 됐네. 그럼 말해봐 어디야?”

이백호의 물음에 사내는 본인의 은신처가 있던 절벽 끝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여기 아래에 있습니다.”

“여기 아래?”

“예…….”

하, 어쩐지 너무 쉽게 말해주더라니.

어차피 우리가 이 근처만 수색해도 금방 들킬 테니 빨리 거래를 끝내려 했던 거구나.

“먼저 갈 테니 다들 알아서 내려와, 알았지?”

이번에도 이백호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고, 우리는 각자의 방법을 사용해 뒤따라 내려갔다.

후우우웅-!

마법사는 부유 마법으로.

탓, 타닷, 탓-!

궁수는 절벽을 폴짝 폴짝 뛰면서.

[히히히히잉-!]

사제는 비행도 가능한 소환수를 탄 채로.

그리고 나는…….

‘몸으로 때워야지 뭐.’

콰아아아아앙-!

꽤 깊어서 그런지 착지한 순간 발끝을 타고 전기가 흐르는 듯했으나, 열심히 찍은 골강도와 물리 내성 스탯으로 버틸 수 있었다.

“이야, 남작님 화끈하네요?”

“뭐라는 거냐. 됐고, 이게 그 차원 비석인가 보군?”

“네. 진짜 있기는 했네요? 작동시킬 수 있는지까지 보려면 이따 할배한테 물어봐야겠지만.”

거진 70m는 됨직한 깊은 골짜기.

빛도 제대로 닿지 않아 어두컴컴한 그곳에는 아까 사내가 말했던 차원 비석이 분명하게 존재했다.

“오, 할배! 여기, 여기! 얼른 와서 좀 확인해봐!”

“하벨리온, 너도 가서 같이 살펴봐라.”

이후 마법사들이 도착한 후에는 그들이 차원 비석을 조사했고, 두 마법사 모두 동일한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이용했던 그 차원 비석과 완전히 동일한 성질을 지녔습니다.”

“아마 그때처럼 마력만 충분히 불어넣는다고 하면 포탈이 열릴 가능성이 높네.”

“와, 진짜로? 그렇게 열심히 찾아다녔을 때도 못 찾은 걸 이렇게 찾네.”

그리 말하는 이백호가 기특하다는 듯 땅굴 사내의 어깨를 팡팡 내리친다.

거, 칭찬할 거면 더 팍팍 쳐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긴 하지만…….

그건 각자 스타일인 거니까 뭐.

“그럼 얼른 마력부터 넣어봐. 제대로 되는지도 확인을 해보자고.”

“……만약 된다면 어떡하실 생각입니까?”

“아니, 일단은 해보라고. 되는지를 먼저 보고 생각을 해야지. 사람이 왜 이렇게 경우가 없어?”

“…….”

괜히 말을 꺼냈다가 타박을 받은 GM이 씁쓸한 표정으로 차원 비석에 다가간다.

그리고…….

“시작하겠네.”

먼저 와 있던 파멸학자와 함께 마력을 주입하자, 이전과 완전히 똑같은 이펙트가 터져나왔다.

솨아아아아아-!

밀집된 마력이 뿜어내는 빛.

그것이 점점 형체를 갖추며 크기를 키우고 어느덧 형체를 갖춘다.

“정말 포탈이 열렸군요.”

“백호 군, 이제 어쩔 건가?”

“……글쎄, 진짜 이제부터 생각해봐야겠는데.”

“되도록이면 빨리 끝내게. 포탈은 5분 정도밖에 유지가 되지 않으니.”

“오케이.”

그렇게 정말로 혼자 고민을 하는가 싶던 이백호는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역시 궁금하네. 이게 어디로 이어지는지. 오랜만에 정말로 탐험하는 느낌도 들고.”

“…우리 목적을 잊지 말게. 우리는 마법진을 고칠 재료를 얻기 위해 이곳까지 온 걸세.”

“근데 혹시 모르잖아? 이걸 타면 더 빨리 그쪽에 도착할 수 있을지.”

“…….”

“뭐, 안 되면 다시 포탈 열고 돌아오면 되는 거고. 안 그래?”

이 새끼는 대체 P가 몇 퍼센트인 거지?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고 방식이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동의했다.

‘궁금하긴 해…….’

진짜 탐험하는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던 때, 이백호가 결정을 끝냈다.

“오케이, 고민 끝.”

“어쩔 텐가?”

“한번 넘어가보자. 나중에 여기까지 다시 오려면 그게 더 일이니까. 남작님도 괜찮죠?”

음…….

“싫다고 하면 안 할 거냐?”

“아뇨. 우리끼리 넘어갈 건데요? 남작님은 여기서 기다리세요.”

“따라가겠다.”

그래, 이것도 일종의 히든피스라고 할 수 있는데 이백호 혼자만 보낼 수는 없지.

나도 결정을 내리자 이후로는 속전속결이었다.

“야, 너가 먼저 들어가.”

“저… 저 말입니까?”

“왜 못 들어갈 이유라도 있어?”

“그 건너편에 위험한 게 있을 수도……. 아,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진작 그럴 것이지.”

이백호는 땅굴 사내를 먼저 포탈에 태워서 보냈고, 이후로는 한 명씩 순차적으로 포탈을 넘어갔다.

참고로 내 차례는 마지막이었는데…….

번뜩-!

눈앞이 하얗게 물들며 천천히 시야가 회복된다.

나는 버릇처럼 일단 주변부터 쓱 둘러보았다.

지형은 어두운 동굴 속.

근처에 마물은 없다.

다만 문제는…….

“백호 씨? 제대로 온 게 맞습니까? 차원 비석이 그 어디에도 안 보이는데?”

넘어온 순간 포탈은 사라졌고, 다시 포탈을 열 수 있게 해주는 차원 비석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하나, 둘, 셋, 넷, 다섯…….’

사람이 한 명 부족하다.

아니, 정확히는.

“뭐야, 그 새끼.”

우리에게 차원 비석 위치를 알려줬던 그 녀석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진짜 어디 갔어? 아니, 도망칠 만한 시간은 절대 안 됐는데? 대체 뭐야, 그 새끼?”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중얼거리는 이백호.

그런 녀석을 보며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두근-!

왠지 함정에 빠진 거 같다 해야 하나?

이유 모를 불길함이 엄습해 오기 시작한다.

나는 서둘러 녀석과 친분이 있던 아우레스에게 말을 걸었다.

“아우레스.”

“왜 부르시오?”

“아까 그놈 있잖냐. 데일란이라는 놈.”

“그렇소만?”

“데일란이 성이면… 이름은 뭐냐……?”

아우레스 입장에서는 조금 뜬금없을 물음.

다만, 아우레스는 진지하게 생각을 해보고 대답해주었다.

“글쎄… 잘 기억이 나지 않소.”

“……그러냐?”

애석하게도 별 소득이 있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차라리 모르는 게 다행이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생각을 접으려던 때.

아우레스가 흘려 들을 수 없는 말을 꺼냈다.

“다만…….”

“다만?”

“굉장히 흔한 이름이었던 거 같소이다.”

……에이, 아니겠지?


23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69화 23

669화 신세계 (4)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은 몹시 간단하다.

두근-!

성벽 바깥에서 만난 렉 아우레스의 지인(?)에게 차원 비석의 위치 정보를 획득.

차원 비석을 발견한 후엔 일단 한 번 가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시 돌아오자는 식으로 가볍게 포탈을 타고 넘어갔다.

그리고…….

“쉽게 말해, 그 새끼가 우리를 담그려 한 거네?”

렉 아우레스의 지인 데일란은 포탈을 넘어감과 동시에 어디론가 증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때 필요한 차원 비석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즉, 돌아갈 방법이 막혔단 뜻인데…….

“이름이 데일란? 데일란이었던가?”

데일란에 관한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

정말 ‘데일란’이 맞는지도 확실하지 않으며, 애초에 우리가 아는 것은 노아르크 출신에 ‘아주 아주 흔한 이름’이라는 것뿐인데…….

꽈악.

나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녀석의 이름이 정말로 ‘그것’인지는 아직 알 수가 없지만.

만약에 정말로 ‘그것’이라고 한다면.

‘L인가…….’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그것’이 되겠지.

두근-!

앞으로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그래야만 이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다.

고로, 그런 의미에서…….

“아직 멀리 못 도망갔을 게 분명—.”

“동작 그만.”

당장에라도 사라진 녀석을 찾으러 뛰쳐나갈 기세인 이백호를 멈춰 세운다.

“……?”

목소리를 깔고 명령하듯 말하자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짓는 이백호.

다만 너무 진지충처럼 보여도 어쩔 수 없다.

두근-!

나는 진심으로 이 상황이 위험하게 느껴지기 시작했거든.

“경솔하게 움직이지 마라. 우선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내는 게 먼저니까.”

이는 [던전 앤 스톤]을 할 때의 내 원칙이다.

처음으로 진입한 낯선 곳에서는 그 모든 것들을 경계해야만 한다.

뭐, 그렇게 조심하고서도 첫 트라이에선 실패하는 게 일상이긴 했지만.

아무튼.

“하벨리온, 브라이엇. 우선 주변에 마물이나 함정이 있는지부터 살펴봐라.”

우선 GM과 궁수에게 지시를 내려 마법적으로, 그리고 물리적으로 주변을 탐지한다.

“없습니다.”

“탐지에 걸리는 건 아직 없군요.”

오케이, 그렇단 말이지…….

툭. 툭.

벽 쪽으로 다가가 동굴 외벽을 손으로 두드리자 둔탁한 소리만이 작게 울려 퍼진다.

‘너머에 빈 공간은 없는 거 같고…….’

스윽.

이내 지면에 붙어 있던 발을 조심스레 떼어내 앞으로 내딛는다.

‘진흙.’

마치 비오는 날 산사태라도 난 것처럼 동굴 바닥엔 질퍽한 진흙들이 늘어져 있다.

이동 속도 감소나 그런 특수 효과는 없는 듯하다.

다만 문제는…….

“우선 여기서 빠져나가야겠군.”

“…그렇죠? 일단 길을 따라 나가다보면 뭔가 알아낼 수 있을—.”

“자칫하면 동굴 전체가 물에 잠길 수도 있다.”

“네?”

고개를 갸웃하는 이백호를 보며 나는 동굴의 벽면과 천장을 가리켰다.

“봐라. 물이 가득 찼던 흔적이 아직 남아 있으니.”

“오, 정말로 그런 흔적이 있구려!”

“근데 그렇다고 지금 당장 물에 잠긴단 건 너무 비약이 심한 거 같은데……. 그냥 그 전에 빠져나가면 그만이잖아요?”

거, 이놈은 왜 이렇게까지 긍정적이야?

“이 동굴이 얼마나 긴지 알고 있나? 만약 사흘 밤낮으로 걸어야 겨우 출구가 나온다면? 중간에 미로 같은 구조로 변해서 한참이나 길을 헤매야 한다면?”

“…그러니까 얼른 이동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음… 그건 맞지.

근데 그 전에 일단 이것부터 하고.

“진형부터 새롭게 맞추도록 하지.”

“진형을요……?”

“이런 상황에서도 둘로 나뉘어 움직이는 건 위험하니까. 이렇게 양옆이 막힌 곳에서는 진형 하나만 잘 구축해도 반 이상은 먹고 들어간다.”

지금까지는 이동은 함께 하되, 나와 GM은 이백호 팀에서 섞이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럴 수 없다.

“하벨리온, 루인제네스, 제이나. 지금부터 너희 셋은 가장 안전한 중심부에서 이동한다.”

우선 핵심 인력을 중앙 배치하고서.

“렉 아우레스. 너는 뒤에서 따라와라. 혹시 뒤에서 적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

“하핫, 그러리다! 뒤는 내게 맡기시오!”

보조 탱커는 후방에 배치한다.

그야 이렇게 좁은 통로형 맵에서는 뒤를 가장 조심해야 하는 법이니까.

어차피 전방은 나 혼자서도 커버가 가능하기도 하고.

“이백호, 너는 바로 내 뒤에서 따라오고, 브라이엇 네 위치는 바로 그 뒤다. 전투가 벌어지면 더 뒤로 가도 되지만, 그 전에는 탐지를 해야 하니 최대한 전방에 붙어 있어라. 알겠나?”

“예.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후… 그럼 이제 기본 배치는 끝났겠다. 슬슬 앞으로 가볼—.

“남작님?”

인력 배치가 끝나기 무섭게 이백호가 무슨 할 말이 있는 듯 내게 다가온다.

“그래도 제 팀원들이 훨씬 많은데 오더는 역시 제가 내리는 게…….”

아, 그게 불만이었던 거구나.

“게다가 남작님은 성벽 바깥에 나와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잖아요? 그냥 하던 대로 제 말을 따는는 게 여러모로—.”

거, 그러면 알아서 잘 하던가.

나라고 운전대를 잡고 싶어서 잡나?

“이백호,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이곳은 단순한 성벽 바깥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나도 여태껏 그랬듯이 보다 많은 정보를 가진 이백호의 판단을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뭐가 다른데요?”

이번엔 아주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여긴 너도 처음이지 않나.”

일행 전원이 처음으로 진입한 장소.

심지어 내 본능은 이 장소가 굉장히 위험하다고 말하는 중이다.

그런데 운전대를 얘한테 맡기라고?

“우린 이곳에 대한 정보가 없고, 그로 인해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도 알 수 없다. 그리고 이런 곳에선 매순간의 판단이 아주 중요하게 작용하지.”

“……그래서요?”

“이럴 땐 적임자에게 맡겨라.”

완곡히(?) 표현은 했을 뿐, 결국 내가 너보다 더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뜻의 말.

당연하게도 이백호는 납득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적임자… 라고요? 남작님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 이백호.

나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왜, 아닌 거 같나?”

“네. 아닌 거 같은데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하는 이백호를 보며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솔직히 말해, 난 이백호가 왜 이렇게 까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누가 봐도 명확하지 않은가.

온갖 개고생을 다하고 매일 밤 자료를 정리하고 필드를 연구하면서 오리지날 모드에서 심연의 문을 연 나.

그리고 치트판이 아니었으면 이 세계에 넘어오는 일도 없었을 전역 군인 이백호.

둘 중 어느 쪽이 적임자인지는.

터벅.

이내 나는 이백호에게 한 걸음 다가가 담담하게 읊조렸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이백호.”

“…….”

“너는 정말로 네가 적임자라고 생각하나?”

놀랍게도 이번엔 아까처럼 즉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야 본인도 찔리는 것이다.

자신 있게 대답하기에는 나와 본인의 차이가 명확히 존재한다는 것을.

“…….”

이백호가 대답을 할 때까지 기다릴 기세로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자, 이내 이백호가 시선을 피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알았어요. 한번 해봐요. 라프도니아에서 가장 유명한 탐험가인데, 이번 기회에 어디 실력 좀 한번 봐보지 뭐.”

거, 진작 그럴 것이지.

***

서열 정리… 라고 하기에는 몹시나 평화로웠던 의견 조율이 끝난 후. 본격적으로 이동을 시작하자 뒤에서 수근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대체 얀델 남작은 뭐요……? 저 이백호가 기세에서 밀리다니…….”

“저도 놀랐습니다… 저 이백호가 설마 꼬리를 말고 물러설 줄은…….”

아우레스의 말에 조용히 속닥이듯 답하는 GM.

다만 그런다고 이백호의 귀에 닿지 않을 일은 없었다.

“허! 무슨 내가 뱀이야? 내가 언제 꼬리를 말아? 그냥 뭐 저리 자신이 있는지 한번 궁금해서 그런 거구만!”

“……아하하.”

“백호! 난 별말 안 했소!”

이백호가 짜증을 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꾹 다무는 둘.

그 모습이 웃기면서도 일단 주의는 줬다.

“조용히들 해라. 지금 당장은 별일 없어도, 언제까지 그러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그, 그러리다!”

명색이 최상위권 탐험가라는 사람들이 다들 왜 이렇게 촐싹거리는 걸까.

다 아멜리아 같기만 하면 참 좋을 텐데 말이지.

아마 뭘 하든 최고 효율이 나올 게 분명하다.

“미세하지만 바람이 느껴지는군요. 다행히 출구가 가까이 있는 듯합니다.”

그렇게 한 20분쯤 걸었을 때 궁수 브라이엇이 그런 말을 꺼냈고, 실제로도 얼마 지나지 않아 출구가 나타났다.

“어둡군요…….”

동굴 바깥이라고 딱히 시야가 더 확보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미궁이 떠오를 정도로 깜깜한 바깥.

“아직 밤 시간이잖아? 이따 해가 뜨면 뭐라도 보이겠지.”

이백호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눈치였으나, 나는 좀 달랐다.

“…단순히 밤이라 어두운 건 아닌 거 같군.”

“네?”

“봐라. 빛이 멀리까지 퍼져 나가지 못하고 있지 않나. 마치 미궁처럼.”

“어… 듣고 보니 그것도 그러네요?”

그제야 어둠의 이질감을 깨달은 듯한 이백호가 인상을 찌푸린다.

“어… 근데 그럼 여기가 미궁일 가능성도 있다는 건가?”

“글쎄… 그건 앞으로 알아봐야겠지.”

“오케이. 전 남작님만 믿을게요. 남작님이 전부 다 알아서 한댔으니까?”

……얘는 무슨 초등학생인가?

이 세계에 나보다 훨씬 더 일찍 왔으니, 실질적인 정신 연령은 나보다 더 높을 텐데.

“그래, 알아서 할 테니 조용히 좀 해봐라.”

이내 검지를 입에 붙이자 이백호가 뭔가 마음에 안 드는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문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할 일에 집중했다.

그야 필드 하나를 지나쳐 새 필드로 나온 거잖아?

당연히 주변 수색부터 시작해야지.

“물은… 보이지 않는군.”

동굴 근처에 강이나 호수가 있으리라는 내 예상과 달리 암만 주변을 수색해도 발견되는 건 없었다.

하면, 어떤 이유로 동굴 안에 물이 차게 되는 걸까.

딱히 비가 온다고 해서 그쪽으로 물이 고이게 되진 않을 거 같던데…….

‘분명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텐데 말이지…….’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면서 한편으론 계속해서 수색을 이어나갔다.

동굴 입구를 중심으로 크게 돌며 간략하게나마 지도를 만들었고, 동굴 입구에 좌표도 찍어놔서 언제 어디서든 찾아갈 수 있도록 대비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하벨리온, 현재 시각은?”

“9시 18분. 해가 떠도 진작에 떴을 시간입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주변이 밝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가 ‘성벽 바깥’이 아닐 가능성이 좀 더 높아졌군.”

“이곳이… 미궁 내부라는 뜻입니까?”

“뭐, 그럴 가능성이 없진 않겠지.”

그런 내 말에 비약이라거나 망상이라 하는 자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실제로 아우릴 가비스는 성벽 바깥에 있던 차원 비석을 이용해 미궁과 연결되는 포탈을 열었던 전적이 있었—.

“남작님, 이것 좀 봐보시지요!”

그때 궁수 브라이엇이 나를 호출했다.

얼른 다가가 보니 내가 서 있던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던 인공 구조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비석?”

물론 브라이엇이 발견한 비석은 차원 비석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1층 수정동굴에 있는 ‘기념비’와 비슷한 형태의 커다란 구조물이라 해야 하나?

“하벨리온, 읽을 수 있겠나?”

“아뇨, 저도 완전히 처음 보는 문자입니다.”

비석에는 그림처럼도 보이는 상형 문자에 가까운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는 고대어 해석 능력을 가진 나조차도 읽을 수 없었다.

“일단 조사를 시작해봐라. 마법적인 뭔가가 가미된 구조물일 수도 있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일단 GM과 파멸할배에게 비석의 조사를 맡긴 후, 나는 제작 중인 지도를 한 번 더 체크했다.

거대한 크레이터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단 걸 제외하면 별다른 특징이랄 게 없는 숲지.

‘슬슬 방향을 정하고 한 곳으로 쭉 나아가는 게 효율적일지도…….’

그렇게 다음 계획에 대해 생각하며 비석 연구가 끝나길 기다리던 때였다.

번뜩-!

일순간 온 세상이 하얗게 빛나는가 싶더니.

콰콰콰아아콰아아앙!!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거대한 천둥소리가 세상을 뒤덮는다.

그리고…….

솨아아아아아아아아-!!!

굵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뭐, 여기까지만 보면 그냥 날씨가 험상궂은 극심한 필드인가도 싶을 테지만…….

[키예에에에엑-!!]

공교롭게도 이상 기후가 시작됨과 동시에 마물이 나타났다.

“저쪽! 저쪽에서 마물이 달려옵니다……!”

이곳으로 넘어온 후 처음으로 조우한 마물.

다행히 처음 보는 타입의 신종 마물은 아니었다.

음, 이걸 다행이라고 해도 되는진 모르겠지만.

“브라키아이스텔로! 염동력과 수속성 계열의 이능을 사용하는 5등급 야수종 마물입니다!”

벌떡 일어난 GM이 몬스터를 보고서 브리핑을 하듯 소리친다.

GM의 설명에 틀린 정보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하나 애석하게도 가장 중요한 게 빠져 있었다.

브라키아이스텔로.

이놈은 고작 5등급짜리 잡몹에 불과하지만.

“별무덤…….”

오직 9층에서만 출현한다.


29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70화 29

670화 별무덤 (1)

미궁의 제9계층 별무덤.

‘심연의 문’이 존재하는 10층으로 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기도 한 계층.

그곳에서만 등장하는 마물이 나타났다.

물론 지하 1층 도서관에서도 사냥해 본 적 있는 개체며, 처치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지만…….

「브라키아이스텔로를 처치했습니다.」

이놈의 등장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일단… 여기가 미궁인 건 아니겠네.’

지금 우리가 와 있는 장소는 미궁 내부가 아니다.

애초에 왕가에서 미궁 자체를 폐쇄했을뿐더러, 바로 알아보지 못했을 만큼, 미궁과 명확한 차이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물론 그렇다고 단순히 ‘성벽 바깥’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이상한 부분들이 많기는 하지만.

아무튼.

‘크레이터가 있는 걸 보고 눈치챘어야 했는데…….’

전부 혼란스럽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미궁과 다른 부분들이 조금 있을지언정, 이곳은 9계층 ‘별무덤’을 본 따 만들어진 곳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모두가 인지를 했기 때문인지.

“…….”

“…….”

전투가 끝난 즉시 기묘한 침묵이 일행을 휘감는다.

“응? 표정이… 갑자기 왜들 그러시오?”

유일하게 렉 아우레스만이 현 사태에 대해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중이었다.

우리 팀으로 따지면 아이나르와 아주 유사한 포지션이라 할 수 있는데…….

‘왜 전사들은 다 이런 포지션인 거지?’

문득 그런 의문이 들지만, 당장 깊이 생각할 사안은 아닐 터.

그렇게 아우레스만 고개를 갸웃하던 침묵의 시간이 얼마나 더 이어졌을까.

솨아아아아아아아아-!!!

폭풍우처럼 쏟아지는 장대비.

“이건…….”

브라키아이스텔로의 사체를 조용히 내려다보던 이백호가 한 마디 중얼거린다.

“확실히 좀 위험한 상황일지도……?”

우리가 현재 처한 상황을 그 무엇보다 잘 설명하는 읊조림이었다.

9계층은 준비 없이 들어와도 되는 곳이 아니니까.

바로 이렇게.

솨아아아—

무대 조명이 켜진 듯, 위에서 쏟아진 붉은색빛이 반경 50m 정도를 뒤덮는다.

9층 별무덤의 유명한 필드 효과였다.

“응……? 이건 그건데……?”

마치 길을 가다 아는 사람을 만난 듯 멍하니 서 있는 아우레스.

“알면서 뭘 가만 있는 거냐? 피해라!!”

이내 다급하게 외친 순간, 다들 정신을 차리고서 범위 밖으로 몸을 옮긴다.

아, 물론 속도가 생명이기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마법사와 신관을 챙겼다.

기동성이 좋은 것과 민첩한 건 이야기가 다르니까.

마법사만 해도 빠르게 움직이기 위해선 캐스팅을 해야 하고, 카루이의 사제인 제이나도 탈것을 소환해야만 하는 것인데…….

꽈악.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는 그럴 여유가 없기 마련.

타닷.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한 GM 정도만 챙겨 범위 밖으로 겨우 벗어난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늘에서 떨어진 붉은빛의 운석이 우리가 있던 지면에 충돌하며 폭발한다.

그리고…….

후우우우우우웅-!!

성인 남성의 몸 정도는 가볍게 밀쳐낼 만큼 강한 풍압이 불어오며 분진이 발생.

물론 휘몰아치는 장대비 덕분에 시야는 빠르게 회복되긴 했지만…….

“다, 다들 괜찮소이까?”

와, 진짜 온몸에 닭살이 돋네.

“……앞으로는 자나깨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겠군요.”

먼지가 가라앉고, 그 지점에 생긴 크레이터를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린다.

그도 그럴 게, 게임에서는 그랬거든.

‘즉사.’

저 운석은 즉사 판정을 갖고 있다.

중심부 5m 반경에서 적중 시에는 캐릭터를 어떻게 키웠든 한 방에 게임 오버 화면이 떠오른다.

뭐, 그나마 외각에서 맞을 땐 고정 대미지가 들어오는 정도에서 그치긴 하지만…….

사실 이것도 큰 의미는 없다.

어차피 어지간한 탱커들은 한 방에 죽여버리는 대미지가 들어오거든.

“후우…….”

강력한 폭발에 넋이 나간 이들을 보며 그 마음에 공감하기도 잠시.

나는 서둘러 큰 소리로 외쳤다.

그도 그럴 게, 운석이 떨어지는 것도 같다면 그 이후도 게임과 동일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다들 정신 차려라!”

함성을 내질러 모두의 정신을 일깨움과 동시.

번뜩-!

벼락 줄기 하나가 크레이터의 중심부를 향해 내리꽂힌다.

그리고…….

‘역시 이놈도 나오는구나.’

벼락이 내리꽂힌 지점에 맺힌 하얀 몽우리 같은 무언가가 순식간에 크기를 키우며 형체를 갖춘다.

이족보행을 하며 팔이 두짝이며 척추를 따라 목이 위로 서 있는, ‘인간형’ 마물.

아, 물론 분류가 그럴 뿐 인간과는 거리가 멀다.

그야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빛으로 이뤄진 인간은 없을뿐더러…….

치지지지지지직-!

사이즈부터가 문제다.

애초에 저렇게 큰 인간은 없잖아?

[거대화]를 가진 바바리안이라면 모를까.

“기가제르오스……!”

이번에도 역시나 마물을 보자마자 버릇처럼 입을 열어 설명을 시작한 GM.

다만 이전과는 조금 느낌이 다르다.

“매우 강력한 전격 속성의 이능을 쓰고, 보이는 것과 다르게 엄청나게 민첩한 마물입니다!”

여유를 갖고 설명하던 이전과 다르게 속사포로 빠르게 설명을 끝내는 GM.

한데 그래서인지 가장 중요한 설명이 빠졌다.

“2등급 마물이니 다들 조심해라!”

2등급 마물 기가제르오스.

브라키아이스텔로와 마찬가지로 별무덤에서만 출현하며, 2등급 마물 중에서도 단일 전투력 하나는 최상위권에 속하는 마물.

나는 평소 ‘천둥 거인’이라 불렀다.

그도 그럴 게, 암만 봐도 기가제르오스보단 그게 잘 어울리거든.

「기가제르오스가 [대방류]를 시전했습니다.」

이내 방패를 꺼내들며 앞으로 달려가기 무섭게 천둥 거인의 몸에서 폭발하듯 전류가 방출된다.

치지지지지직-!

가드는 해봤자 의미가 없었다.

이러한 범위 스킬은 아이기스의 장벽으로도 막는 게 불가능하니까.

그냥 맞는 수밖에 없는 것인데…….

「캐릭터가 [탐욕의 비늘]을 시전했습니다.」

[거대화]로 한 차례 키운 몸뚱이 위에 푸른색의 비늘이 돋아난다.

‘벨라리오스’ 정수를 통해 얻게 된 ‘드래곤 모드’.

‘아오, 저려.’

천둥 거인이 뿜어낸 전류가 몸에 맞닿으며 근육이 경련했지만…….

「캐릭터가 [마비] 상태에 빠집니다.」

입은 피해는 딱 그 정도.

「마비 상태가 해제됩니다.」

항마력 세팅을 끝낸 덕분에 불과 2초도 채 되기 전에 마비 상태가 해제된다.

다만, 뒤를 쓱 살펴보니…….

‘이백호 새끼는 아직도 안 풀렸네?’

너, CC기 방어기제는 아직 완성 못했구나?

‘이러니까 아직 10층도 못 갔지.’

이백호의 약점을 안 것에 미소 지으며 나는 더욱 힘차게 앞으로 대시했다.

그리고…….

「캐릭터가 [합선지대]의 범위 안에 들어섰습니다.」

놈의 근처에 다가간 즉시, 공기 중에 맺혀 있던 하얀 구슬이 전류를 뿜어내며 내 몸과 연결된다.

「캐릭터의 영혼력이 지속적으로 감소합니다.」

「영혼력 소모 시, 소모값에 비례해 고정 대미지를 입습니다.」

「기가제르오스의 모든 피해가 전격 속성으로 적용됩니다.」

「캐릭터가 [전도체] 상태에 빠집니다.」

「전격 피해를 입을 시, [대방류]가 시전됩니다.」

[합선지대].

전격 속성의 근접 캐릭터를 키운다면 일단 누구나 바라고 바랄 오오라 계열의 패시브 스킬.

치직-!

천둥 거인이 거대한 주먹으로 나를 내리찍는다.

「방어 성공.」

「아이기스의 장벽이 모든 피해를 흡수합니다.」

방패로 막으며 충격은 흡수했지만…….

묻어 있던 물방울이 튀듯, 주변에 떨어진 하얀 알갱이들에서 벼락이 날아든다.

음, 날아든다는 표현은 옳지 않으려나?

츠즈즈즛-!

빛의 속도를 눈으로 따라갈 수 없듯,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 알갱이들에서 뿜어져 나온 하얀 번개가 연결되어 있던 상황.

물론 피해량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캐릭터가 전격 피해를 입었습니다.」

「[대방류]가 시전됩니다.」

아까 놈의 몸에서 전류가 방출됐던 것처럼, 내 몸에서도 빛이 터져 나오며 사방으로 벼락 줄기가 뿜어져 나간다.

그것도 이전보다 효과가 300% 증폭된 형태로.

치지지지지직-!

그래도 다행히 뒤쪽에서 알아서 거리를 벌린 상태였는지 피해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이 상태면 근접 지원은 못 바랄 거 같네…….’

판단을 빠르게 끝마친 나는 몸이 따끔하든 말든 무시하며 놈의 몸체를 붙잡고 앞으로 달려나가며 동료들과 더욱 거리가 벌어지도록 만들었다.

몸 컨디션이 실시간으로 나빠지는 게 느껴졌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야 각자 저마다의 역할이 있는 거잖아?

탱커의 역할이 처맞는 것이라면.

「제이나 플라이어가 [치유 거머리]를 소환했습니다.」

힐러는 힐을 하는 것이 역할이다.

타닥.

몸에 달라붙은 반투명한 거머리들이 내 몸에 지속적으로 HP와 MP를 주입하고.

「제이나 플라이어가 [재생의 저주]를 시전했습니다.」

어째선지 ‘저주’로 판정되는 지속 치유 스킬을 시전한다.

「제이나 플라이어가 [생명 그릇]을 소환했습니다.」

또한 전투지 중심부에 제단 비슷한 구조물이 세워지며, 모든 인원들과 붉은색 실로 이어진다.

‘오케이, 이 정도면 탱킹은 충분하고…….’

나머지는 딜러들에게 달렸다.

“……어?”

……라고 생각한 차에 사건은 터졌다.

***

[던전 앤 스톤]에서 가장 중요한 직업이 무엇인가.

누군가 그리 말한다면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당당히 대답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직업은 탱커다.

그도 그렇지 않은가.

딜러의 실력이 부족하면 그냥 해당 몬스터를 잡지 못하고 끝나는 경우가 많지만, 메인 탱커의 스펙이 부족할 땐 거진 전멸로 이어진다.

실제로 내가 탱커로서 항상 임무를 수행했기에 위험한 탐사를 이어나가면서도 지금까지 동료들을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었다.

……몇 번을 제외하면 말이다.

아무튼.

나는 탱커의 중요성을 마법사, 신관들보다도 훨씬 더 높이 여긴다.

하지만…….

‘빌어먹을 신규 맵.’

일종의 신규 필드라 볼 수 있는 성벽 바깥.

그리고 그중에서도 정체 불명의 차원 비석을 타고 넘어온 이곳에서 내 상식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도 그럴 게…….

“……어?”

내가 탱커 역할을 수행하고, 딜러들이 착실하게 딜을 넣어가던 그때.

돌연 천둥 거인이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다름 아니라, 갑작스레 나를 무시하고 뒤에 있는 딜러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한 것인데…….

번뜩-!

블링크 계열의 이동기를 가지고 있는 만큼, 중간에 놈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으! 으악……!”

애석하게도 돌발 행동의 첫 타깃이 된 것은 바로 GM이었다.

바로 코앞에서 등장한 놈을 보며 급하게 마나 실드를 켜는 GM이었지만…….

콰지직-!

2등급 몬스터답게 급조해서 만든 마나 실드는 가볍게 박살내며 클린 히트.

다만, 그래도 충격을 줄인 보람은 있었다.

아니었으면 진짜 한 방에 죽었을 수도 있거든.

“니미럴! 하벨리온! 어때? 살았어?”

“사, 살아는 있어요!”

“그럼 빨리 살려! 그 새끼 뒈지면 마법진도 못 고칠 거 아니야!!”

이곳에서 탈출하는 방법도 찾기 전인데, 마법진이 대체 뭔 소용인가 싶지만…….

이백호의 호통에 제이나가 GM을 집중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

뒤늦게 따라온 내가 다시 놈을 마킹하려고 하던 차.

번뜩-!

또 한 번 놈이 순간 이동 스킬을 사용하며 눈앞에서 사라진다.

‘아니, 이게 대체 뭔…….’

동일한 돌발 행동이 한 번도 아닌 두 번.

더 이상 부정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위협 수치가 통하지 않는다고……?’

[거대화]로 끌어올린 ‘위협 수치’.

그리고 그 위협 수치를 기반으로 발동시킬 수 있는 ‘아이기스의 장벽’의 무조건적인 어그로 효과.

녀석은 이 두 개를 무시하고 있었다.

마치 마물 판정이 아니라 ‘사람’으로 판정되는 것처럼.

“꽉 잡으시오!”

“꺄악!”

두 번째 기습에서는 다행히 궁수가 반응하며 힐러를 안전하게 낚아챘다.

하지만 그럼에도 상황은 좋지 않았다.

치지지지지직-!!

싱거운 마물도 아니고, 무려 2등급이지 않은가.

탱킹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반드시 희생자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인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정말이지 오랜만에 마물을 상대로 그러한 막막함을 느끼며 머리가 복잡해지던 그때였다.

“……니미럴.”

이백호가 천둥 거인을 보며 혀를 찬다.

뭔가 진심으로 이 상황이 답답해서 욕지거리를 뱉었다고 하기엔, 조금 뉘앙스가 이상했다.

어딘가 아쉬워 하는 듯한 느낌이라 해야 하나?

“이건 진짜 보여 주기 싫었는데.”

……뭐지?

마치 자기한테는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다는 것처럼.

“다들 최대한 멀리 도망쳐.”

이내 그리 읊조린 이백호가 손을 앞으로 뻗는다.

그리고…….

지직—

손 앞에 형성된 암흑 구체가 회전하며 주변의 공기가 빨려들어가기 시작한다.

‘아니, 잠깐만.’

이거 어디서 많이 봤던 건데?

“빠, 빨리 도망치시오! 휘말리면 남작도 멀쩡하지 못할 테니!”

이내 다급하게 소리치면서 이백호의 반대로 뛰기 시작한 아우레스.

일단 나도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서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몇 초나 흘렀을까.

“차징은 이만하면 되겠고.”

이백호의 짧은 읊조림과 함께.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암흑구체가 폭발하며 흑색 섬광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

「기가제르오스를 처치했습니다 +EXP 8」

눈이 멀어버린 것처럼 앞이 캄캄하게 변했지만, 나는 천둥 거인과의 전투가 끝났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야 나는 알고 있으니까.

지금 본 이 스킬의 정체가 무엇인지.

“별의 소멸…….”

어둠의 군주 데드레드의 액티브 스킬이자, 파괴력 하나로는 그 어떤 정수로도 견줄 게 없는, 명실상부 [던전 앤 스톤]의 최강의 공격 스킬.

‘미친…….’

이 새끼가 이 스킬을 갖고 있었다고……?


18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71화 18

671화 별무덤 (2)

어둠의 군주 데드레드.

이 녀석의 강력함을 설명하는 것에는 딱 한 줄이면 충분하다.

놈은 제7계층, 암흑대륙의 군주다.

뭐, 7계층의 경우엔 특이하게도 군주가 둘이나 존재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강력함이 줄어드는 건 아니니까.

아무튼.

‘이놈이 저걸 대체 어떻게 먹은 거지……?’

솔직히 말하자면, 납득이 안 된다.

정수로 찍어누르는 게 가능한 치트 버전과 달리, 오리지널 난이도에선 ‘그 방법’을 알지 못하면 사실상 공략이 불가능하다.

한데 그동안 내가 이백호를 과소평가했던 걸까?

어쩌면 이 녀석은 의외로 대단한 녀석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대단히 운이 좋았거나.’

데드레드 정수를 얻게 된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추측을 해보자면 아마 저 정수를 얻은 것은 아주 오래전일 확률이 높다.

그도 그럴 게…….

‘마지막으로 소환된 게 거진 8년 전이었으니까.’

늘 탐험가들로 가득한 미궁 특성상, 계층군주를 몰래 소환하는 것 따위는 불가능하다.

고로, 8년 이내에는 얻고 싶어도 기회가 없다.

아, 물론 자연적인 방법으로는 말이다.

‘왕가라면 계층정수도 하나쯤 시험관에 보관하고 있을 것 같단 말이지.’

중간에 어떠한 거래를 통해 그것을 이백호가 얻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정황상 그 가능성은 좀 낮아보이지만.

‘……그날 정말 소환이 됐던 거구나.’

하렘을 꿈꾸며 미궁 탐사를 해나가던 이백호가 동료의 배신으로 정체가 탄로났던 것.

놀랍게도 그 시기가 딱 그때다.

그래서 나는 왕가에서 이백호에 관한 사건을 은폐하려고 계층군주 핑계를 댄 줄 알았다.

미궁에서 탐험가들이 엄청 죽어나갔다 들었거든.

‘분명 소환한 것도 이백호였겠지.’

한 번 더 궁예질을 해보자면, 계층군주를 소환한 건 이백호였을 것이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는 도박수를 던져서라도 판을 흔들 필요가 있으니—.

“언제 봐도 무시무시한 위력이구려…….”

그렇게 상념에 잠겨 있던 때, 옆에 있던 아우레스가 숨을 길게 내쉬며 중얼거린다.

“다들 다친 곳은 없으시오……?”

그래도 명색이 탱커라고 동료들 안위부터 묻는 게 습관인 모양.

“전 괜찮아요.”

“마찬가지입니다.”

아우레스의 물음에 힐러 제이나와 궁수 브라이엇이 정신을 차리고 답한 반면, 아직도 내게 짐짝처럼 들려 있는 GM은 달랐다.

여전히 넋이 나가 있다고 해야 하나?

“……바, 방금 저, 저게 대체 뭡니까?”

뭐야, 얘는 게임할 때 어둠의 군주도 안 잡아 봤나?

나는 그냥 딱 보자마자 그 스킬이구나 싶던데.

“이, 이런 이능이 존재한다는 건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래도 저 영혼이 빠져나간 표정은 이해가 된다.

나조차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인지라 그 위력에 소름이 쫙 돋을 지경이었으니.

하물며 아예 저 스킬의 존재도 몰랐다면야.

치이이이이이익-!

지면에 남은 열기에 쏟아지는 장대비가 증발하며 생긴 수증기가 화재 현장처럼 높이 치솟는다.

물론 그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열기가 빠르게 식으며 수증기도 사라졌고, 그로 인해 시야도 회복됐다.

“…….”

운석 하나만 떨어졌을 때보다 훨씬 더 크게 확장이 된 크레이터.

그 안에는 이백호만이 고독하게 서 있었는데…….

“서프라이즈!”

이내 이백호가 우리를 올려다보며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흔든다.

이런 걸 보면 마냥 웃긴 녀석 같은데…….

‘설마 저 웃는 얼굴 뒤편에 핵무기가 숨겨져 있을 줄이야.’

어쩌면 이제는 재고를 해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필시 싸우면 절대 지지는 않을 거라 판단했건만.

“뭣들 해? 다 끝났는데 이리 오지 않고!”

이백호의 호출에 우리는 다시금 크레이터가 생긴 곳으로 다가갔다.

“파멸할배! 일단 이것부터 챙겨봐! 이거 엄청 비싼 거 맞지?”

이내 이백호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가리킨 지점엔 새하얀 구슬이 떨어져 있었다.

치지지직-!

구슬 안에 담긴 전류가 춤을 추듯 움직이는 구슬.

굳이 현대의 물건과 따지면 ‘플라즈마볼’과 굉장히 유사했다.

그 있지 않은가?

타로 가게에 하나쯤 소품으로 있을 법한 그거.

“이건… ‘천둥의 구’로군.”

“아, 맞아 그런 이름이었지. 그래서 이건 얼만데?”

“마법사들에겐 값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보물일세.”

“아니, 그래서 얼마냐고?”

이백호의 집요한 물음에 파멸학자가 예상되는 숫자를 대략적으로나마 읊어주자 이백호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와, 이게 그렇게까지 비싸다고? 자칫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이백호가 저렇게 안도하는 것도 공감은 갔다.

반경 70m가 넘는 공간을 통째로 지워버린 위력의 스킬이지 않았던가.

일반적인 마물이었다면 통째로 소멸하는 바람에 부산물은 획득할 수 없었을 터.

“응? 그거 그냥 주우면 되는 거야?”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네만, 부산물 처리 시, 딱히 마법적인 조치를 할 필요는 없다고 알고 있네.”

“아, 그렇구나……. 그럼 이리 줘.”

이내 드롭된 ‘천둥의 구’가 이백호의 아공간 안으로 쏙 들어간다.

왠지 모르게 배가 아팠지만 딴지는 걸지 않았다.

단순히 이백호가 예상보다 훨씬 강해서가 아니라.

‘스킬 보여 준 값은 쳐줘야겠지.’

숨겨둔 비장의 수나 다름없었을 스킬 아니던가.

만약 끝까지 이백호가 이걸 보여 주지 않으려고 아꼈다면 전투는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애초에 ‘천둥의 구’가 당장 필요한 상황도 아니고.

‘딜탱 바바로 갈 땐 저거로 망치를 만들면 좋긴 한데…….’

이미 ‘No.87 크라울의 악마분쇄기’를 얻었기에 큰 의미는 없을뿐더러, 동료들 중에 천둥 무기가 필요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고로, 이번 건 지분을 요구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정말 갖고 싶은 게 생기면 이번에 양보한 것을 빌미로 삼을 수도 있을 테니까.

“오케이, 그럼 루팅도 끝났겠다… 다시 할 일이나 해봅시다.”

이내 루팅을 끝마친 이백호는 즉시 등을 돌리며 크레이터가 생기며 바닥에 넘어진 비석으로 다가갔다.

“그래도 다행히 흠집 하나 안 나긴 했네. 이거 그냥 이대로 아공간에 집어 넣어볼까? 소재로도 가치가 있을 거 같은데.”

그리 말하는 이백호에게서는 왠지 모르게 화제 전환을 하려는 느낌이 풍겼다.

‘[별의 소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까 봐 그러는 건가?’

정확한 속내는 알 수 없지만, 그러한 태도 덕에 정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타이밍을 잃었다.

‘…사실 물어봐도 큰 의미는 없을 거 같지만.’

어찌 됐든, 나도 저 비석에 관해서는 호기심이 생긴 건 마찬가지였기에 얼른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한창 이백호와 아우레스가 힘을 합쳐 비석을 아공간 안에 집어넣으려는 시도를 하는 중이었는데…….

“비켜봐라. 나도 도울 테니.”

이내 나까지 가세하자 천근보다 무겁던 비석이 가벼이 들어 올려진다.

그리고…….

“억?!”

아공간에 끄트머리가 살짝 들어가기 무섭게 엄청난 반발력과 함께 밖으로 튕겨져 나간다.

쿠우우우웅-!

육중한 소리를 내며 반쯤 땅에 박힌 비석.

“와씨! 뭐야 이거!”

이백호가 호들갑을 떨자 GM이 비석 앞에 다가가 쪼그려 앉는다.

“…굉장히 특이하군요. 내부에 마력 회로나 그러한 성질은 일절 느껴지지 않는데, 아공간에 이렇게나 극심한 거부 반응이라니.”

“확실히 수상하긴 하지?”

“예… 시간을 두고 좀 더 정밀하게 조사를 해볼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어때? 한동안 이걸 조사해보려 하는데… 아, 남작님도 동의하시죠?”

자연스레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하는 이백호를 보며 나는 피식 웃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동의한다.”

장대비가 쏟아져 내리고.

심지어 중간중간 운석까지 떨어져 내리는 위험한 지역이지만, 어쩌면 이게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열쇠일지도 모르니까.

“저… 그럼 우선 성분 조사부터 하려는데, 저기… 아우레스 공? 여기 이것 좀 잠시 잡아주시겠습니까?”

“오! 물론이올시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

제9계층, 별무덤.

엄밀히 말하자면 그곳과 매우 유사한 지역이라 할 수 있지만 아무튼.

이곳은 한 장소에서 무언가를 진득하게 연구하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솨아아아아아-!

폭풍우처럼 쏟아져내리는 빗물은 추위나 불편함을 넘어 홍수라도 난 것처럼 계속해서 수심이 올라갔고.

콰아아아아아아앙-!

중간중간 운석이 떨어지기도 했으며.

번뜩-!

낙뢰, 폭설, 강풍, 우박, 지진, 허리케인 등등등.

자연재해란 자연재해는 전부 다 겪었으며, 그런 와중에 계속해서 마물이 나타나 전투를 해야만 했다.

문제는…….

“야, 일주일이나 줬으면 뭔가 알아내야 하는 거 아니냐?”

“…….”

“파멸할배, 할배도 그렇게 안 봤는데 왜 그래? 못 할 거 같으면 못 한다. 그렇게 말이라도 해줘야 우리가 시간 낭비를 안 하지. 응?”

비석을 일주일에 걸쳐 정밀 조사했음에도 알아낸 것은 이 비석이 아주 단단하다는 것 외에는 제로.

다만 오히려 다른 쪽에서 소득이 있었다.

전투 횟수가 쌓이며 이곳의 마물에 대해 더욱더 자세히 파악할 수 있게 됐달까?

‘위협 수치가 확실하게 먹통이야.’

여기서는 어그로를 제대로 끌기 어렵다.

필드 효과나 그런 것 때문에 ‘위협 수치’가 0이 되거나 한 것은 아니다.

단지…….

“아무래도 이곳 마물들의 지능이 높아서 발생하는 현상 같습니다.”

처음엔 흥분해서 달려들던 마물들도 내가 멀쩡하게 잘 버티고 있으면 금방 생각을 고쳐먹고 딜러들부터 공략하려든다.

마치 학습이라도 하듯이.

‘어그로가 제대로 안 끌리니까 체감 난이도가 무슨 세 배, 네 배 되는 거 같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매 전투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힘겹게 해나간 것은 아니었다.

간혹 정말 위험한 경우도 있기는 했지만…….

왜 사람이야말로 가장 적응을 잘하는 동물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전방 북북동 방향에 마물입니다!”

“……레디트로우스군요.”

“각자 위치로!”

혼자 앞으로 나가 메인 탱커를 하는 게 아니라, 일행 근처에 머무르며 방어벽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어차피 한 마리다! 다급하게 움직이지 말고 보호하는 데 집중해라!”

마물이 일반 필드에 비해 극도로 적다는 점을 활용해 최대한 안전하게 전투를 치른다.

“야, 무슨 5등급 잡몹 부산물을 전부 다 챙기려 그래? 자리 없으니까 부피가 큰 건 그냥 버려!”

“등급은 낮을지라도 매우 희귀한 재료입니다. 추후 도시로 돌아가기만 해도—.”

“거, 욕심이 아주 그득그득하기는. 앞으로 챙길 것들만 챙겨서 돌아가도 엄청 땡길 수 있을 텐데.”

“…….”

부산물 중에는 특히나 값어치가 나가는 것들 위주로 챙기고, 나머지는 대부분 그냥 내다버렸다.

어차피 도시로 돌아가려면 최소 몇 달은 걸릴 텐데, 그때쯤에는 인벤토리가 부족할 수 있으니까.

시간 낭비를 줄이자는 선택이었다.

“…그래서 남작님은 어쩔 생각이에요?”

“조사는 이만하고 움직여야 한다 생각한다.”

“어디로요?”

“일단 한 방향으로 쭉 나아가는 게 좋을 거 같다.”

“하긴,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있겠네요. 근데 그럼 어느 방향으로 가려고?”

현재 우리가 있는 곳은 9층 별무덤.

그중에도 중심부에 위치하는 ‘태고의 땅’이다.

참고로 여기서 특수 조건을 만족시키면 ‘태고룡’을 소환해서 잡을 수가 있는데…….

‘소환하는 순간 게임 오버니까 이건 패스하고…….’

나는 생각하고 있던 행선지를 말했다.

“서쪽이다.”

“여기서 서쪽이면… 옛바위 초원? 왜 거긴데요?”

그야 간단한 이유다.

“옛바위 초원에는 ‘정령의 문’이 있으니까.”

“아, 그걸 타면 어디로 가는지 확인해보려는 거구나.”

“뭐, 있을지 없을지도 확실하진 않지만 말이다.”

“그렇구나. 난 또 8단계 각인 재료 때문에 거기로 가자고 하는 줄 알았네!”

……이 눈치 빠른 녀석.

“됐고, 얼른 출발하지. 여기서 더 조사해봤자 나오는 것도 없을 거 같으니.”

“예예! 다들 들었지? 이제 가자!”

그렇게 상황이 마무리 된 후에는 앞선 계획대로 서쪽으로 이동했고, 나흘 정도 흘렀을 때 예정지던 옛바위 초원이 등장했다.

그리고…….

“……하, 여기서 막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네.”

옛바위 초원을 절반 정도 지나쳤을 때, 막다른 벽이 우리를 가로막았다.

솨아아아아아-!

라프도니아 해안선에서도 한 번 보았던, 모든 것이 색을 잃은 채 죽어가는 잿빛의 세계.

“혹시라도 다가가지 마요. 저거 닿는 순간 그냥 바로 즉사니까.”

오, 그럼 여기서 밀치면 이백호가 죽는단 뜻인가?

불현듯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시도는 하지 않았다.

일단 힘을 합쳐 여기서 나가는 게 우선이니까.

“우선 이 경계선을 따라서 빙 돌아보는 거로 하는 게 좋겠군.”

이후로는 경계선을 왼쪽에 두고서 이동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그리고, 보름.

무려 15일에 걸쳐 빠르게 이동한 우리는 날이 갈수록 점점 말이 없어졌다.

그야 지도의 외곽부가 완성될수록 불길한 확신이 차오르기 시작했거든.

“저기 혹시…….”

“그냥 조용히 있어.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

“예…….”

그 뒤로도 이틀이 더 흘러 17일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다시금 옛바위 초원에 돌아와 있었다.

경계선을 왼쪽에 두고서 한 바퀴를 크게 빙 돌은 것인데…….

지이이이익.

지도에 불완전하게 그려져 있던 동그라미에 선을 마침내 이어그리며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제는 부정을 탈까 말을 아낄 필요도 없었다.

“니미럴.”

우리는 이곳에 갇혔다.


29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72화 29

672화 별무덤 (3)

성벽 밖에서 조우한 남자가 알려준 차원 비석.

그리고 그 비석을 타고 넘어온, 제9계층 별무덤과 매우 흡사한 미지의 땅.

처음엔 여기가 미궁 내부인 건가도 싶었지만…….

‘역시 그건 아닌가 보네.’

이곳은 성벽 바깥에 속한다.

그 증거로 마물들의 지능이 높은 것도 일치하며, 마물을 처치했을 때 부산물이 그대로 남는단 점도 그대로다.

다만 문제는…….

‘걸어서 돌아가는 게 불가능하다 이거네.’

이곳은 사실상 ‘섬’이나 다름없다.

아니, 어찌 보면 섬보다 더하다.

설령 위치는 대륙 어딘가에 있을지 몰라도, 사방이 잿빛 경계선으로 이뤄져 아예 그 너머로 나아가는 게 불가능했으니까.

쉽게 말해, 물리적인 탈출 가능성은 제로.

“…남작님? 이제… 어쩌려고요?”

이백호가 눈치를 쓱 보더니 내게 그리 물어온다.

좀 어이가 없었다.

그동안 지휘권을 빼앗아오려 은연 중에 신경전을 하더니, 일이 이렇게 되자마자 싹 모른 척한다는 게.

“크게 한 바퀴 둘러보자고, 어딘가에는 나가는 길이 있을 거라고 말한 건 우리 남작님이었잖아요.”

“나가는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것 같은데.”

“에이, 그게 그거 아닌가?”

어쩜 이리 얄미운 놈이 있을까도 싶지만, 이럴 때 예민하게 반응을 하면 지는 거랬다.

고로, 그냥 싹 무시하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수확은 있었지 않냐.”

“네. 이곳에 제대로 갇혔다는 건 알아냈으니까요. 그렇죠?”

아, 진짜 한 대 때릴까?

순간 그런 욕구가 치밀어 오르지만, 참을 인과 [별의 소멸]을 생각하며 겨우 참아냈다.

“……그래,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수확이다. 게다가 지도도 얼추 완성했고.”

“외곽 테두리만 다 그렸을 뿐이지, 그 속은 텅텅 비어있는 상태인데요?”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그 빈 부분만 수색을 하면 되는 거다. 분명 어딘가에는 원래 있던 곳, 혹은 다른 곳과 이어진 차원 비석이 있을 테니까.”

이내 수많은 리더 경험으로 갈고닦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지만, 이백호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나를 꼬나볼 뿐이었다.

“그거 근거 없는 확신 아닌가? 차원 비석이 있을 줄 남작님이 어떻게 아는데요?”

그야…….

‘[던전 앤 스톤]은 그런 게임이니까.’

물론 이는 좀 안일한 생각일 수도 있다.

이곳은 게임에서 가보지 못했던 ‘성벽 바깥’이며, 내가 직접 들어와서 겪은 이 세상의 현실은 ‘게임’과 엄연히 달랐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거냐?”

그냥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 게 아니다.

탈출구가 없어 보이는 나락에 갇힌 듯하더라도, 반드시 세상 어딘가에는 나가는 길이 있다는 것.

그게 바로 내 철칙이며 신념이다.

“확신이 없으면, 그럼 여기서 그냥 가만히 앉아서 쉬고만 있을 거냐?”

“에이,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니면 잠자코 따라오기나 해라. 너희들 전부가 안 된다 말하며 포기해도, 나는 반드시 방법을 찾아낼 테니까.”

이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하자, 이백호는 잠시 말이 없어지는가 싶더니 어딘가 감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와, 남작님 말빨 죽이네. 지금까지 다들 이렇게 홀렸어요?”

그런 이백호의 말에 옆에 있던 궁수도 한마디를 덧붙인다.

“신기한 경험이군요. 일순간 정말로 아무런 걱정도 들지가 않았습니다.”

“하하핫! 애초에 나는 남작이 틀린 말 하지 않았다 생각하오! 뭐라도 해야지! 가만히 있으면 배고프기만 더하지 않겠소이까!”

이후 아우레스마저 호쾌하게 웃으며 나서자 살짝 예민해질 수 있던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팀 내에 이런 긍정적인 전사가 한 명쯤은 있어야 하는 이유다.

리더 경험을 여러번 해보니, 이런 타입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엄청 크거든.

“자, 그럼 다시 출발하지.”

……가보자.

***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단 하나다.

아직 밝히지 못한 맵을 전부 다 직접 돌아다니며 ‘차원 비석’ 혹은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문제는 그러다 보니 이 넓은 지역을 꼼꼼하게 다 살펴야 한다는 거겠지만.

고로, 우리들의 탐사 방식은 아주 간단했다.

“나무 아래, 절벽, 동굴, 작은 틈새, 구조물……. 뭐든 좋으니 조금이라도 눈에 띄는 게 있다면 바로 말해라. 알겠나?”

탐색꾼 포지션인 궁수 브라이엇만이 아니라 팀의 모든 인원이 이동 중에도 주변을 샅샅이 살핀다.

그러다가 무언가 발견하면…….

“얕은 연못처럼 보이지만 수심이 굉장히 깊은 편이군요. 무언가를 숨기기엔 제격인 장소입니다.”

“좋아, 잠시 멈춰서 확인해보지.”

마법으로 탐지를 돌리고, 그럼에도 어딘가 찝찝해 직접 물 안에까지 들어가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말도 나오긴 했지만, 나는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데일란’이라는 놈이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예의 그 차원 비석도 일반적으로는 찾기 어려운 절벽 틈새에 숨겨져 있었지 않은가.

이 정도는 해야지만 나중에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곳에 ‘차원 비석’이 없다고.

그러니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남작! 이것 좀 봐보시오! 여기 이거 좀 수상하지 않소?”

“대체 어디가 수상한 거지……?”

“여기 여기! 꽃 이파리가 꺾여 있소!”

“……됐다, 마저 이동하지.”

아, 물론 그럼에도 거를 건 걸러서 들으며 시간을 아꼈다.

“왜! 아까는 사소한 거라도 다 말하지 않았소이까!”

아니, 그래도 그렇지.

꽃 이파리가 꺾였는데 나보고 뭘 어쩌란 거야?

이걸 대체 뭘 어떻게 확인해야 하는데?

“루인제네스 공! 공이라도 한번 확인을 해주면 안 되겠소이까?!”

내가 한 귀로 듣고 흘리자 파멸할배에게 가서 징징거리기 시작한 아우레스.

당연한 말이지만, 할배가 저 요청을 들어줄 리 없었다.

“어서 가세.”

“루인제네스 공!!”

“그럼 계속 이동하지.”

그렇게 다시금 재개된 수색.

꼼꼼이 수색을 하는 만큼 속도는 조금 느리지만 착실하게 지도가 채워진다.

‘옛바위 초원은 이제 70% 정도 끝났고…….’

현재 우리가 있는 지역의 구조는 간단하다.

우리가 처음 포탈을 타고 넘어왔던 ‘태고의 땅’을 중심으로 서쪽엔 ‘옛바위 초원’.

북쪽으론 ‘맹독 용암지’.

동쪽엔 ‘꿈결 폭포’와 남쪽엔 ‘용골산’이 존재한다.

하지만 태고의 땅을 제외하면 전부다 재의 경계선 때문에 필드가 중간에 잘려 있는 구조인데…….

‘제일 큰 문제는 꿈결 폭포이려나…….’

맹독 용암지와 용골산.

두 필드 모두 9층을 토대로 하는 만큼 난이도가 높지만, ‘꿈결 폭포’에 비할 바는 아니다.

단순히 지나치는 게 아니라, 차원 비석을 찾기 위해 꼼꼼이 수색을 해야 한다면 더욱더—.

“사람! 사람의 흔적입니다!”

…응?

“정말이군. 이건 분명 사람의 족적일세.”

‘옛바위 초원’을 탐색하고 있던 때, 돌연 사람의 흔적이 발견됐다.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수상한 것’을 찾고 있던 우리가 이걸 보고 그냥 넘어갈 리 만무.

“브라이엇, 너는 이제부터 선두에 서서 흔적을 추격해라. 지금부터 전속력으로 이동한다.”

빠르게 오더를 내리며 우리가 낼 수 있는 최대 속도로 흔적을 뒤따랐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

초원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몇 달은 씻지 않은 것처럼 굉장히 남루하고 꼬질꼬질한 옷차림을 한 남자.

이 묘사만 보면 우리를 이곳으로 유인한 ‘데일란’과 공통점이 있었지만…….

스윽.

이내 우리들의 기척을 느낀 남자가 등을 돌린 순간.

우리는 저것이 ‘데일란’도 ‘사람’도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검은색 거미가 얼굴에 붙어 있었거든.

“…뭐야, 바이욘이었네.”

3등급 인간형 마물 바이욘.

내가 가진 [초월] 스킬의 원주인이기도 한 마물.

참고로 이놈은 7층 암흑대륙의 필드 중 하나인 ‘불멸의 땅’에서 주로 출현하는데…….

9층 ‘옛바위 초원’에서도 가끔씩 등장한다.

“하, 나는 무조건 데일란 그놈일 줄 알았는데.”

“결국 허탕이었군요…….”

흔적의 정체를 알게 되자 기운이 빠진 듯한 모습을 내비치는 일행들이었으나, 사실 나는 이놈을 만난 게 꽤 기뻤다.

표정 관리를 해야 할 만큼 말이다.

‘드디어 찾았네.’

‘바이욘’은 방패바바를 키울 때 가장 많이 잡아야 하는 마물 중 하나다.

그도 그럴 게, [초월]도 얻어야 할뿐더러.

바이욘의 부산물 중 하나인 ‘기생 거미’는 정말 어지간하면 경매장에는 안 올라오거든.

“그래도 남작님은 좋겠네? 쟤가 8단계 각인 재료를 주니까.”

“…….”

“그래도 부럽네요. 더 강해질 게 아직 한참이나 더 남았다는 게.”

이내 이백호가 뼈가 담긴 농담을 하며 스트레칭을 하듯 팔을 휙휙 돌린다.

그리고…….

타닷-!

즉시 바이욘을 향해 대시.

리더 자리를 좀 해본 사람이라면 본 즉시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 돌발 행동.

“잠깐!”

“고작 3등급 몬스터인데 뭘?”

고작 3등급 몬스터.

틀린 말은 아니지만, 바이욘은 꽤 위험한 마물이다.

다른 마물들과 달리 개체마다 그 전투력의 편차가 몹시 크고, 능력도 제각각 다르기에 반드시 탐색전을 가진 후에 사냥하는 게 정석적인 공략법—.

콰지직-!

……뭐, 상관없으려나?

“아! 개운해!”

흑색의 오오라가 실린 이백호의 정권 찌르기 한 방에 심장부가 꿰뚫리며 쓰러진 바이욘.

그와 동시에 뭔가 차오르는 기분이 피어난다.

탐험가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감각이었다.

「바이욘을 처치했습니다. EXP +7」

전에 ‘기가제르오스’를 잡았을 때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긴가민가 했는데.

여기서도 확실하게 경험치 수급이 되는 거구나.

“어디보자… 우리 남작님 각인 재료부터 루팅해 볼까… 응?”

완전히 명줄이 끊긴 바이욘에게 다가가 얼굴에 달라붙어 있던 거미를 떼어내려던 이백호가 돌연 흠칫하며 굳는다.

“백호? 왜 그러는 것… 으악! 뭐요 이게!”

그 뒤에 다가간 아우레스마저 화들짝 놀라는 걸 보니 뭔가 변수가 발생한 듯했다.

따라서 나도 얼른 다가가 바이욘의 시신을 확인—.

“…어?”

뭐야, 이거.

이내 거미가 치워지며 드러난 ‘바이욘’의 얼굴을 본 나 역시 앞선 사람들처럼 똑깥이 놀랄 수밖에 없었고, 이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색이 검게 변했긴 하지만 이, 이건 그 사람 아닙니까?”

옛바위 초원에서 마주친 인간형 마물 ‘바이욘’.

그놈은 ‘데일란’의 얼굴을 갖고 있었다.

***

점점 더 사건이 미궁으로 빠진다.

우리를 이곳으로 유인하고서 사라진 데일란.

이놈이 왜 마물로 변해서 이곳을 배회 중이던 걸까.

“…혹시 고견을 들을 수 있을는지요?”

GM의 조심스러운 요구에 파멸학자가 뭐라 입을 열었다.

“확실한 건 아니네만, 예전에 오래된 고서에서 읽은 적 있네. ‘바이욘’은 미궁에서 죽은 고대의 탐험가들이라고.”

공교롭게도 나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히든피스에 대한 정보가 있지 않을까 해서 매일 게임 세계관 설정 같은 걸 연구했거든.

“아! 그럼 바이욘이 탐험가들처럼 정수를 쓰는 것도 전부 다 그런 이유였던 거군요!”

“그렇다고는 하네만, 그리 근거 있는 이야기는 아닐세. 오히려 대중 오락을 위한 설화에 가까우면 가깝지.”

“…그렇습니까.”

도대체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한 것일까.

더더욱 알 수 없게 되는 가운데, 일단 이백호에게서 빼앗듯이 부산물을 넘겨받았다.

그야 궁금한 건 궁금한 거고, 이건 이거잖아?

‘이제 하나만 더 얻으면 되는 건가…….’

이로써 8단계 각인까지 남은 재료는 단 하나.

‘뭐, 이것도 성벽 바깥의 특성을 이용하면 금방 구할 수 있을 거 같기는 한데…….’

그래도 개체 수가 적은 이곳에서 잘 나오지도 않는 ‘바이욘’을 마주치다니 여러모로 운이 좋다고 말할 수 있—.

“오! 정말 데일란이 맞긴 한가 보구려! 여기 품을 뒤져보니 신분증도 있소!”

그때 아우레스가 흥분해서 몸을 일으킨다.

수박만 한 손에는 명함 크기의 신분증 하나가 들려 있었다.

“어디 보자, 이름이…….”

두근-

“한스……? 아! 그랬지! 맞아! 한스였소!”

두근-!

세차게 뛰기 시작한 심장.

나는 서둘러 판단을 내리고서 다급히 외쳤다.

“이동 준비!!”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최대한 빨리.


24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73화 24

673화 별무덤 (4)

이게 얼마 만에 한스더라?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오랜만에 마주치는 그것…….

한스다.

‘마지막이 K였지…….’

한스 카이사르.

내가 리헨 슈이츠로 활동할 당시, 암흑대륙에서 우연히 조우하게 된 녀석이다.

그리고…….

‘만난지 불과 2시간도 채 되기 전에 노아르크 놈들 기습이 시작됐지.’

결과적으로 큰 희생 없이 헤쳐 넘기긴 했지만, 자칫 큰일이 날 뻔했었다.

중간에 레이븐이 마음을 바꿔 먹지 않았더라면, 그날 내 여정은 ‘침묵의 우리’에 갇힌 채로 끝날 수도 있었으니까.

아무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한스 L.’

이번에 마주치게 된 한스의 코드다.

뭐, 마물로 변했다가 뒈진 놈도 ‘한스’ 판정인지는 조금 의구심이 들기는 하지만.

그래, 조심해서 나쁠 게 없으니까.

두근-!

미친듯이 뛰기 시작한 심장의 울림을 따르기로 하며 힘껏 소리친다.

“이동 준비!!!”

물론 사람들은 그런 내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응? 갑자기?”

“마물의 기척은 전혀 감지되지 않습니다만…….”

이해를 못하겠단 표정을 짓는 이백호와 궁수.

그러나 내 얼굴에서 다급한 마음만큼은 확실하게 인식을 했는지, 일단 자세는 바로 잡으며 몸을 움직일 준비는 착실하게 해준다.

“긴급 상황이다. 지금부터 이곳에서 최대한 멀리 벗어나야 한다.”

“아니, 그러니까 왜 그래야—.”

비상 사태 때는 말보다 행동이 중요한 법.

여러 의문들은 일축하고 먼저 달려나가기 시작하자 다들 일단 영문도 모른 채 내 뒤를 따랐다.

그냥 군중 심리 때문에 그랬다기보다는, 내가 이런 행동을 하는 데 이유가 있으리라 여기는 믿음이 더욱 컸다.

“…우선 가봅시다! 얀델 남작이 저런 행동을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겠지!”

그렇게 예고 없이 시작된 도주.

하나 일행들은 날 따라오면서도 계속해서 의문의 말을 꺼냈다.

“아니, 남작님! 그래서 뭔데요! 이제 좀 말해봐요. 뭐한테 도망치는지 정도는 알아야지!”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의문에 답해줄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야 나도 모르니까.

앞으로 우리가 ‘뭐 한테’ 도망을 쳐야 하는지.

“…곧 너희도 알 수 있을 거다.”

이것 말고는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기에, 그냥 그렇게 대충 얼버무렸다.

“아니, 이 남작님 진짜 사람 답답하게 만드네!”

이백호는 답답해 죽겠다는 듯한 반응이었으나, 도중에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람?”

우리의 시야 범위 끝에서 사람의 형체가 나타난다.

“사람이 아니라, 바이욘입니다.”

안면 부위에 검은색 거미가 내려앉은 거무튀튀한 피부의 마물.

놀랍게도 한 마리가 아니었다.

“……숫자가 꽤 많군요.”

선두에 있던 한 명을 시작으로 암흑 시야로 가려져 있던 뒤에서 나타난 다섯 마리의 바이욘.

“어이, 남작님! 이제 어쩔 거야!”

“최대한 빨리 제거하고 다시 이동한다.”

“오케이. 다들 들었지?”

이내 오더를 내리기 무섭게 이동 진형이던 일행이 전투 모드로 돌입하며, 바이욘을 상대한다.

전투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적의 숫자가 꽤 됐던 만큼 이백호도 아까처럼 무리하며 달려들지 않았고, 속도는 좀 빠를지언정 착실하게 ‘바이욘’들을 파악하며 전투를 치렀다.

“이 새끼 뭐야! 왜 스킬을 다 써?”

“…수호자의 정수입니다!”

“뭐? 이런 좆밥 같은 애가 피아닐의 정수를 갖고 있다고?”

이번에 마주친 바이욘들의 경우에는 보유 중이던 정수의 수준이 예상보다 훨씬 높았기에, 전투 시간 자체는 꽤 소요됐다.

‘15분이라…….’

사실 3등급 몬스터 여섯 마리를 잡았다고 하면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지만, 한스 L에 대한 불안감이 생긴 나로서는 그 시간조차 길게 느껴졌다.

‘아무튼, 아무도 안 다쳤으니 됐나…….’

전투가 마무리된 즉시 다시금 이동을 재개하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거기까지는 내 통솔력이 닿지 않았다.

“에이, 이걸 다 버리고 가요? 잠깐만 기다려 봐. 이거 루팅만 다 하고 가자고요.”

서둘러 이동해야 한다는 내 말을 싹 무시하고 루팅을 시작한 이백호.

그럴 시간이 없다고 말을 해도, 그럴 거면 뭐가 그리 급한 건지 말이라도 해달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하…….”

나로서도 조금 답답했다.

솔직히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다고 해야 하나?

‘한스… 라는 이름 때문이라고 하면 코웃음만 칠 테니까.’

내 곁에서 보고 듣고, 직접 느껴봤다면 모를까.

암만 사례를 들어도 미신으로 치부할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내 억지에 어울려주지도 않겠지.

그런 이유로 하는 수 없이 루팅하는 과정을 지켜보던 때였다.

“바이욘이 여섯 마리라니… 조금 특이하군요.”

“그렇네. 불멸의 땅이라면 모를까. 이곳에서 그리 흔히 볼 수 있는 개체는 아니거늘.”

마법사 두 명이 서로 의견을 주고 받는다.

그들의 말처럼 바이욘이 이렇게 여럿 등장한 것은 엄연히 이상 현상이었다.

다만…….

‘이게 끝일 리는 없겠지.’

고작 이것으로 한스 효과가 끝났다고 믿기에는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게, 그간 당한 게 한둘이었어야지.

“오케이, 이제 루팅 끝!”

어찌 됐든, 이백호도 신속하게 루팅을 끝냈고, 이로써 다시 이동을 할 준비가 끝났다.

하지만, 그런 내 발걸음을 잡는 이가 또 있었다.

“잠시만! 잠시만 다들 기다려보시오!”

이백호 팀의 탱커, 렉 아우레스.

그가 무언가 발견한 것처럼 소리를 쳤고, 이번에도 또 실없는 소리나 할 거 같아 무시를 하려 했지만…….

“이놈들! 이놈들도 얼굴이 익숙하오!”

넘겨 들을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

“브라이엇! 자네도 이것 좀 보시게! 이 녀석들… 우리 쪽 탐험가가 아닌가?”

“…그게 무슨 말이오?”

아우레스의 요구에 궁수가 다가가서 얼굴을 가리던 거미가 뜯겨져 나간 바이욘의 시신을 확인했다.

그리고…….

“맞군요. 전부 다는 아니지만, 그중에 아는 얼굴이 몇몇 섞여 있습니다.”

아우레스의 말에 동의하는 궁수 브라이엇.

그 말을 들은 GM이 조심스레 한 가지 가설을 입 밖으로 꺼냈다.

“혹시… 그 한스 데일란이라는 남자의 일행들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응?”

“그 있지 않습니까. 얘기를 들어보니 처음에는 백 명도 넘는 인원이 함께 바깥 세상을 돌아다녔다고 하던데……. 혹시 그들인 게 아닌가 해서…….”

“엥? 하지만 그놈들은 중간에 뿔뿔이 흩어졌다고 하지 않았소이까?”

아우레스가 의문을 내비쳤지만, 나로서는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거짓을 숨기기 가장 좋은 곳은 진실의 곁이니까.

‘수백 명이 성벽 바깥에 남은 것은 진실.’

다만 그들이 뿔뿔이 흩어진 것은 거짓이고, 어쩌면 무언가 사건에 휘말린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런 증거들도 발견이 되고 있고.

“……제 생각에는 이들이 마물로 변한 지 최소 몇 달은 지난 듯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바이욘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여기 목에 칼집이 나 있던 개체를 보시겠습니까? 필시 이 부상으로 인해 사망 후 ‘마물화’가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한데 여기 상의 목부분에 묻어 있는 핏자국은 적어도 몇 달 전에 생긴 것으로 확인이 됩니다.”

실험이 일상인 마법사다운 합리적인 추론.

파멸할배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음… 그럼 그 한스 데일란이란 친구도 사실은 몇 달 전에 죽은 걸 수도 있겠—.”

나느 중간에 말을 끊었다.

“데일란.”

“……?”

“이름 말고 그냥 데일란이라고만 호명해라.”

그도 그럴 게, ‘한스’란 말이 들려올 때마다 조건반사처럼 몸이 움찔거리거든,

“자네는 별 이상한 걸 다 신경 쓰는군.”

말까지 자르며 태클을 넣은 나를 이상하게 보는 것도 잠시, 파멸할배가 마저 말을 잇는다.

“여하튼, 데일란이란 친구 역시 몇 달 전에 사망을 했고, ‘마물화’가 진행된 거라면 일이 복잡해지네.”

“예. 우리가 만난 그 ‘데일란’이란 자는 ‘데일란’이 아니란 뜻이니까요.”

“응? 둘 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이해를 하나도 하지 못하겠소이다!”

“아우레스……. 쉽게 말해, 누군가 ‘데일란’인 척 연기를 하며 우리를 이곳으로 이끌었다는 뜻이에요.”

“……그런! 함정에 빠진 것인가!”

이내 제이나가 풀어서 설명해주자 크게 놀라며 괴성을 터트리는 렉 아우레스.

이제는 익숙한 일이었기에, 녀석이 그러거나 말거나 마법사 둘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듯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 가설이 맞다면 바이욘들도 이게 끝이 아닐 수 있을 걸세.”

“예…….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정말로 백 명도 넘는 이들이 이곳에서 무언가 사고를 당한 것이라면…….”

“그 많은 바이욘이 이 근처를 떠돌아 다니는 중일 수도 있겠지.”

그렇게 둘이 티키타카를 하며 결론을 내린 순간이었다.

“마물들의 접근이 감지됐습니다!”

탐색꾼 포지션인 궁수 브라이엇이 크게 소리친다.

“숫자는 다섯… 아니, 여섯… 일곱, 열, 열다섯……? 계속 늘어나는 중입니다!”

실시간으로 감지된 숫자를 말하는 브라이엇.

처음엔 다섯이었던 숫자가 서른을 넘어가기까지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마물 급류! 이 정도면 마물 급류라 칭해도 모자람 없을 정도입니다!”

마물 급류란, 급작스럽게 마물들이 몰려드는 현상을 뜻하는 탐험 용어로…….

“이야, 갑자기 몬스터 웨이브?”

플레이어는 이를 몬스터 웨이브라 칭하기도 한다.

“브라이엇, 마물 급류가 시작된 위치가 어디지?”

“위치랄 것도 없이 사방에서 몰려드는 중입니다. 마치 우리를 목표로 하는 것처럼!”

명백한 이상 현상이었다.

내내 돌아다닐 때는 잘 보이지도 않던 바이욘들이 갑자기 수십 마리 넘게 떼를 지어 모여든다니.

‘……한 마리를 잡은 게 뭔가 트리거가 된 건가?’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우선 당장은 고민보다 행동을 하고 나설 시기였다.

“아무리 이 멤버여도 수십 마리는 좀 힘들 거 같은데?”

“혹여 다른 마물이 나타나거나, 중간에 운석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 곤혹을 치를 것일세.”

“동북부 방향이 그나마 숫자가 적습니다.”

“앞장서라. 최대한 전투를 피하는 쪽으로 가겠다.”

“예.”

이후 우리 중에 가장 탐지 반경이 넓은 궁수에게 길잡이 역할을 부여하고서 그 뒤를 따랐다.

한데 확실히 탑 클래스의 탐색꾼이어서 그럴까?

“이쪽입니다!”

넓은 기감을 바탕으로 최대한 바이욘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요리조리 잘 빠져나가는 궁수.

“어때요? 우리 궁수 길안내는 좀 치지 않아요?”

동료를 자랑하는 이백호의 말에 궁수가 무안하다는 듯 웃는다.

“백호, 이번엔 그래도 틈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만약 아까 그 자리에 계속 있어서, 뒤늦게 알아챈 거라면 전투가 불가피했을 겁니다.”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처음에는 긴가민가 했지만 이제는 확실합니다. 처음 바이욘을 처치했을 때, 그 자리에 있었다면 이들의 기척을 느꼈을 때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상태였을 겁니다.”

겸손함이 묻어나는 브라이엇의 말에 아우레스가 호들갑을 떨어대기 시작했다.

“오, 그게 정말이오?! 대단하시오, 남작! 갑자기 벗어나야 한다고 하더니!”

“…저도 궁금하군요. 남작님께선 대체 어떻게 알았던 건지.”

궁수마저 동조하는 말에 이백호의 눈이 음흉하게 변했다.

“헤에… 우리 남작님한테 그런 스킬이 있나보네? 어디 보자, 탱커가 먹을 만한 것 중에 그런 게 뭐가 있더라…….”

진심으로 내게 그런 탐지 계열 스킬이 있다고 믿으며 쉐도우 복싱을 시작한 이백호.

“음, [과민성 근육]엔 그 정도 탐지 효과가 없고, [후회의 시계바늘]은 절대 아닐 테고, ‘운명 추적자’도 별 반응은 없던 거 같던데……. 뭐지 대체?”

내 반응을 떠보듯 하나씩 툭툭 던지며 말하는 이백호를 보며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어찌 말하겠는가.

스킬이 아니라 ‘한스’였다고.

말을 해도 믿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다른 스킬이 있다고 믿게 하는 편이 내게는 이득이다.

그런 판단으로 입을 꾹 다물고서 ‘바이욘’들의 포위를 뚫고 도망치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얼마나 또 시간이 흘렀을까.

「캐릭터가 특수 지역에 진입했습니다.」

우리들은 옛바위 초원을 벗어나 새로운 필드에 들어섰다.

「필드 효과 - 맹독 용암지가 부여됩니다.」

「캐릭터의 독 내성 수치가 0으로 고정됩니다.」

「영혼력 회복 속도가 99% 감소합니다.」

「경고: 폭발에 주의하십시오!」

부글부글 끓는 녹색빛의 용암.

연기처럼 자욱한 독성 가스.

“……더 이상 따라오지는 않는 듯하군요.”

새 필드에 진입하며 탐색꾼이 상황 종료를 말한다.

“살았군.”

“그래도 다행히 무조건적인 추격은 아닌가보네.”

바이욘의 몬스터 웨이브에서 벗어났다.

다만 문제는, 여전히 힘차게 뛰는 전사의 심장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근-!

이대로 끝일 리가 없다고.


26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74화 26

674화 꿈 (1)

9층 별무덤의 필드 중 하나, 맹독 용암지.

최상위 계층인 만큼 그 위험도는 아래 층들과 비할 바 아니며, 이곳에는 짜증나는 필드 효과도 존재한다.

‘독 내성 수치 0.’

중독 면역 판정을 받을 정도로 내성을 올려놨어도 이곳에서는 먹통이 되며.

‘MP 자연 회복 불가.’

뭐, 아예 불가는 아니지만 아무튼.

99% 감소이니 사실상 MP가 차지 않는다고 보는 쪽이 마음 편하다.

물론 이 부분은 내 [영혼 잠수] 같은 스킬이나, 필드 내에 있는 한 가지 방식으로 공략할 수 있는데…….

진짜 가장 큰 골칫거리는 따로 있다.

「경고: 폭발에 주의하십시오!」

이곳에서는 온갖 것들이 폭발한다.

바로 이렇게.

“어어… 땅이 부푸는데……?”

“터진다! 다들 피해!”

퍼어어어어엉-!

길을 걷다가도 땅에서 맹독 용암이 분출되며 폭발.

“……자, 잠깐만! 마물의 몸체가 부풀고 있소!”

“말할 시간에 피해!”

심지어 전투 중이던 마물이 바로 코앞에서 폭탄 테러를 하듯 터지기도 하며.

퍼어어어어엉-!

아무런 징조도 없이 그냥 공기 중에서 폭발이 이뤄지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촤아아아아아아-!!

폭발 시, 진득한 독액이 사방에 비산한다는 것.

「캐릭터가 중독(중) 되었습니다.」

그래도 최상급 중독 상태는 아니고, 고작 중급에 불과하긴 하지만 사실 이것도 의미는 없다.

여기선 독 내성 수치가 0으로 고정되니까.

치이이이이이익-!

아오, 따가워 뒈지겠네.

원래 상태였으면 내성 수치 덕분에 하급 판정으로 조정되고, 그마저도 금방 알아서 풀렸을 텐데.

“해독.”

긴 말 하지 않고 짧게 용건을 읊자, GM이 후다닥 달려와 마법을 걸어준다. 그리고 이는 우리 파티의 유일한 힐러 제이나도 마찬가지.

“치유.”

“……됐어요.”

보다시피 ‘맹독 용암지’는 마법사와 신관의 역할이 중요하다.

중독 등급을 올리지 않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해독을 해야 할뿐더러, 중독으로 인한 HP 소모도 계속 관리를 해줘야 하니까.

다만, 그렇기에 여기서 또 문제가 발생한다.

“오오! 용암과! 저기 용암과가 있소!!”

용암과.

맹독 용암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가끔 발견되는 작은 나무에 딱 세 알만 달려 있는 열매.

참고로 이걸 먹으면 소모된 주 자원이 회복된다.

“제이나, 하벨리온, 할배! 알아서들 나눠 먹어!”

당연한 말이지만, 용암과는 힐러와 마법사를 우선해서 먹여야 했다.

“저… 백호? 나도 슬슬 영혼력이 바닥나서 이능을 발현할 수 없는데…….”

“그래서 어쩌라고?”

“하, 한 알만 주면 안 되겠소이까? 이대로라면 전투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어차피 처맞기만 하면 되는데, 욕심이 과하네?”

“…….”

발견되는 대부분의 용암과가 힐러와 마법사들의 입으로 들어간 만큼, 나머지 역할군들의 MP는 한없이 소모되어가기만 했다.

아, 물론 나는 빼고 말이다.

「캐릭터가 [영혼 잠수]를 시전했습니다.」

「소모된 영혼력에 비례해 영혼력이 재생됩니다.」

심해 거인의 액티브 스킬 덕분에 나는 주기적으로 MP를 회복하며 일정량을 유지하는 게 가능했다.

[거인의 피]를 고른 렉 아우레스와는 다르게.

“……진심으로 부럽소이다, 얀델 남작.”

그러게 너도 녹색 정수를 먹었어야지.

이 게임에서 MP가 얼마나 중요한데.

“어차피 메인 탱커는 남작님이 다 해주니까. 너는 뒤에서 서브 탱커나 잘 하라고. 용암과 같은 건 탐내지 말고. 알겠어?”

“알겠소이다…….”

시무룩해 하며 뒤로 물러나는 아우레스.

다만, 상황이 좋지 않은 건 녀석만이 아니라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냥 평범하게 화살을 쏘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니 투정은 그만, 오케이?”

“……료, 료카이.”

“발음 보소? 너 친일파야? 료카이가 아니라 오케이. 알겠어?”

“백호… 근데 친일파가 뭐요?”

“있어, 그런 게.”

최대한 MP를 아끼기 위해 평타로만 몬스터와 전투를 펼치는 이백호와 브라이엇.

장기로 치자면 거진 차와 포를 떼고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인데……. 여기서 조금 웃긴 건, 그럼에도 사냥이 되긴 됐다는 것일까.

「포펜시스를 처치했습니다. EXP +7」

뭐, 3등급부터는 엄청나게 힘들어지며 2등급이 나타나면 도망가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겠다마는.

‘…다행히 아직 2등급은 안 보이네.’

그래도 가장 위험한 맹독 용암지 북부가 막혀 있기 때문일까?

내심 우려했던 2등급 몬스터는 보이지 않는다.

두근-!

물론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지만.

“남작님, 이제 무리 같은데 잠깐 나가서 쉬고 오는 게 어때요?”

“…그러도록 하지.”

맹독 용암지를 탐사하며 지도에 비어 있던 부분을 채워나가던 우리는, 중간중간 너무 벅찰 때면 맹독 용암지를 벗어나 휴식 시간을 가졌다.

원래 9층 탐사를 할 때도 자주 쓰던 편법이었다.

지역을 벗어나는 순간 필드 효과는 제거되니까.

‘…이것도 남부 끄트머리나 탐사하는 거니까 쓸 수 있는 편법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렇게 맹독 용암지를 탐사하고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맹독 용암지에 해당하는 지역의 지도도 거진 다 채워지고, 이제 슬슬 한스 효과도 끝난 게 아닐까 싶어지던 그때.

“비석! 비석이오!!”

태고의 땅에서 보았던 것과 흡사한 비석 하나가 발견됐다.

“…여기에도 알 수 없는 그림 같은 게 그려져 있소이다!”

“그림이 아니라, 글자일 겁니다.”

“하하핫! 이 마법사 친구도 참! 내가 암만 배운 게 없어도 그런 말에 속을 거 같소? 이게 어떻게 글자란 말이오!”

“…….”

태고의 땅에서 봤던 것과 비슷하기는 하나, 그래도 일단 굉장히 오랜만에 발견한 무언가였기에 우리는 탐사를 멈추고 다시금 비석 조사에 돌입했다.

하지만…….

“태고의 땅에 있던 비석과 적힌 글자는 다르지만, 내용은 해석할 수가 없으니 의미가 없고……. 그 외에 나머지는 동일합니다. 단단하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다는 것까지.”

저번에도 실패한 조사가 이번에라도 성공할 리는 만무. 그나마 이전에 시간을 낭비한 경험에 의거해 이번 조사는 빠르게 끝마칠 수 있었다.

“즉, 더 알아낼 수 있는 게 없다는 거군?”

“예,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고로, 여기서 더 시간을 끌 것 없이 비석의 위치 정도만 상세하게 지도에 기록하고 패스.

이후로는 지도에 빈 부분들을 채우기 위해서 주변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결국 비석 하나 말고는 찾아낸 게 없군요.”

그렇게 맹독 용암지 탐색은 종료.

“그럼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탐색꾼을 겸업으로 하는 궁수 브라이엇의 말을 들으며 나는 피식 웃었다.

뭘 어쩌긴 어째.

아직 둘러보지 못한 곳이 두 곳이나 더 있구만.

“꿈결 폭포로 간다.”

여긴 진짜 가기 싫지만, 선택지가 없잖아?

***

「캐릭터가 특수 지역에 진입했습니다.」

「필드 효과 - 꿈결 폭포가 부여됩니다.」

***

꿈결 폭포.

이 필드는 사실상 9계층 별무덤의 마지막 시련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도 그럴 게, 10층으로 가는 포탈이 여기 너머에 있을뿐더러…….

‘지랄 맞지.’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컨셉과 난이도를 가진 필드다.

「캐릭터가 주기적으로 잠에 듭니다.」

고작 한 줄로 끝나는 단 한 개의 필드 효과.

다만, 플레이를 하다 보면 이것만큼 짜증나는 게 또 없다.

스으으윽.

은하수를 담은 것처럼 환한 빛을 자아내는 잔잔한 호수.

배를 타고 그 위를 지나고 있다.

잠든 세 명의 일행과 함께.

“이번에는 세 명이 잠들었군요.”

“제이나, 파멸할배, 하벨리온. 하필 제일 중요한 이 세 명이 빠졌네.”

“세 명이 깨어날 때까지 추가로 잠드는 인원이 없기를 바라야겠습니다.”

“셋 다 깨어난다는 가정하에 얘기지만 말이지.”

이 호수에 들어선 순간, 캐릭터들은 주기적으로 잠에 빠진다.

물론 그렇다고 잠만 자면서 꿀을 빠는 건 아니고, 그 안에서 혼자 환영과 싸우며 버텨내야 한다.

어찌 보면 아이스록의 특수 보스인 카리아데아가 쓰는 [영혼의 함]과 비슷한 효과인데…….

‘혼자 못 깨어나도 밖에서 깨워줄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차이겠지.’

맹독 용암지의 용암과처럼, 꿈결 폭포에도 잠에 든 동료 캐릭터를 깨워줄 수 있는 아이템이 있다.

문제는 용암과보다 훨씬 보기 어렵단 거겠지만.

촤아아아아.

그림처럼 아름다운 호수 위를 천천히 나아가는 배.

참고로 이 배는 이백호의 것이다.

내 배를 꺼낼까도 싶었지만, 저번에 타보니까 얘 배가 조금 더 좋더란 말이지.

사실 의미가 없을 만큼 미세한 차이긴 하지만.

괜히 내 배를 꺼냈다가 고장나면 수리비도 또 나갈 테니 군말 않고 탑승했다.

“백호, 좀 더 속도를 올리면 안 되오?”

“넌 저번에 여기 지나갈 때 뭘 들은 거냐? 속도를 올리면 몬스터가 튀어나온댔잖아.”

“아, 그랬었지. 깜박했소.”

꿈결 폭포의 짜증나는 점 중 하나다.

속도를 올리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랬다간 물밑에서 고이 잠에 든 마물들이 깨어나서 덮쳐온다.

유일한 방법이 특수 제작된 배를 타서 조용하면서 빠르게 이동하는 것인데…….

‘얘 배도 그건 안 되어 있네.’

하긴, 9층 탐사를 하더라도 10층으로 올라갈 게 아니면 꿈결 폭포는 올 일이 없긴 하니까. 애초에 와서도 그냥 천천히 이동하면 되는 문제이기도 하고.

“여하튼, 조용히 해라. 괜히 시끄럽게 떠들다가 마물들이 나타나면 짜증나니까.”

“아, 알겠소이다…….”

혹여나 이백호에게 혼이 날까 아우레스가 목소리를 줄이고, 궁수 브라이엇이 내게 다가오며 조용히 묻는다.

“남작님, 만약 용골산에서도 아무것도 찾지 못하면 어떡할 겁니까?”

“그럼 여기 물 아래도 조사를 해야겠지.”

“……그때부터는 정말 난이도가 무시무시하게 올라가겠군요.”

“그럴 일이 없기를 바라는 수밖에.”

“예…….”

이후로는 천천히 배를 몰며 나아갔고, 마물은 마주치지 않았다.

위험한 장소라는 것을 잊을 정도로 평온한 시간.

아, 물론 깨어있는 사람들 한정으로 그러했다.

“후… 겨우 깨어났군요. 죽는 줄 알았습니다.”

“파멸할배, 시원하게 자고 일어나놓고 표정이 왜 그래?”

“조금… 기분 나쁜 꿈을 꿨을 뿐일세.”

“헤에… 그렇게 말하니까 궁금해지는데?”

시간이 지나자 GM을 시작으로 하나둘 정신을 차렸고, 이후 머지않아 다른 이들이 잠에 들었다.

“이번엔 브라이엇과 아우레스, 그리고 이백호의 차례군요.”

필드 효과를 이기지 못하고 기절하듯 픽 쓰러지는 이백호.

곤히 잠든 모습을 보고 있자니 충동이 피어난다.

이대로 배 밖에 던져버리면 손쉽게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일단 여기를 벗어나는 게 먼저야.’

고개를 저으며 일순간 피어난 욕구를 던져낸다.

그리고 지도를 보며 이백호를 대신해서 배를 얼마나 더 몰았을까.

“아오… 진짜 이건 당할 때마다 기분이 더럽네.”

“예……. 4층에서는 환상인 줄 알기는 하지만, 이곳은 그렇지도 않으니까요.”

이백호를 시작으로 나머지 인원들도 깨어나고, 그다음 인원이 잠든다.

그리고…….

‘뭐야, 이거?’

자꾸만 나만 빼고 잠에 든다.

뭐, 잠에 드는 건 아예 랜덤이라 말이 안 되는 일은 아니지만…….

‘나쁠 건 없나?’

괜히 잠들면 고생만 하는 지역이기에 그냥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넘겼—.

두근-!

……아니, 지금 이게 위험한 상황인 거 아닌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든 직후부터는 나만 잠에 들지 않는 게 불안해졌다.

그리고 그 불안은 시간이 흐를수록 커졌다.

그도 그럴 게, 놀랍게도 계속해서 나만 빼고 잠에 드는 일이 반복됐거든.

그것도 거진 맵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까지.

“남작님,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괜히 말을 했다간 씨가 되는 법.

“그나저나 이제 곧 도착하겠군요.”

불안한 생각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하며 다른 것에 집중했다.

촤아아아아아-!

그로부터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희미하게 들리던 물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고, 이내 머지않아 이곳이 꿈결 호수가 아니라 ‘꿈결 폭포’라 불리는 이유가 눈앞에 나타났다.

“와, 언제 봐도 장관이긴 하네.”

고대인들이 생각했을 세계의 끝.

호수 중심부에 뚫린 거대한 구멍 아래로 물이 흘러내리며 거대한 폭포가 형성된다.

참고로 잿빛 경계선이 이 폭포를 가로지르고 있는 탓에 폭포의 3분의 2는 멈춰있는 상태였는데…….

“구경하지 말고 추진 장치의 출력을 높여라. 여기부터는 소리가 좀 커져도 괜찮으니까. 아래로 빨려들어가면 끝장이다.”

“옛썰.”

이곳부터 시작해 배를 몰며 호수 전체의 맵을 밝히는 게 앞으로 우리의 동선이다.

따라서 미리 계획해둔 대로 움직이려던 찰나.

“……아래에서 뭔가 오고 있네.”

잠에 든 브라이엇을 대신해 파멸할배가 다급히 뭐라 중얼거린다.

폭포 소리 때문에 처음엔 잘 들리지 않았지만…….

“뱃머리를 돌리게!”

뭔가 위급하다는 건 충분히 인지할 수 있을 소리와 표정.

그와 동시라 봐도 무방했다.

[캬아아아아아아아아악-!!]

쏟아지는 폭포수를 거슬러오르며 뱀 형태의 거대한 마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늘 누구보다 먼저 설명을 해나가던 GM도 잠에 든 상태였지만, GM의 부재는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야 엄청 유명한 놈이거든.

“……드라이즌.”

1등급 환상종, 드라이즌.

빙하의 마법사 카리아데아처럼 해당 지역에서만 출현하는 일종의 ‘특수 보스’.

“조졌네, 이거…….”

이번만큼은 내가 먼저 대차게 함성을 내지를 필요도 없었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앙-!

놈을 보기 무섭게 이백호가 추진 장치의 출력을 최대치로 높인다.

그에 따라 소음이 엄청나게 커졌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걸 신경쓸 때가 아니었다.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마물들이 깨어납니다.」

잡몹들이 덤벼들고 말고, 이곳에 있으면 그 즉시 끝이다.

「캐릭터가 [꿈꾸는 연못]의 범위 내에 들어섰습니다.」

「드라이즌에게 입히는 모든 해로운 효과, 피해가 무효화됩니다.」

저 괴물 새끼는 우리만으론 죽어도 못 잡거든.

같은 1등급이어도 도서관에서 잡았던 ‘카샨’과는 급이 다르다.

애초에 여기는 저놈의 홈그라운드니까.

사실상 멀쩡히 도망칠 수 있을지도 쉽사리 장담을 할 수가 없는 것인데…….

‘설마 한스 효과가 이제서야 발동된 건가……?’

드라이즌을 발견함과 동시에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한 나약한 생각.

“…는 개뿔.”

한스고 뭐고 알 바 아니다.

“후우…….”

호흡을 가다듬으며 정신을 다잡는다.

지금부터는 내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그래야만 이 위기를 잘 헤쳐나갈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결의를 다잡던 그때.

“……어?”

수면제라도 먹은 듯 돌연 머리가 멍해진다.

또한 그와 동시에.

「필드 효과 - 꿈결 폭포가 활성화되었습니다.」

눈앞은 빙빙 돌기 시작하고, 동시에 흐릿해진다.

일전에 한 바퀴를 빙 돌며 꿈결 폭포를 지나쳤을 때 느꼈던 감각이었다.

“이… 런… 씹…….”

어쩐지 내내 안 터지더라니.

“왜, 하필… 이때…….”

그 말을 끝으로 균형을 잃은 육신이 앞으로 기운다.

한데, 한껏 속도를 올린 배의 흔들림 때문일까?

투욱.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난간을 잡고 겨우 버티고 있던 몸이 튕겨져 나가듯 밖으로 떨어진다.

“남작님……!”

주변의 소리는 희미해지고.

풍덩-!

수면 아래로 떨어진 몸이 빠르게 가라앉는다.

하나 그 위급한 상황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캐릭터가 잠에 듭니다.」

……니미럴.


30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75화 30

675화 꿈 (2)

세찬 급류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와중에도 이 무식할 정도로 무거운 몸뚱이는 수직으로 하강한다.

술로 절여진 듯한 의식 속에서도 생각했다.

‘……이렇게 끝이라고?’

그 길고 험났했던 여정의 끝이 고작 이거?

‘그럴 리가.’

잠에 들면 안 돼.

무조건 정신을 차리고 위로 올라가야 돼.

그러한 의지를 먹고 위로 올라가기 위해 헤엄을 치려 했지만…….

스으으윽.

마치 귀머거리라도 된 것처럼, 몸 전체가 말을 듣지 않는다.

이대로 잠에 들면 안 되는데.

그러면 진짜 큰일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포기했다.

‘아, 몰라…….’

이제 버티는 것도 한계다.

배 위에 있는 이백호나 다른 애들이 알아서 구해주겠지.

응, 그래 그럴 거야.

그러니까…….

‘이제 그냥… 자자…….’

부여잡고 있던 의식의 끈을 놓으려던 찰나.

솨아아아아아아-!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며 까맣게 물들던 눈앞이 돌연 새하얗게 빛나기 시작한다.

또한, 그와 동시에.

삐이이이이이이—

뇌를 인두로 지지는 듯한 이명이 귓가에 맺힌다.

강제로 잠에서 깨우는 듯한 빛과 이명.

또각, 또각.

어디선가 구두 소리가 들려오다.

겨우겨우 들어 올린 눈꺼풀 사이로 사람의 형체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귀신이라도 삼킨 듯 희멀건 피부색.

손에 쥐고 있는 정체 모를 누더기 인형.

어깨까지 내려오는 갈색 생머리를 가진 열살배기쯤 되어 보이는 평범한 여자아이.

멍한 정신 상태인데도 얘가 누군지는 바로 떠올랐다.

‘엘리스 그라운디아…….’

일전에 오두막에서 만났던 땅의 마녀.

‘네가 왜 여기에…….’

그리 말하려 했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그럼에도 내 목소리가 들린 것처럼 땅의 마녀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내가 당신의 꿈을 이뤄줄게요.”

어딘가 몽환적이면서도 유혹적인 목소리.

또한 동시에 왠지 모르게 당부하는 듯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러니까…….”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돌아오지 마.”

내 기억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

“허억……!”

물에 빠졌다가 겨우 탈출한 사람처럼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상체를 들어 올린다.

그리고…….

흠칫.

온몸이 굳는다.

이번엔 물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정신적인 이유로.

“…얇아.”

손을 내려다보며 몇 번인가 쥐었다 폈다를 반복한 나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

늘 그렇듯 시간이 필요했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시간이.

지끈-

일단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평소 느끼던 그 무한한 활력이 완전히 사라진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고주망태가 될 정도로 술을 마신 다음 날 같달까.

머리가 깨질 듯 아프다.

또한…….

스륵.

다시금 눈을 떠 바라본 공간 역시 그대로다.

“여긴…….”

내게 있어서 익숙하다는 말로도 모자란 바로 그 장소.

“내 방이잖아.”

이한수의 방.

대체 내가 왜 이곳에서 눈을 뜬 걸까.

설마 고스트 버스터즈 서버가 다시 열린 건가?

불현듯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달라.”

커뮤니티 내에서 보았던 그 공간과, 지금 내가 자리한 이 공간에는 명백한 이질감이 존재한다.

고스트 버스터즈의 내 방은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던 데 반해.

‘뭔데 이건……?’

여긴 난장판이란 말로도 모자라다.

컴퓨터 책상 옆 책들은 다 쏟아져 있고, 모니터는 누가 떼어갔는지 사라져 있다.

장농과 서랍은 활짝 열린 채로 방치되어 있으며, 그 앞에는 널브러진 옷가지들이 가득하다.

‘…어쩐지 허전하더라니.’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라는 걸 뒤늦게 눈치챈 나는 일단 널브러진 옷가지들을 대충 골라서 입었다.

그리고…….

툭.

냉기가 전해지는 장판 바닥을 맨발로 밟으며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 역시 난장판이라는 말로도 모자랐다.

마치 한바탕 압수 수색이라도 지나간 거 같달까.

서랍이란 서랍은 전부 다 열려 있고, 온갖 잡다한 물건들이 바닥에 뿌려져 있다.

“하아…….”

왠지 목이 타기 시작한 나는 찬 물이라도 마실까 싶어 냉장고 문을 열었다.

하지만…….

“웨엑……!”

한참 전에 전원이 꺼진 듯한 냉장고에서 확 풍겨져 나오는 썩은내.

구역질과 함께 재빨리 문을 닫은 나는 쓰러지듯이 마루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오, 죽겠네…….’

안 그래도 머리가 아픈 와중에 썩은내까지 맡아서 그럴까?

어지럼증이 더욱 심해졌다.

다만, 그래도 할 건 해야겠지.

벽에 기대어 주저앉은 채 진정이 되길 기다리며 머리로는 끊임없이 현 상황을 분석했다.

결론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고스트 버스터즈의 서버가 활성화 되어서 타이밍 좋게 이곳에 온 것도.

실제 지구로 귀환한 것도 아니다.

필시 높은 확률로 이곳은…….

“꿈속이겠지.”

필드 효과 ‘꿈결 폭포’로 인해 잠에 든 나는 환상 속에 갇혔다.

배경이 현대인 것? 이것도 딱히 이상하진 않다.

실제로 앞서 잠들었을 때도, 현대에서의 인연들이 환상으로 나오기도 했었으니까.

뭐, 그땐 이런 식으로 두통이 느껴진 적이 없어서 그게 좀 의문점이긴 하지만.

아무튼.

상황은 명료하며,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들은 더욱더 명료하다.

어딘가 숨어 있을 적과 싸우거나 미션을 해결해 꿈에서 깨어날 수 있는 열쇠를 얻어야 한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그것도 역시 꿈이겠지?’

마지막에 의식을 잃기 전에 만났던 땅의 마녀.

그리고 땅의 마녀가 내게 했던 말들까지…….

곰곰이 생각을 하면 할수록 왠지 모르게 석연찮은 느낌이 가시질 않는—.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진 순간.

띠디디, 띠, 띠, 띠디…….

현관문 쪽에서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두근-!

야만 전사의 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위기를 감지한 심장이 크게 철렁였다.

타닷.

전자음이 들려온 즉시, 나는 곧장 일어나 부엌 아래 선반을 열었다.

그야 그렇지 않은가.

앞서 말했든 이곳은 꿈속 세상이다.

지금 저 문을 열고 들어오려는 자는 나를 죽이려 드는 ‘적’일 가능성이 매우 높—.

‘칼이… 없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으나, 어디 이런 적이 한두 번인가? 나는 즉시 판단을 재고하고 몸을 돌려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무기가 없는 건 아쉽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씹어야 하는 법.

게다가 이렇게 육체 능력을 다 빼앗아갔으니 적의 수준 역시 그리 높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배경도 현대이고 말이지.’

띠, 띠디…….

남의 집 비밀번호를 누르듯 천천히 하나씩 눌러지는 번호.

이내 현관문 앞에 선 나는 기다리지 않았다.

자고로 기습이란, 적이 절대 예상하지 못한 시기일수록 효과가 좋은 법이니까.

그래, 그러니까…….

벌컥-!

비밀번호가 완성되기 전에 오히려 이쪽에서 문을 확 열어젖히며 앞으로 나아간—.

“아악!”

대뜸 열린 문에 코를 박고 비명을 내지르는 정체불명의 남자.

다만 혼란이 가득한 저 눈빛은 나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터였다.

“어…….”

한 놈이 아니네?

“여러 명인 건 예상에 없었는데?”

안 그래도 어지럽던 머리가 더욱더 멍해지지만, 늘 그랬듯 판단은 번개와도 같았다.

휘이익.

팔을 뻗어 코가 맞은 남자의 멱살을 잡고서 그랩을 날리듯 실내로 잡아당긴다.

그리고…….

쿠웅-!

다시금 문을 쾅 닫고서 수동으로 잠금 장치를 돌려서 밀실을 만든다.

“뭐, 뭐야! 넌……!”

이내 내팽개치듯 던져져 신발장 아래에 쓰러진 남자가 날 보며 당황해 소리친다.

또한 그와 동시에.

“뭐야! 강 팀장님! 강 팀장님!”

“너 이 새끼 뭐야! 당장 문 안 열어?”

문 밖에서 들려오는 적대적인 음성들.

낭비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퍽-!

주먹을 잘 말아서, 쓰러진 남자의 얼굴에 있는 힘껏 꽂아넣는다.

바바리안 때처럼 수박이 터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잘 들어간 일격…….

‘…이 아닌가 보네.’

“이 미친 새끼가!”

얼굴에 정타를 맞고서도 멀쩡히 일어난 사내가 내 어깨를 붙잡으며 나를 벽에 밀어붙인다.

“하, 씨발 돌겠네…….”

나보다 훨씬 더 큰 체격.

심지어 소위 말하는 장사형 체형.

예전에 나였다면 보는 것만으로도 위축이 되어 싸울 엄두도 내지 못했을 상대.

“너 뭐야? 너 뭐냐고? 어?”

그것 하나는 틀림없었다.

하지만…….

‘뭐 이리 어설퍼?’

딱히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게, 내가 죽을 고비를 얼마나 넘겼는데?

아무리 일반인 스펙이 되었다고 한들, 이 정도도 혼자 해결하지 못하면 나가 죽어야 한다.

따라서…….

“아아악!!”

어깨를 잡은 손가락을 반대편으로 꺾은 뒤, 고통스러워 하는 상대의 면상에 스트레이트 한 방.

퍼억!

주먹에 맞고 밀려난 사내가 비틀거리는 순간을 이용해 안으로 파고들며…….

꽈악—

자연스럽게 뒤를 잡으며 백 초크.

“컥, 커, 커허, 읍……!”

목을 졸라 산소와 뇌로 가는 혈류를 차단한 자세를 단단히 고정시키자, 사내의 몸부림이 심해진다.

퍽! 퍽! 퍽! 퍽!

팔꿈치로 내 갈비뼈를 가격하고, 발로 내 발을 내리찍는 등.

열심히 발악을 했으나 큰 의미는 없었다.

“씨바, 내가 탱커 경력이 얼마인데.”

물리 내성 보정을 못 받는다고 이거 맞고 아파서 힘을 풀까봐?

“커, 컥… 사, 살려…….”

이내 반항을 해봤자 의미가 없음을 직감했을까.

이내 발버둥을 멈춘 사내는 방법을 바꿔 내 팔에 탭을 치며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밖에서도 이 소란을 들었을까.

쾅쾅쾅!

더욱 거칠어진 노크 소리.

“강 팀장님! 강 팀장님! 괜찮으십니까!”

“너 이 새끼 뭔 짓을 하는 거야! 문 열어!”

“뭐 해! 비밀번호! 보고만 있지 말고 비밀번호를 누르라고!”

“아, 예……!”

이내 다시금 현관문에서 삐빅거리는 도어락 전자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하, 진짜 시작부터 난이도 장난 아니네.

“사, 살려…….”

우선 목을 조르는 팔에 힘을 더욱 불어넣으며 앞으로의 전투를 머릿속으로 그린다.

총 인원은 다섯.

‘일단 여기서 한 놈을 잡으면 넷이니…….’

뭐, 어떻게 가능하긴 할 거 같다.

죽도록 힘들기는 하겠지만.

‘오케이, 한 놈은 보냈고.’

잡고 있던 사내의 몸이 축 늘어진 즉시 손의 힘을 풀고 일어선다.

그리고…….

“오, 시작 무기 달달한 거 보소.”

축 늘어진 사내의 허리춤에 달린 삼단봉을 바로 루팅해서 장착했다.

어쩐지 자꾸 허리에서 뭔가 꺼내려는 거 같더라니, 이런 꿀무기를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이거면 난이도가 확 쉬워졌는데?’

이내 삼단봉을 최대 크기로 펼친 뒤, 허공에 몇 번 휘둘러 보던 나는 흡족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악마분쇄기는 물론이고, 상점에서 20만 스톤이면 살 수 있던 철제 메이스보다도 손맛이 적긴 하지만, 이 정도면 나름 상급 무기였다.

애초에 지금 근력으로 그런 무기는 무리기도 하고.

띠디, 띠, 띠, 띠…….

아까보다 훨씬 더 빠르게 눌러지는 비밀번호.

사실 여기서 강제 잠금 버튼만 눌러도 저쪽에서는 문을 열 방법이 없어진다.

다만, 나는 문을 잠그는 대신 현관문으로 다가갔다.

그야 바바리안의 삶이 내게 가르쳐주었으니까.

모든 것에는 골든 타임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상황을 회피하면, 나중에는 더욱 어려운 상황이 찾아온다.

따라서…….

벌컥.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먼저 문을 대차게 열며—.

“아악!”

비밀번호를 누르다 머리를 찧은 남자의 정수리를 향해—.

“[휘두르기].”

삼단봉을 내리찍는다.

악마분쇄기가 아니라 내려찍기 시의 방어 관통 효과는 볼 수 없었지만…….

퍼억-!

나름 깔끔하게 전해지는 손맛.

이내 급소를 가격당한 사내가 바닥으로 쓰러지며 주위에 있던 사내들이 달려든다.

“이 미친 새끼가!!”

“잡아!!”

길목이 좁은 지형적 특성을 사용하는 것이 내 특기이지만, 이번에는 피지컬이 받쳐주지 않기에 일단 뒤로 백스탭을 하며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가, 강 팀장님!!”

거실로까지 물러서자, 이내 실내에 진입한 사내들이 축 늘어진 사내를 보며 아연을 금치 못한다.

“동료애가 끈끈한 타입인가 보네?”

개인적으로 그런 부류는 좋아하지만, 그 상대가 적일 경우에는 약점일 뿐이다.

“강 팀장님! 정신 좀 차려보십시오! 예?!”

‘한 명은 상태를 봐주고 있으니…….’

당장 상대해야 할 놈은 두 명이다.

문제는, 이제 저 두 놈도 맨몸이 아니란 거겠지만.

촤아악-!

아까 잡은 ‘강 팀장’이 일반 고블린이라면, 이놈들은 변이종에 속한다 볼 수 있었다.

고블린 검사…….

“아니, 삼단봉을 들었으니 고블린 경관인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웃고 있던 때.

“이 씨발놈이 웃어!!”

‘도발’ 당한 고블린 경관이 삼단봉을 휘두르며 내게 달려든다.

후우우우웅-!

나름 좋은 파공음이 피어날 정도로 기세가 실린 일격.

하나 내가 보기엔 너무나도 정직했다.

스윽.

따라서 허리만 살짝 뒤로 젖히며 회피.

바로 반격기를 넣듯 삼단봉을 휘둘러 관자놀이에 정확히 가격했다.

퍼억-!

사소해 보일지 모르지만, 어찌 보면 이게 일반인과 탐험가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무기를 있는 힘껏 휘두르거나 찔러넣었을 때.

훈련받지 못한 사람들은 백이면 백 목표로 한 위치를 가격하지 못할뿐더러…….

‘힘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지.’

아, 물론 나는 진작에 그 단계는 지나쳤지만 말이다.

바로 이렇게.

털썩-

딱 한 대를 관자놀이에 정통으로 얻어맞고서 힘 없이 쓰러지는 사내.

한데 이런 내가 갑자기 무서워졌을까?

“…….”

갑자기 옆에 있던 한 놈이 나를 보며 뒷걸음질을 친다.

나로서는 굉장히 좋은 상황이었다.

공포에 질린 적만큼, 요리하기 쉬운 상대는 없으니까.

타닷.

고로, 적극적으로 앞으로 대시.

충분한 거리에 도달했을 때는 허리의 힘을 사용해 삼단봉을 휘둘렀다.

하지만…….

후우우웅-!

어쭈, 이걸 피해?

‘그래도 자세가 무너졌네.’

숯한 전투 경험에 의거했을 때.

이 자세에서는 절대 추가타를 피할 수 없다.

즉, 사실상 승기가 굳어진 거나 다름없다.

이놈만 잡으면 나머지 한 놈을 잡는 건 식은 죽 먹기일 테니까.

스윽.

그렇게 씨익 웃으며 균형을 잃은 ‘고블린 경관C’의 머리통을 향해 삼단봉을 내리찍으려던 찰나였다.

탕-!

총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작고 맥빠지는.

BB탄 총을 쏜 것만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푸욱-

길고 날카로운 침 형태의 무언가가 살가죽을 파고들며 따가운 고통을 선사한다.

이에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을 때.

“뒈져, 이 새끼야!”

‘강 팀장’에게 인공 호흡을 해주고 있던 사내가 일어나 내게 총구를 겨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나는 내가 뭐에 당한 건지 알 수 있었다.

“아니, 이런 씹…….”

지지지지지지지직-!

“…테이저건은, 반칙… 이지…….”


52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76화 52

676화 꿈 (3)

천천히 실눈을 뜨고서 들려오는 소리, 보여지는 시각 정보를 종합한다.

“…맞지? 맞는 거 같은데?”

일단 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진 채 손잡이에 고정이 된 상태고…….

덜컹!

장소는 이동 중인 대형 승합차 안.

“아니, 근데 그놈이 맞다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1년 넘게 실종 됐던 사람이 느닷없이 집에서 발견된 것도 그렇고… 이렇게 공격적인 사람이란 말은 들은 적이 없었는데…….”

음, 이런 설정인 건가?

어쩐지 게임으로 치면 튜토리얼 부분인데 난이도가 너무 높더라.

건장한 성인 남성 다섯이 비밀번호를 치며 들어온 것도 모자라 테이저건이라니?

‘암, 칼 한 자루도 안 주고 원거리 몹에 테이저건을 달아놓은 건 그냥 당하라는 거지.’

내 예상에 따르면, 필시 시작 위치에서 패배 후 포박당하는 것은 확정된 일이었을 거다.

아마 높은 확률로 이 다음부터 시련이 진행—.

“다들 그만! 서에 가서 손가락부터 찍어보면 알겠지. 이놈이 그 이한수가 맞는지 아닌지는.”

……후, 그래도 다행이네.

아직 살아 있어서.

“강 팀장님? 이 새끼 웃는데요?”

“뭐어?! 깼다고?”

옆에 있던 남자가 내가 깨어난 사실을 말하자 조수석에 타 있던 ‘강 팀장’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본다.

‘뭐야, 얘도 못 죽였었네?’

너무 일찍 풀었나?

그래도 차에 세 명밖에 안 타고 있는 거로 보아 두 놈은 병원으로 이송돼서 힐을 받는 중인 거 같은데…….

“이한수! 너 가만히 있어! 네가 뭔 일을 겪었든지 간에 여기서도 또 난동 부리면 그땐 진짜 어머니가 뭐라 말하든 법대로 하는 수밖에 없어!”

아무래도 강 팀장은 내가 또 차 안에서 난리를 칠까 봐 걱정하는 듯했다.

거, 내가 병신으로 보이나?

“예. 죄송합니다. 가만히 있겠습니다.”

최대한 정중한 목소리로 더 이상 트러블을 만들지 않을 것임을 상대방에게 인식시킨다.

한데, 이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었을까?

“뭐야, 이 새끼… 갑자기 왜 이렇게 얌전해졌어?”

그야 지금은 CC기에 당한 상태니까.

수갑 정도는 순식간에 박살낼 괴력을 지닌 전사의 몸뚱이를 지닌 상태라면 모를까.

일반인 이한수는 수갑만 채워져도 병신이 된다.

따라서…….

‘탈출 미션 같은 걸 수도 있겠네. 그냥 몬스터들 때려잡으면 끝나는 꿈이 있으면, 이런 꿈도 있으니.’

되도 않는 탈출 시도를 하는 것보단 비위를 맞추며 정보를 모으기로 했다.

지금은 일종의 튜토리얼 과정이라 볼 수 있으니까.

그래, 그러니까…….

“경관님, 아까는 제가 너무 경황이 없었습니다. 갑자기 모르는 사람들이 비밀번호를 치고 제 집에 들어오려 하다보니까 놀라서… 아까 일은 다시 한 번 사과드리겠습니다.”

바바리안으로서의 사고방식을 버리고, 깔끔하고 예의 바른 현대인식의 사죄를 상대방에게 보낸다.

한데 어째서일까?

내 사죄를 받은 강 팀장의 표정은 풀릴 기미 없이 더욱더 기괴해질 뿐이었다.

“지랄하네.”

…허, 사람이 사과를 했는데 지랄이라니.

그때 진짜 확실하게 보내버렸어야 했—.

“웃고 있었잖아 너.”

…응?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경관님.”

“하… 진짜 미친놈한테 제대로 걸렸네. 야, 아까 이 새끼가 우리 보고 뭐라 그랬지?”

“고블린 경관이라고 했습니다.”

아, 그거…….

“하하, 제가 흥분하다 보니 말이 헛나왔습니다. 좀 진정하시고 저한테 상황 설명을 좀 해주시는 건 어떨는—.”

강 팀장은 듣기 싫다는 듯 말을 끊으며 소리쳤다.

“닥쳐!!”

뭐야, 이 급발진은?

“그냥 닥치고 있으라고 새끼야!! 지금도 겨우겨우 참고 있으니까!”

아오, 침 튀기기는.

“…….”

솔직히 왜 저렇게까지 급발진하는지 이해는 되지 않지만, 그래도 상대를 더 자극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했다.

따라서 이때부터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서 혼자 생각을 정리했다.

그로부터 차로 얼마나 이동했을까.

이내 근방 경찰서에 들어선 차가 멈추고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드르륵 열렸다.

눈을 찌르는 따사로운 햇살.

향긋한 꽃내음을 품은 자유의 공기.

“내려.”

오, 드디어 탈출각이 생기는—.

“혹여나 이상한 마음 품지도 말고. 전기 맛 또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에라이…….

‘그래, 뭐… 일단 수갑부터 풀어야 하니까. 수갑이 풀리는 순간이 기점이라 보고 지금은 참자.’

탈출각은 깔끔하게 포기하고서 ‘강 팀장’을 따라 양팔을 포박당한 채 경찰서 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조사실에 도착.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건물 전체도 아니고 같은 층에만 고블린 경관들이 한가득이다.

대체 튜토리얼은 언제 끝나는 거지?

알 수 없지만, 일단 강 팀장의 지시대로 지문을 찍고서 유치장에 잠깐 갇혀 있자니 머지않아 다시 불려나가 조사를 받게 되었다.

“가족에게는 연락을 넣었으니 곧 오실 겁니다. 아, 그리고 아까는 기절하느라 못 들었을 거 같아서 다시 한 번 얘기하는데, 이한수 씨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고…….”

아까와 달리 존댓말을 써주기 시작한 강 팀장은 미란다의 원칙 고지가 끝나자마자 이것부터 질문을 해왔다.

“성명 이한수. 나이 30세. 1년도 더 전에 자택에서 실종. 우선 이것부터 말해보십시오. 그런 당신이 왜 오늘 거기에 있던 겁니까?”

“그냥 눈을 떠보니 거기였다.”

조금의 과장도 없는 진솔한 답변.

한데 나도 모르게 나온 바바리안 화법이 신경을 거슬리게 했을까?

옆에 있던 잡졸이 발끈하며 위로 팔을 올린다.

“…거기였다? 나이도 어린 게 감히 강 팀장님한테 반말이야 반말은!”

“그만해, 박 형사! 실종됐다가 1년도 더 넘어서 발견된 사람이잖아! 무슨 일을 겪었는지도 모르는데, 일단은 참아.”

“하지만 팀장님! 이놈 때문에 지훈이가 응급실에 실려갔다고요! 응급실에!”

“……됐으니까, 조사 방해할 거면 나가있어 이 새끼야!”

강 팀장의 불호령에 분한 티를 팍팍 내며 등을 돌리는 잡졸A.

“하… 소란스럽게 해서 미안합니다. 이한수 씨. 다시 조사 시작할게요. 지금 우리는 한수 씨한테 궁금한 게 아주 많아요. 물론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 걱정 마십시오. 성실히 조사에 응하겠습니다.”

“아니, 허투로 듣지 말고 정말로요. 대한민국 형사가 다쳤어요. 한 명은 목이 졸려 죽을 뻔했고. 우리가 당신을 감싸지 않으면, 당신 진짜 큰일나는 거야. 알겠어요?”

“예.”

한 귀로 대충 흘리며 답하자, 강 팀장이 한숨을 푹 내쉬며 조사를 재개했고, 나도 나름 성실하게 조사에 임했다.

문제는 상대방이 그렇게 느끼지 않았단 거지만.

“그러니까… [던전 앤 스톤]이라는 게임을 하고 있던 중에 정신을 차려보니 게임 속 세상에 빨려 들어가 있었다?”

“그렇다.”

“그 말투도 그쪽 세상에선 당신이 ‘바바리안’이란 종족으로 살아남아야 했기에 생긴 거고. 지금은 꿈결 폭포란 곳을 탐험하다가 잠에 들었는데, 여기가 그 꿈속 세상이다?”

“오, 맞다.”

깔끔한 정리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옆에서 탄성 아닌 탄성이 들려온다.

“와… 이거 진짜 꼴통 새끼네…….”

“조현병 그런 거 아닙니까?”

“그런 거 같다.”

기껏 진실을 말해줘도 정신 병자 취급을 하는 게 좀 억울했지만, 그래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니었다.

정신적으로 약해보이면, 상대도 방심을 할 테니까.

이들은 전부 다 ‘적’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딸깍, 딸깍.

앞에 있는 볼펜을 집어들고서 만지작거린다.

‘끝이 제법…….’

날카롭다.

눈 같은 급소에 찌르면 얄짤없이 영구적인 신체 결손을 입히며 무력화 시킬 수 있을 만큼.

‘아무튼, 수갑 푸는 방법도 체크 완료.’

조사를 받으면서도 주변 탐색을 게을리하지 않은 덕택에 수갑을 푸는 방법도 알게 됐다.

옆옆 테이블에서 조사를 받던 남자의 수갑을 푸는 걸 보고 알게 된 것인데…….

‘허리춤.’

경관들은 수갑 열쇠를 벨트에 보관한다.

쉽게 말해, 강 팀장만 제압하면 허리춤에서 열쇠를 빼내 CC기를 풀 수 있다는 뜻.

“팀장님… 이거 조사 이전에 정신 감정부터 맡겨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업무나 보고 있어. 한가해?”

이후에도 조사를 받으며 솔직하게 말했고, 강 팀장은 의외로 진지하게, 혹은 흥미롭게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렇게 얼마나 더 흘렀을까.

“배고프죠? 일단 밥부터 먹읍시다. 짜장이 좋아요, 짬뽕이 좋아요?”

“짜장. 아, 그리고 사이다, 사이다도 같이.”

“……알겠습니다.”

강 팀장이 시켜준 짜장에 코를 박고 흡입하다가 처음으로 위화감이 들었다.

“캬아아아아…….”

이게 이렇게까지 리얼할 것인가?

“왜 갑자기 그런 표정입니까? 맛있게 먹다가.”

“그야… 뭔가 이상해서.”

“뭐가 이상합니까? 멀쩡해보이는데.”

“예전에 꿨던 꿈에서도 뭔가 먹어보기는 했지만, 그땐 맛이 안 느껴졌었다.”

그런 내 답변을 들은 강 팀장은 정말이지 오묘한 눈빛으로 말없이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무릎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사는 이만하면 됐고, 다 드셨으면 그릇 이리 주세요. 곧 만나볼 사람이 있으니까.”

“만나볼 사람이라면…….”

“누구겠어요. 이한수 씨, 당신… 아, 저기 오셨네. 어머니, 이쪽입니다 이쪽!”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드는 강 팀장을 따라 등을 돌렸을 때였다.

“한수야…….”

늘상 즐겨 입던 긴 치마.

낡고 헤진 운동화.

푸석한 머리를 가리듯 깊게 눌러쓴 벙거지 모자.

그 아래로 보이는, 늘 보고 싶으면서도 다신 보고 싶지 않았던 바로 그 얼굴.

“아흐흑……!”

어머니가 입을 틀어막은 채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그걸 보며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푸흐흡…….”

확실히 덕분에 꿈속이라는 실감이 나긴 했는데.

“푸흡! 푸하하하하!”

그래도 기분 참 엿같네 이거.

***

어느 이름도 모를 고시원의 단칸방이었다.

어머니는 늘 일로 바빠 밤 늦게 들어왔고, 나는 그런 어머니를 이해할 만큼 성숙하지 못한 나이였다.

너 때문이란 말을 달고 살던 어머니.

왜 나 같은 걸 낳았느냐 울던 어머니.

난 그래도 어머니가 좋았다.

항상 같이 있어 달라며 졸랐고, 어머니는 딱 한 번 그 어린아이의 투정을 들어주었다.

그날 우리는 같이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좋아했던 동화책을 읽어줬고, 배가 고프면 컵라면을 끓여줬다. 추운 단칸방, 이불 안에서 서로를 꼭 끌어안고 과자를 까먹었다.

나는 매일이 오늘 같았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어머니도 그러자고 했다.

다음 날 엄마는 놀이공원에 나를 데려가 주었다.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회전목마 앞에서 어머니는 홀연히 종적을 감췄고, 나는 폐장 시간이 되어서야 놀이 공원 측 사람들에 의해 거둬졌다.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수많은 어른들이 나에게 다가왔고, 매일매일 잠드는 곳이 다를 만큼 수많은 기관을 전전했다.

아동 유기 및 학대.

양육권 박탈.

어른들은 내가 없는 곳에서 쑥덕이며 어려운 말을 썼고, 당시 나는 어렴풋이 느꼈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겠구나.

‘이해해. 넌덜머리가 나는 것도.’

물론 이제는 어머니의 심정을 모르진 않는다.

아픈 아이.

그래서 부모의 골치를 썩이는 그런 아이.

단지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가는 곳마다 불행한 사건 사고를 불러일으키는 역병 같은 존재.

이한수.

그게 나였다.

그러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어머니라 해도 사실 지금의 나보다 고작 몇 살 많은 나이였지 않은가.

미워할 곳이 필요했을 것이고.

모든 걸 털어버리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매 순간 유혹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뭐, 그다음 일은 그것과는 또 별개지만.

[꺄아아악! 오지 마! 다시는! 내 인생에서 제발 사라져 달라고!]

언젠가 성인이 되어 어머니를 찾아갔을 때.

어머니는 비명을 내지르며 그렇게 외쳤고, 나도 다시는 어머니를 찾지 않았다.

그래서 현별이에게 어머니의 소식을 들었을 때도 참 신기했었다.

[유산에 대해서 한참이나 얘기를 하다가··· 실종 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사망 신고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냐고 경찰에게 묻더라고요.]

어찌 소식을 알고서 돈이 탐나긴 했나 보지?

아니면 내가 하루라도 빨리 사라지길 바랐나?

정확한 생각이야 이 여자만이 알겠지만, 그래도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아흐흑……. 한수야… 미안해, 미안해… 엄마가 정말 미안해…….”

이제 와서 이렇게 눈물 흘릴 여자가 아니다.

뭐, 그 덕분에 이곳이 꿈속 세상이 맞다는 확신이 더욱더 크게 들기는 했지만.

“꼭… 꼭 만나서 말하고 싶었어. 내게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용서해 줄 수 있겠니……? 이 못난 엄마를…….”

훌쩍이는 어머니를 보며 나는 판단을 끝냈다.

‘이건… 이용할 수 있을지도?’

오히려 나쁘지 않다.

따라서 나는 울고 있는 어머니에게 다가가며 손을 뻗었다.

속에서 올라오는 모든 감정을 억누른 채로.

“용서… 할게요…….”

“저, 정말이니……?”

“네…. 엄마가 그렇게 가르쳤으니까…….”

마치 모든 죄를 사하여 주는 신부처럼, 손을 뻗어 어머니의 손 위에 다정하게 내 손을 겹친다.

두툼하다는 표현과는 거리가 먼 이한수의 손.

포옥.

어루만지듯 어머니의 손등을 매만지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강 팀장을 보았다.

“형사님… 수갑 좀 잠시 풀어주실 수 없겠습니까?”

“…안 됩니다.”

“에라이.”

이게 안 통하네.

21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77화 21

677화 꿈 (4)

이후로 벌어진 일들을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강 팀장이 어머니와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시간을 주었고, 어머니는 나에게 한참 동안 용서를 구했다.

그날 왜 나를 두고 떠났는지.

스스로의 나약함에 대해 얘기했다.

또한, 그날 떠나지 말았어야 한다며.

진심으로 후회하는 눈빛과 목소리로 후회의 말들을 토해냈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얘기들을 한 귀로 들으며 대충 흘려 넘겼다.

아니, 정확히는…….

‘슬슬 각이 나오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부족한 점들을 보완하거나 혹은 아예 계획을 갈아엎는 등.

계속해서 주변을 관찰하며 탈출 루트를 생각했다.

그러고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똑똑똑.

어머니와 단둘이 있던 조사실에 누군가 조심스레 노크를 하며 들어선다.

“안녕하세요, 이한수 씨.”

누구지 이놈은?

아무리 봐도 형사 같지는 않은데.

“죄송하지만, 보호자 분께서는 잠시 자리를 비켜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네…….”

이내 어머니가 조사실을 떠나고, 그 건너편 자리에 뉴페이스가 앉는다.

손에는 꽤 두툼한 서류들이 쥐어져 있었다.

“좀 전에 조사를 하신 내용부터 시작해 앞에 있었던 난동 사건까지 이야기를 전부 들었습니다.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던데, 그에 관해서 조금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본인의 정체도 밝히지 않은 채 부드러운 표정과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안경잡이.

그제야 나는 이놈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정신 감정.’

이놈은 내 정신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서 왔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얄짤 없이 정신 병원으로 이송되겠지.’

나는 빠르게 이후 상황을 가정해보았다.

과연 정신 병동까지 가는 것까지 ‘튜토리얼’의 일부일까?

‘…그럴 리가.’

내 게임 경험에 의하면 절대 그렇지 않았다.

현 상황을 게임에 빗댄다면, 정신 병동에 이송 되는 순간 ‘게임 오버’일 가능성이 높다.

일종의 베드 엔딩이라 해야 하나?

어쩌면 평생 병원에 갇혀서 강제로 약을 먹고 진짜 정신 병자가 된 채로 살아야 될 수도 있다.

따라서…….

“네. 뭐든 물어보셔도 됩니다.”

바바리안 모드를 끄고 젠틀맨 이한수 모드를 온.

“감사합니다. 들었던 것과 달리 아주 친절하시군요.”

“제가 원래 그렇습니다.”

이내 그렇게 대화할 환경이 구축되자 안경잡이는 본격적으로 내게 질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게임 속에 끌려갔다고 하시던데, 사실입니까?”

“아뇨.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럼 실종된 기간 동안에는 어디에 계셨죠?”

“어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굉장히 어두운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갇혀서 지내다가 나를 잡아간 놈들이 갑자기 나를 집으로 데려다 줬습니다. 그래서 그 난동 사건도 있었던 거고요. 날 납치했던 놈들이 다시 온 줄 알았습니다.”

“흐음…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이한수 씨를 납치했는지 알고 계십니까?”

“모릅니다. 전 그냥 납치 되어서 갇혀 있었습니다. 그 영화 아시려나? 군만두만 주던 그 영화……. 네, 그 영화처럼요. 그냥 가둬만 두고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근데 아까 조사를 받을 때는 왜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던 겁니까?”

“납치했던 놈들이 제게 협박했습니다. 자신들에 대해 말하면 반드시 찾아와 보복하겠다고… 그게 너무 두려웠습니다.”

순식간에 만들어낸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나름 그럴듯한 얘기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데 그런 얘기를 이렇게 제게 해도 되나요? 협박을 당하셨다면서.”

“그건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어딘가 믿음직하고 착해보여서요……. 요, 용기를 내보기로 했습니다.”

어리버리한 청년의 모습을 연기하며 말하자, 안경잡이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믿음직하고 착한 ‘선생님’처럼 보였다라… 잘 알겠습니다. 오늘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지요.”

아, 어, 음…….

‘……이거 조진 거 같은데?’

슬픈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는 말은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따.

정신 감정을 하러 온 안경잡이가 떠나가고, 면회가 끝난 어머니는 밖에서 대기. 나는 유치장에 갇혀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이한수 씨, 나오세요.”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유치장에서 꺼내진 나는 서 밖으로 이송됐다.

“강 팀장님, 제가 어디로 가는 겁니까?”

“……가보면 알게 되실 겁니다.”

니미럴.

‘실패했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조사를 받을 때 게임 얘기는 하지 않는 거였는데.

내가 입술을 꾹 다물고 땅을 바라보자, 강 팀장도 숨기는 게 의미 없다고 판단했는지 위로의 말을 전해왔다.

“그래도 그곳에서 잘 계시면 재판에서는 훨씬 더 유리할 겁니다. 살인 미수에 특수 상해……. 원래라면 아무리 초범이라고 해도 징역을 면치 못할 거였어요. 그러니까… 지친 마음을 편히 쉰다고 생각하고…….”

지랄.

지친 마음을 편히 쉬기는 무슨.

“저도 자주 가고, 어머니께서도 특히나 많이 한수 씨를 도와줄…….”

주의 깊게 들을 이유가 사라진 강 팀장의 목소리가 점점 흐릿해지고.

터벅.

서 앞에 주차된 특수 이송 차량이 보인다.

차 앞에는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서 있다.

“별 다섯 개짜리 초위험군 환자예요. 절대 자극하지 말고, 이송하는 데 특히나 유의하세요.”

그런 제복남들에게 아주 강한 어조로 경고를 덧붙이는 안경잡이.

‘별 다섯 개는 뭔… 여기가 탐험가 길드냐.’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주변을 쓱 훑었다.

안경잡이의 경고를 들은 제복남들은 차에서 구속복 같은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마 준비가 끝나면 수갑을 풀고 저기로 옮겨지겠지.’

다만, 그렇기에 이번에도 한 걸음 더 빠르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곧 있으면 자연스레 수갑이 풀린다고는 하지만, 이놈들이라고 병신은 아니지 않은가.

가장 위험한 순간임을 알기에 훨씬 더 철두철미하게 진행을 할 것이다.

그래, 그러니까…….

‘지금.’

등을 돌아 강 팀장을 바라본다.

“한수 씨?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그… 잘 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제 일인데요 뭘. 감사받을 일이 아닙니다.”

“제 일이라…….”

그렇다고 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다.

강 팀장이 강 팀장의 ‘할 일’을 한 것처럼, 나도 내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니까.

콰직-!

초보 바바리안 시절에 자주 썼던 ‘박치기’를 얼굴 정가운데에 적중.

“아악!”

“꺄아아악!”

앉은 강 팀장을 밀치며 바닥에 쓰러뜨린 뒤, 이전에 눈여겨보았던 허리춤에 손을 뻗어서…….

“왜 없지?”

뭐야, 이거?

이런 상황은 내 계획에 없었는데?

“어…….”

진심으로 당황하며 주변을 확인하고 있던 때였다.

“아으…….”

“가, 강 팀장님!”

“이 개새끼가 또!!”

강 팀장이 박치기에 얻어맞은 코를 부여잡은 채 동료들을 말린다.

“됐어! 하지 마!”

“그, 그렇지만……!”

“하지 말라면 하지 말라고!”

이내 강 팀장이 천천히 바닥을 짚고 일어나며 나를 보았다.

“…한수 씨가 이럴지도 모른다 생각해서 열쇠는 다른 동료에게 맡겨뒀었습니다.”

아… 그랬구나.

“한수 씨를 원망하진 않습니다. 단지 아플 뿐이니까요. 거기서 선생님들 말씀 잘 들으며 ‘약’만 잘 먹으면 금방 건강해질 겁니다. 한수 씨도.”

망했네 이거.

***

하얗고 하얗다.

독한 약품 냄새가 곳곳에서 가득하고.

“아아아악! 아아아악! 아아아악!”

오늘도 어김없이 지랄을 시작한 옆방 환자의 발작 소리를 자장가 삼아 특수 유리로 제작된 창 밖을 바라본다.

“히히…….”

나른하단 말로는 절대 표현하지 못할 만큼 노곤한 오후.

간호사복을 입은 근육질의 건장한 사내가 차트를 들고 내 앞에 서 있다.

신입으로 보이는 얼빵한 간호사를 대동한 채.

“여기 이 환자가 그때 말한 이한수 환자야. 이 환자를 대할 때 주의할 게 뭐라고 했지?”

“절대 개인적인 대화를 하지 말 것입니다!”

“너도 다른 병원에 있었지만, 그래도 이 환자는 특히나 주의해. 박 교수님이 말했듯, 남을 기만하고 속이고 연기를 하는 게 숨 쉬는 것처럼 능숙한 환자니까.”

“그, 그렇습니까?”

“그래! 지금이야 약에 취해 얌전하지만, 틈만 나면 탈출하려고 하는 환자야. 현실을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칼이 있으면 우리를 찔러 죽이고 깔깔거리며 웃을걸? 하나 해치웠다며?”

“…예, 알겠습니다!”

“허투로 듣지 말고! 듣자 하니 체포 과정에서 경찰 세 명을 때려 눕히고, 한 명은 목을 졸라 죽였다고 하니까.”

“아… 그 얘기는 들었습니다. 경찰서에서 나올 때조차도 난동을 부렸다죠? 심지어 병원에 와서도 몇 번인가 간호사 분들이 크게 다치는 일이 있었다고…….”

“그래도 차라리 다행이지. 그 덕분에 강한 약물 치료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제 이렇게 얌전하게 됐잖아?”

“예.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한 번을 쳐다도 보지 않네요.”

그야 쳐다보면 말을 안 할 거잖아.

이렇게 듣는 대화들도 어찌 보면 다 정보인…….

“하아아암…….”

피곤해 죽겠네.

오늘은 이만하면 됐으니, 잠이나 자야지.

‘근데… 벌써 며칠이나 지났더라……?’

잘은 모르겠지만, 휴식도 전투의 일환인 법.

눈을 감고 덮쳐오는 수마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나는 생각했다.

‘정신 차리자.’

누가 뭐라 하든 이곳은 꿈속 세상이다.

나는 아직 시련에 빠져 있는 것이며, 늘 그랬듯 어떻게든 이겨낼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하지만…….

“이한수 환자분 투약 시간입니다. 입 벌리세요!”

“아…….”

꿀꺽!

“…아, 또 삼키는 척만 하네. 김 간! 그거 가져와! 오늘도 강제로 넣어야겠어. 토하지 못하게 1시간 동안은 손발이랑 묶어두고!”

매일같이 투약 받는 항정신성 약물 때문일까?

졸리면 자고, 깨어나면 몽롱하고, 언제부터인가 산책 시간도 아예 사라져서 하루 온종일 침대에만 묶여 있는 일상들.

그 속에서 나도 서서히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여기가 꿈속이 맞나……?’

면회가 가능할 때마다 찾아와 우는 어머니도.

라프도니아에서 얻은 모든 추억과 경험들도.

모두 지금 이 상황이 꿈속임을 말해주고 있지만, 한 가지 결정적인 모순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대체 왜…….’

아무도 나를 죽이려 들지 않는 거지?

***

실수하면 죽고.

운이 없어도 죽고.

그냥 조금 잘 모르기만 해도 죽는.

온갖 사망 플래그로 가득했던 그 지랄 맞은 세계.

[던전 앤 스톤].

내 몸은 여전히 그 세계에 속해 있고, 정말로 꿈만 꾸고 있는 거라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내가 왜 아직까지도 살아 있을 수 있는 거지?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왜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누구 하나 나를 죽이려 들지 않는 거지?

내게 머리를 맞은 형사도, 목이 졸려 죽을 뻔한 강 팀장도.

어째서 다들 그렇게 비폭력적인 걸까.

‘마치…….’

진짜 현대 세상에 오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 정확히는…….

‘내가 정말… 정신 이상자라도 된 것처럼.’

아무리 심지를 굳게 다잡아도, 나도 모르게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단지 약물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든 걸 수도 있지만.

정말로 의사, 간호사, 형사, 어머니가 말했듯.

“진짜 내 정신에 문제가 생긴 건가?”

사실 생각해보면 그렇게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개연성이 있다고 해야 하나?

스트레스, 트라우마 그런 단어로도 설명하지 못할 만큼 불운하고 끔찍했던 유년 시절.

도피성으로 몰두했던 게임.

그중에서도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제일 열심히 플레이한 [던전 앤 스톤].

플레이 도중에 있었던 현별이와의 이별.

그러한 것들이 모두 겹쳐져 정신이 확 돌아버렸다 해도 이상한 얘기는 아니다.

아니, 정신과 의사가 아니어도 모두 ‘그럴 만하다’라며 납득할 만한 이야기에 가깝다.

“그럼… 거기서 있었던 일들이…. 정말 다 내가 미쳐서 그랬던 거라고……?”

“다들 귀 막으세요! 이한수 환자가 또 뭔가 수작을 부리려나 보니까!”

“예! 분명 멀쩡해진 척 하면서 우리를 방심시킬 생각일 겁니다!”

주변에 있던 병원 관계자들 반응이야 어쨌든.

‘아니야, 그럴 리가.’

고개를 내저으며 나약해지려는 마음을 붙잡는다.

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곳은 여전히 꿈속이다.

내가 이것을 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시련은 끝. 그때부터 게임 오버인 게 분명하다.

그래, 그러니까…….

‘증거가 필요해.’

마음을 굳게 다잡기 위해서는 증거가 필요하다.

그 무엇보다 단단한 지지대를 세워 무너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편지……. 편지를 전달해주세요.”

“편지 말입니까? 어머니께요?”

“아뇨… 해외에요. 열어서 내용을 봐도 상관 없으니까, 국제우편으로 보내기만 해주세요.”

“주소가… 캐나다? 혹시 예전에 말했던 그 ‘캐나다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인 겁니까?”

“네. 부탁 좀 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꼭 전달하겠습니다.”

편지를 읽고서 내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여겼을까?

내 담당의는 흔쾌히 요구를 들어주었고, 그로부터 약 이 주가량이 흐른 뒤에 답장이 돌아왔다.

[뭐라 시작해야 할지를 모르겠네. 안녕, 한수.]

[너의 편지를 보고서 엄청나게 놀랐어. 처음엔 내 친구들이 장난을 치는 건가도 싶었는데… 의사가 같이 보낸 너의 사정이 정말이라면, 꼭 답장을 해야 할 거 같아서 이렇게 글을 쓰게 됐어.]

[근데 네 주치의는 싫어할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 난 네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잠깐이나마 생각을 했거든.]

[그야 말이 안 되잖아? 나도 [던전 앤 스톤]을 했고, 관련 커뮤니티도 했으니 내 이름이나 주소를 네가 인터넷을 뒤져서 알아낼 수도 있어.]

[하지만 첫 키스가 17살이었던 것. 그 상대가 내 여자친구의 베스트 프렌드였던 것. 어릴 때 키우던 강아지가 죽고 나서 수의사를 꿈으로 삼았던 것까지.]

[나는 그런 얘기를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어. 인터넷은 물론이고 친한 친구들에게조차 말이지.]

캐나다 친구의 답장은 내가 ‘꿈속’에 갇혀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어주었다.

그도 그렇잖아?

내가 겪은 일들이 전부 ‘환상’이었다면, 어떻게 저 멀리 바다 건너편에 있는 ‘캐나다 친구’의 일을 알 수 있었겠어?

“후…….”

좋아, 나는 미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제 정신만 바짝 차리고 탈출할 방법을 찾자.

그런 생각을 하며 편지를 마저 읽어내렸다.

[한데 너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한편으로는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

[네 말이 사실이라면 난 이미 그 세계에서 죽었고, 지금의 나는 만들어진 가짜란 뜻인데… 그런 건 너무 슬프잖아? 내게는 사랑하는 가족도, 애인도 있어.]

[넌 어떨지 몰라도, 난 이게 진짜라고 생각해.]

[물론 무엇을 진짜라고 믿을지는 너의 선택이지만 말이야.]

[아, 그리고 이야기 할 사람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편지를 보내도 좋아. 아직 얼굴도 모르는 바다 건너의 너지만, 왠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 같단 기분이 들거든.]

[PS. 너의 유년 시절 이야기도 들었어. 넌 굉장히 강한 사람일 거 같아. 그러니까 꼭 이겨낼 거라 믿고 멀리서라도 응원할게.]

이내 편지를 모두 읽은 나는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하아…….”

이건 또 이것대로 기분이 착잡했다.

35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78화 35

678화 꿈 (5)

깨지 않는 꿈이 이어진다.

“오빠, 저 오늘도 왔어요.”

거의 매일같이 현별이가 면회를 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빠가 정신 차리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따로 알아봤어요. 솔직히 말해 찾는다고 찾아질까 싶기는 했는데… 정말 운 좋게도 찾았어요.”

이 꿈속 세상에서 현별이는 게임 속에 끌려가지 않았으며, 어머니에게 내 소식을 들은 다음에는 자주 찾아와 나를 도와주고 있었다.

바로 이렇게.

“이백호라는 전역 군인이요. 오빠가 자주 하던 [던전 앤 스톤]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더니 어떻게 찾아지긴 하더라고요?”

“만나서 얘기 좀 나눌 수 있냐니까 여자냐고 먼저 묻더라고요? 그렇다고 하니까 만나겠다고 하던데… 만나서 하는 짓도 그렇고 약간 좀 여자에 미친 애 같아요.”

“아, 잠깐 얘기가 샜네. 아무튼, 중요한 건 걔도 게임 속에 빨려 들어갔다거나 한 건 없었어요. 어… 실망하셨어요?”

실망은 무슨.

이미 예상했던 일이다.

이 꿈속 세상에서 게임 속에 끌려간 사람은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였다.

내가 굳이 캐나다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도.

진심으로 내가 미친 건 아닌가 싶어졌거든.

하지만 다행히도 어제부로 결과가 나왔다.

아무리 약물을 먹이고 그 지랄을 한들.

나는 미치지 않았다.

뭔가 꿈이라기엔 이상한 부분이 많고, 쓸데없이 현실적인 부분들이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곳은 꿈속 세상이다.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것도 뭔가 나에게 아주 유리한.

‘지금 생각하면 경찰들도 이상했지.’

암만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다 해도 그 난리를 피웠다. 한데 강 팀장은 아직도 가끔 찾아와 얼른 낫기를 바란다며 호의적인 말을 뱉어 댄다.

어디 그뿐인가?

“오빠, 얼른 나으면 같이 남산이나 가요. 거기 야경 좋아했잖아.”

현별이는 헤어진 전 남친에 불과한 내게 너무나도 지극정성을 다하고 있고.

“한수야… 내 탓이다, 내 탓이야…. 내가 그러지만 않았어도 네가 이렇게 될 일은 없었을 텐데….”

내 역린이었던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내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바라고 바랐을 말들을 계속해서 토해 낸다.

정말 말 그대로 꿈 같은 세상이라 해야 하나?

‘그래서였을지도.’

지금 생각해 보면, 약물이나 그런 것의 영향보다도 이게 더 컸을지 모른다.

여기가 현실이고, 내가 미친 게 아닐까 여긴 것도.

원래 사람이란 게, 전기장판 위에 한번 누으면 그냥 계속 그대로 있고 싶어지는 법이잖아?

‘하지만 이제는 일어나야겠지.’

캐나다 친구의 편지를 지지대 삼아 박약해져 가던 의지를 다잡은 나는 다시금 탈출 계획을 세워 나갔다.

병원의 구조를 파악했고, 근무자들의 성향과 스케줄도 분석.

그러면서도 순순히 치료를 받는 척하며 방심하게끔 유도했다.

그렇게 착실히 준비를 해 가던 무렵이었다.

“한수 씨, 사실 그동안 한수 씨는 물론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못했지만……. 저는 한수 씨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사 명목으로 면회를 온 강 팀장이 내게 뜬금없는 말을 던진다.

상태가 호전되는 척 연기 중이던 나로서는 다소 난감한 상황이었다.

“예? 그건 제가 다 지어낸 얘기 아닙니까? 저는 이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요…?”

“죄송합니다…. 호전되는 듯한 지금에 와서 이 말을 하는 게 옳은지 계속 고민했습니다마는…….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여기 이 영상을 봐 주시겠습니까?

이내 부탁하듯 말한 강 팀장이 휴대폰을 꺼내서 저장되어 있던 동영상을 재생했다.

‘뭐야 이건…?’

동영상 속 전에 내가 조사를 받았던 경찰서였다.

카메라는 책상 위에 올려진 모니터를 비추고 있었는데….

“보이십니까? 여기 이 모니터에 적힌 글자들.”

모니터에는 알 수 없는 로그들이 떠 있었다.

화질이 좋지 않아 모니터에 적힌 글자들을 영상을 통해 읽어 내리긴 어렵지만, 다행히 강 팀장이 옆에서 대신 읽어 주었다.

“동기화가 완료되었습니다.”

“캐릭터 정보 및 일지가 기록되며 관리자에게 전송됩니다.”

“성인식을 무사히 끝마쳤고, 새로운 장비를 꼈고, 종합 아이템 레벨이 얼마 만큼 올랐고…. 대충 그런 게임 메시지 같은 게 빼곡히 적혀 있더군요. 심지어 실시간으로 갱신이 됐습니다.”

“캐릭터 정보 같은 것도 가끔 적힐 때가 있었는데, 그때 그 캐릭터의 이름이 ‘비요른 얀델’이었습니다. 한수 씨가 말한 이름과 일치하죠.”

이곳이 꿈속이라 판단하고 탈출 계획을 짜고 있던 내게는 갑자기 이게 뭔가 싶은 상황.

“근데…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건데요?”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강 팀장이 잠시 멈췄던 동영상을 다시 재생한다.

“여기 모니터 주변을 잘 봐 주시겠습니까? 네, 바로 여기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모니터에 아무런 선도 연결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본체는 물론 전원선도 아예 꼽혀 있지가 않아요.”

어… 그것도 그러네?

일순간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게 대체 뭘 뜻하는 거지?

“과학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상황이지요. 이것 때문에 더더욱 한수 씨의 말이 진짜가 아닐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럼 내가 미치지 않았단 겁니까?”

“아뇨, 그건 저도 아직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상황이 무척이나 수상하단 겁니다.”

“수상하다니요?”

고개를 갸웃하자 강 팀장이 주변을 쓱 둘러보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이 모니터를 서로 가져온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증거 보관실에서 분실됐습니다.”

“…….”

“마치 누군가 증거를 인멸하려 한 것처럼요.”

뭐가 어떻게 돼 가고 있는 거야?

***

강 팀장의 말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기껏 이 세상이 꿈속이라고 완전히 믿게 되었는데, 이런 영상을 보여 주다니?

뭐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가짜인 거야?

혹시 내가 이곳을 현실이라 믿지 않으니까, 믿게 하려고 강 팀장을 보내 이런 걸 보여 준 건가?

‘아니, 그럼 애초에 캐나다 친구한테 그런 답장이 안 오게 했으면 됐잖아?’

모순을 해결하면 다른 모순이 생겨나는 상황.

새삼 머리가 아파 오지만, 그럴수록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그리고 나는 선택할 수 있다.

내가 무엇을 믿을 것인지.

‘결행일은 나흘 후…….’

이내 탈출 계획이 완성되고 기일까지 잡혔다.

그날 나는 이 병원을 탈출해 바깥으로 나갈 거다.

그다음에 어떻게 해야 이 꿈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 생각을 해 봐야 할 테고.

‘왠지 [던전 앤 스톤]에 그 방법이 있을 거 같기는 한데…….’

물론 이건 내 추측일 뿐 확실한 건 아니다.

다만, 병원에서도 다 허락을 해 주면서 [던전 앤 스톤]은 못 하게 한 걸 보면 수상하긴 하다.

뭐, 치료에 방해된단 명분이 있긴 했지만서도.

‘[던전 앤 스톤]을 다시 한번 깨는 것. 그게 트리거일지도.’

일단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

그러니 중요한 건 탈출이 첫 트라이에 성공하는 것인데….

‘혹시 모르니 한 번 더.’

결행일까지 기다리는 동안에도 나는 계속해서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부족한 점이 없는지를 찾았다.

그리고….

하루, 이틀, 사흘.

그렇게 결행일을 하루 남겨 놓았을 시점이었다.

“이한수 환자분! 면회예요!”

누군가 내가 입원한 병원에 방문했다.

현별이, 어머니, 강 팀장.

십중팔구 셋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으나, 막상 가 보니 나를 반긴 이는 생판 모르는 할아버지였다.

종족은 백인.

복장은 신사를 연상케 하는 정장.

무기처럼은 보이지 않는 고급진 지팡이.

‘지팡이를 들었다고 마법사는 아니겠지만서도.’

일단 낯선 사람을 보면 분석을 하는 것.

라프도니아에서 생긴 습관—.

“자네가 한수 군이로군.”

놀랍게도 순혈 백인처럼 보이는 노인은 나를 보며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한국말을 썼다.

난 뒤에 있는 젊은 사람이 통역가인 줄 알았는데.

그냥 수행인 같은 건가?

알 수 없지만 딱 한 가지는 분명했다.

“예, 그런데… 어르신은 누구십니까?”

어째선지 느낌이 좋지 않다.

그야 이런 사람들이 날 찾아올 이유가 뭔가?

딱 봐도 돈 많고 지위도 높아 보이는 사람인데.

심지어 나랑 연관도 없는 사람이 면회를 올 수 있던 것부터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인데…….

스윽.

이내 백인 노인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중절모를 벗으며 탁자에 올려 둔다.

그러면서 가려져 보이지 않던 얼굴이 드러났다.

덕분에 소개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다.

“아우릴 가비스라는 사람일세.”

두근-!

“자네가 플레이한 [던전 앤 스톤]을 제작한 사람이기도 하지.”

이 할배까지 나타날 줄은 몰랐건만.

명색이 컨셉이 ‘꿈’이라서 그럴까? 정말이지 전개를 한 치 앞도 읽을 수가 없—.

“그런데 말일세.”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할배의 날카로운 눈빛이 내게 고정된다.

어딘가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분위기.

“보아하니, 자네는 이미 나를 알고 있던 거 같군?”

거, 저쪽 세상이나 이쪽 세상이나 이 할배한테는 뭘 숨길 수가 없네.

“아무래도 그쪽에서 또 다른 나를 봤나 보군?”

“또 다른 나…?”

“흐음, 거기까지는 알아내지 못한 건가….”

현대 생활에 너무 익숙해져서일까?

할배의 입맛 다시는 소리를 듣자마자 온몸에서 옛날의 감각이 깨워진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당한다.

그래, 그러니까….

“됐고, 본론만.”

목소리를 내리깔며 깊은 눈동자를 똑바로 직면하자 할배가 이유 모를 미소를 입가에 걸친다.

어딘가 흡족해하는 듯한 미소.

“나는 자네가 미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일세. 그리고 자네를 이곳에서 빠져나가게 도울 능력도 갖고 있지.”

“…….”

“한데 이 말에 별다른 반응이 없는 걸 보니… 이미 빠져나갈 계획을 세워 둔 모양이지?”

하, 이 할배는 뭐 이리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떠보는 건지.

“본론만.”

목소리를 조금 더 내리깔며 강한 어조로 말하니 할배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인다.

그리고 마침내 본론으로 들어선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이 할배는 한 가지가 궁금해 나를 찾았다.

“그 아이를 만났나?”

“그 아이가 누구지?”

짐작 가는 것이 있긴 했으나 모른 척 되묻자, 할배가 고개를 저었다.

“……됐네. 질문을 바꾸지.”

뭐야, 괜히 궁금해지게.

“어찌 돌아올 수 있던 겐가? 심연의 문이 열린 것도 아닐진대.”

“…여기까지 왔을 정도면 이미 조사는 다 해 봤을 텐데?”

“아, 자네가 경찰이나 의사에게 말한 기록들 말인가? 그거라면 진작에 확인해 봤…….”

태연히 말을 잇던 할배가 돌연 입을 꾹 다물더니, 돌연 크게 웃음을 터트린다.

“하하핫! 아하하하하!”

“…….”

“혹시 자네는 정말로 이 세상이 꿈속 세상이라고 믿고 있는 겐가?”

비웃는 듯한 뉘앙스인지라 맘 같아선 대답하기 싫었다. 하나 그냥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어떠한 정보도 얻지 못할 터.

“할배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네?”

“한수 군, 자네가 뭐라 믿든지 간에 여긴 틀림없는 현실일세. 자네가 있던 곳과는 다를지라도.”

“있던 곳과는 다르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이 세상에는 자네가 말한 ‘치트 모드’는 존재치 않네. 그렇기에 오직 자네만이 심연의 문을 열고 라프도니아로 넘어갈 수 있었지. 하지만…….”

말꼬리를 흐렸던 할배가 말을 잇는다.

“그렇다고 이곳히 현실이 아니란 뜻은 되지 않네.”

“믿기 어려워도 모두 진짜일세. 자네에게 용서를 비는 어머니도, 헌신적인 전 연인도.”

믿기 어려워도가 아니라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

“그럼… 증거를 대보든가.”

다만 배짱을 부리는 태도로 나가자, 할배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아니, 됐네. 그럴 필요까지야.”

“댈 수 있는 증거가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니고?”

살살 긁어 봤음에도 예상했던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음대로 생각하게. 어차피 자넨 이곳이 꿈속이라 생각하지 않나.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마음이라면, 구태여 설득할 이유 또한 없지.”

하… 여기서 이렇게 나온다고?

갑자기 스트레스 지수가 치솟지만, 탈출을 앞둔 상황인지라 한 방 때려 줄 수도 없었다.

“그럼 이만 일어나겠네. 무운을 빌지.”

정말로 볼일이 다 끝났다는 듯 쿨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할배.

물론 그냥 여기서 보낼 수도 있었지만…….

“잠깐.”

왠지 찝찝해진 나는 할배를 멈춰 세웠다.

“할 말이라도?”

어… 용건이 있어서 잡은 게 아니라, 그냥 이대로 보내면 안 될 거 같아서 잡은 건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이거나 묻기로 했다.

“꿈에서 깨어나는 방법이 뭐지?”

“으흠?”

“어차피 그쪽도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라면, 그냥 말해 줘도 되는 거 아닌가?”

거듭된 물음에 나를 빤히 바라보던 할배가 또다시 피식 웃었다.

“바라는 것일세.”

“……뭐?”

“자네가 돌아가길 바란다면, 자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리될 걸세. 한데 아직까지도 이곳에 있는 걸 보니….”

“…….”

“말과 달리, 자네도 이곳이 제법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야.”

뭐래, 나는 이 순간에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구만.

“아, 병원이나 경찰 문제라면 해결해 두겠네. 자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도록.”

뭐라 하건 절대 헷갈리지 말자.

44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79화 44

679화 꿈 (6)

결행일을 하루 앞뒀던 내 탈출 계획은 무산됐다.

그야 더 이상 탈출을 할 이유가 사라졌거든.

아우릴 가비스가 떠난 후, 모든 퇴원 수속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됐다.

“이 정도면 사회로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다는 게 제 소견입니다.”

의사는 내가 완치됐다고 판단했고.

“퇴원 축하드립니다. 한수 씨.”

경찰 쪽 소식을 가져다주던 강 팀장도 딱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물론 현별이나 어머니는 그러한 갑작스러 변화에 당황스러운 기색을 내비치기도 했지만…….

“잘 됐네요, 오빠. 정말로요. 너무 잘 됐어요.”

“집으로… 집으로 가자, 한수야…….”

결국 두 사람 다 잘 됐다며 기뻐했다.

그리고 그렇게 불과 하루 만에 퇴원 수속이 종료.

얼마나 갇혀 지냈는지도 모를 병원에서 마침내 빠져나온 나는 어머니와 함께 내 방으로 향했다.

“저번에 들러서 조금 정리해두기는 했는데……. 많이 더럽지? 이렇게 빨리 퇴원할 줄 알았으면, 미리 다 해두는 건데…….”

“……안 가세요?”

“당분간은 엄마가 같이 지내면서 도와줄게……. 호, 혹시 불편한 거면 잠은 자지 않고 왔다 갔다만—.”

“하……. 됐습니다. 2시간도 넘는 거리인데 뭘 또 왔다 갔다……. 그냥 여기서 지내세요.”

어차피 시간이 되면 떠날 세상.

괜히 내쫓는 게 더 귀찮다고 판단한 나는 어머니와 동거를 시작했다.

그래도 엄마가 있으니까 꽤 편리한 점이 많았다.

“한수야, 밥 다 차렸는데…….”

시간이 되면 밥이 나온다든가.

‘……얼마 만에 먹어보는 거지?’

그 밥이 내 입맛에 아주 잘 맞는다든가.

“저 노트북을 좀 사려 하는데요.”

“엄마 카드를 줄 테니 이거를 쓰렴.”

돈복사도 가능하다.

뭐, 찝찝해서 쓰지 않았지만.

“아뇨. 카드가 아니라 차로 좀 데려다 줄 수 있나 부탁드리려고요.”

아무튼, 집 정리가 끝난 후에는 곧바로 전자 제품 매장에 가서 노트북을 구매했다.

제일 저렴한 제품으로 다섯 개나.

“한수야… 노트북을 이렇게 많이 살 이유가 있니?”

“네. 다섯 대는 있어야 제대로 돌릴 수 있는 게임이라서요.”

“……그, 그러니?”

어머니는 이해하기 어렵단 표정을 지었지만, 그건 다 이 게임을 안 해봐서 그렇다.

[던전 앤 스톤]의 핵심은 운빨과 노가다이니까.

계속 리트라이를 반복해야 하는데 컴퓨터 한 대로 언제 깨?

‘툴을 써서 한 컴퓨터에 4개씩 돌리면… 동시에 스무 캐릭터를 키울 수 있는 거네.’

실제로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9년간 게임을 했다.

몇몇 상황을 제하면 세심한 컨트롤을 할 필요가 없는 게임이니까.

이렇게 여러 캐릭을 키우다가 특정 정수나 혹은 특정 장비가 빠르게 떠주면, 클리어 가능성이 생겼다 판단하고서 좀 더 집중 관리하는 식으로 플레이를 하는 것인데…….

‘오케이, 세팅 완료.’

스무 개의 캐릭을 전부 바바리안으로 채우고서 본격적으로 게임을 진행했다.

딸깍, 딸깍, 딸깍.

타다닷, 타다다닷, 타닷.

탁! 탁! 탁! 타악!

자동화가 힘든 1층 구간인지라 손이 아주 바빴지만 중간중간 ESC 신공을 써서 템포를 조절하며 버텼다.

그리고…….

「캐릭터가 전사를 동료로 영입했습니다.」

「캐릭터가 궁수를 동료로 영입했습니다.」

「캐릭터가 궁수를 동료로 영입했습니다.」

「캐릭터가 전사를 동료로 영입…….」

첫 귀환 이후 탐험가 길드에서 동료를 한 명씩 구한 뒤에는 조금 더 손이 편해졌다.

뭐, 이때도 모니터링 자체는 잘 해줘야 하지만.

“암, 저층 때는 닥치고 전사랑 궁수가 짱이지.”

오랜만에 게임을 플레이해서 그런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저층 구간을 하는데도 꽤나 즐겁다.

물론 그러한 시간들도 길게 이어지진 않았지만.

「함정을 밟은 캐릭터가 사망했습니다.」

「게임 오버.」

3층이 넘어가며 하나둘 죽는 캐릭터가 나오기 시작했다.

20개의 캐릭터를 키우며, 죽을 놈은 죽으란 식으로 하드코어하게 플레이한 탓인데…….

「감당할 수 없는 일격!」

「캐릭터가 사망했습니다.」

딱히 아쉬워 할 것도 없었다.

차근차근 안전하게 성장해서는 클리어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게임이니까.

적자생존.

아니, 이 말로도 부족하다.

날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날 더 강하게 만들어 줄 뿐인 것처럼.

누가 봐도 뒈질 수밖에 없는 곳에 가서 ‘운 좋게’ 살아나온 캐릭터들은 강해진다.

「치명적인 일격!」

「캐릭터가 사망했습니다.」

「약탈자의 습격으로 캐릭터가 사망했습니다.」

「게임 오버.」

「트롤에 의해 캐릭터가 사망했습니다.」

「게임 오버.」

그 어느 캐릭터들보다 빠르게.

***

「캐릭터의 영혼에 [트롤의 정수]가 스며듭니다.」

「캐릭터가 5층 대마경에 진입했습니다.」

「새로운 장비를 장착했습니다.」

「캐릭터의 장비의 종합 아이템 레벨이 +799 상승합…….」

***

일주일, 이 주일, 삼 주일…….

내가 이 집에 틀어박힌 후부터의 시간은 정말이지 쏜살처럼 흘러갔다.

“한수야! 식사하렴!”

어머니는 하루 종일 처박혀 게임만 하는 나를 지극정성으로 돌봤고.

“오빠, 얘는 뭐예요? 몬스터는 아닌 거 같은데.”

“사람. 이 캐릭터는 약탈이나 하면서 키워보려고.”

“우아, 잔인해.”

현별이는 가끔 찾아와 침대에 앉아 내가 게임을 하는 것을 구경하며 게임을 주제로 얘기를 걸어왔다.

마치 반에 적응하지 못한 아이를 도와주라는 명을 받은 학급 반장처럼.

“오빠, 그럼 전 가볼게요! 내일도 출근해야 돼서. 어머니도 안녕히계세요!”

“어, 그래 현별아! 조심히 가렴!”

아무튼, 그러한 나날들이 계속 이어지며 어머니와 지내는 일상도 익숙해졌다.

처음엔 옷 갈아입는 것도 보이는 게 불편해 문을 꼭 잠그고, 화장실에 갈 때도 속옷에 상하의까지 전부 다 챙겨갔지만…….

‘어차피 돌아갈 건데 굳이?’

지금에는 그냥 별 생각 않고 편하게 지내고 있다.

다만 그런 불편함마저 사라진 상태에서 주야장천 게임만 하고 있자니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요컨대, 쓸데없이 현타가 온다거나.

[말과 달리, 자네도 이곳이 제법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야.]

그 할배가 한 말이 자꾸 떠오른다거나 하는 등.

더 이상 헷갈리지 말자고 했던 부분들이 자꾸만 머릿속에 아른거린다.

‘정말… 꿈속인 걸까?’

돌아오지 말라고 했던 마녀도, 정말 내 무의식을 토대로 만들어 낸 환상에 불과한 걸까?

이제 고민하는 것도 지겹지만, 자꾸만 생각이 드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내친김에 정리를 해봤다.

[한수 군, 자네가 뭐라 믿든지 간에 여긴 틀림없는 현실일세. 자네가 있던 곳과는 다를지라도.]

아우릴 가비스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일종의 평행세계다.

[이 세상에는 자네가 말한 ‘치트 모드’는 존재치 않네.]

치트 모드가 생겨나지 않았고, 그렇기에 오직 나 한 명만이 라프도니아로 끌려간 또 하나의 세계.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마음이라면, 구태여 설득할 이유 또한 없지.]

아우릴 가비스는 내가 다시 라프도니아로 돌아가길 바라고 있으며.

[바라는 것일세.]

돌아가는 방법은 오직 간절히 바라는 것뿐.

게임 클리어를 위해 매일같이 방구석 폐인으로 지내는 것도 사실 이 때문이었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정말로 입장하시겠습니까?」

다시 한 번 그 문구를 보고 나서.

그때에도 ‘예’ 버튼을 누를 수만 있다면, 내 바람과 의지가 증명될 테니까.

‘어쩌면… 정말 또 하나의 현실일 수도…….’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던 약물은 더 이상 복용하지 않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욱더 혼란스러워진다.

점점 더 명확한 증거가 눈에 들어온달까.

만약 이곳이 꿈속 세상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걱, 우걱.

소 여물 먹듯 목에 쑤셔박는 이 따뜻한 집밥의 맛도 설명된다.

지익.

달력에 그려진 X 표의 개수가 60개가 넘어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꿈결 폭포’의 꿈이 이렇게 길게 이어지는 경우를 난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또한, 동기도 설명이 된다.

[심연의 문을 열어선 안 돼요.]

언젠가 나에게 그렇게 말했던 땅의 마녀라면, 언젠가 심연의 문을 열지도 모를 나를 또 다른 세상으로 보내버리고 싶었을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내가 꿈이라 생각했던 위화감들도 이제는 다 설명이 돼.’

현별이와 어머니의 호의를 두고서 말하는 게 아니다. 경찰서도, 병원도 전부 다 어딘가 자연스럽지 않았다.

현실적이지 않다고 해야 하나?

축약해서 설명하자면 딱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우릴 가비스.’

그 할배가 개입했다면 이것도 설명은 된다.

일반인들이 마법을 보았을 때 지을 법한 표정을, 마법사들에게 짓도록 만드는 게 바로 저 할배였으니.

할배가 뒤에서 영향력을 끼치든, 마법을 걸어서 세뇌를 하든 해서 내 편의를 봐줬을 수도 있다.

다음 날 의사가 돌연 완치 판정을 내린 것처럼.

‘내가 꿈속 세상이라고 믿으면, 오히려 그 할배 입장에서는 땡큐일 테니까.’

아, 물론 남는 시간에 자꾸 생각이 나서 정리를 해봤을 뿐, 내 목표가 달라지거나 한 것은 아니다.

정말로 거대한 힘이 개입해 평행 세계의 ‘현실’로 온 거라고 한들.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인가?

달라지는 것은 없다.

아니, 오히려 더 명확해졌다.

친구도, 동료도 모두 그곳에 있다.

나는 그곳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가족도 그곳에서 생길지도 모르고.

그래, 그러니까…….

타다닷, 타닷, 타다다닷.

딸깍, 딸깍, 딸깍.

하루라도 빨리 내가 있을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마우스를 움직이고, 키보드를 눌러댄다.

「캐릭터가 사망했습니다.」

「게임 오버.」

죽고.

「캐릭터가 사망했습니다.」

「게임 오버.」

또 죽고.

「캐릭터가 사망했습니다.」

「게임 오버.」

[던전 앤 스톤]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억까들을 이겨내며.

「캐릭터가 사망했습니다.」

「게임 오버.」

내가 가진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 도달 층수를 높여나간다.

「캐릭터가 사망했습니다.」

「게임 오버.」

아, 물론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아아악!! 거기서 왜 힐을 걔한테 주냐고!!”

기껏 잘 키운 파티가 전멸하며 텅 빈 방 안에서 괴성을 내지르고.

“후아아…….”

자는 시간을 빼고 전부 게임에만 몰두하고 있자니 제정신을 지키기가 어려워 맥주도 한 캔 까서 마시는 등.

“한수야, 이제 그 게임은 좀 그만하는 게…….”

“여기 안에 사람이 있다고!”

그런 나날들이 이어지자 어머니와 현별이도 지쳐 가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어머니… 이대로는 안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저 게임을 클리어 하고도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면 정신을 차리는 데 도움이 될 거라 한 건 너였잖니.”

“네, 그랬죠. 그런데 날이 갈수록 상태가 더 안 좋아지는 것만 같아서……. 병원에 들러서 약이라도 타와야 하는 건 아닐는지…….”

“미안하다, 현별아……. 다 내 잘못이야…….”

“아니예요, 어머니. 제가 옆에서 잘 도울게요.”

문득 화장실을 가려고 방문을 열었다가 거실에서 들린 대화에 진짜 금쪽이가 된 기분도 들었지만…….

그렇다고 변하는 건 없었다.

꽈악…….

나는 내 할 일이나 하면 그만이다.

바바리안답게.

「캐릭터가 사망했습니다.」

「게임 오버.」

「캐릭터가 7층 암흑대륙에 입장했습니다.」

「캐릭터가 사망했습니다.」

「게임 오버.」

「캐릭터가 8층 여명의 땅에 입장했습니다.」

「캐릭터가 사망했습니다.」

「게임 오버.」

「캐릭터가 9층 별무덤에 입장했습니다.」

「캐릭터가 사망했습니다.」

「게임 오버.」

「캐릭터가 10층…….」

.

.

.

.

「Gate of the Abyss」

「입장하시겠습니까?」

“왔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모니터 앞에 선 내가 소리를 내지르자, 침대에 누워 책을 읽던 현별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가온다.

“…뭔데 갑자기 소리를 질러요?”

“도착했어! 도착했다고오오오!!!”

“…………깬 거예요?”

이내 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현별이의 표정이 굉장히 묘해졌다.

“이렇게까지 신나하는 오빠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거 같네요.”

“그럼 신나지, 안 신나냐? 이 방 안에 갇혀서 몇 달을 낭비했는데!”

그런 내 반응에 현별이는 말이 없었다.

“오빠도 잔인하네, 낭비라니.”

“……응?”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했을 때, 내가 한 게 낭비야 오빠.”

어…….

“물론 나는 낭비라고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지만.”

항상 강했던 현별이가 약한 표정을 내짓자 암만 나라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몇 달 동안 물심양면 도와준 건 인정하는 바니까.

솔직히 그동안 대화를 나누며 정이 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

“누르지 않으면 안 돼요?”

“……뭐라고?”

“저기 저 ‘YES’ 버튼요. 그냥… 안 누르면 안 돼?”

“현별아……? 그게 무슨 소리야? 누르지 말라니.”

침착하게 되묻자 현별이의 목소리에 물기가 맺혔다.

“그렇잖아요. 오빠는……. 저 버튼 하나만 누르면 원래 세상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여기고 있는 거잖아.”

내가 게임 속에 들어갔단 얘기는 절대 믿지 않더니, 막상 이때가 되니까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걸까?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결과적으로 틀렸다.

“우리가 그렇게 싫어요?”

현별이는 슬퍼하고 있었다.

내 선택 자체에.

“우리랑 지내는 시간들이 그렇게 오빠를 힘들게 만들기만 하던 거냐고요.”

사실, 그렇지 않다.

나름 즐겁기도 하고 편안했다.

어찌 보면 이런 일상들이 나의 오랜 꿈이었으니까.

아니, 정확히는…….

‘한때 내가 바랐던 것이었으니까.’

나의 꿈은 이미 바뀌었다.

더 소중한 게 생겼고, 더 간절히 바라는 게 생겼다.

그러니까…….

“그냥 여기서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잖—.”

“돌아가야 돼.”

암만 불편하더라도 내 의사를 확실하게 전달한다.

“…….”

그와 동시에 생겨난 무거운 정적.

“현별아, 미안하다. 내가 돌아가면 진짜 진짜 잘 도와줄게……. 응? 어차피 저쪽에 있는 널 돌려보내려면 내가 꼭 가야 한다니까?”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농담스레 말하자 현별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진짜 뭐라는 거야. 바보같이. 난 이제 몰라요. 오빠 알아서 해. 그냥 짜증나서 누르지 말라고 했을 뿐이니까.”

이후 현별이는 잔뜩 토라진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 책을 펼쳤고, 나는 다시금 의자에 앉아 모니터를 보았다.

그리고…….

딸깍.

조심스레 YES를 누르자 한 번 더 메시지가 출력된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정말로 입장하시겠습니까?」

플레이어 입장에선 불필요하다 생각했던 연출.

한데 뭔가 이상하다.

“…….”

아무 미련 없이 클릭했던 그때와 달리, 쉽게 손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왜요? 안 누르게요? 나 맘 상할까 봐? 그래 봐야 이미 늦었는데?”

잔뜩 삐진 목소리로 나를 흘기는 현별이.

“둘이 방 안에서 뭐 그렇게 얘기를 하니? 얼른 나와서 식사하렴! 밥 다 됐어!”

주방에서 풍겨오는 따뜻한 음식 냄새.

[말과 달리, 자네도 이곳이 제법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야.]

이제 나도 할배가 했던 말을 인정하는 바다.

다만, 그럼에도 머뭇거리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양손에 모든 걸 쥐고 싶어 했던 어린 시절의 이한수도 이제는 다 커버렸으니까.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정말로 입장하시겠습니까?」

딸깍.

「예.」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다.

33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80화 33

680화 꿈 (7)

온 천지가 어둠으로 뒤덮인 공간.

번뜩-!

새벽의 여명이 밝아오듯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시작된 빛이 순식간에 온 세상을 물들이기 시작한다.

솨아아아아아아아-!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 정도로 세차게 부는 바람.

삐이이이이이이이-.

두통이 동반된 이명과 함께 새로운 지식이 뇌리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아, 새로운 지식은 아닌가?

“후아, 이제 살겠네.”

꿈속에서 정신과 의사가 라프도니아 말을 해 보라 했을 때, 아무 말도 못 한 채 입만 뻥긋거리느라 엄청 수치스러웠는데.

뭐, 돌아왔으니 이제 상관없지만.

스윽.

고개를 내려 손을 바라본다.

작달막했던 이한수의 손과 달리 거칠고 투박하고 핏줄이 두껍게 선 야만인의 손.

꽈악.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며 몸 상태를 확인하기도 잠시.

또각, 또각.

귀에 익숙한 구두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이에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역시나.

또각-.

꿈속 세상에 끌려올 때도 잠깐 보았던 소녀가 귀신처럼 나타나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엘리스 그라운디아.”

이내 이름을 짧게 읊조리자 땅의 마녀가 걸음을 멈춘 채 나를 빤히 보았다.

“분명 돌아오지 말라고 했는데.”

“…….”

“대체 왜 돌아온 거죠?”

왠지 모르게 어딘가 슬픈 감정이 묻어나는 목소리.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니까.”

다만, 이것으로는 대답이 충분하지 못했을까.

내 답변을 들은 소녀는 분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따지듯이 말을 이을 뿐이었다.

“당신의 꿈이 실현된 세상이었잖아요.”

“하지만 가짜였지.”

“가짜가 아니란 건 당신도 알잖아요?”

음, 글쎄…….

확실히 그곳에서 지낸 시간이 늘수록 단순한 꿈속 세상이 아니라는 건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상관없어. 거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니까.”

다시 한번 단호하게 내 의지를 표명하자, 소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솨아아아아아아아-!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점점 시간이 흐르며 절반 이상 하얀빛으로 물든 세상.

지지지직-.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나와 땅의 마녀를 사이에 두고서 어둠과 빛의 경계선이 그어진다.

“난 내 뜻을 분명히 표한 거 같은데, 이제 슬슬 돌려보내 주지?”

짧은 듯 길었던 정적을 끝내고 묻자, 땅의 마녀가 어린아이처럼 양손에 주먹을 꽉 쥐었다.

“당신은 그곳에서 더 힘들고 슬픈 일을 겪게 될 거예요.”

오,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

“그래도 돌아가고 싶어요?”

소녀의 모습에 어울리는 유치한 질문이었으나, 나는 진지하게 듣고서 답해 주었다.

“어. 그래도 돌아갈 거다.”

항상 뒤통수를 경계하고, 나와 동료들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개같은 세상이란 것에는 조금도 이견이 없지만.

“또 소중한 걸 잃을 거예요. 지금까지 겪은 아픔은 아픔도 아닐 만큼, 당신은 크게 절망할 거고요.”

저런 얘길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혀 오지만.

“그래서 뭐 어쩌란 거냐?”

원래 삶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니겠는가?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늘 도망치고 싶어진다.

그리고 이한수는 늘 현실에서 도망쳤기에 평생을 모르고 살았다.

도망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전사의 삶이 내게 가르쳐 주었다.

그래, 그러니까…….

“얼마나 아프든, 나는 나아갈 거다.”

“그 어떤 무슨 좆같은 일이 닥치든, 나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려 악착같이 발버둥칠 거다.”

“나는 바바리안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소녀가 서 있던 어둠의 경계선 너머로 한 걸음을 내딛자, 소녀가 한 걸음을 뒤로 물러선다.

솨아아아아아-!

어째선지 내가 나아간 만큼 줄어든 어둠.

오, 이거 뭔가 재밌는데?

터벅.

한 걸음을 더 크게 내디딘다.

소녀는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단지, 서 있던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선 채 내게 말을 건네올 뿐이었다.

“당신은…….”

터벅.

“비요른 얀델의 삶을 선택한 거군요.”

터벅.

나를 바라보던 마녀가 이유 모를 허무한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당신도 결국… 우리랑 다를 게 없었던 거야.”

…응?

“우리?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문득 피어난 의문에 걸음을 멈추고 물었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도망치지 않는 척하면서, 결국 도망치고 있다는 것까지도.”

“아니, 그러니까 그게 대체 뭔 말—.”

그리 말하며 한 걸음을 더 크게 내디딘 순간이었다.

“그래, 역시 우리가 옳았던 거야.”

소녀가 등을 돌려 어둠 속으로 걸어 나간다.

또각, 또각.

점점 멀어지는 구두 소리.

그리고 그에 따라 줄어드는 어둠.

“야, 기다려!!”

따라가려 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천천히 걷고 있는 소녀와의 거리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또각-.

그렇게 희미하게 들리던 구두 소리마저 사라지며 온 세상이 빛으로 뒤덮였을 때.

“얀… 남……! 델 남작……!”

한 사내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공간 전체를 울린다.

노이즈가 낀 것처럼 중간중간 끊기던 목소리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명확하게 또렷해졌다.

“아아! 얀델 남작 놈아!”

“하아…….”

마지막이 조금 찝찝하긴 했지만…….

“아 좀! 이제 일어나라고 제바아아아아아알!!!”

“깼으니까, 그만 흔들어라.”

“…어?”

마침내 돌아왔다.

내가 있어야 할 그곳으로.

***

사실 조금 걱정을 했었다.

과연 [던전 앤 스톤]을 다시 한번 클리어해서 가게 되는 곳은 어디일까.

혹시 전혀 다른 바바리안의 몸에 깃들어 다시 성인식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도 아니면 몇십 년 전 세상, 아니면… 몇십 년 후의 세상에서 깨어나는 건 아닐까.

나와 내 동료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미래에도 살아남아 있는 몇몇만이 노인이 된 모습으로 나를 반겨 주는 건 아닐까.

뭐, 결과만 말하자면 망상으로 끝났지만.

“그만 흔들라고, 깼으니까.”

눈을 뜬 곳은 배의 갑판 위였다.

나는 잔뜩 젖은 채 대자로 뻗어 있었고, 그 위에서 이백호가 내 어깨를 잡고 막 흔들던 참이었는데…….

“…어? 혀… 아니, 남작님? 어! 깼다! 괜찮아요?”

외려 내가 눈을 뜨자 당황한 듯 뒤로 물러나는 이백호.

나는 빠르고 짧게 가장 중요한 것부터 확인했다.

“지금 상황은? 위급 상황이냐?”

“아, 아뇨. 위험한 건 다 끝났어요.”

오, 그렇다면 다행이네.

마지막 기억이 드라이즌에게 쫓기다가 물 아래로 떨어지는 장면이었던 데다가, 하도 간절하게 깨우기에 급한 상황인가 싶었건만.

“내가 잠들어 있던 시간은?”

“얼마 안 됐어요.”

“시간으로 정확하게.”

“어… 한 30분?”

30분이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면서도 어딘가 허무하다.

그곳에서 적어도 반년 이상은 머물다 왔건만.

“다른 애들은?”

“마법사들은 지쳐서 명상에 들어갔고, 나머지는 보다시피 멀쩡해요.”

오케이, 일단 내가 잠에 든 동안에 별다른 사건은 없었던 듯하다.

따라서 나도 조금은 여유를 갖고 그 동안의 사정을 청취했다.

“내가 배에서 떨어지고 어떻게 됐는지 말해 봐라. 하나도 빠짐없이.”

정보 공유가 우선이라 생각했는지 이백호도 곧장 이야기를 시작했다.

축약해 보자면 간단한 이야기였다.

“남작님이 물에 빠진 걸 보자마자 제가 아래로 뛰어들었어요.”

이백호가 나를 구하려 물 아래로 뛰어들었다.

참고로 그 과정에서 깨어난 마물들이 막 다구리를 놓는 바람에 정말 죽을 뻔했다는데….

‘쓸데없이 자세한 무용담은 그냥 걸러 듣고.’

이런저런 재치와 임기응변을 발휘한 이백호는 끝내 물에 가라앉던 나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바바리안의 골격 자체가 무겁고, 갑주까지 입은 게 천만다행이었다던가?

안 그랬으면 물살에 휩쓸려 폭포에 떨어졌을 테고, 그렇게 되면 절대 구해 낼 수 없었단 게 이백호의 설명이었다.

“그다음에는 겨우겨우 배로 다시 올라왔고, 얼른 도망쳤죠.”

“그렇게 쉽게……?”

이야기만 들어서는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마법사들이 마력 전부를 태워 배에 있는 방어 마법진을 활성화했다고 한들, 1등급 ‘특수 보스’인 드라이즌을 상대로 날 구해 낼 때까지 버텼단 것도 의아할뿐더러…….

이후로는 ‘그냥 잘 도망쳤다’가 끝이라니?

“솔직히 이해가 안 되는 건 저도 이해하는데요. 진짜 그게 전부예요. 막 죽어라 도망치니까, 그냥 도망치게 냅두던데요? 애초에 배에서 버틸 때도 그냥 툭툭 건드는 정도로 끝났다 하고.”

이백호의 설명에 따르면 ‘드라이즌’의 행동에는 굉장히 많은 의문점이 있었다.

그야 원래 그렇게 온순한 몬스터가 아니니까.

하지만, 이건 얘가 그렇다고 하니까 일단은 넘어가도록 하고…….

“근데 그러면 왜 그렇게 다급하게 날 깨운 거지? 보아하니 딱히 위험할 일도 없었던 거 같은데?”

다음으로 제시된 내 질문에 이백호의 표정이 무척이나 이상하게 변했다.

“그걸 몰라서 물어요? 아니… 아, 모르겠구나.”

“뭐 하자는 거냐?”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을 보내자 이백호가 헛기침을 연신 뱉으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답변을 이어 갔다.

“크흠흠! 당연히 다급할 수밖에 없죠! 그때 남작님 심장이 멈췄었는데!”

“…뭐?”

“진짜로 남작님 죽는 줄 알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요!”

그제야 보니까 이백호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물에 들어가 죽을 뻔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닌 듯하달까.

홀딱 젖은 건 물론, 여기저기 장비가 박살 나고 곳곳에 아물지 않은 상처들도 보인다.

‘저 상태에서 내 심장이 멈추니까 그렇게 울부짖은 거야?’

불현듯 혼잡한 틈을 타서 이백호를 배 아래로 밀어 버리는 걸 진지하게 고민했던 게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하지만…….

‘근데 어차피 얘도 목적이 있어서 구한 거지. 날 진심으로 생각해서 저런 건 아니잖아?’

따져 보면, 이백호도 목적이 있어서 자기 이득을 위해 전심전력으로 날 구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너무 고마워하지 말자.

암, 이게 비정한 라프도니아에 어울리는 사고방식이잖아?

“이백호,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요?”

“아니, 됐다. 아무것도 아니다.”

“뭐예요. 형, 내가 미치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뜬금없이 들려온 ‘형’이란 호칭에 움찔했지만, 다행히 나머지 일원들은 딱히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하긴 애초에 이백호 이놈 자체가 아무한테나 아무 말을 던지는 성격이긴 하니까.

“뭔데! 뭔데! 뭔데! 말해 줘! 말해 줘! 말해 줘!”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아악!! 그러니까 더 정신 나갈 거 같아!!”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시끄러워진 이백호를 보고 있자니 그냥 말해 주고 조용히 시킬까도 싶었지만, 냉정히 생각해서 그만뒀다.

그도 그럴 게…….

‘왜 내가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는가.’

이게 원래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그야 이놈은 한때 날 죽이고 ‘소생의 돌’로 부활을 시키겠단 계획을 세웠던 놈이니까.

오늘 내가 죽고서 내가 갖고 있던 ‘소생의 돌’을 사용해 부활. 그다음에 기억을 지워진 나를 옆에서 구워삶으며 제멋대로 조종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몰랐던 거겠지.’

생각해 보면, 이놈 입장에선 내가 지금 ‘소생의 돌’을 지니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미샤가 그대로 갖고 있을 수도 있고, 그도 아니면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보관시켰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뭐, 똑똑한 놈이니 그래도 내가 ‘소생의 돌’을 갖고 있을 확률이 가장 높다고 판단은 했을 테지만.

‘내 아공간은 날 죽이기 전에 절대 못 여니까. 얘한텐 도박이나 다름없었겠지.’

따라서 질문 자체를 중간에 끊었다.

그야 이에 대한 언급하는 순간, 이 녀석에게 내가 소생의 돌을 보관 중이란 정보가 주어지니까.

이후 변수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인데…….

‘돌아왔다는 게 확 실감이 나네.’

그런 생각이 들어 피식 웃고 있자니, 이백호가 뭔가 떠올랐다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아, 맞다! 뭔 질문을 하려 했냐는 건 이제 됐으니, 다른 거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해 봐라.”

“기절해 있는 동안에 드문드문 웃던데…….”

“그런데?”

“대체 무슨 꿈을 꿨어요?”

이백호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무슨 꿈을 꿨냐라…….’

거기서 겪은 것들에 대해 솔직히 말해 봤자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게 분명하다.

그쪽 세상에서 내가 사람들에게 그리 보였듯이.

땅의 마녀니, 평행 세계니 뭐니 말해 봤자 필드 효과 때문에 잠에 들어 환각을 보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웃기네.’

근데 더 웃긴 건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는 거다.

내가 겪은 일들이 진짜 꿈인지, 아니면 진짜로 실제 현실 세계에 다녀온 것인지.

그 과정에서 만난 마녀가 진짜인지 환상인지.

두근-.

아직도 조금은 헷갈린다.

실제로 어찌된 영문인지 깨어난 직후부터 거기서의 기억이 점점 흐려지고 있기도 하고.

꿈에서 깨면 인상 깊었던 몇몇 장면들만 기억나는 것처럼.

“아니, 왜 말을 못 해요? 혹시 야한 꿈이라도 꾼 건 아니죠? 요컨대, 주지육림으로 이뤄진 환각에 갇혀서 못 헤어났다든가 그런…….”

“그런 거 아니니까 헛소리하지 마라.”

“그러면 뭔데요? 이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지 않나?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가 대체 뭔데?

반문하며 핀잔을 주고도 싶었지만, 괜히 얘기만 길어질 게 분명하기에 그냥 짧게 축약했다.

많이도 필요 없고.

살아가며 딱 한 번은 경험해 볼 법한.

“그냥 개꿈이었다.”

고로, 아쉬워할 이유 또한 없다.

23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81화 23

681화 나비 (1)

촤아아아아아-!

배가 별빛 물결을 헤치며 천천히 나아간다.

“오, 이제 몬스터가 안 나오는 걸 보니까 이제 어그로는 다 풀린 듯하네?”

“백호, 어그로가 뭐요?”

“아, 진짜 몇 번을 설명해줘야 기억할래?”

“…….”

언제 위급 상황이 있었냐는 듯 평화로워진 선상.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남작님.”

“그래, 너도 무사해서 다행이다.”

MP 충전을 완료한 GM이 뒤늦게 안부 인사를 건네와 대화를 좀 나누려는 중에 렉 아우레스가 크게 웃으며 끼어든다.

“하하핫! 나는 멀쩡히 일어날 거라 믿고 있었소! 그 불멸의 거인이 이런 데서 죽을 리가 없지 않소이까!”

“불멸의 거인… 이라니요?”

“아! 방금 내가 만든 이명이오! 멋지지 않소? 아주 잘 어울리기도 하고!”

“저거 또 헛소리 시작했네. 뭘 진지하게 받고 있어? 그냥 무시해.”

이백호의 조언을 받은 GM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상처받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는 렉 아우레스.

아, 물론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아이고! 내가 왜 이런 팀에 들어온 건지! 이곳처럼 전사를 대우해 주지 않는 곳도 없을 것이오!”

고개를 숙인 건 모두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였다는 것처럼 다시금 시끄러워진 아우레스.

이런 일이 익숙한지, 난간 쪽에서 조용히 주변을 경계하던 궁수가 주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번엔 두 명이군요.”

‘두 명’이 누구를 뜻하는지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신관 제이나와 파멸할배.

필드 효과로 잠에 든 두 명.

“백호, 이대로 수색을 이어나갈 겁니까?”

“글쎄… 난 잘 모르겠다? 저기 남작님한테 물어봐. 개성과 자유로움으로 가득한 우리들의 새로운 리더즈니까.”

“리더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 됐으니까 그냥 남작님한테 물어보라고.”

“……가만 보면 헛소리는 아우레스보다 백호가 더 자주 하는 거 같습니다.”

“엉? 뭐라 했냐?”

“…아무것도.”

이백호의 헛소리에 궁시렁대던 궁수가 빠르게 태세 전환을 한 뒤 내 옆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렵니까, 남작님은? 예정대로 꿈결 호수 수색을 이어갈 계획이십니까?”

음, 글쎄…….

사실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던 문제이긴 한데…….

좋아, 결정했다.

“일단 꿈결 호수는 이후로 미루고, 우선 용골산을 먼저 수색하는 게 나을 거 같다.”

“용골산 말이지요…….”

내 말을 들은 궁수는 잠시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군요. 어쩌다 보니 배도 이미 용골산 근처까지 왔으니.”

“게다가 폭포 근처에는 드라이즌까지 이미 나타난 상황이라 제대로 된 수색이 어렵지. 용골산을 먼저 수색하고 그다음에 상황이 좀 진정되면 그때 다시 이곳에 오는 게 합리적이라는 게 내 판단이다.”

만약 이 계획에 불만이라도 있으면 지금 말하라는 눈빛을 이백호에게 보내자, 이백호는 그냥 알아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거, 쿨한 척하기는.’

다른 생각이 있었으면 일단 반대부터 했을 거면서.

아무튼, 그렇게 목적지가 정해진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계속해서 용골산이 있는 방향으로 배를 몰았다.

그리 빠른 속도가 아니었던 만큼, 몬스터가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응?”

중간에 위기감이 드는 순간도 있기는 했다.

“자네 빼고는 모두 잠들었군.”

파멸할배와 나 빼고 전원이 필드 효과로 잠에 드는 일이 생긴 것인데…….

‘확률이 대체 몇이야?’

꿈결 폭포에서 인원의 절반 이상이 잠드는 확률은 매우 낮았기에 괜히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혹시… 불행의 전조인가?

그런 생각도 들어 열심히 사방을 경계하며 배를 몰기도 잠시.

“…….”

아, 진짜 어색해 죽겠네.

“…….”

차라리 몬스터라도 튀어나왔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불편한 침묵.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봐.”

툭 던지듯이 부르자, 난간 앞에 서 있던 파멸할배가 날 돌아본다.

들었으면 쳐다만 볼 게 아니라 대답이라도 하는 게 예의 아닌가도 싶지만…….

그런 걸 아는 할배였으면 그런 일도 없었을 터.

그냥 이 기회에 궁금했던 거나 묻기로 했다.

“대체 운명이라는 게 뭐냐?”

“참으로 포괄적인 질문이로군.”

“전에 에르웬을 보고서 나 다음으로 많은 운명을 타고 났다고 했잖아. 그게 무슨 뜻인지가 궁금해서.”

“지금은 자네 옆에 지내며 빛을 거의 잃었지만 말일세.”

“아니, 그러니까 그 운명이라는 게 대체 뭐냐고.”

재차 묻자 파멸할배는 난간 아래 흘러가는 별빛 물결로 시선을 옮겼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힘이 있네. 마력, 신성력, 마나. 일반적으로 아는 그러한 것들만이 아니라 분노와 사랑 같은 감정 또한 힘의 근원이 되어준다는 점에서 ‘자원’으로 분류할 수 있네.”

“…그래서?”

“운명이란 뭐라 딱 정의하기에 어려운 성질을 지녔네만, 나는 운명 또한 그러한 힘들 중 한 종류라 생각하네. 쓰면 쓸수록 닳는다는 점에서 특히나 더.”

“쓰면 쓸수록 닳는다고?”

내 되물음을 들은 파멸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은 무한하지 않네. 보통 사람들은 서너 개 정도만을 갖고 살아갈 뿐이지. 그마저도 선택에 따라 줄어들기도 한다네.”

음… 뭔가 싶어 가만히 듣기는 했는데, 무슨 사이비 교단 세미나에 온 거 같다.

“잠깐만, 지금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새고 있는 거 같은데.”

“하지만 운명이 무엇인지 물은 건 자네 아닌가.”

“난 단지 에르웬에게 한 말이 뭔지가 궁금했을 뿐이다.”

이내 딴길로 새려던 이야기의 주제를 다시금 설정하자 파멸할배도 내가 궁금했던 것에 대한 답을 내주었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 말인가…….”

“그래, 걔한테 한 말들이 대체 뭔 뜻이었냐?”

“말 그대로일세. 그녀는 그날 자네 다음으로 많은 운명을 지니고 있었고, 그래서 되도록이면 그녀를 제거하려 했네.”

“하지만 실패했지.”

“그래, 그리고 그날 내가 죽이지 못했던 요정은 지금은 혈령후라 불리는 강자로 성장했고 말일세.”

“그게 다 운명의 힘이라는 거냐?”

“맞네. 보통 사람들에겐 그 정도 운명은 주어지지 않으니까. 주방장이 될 것인가 학자가 될 것인가. 일반인들의 운명은 딱 그 정도이지. 절대 왕이 되거나 역사에 이름을 남길 사람이 될 수는 없네.”

그리 말한 파멸할배가 난간 아래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자네와는 다르게 말일세.”

“……?”

“자네가 가진 운명의 크기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네. 설령 이 도시의 왕이 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자네에겐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

“…….”

“물론 자네를 강렬히 끌어당기는 그 운명과 공존이 가능하다는 가정하에 얘기지만 말일세.”

“그 운명이라니?”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파멸할배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알고 있지 않은가? 자네는 언젠가 심연의 문을 열게 될 운명이라는 걸. 자네의 운명이 아무리 커다랗다 한들 ‘기록’을 바꿀 수는 없네. 뭐, 그거야 직접 겪어본 자네가 더 잘 알겠지만 말일세.”

직접 겪어봤다라…….

아무래도 파멸할배는 내가 20년 전 시대에 다녀온 이야기도 아는 듯했다.

‘하긴 최근 몇 년 동안에는 거의 이백호랑 단짝처럼 붙어다녔으니까.’

잠시간 대화 중에 생겨난 공백.

그 틈을 이용해 나는 주변을 쓱 훑어보았다.

이백호를 포함해 모든 일행들이 곤히 잠에 빠져 아직은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따라서…….

“벨베브 루인제네스.”

“풀네임을 듣는 건 아주 오랜만이로군.”

“이백호와는 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냐?”

솔직히 말해, 질문을 하면서도 정말로 답변이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꿍꿍이랄 것까지는 딱히 없네마는?”

“없기는. 뒤에서 나를 이용해 뭔가 하려고 하는 중인 걸 모를까 봐서?”

“흠… 이백호의 속내는 모르겠네마는, 적어도 난 자네를 이용할 암계 따위는 생각지도 않네. 이백호와 다니는 건 다른 부분에서 목적이 일치했기 때문일세.”

“그럼… 일치했다는 목적이 뭔데?”

은근한 목소리로 떠보듯이 물었음에도, 파멸할배는 딱히 숨길 일이 아니라는 듯 쿨하게 대답했다.

“심연의 문을 열지 않고서도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일세. 이백호는 그걸 플랜 B라고 하더군.”

“아…….”

플랜 B라면 예전에 이백호가 언급한 적이 있다.

한데 얘기를 들어보니 정말로 파멸할배는 나에게 관심이 없고, 플랜 B에만 열중하고 있는 듯한데…….

“심연의 문 없이도 돌아가는 거… 그게 정말 가능한 거냐?”

조심스런 내 질문에 파멸할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가능하네. 이론상으로는.”

“이론상으로는?”

“아직 준비할 게 많아서 시도는 하지 못했네. 그리고 그 준비를 위해 이백호와 함께 다니는 것이고.”

“…그랬군.”

“아무튼, 자네가 믿을지 않을지는 모르겠으나 난 정말로 자네를 대상으로 한 암계 따위에는 관심도 없네. 혹여 내 방법이 실패한다면 모를까.”

“그래도 이백호랑 같이 다니는데 뭔가 아는 게 있진 않나?”

“글쎄. 이백호도 뭔가 생각이 있겠지만, 따로 묻지 않았네. 그건 내 일이 아니니까. 설령 도와달라 해도 도울 일도 없을 걸세.”

“네 목표에 이득이 되지 않는 한 말이지?”

“바로 그렇네.”

빈말로라도 아니라고 할 법도 한데, 바로 수긍하는 파멸할배의 모습에 오히려 신뢰가 갔다.

진짜 나한테 별 관심이 없어보인다 해야 하나?

“…….”

연애에 있어 밀당이 중요하듯.

다시금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며 사색에 잠기는 걸 보고 있자니, 외려 이쪽에서 호기심이 생긴다.

‘그러고 보면… 이 할배도 ‘악령’이었지.’

정확히는 우리 이전 세대의 악령이다.

그들은 지구가 아닌 다른 세계 출신으로, 게임이 아니라 다른 방식을 통해 이곳에 불려왔다.

뭐, 세대가 다르다보니 그들과 직접적인 교류를 한 적은 거의 없지만.

“루인제네스, 네가 살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지?”

“내가 살던 세상이라…….”

질문을 곱씹듯 먼곳을 바라보던 파멸할배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을 내놓았다.

“기억나지 않네. 내가 이 세상에 불려온 것은 아주 어린 시절일 때였으니까.”

“…뭐?”

“어두운 동굴 아래에서 책 한 권을 발견했고, 매일같이 그 책을 읽었던 것. 이제 와서 제대로 기억나는 것은 그 장면들뿐일세.”

설마 그래서 20년 전 커뮤니티에서 봤을 때 어린아이의 외형이었던 걸까?

알 수 없지만, 할배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언젠가 눈을 떠보니 성인의 몸에 깃들어 있었고, 나는 그 책의 지식을 바탕으로 생존을 시작했네.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지.”

처음 보는 타입의 빙의 방식이었다.

대부분 나이가 많든 적든 20살의 육신으로 들어서며 나이가 젊어지기 마련인데, 완전히 그 반대라니.

파멸할배의 이야기가 신기하게 들리는 한편으로는 이런 의문도 피어났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돌아가는 데 집착을 하는 거냐?”

이전 세계에 대한 기억이 흐릿하다면, 그만큼 그 세상에 대한 그리움도 적을 터.

한데 그럼에도 어째서 돌아가려고 하는 걸까.

순수한 호기심으로 묻는 내 질문에 파멸할배는 피식 웃었다.

“반대로 묻지. 자네는 어째서 돌아가지 않으려는 건가?”

어, 그야…….

“…이 세계가 더 마음에 드니까?”

많은 이유들이 생략됐을지언정, 이게 본질이다.

그토록 야만스럽게 여겼던 이 세상을 나는 더 이상 야만스럽다 여기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현대를 배경으로 한 꿈속 세상에서 지내며 거듭 생각했을 정도다.

어떻게 이리도, 비현실적인 세상이 있—.

“나는 그 반대일세.”

“응?”

“이 세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래서 돌아가려 하는 걸세.”

그리 말하는 파멸할배의 목소리와 눈빛에는 어떠한 감정도 묻어나지 않았다.

이 할아버지한테는 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

굉장히 궁금해지는 순간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오늘 대화는 여기서 끝이었다.

“으으…….”

“슬슬 하나둘 깨어나려는 모양이군.”

쩝, 살살 긁으면 더 들을 수 있을 거 같았건만.

“나는 브라이엇 군을 볼 테니, 자네는 이백호를 봐주게.”

타이밍 하고는.

28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82화 28

682화 나비 (2)

별빛 물결을 헤치며 쭉 나아가던 배가 육지에서 멈추고.

바스락.

자갈밭 같은 감촉의 지면에 발을 맞댄 순간.

「캐릭터가 특수 지역에 진입했습니다.」

「필드 효과 - 용골산이 부여됩니다.」

새로운 지역에 왔다는 변화가 즉시 온몸으로 느껴진다.

「상태이상 [용의 저주]가 부여됩니다.」

「물리 내성 수치가 50% 하락합니다.」

강철처럼 단단하던 피부가 바위 정도로 물렁해지는 거 같달까?

물론 그것만으로 끝은 아니다.

「무작위 정수 하나가 봉인됩니다.」

아오… 스탯 쫙 빠지는 거 보소.

‘쌍스탯이 같이 빠진 느낌인데…….’

탐험가라면 가슴 깊이 와닿을 수밖에 없을 공허감.

이를 느끼며 새로운 상태에 적응하고 있자니, 이백호가 모두에게 지시를 내린다.

“일단 다들 확인부터 하고 가자고! 정수 하나씩 다 써봐!”

지시대로 어떤 정수가 봉인되었을지 확인하기 위해 갖고 있는 스킬들을 차례로 쓰는 일행들.

다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야 첫 트라이에 바로 확인할 수 있었거든.

‘폭풍의 눈.’

[초월]과 연계시에 그랩기로 활용할 수 있는 그 스킬이 작동하지 않는다.

“응? 남작은 벌써 확인하셨소?”

“운이 좋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대충 예상한 일이었다.

내 정수들 중에 근력과 민첩, 소위 말하는 쌍스탯이 붙은 건 ‘스톰 거쉬’ 정수뿐이니.

딱 배에서 내리자마자 눈치챘달까.

‘아무튼, 이 정도면 뭐 베스트려나?’

저번에 지나갈 때는 벨라리오스 정수가 봉인이 된 바람에 마법 저항 쪽에서 무방비해졌었는데.

아무래도 ‘스톰 거쉬’는 언젠가 지울 생각으로 먹은 정수인 만큼, 이번에는 탐사에 큰 영향이 없을 듯하다.

이백호와는 다르게.

“아, 망할……!!!”

“백호, 왜 그러시오?”

“아니, 왜 하필 그 많은 것 중에 계층정수가 봉인이 되냐고오오오오오오!!”

이백호의 경우에는 보유 정수 중에 단연 밸류가 가장 높을 계층 정수가 봉인됐다.

사실상 계층정수를 보조하는 식으로 다른 정수를 세팅했을 걸 생각하면 손실된 전투력은 그 이상일 터였다.

“…아앗! 그거 참 큰일이구려!”

“차라리 돌아갔다가 나중에 다시 오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 됐어! 정수 봉인이 리셋되려면 열흘이나 밖에 있어야 하는데, 언제 그걸 또 기다려? 나머지 가챠가 전부 폭망인 거라면 모를까. 비효율적이잖아?”

아저씨 같은 목소리로 손을 휙휙 젓던 이백호가 은근한 목소리로 모두에게 물었다.

“그래서… 다들 어떤데? 잘 걸렸어?”

“어… 저는 이전보다 훨씬 낫습니다. 전투 관련 정수가 하나 빠지긴 했지만, 제 역할을 수행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거라…….”

“나는 대만족이올시다!”

“그럼 남작님은……?”

“나도 마찬가지다. 제일 비중이 낮은 정수가 걸렸다.”

“아하, 그렇구나……?”

모두가 만족해하는 상황일 줄은 몰랐는지 어색하게 웃는 이백호.

다만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을까?

“됐네 그럼. 내가 조진 만큼 다른 쪽에서 이득 본 거잖아? 바텀에서 캐리해주겠지.”

“백호… 바텀이 뭐요……?”

“있어 그런 게. 혼자 숟가락 하나 드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온갖 라인에서 케어해주는 얄미운 놈들이.”

“라인……?”

이백호와 아우레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이 새끼 100% 탑이네.’

참고로 나는 정글러였다.

뭐,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지만.

“다들 그럼 확인이 끝났으면 슬슬 출발하도록 하지.”

그렇게 정비가 끝난 후에는 본격적으로 탐사를 진행했다.

바스락, 바스락.

작은 뼛조각들이 해변가의 모래알처럼 수북히 쌓인 잿빛의 필드.

물량으로 유명한 지역답게 얼마 걷지 않았음에도 금방 마물을 마주할 수 있었다.

처벅, 처벅.

「스켈레톤 킹헬름을 처치했습니다.」

「리치를 처치했습니다.」

「좀비 로드를 처치했습니다.」

「본 드레이크를 처치했습니다.」

「다크나이트를 처치했…….」

5분도 되지 않는 간격으로 나타나는 마물들.

용골산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스펙이 딸리면 사냥 자체가 불가능하지만… 고점 자체는 타 필드에 비해서 낮은 편이다.

딱 한 가지 경우만 빼고.

‘이건 불길하니 생각도 하지 말고…….’

아무튼, 이후로도 지도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계속해서 가보지 않은 장소를 위주로 동선을 짜서 움직였다.

전투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았지만, 아쉬운 점을 꼽는다면 신관의 직업이었다.

‘카루이의 사제’가 아니라 정통 신관이었다면 언데드와 싸울 때 훨씬 더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

‘뭐… 신관이 이만큼이나 전투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따로 할 말이 없긴 하지만.’

게다가 나름 언데드를 상대할 때 쓸 만한 스킬이 하나 있기도 하고.

「제이나 플라이어가 [불사의 군주]를 소환했습니다.」

「반경 내 모든 5등급 이하 언데드 몬스터들에 대한 통제권을 얻습니다.」

제이나 플라이어.

이백호가 비교적 최근에 영입한 팀원.

‘얘도 참 신기하단 말이지.’

대체 어디서 이 정도 수준이 되는 카루이의 사제가 뜬금없이 나타난 걸까. 저 정도로 키우려면 제물도 엄청나게 바쳐야 했을 텐데.

“10분간 휴식이니, 알아서들 쉬어라.”

내친김에 휴식 시간을 이용해 제이나의 곁으로 다가갔다.

“……?”

옆으로 오자마자 무슨 일인가 싶어 인상을 찌푸리는 제이나.

거, 내가 뭐 나쁜 짓이라도 하려 온 줄 알겠네.

“무슨 일인데요?”

“별일은 아니고 잠깐 물어볼 게 있어서. 사적인 질문은 아니니 걱정 마라.”

“해보세요.”

“그놈은… 조용하냐?”

이내 슬쩍 묻자 제이나의 미간이 더욱 좁혀진다.

“그놈 말이다. 카루이.”

설마 이해하지 못한 건가 싶어 주어를 덧붙였지만, 표정이 펴지는 일은 없었다.

“뭘 말하는진 알아들었어요. 단지 사적인 질문이 아니라 해놓고 그런 질문을 한 이유에 대해서 잠시 생각했을 뿐.”

“다시 말하지만 사적인 질문이 아니다. 같이 다니는 입장에서 변수에 대해서는 늘 인지하고 있어야 하니까.”

“……그래서 뭐가 걱정인 건데요?”

“말 그대로다. 카루이, 그놈이 조용히 있는지 그게 궁금했다. 성벽 밖에 나와서 ‘제물’도 제대로 바치지 않았지 않나?”

‘제물’이란 인신공양을 뜻한다.

카루이는 큰 힘을 대가로 늘 제물을 요구하고, 그 제물을 바치기 위해 사제들은 주기적으로 미궁에 들어가 죄 없는 사람을 죽여야만 한다.

그리고 이에 관한 내 걱정을 어느 정도 납득했을까.

“……걱정할 일은 없을 테니 신경 쓰지 마요.”

“좀 더 자세히 말해줄 수는 없나? 내가 정말 신경 쓰지 않길 바란다면.”

이내 거듭된 요구에 고민하는가 싶더니, 제이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성벽 밖으로 나오는 순간 카루이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아요. 당연히 제물도 바칠 이유가 없고요.”

“바칠 이유가 없는 거냐? 아니면 못 바치는 거냐?”

“………못 바치는 거예요.”

오, 그렇구나.

그럼 제물을 바쳐야만 하는 스킬들은 못 쓰겠네?

“그보다 10분 다 된 거 같은데요?”

“……그렇군. 다들 일어나라.”

묻고 싶은 게 더 있었지만, 아쉽게도 휴식 시간이 끝나며 일정대로 다시 탐사를 재개했다.

성벽 밖에선 제물을 바치지 못한다.

그런 새로운 정보가 추가된 것과 별개로 의문이 들었다.

‘……왜 성벽 밖에서는 카루이와의 유대가 끊기는 거지?’

명색이 ‘신’이라 불리는 작자들 중 하나인데, 이건 좀 뭔가 이상하지 않나?

***

콰아아아아아아앙-!

운석이 떨어지며 바닥에 산처럼 수북히 쌓인 뼛조각들이 비산한다.

그리고…….

스윽.

운석이 떨어지며 생긴 크레이터 중심부에서 검은 형체의 거대한 괴물이 몸을 일으켜 세운다.

[그르르르르르…….]

외형은 얼핏 보면 스켈레톤과 닮았다.

다만 차이점은 뼈의 색이 흑색이라는 것.

뼈의 굵기나 형태가 다르다는 것.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저 흑색 철퇴겠지.’

No. 687 공성 살육자.

‘일반 몬스터’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동일한 넘버스 아이템을 항상 지니고 나타난다는 특징을 지닌 3등급 몬스터.

“반데몬! 반데몬이오!”

반데몬.

비가 오는 날 용골산에 운석이 떨어지면 아주 낮은 확률로 출현한다는 조건을 지닌 바로 그놈.

설마 이놈을 성벽 바깥에서 마주칠 줄이야.

“전투 준—.”

즉시 전투 태세를 갖추며 달려나가는 찰나, 뒤에서 대기 중이던 GM이 흥분해서 소리친다.

“잠깐! 잠깐 기다려보십시오!”

“……응?”

“반데몬은 세 명이서 처치 시 확정적으로 정수를 얻을 수 있다는, 아주 신뢰할 만한 정보가 있습니다!”

어…….

‘이거 내가 예전에 원탁에서 했던 얘기 아닌가?’

말하는 걸 보니 왠지 진짜 원탁에서 풀었던 정보가 새어나간 거 같은데…….

“이 상태로 전투가 시작되면 정수는 얻을 수 없으니 우선 결정을 내리고 나서—.”

“뭐라는 거냐 넌?”

“예?”

“그래서 세 명이서 잡자고? 고작 3등급 정수 하나 얻자고?”

이백호 특유의 시니컬한 지적이 GM에게 향한다.

“애초에 여기서 정수를 얻으려면 ‘왜곡’ 마법도 걸어야 하잖아? 근데 만약 ‘왜곡’이 실패하면?”

“어…….”

“마법사라는 놈이 뭔 생각이 그렇게 짧냐? 아주 그냥 틈만 나면 지식 자랑할 생각밖에 없지?”

“그, 그게 아니라 다양한 선택지를 제시하고 싶었을 뿐—.”

“아니, 진짜 생각을 해보라니까? 여기서 왜 정수를 노려? 그냥 잡기만 하면 넘버스 아이템이 떡하니 떨어지는데.”

사실 이백호처럼 싸가지 없게 말하지만 않았을 뿐, 나도 똑같이 갖고 있던 생각이었다.

보통 반데몬은 ‘왜곡’을 걸고 잡는 몬스터니까.

부산물의 값어치도 값어치지만, 반데몬은 ‘왜곡’ 마법이 성공할 시 넘버스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여기는 미궁과 규칙이 정반대인 성벽 바깥이지.’

미궁과 만대로, 이곳에선 ‘왜곡’을 걸면 시체가 사라지며 정수 드랍의 기회가 생기며, 반대로 그냥 잡을 시엔 그대로 시체가 보존된다.

쉽게 말해, 그냥 잡기만 하면 반데몬이 들고 다니는 넘버스 아이템을 루팅할 수 있는 것인데…….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

어느 쪽이 합리적인지는 고민할 여지도 없기에, 즉시 전투 함성을 내지르며 반데몬을 향해 돌진한다.

「반데몬이 [비탄의 일격]을 시전했습니다.」

휘둘러지는 철퇴에 세찬 빛까지 어린 것이 보는 것만으로도 약간은 등골이 오싹해진다.

그야 알고 있거든.

암만 나라도 저걸 맨몸으로 맞으면 어디 하나가 부러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암, 괜히 탱커 담당일진이라 불리는 놈이 아니지.’

반데몬은 공격 속도가 낮은 대신, 평타 한 방 한 방이 즉사기에 가까울 정도로 강력하다.

순수 위력만으로도 오우거와 비등하거나 그 이상인 수준인데…….

그 와중에 용골산의 필드 효과로 물리내성까지 깎인 채 싸워야한다.

때문에 원래 민첩 캐릭터들이 회피형 탱커 역할을 수행하며 외줄타기를 하듯 싸우는 게 정석이었다.

탱커 수준이 앞도적으로 높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바로 이렇게.

「방어 성공.」

「아이기스의 장벽이 모든 피해를 흡수합니다.」

귀찮게 하나하나 피할 것 없이 방패를 쓱 밀어서 갖다대면 끝.

[그륵……?]

뭘 떨떠름한 눈빛이야.

내가 왜 5등급 스킬인 [거대화]를 끝까지 가져가는 육성법을 짰는데.

아이기스의 장벽과 [거대화]를 연계하면 원래 사이즈로 ‘방어 성공’ 판정을 받지 못할 공격을 막아낼 수 있다.

“뭣들 하냐! 공격하지 않고!”

이내 어그로가 내게 끌린 것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사냥이 시작됐다.

성벽 바깥인 만큼, 중간중간 어그로가 튀는 일도 있었지만 크게 위험할 일은 없었다.

애초에 기동성 자체가 뛰어난 놈은 아니거든.

「레이튼 브라이엇이 [조준태세]를 시전했습니다.」

「조준 시간에 비례해 다음 원거리 공격에 특수 효과가 부여됩니다.」

반데몬은 끈질기게 따라붙는 나를 떼어낼 만큼의 기동성을 보유하지 못했고, 결국 다른 일행들에게는 접근도 하지 못하고서 집중 포화를 맞고 쓰러졌다.

쿠웅-!

미궁에서와 다르게 빛무리로 화해 사라지지 않는 반데몬의 사체.

“뭐야 할배? 그것만 루팅하고 끝?”

“안구와 척추뼈를 제하면 따로 시간 들여 챙길 정도는 아닐세.”

“오, 그랬나?”

부산물 루팅이 끝나자 이백호가 다가가 반데몬 손에 쥐어져 있던 철퇴를 양손으로 집어든다.

“와씨, 더럽게 무겁—.”

“뭐 하는 거냐?”

“예? 무거우니까 일단 아공간에 넣으려고 하는 건데요?”

“그러니까, 그게 왜 네 아공간으로 가냐고.”

한 손으로 이백호의 손목을 낚아채고서, ‘공성 살육자’에 손을 갖다대자 이백호가 이게 뭔가 하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피식 웃는다.

“아하하, 맞네. 맞아. 남작님은 우리 팀이 아니지?”

“이런 부분은 확실하게 정리를 해야 하는 법이다.”

“근데 저번에 그 각인 재료, 군말없이 양보해줬던 거 같은데?”

“그래서 이후로 다른 부산물을 넘겨준 거로 기억한다마는?”

“근데 그렇게 칼같이 할 거면 비율이 이상하지 않나? 우리는 다섯이고 남작님은 두 명인데?”

피차 탐험가인 만큼, 돈 문제가 나온 즉시 이백호의 목소리도 날카로워진다.

다만 딱히 불편하거나 그럴 상황은 아니었다.

내가 이제 탐험가 경력이 몇 년 차인데?

난쟁이놈과 레이븐이 함께했던 ‘핏빛 성채’에서부터 시작해 이런 상황은 일상이다.

뭐, 그건 이놈도 마찬가지겠지만.

“전리품 때문에 팀이 분열하고, 미궁에서 전멸하는 일은 이제 우스개소리도 안 되지. 깔끔하게 이거로 결정하는 게 어떤가?”

지켜보다 못해 나선 파멸할배의 손에 다소곳이 올려져 있는 것은 두 개의 주사위였다.

“…나는 좋다.”

제일 공평한 방법이란 생각에 동의했지만, 이백호는 어딘가 맘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다.

“하…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요? 그냥 한 번 양보해주면 되는 걸?”

“굳이 양보할 이유가 있나?”

“아니, 진짜 이거 내가 쓰려는 것도 아니고. 우리 전사가 스왑 무기로 쓰면 좋을 거 같아서 그런 건데.”

“오… 백호! 나를 그렇게까지 생각해주고 있던 거 였—.”

“가만히 있어 봐. 끼어들지 말고.”

양팔을 벌리며 다가오던 아우레스가 무안하게 팔을 다시 아래로 내리고, 불편한 침묵이 이어진다.

“…….”

“…….”

이백호는 내 심리를 떠보듯 나를 빤히 보았고,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을 것을 암시했다.

그래서일까?

“하… 그래요. 오랜만에 주사위나 한번 굴려보지 뭐. 대신 한 사람당 한 번씩이에요? 우리는 다섯 명이니까 다섯 번. 그쪽은 두 명이니까 두 번. 그중 합이 가장 높게 나온 사람이 갖는 거로, 오케이?”

“그러도록 하지.”

그렇게 합의가 다 끝나갈 무렵 GM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저… 저는 따로 해도 되겠습니까? 만약 제가 이기면 제가 갖는 거로…….”

허, 진짜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그건 남작님이랑 알아서 합의를 보시고……. 그럼 우리부터 굴릴게요? 야, 너희들 거는 내가 알아서 다 굴린다?”

“어… 백호? 주사위는 각자 굴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싶소이만……?”

“날 못 믿어?”

“그건 아닌데…….”

“그럼 됐네.”

이내 독재적으로 상황 정리를 끝마친 이백호가 주사위를 굴리기 시작했고,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주사위의 눈을 확인했다.

그리고…….

‘2’

그 과정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다.

‘3’

뭐야, 얘.

‘2’

얘, 나보다 주사위를 못 던지는데?

‘4.’

최대 6까지 나오는 주사위를 두 개 던져서 나온 합이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한 숫자.

하지만 횟수가 깡패였다.

“9…?”

“9네요……?”

“됐다아아아아아아아!!!”

다섯 번이나 주사위를 던지며 결국 9라는 높은 숫자를 뽑아낸 이백호.

“그, 그럼 이제 저도 한번…….”

이후 GM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사위를 던졌지만, 결과는 아쉬웠다.

“아…… 8이군요.”

“이야, 그럼 남작님만 던지면 끝이네?”

“…….”

“아참, 이건 주사위 굴린 거니까. 양보해줬다거나 그런 거로는 안 칩니다?”

“…….”

“그러게 그냥 줬으면 내가 알아서 이것만큼 양보를 해줬을 텐데.”

“조용히 해라. 집중 중이니까.”

이내 이백호의 입을 다물린 뒤, 주사위를 쥔 손에 살짝 힘을 불어넣으며 주먹을 쥔다.

그리고…….

주사위의 무게와 감촉.

피부를 스치는 바람의 결.

그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느끼며 ‘지금’이라고 생각한 순간에.

촤아아아악.

손바닥을 펼치며 주사위를 판 위에 흩뿌린다.

늘 그렇듯 승부가 정해지는 것에는 찰나의 시간이면 족했다.

데구르르르.

이내 굴러가던 주사위가 멈추며 결과를 나타낸다.

“……허.”

“……12네?”

“12군요.”

두 개의 주사위를 이용해서 뽑아낼 수 있는 가장 높은 눈금.

“에이씨, 짜증나. 뭐 수 쓴 거 아니죠?”

“백호, 인위적인 개입은 없었네.”

“거, 이 남작님 운 하나는 진짜 끝내준다니까?”

결과에 승복하기로 한 이백호가 바닥에 놓인 ‘공성 살육자’로부터 등을 돌리며 툭 말을 던진다.

“하… 뭐 해요? 얼른 가져가지 않고?”

“어…….”

현재 상황은 너무나도 명료했다.

‘운 좋게’ 주사위에서 승리해 이번 탐사 중에 가장 가치가 높은 전리품을 손에 넣었다.

이는 너무나도 기쁜 일임이 틀림없다.

한데…….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대체 왜일까.

‘내가… 주사위에서 이겼다고……?’

왜 자꾸 이렇게 심장이 빠르게 뛰지?

24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83화 24

683화 나비 (3)

공성 살육자는 굉장히 좋은 아이템이다.

성능도 성능이지만, 비슷한 서열의 넘버스에 비해서 값을 후하게 쳐준다는 점에서 특히나 더.

‘이 세계관에는 철퇴 전사들이 꽤 많으니까.’

검, 망치, 메이스, 폴암, 창…….

세상에는 수많은 무기들이 있으며, 대부분의 게임들에서 ‘철퇴’는 비주류 무기로 취급 받는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무기지.’

[던전 앤 스톤]에서 철퇴류는 꽤 괜찮은 무기다.

느린 공격 속도란 패널티가 있긴 하지만, 대미지 하나만큼은 그 어떤 무기들보다 높다는 이점이 있으니까.

그야 그렇잖아?

사용자의 스펙이 동일하다는 가정하에 원심력까지 동원되는 철퇴를 따라갈 무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아, 물론 초심자들에게는 말이다.

‘나도 초창기에는 자주 키웠지…….’

물론 철퇴가 가진 한계 때문에 이후엔 다른 무기로 갈아탔지만, 그건 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이곳 사람들에겐 2회 차, 3회 차가 없으니까.

무기란 쓰면 쓸수록 숙련도가 쌓이기 마련이고, 생계가 걸린 대부분의 탐험가들은 쉽사리 쓰던 무기를 바꾸지 못한다.

즉, 초반에 쓰던 무기를 후반에도 쓰는 경우가 많단 뜻인데…….

‘7층 이상에서도 어딜 가나 한 명씩은 보였지.’

실제로 7층 이상 탐험가들 중에도 철퇴 사용자는 꽤 많다.

다만, 문제는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간단 것이다.

그도 그럴 게, 넘버스 아이템 중에 철퇴류가 몇 개 없거든.

‘사실상 걔네한테는 이게 졸업 무기지.’

고작 600번 대의 장비이긴 하지만, 철퇴를 무기로 쓴다면 이것보다 좋은 선택지는 없다.

그리고 그걸 철퇴 사용자들도 잘 알고 있다.

경매장에 올리기만 하면 비싸게 팔려나가는 것도 바로 그게 이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고개를 흔들며 억지로 잡념을 지워낸다.

No.687 공성 살육자.

팔아도 좋고, 스왑 무기로 써도 좋을 귀한 아이템.

그 아이템이 내 손에 들어왔다.

그것도 운 좋게 ‘주사위’를 이겨서.

두근-!

처음에는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자꾸만 심장이 쿵쾅거리는 게 기뻐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불안해서인지.

다만 차차 시간이 지나니 알겠다.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이 감각은 결코 좋은 의미의 흥분이 아니다.

그야 ‘아이기스의 장벽’을 먹었을 때도 이렇게까지 심장이 뛰지는 않았거든.

기쁜 것만 따지면 비교가 되지 않을 텐데도.

“뭐 해요? 계속?”

혼자 멍하니 서 있는 것도 조금 그랬기에 일단 정신을 차리고서 ‘공성 살육자’를 집어들었다.

「캐릭터가 No.687 공성 살육자를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2,800 상승합니다.」

딱 손에 쥐자마자 육체 수치의 변화가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게, 이 아이템엔 스탯이 붙어있거든.

그것도 무려 퍼센티지로.

「근력 수치가 40% 증가합니다.」

「민첩 수치가 80% 감소합니다.」

민첩이 줄어들고 근력이 높아진다.

전반적인 스펙은 악마분쇄기에 비할 바 아니지만, 그럼에도 때에 따라 직접 쓸 수 있다고 판단한 가장 큰 이유다.

근력이 필요할 때 이걸로 뻥튀기를 할 수 있으니까.

‘근데 진짜 몸이 둔해지긴 하네.’

물론 반대급부로 얻은 것도 있기는 하다.

뭐, 정확한 건 확인해봐야 알겠지만.

‘휘두르기.’

시험 삼아 허공에 대고 스킬을 시전한다.

그야 일단 ‘철퇴’도 ‘둔기’로 판정이 되거든.

“엥? 남작, 뭐 그리 굼뜨게—.”

바로 이렇게.

파아아아아아앙-!!!

철퇴가 허공을 가로지르며 자아낸 풍압 소리.

이에 나를 포함해 모든 일원이 움찔했다.

“어?”

그 표정들을 보며 나는 판단을 끝마쳤다.

‘역시 파는 것보다는 갖고 있는 게 낫겠네.’

새로운 무기가 생겼다.

물론 찝찝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공성 살육자가 마음에 들면 들수록 마음속 불안도 커져간다.

하지만…….

두근-!

……그래, 차라리 보상이라고 생각하자.

꿈속 세상에서 몇 달 동안 개고생한 것에 대한 보상.

두근-!

어… 그래도 주의는 좀 하고 있자.

혹시 이게 다음 불행의 전조일 수도 있으니까.

갑자기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대비할 수 있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자.

그래, 그러면—.

“다, 다, 다……!”

그때 돌연 궁수가 다급하게 뭐라 소리친다.

“다들 피하십시오!”

…응?

이게 이렇게 빨리 터진다고?

***

대체 무슨 상황인 걸까.

사건이 터진 즉시 크게 주변을 쓱 훑어본다.

무엇이든 직접 보고 판단하고자 하는 내 버릇 중 하나.

민첩 수치가 줄어들며 기감 자체가 무뎌진 탓일까.

당장 느껴지는 위협은 없었다.

하지만…….

“……씹!”

“……!”

주변인들의 표정이 너무도 위급하다.

아니, 단순히 표정만 그런 걸 넘어서 헐레벌떡 움직이며 자리를 벗어나고 있다.

“제이나!!”

기동력이 떨어지는 신관은 궁수가.

“할배!”

파멸할배는 이백호가.

“업히쇼!”

얼빠진 얼굴인 GM은 바로 근처에 있던 렉 아우레스가 들쳐메며 황급히 있던 자리를 벗어난다.

그때까지도 나는 무슨 상황인지 알지 못했지만, 단 한 가지만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두근-!

이곳은 위험하다.

나도 저들을 따라서 도망쳐야 한다.

그런 마음에 일단 다리부터 움직여보았지만…….

‘니미럴.’

공성 살육자를 착용하며 80% 굼떠진 몸은 너무나 느렸다.

뒤늦게 현 상태를 인지하고 무기를 아공간에 다시 집어넣으려 했으나, 애석하게도 골든 타임은 이미 지나간 상태였다.

“뭐 해! 위를 봐!!”

파멸할배를 들쳐메고서 자리를 벗어난 이백호가 뒤돌아 나를 보며 외친 순간.

‘위……?’

이백호의 시선이 하늘 위를 향하는 걸 깨닫고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위로 들었다.

그리고…….

‘아, 이래서 튄 거구나.’

저들이 왜 그렇게 다급했는지를 그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끼야아아아아아아악-!]

소름끼치는 익룡 소리를 내며 하늘에서 하강 중인 초거대 비행 생명체.

전반적으로 무난한 난이도를 지닌 용골산의 유일한 특이 케이스.

통칭 ‘별무덤 3인방’ 중 하나.

1등급 불사종.

‘본 드래곤…….’

앞에 ‘본’이 붙기는 했으나 드레이크나 드래고니안 따위가 아닌.

「캐릭터가 [드래곤 피어]의 범위 내에 있습니다.」

용족의 상징인 그 패시브까지 지닌 진짜 드래곤.

아, 참고로 이 패시브의 효과는 아주 간단하다.

「격의 간극이 존재합니다.」

10레벨 미만일 시, 렙차에 따라 ‘항마력’이고 뭐고 영향을 받지 않는 디버프를 뿌린다.

물론 9렙일 땐 ‘마비’에 그치지만…….

5레벨 이하는 즉사.

6레벨부터는 ‘기절’ 및 ‘영혼 탈진’.

7렙에는 ‘경직’ 및 ‘영혼 탈진’.

그리고 내가 포함된 8레벨일 경우에는…….

「캐릭터가 10초간 ‘경직’ 상태에 빠집니다.」

무려 10초간 몸이 굳는다는 지랄 맞은 상태에 빠지는데, 심지어 이게 전부가 아니다.

경직은 최초의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일정 시간이 지나면 또 발동되며, 전투 시간이 길어지며 중첩 횟수가 쌓이면 특수 효과까지 발동된다.

때문에 드래곤 레이드는 반드시 10레벨 레이드가 권장되며 최소 컷이 9레벨이다.

…지금 생각할 건 그런 게 아닐 테지만.

‘초월.’

‘경직’ 상태에서 재빠르게 스킬을 시전한다.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우선 거대화(초월)로 깡스탯부터 끌어올려준 뒤.

「캐릭터가 [철옹성]을 시전했습니다.」

물리 내성.

「캐릭터가 [탐욕의 비늘]을 시전했습니다.」

마법 내성 수치를 극대화시킨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콰아아아아아앙-!

추락하듯 착지한 녀석의 앞발이 돌처럼 굳은 내 몸을 짓뭉갠다.

물리적인 충돌은 버틸 만했다.

“커헉……!”

나도 모르게 입을 떡 벌리며 피를 토해내긴 했지만 버틸 만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지만 말이다.

「캐릭터가 물리 피해를 입었습니다.」

[드래곤 피어]와 마찬가지로 용족이라면 모두 갖고 있는 공통적인 패시브 스킬.

「[용발톱]의 조건이 충족됩니다.」

효과는 아주 직관적이다.

「입은 물리 피해만큼 마법 피해가 적용됩니다.」

저 개같은 패시브 스킬은 물리 피해를 입히면 마법 피해를 추가로 주고, 반대로 마법 피해를 주면 추가 물리 피해를 입힌다.

쉽게 말해, 하이브리드 대미지가 들어오는 건데…….

삐이이이이이이-!

몸 안에서 무언가 폭발하는 느낌이 피어남과 동시에 이명이 들려온다.

열심히 키운 방패바바가 한 방 맞자마자 거진 빈사 상태에 빠진 격이었으나,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게 바로 [던전 앤 스톤]이란 게임이니까.

1등급 몬스터들은 전부 비상식적일 만큼 강하며, 그중에서도 용족들은 특히나 더 악질이다.

「제이나 플라이어가 [치유 거머리]를 소환했습니다.」

「제이나 플라이어가 [재생의 저주]를 시전했습니다.」

「제이나 플라이어가 [긴급 수혈]을 시전했습니다.」

「저주 받은 피가…….」

그래도 미리 캐스팅을 하고 있었는지, 다행히 대미지가 들어오자마자 힐이 시작되기 시작했다.

음… 다행이라 하기엔 이른가?

「신체가 빠르게 재생됩니다.」

「신체가 빠르게 재생됩니다.」

「신체가 빠르게 재생됩니다.」

「신체가 빠르게 재생…….」

자칫 치명상으로 이어질 수 있던 부상이 순식간에 회복되기 시작했으나,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몸이 굳자마자 숫자를 셌거든.

‘4초.’

경직이 풀리려면 아직 4초가 남았다.

그리고 그사이에 이 뼈다귀 용새끼가 평타 두 방, 혹은 스킬 하나만 제대로 박아도…….

‘그대로 뒈지겠지. 그게 1등급 몬스터니까.’

아무리 잘 키운 캐릭터라도 무방비한 상태에서 1등급 몬스터에게 처맞으면 뒈지는 수밖에 없다.

바로 이렇게.

콰아아아아아앙-!

이내 본 드래곤이 앞발로 다시금 나를 공격한다.

고양이가 작은 동물들을 갖고 노는 것처럼 가벼운 움직임.

하나 당하는 입장에서는 전혀 가볍지 않았다.

“커헉……!”

체감상 생명력의 3분의 2가 날아간 듯한 기분.

한데 그 와중에 이놈의 앞발이 또 움직인다.

다만 또 내리찍거나 하려는 움직임은 아니고…….

‘날개가 벌어지는 걸 보니.’

니미럴.

「본 드래곤이 [본 브레스]를 시전합니다.」

그걸 쏘려는 거구나.

다음 행위를 직감한 순간 눈앞이 아득해진다.

‘맞으면…….’

100% 죽겠구나.

그런 확신이 들 정도로 위험한 상황.

“이 시밸럼이!!”

그때 뒤에서 이백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타닷!

뭐지? 날 구하러 오는 건가?

타다닷-!

그런데 얘는 어떻게 여기서 뛰지?

마치 [드래곤 피어]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아… 이미 10레벨인 거구나…….’

이백호에 대한 정보가 하나 더 늘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게 더 이상 의미가 있는가 싶기는 하—.

‘…기는 개뿔.’

몇 방 처맞으며 아득해졌던 정신이 확 돌아온다.

아무리 숨 쉬다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9층이라 한들, 내가 여기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까 봐?

후웅-!

이내 본 드래곤이 뼈로 이루어진 날개를 한 번 더 크게 뒤로 젖히며 아가리를 내민다.

그리고…….

파아아아아아아아앗-!!

입에서 흑색의 광선 비슷한 브레스가 쏘아진다.

다만 나는 절대 눈을 감지 않았다.

애초에 경직 상태라 감지도 못하지만 아무튼.

꽈악.

그도 그렇잖아?

그런 각오를 새기고서 꿈속 세상에서 미련 없이 등을 돌렸는데, 벌써 포기하면 그것만큼 우스운 게 없—.

“세이프!!”

그 순간 가까이서 이백호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무언가가 나를 뒤로 강하게 잡아당겼다.

‘이건 좀 감동일지도.’

설마 용이 브레스를 뿜는데 구하러 올 줄은 몰랐는데.

‘0초.’

속으로 마지막 카운트를 외친 즉시.

「‘경직’ 상태가 해제됩니다.」

굳어 있던 몸이 부드럽게 풀어진다.

그와 동시에 나를 잡아끌던 이백호가 외쳤다.

“뭐 해! 가드 올려!!!!”

뭐야, 얘도 나랑 똑같은 각을 본 건가?

경직 시간까지 쟀던 거고?

정확한 건 나중에 물어봐야 알겠지, 일단 나는 바로 방패를 들어 올리며 온몸을 감쌌다.

「방어 성공.」

「아이기스의 장벽이 모든 피해를 흡수합니다.」

하, 진짜 뒈지는 줄 알았네.

24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84화 24

684화 나비 (4)

본 드래곤.

꿈결 폭포의 드라이즌과 같은 ‘용골산’의 특수 보스.

사실 아직도 좀 얼떨떨하다.

불과 얼마 전에 드라이즌과 마주친 것도 모자라 바로 이놈까지 직접 두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재수 완전 옴 붙었네.’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뭐 어쩌겠어.

이미 일은 터졌으니, 어떻게든 수습을 해보는 수밖에.

파아아아아앗-

이윽고 내 방패 위를 지져대던 브레스가 멈췄을 때.

“형, 괜찮?”

내 뒷덜미를 잡고 끌어당기던 이백호가 남들에게 들리지 않을 소리로 작게 속삭이듯 묻는다.

“어, 괜찮.”

본 드래곤의 브레스가 레이저처럼 일직선으로 비교적 얇게 쏘아지는 형태라는 게 다행이었다.

다른 드래곤처럼 넓게 퍼지는 식이었으면 방패로 막은 곳 외에도 피해가 있었을 테니까.

[크오오오오오오오-!!]

브레스를 막아 낸 우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포효하는 본 드래곤.

놈을 보며 나는 이백호에게 한 가지를 물었다.

“근데 계산했던 거냐?”

“뭘요?”

“경직 시간. 그거 계산하고 딱 맞춰서 구하러 온 거냐고.”

“…아뇨? 저는 그런 계산 없이 그냥 형을 구하지 못하더라도 함께하겠다는 순수한 마음에—.”

계산했었단 뜻이구나.

하긴 생존 각이 하나도 안 보이는 상황에서 브레스 한복판으로 들어올 탐험가가 어디 있겠어?

“됐다.”

나도 모르게 웃으며 아직까지 내 뒷덜미에 붙은 이백호의 손을 떼어냈다.

각이 보였든 안 보였든 어차피 변하는 건 없었다.

“고맙다. 구하러 와줘서.”

“…….”

뭐야, 모처럼 감사 인사까지 했는데 답이 없어?

설마 얘도 부끄러워하는 건가……?

“……그러니까 왜 그렇게 굼떠요? 다들 튈 때 제때 튀었으면 이럴 일도 없었잖아?”

…맞네. 부끄러워 하는 거.

괜히 민망해진 나는 일단 반쯤 주저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혹시 다음 계획이 있냐?”

“없어요. 일단 구하고 보잔 생각에 뛴 거라.”

음, 그렇단 말이지.

“그래도 뭐, 도망치는 건 이제 힘들지 않을까요? 드래곤 피어에 닿았으니까.”

근데… 내 책임을 유독 강조하는 듯한 뉘앙스인 건 기분 탓인가?

알 수 없지만 나는 즉시 자기 변호에 나섰다.

“닿든 안 닿든 그런 식으로는 못 튀었을 거다. 하늘에서 나타났단 것부터가 이미 우리에게 어그로가 끌렸단 거니까.”

“네? 그래도 거리 조절을 잘 하면서 튀면—.”

어허, 말대꾸?

“그러니까 안 됐을 거라고.”

“…….”

“근데 내가 혼자 남아 첫 일격을 받아내고 ‘브레스’까지 뺐으니, 두 명은 살렸다고 봐야하겠군.”

암, 그렇게 생각하면 감사 인사를 받아야 할 사람은 오히려 나일지도 모른—.

“아아! 됐으니까 앞이나 봐요!”

이백호의 외침에 다시금 시선을 정면으로 향하니 높이 20m가 넘어가는 본 드래곤의 주변에 흑색 구슬들이 허공에 맺히는 것이 보인다.

「본 드래곤이 [흑마력의 가호]를 시전합니다.」

이또한 용족이라면 모두 갖고 있는 액티브였다.

뭐, 본 드래곤을 제외하면 흑마력이 아니라 그냥 ‘마력의 가호’이긴 하지만.

스킬의 형태에선 좀 차이가 있어도 1티어 방어기란 점은 변함 없다.

그야… 공격은 최선의 방어란 말도 있잖아?

바로 이렇게.

푸슈우웅-!

드론처럼 본체 주변을 맴돌던 흑색 구슬들이 번뜩이며 우리 쪽으로 마력 파장을 쏘아낸다.

아까 전에 본 드래곤이 쏜 브레스의 축소판과도 같은 버전.

「방어 성공.」

정면에서 오는 하나는 막았고.

콰아앙-!

사선으로 날아들던 것은 이백호가 정권 찌르기로 파쇄.

‘이걸 어째야 하나…….’

생각이 많아진다.

물론 목표는 간단했다.

드래곤 레이드?

성공만 하면 막대한 보상을 얻을 수 있기는 하다.

미궁이 아닌 만큼 정수는 기대하기 어렵겠지만, 애초에 용족들은 부산물이 훨씬 가치가 있다.

일단 드래곤 본에 드래곤 하트.

‘본 드래곤이라 용가죽은 없겠고…….’

레이드 성공 시 업적 달성도 될 테고, 내 경우엔 용인족 비전으로 얻은 ‘대지룡의 축복’도 1스택 채울 수가 있다.

하지만…….

‘레이드는 나중에 준비가 된 다음에.’

현재 우리끼리 저놈을 잡는 건 불가능하다.

따라서 지금 우리들의 목표는 단 하나.

“좀 생각해봤어요? 어떻게 도망칠지.”

이미 어그로가 끌린 본 드래곤에게서 어떻게 멀쩡히 벗어나는가.

그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일단 전투를 지휘했다.

“우리도 돕겠소이다!”

“한 명씩! 한꺼번에 가까이 오지 말고, 한 명씩 안으로 들어와라!”

우선 드래곤 피어 밖에 있던 일행들을 한 명씩 범위 안으로 들어오게 하며 리스크를 최소화 시켰다.

그야 한 번에 여러 명이 무력화되면 지켜주는 게 훨씬 더 어려울뿐더러…….

「격의 간극이 존재합니다.」

「렉 아우레스가 10초간 ‘경직’ 상태에 빠집니다.」

이렇게 순차적으로 필드에 입장을 시켜야 두 번째 피어에서도 문제가 없다. 드래곤 피어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금 활성화가 되는 패시브니까.

전투 시작부터 한 명씩 돌아가며 무력화가 되도록 설계를 할 필요가 있는 것인데…….

“나는 상관없을 걸세.”

여기서 놀라운 점은 파멸할배였다.

파멸할배는 영역 안에 들어와서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 할배도 10레벨이라고……?’

물론 마법사와 신관의 경우엔 정수를 먹을 수가 없기에 레벨의 의미가 없다.

다만 그렇다고 레벨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몬스터를 잡으면 이들 역시 경험치를 얻는다.

그리고…….

‘어찌 된 게 전사들만 경직이네.’

놀라운 점은 나와 렉 아우레스를 제외하면 전부 다 9레벨 디버프인 ‘마비’로 끝났단 것일까.

「미약하게나마 격의 간극이 존재합니다.」

「레이튼 브라이엇이 10초간 ‘마비’ 상태에 빠집니다.」

궁수도 9레벨.

「미약하게나마 격의 간극이 존재합니다.」

「제이나 플라이어가 10초간 ‘마비’ 상태에 빠집니다.」

카루이의 사제도 9레벨.

「미약하게나마 격의 간극이 존재합니다.」

「유르벤 하벨리온이 10초간 ‘마비’ 상태에 빠집니다.」

심지어 몇 년 동안 미궁에 들어간 적 없다는 GM마저 9레벨.

‘……얘네가 진짜 고인물 팀이긴 하구나.’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과, 그러려면 이 순간을 잘 헤쳐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공존한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하벨리온, 루인제네스. 너희 둘에게 물을 게 있다.”

문득 떠오른 계획을 실행하기 앞서 마법사 두 명에게 한 가지를 질문했고, 둘 모두에게서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다.

“…가능하긴 하네마는.”

“설마 그 마법을 이용해 도망칠 생각이십니까?”

아, 물론 답변이 긍정적이었을 뿐이지 반응까지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마법사 둘을 포함해 모두가 석연치 않은 반응을 보였다.

“저… 근데 그게 정말 되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방법이라도 있나?’

“…….”

거, 다른 걸 제시하지도 못할 거면서 투정은.

“왜들 그래? 나는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다들 착각하지 마. 지금 우리가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걸.”

그래도 이백호가 내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며 계획 수립 단계는 끝났다.

따라서 이제 실행으로 옮길 차례.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마법사들이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한 것을 본 즉시 함성을 외치며 앞으로 돌진했고, 이백호가 바로 뒤에 따라붙었다.

지금부터 우리의 목표는 단 하나.

“남작님, 알고 있죠? 그걸 하려면 우리끼리 저 새끼 피 10% 이상 까야 하는 거.”

“알고 있다.”

본 드래곤의 1페이즈를 넘겨야 한다.

그것도 마법사 둘을 뺀 다섯 명이서만.

“만약 남작님 계획이 실패하면 플랜 B로 가야 하는 거 알죠?”

“…….”

“걱정 마요. 플랜 B는 내가 준비해놨으니까.”

과연 이백호의 플랜 B가 무엇일까.

여러모로 궁금해—.

“최악의 상황에서도 살 사람은 살아야지.”

……갑자기 듣고 싶지 않아졌다.

애초에 플랜 A가 성공하면 알 필요도 없을 테고.

“어깨 좀 빌릴게요!”

어느 정도 본 드래곤과 가까워지자 이백호가 내 어깨를 도약대 삼아 높이 점프한다.

푸슈우웅-!

사방에 떠 있는 흑색 구체가 공중에 뜬 이백호를 향해 레이저를 쏘아냈지만, 녀석은 곡예를 하듯 허공을 즈려밟으며 회피에 성공.

그리고…….

콰아아앙-!

대범하게 본 드래곤의 턱주가리에 어퍼컷을 꽂아넣는다.

[그오오오오오-!!]

애석하게도 피해량 자체는 크지 않아 보였다.

후우웅-!

뒤에서 쏘아지는 화살도 큰 대미지를 입히지는 못했으며, 신관 역할인 제이나의 경우에는 딜보다는 보조 지원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

‘렉 아우레스는 애초에 퓨어 탱에 가깝고…….’

대미지 기대치가 워낙 낮기에 아우레스는 후방에 배치했다.

마법사나 궁수, 신관에게 날아드는 원거리 공격을 몸으로 막는 것이 이번 레이드에서 녀석이 맡게 된 역할이었는데…….

‘……백호놈도 하필 그 스킬이 빠져가지고.’

전투가 전개될수록 너무나도 미미한 대미지에 새삼 막막해진다.

그야 이백호에게서 [별의 소멸]이 없어진 지금, 우리 일행에서 메인 딜러는 마법사라 볼 수 있다.

한데 마법사들은 마법진을 그리느라 아예 전투에서 빠졌을뿐더러…….

‘애초에 참가해도 다를 게 없었겠지.’

3페이즈까지 마법사는 지원 역할밖에 못한다.

본 드래곤도 일단 ‘드래곤’이니까.

3페이즈에 갈 때까지는 마법 대미지는 100% 면역이란 개사기 특성을 보유하는 것인데…….

「레이튼 브라이엇이 [이능 중첩]을 시전했습니다.」

「레이튼 브라이엇이 [장력 강화]를 시전했습니다.」

「레이튼 브라이엇이 [장력 강화]를 시전했…….」

사실상 딜러는 이백호와 레이튼 브라이엇.

이렇게 둘뿐이다.

‘아니, 나까지 하면 셋인가?’

이내 나는 아무것도 들지 않은 손을 아공간 안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캐릭터가 No.687 공성 살육자를 착용했습니다.」

「종합 아이템 레벨이 +2,800 상승합니다.」

아공간 딜레이로 생기는 약 3초의 시간에 걸쳐 얼마 전에 얻은 신무기를 장착.

「근력 수치가 40% 증가합니다.」

「민첩 수치가 80% 감소합니다.」

그다음에는 눈에 띄게 둔해진 몸으로 있는 힘껏 철퇴를 휘두른다.

파아아아아아아아아앙-!!

적어도 오늘만큼은.

「캐릭터가 [휘두르기]를 시전했습니다.」

「캐릭터의 근력 수치가 1,200 이상입니다.」

「HP가 90% 이상인 적에게 2배의 피해를 입힙니다.」

내가 메인 딜러다.

***

1분, 2분, 3분…….

여기까지는 그렇게까지 어렵지 않았다.

그냥 조금 힘든 노가다를 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곡괭이를 들고서 절대 깨지지 않는 광석을 내리치는 걸 반복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5분.

이때부터는 전투가 확 어려워진 게 체감됐다.

시간이 흐르며 [드래곤 피어]가 한 번 더 발동이 되며 ‘경직’되는 일이 있었고, 앞발에 몇 번 얻어맞고 뒈질 뻔했다가 힐을 받고 겨우 살아났다.

집중 공격한 본 드래곤의 뒷발은 아직 멀쩡했다.

10분.

쉬지 않고 스킬을 쏟아붓던 궁수, 레이튼 브라이엇의 MP가 바닥났다.

다만 마법진을 완성한 마법사들이 지원 마법을 써주기 시작한 덕에 빈 자리는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본 드래곤의 뒷발이 조금 너더분해졌다.

12분.

제이나의 자원이 고갈되며 나와 렉 아우레스에게 들어오던 힐이 끊겼다.

다만 좋은 소식이라면 철퇴를 아공간에 넣었다 뺐다 하는 것에 노하우가 생겼다는 것.

이제 스왑하는 데 약 2초 정도면 충분하다.

아, 본 드래곤의 뒷발도 눈에 띄게 파손됐다.

17분.

맨몸으로 모든 원거리 투사체들을 받아내던 렉 아우레스가 마침내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며 전투 불능 상태에 돌입.

본 드래곤이 뒷발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21분.

‘경직’ 상태에 빠진 나를 구하려다가 이백호가 큰 부상을 입었다.

그동안 주의를 끌어주던 녀석이 사라진 덕분에 철퇴를 맞추는 일이 몇 배는 더 어려워졌다.

하지만,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22분.

미처 가드하지 못하고 한 방 크게 얻어맞았다.

공격 패턴에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방심하고 있던 때 변칙 공격이라니.

23분.

아우레스의 이탈로 무방비해진 후열에서 부상자가 발생했다.

카루이의 사제 제이나.

레이저가 배에 제대로 꽂힌 거 같던데, 살아있을진 모르겠다.

24분.

뒤에서 포션을 빨던 이백호가 전장에 복귀했다.

분당 철퇴를 휘두르는 횟수가 늘었다.

지금부터는 하나만 생각하자.

철퇴를 휘두르고, 아공간에 넣는다.

그리고 가벼워진 몸으로 옆으로 구르며 앞발을 회피.

이 과정을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25분.

이백호가 플랜 B를 얘기한다.

들어보니 내용이 가관이다.

이만하면 됐으니 파멸학자 정도만 챙겨서 셋이 튀자는데, 그러니까 네가 친구가 없는 거라고 친절히 답해주었다.

26분.

철퇴를 휘두른다.

힘들다.

27분.

철퇴를 휘두른다.

죽을 거 같다.

28분.

철퇴를 휘두른다.

이제 나도 MP가 얼마 안 남은 거 같은데.

진짜 플랜 B를 써야 하나?

‘……는 무슨.’

됐고, 철퇴를 휘두른—.

‘응?’

그동안이랑 손맛이 좀 다른데 싶던 찰나, 철퇴가 실금이 잔뜩 가 있던 본 드래곤의 뒷발을 깨트리며 바닥에 부딪친다.

29분.

마침내 본 드래곤의 한쪽 발이 박살났다.

목적이 달성됐단 뜻이었다.

발 네짝, 뿔, 날개.

게임 내에서 본 드래곤은 이 중 하나라도 부서지면 생명력 10%가 깎이는 것으로 판정됐으니까.

그래, 그러니까…….

「본 드래곤이 [마법의 종주]를 시전합니다.」

1페이즈는 끝났다.

「범위 내에서 시전되는 모든 마법의 효과가 10배 증가합니다.」

내가 지시를 내릴 필요도 없었다.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기다렸을 마법사 둘이서 마법진을 활성화시켰다.

「벨베브 루인제네스가 4등급 공간 마법 [다중 순간이동]을 시전했습니다.」

벌써 여러번 활용된 마법이긴 하지만, 원래 그런 거잖아?

자주 쓰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

솨아아아아아아아아-!

[마법의 종주]가 발동된 현 상태에서 이 마법진을 사용 시 원래보다 10배 더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여기서 태고의 땅까지도 단숨에 이동할 수 있다는 뜻.

그쯤되면 암만 이 녀석이라도 따라오지 못할—.

[어디를 가느냐?]

“……응?”

지금 내가 뭘 잘못 들었—.

「본 드래곤이 ‘디스펠’을 시전합니다.」

아니, 잠깐만.

‘본 드래곤이… 디스펠을 쓴다고……?’

이건 게임이랑 다른데……?

두근-!

일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며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던 그때.

「벨베브 루인제네스의 마력 수치가 1,000 이상입니다.」

「미약하게나마 본 드래곤의 [디스펠]에 저항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번뜩-!

어째선지 텔레포트 특유의 이펙트가 발현되며 강렬한 섬광이 나를 덮쳤다.

「불완전한 주문.」

「캐릭터가 무작위 좌표로 이동합니다.」

19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85화 19

685화 나비 (5)

섬광이 가시며 시야가 돌아왔을 때.

아니, 이걸 시야가 돌아왔다고 말해도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눈을 떴을 때, 앞은 뿌옇고 흐릿했다.

하나 그럼에도 일단 신체의 감각들로 얻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종합해보자면.

솨아아아아아아-

물 아래로 가라앉고 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쿠웅-!

정신을 차리기 무섭게 육신이 최대 수심에 도달하며 육중한 진동을 자아낸다.

또한 그와 동시에.

‘앗, 따가.’

어깨에서 따끔한 통증이 피어난다.

뭔가 날카로운 것에 찔린 듯하달까.

화들짝 놀라서 얼른 고개를 돌려 옆을 확인하자 망둥어처럼 생긴 몬스터가 내 어깨를 꽉 물고서 달라붙어 있는 게 보인다.

‘…어, 이놈은…….’

5등급 어류종 몬스터 홉피시.

흐릿한 시야로나마 내 어깨를 물고 있는 녀석의 정체를 알아챈 순간, 현재 내 위치에 대해서도 자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야 이 몬스터는 딱 두 곳에서만 출현하니까.

6층 대해.

그리고 9계층 별무덤의 꿈결 폭포.

둘 중 어디인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캐릭터가 특수 지역에 진입했습니다.」

「필드 효과 - 꿈결 폭포가 부여됩니다.」

추가적인 정보가 주어지며 머릿속에서 대략적인 인과가 그려진다.

본 드래곤의 ‘디스펠’에도 텔포는 성공했다.

다만, 그게 좀 불완전했을 뿐.

‘여기에 나 혼자 달랑 떨어진 걸 보면, 전원 무작위 위치로 텔포가 타진 건가…….’

불현듯 나머지 일행들이 괜찮을까 걱정이 된다.

그도 그럴 게, 이백호처럼 솔플이 되는 직업군이면 모를까. 마법사나 신관이 9층에서 혼자 살아남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오지랖은 여기까지.’

당장은 나 먼저 살아남을 걱정을 하는 게 옳을 터.

그런 의미에서 일단 팔을 휘둘러 어깨를 물고 있던 홉피시부터 쳐냈다.

그리고…….

‘가보자.’

물에 떠오르지 않은 육중한 몸을 이끌고 뚜벅뚜벅 걸어나간다.

올바른 방향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꿈결 폭포의 조류는 무조건 필드의 중심부로 향하니까. 그냥 배만 물 위에 띄어놓으면 그 배는 무조건 폭포가 있는 방향으로 향한다.

즉, 그 반대로만 걸어가면 언젠간 뭍이 나온단 뜻.

심지어 홉피시가 있던 거로 봐서 뭍이랑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니었다.

따라서…….

푸욱, 푸욱.

내딛을 때마다 발목까지 빠지는 땅을 밟아나가며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다만 애석하게도 방해꾼들은 끈임없이 나타났다.

‘돌겠네 진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수면 아래에 잠들어 있던 근처 마물들이 깨어나며 나에게 어그로가 끌린다.

후우우우웅-!

하도 귀찮게 굴어대서 악마분쇄자를 휘둘러보기도 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물의 저항에 의해 느려진 공격 속도로 물에 사는 몬스터를 맞히는 것은 너무나 어려웠다.

후웅-!

무기를 휘두르면 민첩하게 뒤로 물러났다가 동작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가와 내 몸을 물어뜯는 녀석들.

‘빌어먹을 새끼들…….’

결국 나는 놈들을 떼어내는 걸 포기하고 이동에만 집중했다.

몇 놈이 몸에 달라붙어 물고 씹고 즐기던, 그냥 싹 무시하고 걸어나가기 시작한 것인데…….

“푸하아아앗!!”

그래도 홉피시가 출현하는 초입부였던 만큼, 금방 뭍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음… 금방은 아닌가?

‘후아, 진짜 뒈지는 줄 알았네.’

진짜 마지막엔 숨이 막혀서 골로 가는 줄 알았지만, 그래도 다행히 제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따라서 이제는 복수를 해줄 차례.

콰직-! 콰직-! 콰직-!

몸에 매달린 채 감히 뭍까지 따라온 놈들을 망치로 짓이겨준 뒤, 땅에 널브러지듯 쓰러졌다.

“하아, 하아, 하아…….”

본 드래곤과 난전을 펼치다가 물 아래에 빠져 개고생까지 했더니 진짜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남지가 않았다.

그래서 맨바닥에 대자로 누워서 쉬며 머릿속으로 정리나 해보았다.

늘 그렇듯 위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깊게 고민할 것도 없이 답이 나왔다.

‘합류부터 해야겠지.’

혼자인 만큼 최대한 조심해서 9계층을 탐색하며 흩어진 일행들과 합류하는 것.

일단은 그게 최우선 목표다.

부가적인 목표라 한다면, 그 과정에서 별무덤에서 탈출할 방법이나 단서를 찾는 것일 테고.

“후…….”

고로 더 자빠져 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몸을 일으켜세운다.

나야 9계층에서의 생존이 비교적 유리하지만, 이백호를 제외한 나머지는 그렇지 않으니까.

그나마 돌아다니기 수월한 내가 더 열심히 해야—.

“…응?”

그런 마음으로 억지로 걸음을 떼려던 나는 그 상태로 굳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제이나?”

벌써 첫 번째 일행을 발견했다.

***

발견 위치는 내가 널브러져 있던 곳에서 불과 5m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아깐 왜 이걸 못 봤지?’

그런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는, 못 본 것도 납득이 된다.

솔직히 그럴 정신이 아예 없었거든.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제이나!”

어서 후다닥 달려가 상태를 살핀다.

멀리서 봤을 때는 시체처럼만 보였는데, 다행히 숨은 붙어 있었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촤악.

항상 꽉 동여맨 채 입고 있던 두꺼운 외투를 벗기자 그 안에 입고 있던 청록색의 내갑이 보인다.

No. 2,578 하늘갑주.

스탯이 오른다거나, 이능 효과 혹은 재생력을 올려주는 그런 식의 아이템은 아니지만, 방어력 하나만큼은 상위권에 속하던.

내가 평소 ‘구명 조끼’라 부르던 바로 그것.

‘이것 덕분에 살았구나.’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것 때문에 죽어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하늘갑주의 명치 부분이 움푹 패여들어가서 폐부를 꾹 누르고 있었거든.

보아하니 갈비뼈도 전부 나갔을 거 같고.

‘하, 씨… 이걸 어떻게 벗기지?’

꽤나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일단 치료를 하려면 갑옷부터 벗겨야 하는데, 이 상태로는 벗길 수도 없다.

따라서…….

“살리기 위함이니 이해해라.”

의식이 없는 제이나에게 통보 및 양해를 구한 뒤, 갑옷 사이에 있는 작은 틈에 손가락을 끼워넣었다.

그리고…….

“으아아아아아아아……!!!”

있는 힘껏 힘을 주며 갑옷을 양쪽으로 잡아뜯는다.

갑옷이 원래의 컨디션이었다면 어림도 없었을 터이나, 앞서 크게 구겨지며 내구성이 하락한 덕일까?

천천히 벌어지던 갑옷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찢어지듯이 박살난다.

‘수리… 되려나?’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신경쓰진 않기로 했다.

뭐, 수리가 안 되면 새로 사든가 하겠지. 딱 보니 돈도 꽤 많이 모아뒀을 거 같은데.

치이이이이이이익-!

회복을 방해할 게 분명한 갑옷을 벗겨낸 다음에는 곧바로 포션을 뿌려주었다.

기포가 보글보글 끓는 게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다 아파오지만, 정말 죽기 직전이었는지 회복이 되는 데도 미동조차 없다.

고로, 포션을 한 병 더 뿌리며 옆에서 상태를 계속해서 확인.

치이이이이이이익-!

그렇게 소름끼치는 소리만이 이어지던 때였다.

“읏… 으으읏…….”

의식이 조금 돌아왔는지, 입에서 옅은 신음이 흘러나오더니 제이나가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면서 보게 된 것인데…….

‘옆구리에 문신이 있네.’

탐험가에게 문신이 있는 거야 신기할 일도 아니지만, 그래도 제이나의 문신은 조금 특이했다.

그도 그럴 게, 일단 크기부터 엄청 작았다.

한 엄지 손가락 정도 되나?

그 정도로 자그마했으며, 아마추어가 그려준 것처럼 형태도 조잡했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듯 색도 흐렸다.

‘…혹시 노아르크 출신인가?’

슬럼가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노아르크에서 지내던 때, 이런 조잡한 문신을 갖고 있는 어린 애들을 본 적이 있다.

전부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타인의 의지… 아니, 정확히는 한순간의 유흥에 의해 갖게 된 문신이었다.

아멜리아의 눈 아래에 그려진 문신처럼.

“하아… 하아… 하아…….”

약 10분 정도 시간이 흐르자, 내내 몸을 배배 꼬고 비명을 내지르던 제이나가 거친 숨소리를 내뱉기 시작한다.

그리고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

너무 작은 목소리에 발음도 어눌해서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언가 방언을 외우는 것처럼만 들렸다.

하지만, 계속 옆에서 듣고 있자니 알겠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uck…….”

이건 이 세계의 말이 아니다.

‘……악령이었을 줄이야.’

뭐, 이백호가 매일 장난스레 해대는 ‘악령어’가 무의식에 깊게 배어져 있다가 문득 나온 것일 가능성도 존재는 한다.

근데 느낌상 그런 건 아닐 거 같단 말이지.

“하아… 하아…….”

계속 지켜보고 있자니 혼잣말도 어느새 끝나고 호흡도 점차 정상으로 돌아왔다.

경험상, 이제부터는 대화가 가능한 타이밍이었다.

“좀 정신이 드나?”

어깨를 살짝 흔들며 묻자 힘없이 들어 올려지는 눈꺼풀.

“뭐가… 어떻게, 된 거죠……?”

이야, 얘도 정신을 차리자마자 상황 파악부터 하려 하네.

보통 이런 애들이 오래 살아남는데.

역시 [던전 앤 스톤] 출신이라 그런가?

“어디까지 기억하지?”

“배를… 얻어… 맞고 기절한… 것까지요…….”

“네가 기절한 이후, 결국 계획대로 흘러가 다중 순간이동 마법을 썼다. 하지만 본 드래곤의 방해로 마법이 불완전하게 발동됐지.”

“불… 완전……?”

“아마 다들 무작위 좌표로 순간 이동을 하게 된 거 같다. 나만 해도 꿈결 폭포 한복판에 떨어졌고, 겨우 헤엄쳐서 뭍으로 올라왔더니 네가 쓰러져 있었다.”

“그런 일이…….”

“몸은 어떠냐? 일어날 수 있겠냐? 이곳에 너무 오래 있어서 슬슬 이동하려 하는데.”

“조금만… 도와주세요.”

이후 제이나의 몸을 부축하며 일으켜 세웠다.

다만, 그러고 나서도 제대로 서지를 못해서 아예 그냥 들쳐멨다.

“꺗……!”

“그냥 업고 다니는 게 서로 편할 거 같아서.”

“…….”

한 자리에 너무 오래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기에 일단 제이나를 업은 채 이동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어디로 가시려는 거죠……?”

“태고의 땅으로 갈 거다. 중심부에 위치한 만큼, 다들 깨어나서 이리로 올 가능성이 높으니까.”

게다가 태고의 땅은 어느 지역이든 이어지기에 이후 상황에 따라 빠르게 목적지까지 향할 수 있단 장점도 있다.

“아무튼, 되도록이면 전투는 피할 생각이니, 기력이 생기면 생기는 대로 탐지나 해라.”

“…무슨 도구라도 된 거 같네요.”

“싫으면 얼른 회복부터 해라. 그럼 나도 훨씬 더 편할 테니까.”

“…….”

그렇게 시작된 둘만의 동행.

근데 둘만 있어서 그런지, 평소보다는 훨씬 더 말투가 온전하다.

‘나한테 버림받으면 끝인 걸 알아서 그런 건가?’

알 수 없지만, 어딘가 다소곳한 감사 인사까지 들을 수 있었다.

“……고마워요. 구해줘서.”

“고마우면 나중에 싸울 때 치료나 잘 해줘라. 가만 보니까 똑같이 다쳐도 아우레스 그놈한테 치료 주문이 더 많이 들어가던데.”

“…착각이에요.”

음, 그건 아닌 거 같던데…….

“그나저나 너도 악령이었냐?”

그 누구도 예기치 못할 타이밍에 툭 던지듯이 묻자, 어깨에 들쳐멘 제이나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역시 정답이었나 보군.”

이어진 내 중얼거림을 들은 제이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에 나도 피식 웃고 말았다.

“굳이 숨길 이유가 있나? 어차피 이백호와 함께 다닌 것만으로도 이미 왕궁에서는 대역죄인인데.”

이 말이 결정적이었을까?

살짝 더 고민하는 듯하던 제이나가 쿨하게 인정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기절해 있는 동안에 잠꼬대로 ‘악령어’를 했으니까.”

다만, 내가 내민 증거에 대한 반응은 의외였다.

“제가요……? 그럴 리가 없는데…….”

“보통 잠버릇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그런 버릇이 있는지 모르—.”

“아뇨,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단지… 말이 안 돼요.”

“…말이 안 되다니?”

이해가 안 된단 뉘앙스로 되묻자, 제이나는 이번에도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전 악령이긴 하지만, 그쪽 세상에 대한 기억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아요.”

…응?

이건 또 무슨 소리래?

29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86화 29

686화 나비 (6)

악령인 건 맞지만, 그쪽 세상에 대한 기억이 없다.

이 말을 듣자마자 술은 마셨지만 음주 운전은 하지 않았다는 유명한 말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그만큼 처음에는 어처구니가 없게 들렸지만, 잠시 시간이 흐르고서 머릿속에서 벼락이 쳤다.

“혹시… 소생의 돌로 부활한 거냐?”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설명이 된다.

소생의 돌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이 필요하지만, 가장 큰 페널티는 역시 ‘기억의 삭제’다.

나도 바로 이것 때문에 기껏 동료를 되살렸는데, 친밀도가 0이 되어 팀에서 이탈하며 소생의 돌만 날리는 일이 있었—.

“소생의 돌요……?”

근데 뭐야, 이 반응은.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진 몰라도, 소생의 돌이랑은 전혀 관계없어요.”

“그럼 왜 기억이 없다는 거냐?”

내 질문을 받은 제이나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전… 일전에 카루이 님에게 그쪽 세상에 대한 기억 전부를 바쳤어요. 제 기억이 없는 것도 바로 그래서고요.”

아, 그렇구나.

나는 영락없이 소생의 돌 때문인 줄 알았는데.

이거 뭔가 좀 무안하네.

‘…기억 같은 것도 바칠 수가 있구나.’

예전에 카루이의 사제로 플레이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게임 오버’에 가까워질 무렵에는 어김없이 녀석이 제안을 해 왔다.

살려 줄 테니 대가를 내놓으라는 건데…….

그 대가는 항상 랜덤이며 선택지도 몹시나 다양했다.

모든 캐릭터들과의 친밀도가 0으로 하락한다든가.

보유 정수 중에 하나를 빼앗아 간다든가.

영구적인 신체 결손은 물론이고, 다른 동료 NPC의 목숨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제일 골 때리는 건 살려 주는 대가로 도시로 돌아가 현상 수배범이 되라는 거였지.’

이때 카루이와의 거래는 절대적이다.

대가를 ‘후불’로 지급하는 경우더라도, 이후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캐릭터는 신벌을 받아 사망한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기억을 바칠 만큼 위급한 상황이었나 보지?”

짧게 읊조리자 제이나가 오묘한 표정을 내짓는다.

“네… 그랬을 거예요. 아마.”

음, 이건 뭔가 그냥 대충 둘러대는 듯한 말투인데?

좀 더 캐물어 볼까 말까 고민하고 있자니, 의외로 저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그날 저는 총 두 번의 대가를 바쳤어요. 한 번은 우리 모두를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기 위해서…. 이때 저는 원래 세상에 대한 기억을 잃었어요.”

“그리고?”

“다른 한 번은… 죽어 가는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썼어요. 대신 그 대가로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게 됐죠.”

“…소중한 사람이었나?”

“잘 모르겠지만… 분명 그랬을 거예요. 그런 대가를 바칠 정도였으니.”

“그 사람과는 어떻게 됐지?”

“어떻게 될 것도 없어요. 얼마 못 가 미궁에서 죽었으니까.”

“…….”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돼요. 제 눈앞에서 죽는데도 딱히 별 감정이 들지 않았거든요.”

제이나의 담담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오히려 확 와닿는다.

이 세상 사람들이 카루이를 왜 악신이라 칭하는지.

“그럼 이백호랑은 어쩌다가 같이 다니게 된 거냐? 혹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아뇨, 그쪽 세상엔 별로 관심이 없어요. 어차피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으니까. 오히려 저한테는 이쪽이 현실이고, 그쪽이 꿈같은 거죠.”

과정은 좀 많이 달랐지만 어찌 보면 나와 아주 흡사한 케이스였다.

그래서일까?

처음에는 그냥 정보를 얻어 낼 작정이었으나, 점점 더 제이나의 이야기 그 자체에 호기심이 생긴다.

“이백호와 다니는 이유는 하나예요.”

“뭐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으려면 막대한 양의 제물을 바쳐야 하니까.”

“그랬군…….”

제이나의 말처럼, [던전 앤 스톤]에서 카루이에게 바친 대가를 다시 되찾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다.

영구적인 신체 결손도 다시 회복할 수 있다.

카루이가 판단하기에 충분한 제물만 바친다면.

“이백호와 다니면 질 좋은 제물을 쉽게 얻을 수 있어서 같이 다니는 것일 뿐. 다른 이유는 없어요.”

후, 설마 이런 사정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앞서 현대의 기억엔 관심이 없다고 하였으니, 얘가 되찾으려는 기억이 무엇인지는 명확하다.

다만 한 가지 의문점이 있다면 역시 이거겠지.

“…왜 그렇게까지 해서 기억을 되찾으려는 거냐?”

이미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은 없다.

그래서 죽을 때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하였다.

한데 이 여자는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그냥… 좀 갑갑해서요.”

제이나의 답변은 참으로 단순했다.

“그날 그 사람이 죽을 때, 저한테 했던 말과 표정이 정말로 단 하나도 이해가 안 돼서. 그게 너무 답답하고 짜증 났거든요. ……왜요? 이상해요?”

“…아니, 하나도.”

그 말을 끝으로 제이나의 탐지 주문에 몬스터의 기척이 잡히며 이야기가 끝났고, 더 이상 관련된 주제로는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아까 나눈 이야기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기억을 잃어버린 악령이라…….’

세상엔 정말 온갖 사연들이 다 있구나.

***

콰아아아아앙-!

주기적으로 운석이 떨어지는 ‘별무덤’의 특징과는 별개로, 태고의 땅은 매번 기후가 바뀐다.

그것도 아주 사람에게 가혹한 형태로.

“하아… 하아….”

이번에는 폭염이었다.

아니, 이걸 과연 ‘폭염’이란 말로 설명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화르륵-!

열기에 버티지 못한 생목들에서 연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하고, 심한 경우에는 불까지 붙어 활활 타오른다.

그래도 불의 보주에 화염 내성이 있어서 화상을 입거나 지속 대미지를 입지는 않았지만, 더운 거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마법사라도 있으면 에어컨 좀 켜 달라 할 텐데.

“…포위됐군.”

“어쩔 건가요?”

“우리 속도로 도망치는 건 무리니 싸우는 수밖에.”

최대한 몬스터들과의 전투를 피하며 이동했음에도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하는 경우들이 발생했다.

탱커와 신관.

몬스터를 사냥하기에 결코 좋은 조합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찌저찌 사냥이 되기는 했다.

그도 그럴 게…….

「제이나 플라이어가 [썩은 바람]을 시전합니다.」

「범위 내의 적에게 지속 암속성 피해를 입히며, 물리 내성 수치를 감소시킵니다.」

신관부터가 일반적인 신관이 아닌 데다가.

「캐릭터가 [휘두르기]를 시전했습니다.」

나도 보통 탱커는 아니거든.

콰직-!

4등급 이하까지는 우리 둘이서도 충분히 해결이 가능하다.

뭐, 아주 느리긴 하지만.

쿠우웅-!

“저기 바르타누스예요!”

“업혀라!”

아무튼, 그렇게 전투를 치르다가도 3등급 이상의 몬스터가 나타나면 부리나케 자리를 피했다.

신관과 탱커 조합인 만큼 몇 시간 동안 전투를 지속하면 잡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닐 터이나, 그건 다 일대일이 가능할 때의 얘기였다.

애초에 몇 시간에 걸쳐 잡을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

이내 앞장서 걷던 내가 돌연 멈춰 서자 제이나가 불안한 목소리로 이유를 물어 온다.

나는 대답 대신 한 부분을 손으로 가리켰다.

투박하게 찢어진 천이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이전에 이곳을 지나갈 땐 발견하지 못했던 사람의 흔적.

스윽.

손을 뻗어 묶여 있던 천을 펼치자 그 안에 글자가 적혀 있다.

[이걸 본다면…… ……, ……앙 기념비로.]

폭염에 의해 중간 부분이 시꺼멓게 타서 내용을 알아볼 수 없었으나, 무엇을 전하려 했는지는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태고의 숲 중앙 기념비로 오라는 거군.”

이백호, 파멸할배, 궁수, GM.

아무래도 이 넷 중 한 명이 중앙에 있던 기념비로 향하며 가는 길목에 이렇게 소식을 전한 듯한데…….

“왜 네 명이죠……?”

“아우레스가 이걸 남겼을 거 같나?”

“아, 납득했어요.”

“어찌 됐든, 중앙 기념비로 가면 한 명은 더 만날 수 있다는 거군.”

모처럼의 희소식이었다.

그도 그럴 게, 아우레스를 빼면 나머지는 전부 다 딜러니까.

넷 중 누가 있든 딜, 탱, 힐 조합이 완성된다.

그럼 이후로는 안정성 및 이동 속도가 훨씬 더 올라갈 터.

“얼른 이동하지.”

“네.”

혹시나 길이 엇갈릴 수도 있다고 판단한 나는 최대한 속도를 올려서 이동했다.

그리고…….

1시간, 2시간, 3시간…….

그렇게 일말의 휴식도 없이 강행군을 이어 나가고 있던 때.

갑자기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익숙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 남작님?”

와씨, 깜짝아.

나도 모르게 망치부터 휘두를 뻔했네.

“…하벨리온?”

이내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자, 은신 마법이 풀리듯 GM의 모습이 드러난다.

놀랍게도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동료와 조우한 것인데…….

“남작니이이이이임!!!!”

철딱서니 없이 안겨 드는 GM을 가볍게 옆으로 무빙해 피해 준 뒤 물었다.

“나무에 묶여 있던 천은 네가 한 거냐?”

“아, 아뇨. 저도 얼마 전에 발견해서 따라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어찌 된 게 일이 술술 풀린다.

이렇게 되면 기념비 앞에는 천을 묶어 놨던 동료가 한 명 더 기다리고 있다는 거니까.

순식간에 둘이었던 인원이 총 넷으로 변하는 것.

“남작님께서는 어떻게 되신—.”

“거의 다 왔으니, 대화는 도착해서 나누지.”

GM의 사정도 궁금했지만, 목적지까지 거리가 얼마 남지 않은 만큼 감각을 활짝 열고서 이동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한 30분쯤 더 흘렀을까.

“뭐야, 이건……?”

수풀을 헤치고 나가자 크레이터에 파묻힌 예의 그 비석이 저 멀리서 보인다.

다만 문제는…….

“저, 저런 게 원래 있었습니까?”

“그럴 리가.”

비석만 떡하니 있어야 할 그곳에 정체를 가늠하기 힘든 건축물이 더 있었다.

마치 신전의 입구 부분에 해당하는 문짝만 떼어 내 맨땅에 설치한 듯한 건축물.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는데, 가까이서 확인을 해 봐도 어두워서 내부가 잘 보이지가 않는다.

또한…….

“저기 글씨가 붉은데… 저것도 원래 안 저랬죠?”

“예! 비석은 제가 조사했던 만큼 확실합니다. 저런 현상은 없었습니다.”

해석 불가의 상형문자가 적혀 있던 비석 최상단부 첫줄이 붉게 빛나고 있다.

대체 이게 어떤 상황인 걸까.

못내 혼란스러워지지만, 가장 큰 의문은 따로 있었다.

“…그런데 왜 아무도 없는 거죠?”

천에 남겨져 있는 메시지를 따라 이곳에 왔지만, 정작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없다.

“우선 기다려 보지. 어쩌면 주변에 천을 더 묶으러 잠시 나간 걸 수도 있으니까.”

“예… 저는 그럼 비석을 좀 조사해 보겠습니다. 이전과 다르게 마력의 흐름이 감지돼서…….”

“저는 저 건축물 좀 보고 올게요. 굉장히 익숙한 기운이 느껴져서요.”

“익숙한 기운?”

“말로 설명하긴 어렵고, 고대의 존재와 관련된 기운 같은 거라고만 아시면 돼요.”

“…알겠다.”

그렇게 두 사람이 조사를 시작하고, 나는 주변을 경계하며 그들의 조사 과정을 관찰했다.

그리고…….

‘대체 왜 아무도 안 오는 거야?’

무려 사흘이 지나며 이곳에서 기다리는 게 의미가 없지 않을까 싶던 생각이 들던 시기.

“다행히 늦지 않았나 보군.”

파멸할배가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사 혼자 사흘이 넘는 기간 동안 혼자 9계층을 떠돌아다녔다 보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멀쩡한 몰골이었다.

‘…마법사면서 솔플도 어느 정도 된다는 건가?’

놀라울 따름이지만, 일단 실력에 대해 얘기하는 것보다 먼저 물을 게 있었다.

“네가 천을 매달아 둔 거냐?”

“…천?”

전혀 모르겠다는 반응에 나무에 묶여 있던 천에 대해 얘기하자 파멸할배는 그런 건 일절 보지 못했다 답했다.

“난 단지 중심부에 있으면 한 사람은 오지 않을까 해서 이리로 왔을 뿐이네.”

“그럼 너도 천을 매단 사람이 누군지는 모른다는 거군.”

“아니, 그건 아마 이백호가 한 일일 걸세.”

“어떻게 확신하지?”

“아우레스 군이 그랬을 리 없으니, 남은 사람은 한 명뿐이지 않은가.”

“예? 하지만 브라이엇 씨가 남긴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GM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파멸할배가 단호한 어조로 읊조렸다.

“브라이엇 군은 죽었네.”

23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87화 23

687화 미스터리 (1)

[던전 앤 스톤]은 하드코어류 게임이다.

딱히 실수 같은 걸 하지 않았음에도 공 들여서 키운 캐릭터가 플레이 내내 죽어 나간다.

그런 의미에서 크게 놀랄 이야기도 아니었다.

이백호 팀의 궁수, 레이튼 브라이엇이 사망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본 드래곤과 사투를 펼쳤고, 그 이후 무작위 좌표로 순간이동을 당하기도 했으니까.

어떤 캐릭터라도 9계층에서 홀로 살아남는 일은 결코 쉽지 않으며, 부상까지 입은 상태라면 더더욱 그렇다.

힐러인 제이나 플라이어 또한 운 좋게 나를 만난 게 아니라면 그 자리에서 운명을 다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

그래도 갑자기 이렇게 소식을 들으면 당혹스러운 건 어쩔 수 없는 법.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브라이엇 씨가 죽었다니…….”

GM이 충격을 받은 얼굴로 다시 한 번 되묻자, 파멸할배는 별다른 감흥이 묻어나지 않는 목소리로 사실만을 고하듯 말을 이었다.

“이리로 향하는 길에 그의 시체를 발견했네. 있는 힘을 다 끌어쓴 상태에서 홀로 살아남기엔 이 지역이 많이 가혹했나 보더군.”

“그, 그런…….”

일행의 부고 소식에 뭐라 말을 잇지 못하는 GM.

참 아이러니하다.

우리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같이 했을 파멸할배는 정작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라는 게.

“아무튼, 브라이엇 군은 죽었으니 나무에 천을 매달아 소식을 전할 사람은 이백호, 그 친구밖에 없단 게 내 결론일세.”

“그, 그렇군요……?”

“브라이엇 군은 이만하면 됐고, 그래서 여긴 어떤 상황인 건가? 저 건축물은 또 뭐고?”

“그… 저희도 잘 모릅니다. 와보니 갑자기 이런 게 생겨 있어서…….”

“흐음, 아주 흥미롭군.”

눈을 반짝 빛내며 구조물을 향해가는 파멸할배를 어이없게 보기도 잠시.

나는 잠시 눈을 감고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레이튼 브라이엇…….’

이백호와 함께 다니던 걸 보면 결코 착한놈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나라도 애도를 표하자.

이 삭막한 미궁에 그 정도 낭만도 없으면 너무 슬픈 일일 테니—.

“…브라이엇 씨는 항상 다 그만두고 싶어 했어요.”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제이나가 보인다.

“원하는 대로 됐네요. 이제 아무것도 안 해도 될 테니까.”

뭐지? 얘도 사이코패스인가?

불현듯 그런 생각도 들었으나, 제이나의 표정을 본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비꼬는 듯 들리기도 하는 말이지만, 이것 역시 그녀 나름대로의 애도임이 느껴졌다.

“그쪽 동료들은 좋겠네요. 죽으면 어느 누구보다 슬퍼해줄 사람이 있어서.”

“그럼 너도 아예 이적하지 그러냐?”

장난스레 툭 던진 말에 제이나가 멈칫하더니, 이내 작게 웃으며 답했다.

“그건 안 돼요. 난 제물이 많이 필요하니까.”

“제물이야 약탈자나 노아르크 놈들을 때려죽여서 해결하면 그만이다.”

“……제가 그 노아르크 놈들이라는 건 알고 하는 말이죠?”

아, 그것도 그러네.

“말은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그래라 뭐.

어차피 나도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카루이의 사제를 클랜원으로 받았다가 그 사실이 발각되면 ‘삼신교’까지 내 적이 되어버린다.

왕가만 생각해도 머리 아픈 나로선 절대 벌어져선 안 될 일인 것인데…….

‘이제 렉 아우레스랑 이백호만 오면 되는 건가.’

이후 파멸할배와 GM은 새로운 이상 현상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고, 그 외의 나머지는 대기를 하며 기다렸다.

그리고…….

하루, 이틀…….

사흘째가 되어서 렉 아우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넝마가 되었다는 말로도 모자랄 만큼 망신창이가 된 상태로.

“하, 하하… 사, 살았구려…….”

며칠 동안 그 어떤 고생을 했는지는 몰골만 봐도 알 수 있는 상태.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긴장이 풀렸는지 아우레스는 곧바로 잠에 들었고, 그런 그를 제이나가 옆에서 보살피며 치료했다.

그리고…….

“결국 천을 매단 건 네가 아니었다는 거군…….”

“부끄럽지만, 그렇소. 마물들에게 겨우 도망쳐 태고의 땅에 발을 들이밀었는데, 그때 딱—.”

“그만.”

길어질 거 같은 렉 아우레스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내고서 일행들과 시선을 공유한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정황상 이백호가 천을 매달아 소식을 전한 게 분명한데, 정작 그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니.”

“확실히 좀 이상하네요. 처음에 며칠은 다른 지역에도 천을 매달러 가서 그랬다고 이해할 수도 있었는데…….”

“나 역시 이 정도 시기면 한 번쯤은 돌아와서 중간에 확인을 하는 게 합리적인 행동이라 생각하네.”

렉 아우레스까지 합류를 하며 의문이 커진다.

천을 매단 게 얘도 아니라면 정말로 이백호밖에 없는데, 얘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이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중 파멸할배가 한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어쩌면 이백호는 저 안에 먼저 들어가버린 것일지도 모르겠군.”

파멸할배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기념비 왼편에 새롭게 나타난 건축물이었다.

누가 봐도 입구처럼 생긴 구조물.

밖에서 조사를 열심히 해봤지만, 아직 그 아래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어찌 될지 모르니 전원이 다 모인 다음에 결정을 하기로 한 것인데…….

“확실히… 이백호라면 혼자 들어갔을지도 모르겠네요. 우리가 오기 전에 잠깐만 확인을 해보겠다 하면서.”

“…말도 안 되는 짓이지만, 왠지 그라면 그렇게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파멸할배의 설명에 납득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일행들.

다만 정작 말을 꺼낸 파멸할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분명히 이상한 일일세. 이백호 그 친구가 자네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내가 보기에는 그 누구보다 신중한 자니까.”

“…예?”

“겉보기와 달리 이백호는 절대 무모한 짓은 하지 않네. 가끔 보면 옆에 있던 내가 다 답답해질 정도로 겁이 많지.”

“…그 이백호가 말입니까?”

“자신감이 넘치는 것과 신중한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니 말일세.”

“하지만 저 안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신 건 루인제네스 공 아니십니까.”

“그렇지. 소거법에 의해 다른 가능성이 떠오르지 않으니까. 하나 그렇게 신중한 이백호가 만약 저곳에 들어갔다고 한다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따로 있었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일세.”

흐음…….

“어떤가? 비요른 얀델, 자네 생각은.”

여러모로 머리가 복잡해진다.

파멸할배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저 안으로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가 어렵다는 뜻이니까.

그도 그럴 게,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면 진작에 이백호가 한 번은 나오든가 했을 터.

“하루만, 하루만 더 기다려보고 결정하지.”

이후 나는 하루의 유예 기간을 두었지만, 그동안 이백호가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따라서 이제 결정을 내릴 차례.

“하벨리온, 이 아래에 뭐가 있을지 짐작 가는 게 있나?”

암흑 시야로 뒤덮여 제대로 보이지 않는 계단 아래를 바라보며 묻자, GM이 고개를 내저었다.

“태초의 땅에 이런 게 있다는 얘기는 어디에서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사실 나도 마찬가지다.

태초의 땅만이 아니라 별무덤 전역에서 이러한 입구는 본 적도 없고, 전에 왔을 때는 없다가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도 너무나 수상하다.

하지만…….

“좋아, 결정했다.”

“역시 들어갈 모양이로군?”

“그래.”

처음부터 들어가지 않을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위험을 무릅쓰고 별무덤 전역을 뒤진 것도 ‘수상한’ 무언가를 찾으려 했던 것 아닌가.

그런 게 떡하니 나타나줬는데 그냥 지나칠 리가.

“좀 더 이백호를 기다려보려 했지만… 나타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 혹시 안에 들어가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 우리끼리 진입한다.”

일단 들어가보자.

***

일종의 던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기믹이 있을 것이고, 알지 못하면 밟는 수밖에 없는 함정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조심스레 좁은 계단 아래로 내려간다.

터벅, 터벅.

선두에는 당연히 내가 서 있고, 최후방에는 렉 아우레스가. 그리고 원거리 라인들이 중심부에 차례로 서 있는 진형.

터벅, 터벅.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발을 내딛는다.

정보가 없는 ‘던전’이란 건 원래 그런 거니까.

게임 내에서는 첫 트라이는 항상 정보를 얻는 것에 만족해야 했을 만큼, 미지의 지역은 위험하다.

터벅, 터벅.

그런 의미에서 다섯 명 모두 허리에 로프를 둘러 굴비처럼 엮었다.

참고로 로프는 암벽 등반을 하듯 입구 앞에 말뚝을 세워 고정시켜 둔 상태였는데…….

“으앗! 큰일이오! 큰일!”

계단을 얼마 내려가기도 전에 맨 뒤편에서 큰 소리가 들려온다.

“밧줄이 끊어졌소!”

“……뭐라고요?”

“내 잘못이 아니오! 난 아무것도 안 했단 말이오! 그냥 따라간 것밖에—!”

“거짓말은 아닌 거 같습니다. 여기 단면을 보면, 마치 날카로운 무언가로 베어낸 듯한데…….”

“다들 벽쪽으로 붙어봐라.”

이내 좁은 계단을 비집고 올라가 로프의 단면을 직접 확인해보았다. 일단 아우레스가 뭔가 실수해서 잘릴 수 있는 흔적은 아니었다.

애초에 수백 미터까지 늘어나도록 설계된 마공학 로프가 실수로 끊어질 일 자체가 없기도 하고.

“천천히 따라와라.”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기에 내려가던 것을 멈추고 다시금 계단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이미 내려왔던 것보다 한참 더 올라오지 않았나요……?”

“예. 맞습니다. 지금까지 내려간 계단이 213개인데 지금 벌써 240개가 넘었습니다.”

아무리 계단을 밟고 올라가도 바깥은 보이지 않는다.

쉽게 말해 돌아갈 길이 사라진 것.

“…크, 큰일 아니오? 여기에 갇힌 거지 않소!”

“호들갑 떨지 마세요. 다들 그 정도는 예상하고 들어온 거니까.”

“그, 그렇소이까?”

제이나가 렉 아우레스에게 핀잔을 줌과 동시에 GM이 내 옆으로 다가온다.

“돌아갈 길이 막힌 건 확인했으니, 이쯤에서 다시 원래대로 진행을 하는 게 어떨는지요?”

합리적인 조언이었다.

다만 어딘가 위화감이 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위화감이 아니라…….

‘계단 아래로 내려가면 입구가 사라지고, 다시 돌아가려 하면 무한히 나타나는 계단이라…….’

기시감이 피어난다.

그야 균열 중에 이런 곳이 하나 있긴 하거든.

‘황금 유적’.

4층의 균열 중 하나인 그곳 초입부에 이런 연출이 있었다.

‘가만 보니까 벽도 뭔가 비슷한 거 같고…….’

만약 ‘황금 유적’을 기반으로 한 지역이라고 한다면, 마냥 아래로 내려가는 게 능사가 아니다.

여기에도  피스가 하나 숨겨져 있으니까.

입구가 닫힌 상태에서 계속 계단을 올라가다보면 특수한 이벤트 하나를 겪을 수 있다.

‘뒤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 일단 이벤트는 깨고 가는 게 낫겠지.’

아, 물론 여기서도 그 이벤트가 발생한단 보장은 없다.

하나 한 번 시험해본다고 해서 손해 보는 건 약간의 시간 말고는 없을 터.

“계속 올라갈 테니 낙오되는 사람이 없게 조심해서 따라와라.”

“예? 하지만…….”

“먼저 가지.”

이후로는 성큼 성큼 발을 뻗으며 빠르게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그리고…….

“언제까지 올라가려는 겁니까? 가도 가도 계단 말고는 나오지가 않는데.”

“되돌아가는 것도 일이겠네요.”

이제 한 절반 정도 올랐다고 예상이 되는 시기.

터벅, 터벅.

이질적인 발걸음 소리가 두 귀에 포착되며 나는 황급히 진형을 멈춰 세웠다.

“멈춰라.”

“아, 이제 돌아가시는—.”

“조용.”

“……?”

“앞에서 누군가 내려오고 있다.”

참고로 그 누군가에 대해서는 나도 정보가 없다.

애초에 특수 이벤트 자체도 이런 식이 아니니까.

‘대체… 누구지?’

알 수 없지만,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경계 상태를 뜻하는 수신호를 올린다.

그리고 그때.

“…….”

“…….”

가까워지던 발걸음 소리가 뚝 그친다.

‘저쪽도 우리를 눈치챈 건가?’

팽팽하게 당겨진 실처럼 경직된 공기.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방패를 쥔 손에 힘을 불어넣은 그 순간이었다.

타닷-!

기습적으로 달려드는 소리가 귓가에 잡힌다.

“전투 준비!!”

짧았던 정적을 깨트리며 외침과 동시에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재빠르게 돌진한다.

반사적으로 방패로 태세를 갖추던 나는 그대로 몸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탓-

빠르게 달려오다가 방패 앞에서 장난스럽게 멈추는 두 발.

“서프라이즈! 어때요, 놀랐어요?”

천진난만하게 말하는 녀석을 보며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미친놈인가?’

이백호였다.

***

이번에야말로 이 새끼를 한 대 때릴까 말까 고민을 하던 차, 이백호가 실실 웃으며 내 옆구리를 콕콕 찌른다.

“우하하! 많이 놀랐어요? 많이 놀랐죠? 많이 놀란 거 같던데. 괜찮아요? 많이 놀랐죠?”

“…장난도 상황을 봐가면서 해라.”

“에이, 이걸 어떻게 참아요? 드디어 소중한 동료들이랑 재회를 하게 됐는데!”

“…….”

“아니, 근데 진짜 안에 있을 줄은 몰랐네. 어떻게 날 안 기다리고 그냥 들어가지?”

……뭐라고?

“남작님은 내가 장난친 것 정도로 뭐라 하면 안—.”

“…지금 뭐라고 했냐?”

목소리를 내리깔며 묻자 이백호도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서 의문 어린 시선을 보낸다.

나는 빠르게 한 가지를 확인했다.

“아주 중요한 문제니 장난치지 말고 진지하게 답해라. 나무에 천을 묶어둔 게 너 아니냐……?”

지금까진 거의 확신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다만, 그 물음에 이백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뭔 소리예요? 그 천… 남작님 쪽에서 달아둔 거 아니었어요……?”

그 반응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백호가 아니라면.’

그럼 대체 여기로 오라고 한 놈이 누구인 거지?

22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88화 22

688화 미스터리 (2)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표정이 혼란으로 물든다.

다만 판단을 내리기 전에 이백호의 이야기를 먼저 듣기로 했다.

“저요?”

“그래, 일단 말해봐라. 혹시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정보가 있을지 모르니까.”

“그럴 만한 게 딱히 없는데……. 맹독 용암지에서 눈을 뜬 다음 이쪽에 떨어진 사람이 없나 싶어서 막 돌아다녔고… 대충 쓱 둘러보니 없는 거 같아서 일단 태고의 땅으로 넘어왔거든요?”

그다음도 딱히 도움이 될 단서는 없었다.

태고의 땅에 진입한 며칠 전에서야 천이 묶여 있는 걸 찾았고, 기념비가 있는 장소까지 후다닥 뛰어서 달려온 것 말고는 별일 없었다고 하는데…….

“근데 이게 웬걸? 도착해보니 머물렀던 흔적은 있는데 아무도 안 보이네?”

심지어 전에는 없었던 웬 이상한 입구 같은 게 생겨 있고, 우리들의 흔적이 거기로 이어져 있는 걸 보고서 이제 막 진입했다는 것이 이백호의 설명.

“짜잔, 그럼 여기서 내 이야기는 끝!”

이내 기지개를 켜듯 몸을 푸는 제스처를 취하던 이백호가 돌연 표정을 바꾸더니 우리를 쭉 훑어보며 낮은 음성으로 묻는다.

“그래서, 우리 활잽이는 왜 안 보여?”

“…….”

“뒈졌대?”

툭 던지는 듯한 물음에 괜히 말문이 막혔다.

거,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닐진대.

“브라이엇 군은 죽었네.”

“어떻게?”

“홀로 떨어져 태고의 숲으로 향하던 길에 시체를 발견했네. 마물에게 당한 듯하더군.”

“……그래?”

이백호는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을 이어갔다.

물론 그 시간은 별로 길지 않았다.

“흐음, 그래도 한 명밖에 안 죽은 거면 선방하긴 했네.”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텐션을 되찾은 이백호.

“다들 고생 좀 했겠다? 솔직히 나는 남작님이랑 우리 할배 빼고 다 뒈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

“근데 궁수가 없어서 어떡하지? 걔가 좀 소심하긴 해도 실력 하나는 괜찮았는데.”

도무지 녀석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이 새끼는 진짜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적어도 3년은 넘게 같이 지낸 동료였는데?

알 수 없지만, 브라이엇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 건데? 우리 중에 천을 매단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그렇네. 백호 자네가 장난을 치는 게 아니라면.”

“그런 장난을 내가 왜 쳐? 하… 진짜 이거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음, 글쎄.

이게 귀신이 곡할 노릇까지 갈 정도인가?

“혹시… 우리 중에 배신자라도 있나?”

이백호가 눈알을 부라리기 시작했다.

***

“나는 아니오! 정말 결백하오! 그런 복잡한 계획 같은 걸 내가 세울 수 있을 리 없지 않소!”

이내 이백호의 시선을 받은 즉시 자기 변호를 시작한 아우레스.

이건 뭐 마피아 게임도 아니고.

쓸데없는 일에 기운 뺄 이유가 하등 없기에 얼른 상황에 개입했다.

“동료부터 의심하는 짓은 관두는 게 어떠냐?”

“왜요? 이 정도면 합리적인 의심 아닌—.”

합리적인 의심은 개뿔.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천을 매달지 않았다면, 다른 쪽을 의심하는 게 먼저지 않나.”

“다른 쪽이라뇨……?”

“벌써 잊은 거냐? 이 지역에는 우리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내 말에 뭔 소리인가 싶던 이백호가 뭔가 깨달은 듯 입을 살짝 벌린다.

“아! 우리를 유인한 그 씹새끼! 그, 그, 그 이름이… 한… 뭐였는데? 아, 맞다! 데일란! 한—!”

“그만.”

불행의 상징과도 같은 이름이 완성되기 전에 재빨리 제지하고 나서자, 이번에는 제이나가 옆에서 입을 열어온다.

“근데 그자는 이미 죽었잖아요?”

“맞소! 바이욘으로 변한 걸 조져서 루인제네스 공이 해체까지 하지 않았소?”

옳다구니 맞장구를 치는 아우레스.

내가 나설 것도 없이 파멸할배가 입을 열었다.

“나 역시 남작과 같은 의견일세. 우릴 계획적으로 유인한 듯한 정황을 갖고 있던 자가 아닌가. 한—.”

“웬만하면 성으로 호칭해라.”

“……?”

“둘이 딱히 친한 사이도 아니었지 않나. 예의는 지켜야지.”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하는 눈짓을 보내는 할배였으나, 귀찮게 언쟁을 벌일 생각은 없는 듯했다.

“…아무튼, 우리가 만난 건 데일란이라는 남자로 위장한 정체불명의 누군가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내 의견일세.”

“그럼 그 정체불명의 누군가는 뭐가 목적인 건데요?”

“모르겠네. 다만, 이곳을 조사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지 않겠나. 그자가 왜 우리를 이곳으로 불러낸 것인지.”

파멸할배가 말했듯,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이미 우리는 이곳에 갇혔고, 할 수 있는 것은 이 의문의 공간을 계속해서 탐사해나가는 것뿐이니까.

“자, 그럼 얼추 정리 끝났네. 그 의문의 씹새끼를 조심하면서, 이 공간을 수색한다. 맞죠, 남작님?”

“정리하자면 그렇다.”

“됐으면 얼른 가죠? 가다보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 개잡놈을.”

그리 말한 이백호가 얼른 가자는 듯 내게 다가온다.

하나 내가 비키지 않고 꿈적도 않고 있자 고개를 갸웃한다.

“왜 내려가지 않고… 아, 맞다. 아까 마주칠 때도 이리로 올라오고 있었지?”

그제야 이상한 점을 깨닫고서 이유를 물어오는 이백호.

뱃사공이 많으면 안 되는 이유 중 하나다.

나머지는 그냥 내가 억지를 부리면 따라왔는데, 얘는 그럴 거 같지가 않거든.

“올라가다보면 뭔가 나올지도 모르니까. 확인을 해봐야 한다 생각했다.”

적당히 설명을 덧붙이자 이백호가 잠시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무릎을 탁 친다.

“올라가면 뭐가 나올지 모른다라… 아! 그러고 보니 여기 ‘황금 유적’이랑 닮았네!”

후, 옛날에 오리지널 모드도 오래했어서 그런가?

이 새끼는 치트맵을 깬 주제에 의외로 아는 게 많단 말이지.

“헤에, 그걸 노리는 거였구나? 그럼 인정. 확인해 볼 만하네!”

“저… 두 분이서 무슨 말씀을 나누시는 건지……?”

“있어. 너희는 그냥 따라만 와.”

어찌 됐든 의견이 일치되고, 이후로는 이백호까지 합류한 채로 계단을 계속해서 올랐다.

10분, 20분, 30분…….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더 흘렀을까.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혹시 여기는 미궁이랑 달라서 ‘이벤트’가 발생하지 않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터벅.

마침내 계단이 끝나며 좁은 통로 하나가 나타난다.

“…어?”

“정말 끝이 있었네요……? 당연히 환각 마법이거나 그런 걸 줄 알았는데.”

“뭐가 나오려는 건지…….”

설명을 바라는 듯한 분위기지만, 말없이 통로를 걷기 시작하자 일단 다들 조용히 뒤따른다.

터벅, 터벅.

한 10m쯤 지나가자 암흑 시야가 사라지며 그 끝에 석문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입장 전에 대략적인 브리핑이라도 해야 할까 싶긴 했지만, 그냥 스킵하기로 했다.

‘3등급 몬스터도 쉽게 쉽게 잡는 애들인데 굳이?’

4계층의 균열 중 하나인 황금 유적.

심지어 균열의 수호자도 아니고 숨겨진 중간 보스 같은 포지션인 놈이니, 전투 자체는 어렵지 않을 터.

“그럼 시작하지.”

그 정도 언질만 준 뒤 곧바로 망치를 꺼내 들어 석문을 내리쳤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앙-!

단 한 방에 산산조각이 나서 부서지는 석문.

‘…뭐지?’

때려부서 놓고도 내가 다 얼떨떨했다.

그야 게임에서는 꽤 내구도가 높았거든.

아무리 딜탱바바로 육성이 됐다지만, 그래도 최소 다섯 방은 때려야 부숴질 줄 알았건만.

솨아아아아.

GM이 풍속성 마법으로 먼지를 제거하며 시야가 확보됐고, 나는 조심스레 그 안으로 들어서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일단 지형은 정사각형 구조의 밀실.

비좁았던 통로보다는 훨씬 낫지만, 그리 넓지는 않다. 또한 벽면에는 어딘가 소름 끼치는 화풍의 벽화가 빼곡하게 그려져 있으며…….

터벅.

중심부에 3m 길이의 황금 관짝 하나가 놓여있다.

계단을 계속해서 역으로 올라가다보면 찾을 수 있는  피스였다.

터벅.

저 관짝을 열면 ‘마카이로’란 개체 명을 지닌 4등급 몬스터가 중간 보스로 등장한다.

처치 시에 균열을 나갈 때까지 지속되는 전투 버프를 획득하며, 운이 좋으면 아주 특이한 넘버스 아이템 하나를 얻을 수 있는데…….

툭.

관짝의 뚜껑 부분을 발로 밀어서 떨어뜨린 뒤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콰아아아앙-!

방패를 들어 올리고 전투 준비를 하자, 다들 눈치껏 태세를 갖춘다.

하지만…….

“…….”

“…….”

“…뭔가 나오는 거 아니었습니까?”

뿌옇게 올라온 먼지가 다 내려앉고 나서도 일어날 기미가 없는 보스 몬스터.

‘뭔데 이건 또.’

방패로 상체를 가리며 천천히 다가가 관짝 안을 확인한 내가 멍하니 굳어 있자, 이백호가 슬쩍 다가와 읊조린다.

“뭐야, 이미 죽어 있네?”

관짝 안에는 새하얗게 백골이 된 시신이 한 구 놓여 있을 뿐이었다.

***

관 안에 누운 자세로 안치되어 있는 뼈.

이를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자니 이백호가 파멸할배를 호출한다.

“할배, 일단 루팅부터 해 봐. 제일 귀한 눈알은 썩어 없어졌다 쳐도, 마카이로 뼈면 나름 상등품일 걸?”

“필요없네. 이미 이 뼈는 아무런 가치가 없으니.”

“그건 또 뭔 소리야?”

“마물들의 뼈에 가치가 있는 것은 그 안에 마력이 보존되어 있기 때문일세. 하지만…….”

파멸할배가 뼈 하나를 집어들며 말을 이었다.

“여기선 어떠한 마력도 감지되지 않는군. 이제 이건 고블린 뼈만도 못하네. 이미 삭고 삭아서 지팡이 대용으로도 못 쓸.”

“…생물의 뼈에서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건 처음입니다. 마력 농도가 0이 되려면 보통 세월로는 부족할 터인데.”

“그런 의미에서 몇 개 정도는 챙겨볼 법도 하겠군. 이 친구가 말했듯, 아주 특이한 경우니까.”

그리 말한 파멸할배가 큼직한 뼛조각 몇 개를 집어 가방에 넣었고, 이를 본 GM도 따라서 몇 조각을 챙겼다.

“와, 그럼 여기까지 와서 챙긴 게 고블린 뼈만도 못한 뼛조각 몇 개가 다라고?”

“애석하지만 그렇네.”

“왜 그렇게 된 건데?”

“글쎄, 추론을 해보자면 두 가지 정도가 있겠군.”

이내 파멸할배가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하나는 이 마물의 사인일세. 간혹 흑마법이나 카루이의 권능에 의해 생명력과 마력이 흡수당한 사체에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니까.”

“그럼 우릴 여기로 유인한 새끼가 흑마법사나 카루이 따까리일 수도 있단 거네? 오케이 확인. 그럼 두 번째는 뭐야?”

“시체가 되고서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경우일세. 원래 모든 생물의 부산물들은 시간이 흐르다보면 부패, 혹은 부식되며 마력이 흩어지기 마련이니.”

“그럼 뼈로 장비를 만들어서 쓰는 건 뭔데? 전에 경매장에 나온 건 몇 천 년 전 초유명 탐험가가 쓰던 거라면서 엄청 비싸게 팔리던데.”

“그건 마력이 흩어지지 않도록 마법으로 가공을 해뒀기 때문에 그런 걸세.”

“그래서 뼈가 이런 쓰레기 상태가 되려면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하는데?”

“때마침 마탑에 그 주제로 실험 중인 표본이 있네.”

“아, 제이메탈의 고블린 뼈 말씀이시군요. 작년부로 실험을 시작한 지 딱 4천 년이 됐다고 들었습니다.”

“그랬나? 한데 아직까지도 마력이 남아있더군.”

갑작스레 뼈 이야기가 길게 이어지긴 했지만, 요점은 딱 하나다.

“쉽게 말해, 이놈이 죽은 지 4천 년이 넘게 지났을 수도 있다는 건가?”

“흑마법이나 그런 것에 당한 게 아니라면 말일세.”

물론 어느 쪽이든 당장 고민할 거리는 아니었다.

어떻게 죽었는지, 아니면 얼마나 오래전에 죽었는지 알 게 뭔가?

‘…버프를 못 받은 건 너무 아쉬운데?’

게다가 내심 기대도 했었다.

이놈을 잡으면 아주 낮은 확률로 아이템 하나를 얻을 수 있—.

“응? 남작 이건 뭐요? 뭐 ‘상자’ 같이 생겼는데…….”

“뭐? ‘상자’라고?”

이내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휙 돌리자, 아우레스가 시꺼먼 정육면체 형태의 상자 하나를 들고 있는 게 보인다.

“…이걸 어디서 찾았냐?”

“찾고 말고 자시고… 그냥 저기 구석에 있었소만?”

“이리 줘라.”

빼앗듯이 상자를 건네받은 나는 상하좌우로 세심히 확인했고, 이내 감정을 끝마쳤다.

틀림없는 정품이었다.

“대체 그게 뭐요……?”

“No.777 마카이로의 보관함.”

평소 미스터리 박스라 부르던 아이템이었다.

26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89화 26

689화 미스터리 (3)

No.777 마카이로의 보관함.

모든 번호를 통틀어 얼마 되지 않는 ‘소모성’ 넘버스 아이템.

하나 소모성 아이템이라고 해도 ‘무명신상’이나 ‘용혈주’와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광범위 치유를 해주거나, 복용 시 얻을 수 있는 강력한 전투 버프 같은 건 완전히 ‘일회성’이지만, 적어도 얘는 그렇지 않으니까.

‘어찌 보면 7,777번 가르파스 목걸이랑 비슷하지.’

마카이로의 보관함은 사용 시 무작위 아이템, 혹은 영구적인 버프를 얻을 수 있다.

뭐, 정말 낮은 확률로 ‘꽝’이 나올 때도 있지만.

아무튼.

“이번 탐사에서는 예기치 않게 귀한 물건을 여럿 보는군요.”

수많은 값비싼 부산물들부터 시작해 공성 살육자, 그리고 이번에 얻게 된 ‘미스터리 박스’까지.

정상적인 미궁 탐사라면 하나만 얻어도 운이 좋았다 할 것들을 계속해서 획득하고 있다.

이래서 사람이 미지의 지역을 탐험해야 하는 건가?

“나오는 게 무작위라니 이거 엄청 재밌을 거 같지 않소이까! 얼른 주사위부터 굴려봅시다!”

다만 좀 아쉬운 부분은 이백호 팀과 같이 다니는 탓에 전리품이 나올 때마다 경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클랜을 이끌고 왔으면 그냥 내 마음대로 분배를 했을 텐데.

“주사위는 오랜만에 굴리는 거라 재밌긴 하네.”

“백호… 이번엔 각자 돌리는 거로 하면 어떻소? 나도 굴려보고 싶은데……. 심지어 백호는 운도 나쁘지 않소이까.”

“……내가? 내가 운이 나쁘다고?”

“…….”

“됐어. 이번엔 각자 돌리는 거로 하지 뭐.”

그렇게 상황 정리가 끝나고 시간 낭비할 것 없이 빠르게 주사위를 굴렸다.

그리고…….

“푸하하하핫! 낮은 숫자로 했으면 둘이 1등, 2등을 나눠가졌겠구려!”

나와 이백호의 숫자는 5였다.

아, 참고로 둘의 숫자 합을 합쳐서.

“합이 11……. 제, 제가 이겼습니다!”

여하튼 결과만 말하자면, 주사위에서는 GM이 승리를 하며 ‘미스터리 박스’를 겟.

“뭐 해? 바로 안 까봐?”

“지, 지금 여기서 말입니까……?”

“와, 매너 없는 거 보소? 그럼 안 까려고 했어?”

“하하핫! 하벨리온 경! 그러지 말고 지금 바로 열어보시오. 이런 즐거움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소?”

GM은 혼자 있을 때 까보고 싶은 눈치였으나, 다른 사람들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열어보겠습니다.”

어딘가 긴장한 눈치로 상자에 손을 대는 GM.

길게 손을 올리고 있자 이내 손과 맞닿은 검은색 정육면체 상자가 천천히 허공에 떠오른다.

「유르벤 하벨리온이 No.777 마카이로의 보관함을 사용하였습니다.」

허공에 떠오른 채로 육면체의 한쪽 면씩 펼쳐지듯 벗겨지는 상자.

솨아아아아아.

머지않아 그 안에 감춰져 있던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갑옷?”

갑옷이 나왔다.

“이런 넘버스 아이템이 있었소이까……?”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

「No.???? 아이기스의 용갑이 생성됩니다.」

***

갑옷의 외형은 무척이나 평범했다.

화려하다란 수식어가 절대 어울리지 않을 몸통만 뒤덮는 조끼 형태의 갑옷.

철보다 칙칙한 잿빛에 가까운 색상이며, 보석이나 각인, 문양 같은 장식은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

한데, 그래서일까……?

‘……무슨 세트 아이템 같네.’

No.3 아이기스의 장벽과 뭔가 깔맞춤이다.

실제로 옆에 갖다대 보니 색도 아예 일치하는 것 같고…….

‘안 그래도 갑옷을 바꿀 때가 됐긴 했는데…….’

현재 나는 라이티늄제 흉갑을 입고 있다.

당장은 깡스탯만으로도 모자람이 없어서 새로 돈을 줘서 맞추기보다는 이후 적당한 게 나올 때까지 버텨보자는 마인드였다.

하지만…….

츄릅.

왠지 모르게 침이 흘러나온다.

저 갑옷의 정체에 대해서 아직 아는 게 아무것도 없긴 하지만,

그도 그렇잖아?

‘미스터리 박스’에서 나온 물건이 몇 백만 스톤짜리 라이티늄제 흉갑보다 구릴 리는 없—.

“왜, 왜 그렇게 쳐다보시는지요……?”

거, 쳐다볼 수도 있지.

“한번 입어봐도 되냐?”

“……예?”

“어차피 나 말고는 갑옷을 입을 사람도 없지 않나.”

“아, 아뇨? 저도 플라이어 씨의 얘기를 듣고나서 비상 시를 대비한 갑옷 하나가 있었으면—.”

어허, 무슨 마법사가 중갑옷을 입으려고?

응당 마법사면 천갑옷 같은 거나 입어야지.

“그러니까 한번 입어만 보겠단 거다. 누가 뺏어간다 했나?”

가까이 다가가서 눈알을 부라리자 GM이 내키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갑옷에 대해서도 실험을 해봐야 할 거 아니냐.”

“예… 그럼… 입어보기만 하시는 겁니다……?”

“내가 거짓말 하는 거 봤나?”

얼핏 보면 빼앗아가는 거 같지만, 사실 이건 GM에게도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니다.

애초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갑옷 아니던가.

누군가 직접 착용해보며 능력을 시험해 볼 필요가 있으며…….

‘당장 내 전투력이 올라가면 팀에도 이득이지?’

중갑주를 입을 포지션은 아우레스뿐인데, 얘는 스킬 매커니즘상 갑옷을 착용하지 못한다.

쉽게 말해, 임자가 나밖에 없는 것인데…….

「캐릭터가No.???? 아이기스의 용갑을 착용했습니다.」

오, 일단 착용감은 죽이는데?

「종합 아이템 레벨이 +13,600 상승합니다.」

기분탓인진 몰라도 뭔가 훨씬 세진 느낌도 들고.

「아이기스의 유물을 두 개 이상 착용했습니다.」

「영혼의 조각이 공명합니다. (2/3)」

「모든 재생 속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장비가 착용자에게 귀속되었습니다.」

‘……어?’

뭐지 이건?

갑자기 갑옷이 피부에 딱 달라붙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나쁘지 않군.”

여하튼, 처음 입는 장비임에도 전혀 낯설지가 않다.

딱 입자마자 내 몸처럼 느껴졌다 해야 하나?

“와, 이 남작님은 뭔지도 모르는 걸 진짜 그냥 바로 입네. 저주 템이면 어쩌려고?”

체조를 하듯 몸을 풀고 있자니 이백호가 나를 보며 어이없다는 시선을 보내온다.

근데 나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야 어떤 불안이나 의심도 없었거든. 딱 보자마자 내 거 같았달까.

“아무튼, 장비 성능표 뽑는 건 나중에 혼자 알아서 하시고……. 일단은 마저 움직이죠?”

“알겠다.”

맘 같아선 새 갑옷의 성능을 실험해보고 싶었지만, 나 하나 때문에 모두가 시간 낭비를 하게끔 하는 건 민폐일 터.

“자자, 어서 갑시다. 만약 시간 제한 기믹 같은 게 있으면 골치 아프니까.”

갑옷에 대해서는 차차 조사를 해보기로 하며, 마지막으로 방을 한 번 더 수색했다.

다만 역시나 별다른 건 찾아낼 수 없었고, 이후엔 올라왔던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터벅, 터벅.

올라올 때는 몇 시간이나 걸었던 계단이지만, 내려가는 것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내 마지막 계단을 밟고 내려가자 이전과 비슷한 형태의 비좁은 통로 하나가 나타났고, 통로 끝에는 황금색 석문 하나가 위치해 있었다.

“……황금 유적?”

GM 역시 황금색 석문을 보고서 이곳의 정체를 깨달은 모양.

“황금 유적이 대체 왜 여기에…….”

“뭘 놀라고 있어? 지금까지의 여정 중에 납득되는 부분이 하나라도 있었던 것처럼.”

“그건… 그렇습니다마는.”

“야, 난 이 너머에 갑자기 다른 지역이 나오더라도 안 놀랄 자신 있어. 그게 탐험가라는 거니까.”

이백호가 그리 말하며 선두로 나와 천천히 문을 밀었다.

그리고…….

“옴마?”

이해 못할 탄성을 내뱉으며 멈칫한다.

뭐 때문에 그러는지 확인하려 다가간 나 역시 마찬가지로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이백호의 말처럼, 갑자기 다른 지역이 펼쳐져 있던 것은 아니지만…….

“왜 전부 다 열려 있지?”

석문 너머엔 공략할 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

‘황금 유적’의 공략 순서는 몹시 간단하다.

울창한 숲에서 시작해 미션 몇 가지를 깨다보면 사원이 나타나고, 그 사원 안으로 진입 시 좀 전에 우리가 있었던 계단 파트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다음이 여기지.’

지금처럼 황금색 석문을 열고 메인 홀로 들어가고 나면 본격적인 공략이 시작된다.

저층에 속하는 4계층 균열인 만큼 공략 자체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입구 기준으로 좌우에 나 있는 석문으로 들어가 장치를 활성화 시키면 메인 홀에 수호자가 등장하고, 추가로 굳게 닫혀 있던 보물방 하나가 열리는 형식인데…….

‘보물방까지 포함해서 이미 다 열려 있네.’

심지어 석문을 열고 들어오면 천장에서 황금색 빛이 뿌려지며 주변이 환히 밝아져야 하는데, 그러한 이펙트도 벌어지지 않았다.

또한…….

“와… 무슨 먼지가…….”

“무슨 폐가 탐험이라도 하는 기분이구려!”

유적 전체에 먼지가 수북히 쌓여 있으며, 금색으로 반짝여야 할 벽면은 여기저기 파이고 부서진 상태로 굴러다니고 있다.

“일단 시야부터 좀 밝혀봐. 이거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네.”

이백호의 요청에 GM이 빛 구체를 여러 개 소환해 허공에 띄웠고, 그 상태로 우리는 조심스레 주변을 탐색했다.

“역시 보물방은 이미 싹 털렸네.”

첫 번째로 수색에 나선 건 균열 수호자인 칼피온을 처치 시 오픈되는 보물방이었다.

원래 여기에는 세 개의 넘버스 아이템이 봉인되어 있으며, 균열 클리어 과정에서 얻은 열쇠를 이용해 그중 하나를 선택해 고를 수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도착했을 땐 텅 비어 있었다.

“뱀방이랑 미라방 중에 어디부터 볼까요?”

따라서 다음 수색 코스는 좌문과 우문이었는데, 뱀 형태의 중간 보스가 등장하는 좌문부터 먼저 수색에 나섰다.

‘… 피스들까지 싹 털려있네.’

사자 벽화 아래를 누르면 나오는 ‘황금 구슬’부터 함정방에 숨겨진 ‘독수리 촛대’ 등등.

미로처럼 복잡한 길목을 돌아다니며 하나하나 다 확인을 했지만 수확은 없었다.

레버 형태의 장치가 있는 중간 보스방도 비슷했고.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없으니까 뭔가 으스스한 기분이네요…….”

레버 장치는 돌아가 있으며, 중간 보스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또한 여기에도 있는  피스는 이미 털린 상태.

애석하게도 이는 미라방에 속하는 우측 문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이러면 수색해 볼 곳은 다 한 거 같은데…….”

“하핫! 이것 참 난감하구려!”

유적 전체를 뒤져봤음에도 딱히 나오는 게 없다.

그리고 이는 아주 큰 문제였다.

그야 뭔가 나오기라도 해야 공략을 하든가 할 거 아닌가.

원래 게임도 그렇다.

정말 진행 막히는 구간은 어려운 시련을 마주했을 때가 아니다.

오히려 이제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을 때.

그때 게이머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며 허송세월 시간을 낭비한다.

바로 지금처럼.

“저는… 계단을 한번 조사해보겠습니다…….”

“저도요. 벽들 사이에 숨겨진 통로 같은 게 있나 한번 쓱 둘러보고 올게요.”

그래도 탑급 탐험가들인 만큼 의욕을 잃지 않고 각자 할 일을 찾아나섰지만, 크게 유의미하진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시간이 흐르며 정말로 더 이상 수색할 곳도 아예 사라졌고, 그로 인해 일행들 사이에서 초조함과 불안이 번지기 시작했다.

“……평생 여기에 갇혀 지내야 하는 건 아니겠죠?”

“어쩌면 우리를 굶겨 죽이려는 거였을 수도.”

“이런 식으로 사람을 미치게 할 줄은 몰랐는데…….”

다들 한마디씩 나약한 말을 뱉었고, 의외로 이들 중에서 가장 극심한 반응을 보인 건 이백호였다.

“씨발, 다들 뭐 하고 있어? 쉬고 있을 시간에 나갈 길이라도 찾아봐야지? 어?”

날카로운 눈빛과 목소리로 사람들을 쏘아붙이는 이백호.

‘이 새끼는 멘탈이 뭐 이리 약해?’

그래도 나한테까지는 저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단 게 다행이었지만…….

그것도 며칠이 더 지나자 끝이었다.

“남작님, 갑옷 줘봐요.”

“…뭐?”

“그도 그럴 게, 그 갑옷 말고는 없잖아요. 여기서 얻은 물건이니, 어쩌면 그 갑옷에 탈출 방법이 숨겨져 있을 수도 있잖아?”

태도는 좀 기분 나쁘긴 했지만…….

감정을 싹 빼고 본다면.

“…틀린 말은 아니군.”

나름 그럴듯하게 들리는 얘기였다.

25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90화 25

690화 미스터리 (4)

이백호의 제안 이후, 본격적으로 이번에 얻은 갑옷에 관하여 연구를 시작했다.

고위 마법사 둘.

게이머 출신 이백호와 나.

그리고 상위 탐험가인 현지인 둘.

미스터리 박스에서 튀어나온 의문의 갑옷이었으나, 여러 명이 달라붙어 연구를 시작하자 금방 성과가 났다.

그리고 그 첫 번째를 말해보자면.

“넘버스 아이템인 건 확실해보입니다.”

“……넘버스 아이템이라고요? 저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들어본 적 없는 건 나도 매한가지네만, 놀랍게도 넘버스 아이템이란 것엔 의심의 여지가 없네. 애초에 분류하는 방식 자체가 특정 마력 반응을 보이느냐 아니냐였으니.”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사실 미궁의 역사를 살펴보면 처음부터 모든 번호의 보구들이 존재했던 건 아닙니다. 애초에 ‘번호’가 없던 시절도 있었고요.”

“오! 번호가 없던 시절? 그런 시절도 있었소이까?”

“예. 번호가 생겨난 것부터가 한 감정사의 의해 1만 개의 보구들이 책 하나로 편찬된 이후니까요.”

“어쩌면 이 갑옷은 미궁이 생겨난 이후로부터 바로 지금까지 어느 탐험가도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넘버스 아이템일지도 모르네.”

“…새로운 넘버스요?”

“저는 이 갑옷과 비슷한 케이스가 더 있을 거라고 봅니다. 따라서 ‘노 넘버스’, 아니면 ‘미스터리 넘버스’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은데…….”

GM이 고유 명사에 대한 욕심을 내기 시작했지만, 아쉽게도 이미 이름을 선점한 사람이 있었다.

“정식 명칭은 시크릿 넘버스다.”

“예……?”

“아루아 레이븐이 먼저 발견하고 이름을 붙였지.”

암, 기껏 먼저 찾아낸 걸 남한테 뺏기면 속상할 테니까.

내가 딱 잘라 말하자, GM은 서운한 티를 내기보단 학구열적인 눈빛을 띠었다.

“혹시… 이런 보구가 더 있었던 겁니까?”

그 말에 잠시 고민이 됐지만, 현 상황을 헤쳐나갈 단서가 될 수 있는 정보기에 솔직히 답했다.

“딱 하나, 미궁에서 발견한 적이 있다.”

“볼 수 있을는지요?”

“아쉽게도 현재 내 수중에 있지 않아서.”

“그, 그렇군요…….”

다들 그 아이템이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눈치였고, 나는 지하 1층 탐사에서 얻은 것이라고만 답해줬다.

“처음 개방된 지역에서 나온 ‘시크릿 넘버스’라……. 어쩌면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넘버스 아이템이 훨씬 더 많이 존재할지도 모르겠군요.”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성벽 바깥도 그렇고, 얼마 전에 갔던 지하 1층도 그렇고. 그 오랜 세월 동안 탐험가의 발길이 닿지 못한 곳이 요 몇 년 사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었으니까.

아무튼, 시크릿 넘버스라는 정보 외에도 알아낸 것들을 정리하자면.

“와, 귀속 템이었어?”

이 갑옷은 이미 나에게 귀속됐다.

“귀, 귀속 각인이라니… 그, 그럼 못 돌려받는 거지 않습니까!”

이 사실을 알게 된 GM이 한바탕 절규하는 일이 있긴 했지만, 그래서 뭐 어쩌겠는가.

그냥 코나 후비적거리면서 못 들은 척했다.

“아무튼, 그래서 설명이나 해봐. 귀속 템인 거… 확실한 거야?”

“예? 아, 예… 타인이 입으려 할 때 형상 조절이 작동하지 않고, 만약 맞지 않는 걸 억지로 입는다 한들 아무런 효능도 없는 평범한 갑옷으로 변해버립니다. 전형적인 귀속 각인의 패턴인데…….”

“아무래도 저번에 자네와 내가 말했던 애매한 파동이 바로 그 주인 각인과 관련된 회로였나보군.”

“예,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참고로 귀속 외에도 ‘파괴 불가’ 옵션이 붙어 있는 상태였고, 직접적으로 착용자의 스펙에 영향을 주는 옵션도 있었다.

‘모든 재생 속도 증가’.

GM이 이름 붙인 이 옵션이야말로 이 갑옷의 꽃이었다.

“굉장히 희귀한 특성이로군요. 영혼력이나 마력, 신성력 같은 특정 자원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재생’이 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특성이라니.”

MP처럼 사용되는 자원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재생 속도 증가’ 옵션은 ‘자연 재생’에도 영향을 끼치며, 만약 내가 다른 스킬을 먹어 특수한 자원을 사용하게 되더라도 특성의 덕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하는데…….

“근데 명색이 넘버스 아이템이면 적당한 이름도 하나 붙여야 하는 거 아닌가?”

이백호의 말처럼 그냥 갑옷, 갑옷 하고 부를 수도 없기에 이름도 하나 붙여줬다.

“오! 그럼 내가 멋진 거로 하나 지어봐도—.”

“아이기스의 용갑.”

“……응?”

“아이기스의 용갑이다. 이 갑옷의 이름은 이제부터.”

내가 생각한 이름을 말하자 이백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 이름 괜찮은데요? 색깔도 그렇고, 이러니까 무슨 세트 아이템 같네.”

이백호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반면 옆에 있던 제이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이기스는 알겠는데, 왜 용갑이에요? 용가죽을 쓰거나 용 심장이 들어간 것도 아닌데.”

“어…….”

툭 던진 거치고는 꽤나 난감한 질문이었다.

다만 그래도 솔직히 답을 해보자면.

“그냥 갑주라고만 하면 조금 심심하니까……?”

“아, 그렇구나…….”

이번에도 제이나는 이해하기 어렵단 표정을 지은 반면, 남자인 일행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들은 모두 갑주나 철갑보다는 용갑 쪽이 훨씬 더 마음에 드는 듯했다.

‘하여간, 여자들은 남자 마음을 하나도 모른다니까.’

어찌 됐든, 그렇게 ‘아이기스의 용갑’이라는 이름이 완성됐고, 신기하게도 이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성과가 나왔다.

“……참 공교롭군요. 혹시나 해서 ‘아이기스의 장벽’과 대조 검증을 해봤는데, 정말로 공명 반응이 일어날 줄이야.”

“쉽게 말해, 진짜 방패랑 세트 아이템이었다는 거네?”

“예. 아이기스의 용갑, 그리고 장벽까지… 둘 다 공명보구였습니다.”

공명 보구는 함께 장착했을 때 추가 효과가 생기는 세트 아이템을 뜻한다.

예를 들면, 예전에 곰아저씨가 사용했던 No. 7611 ‘시체술사의 기만’가 대표적이다.

No. 7612 ‘시체술사의 오만’이란 이름의 해골 모양 벨트를 동시에 착용 시 ‘공명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둘 중 하나의 사용 효과가 발동됐을 때 추가로 피가 50% 회복되는 효과였지.’

여하튼, 꼬리에 꼬리를 물듯 세트 아이템이라는 걸 알아내게 되면서 기존에 있었던 정보도 갱신됐다.

“그럼 이 갑옷이랑 방패는 공명 효과가 뭔데?”

“음… 이제 보니 재생 효과가 바로 공명 효과인 듯합니다.”

모든 재생 속도 상승 옵션은 아이기스 세트의 공명 효과였다.

“오, 그럼 패시브 효과는 따로 있다는 거네?”

“예……. 상시 적용 이능 하나와 사용 이능 하나가 있는 거로 보입니다.”

풀어 말하자면 갑옷 하나가 자체적으로 보유 중인 옵션은 패시브 하나, 액티브 하나가 있다는 뜻인데…….

액티브 효과 자체는 여러 실험을 통해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유르벤 하벨리온이 5등급 공격 마법 [뇌창]을 시전했습니다.」

효과는 참 간단했다.

「유르벤 하벨리온이 4등급 공격 마법 [폭풍쇄도]를 시전했습니다.」

일단 ‘갑옷’에 달린 옵션답게 방어 계열이었다.

「유르벤 하벨리온이 4등급 공격 마법 [빙검]을 시전했…….」

그도 그럴 게…….

「캐릭터가 [아이기스의 용갑]을 사용하였습니다.」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란 말도 있잖아?

***

「누적된 피해를 반사합니다.」

***

용갑의 사용 효과는 어떤 면에서 ‘가챠본’의 정수와 비슷하다.

‘반격’이라는 매커니즘.

그리고…….

솨아아아아아-!

반격을 위한 일회용 스켈레톤이 생성되던 것처럼 내 뒤에서 일종의 소환수가 나타난다는 것.

이 두 특징들은 ‘가챠본’과 유사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면.

“…뭐 이리 커?”

스켈레톤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위압적인 스케일.

“……소환을 하는 이능인 걸까요?”

“어… 근데 움직이고 있소만?”

영혼의 형태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이킹 전사가 대검을 휘두른다.

실험을 위해 나를 공격했던 GM을 향해.

“씨발!! 막아!”

이백호의 외침과 함께 파멸할배가 마력 방벽을 소환해 검의 궤도를 가로막는다.

콰지직-!

다만 황급히 펼친 마법인 만큼 대검을 막아낼 정도로 견고하지는 못했다.

“나오시오!”

이에 렉 아우레스 다급하게 앞으로 나가 방패를 들었고…….

“커헉-!”

거대 방패로 대검을 막아낸 렉 아우레스가 피를 토해내며 상황은 마무리.

댕그랑-!

아우레스가 들고 다니던 거대 방패가 깊게 패인 채로 바닥에 떨어지고, 대검을 휘두른 영혼 거인은 할 일이 모두 끝났다는 듯 스르륵 사라진다.

“괘, 괜찮아요?”

힐러인 제이나가 렉 아우레스의 상세를 보기 위해 달려나가고, 그제서야 죽을 뻔했다는 실감이 났는지 뒤로 주저앉는 GM.

“와아… 장난 아니네 이거.”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이백호가 눈을 빛내며 관찰한다.

“처맞는 게 발동 조건인 건 확실한데, 그럼 입힌 대미지에 비례해서 반사하는 건가? 아니면 비례 대미지가 아니라 그냥 일정량 축적되면 발동할 수 있는 식?”

“…….”

“음, 어느 쪽인지에 따라서 공략 방법이 조금 달라지겠네. 뭐, 그래도 회피 불가 타격은 아니니까 크게 까다로울 거 같진 않지만.”

하, 이래서 나중에 따로 혼자서 연구하려 했던 건데.

“야야! 다들 뭐 해? 아무도 안 다쳤잖아! 호들갑 그만 떨고 연구나 다시 하자.”

“응? 백호? 못 봤소? 방금 내 입에서 피가—.”

“근데 이제 안 나잖아.”

“…….”

이후 이백호의 적극적인 진행에 의해 다시금 연구가 재개됐고, 액티브 효과에 대해서도 샅샅이 조사했다.

“처맞다보면 스택이 쌓이고, 그 스택에 비례해서 단계별로 물리 대미지를 입히는 매커니즘.”

“쿨타임은 5분밖에 안 되고, 딱히 소모되는 자원도 없음. 그런데 스택 4단계만 채워도 마력 장벽 스무 개를 종잇장처럼 뚫어버리는 딜이 나온다?”

“아, 그래그래. 파괴 불가는 넘버스 아이템이니까 그렇다 쳐.”

“근데 세트 템이라 같이 끼면 재생 속도가 존나 상승하고, 심지어 아직 알아내지 못한 패시브 효과도 하나 더 남아 있다?”

어, 음…….

정리하자면 대충 그런 느낌이긴 한데…….

“씨바, 대체 뭔데 이 사기 갑옷은?”

“…….”

할 말이 없다.

그야 나도 동의하는 부분이거든.

패시브가 뭔지에 따라서 좀 달라지겠지만, 액티브 하나만 보면 싱글 넘버스급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달까.

만약 패시브도 싱글 넘버스 급이라고 하면… 진짜 싱글 넘버스를 새로 얻었다고 봐도 무방—.

“내, 내 건데… 원래…….”

GM의 중얼거림을 듣고 있자니 양심이 쿡쿡 찔려오지만, 근데 그래서 뭐 어쩌겠는가.

이제 와서 돌려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유르벤 하벨리온, 징징거리는 것 좀 그만해라.”

“하,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 내가 귀속 시키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

“아니면 우리 인연이 이번 탐사 한 번으로 끝날 거라 생각하는 거냐?”

“그, 그런 건 아닙니다마는…….”

“그럼 내가 강해지면 너한테도 좋은 일인 거 아니냐. 내가 은혜를 잊을 사람도 아니고.”

논리적으로 설득을 하자 GM도 할 말이 없어졌는지 입을 꾹 다문다.

조금 시무룩해진 거 같긴 하지만, 이거야 뭐 시간이 해결해 줄 터.

“와, 남작님 가스라이팅 오지는데?”

이백호의 말은 그냥 한 귀로 흘리며 다시금 장비 연구를 시작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패시브부터 제대로 확인을 하자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용갑의 패시브 효과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하… 몬스터라도 있으면 뭔가 좀 알아낼 수 있을 거 같은데.”

“마물 없이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본 거 같습니다.”

“정말 특수한 조건이나 알기 어려운 효과인 게 아니라면, 마물이 있어야지만 알아낼 수 있겠군.”

따라서 패시브를 알아내는 건 이쯤에서 포기.

다만 일이 이렇게 끝나자 상황이 또 곤란해졌다.

애초에 용갑 연구를 시작했던 것 자체가 이곳에서 탈출할 실마리라도 찾기 위함이었으니까.

“그럼 다시 제자리네?”

허탈한 심정을 고스란히 내비치는 이백호의 감정이 공기를 타고 전염되듯 모두에게 퍼져나간다.

거, 이럴수록 티를 안 내야 되는 게 리더구만.

“다시 천천히 해볼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지.”

이후 나는 어떻게든 격려를 하며 다시금 황금 유적 수색에 나섰다.

모든 통로들을 한 번 더 샅샅이 뒤졌고, 벽을 부수는 등 물리적인 수단도 동원했다.

또한, 입구의 계단을 역으로 올라가며 다시금 황금 유적의 히든피스인 마카이로의 석실에 방문하는 일도 있었는데…….

“…어?”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일까.

“…이야, 이건 좀 소름돋네.”

관 안에 있어야 할 마카이로의 시체가 사라졌다.


29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91화 29

691화 미스터리 (5)

마카이로의 석실.

무한의 계단처럼 보이는 계단을 역으로 계속해서 올라가다 보면 등장하는 숨겨진 공간이자, 미스터리 박스를 손에 넣고 새로운 갑옷을 얻게 된 장소.

분명 마지막에 왔을 때 우리는 당황했었다.

중간 보스인 ‘마카이로’가 이미 죽어서 백골이 된 상태로 관짝에 있었기 때문인데…….

“…….”

“…….”

다시금 석실에 방문한 우리는 또 다른 의미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이놈이 어디로 사라졌을까. 시체가 걸어서 움직였을 리도 없는데.”

관짝을 열어보니 시체가 사라졌다.

“야, 아우레스. 저번에 마지막으로 혼자 조사하러 왔던 게 너였지?”

“그, 그렇소만……?”

“그때는 있었어? 관짝 안에.”

이백호가 예리한 눈빛을 뿌리며 묻자, 아우레스가 시선을 피하며 말꼬리를 흐린다.

“그…….”

“그 뭐? 확실하게 말을 해. 있었냐고 그때는.”

“…모르겠소.”

“모르겠다니? 그게 무슨 뜻인데?”

“그때 왔을 때는 저 석관까지는 열어서 확인을 해보지 못해서…….”

“야, 장난치냐? 기껏 석실까지 와서 관짝도 안 열어보고 다시 돌아갔다고……? 너 설마 석실까지 가지도 않고 농땡이 피우다 돌아온 건 아니지?”

심문하는 듯한 이백호의 말에 아우레스가 격하게 손사래치며 부정했다.

“그럴 리가 있소! 분명 제대로 갔다 왔었단 말이오! 다리가 아파서 조, 조금 천천히 올라가긴 했지만……!”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실수잖아요.”

한데 옆에 있던 제이나가 두둔의 말을 해오자 힘이 됐을까.

아우레스도 목소리도 이전보다 높아졌다.

“애, 애초에! 나한테만 제일 귀찮은 걸 시켰던 걸 모를 거 같소! 그래도 군말 않고 열심히 갔는데 이렇게 말하면 너무 섭섭하올시다……!”

적반하장까지는 아니지만, 듣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복장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해도 가장 단순한 조사여서 맡긴 건데, 그조차도 제대로 못한 게 이놈이었으니까.

“하! 섭섭해? 야, 진짜 섭섭하게 만들어줘?”

“그만하게. 아우레스 군을 혼자 보낸 건 우리였지 않은가. 혼자서는 이런 간단한 일처리도 제대로 하지 못할 걸 예상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 우리의 실책일세.”

파멸할배의 말에 아우레스는 이게 비난의 말인지 비호의 말인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루, 루인제네스 공 말대로요!”

녀석은 아무래도 저 말을 비호로 받아들이기로 한 모양.

근데 이 모습을 보니 괜히 힘이 빠진다.

파멸할배의 말대로 얘한테 그런 임무를 맡긴 우리가 잘못한 느낌이라 해야 하나?

실제로 이백호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였는지 한숨을 푹 내쉴 뿐, 질책의 말을 더 쏟아내진 않았다.

“하… 그래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대체 어쩌다가 시체가 사라졌을까요……?”

삼천포로 빠졌던 얘기가 본론으로 돌아와 각자 의견을 꺼낸다.

“해석의 여지가 있겠지만, 저는 다른 누군가가 이 유적 안에 숨어 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꼭 한 명일 거라는 보장도 없죠.”

“예. 또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높은 수준의 은신 능력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샅샅이 뒤졌음에도 머리카락 한 올조차 찾지 못하였으니.”

“……오! 듣고 보니 어쩌면 대머리일 수도 있겠구려!”

누군가 유적 안에 숨어 있을 수도 있다는 GM의 추측에 이백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여기에 누가 숨어 있는 걸 수도 있겠네.”

“예, 아무래도 그런 가능성을 배제할—.”

“뭐, 우리 중에 뭔가 꿍꿍이가 있는 놈이 섞여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얘도 진짜 한결같다.

일단 동료부터 의심을 하고 보는 게 버릇인가?

‘저 정도면 거의 병인데…….’

물론 이백호의 아픈 과거를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는 만큼, 아예 이해하지 못할 행동은 아니다.

하지만…….

“동료를 의심하는 건 그만둬라. 그건 정말 최후의 최후까지 아껴둬야 하는 거니까.”

“…내가 뭐랬나? 그냥 그럴 수도 있다고 한 거지. 가능성은 열어둬야 하잖아요?”

타이르듯 말하자 금쪽이처럼 틱틱대는 이백호.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주제를 바꾸었다.

그야 이제는 들어봐야 할 거 같거든.

“됐고, 제대로 말이나 해봐라. 이번에는 얘기를 돌리거나 할 생각은 말고.”

“제가 언제 그랬다고요?”

언제 그러긴, 여태 계속 그랬구만.

“성벽 밖으로 나온 이유가 뭐냐?”

이백호가 동료들을 이끌고 어째서 성벽 밖으로 나왔는가.

이에 대해 나는 여러 번 돌려 물었지만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게 지금 상황이랑 무슨 관련이 있는데요?”

“당연히 있다. 암만 봐도 그동안 겪은 일들이 나와 하벨리온을 노린 것처럼은 보이지 않으니까.”

누군가 도시로 돌아가는 마법진을 부수고 자살한 것도.

마법진 복구를 위한 재료를 수급하려 돌아다니던 중에 의문의 사내가 우리를 그 차원 비석으로 안내했던 것도.

그리고 지금 이 황금 유적에 갇힌 것까지도.

“수작을 부린 정체불명의 배후가 누구든, 나는 너희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

“그러니까 이제는 속 시원하게 말해봐라. 너희 목적이 뭐였는지를 알아야, 상대방의 목적이 뭔지 유추라도 해볼 수 있을 테니까.”

단호하게 말하자 이백호가 내 눈치를 싹 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별 대단한 걸 하려고 나온 건 아니에요. 단지 남작님이 말했던 그 ‘잿빛 세계’에 대해서 조금 더 조사하고 싶은 게 있었을 뿐.”

“조사? 정확히 말해라.”

“정말 그 잿빛 세계가 확장되고 있는 것인지, 그걸 제대로 알아보려 했어요.”

“그건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알 수 있는 부분 아니냐?”

“아뇨. 딱히 그렇지는 않아요. 천천히 다가오는 듯하다가도 어느 날 다시 가보면 다시 멀어져 있고 그러거든요. 마치 밀물 썰물처럼.”

“그래서 결론이 어떻게 났지?”

“아직 결론을 못 내렸어요. 정확하게 실험을 해보고 싶어서 여러곳에 표시 정도만 하고 돌아가려던 참이었으니까.”

돌아가려던 참이었다라…….

그 말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정체불명의 누군가는 이백호가 성벽 밖에서 하려는 무언가를 방해하려고 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높은 확률로 그놈의 목적은.

[하, 조졌네 이거. 할배 말로는 1년은 족히 걸릴 거라던데.]

이백호가 도시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

그래서 그자는 귀환 마법진을 파괴하고 증거를 인멸했다.

‘그런데 때마침 나와 GM도 밖에 나와 있던 터라 합류하게 된 거지.’

마법진을 이른 시일 내에 고칠 수 있는 GM의 등장으로 누군가의 계획은 틀어졌고, 그래서 놈은 우리를 ‘차원 비석’으로 유인해 이곳에 가둬버렸다.

‘……라고 한다면 비약이려나?’

음, 글쎄… 비약까지는 아닌 거 같지만, 무조건 이거다라고 하기에는 근거가 빈약하다.

따라서 좀 더 질문을 이어나가기로 했다.

예를 들자면.

“네가 예전에 말했던 그 1년 뒤.”

어쩌면 현 상황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할 그것.

“그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냐?”

“…….”

“말해봐라. 그걸 알아야 마법진을 부순 놈이 누군지 조금이라도 유추할 수 있을 테니까.”

“하아… 진짜 머리 아파 죽겠네.”

이백호가 이마를 손으로 매만지며 고개를 살살 내젓는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계속 숨기는 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최종 판단했을까.

“한 번만 말할 거니까 잘 들어요.”

이내 이백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전쟁요.”

“……전쟁?”

“노아르크 쪽에서 하고 있는 준비만 끝나면, 황도 카르논으로 진격해 라프도니아 왕을 죽일 거예요.”

벌써부터 피냄새가 나는 것 같은 건 착각일까.

***

노아르크에서 왕을 죽여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리고 아마 이백호는 이 계획에 밀접한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겠지. 이 새끼 스킬 한 방이면 왕궁의 반을 날려 버릴 수 있으니까.’

다만 문제는 이렇게 되면 이백호를 막으려 들 만한 인물이 너무 많아진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특정 짓기가 어렵달까.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왕가에서 정보를 얻고 손을 썼을 가능성이 제일 높아보이긴 하는데…….’

심지어 이런 식의 음흉한 일처리는 왕가가 잘하는 수법이기도 하다.

“근데 남작님, 남작님 말처럼 정말 우리를 노린 거라면, 그럼 더 얘기가 좆같아지는 건 알죠?”

“…무슨 뜻이지?”

“우리라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서 온 게 아니라 이 말이죠. 우린 노아르크 성주한테도 밖에 나온다고 안 말했어요.”

“그래서?”

“우리 중에 배신자가 정말 있었다는 거죠. 왕가에 아예 붙어서 수작을 부렸든, 아니면 우리가 나간다는 정보만 흘렸든.”

이백호가 습관처럼 호랑이 눈깔을 뜨며 동료들을 쓱 훑자, 이번에도 아우레스만 멈칫하며 어깨를 움추린다.

‘얘는 전사란 놈이 뭐 이렇게 기개가 없어?’

그런 생각을 하며 보고 있자니 제이나가 조용히 속삭인다.

“예전에 죽을 만큼 맞은 적 있어서 저래요.”

“이백호한테?”

“그럼 누구한테겠어요?”

아하.

어쩐지 다른 애들은 눈을 부라려도 그냥 그러려니 하던데, 얘만 유독 저러더라.

터벅, 터벅.

이내 이백호가 천천히 걸어나와 일행 중심부에 멈춰섰다.

“아무튼, 그래서 이제야 말로 좀 검증을 해봐야 할 거 같은데. 다들 어떻게 생각해?”

“전 상관없어요.”

“나도! 나도 상관없소이다!”

“이쯤에서 한번 짚고 넘어가는 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겠군.”

이백호의 제안에 모두가 빼지 않고 동의했다.

정말로 배신자가 있다면 나오기 어려운 반응.

다만 그래도 제대로 확인을 해봐야한다고 판단을 끝마쳤을까?

“자, 그럼 동의도 얻었겠다…….”

이내 이백호가 아공간에서 물건 하나를 꺼낸다.

No.7234 어긋난 신뢰.

나도 지금까지 몇 번이나 사용했던 바로 그것.

근데 얘는 거짓말 탐지도 가능하면서 이런 거까지 항상 들고 다니는 건가?

“아무래도 내 이능보다는 이쪽이 더 판정이 좋아서 말이지. 이거로 할 건데 다들 괜찮은 거 맞지?”

어긋난 신뢰까지 꺼낸 이백호의 강수에도 동료들 반응은 평온했다.

후우우웅-!

이내 전원 버튼을 누루자 원판에 박힌 시침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제이나 플라이어, 너는 우리가 밖에 나온다는 정보를 누군가에게 전한 적 있나?”

“아뇨, 없어요.”

이백호가 한 명씩 돌아가며 질문을 날린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질문을 받고서 대답을 하지 못하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만족을 하지 못했을까?

“렉 아우레스, 너는 우리가 이곳에 갇히게 된 거에 조금도 연관이 없나?”

빠져나갈 구석이 아예 없도록 아까와 질문을 바꿔서 동료들에게 묻는다.

하나 몇 번을 반복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아니오, 나는 그런 적 없소.”

“이백호, 그만해라. 이 정도면 모두 결백하다는 건 증명이 됐으니까.”

“그러게요? 진짜 우리 중에 배신자가 없었나 보네?”

의심이 조금 풀렸는지 조금 덜 예민하게 변한 말투.

그러나 이백호는 나보다 더한 효율충이었다.

“배, 백호? 그럼 의심이 다 풀렸으면 이제 여기서 그만—.”

“아니, 아직 시간도 남았는데 조금 아깝잖아.”

“아깝다니, 그게 무슨 뜻—.”

“말 그대로지 뭐. 기왕 켰으니까… 조금 더 서로에 대해 아는 시간을 가져보자고. 우리… 꽤 오래 같이 있었는데 서로에 대해 잘 알진 못하잖아?”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던 이백호가 씩 웃으며 제이나 플라이어를 바라본다.

“자, 그런 의미에서 첫 번째 질문.”

“…….”

“제이나 플라이어는 아직도 나 이백호를 죽이고 싶다.”

대체 왜 이런 질문이 갑자기 튀어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맞으면 예스, 아니면 노라 대답해.”

어느새 장난기가 싹 사라진 눈빛과 말투.

이에 제이나 역시 표정을 굳히더니 이내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예스.”

……대체 얘네들은 어떻게 동료로 다니고 있는 거지?


20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92화 20

도무지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겠다.

갑자기 자길 죽이고 싶냐고 묻는 이백호나, 거기에 아무런 고민 없이 그렇다고 답하는 제이나나.

이 둘은 대체 어떤 관계인 걸까.

“오, 눈깔 또 엿같이 뜨는 거 보소?”

“…….”

“그, 그만하시오. 백호……. 이런 상황에 우리끼리 다투면 우릴 여기에 가둔 그 나쁜놈만 좋은 일이지 않소!”

웬일로 맞는 말을 하며 상황을 무마하려 애쓰는 아우레스.

“너는 그냥 닥치고 있어. 네가 아직도 성주랑 연락하고 지내는 걸 모를까봐?”

“……그, 그게 무슨 소리요! 나, 나는—!”

“야, 여기 안에선 거짓말 못 한다니까?”

“…….”

“그래도 이번에 나가는 걸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고 하니까. 그래서 이거로 넘어가는 거야.”

“고, 고맙소…….”

대화를 듣고 있자니, 저 천진난만한 아우레스조차 뭔가 뒤에서 꿍꿍이를 갖고 있던 듯한데…….

‘이 새끼들은 이럴 거면 왜 같이 다니는 거야?’아무래도 이백호에게 있어 ‘동료’란 내가 아는 ‘동료’와 전혀 다른 개념인 듯하다.

“…남작님, 남작님이 좀 나서야 하는 게 아닐는지. 이러다가 분열이라도 되면…….”

“일단 가만히 있어라. 심각해지면 나설 테니까.”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분위기.GM이 우려를 내비쳤으나, 나는 우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도 그렇잖아?처음엔 이백호가 왜 저렇게까지 동료들부터 의심하고 나섰는지 이해가 안 됐는데.

‘암, 이런 속사정이 있으면 그럴 만도 하지.’나름 친해보이는 모습에 착각할 뻔도 했으나, 근본은 달라지지 않는다.

서로 목적이 일치해서 함께 다니고 있을 뿐.

이놈들은 ‘동료’ 같은 게 아니다.

“할배는… 됐어. 어차피 다른 꿍꿍이가 있단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파멸학자에게도 뭐라 한 마디하려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젓는 이백호.

왠진 모르겠지만 어딘가 지긋지긋하단 눈빛이다.뭐, 갑자기 현타라도 온 건가?

째깍-

알 수 없지만 그때를 기점으로 어긋난 신뢰의 사용 시간이 다했다.

“더 하는 건 낭비일세. 이만하면 우리 중 배신자가 없다는 건 증명됐지 않은가.”

“…….”

여기서 한바탕 더 할 만큼 막장은 아니었을까.이백호도 파멸할배의 말대로 어긋난 신뢰를 아공간 안에 도로 집어넣었다.

아, 물론 쓸데없는 뒷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그래도 다행이네. 몇 년 같이 다닌 새끼를 죽이면 나라도 조금은 기분이 찝찝한데, 그럴 일은 없어서.”

이내 이백호가 제이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아, 너는 잘 모르려나? 어차피 기억도 제대로 못 하는 상태였으니까?”

자세한 속사정은 알 수 없지만,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이 말이 누군가에게는 심장을 찌르는 말이란 걸.

터벅, 터벅.말없이 몸을 부르르 떨던 제이나가 한 걸음, 두 걸음 이백호에게 다가가 멈춘다.그리고…….

“왜 한 대 쳐보게?”

비아냥거리는 이백호를 올려다보며, 제이나가 이를 악문 발음으로 읊조린다.

“이백호… 우린 당신 화풀이용 장난감이 아니야.”

“…….”

“그러니까 어리광은 당신 엄마한테나 부려.”

괜히 옆에 있던 GM과 아우레스가 움찔할 만큼 당찬 반격.

“아, 어리광은 못 부리려나? 당신은 절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이내 제이나가 역린을 건드리려던 찰나였다.순간적으로 이백호의 신형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콰아아아앙-!고막을 찌르는 굉음과 함께 돌풍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이야, 재밌네.”

상황은 아주 간단명료했다.이백호가 제이나를 공격하려 들었고, 그것을 바로 옆에 있던 아우레스가 방패로 막아냈다.

“뭐야. 기억을 되찾니 뭐니 하더니, 벌써 붙어먹을 놈이 생긴 거야?”

외부인인 내가 듣기에도 너무나 졸렬하고 3류 악당 같은 대사.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이백호라는 사람의 바닥을 본 것만 같았다.

“백호, 조급한 건 알겠지만 이성을 찾으시오. 이건 그대답지 않소이다.”

“나다운 게 뭔데?”

“늘 변덕스럽고 까탈스럽지만, 적어도 이렇게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아니었소이다.”

한 대 때릴 기세인 이백호 앞에서도 당당하게 눈을 마주하며 할 말을 다 하는 아우레스.‘암, 이게 탱커지.’세상에 나쁜 탱커는 없다.***

“……하, 머리 좀 식히고 올게.”

그 말을 끝으로 이백호가 도망치듯 자리를 뜨자, 아우레스가 긴장이 풀린 듯 참아왔던 숨을 길게 토해낸다.

“후아……. 백호의 살기는 언제 느껴도 살벌하구려. 정말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소이다.”

“허허, 그런 것치고는 눈빛에 물러섬이 없더군. 다시 보았네.”“아하하… 동료를 지키는 일이지 않소. 그런데 어디 물러설 수가 있나…….”

“……고마워요.”

제이나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감사 인사까지 전하자 머쓱한 눈빛으로 뒤통수를 벅벅 긁는 아우레스.

“그럼 다들 먼저 가실래요? 저는 잠시 머리 좀 식히고 따라 내려갈게요.”

“아… 아! 그러시겠소?”

그러시겠소는 무슨.아우레스가 뭐라 더 말을 잇기 전에 냉큼 개입했다.

“단독 행동은 불가하다. 여기라고 안전하단 보장은 없으니까.”

“어… 근데 이백호는 혼자 가버렸지 않소?”

거, 말대꾸는.이백호랑 신관이랑 같아?

“안 되면 안 되는 줄 알아라.”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으나, 아우레스는 물러나지 않았다.

“혼자 있는 게 문제면 내가 같이 옆에 있겠소이다. 그럼 되겠소?”

어…….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긴 한데…….‘얘, 이렇게까지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으면서 그간 안 하고 있던 거야?’

신기한 것과 별개로 허락해 줄 생각은 없었다.

“안 된다.”

“어째서 안 된다는 것이오?"

이유는 여럿 있다.첫 번째는 이 녀석에게 하나뿐인 신관을 맡기기에는 영 불안하다는 것이고…….

“아까는 분명히 혼자 있는 게 문제라고 했지 않소? 그래서 내가 그녀 옆에 있겠다는데 대체 뭐가 문제란 거요?”

두 번째는 그냥 이 녀석 자체다.안 그래도 분열 중인 팀 내에서 남녀 문제까지 생기면 진짜 대환장 파티가 열릴 거 같거든.

“제대로 대답해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절대 물러서지 않을—.”

거, 시끄럽게.

“그럼 너희 먼저 내려가라. 내가 남아 있을 테니.”

그냥 안 된다고만 하면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것 같은 기세인지라, 내가 대신하는 걸 선택했다.

“어… 어? 그, 그러지 않아도…….”

예상대로 크게 당황한 아우레스.

“괜찮아요. 아우레스. 금방 따라 내려갈 테니 걱정 마세요.”

“……알겠소이다.”

이내 제이나까지 저렇게 말하자 녀석도 할 말이 없어졌는지 순순히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떠났다.그리고…….

“재밌는 사람이죠?”

석실에 둘만 남게 되자 제이나가 말을 걸어온다.

“전부터 그랬어요. 장난을 치다가도 항상 옆에서 힐끔힐끔.”

“알고 있던 거냐?”

“어떻게 모르겠어요? 저렇게 티가 나는 사람인데.”

그런가?솔직히 말해서 나는 오늘이 되기 전까지 딱히 낌새를 느끼지 못했는데.

"그나저나 또 둘이 남았네요.”

“그래, 어쩌다보니 또 그렇게 됐군. 그럼 나는 이제 조용히 있을 테니 혼자 생각 정리나 해라.”

그리 말하고서 입구 쪽에 책상다리로 앉자, 제이나도 좀 떨어진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그리고 이어지는 기나긴 정적.

이런저런 상념을 이어나가며 육포나 뜯고 있자니 저쪽에서 먼저 또 말을 걸어왔다.

“……안 물어봐요?”

밑도 끝도 없는 말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소통 자체엔 문제가 없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거 아니었나?”

“그런데 어차피 혼자가 아니잖아요.”

음,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네.

“그럼 물어보면 말해줄 거냐?”

툭 던지듯이 물은 질문에 제이나도 툭 던지듯이 답했다.

“말 못 해줄 건 없죠. 먼저 꺼낼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숨길 이야기인 것도 아니라서.”

“…….”

“그리고 애초에 그게 궁금해서 남는다고 한 거 아니었어요?”

뭐, 그것도 이유 중 하나이긴 하지.

“제일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뭔데요?”

“이 상황에서 정분까지 나면 골치가 아파질 거 같았으니까.”

숨김 없이 그대로 솔직한 답변.이를 들은 제이나는 예상치도 못했다는 듯 소리내어 웃더니 느닷없이 말을 바꾸었다.

“아뇨, 역시 말하지 않을래요.”

“……뭐냐, 갑자기?”

“그냥요. 딱히 재밌는 이야기는 아니라서요.”

“그러냐? 마음대로 해라.”

쩝, 괜히 기대했네.왠지 맥이 탁 풀려 한숨을 내쉬었다.

한데 그 모습에 조금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까?

“그래도 한 가지는 말해드릴게요. 전에 남작님께 거짓말을 했어요. 아니, 정확히는 일부러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죠.”

“그게 뭐였지?”

“제가 카루이 님께 기억을 바치면서까지 살리고자 했던 사람요. 그 사람을 죽인 게 바로 저예요. 뭐, 이백호의 말을 들었으니 어느 정도 예상했겠지만요.”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도 들을 수 있나?”

“별 대단한 이유 같은 건 없었어요. 단지 카루이 님이 제물로 그 사람을 요구하셨거든요. 새로운 권능을 주겠다고 약속했고, 그래서 죽였어요.”

“…….”

“제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한 강력한 권능이었어요.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았을 거예요. 이렇게까지 갑갑해질 줄 알았으면, 절대로…….”

제이나의 목소리에서 짙은 후회를 느낄 수 있었고, 나도 그냥 더 캐묻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주었다.

10분, 20분…….30분 정도가 흘러서야 제이나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제 괜찮다는 말과 함께 먼저 석실 아래로 내려갔다.

“이제 좀 괜찮아지셨소?”

유적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다가오는 아우레스.둘이 뭔가 대화를 나누는 거 같은데, 굳이 엿듣지는 않았다.

“이백호는?”

GM에게 다가가 묻자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답변만을 들을 수 있었다.하, 얘는 뭐 사춘기도 아니고.

“수색이라도 해볼까요?”

“됐다, 수색은 무슨. 기다리고 있으면 알아서 돌아오겠지.”

“그래도 정체 모를 누군가가 이 유적 안에 우리와 함께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좀 더 기다려보고 정 오지 않으면 그때 찾아도 늦지 않다.”

무엇보다 이백호가 없을 때 나눠야 하는 대화도 있고.

“이봐.”

나는 GM과의 대화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고서 파멸할배에게 향했다.

“무슨 일인가? 남작.”

“너랑 상의하고 싶은 게 하나 있어서.”

“말해보게.”

이 할배도 말이 많은 스타일이 아니기에 나도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백호, 네가 보기에 정상 같았냐?”

사실 아까부터 느끼고 있던 점이다.백호 요놈이 아무리 정상인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생각 없이 행동하는 놈이 아니거든.

녀석은 반드시 ‘이득’이 되는 짓만 하니까.

“아마도 정상이 아닐 걸세. 자네도 그리 말하는 걸 보니.”

“너도 뭔가 이상한 점은 느꼈다 이거군?”

“그의 기준점은 ‘선악’ 같은 게 아닐세. 어떤 상황에서도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려 노력하지. 하나 오늘 있었던 일은 너무도 감정적이었네.”

“조급함을 느껴서, 그래서 그랬을 가능성은?”

“우스운 이야기일세. 이런 것 따위에 조급함을 느낄 자였자면, 이십 년 가까이 한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수도 없었을 테니.”

“그렇군…….”

하면 대체 무엇이 이백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우리가 알지 못하는 필드 효과라도 있나?근데 그렇다기에 이백호를 뺀 나머지는 너무 멀쩡한데?

고민하고 있자니, 파멸할배가 쓰윽 다가와 다른 주제를 꺼냈다.

“그보다 나는 다른 쪽이 더 의문일세.”

“어떤 게?”

“상황을 계속해서 정리하다 보니 든 생각이네만. 역시 우리 중에 내통자가 있었을 거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네.”

“그 문제는 이제 다 끝난 거 아니었나?”

어긋난 신뢰까지 써가며, 심지어 이백호의 팀원만이 아니라 GM까지도 확인했다.

나야 통하지 않으니 쓰지 못했고.그런데 이 할배는 왜 또 이 얘기를 꺼내는 걸까.

“설마… 나와 이백호를 의심하는 거냐?”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밖에는 답이 나오지 않아 목소리를 내리깔고 묻자, 할배가 피식 웃었다.

“그런 건 아닐세. 물론 자네에게는 우리를 방해할 동기가 확실하긴 하네마는……. 자네보다 더 의심스러운 용의자가 있어서 말이지.”


16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93화 16

“질질 끌지 말고 본론만.”

“대답을 듣지 못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지 않은가.”

이 할배가 뭐라는 거야.자꾸 앞뒤가 안 맞는 말을—.

“브라이엇 군 말일세.”

“…뭐?”

“브라이엇 군에게는 내통자가 아니란 답을 듣지 못했지 않은가.”

“설마…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글쎄, 시체를 직접 본 나로서는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보네마는……. 그의 죽음이 그가 결백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이내 파멸할배가 아무런 감정도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몇 번을 생각해도 같은 결론에 도달하고 있네.”

“…….”

“만약 우리 중에 내통자가 있다면, 역시 브라이엇 군 말고는 없다고.”

어떤 근거가 더 있는진 몰라도, 할배는 브라이엇이 배신자일 거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따라서 나도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졌다.

‘신관은 이백호를 죽이고 싶어 하고, 전사는 성주의 앞잡이에, 마법사는 다른 꿍꿍이가 있다.’

근데 여기에 궁수는 배신자라…….‘진짜 이백호 이 새끼는 팀을 발로 꾸렸나?’이제 놀랍지도 않다.

끼이익.현관문을 열고서 한 여인이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거실에 모여 있던 이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에밀리……! 어떻게 됐냥?”

“방법은? 아직도 방법은 못 찾았어요?”

비요른 얀델이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겠다고 외출 후 사라진 지 어언 네 달째.

처음엔 그들도 귀가가 며칠 정도 늦어지는 줄 알고 기다렸지만, 일주일이 넘게 지나자 상황이 달라졌다.

걱정되는 마음에 직접 지하까지 내려갔고, 그곳에서 텅텅 비어있는 지하 광장을 마주했다.

따라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수소문을 시작했는데…….

“유르벤 하벨리온. 그 사람은요? 그 사람은 아직도 안 나타났고요?”

베르실의 소개로 함께 마법진을 보러 갔다는 마공학자까지 종적이 묘연해지며 불안은 커졌다.

물론 초창기엔 둘이 성벽 밖으로 나간 게 아니냐며, 좀 더 기다리면 어련히 알아서 잘 돌아오지 않겠느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나 실종 기간이 길어지며 그 의견은 바뀌었다.비요른이 마공학자와 밖에 나간 것까지는 맞다.

다만 밖에서 무언가 모종의 사건이 벌어져서, 그래서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러한 추측이 확신으로 변하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머지않아 아무도 없던 지하에 왕가의 병력이 주둔하기 시작한 것인데······.

“아직 비요른이 돌아오게끔 할 수 있는 방법은 찾지 못했다.”

아멜리아가 클랜을 대표해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정보를 캐고 있지만, 그간 알아낸 정보는 하나였다.

지하에 있던 이동 마법진에 손상이 가해졌단 것.

위험을 무릅쓰고 군부 막사에 잠입해 지휘관들의 대화를 엿들으면서까지 알아낸 정보였고, 이 덕분에 그들도 비요른이 어째서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지에 대해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런가요…….”

“걱정 마라. 그래도 이번에는 어느 정도 소득이 있었으니까.”

“…소득요?”

“돌아오는 방법이 막혔을 뿐이지, 나가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 하더군.”

“네? 그게 정말인가요?”

“운 좋게도 마법진을 발동시키는 방법에 대해서도 손에 넣었다. 실현 가능한지는 고울랜드, 네가 직접 봐야 알겠지만.”

아멜리아가 품 안에서 군부의 것으로 보이는 서류 하나를 꺼냈고, 이를 받아든 베르실은 빠르면서도 꼼꼼하게 읽어내렸다.그리고…….

“왕가에서는 이 마법진에 대해서도 전부 다 알고 있던 거 같네요. 마법진을 발동시키는 방법에 대해 지침서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요.”

“그래서 결론은? 할 수 있나?”

“네. 이게 있으면 저도 마법진을 발동시킬 수 있어요.”

베르실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하자, 아멜리아가 옳거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됐군.”

“됐다니요……?”

“사흘 뒤까지 모두 원정 준비를 끝내라.”

느닷없는 지시였으나 이에 반박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오오오오! 드디어 뭔가 하는 거냐 우리도!!”

졸고 있던 아이나르는 환성을 터뜨렸고.

“으응… 집 나간 단장이 몇 달째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직접 데리고 오는 수밖에.”

미샤는 결의를 다 잡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은 다 벌려 두고 혼자 사라진 탓에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들어 보니까 샤빈 에무어 씨도 돌아오면 죽이든 사표를 내든 할 거라던데.”

클랜의 대소사를 도맡고 있던 베르실은 울분 섞인 한숨을 내쉬었으며.

“그런 건 다 제쳐두고서, 흔치 않은 기회이긴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단장님을 구하러 가는 건.”

항해사 아우옌의 말에 에르웬은 눈을 감고 가슴에 손을 올렸다.

“우리를 지켜주고 구하러 오는 건 항상 아저씨의 역할이었으니까요.”

클랜 아나바다의 원정이 결정됐다.***

레이튼 브라이엇.성격도 좋고 능력도 괜찮았던 이백호 팀의 궁수.이 녀석이 정말 배신자라고 한다면, 의심스러운 정황이 존재한다.

녀석은 우리 팀의 길잡이 역할도 맡고 있었으니까.[마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상대는 단 한 명… 놀랍게도 숙면 중인 듯하군요.]

만약 이백호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녀석은 포지션의 특성상 한스 L… 

정확히는 한스 L로 위장했던 정체 모를 그놈에게 우리를 자연스럽게 안내하는 게 가능했다.

‘게다가 모두 이백호가 차원 비석 타겠다는 걸 말릴 때 얘는 한 마디도 안 했었지…….’

한번 의심을 하고 나니 정말 이놈이 배신자였나 하는 생각이 든다.

뭐, 확실해진 건 아무것도 없—.쿠웅-!그때 돌연 지면을 타고 진동이 느껴진다.다만 방향은 어디인지 잘 모르겠다.

원래 이럴 때 보통 민첩 캐들이 알아서 브리핑을 해주는데, 문제는 지금 주변에는 그런 포지션이 아무도 없거든.

마법사 둘에 신관 하나.그리고 탱커가 둘.

“어디죠……?”

“저쪽인 거 같기는 했소만…….”

“거리가 멀어서 마력 탐지로 확인하려면 조금 더 시간이—.”

그렇게 전문가의 부재로 인해 우왕좌왕하던 중, 다시금 진동이 느껴졌다.쿠우우웅-!아까보다 더 큰 진동.

게다가 이번에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덕일까?

“저쪽이다.”

이번엔 방향을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던 나는 즉시 일행들을 데리고 해당 지점으로 달려갔다.그리고…….쿠웅-! 쿵! 쿠우웅!

다가갈수록 더 크고 선명하게 느껴지는 진동과 굉음

“————아, 말———!!”

흐릿하게나마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어렴풋이 들어도 이백호의 목소리였다.다만 문제는…….

“누군가와 싸우고 있는 거… 맞죠?”

“아무래도.”

일단 정황상 그래 보인다.처음에는 이백호가 화에 못 이겨 이것저것 다 때려 부수고 있는 게 아닌가도 싶었는데.

“야, 이 개새끼야! 잡히면—!”

대화를 들어보니 누군가를 추격하고 있는 게 확실해 보인다.따라서 속도를 더 올리며 소음이 피어나는 곳으로 전력질주.

그리고…….타닷-!관성에 못 이겨 벽에 부딪치듯 코너를 딱 꺾은 그 순간.번뜩-!눈앞에서 핵폭탄이 터진 듯 섬광이 번뜩인다.

머리로 판단하는 것보다 탱커로서의 본능이 먼저였다.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신속하게 부풀린 몸으로 비좁은 통로를 틀어 막고 방패로 상체를 보호.한데 아니나 다를까 그 즉시.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무형의 충격이 강하게 몸을 밀쳐내며, 피부에 뜨거운 열기가 전해진다.

마치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감각.선크림을 바른 것처럼 방패로 가린 부분은 그나마 좀 나았지만…….치이이이이이이익-!

섬광이 잦아들었을 때, 뜨겁게 달궈진 갑옷 위로 연기가 피어올라온다.

찌릿-!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뜨거운 전기가 흐르는 듯했으나, 우선 뒤에 상황부터 체크했다.

“다들 괜찮나?”

“괘, 괜찮습니… 아악!”

뭐야, 많이 다친 건가?그런 의문을 가지며 뒤돌아보려는 때, 파멸할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다들 다치긴 했지만, 중상까지는 아니네.”

원래 이런 성격 유형이 이럴 땐 아주 도움이 된다.긴급 상황에선 낭비를 줄이는 깔끔한 브리핑이 중요하니까.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타닷.후열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서 앞으로 달려나간다. 

어느 정도 패이고 녹아내리긴 했지만 연기가 피어날 뿐 벽 구조 자체는 멀쩡했다.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지난번에도 시험해봤거든.[별의 소멸]로도 이곳의 구조물은 파괴할 수 없다.

물리적인 파손이 가능한 몇몇 약한 지점이 있긴 하지만, 그건 극히 일부이기에 논외.

‘뭐, 이번에 쓴 건 다른 스킬인 거 같지만.’

대체 이 새끼는 숨겨둔 필살기가 몇 개야?

“하아… 하아… 하아…….”

이내 코너 하나를 더 꺾고 들어서자 우두커니 선 채로 숨을 헐떡이는 이백호가 보인다.

“…이백호.”

내 목소리를 듣고서야 인기척을 느낀 듯 뒤돌은 이백호가 태연하게 말을 받는다.

“아, 왔어요……?”

“말해봐라. 대체 무슨 상황인 거냐?“

"별거 아니에요. 쥐새끼 한 마리 잡으려다가 하도 날쌔서… 홧김에 무리 좀 했죠.”

“쥐새끼……?”

“근데 잘 됐는지는 모르겠네. 한번 같이 가볼래요? 쥐새끼가 잡혔는지 안 잡혔는지 확인하러.”

“앞장 서라.”

“아아, 충성!”

장난스러운 태도야 어쨌든, 이백호가 빠르게 앞을 치고나가며 안내했고, 그렇게 한 1분쯤 뒤따라갔을 때였다.

“와, 이걸 맞고도 버틴 거야?”

텅 빈 통로에 핏자국만이 덩그라니 남아 있다.참고로 이 핏자국은 통로 반대편으로 이어져 있는 상태였는데…….

“근데 왠지 난 멀리 못 갔을 거 같네?”

이백호가 씨익 웃으며 천천히 핏자국을 따라서 걸어나간다.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이어지던 걸음이 멈춘 것은 한 3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이내 핏자국이 도중에 끊기며 이백호 역시 걸음을 멈추었다.

‘이렇게 느긋하게 움직일 게 아니라 얼른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괜히 내가 다 조급했지만, 이백호는 여유롭게 주변을 쓱 훑어볼 뿐이었다.

“뭐 하는 거냐? 얼른 찾아 나서야—.”

“남작님, 그거 알아요?”

말까지 끊어가며 물은 질문에 고개를 갸웃하자 이백호가 설명하듯 말을 이었다.

“저희가 살던 세상에는 카멜레온이라는 생물이 있어요. 얘는 참 신기한게 막 주변 색깔에 따라 피부색이 바뀌어서 그걸 막 사냥할 때 이용해요.”

처음엔 뭔 개소리인가도 싶었으나,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은 필요 없었다.

애초에 이백호는 남들 앞이 아니면 나를 ‘남작님’이라고 말하지 않거든.

“근데… 얘를 보면 계속 카멜레온 생각이 나네?”

그 말을 끝으로 이백호가 텅 빈 벽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그리고…….퍼억-!벽에 닿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둔탁한 파생음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커헉!”

은신 상태로 숨어 있던 ‘쥐새끼’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다.

“잡았다, 요놈.”

소름 끼치는 미소로 아래를 내려다보던 이백호가 이내 쥐새끼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렸다.체격은 일반적인 남성에 가까웠다.

털이나 귀가 안 보이는 거로 봐서 종족도 인간인 거 같고.몸은 넝마가 된 로브로 감싸져 있는데…….

‘늑대 가면……?’

당장 눈에 띄는 특징이라고 한다면 이것 정도겠지.남은 건 앞으로 천천히 알아보면—.

“뭐야 이건 또?”

이미 의식을 잃은 듯 축 늘어지는 몸.한데 자세히 보니 입에서 칙칙한 색깔의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

이에 화들짝 놀라 맥박을 짚었지만, 어찌된 것인지 어떠한 미동도 느껴지지 않는다.

“자결인가…….”

내 중얼거림을 들은 이백호가 피식 웃더니 쓰윽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한다.그리고…….

“남작님.”

듣는 귀가 없을 땐 절대 쓰지 않는 호칭으로 나를 부르며 말한다.

“어느 세상을 가든 작은 동물들은 꼭 비슷한 공통점이 있는데, 혹시 알아요?”

이미 그 뒷말을 알 것도 같았지만, 애석하게도 이백호는 정답을 맞힐 시간을 주지 않았다.

“꼭 불리하면 다 죽은 척을 해.”

“……?”

“바로 이렇게.”

그 말을 끝으로 시체의 복부를 향해 주먹을 한 번 더 내지르는 이백호.

“커헉-!!”

바닥에 나동그라져 벌레처럼 몸을 웅크린 늑대 가면을 향해 이백호가 손을 뻗었다.

“자,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가면을 벗겨볼 시간이다.

가면을 벗기는 이백호의 손길은 다정, 배려 같은 단어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손바닥을 펼쳐 가면을 잡은 뒤.드드득.가면을 단단히 고정하기 위한 여러 장치들을 싹 무시하고서 우악스럽게 잡아 뜯는다.그리고…….

“…….”

마침내 드러난 가면 너머의 얼굴.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말이 없던 이백호가 정적을 꺠고 입을 열었다.

“이야, 진짜 살아 있었어?”


18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94화 18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말투이나, 내려다보는 눈은 얼음장처럼 차갑다.뭐, 이해 못할 건 아니다.

동료의 ‘배신’이 이놈에겐 발작 버튼이었으니.

“레이튼 브라이엇.”

심지어 이놈은 이백호 팀에서 파멸할배 다음으로 오래된 팀원이었다.

“씨바, 그래도 내가 너한테는 잘해주지 않았냐?”

그리 읊조리던 이백호가 한숨을 푹 내쉰다.

“뭐, 그건 됐고……. 한번 말이나 해봐라. 죽었다던 네가 왜 살아 있고, 쓰고 있는 이 가면은 또 무엇이며, 뒤에서는 대체 뭔 개짓거리를 꾸미고 있는 건지.”

“…….”“참고로 설명이 끊길 때마다 네 몸에서 무언가 하나씩 뽑을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고.”

“…….”

“시작.”

고압스러운 목소리로 시작을 알리는 이백호.당연한 말이지만,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녀석이 갑자기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을 리 없었다.

“…….”

외려 적대적인 눈빛을 흩뿌리며 이백호를 올려다보는 브라이엇.이백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단지 정적이 3초 정도 더 이어졌을 때.

스르륵.느긋하게 손을 앞으로 뻗은 뒤.

“아악! 아아, 아아악—!!”

왼쪽 눈에 손가락을 깊숙이 찔러넣은 뒤, 그 안에 들어 있던 것을 뽑아낸다.드득, 드드득, 드득…….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선명히 들릴 만큼.

아주 천천히.

“아아아악! 아악!!”

바닥에 쓰러져 고통에 몸부림치는 브라이엇을 보며 이백호는 무표정하게 딱 한 마디만을 뱉었다.

“시작.”

그 말 외에 더 보태진 것은 없었다.협박도, 회유도, 별도의 심문 작업도 하지 않는다.단지 시작을 말하고 몇 초를 기다린 뒤, 

그래도 이야기가 시작되지 않으면 일련의 과정을 반복할 뿐.

“아아아악—!!”

눈을 뽑고, 귀를 뜯어내고, 장기를 잡아당긴다.그러다가 상태가 심각해지면 포션으로 치료.치이이이익-!

아무 표정 변화 없이 저 짓거리를 이어나가는 이백호도 이백호지만, 브라이엇 이 녀석도 대단했다.보아하니 통증을 느끼지 못하거나 그런 건 아닌 듯한데…….

‘비명을 내지르는 것 말고는 한 마디도 안 하네.’

어차피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아서일까?변명은 물론이고, 죽이라든가 그러한 말도 일절 하지 않는다.

실로 대단한 정신력이 아닐 수 없으나, 이대로면 암만 고문을 이어나가도 소득이 없을 터.

‘슬슬 방법을 바꿀 때인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어 일단 중단을 시킬까도 싶었으나, 이백호의 표정을 본 뒤 그만두기로 했다.

그야 쟤가 좀 진정된 다음에 방법을 바꿔도 늦진 않을 테니까.어차피 내가 아픈 것도 아니고.

“아아아아악!!”

그렇게 브라이엇이 포션으로 치유(?)를 받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남은 일행들도 도착했다.

“아, 왔군. 왜 이렇게 늦은 거냐?”

“…좀 헤맸어요. 길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보니.”

“그래서 여긴 무슨 상황입니까?”

“잠깐만! 브라이엇? 저기 저거 브라이엇 아니오?”

“진정들 해라 다 설명해줄 테니까.”

이쪽엔 관심도 없어 보이는 이백호 대신 뒤늦게 도착한 일행들에게 상황 설명을 대략적으로 해줬다.

“그러니까… 늑대 가면을 쓰고 있던 수상한 자가 있었고, 이백호 씨가 그자를 잡아 가면을 벗겨보니 브라이엇 씨가 있었다는 거군요…….”

“루인제네스 공! 이게 어찌 된 일이오? 브라이엇이 죽은 걸 직접 봤다고 했지 않소!”

“내가 봤을 때는 확실했네. 하나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죽음을 위장하는 이능이 있거나, 특수한 도구를 이용한 듯하군.”

“아마 그럴 거다. 아까도 잡히자마자 죽은 척을 하던데.”

“흐음… 생각나는 이능이 몇 개 있기는 하군요.”

뭐, 이능이든 아이템 빨이든 중요한 건 아니다.요점은 브라이엇 저놈이 파멸할배 앞에서 죽은 척 위장까지 한 다음에 몰래 이 유적 안에 숨어들었단 거니까.

“이렇게 되면 더 수상해지네요. 브라이엇 씨가 대체 뭘 위해서 그런 짓들을 벌인 건지…….”

“그건 이제부터 들어봐야겠지.”

대화가 거기까지 이어졌을 무렵, 이백호가 우리를 보며 소리쳤다.

“할배! 뭐 하고 있어? 도착했으면 얼른 이리로 와서 그것부터 걸어줘, 그거!”

이백호의 요청을 받은 파멸할배가 브라이엇에게 다가가 무언가 마법을 걸었다.

“무슨 마법인지 알겠나?”

GM에게 쓱 묻자 금방 답변이 돌아왔다.

“마력 분자 구조로 보아 신경계를 촉진 및 각성시키는 계열로 추측—.”

“쉽게 말해, 고문에 도움이 된다는 거군?”

“예……. 아무래도 저 상태에서는 통증이 몇 배는 더 크고 선명하게 느껴질 테니까요.”

예기치 못하게 좋은 지식을 얻었다.나도 나중에 심문을 해야 되는 상황이 되면 마법사한테 부탁해야지.

“……!!”

여하튼, 마법의 효과는 즉발적이었다.비명 소리가 몇 배는 더 커졌고, 눈물 콧물까지 전부 흘리게 됐다.또한 머지않아 목이 완전히 갈라졌는지 비명 대신 쇳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

끝까지 말없이 버티다가 기절한 브라이엇을 보며 결국에는 이백호도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뱉었다.

“와, 이거 이거 진짜 독한 새끼였네.”

사실 나는 저리 말하면서도 포션을 붓고 있는 이백호가 더 독해보였지만 아무튼.치이이이이이익-!화가 어느 정도 풀렸는지, 이백호도 심문을 잠시 멈추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서글서글한 평소의 미소가 입가에 어려있는 걸 보니 이제 좀 대화를 해도 될 거 같았다.따라서…….

“어떻게 된 거냐?”

“아니, 그렇게 말하면 제가 어떻게 알아들어요?”

“좀 이상하지 않나. 다 같이 수색해도 찾지 못했던 이놈을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혹시 이백호 이놈이 찾을 방법이 있음에도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던 건 아닌가도 싶었다.

하지만…….

“아, 그거요?”

이백호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면서 밝힌 진실은 그것보다도 더 충격적이었다.

“일부러 어그로를 잔뜩 끌었잖아요. 갑자기 정신 나간 척하면서.”

“그게… 전부 연기였다고?”

“네. 이상 행동을 보이면 왠지 내 주변에서 날 관찰할 거 같았거든요. 그래서 혼자 떨어져 나온 후에 막 혼잣말도 중얼거리고, 벽에 머리도 쿵쿵 박고 그러면서 어그로를 더 끌다가 이때다 싶었을 때… 붐!”

이백호가 무언가 터지는 걸 표현하듯 손을 펼치며 말을 이었다.

“근처에다가 광역기를 막 남발했죠. 근데 그러니까 진짜 누가 맞긴 하더라고요? 그다음부터는 남작님이 본 대로예요.”

“어… 그렇군……?”

“어때요? 제 작전? 천재적이지 않았어요?”

글쎄, 천재적인 건 잘 모르겠고.딱 하나 분명한 건 이놈의 정신 상태가 일반적이진 않다는 거다.

‘진짜 미친놈이구나 얘는…….’

뭐라 할 말이 없어서 벙쪄 있자니, 이백호가 피식 웃으며 등을 돌린다.

“아무튼 화도 이제 좀 풀렸으니… 슬슬 센터나 까봐야겠다.”

그러고는 정신을 잃은 브라이엇에게 뚜벅뚜벅 걸어가 품을 뒤지기 시작한 이백호.

“에라이, 중요한 건 전부 종속 아공간에 넣어놨나 보네.”

“활도 안 보이는구려. 넘버스 아이템이지 않았소? 그것도 꽤 높은 번호의.”

“하, 결국 이 새끼가 협조 안 하면 루팅도 제대로 못한단 건데……. 어이, 할배! 뭔가 방법 없어?”

"한번 보겠네.”

이후 파멸할배가 쓱 다가가 구부정한 허리를 굽혀 살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술식이 꽤나 복잡해서 온전하게 아공간을 열거나 각인을 양도 받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네.”

“그럼 방법이 없는 거야?”

“술식 자체를 파괴하면 강제로 아공간을 여는 건 가능하네만, 그렇게 되면 손실이 발생할 걸세.”

“손실이 정확히 무슨 뜻이야?”

“아공간에 들어가 있는 물건들 중 3할 정도는 다중 차원 내에서 소멸할 거란 뜻일세.”

“아, 쉽게 말해서 30% 확률로 이 새끼 활이 사라질 수도 있단 거네?”

“어쩔 텐가?”

“해줘. 어차피 이 새끼가 순순히 열어줄 거 같지도 않으니까.”

“그럼 좀 넓은 장소로 자리를 옮겨야겠군.”

이후 파멸할배의 조언대로 우리는 브라이엇을 메인 홀로 데리고 가서 가지런히 눕혔다.그리고…….

“시작하겠네.”

곧장 아공간 해체술을 시작.후우우웅-!처음에는 손등에 난 각인이 붉게 달아오르는 게 전부였으나,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새하얀 빛이 흘러나왔다.

그로부터 얼마나 더 시간이 흘렀을까.번뜩-!새하얀 섬광이 터져 나오며 자그마한 포탈이 손등 위로 열렸다.

그리고…….퍼엉-!폭발 소리와 함께 아공간 안에 있던 걸로 추정되는 물품들이 마구잡이로 비산하며 사방에 흩뿌려진다.

“와…….”

이러니까 무슨 보물 고블린 같네.***

브라이엇 얘는 아공간이 대체 얼마나 컸던 걸까.

“이게 3할이 손실된 양이라고……?”

모두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넋을 잃을 정도로 아공간에서 튀어나온 물건들의 양은 엄청났다.

얼추 봐도 메인 홀의 절반 이상이 드롭된 템으로 뒤덮인 듯한데…….

“조, 조심해요!”

마구잡이로 나온 만큼 장내는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했다.쨍그랑-!깨진 포션, 도자기…….퍼엉-!

폭발형 소모품이었는지 밖으로 나오자마자 터진 것도 있었으며.솨아아아아아아-!한바탕 독가루가 흩날리며 다 같이 해독 주문을 받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다.뭐, 그래도 그 보상은 확실했지만.

“그래, 믿고 있었다고오오!!!”

3할의 확률을 버티고서 온전하게 드롭된 No. 696 레인드리스의 황궁.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고가의 장비들이 보인다.

최상위권에서 오랜 시간 ‘약탈자’로 활동했던 놈인 만큼 수많은 장비들이 있었던 것인데…….

‘성벽 밖에서 오래 지냈던 만큼 처분하지 못한 게 많았던 모양이네.’

게다가 고가의 장비를 보관해두는 건 노아르크 약탈자들의 습성이기도 했다.노아르크는 물물교환이 빈번하게 이뤄지니까.

상단에 헐값에 넘길 바에 대등한 가치의 물품과 맞바꾸는 게 이득인 것.

“다들 뒷주머니 차지 말고 제대로 한곳에 모아! 분배는 확실하게 해줄 테니까.”

이후로는 다 같이 힘을 모아 물품들을 한곳으로 모으고 분류했는데, 수상해 보이는 물건들도 몹시나 많았다.

“대체 뭐야, 이 늑대 가면은?”

“브라이엇 씨는 같은 가면을 뭐 이렇게 많이 갖고 다녔던 걸까요?”

“같은 가면이 아닙니다. 이것과 이것. 딱 봐도 치수가 다르지 않습니까?”

기괴할 정도로 많이 보이는 늑대 가면.또한, 자매품으로 웬 이상한 메달도 있었다.

“여기 이 메달에도 늑대가 새겨져 있어요.”

“약탈 중에 주운 물건이라기엔, 뭔가 굉장히 공교롭군요.”

“잠깐 줘보겠나?”

파멸할배가 메달을 빼앗듯 가져가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시는 물건입니까?"

"오래전에 이 메달에 대해 들어본 기억이 있네.”

“어떤 물건인지요? 특별한 기능이 있는 마도구 같진 않은데.”

“이건 마도구가 아니라, 한 집단의 일원임을 의미하는 표식일세.”

“집단 말씀이십니까……? 이런 문양을 쓰는 집단에 대해서는 처음 들었습니다마는.”

“아무래도 그럴 걸세. 라프도니아가 건국될 당시에나 있었던 고대의 집단이니까.”

“고대의 집단 말입니까? 혹시 이름이 뭡니까?”호기심으로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한 GM의 물음에 파멸할배가 메달을 내려다보며 답했다.

“히르크무타.”

“해석하자면, 하얀 늑대라는 뜻의 고대어군요.”

“그들이 따르던 인물의 이명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알고 있네.”

“이명이라면…….”

“백의 마도사.”

파멸할배의 말에 GM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프도니아 역사상 ‘백의 마도사’라 불렸던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니까.

“백의 마도사라면…….”

“최후의 대현자, 디플런 그라운델 가브릴리우스. 히르크무타는 그를 추종하는 이들이 모여 만들어진 집단이라네.”

히르쿠무타.백의 마도사이자 최후의 대현자로 불렸던 디플런 그라운델 가브릴리우스를 추종하는 이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고대’의 집단.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요? 가면들은 다 하얀 늑대라면서 가면은 왜 전부 검은색이죠?”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군. 브라이엇, 저 친구가 말해줄 거 같지도 않고 말일세. 자네 생각은 어떤가?”

파멸할배의 물음에 이백호도 애매한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음… 통각 강화까지 걸었는데 이 상태면 입을 열게 하는 건 그냥 때려쳐야 할 거 같기도? 별다른 수가 없잖아.”

이렇게까지 독한 놈일 줄은 몰랐다며 혀를 내두르는 이백호를 보며 파멸할배가 툭 던지듯이 말했다.

“…어쩌면 ‘금제’가 걸려 말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드는군.”

“금제라니? 할배 그게 무슨 말이야?”

“히르쿠무타란 집단에 대해 조사할 때 곁가지로 읽은 기억이 있네. 소속원들은 모두 기밀 유지를 위해 한 가지 맹세를 하게 된다고.”

“맹세랑 금제는 좀 뉘앙스가 다르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추측인 걸세. 하나 잊혀진 고대 마법 중에 ‘맹세’에 강제성을 부여하는 마법도 있었다 하니 마냥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닐 걸세.”

“흐음… 그렇단 말이지?”

대화가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였다.돌연 제이나가 다급하게 우리들을 불렀다.

“저기요! 다들 와보세요! 브라이엇 씨가 죽었어요!”

“…응? 아, 그거? 신경 쓰지 마 또 배 까뒤집고서 죽은 척하는 거니—.”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죽은 거 같다고요!”

“…….”

심각한 제이나의 반응에 이백호도 긴가민가하는 표정으로 브라이엇에게 다가갔다.툭, 툭.발끝으로 어깨를 흔들지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브라이엇. 


18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95화 18

다만 그때까지도 이백호는 크게 걱정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이야, 새끼 또 이러네. 진짜 우리를 호구로 아나.”

축 늘어진 브라이엇을 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던 이백호가 이내 힘껏 발길질을 가한다.

“봐 봐, 이렇게 한 방 먹여주면 바로 일어날…….”

퍽-!

“…응? 뭐야, 이 새끼 왜 안 일어나.”

저 킥에 얻어맞고도 미동조차 없는 브라이엇.이백호의 표정이 굳기까지 오랜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지랄?”이백호가 짐짓 당황한 표정으로 황급히 허리를 숙여 브라이엇의 상세를 확인했다.아니, 정확히는 뺨을 연달아 후려쳤다.

“야! 야! 야! 야! 일어나! 장난치지 말고 일어나! 야! 일어나라고!”

“그만해요. 이미 죽었어요.”

“아니, 이상하잖아? 포션까지 먹여둔 새끼가 갑자기 왜 죽는데? 야! 할배! 네가 뭐 잘못한 거 아냐? 아공간을 열다가 죽인 거 아니냐고!”

느닷없이 책임의 소재가 된 파멸할배가 천천히 걸어오더니 침 하나를 브라이엇의 목에 찔렀다.그리고…….

“…독이군.”

“…독? 아! 설마 아까 독가루 때문인가?”

“그것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지독한 극독일세. 보아하니 겉은 멀쩡해도 장기가 전부 녹아내렸군.”

“그럼 진짜 죽었다는 거지?”

“그렇네. 이번 건 의심의 여지조차 없—.”

파멸할배가 막 확답을 주려던 차, 이백호가 한발 빠르게 ‘행동’했다.콰직-!예고도 없이 브라이엇의 머리통을 차서 그대로 축구공처럼 날려버린 것인데…….

툭, 데구르르.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적이 흐르기도 잠시. 이내 이백호가 짧게 읊조린다.

“아오, 왜 이렇게 되는 게 없냐.”

별일 아니었다는 듯 기지개를 켜며 우리가 있는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이백호.

“할배! 말해봐, 이 새끼가 갑자기 왜 뒈진 거야?”

“아까 말했듯 극독이—.”

“그러니까 이상하잖아. 독가루는 우리가 처맞았는데 왜 이 새끼가 독에 걸려 뒈지냐고.”

“나라고 세상 모든 일을 아는 건 아닐세.”

파멸할배가 귀찮게 굴지 말라는 듯 인상을 팍 쓰자 이백호도 한숨을 내쉰다.

“……으음, 혹시 미리 독약 같은 걸 먹었던 것 아니오?”

“아, 들어는 봤어요. 비밀 임무를 하는 사람들은 항상 입 안에 독단을 숨기고 다닌다고…….”

“모두가 아공간에 한눈이 팔렸을 때, 그때 독단을 씹었다고 하면 설명이 되기는 하는군요.”

납득은 되는 이야기지만, 어딘가 미심쩍은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 여기서 그 얘기를 꺼내봤자 더 이상한 분위기만 연출될 터.

“하…….”

보아하니 이백호도 뭔가 다른 생각이 자꾸만 들고 있는 거 같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어긋난 신뢰까지 써가며 심문한 게 바로 이전이다보니 또 대놓고 의심부터 하기엔 멋쩍었던 모양.

“됐고, 센터 까던 거나 마저 이어가자. 뭔가 수상한 게 나오면 바로 알려주고.”

“…아, 알겠소.”

“이 상황에서 뒷주머니 차다가 걸리면 진짜 나도 머리가 돌 거 같으니까 알아서 조심들 하고.”

마지막까지 동료들을 향한 경고의 말을 잊지 않는 이백호.

내가 얘네 입장이면 기분이 더러울 거 같은데, 얘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것 말고는 별 반응이 없는 걸 보니 이백호에게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듯하다.

“오케이, 그럼 얼추 끝났네.”

여하튼 이후로 다 같이 드롭 템들을 정리하고 있자니 분류가 거진 마무리됐다.장비면 장비.소모품이면 소모품.재화면 재화.

사람인 이상 시선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지만, 다들 이번만큼은 다른 쪽에 집중했다.바로 용도를 알 수 없는 수상한 물건들이 모인 곳이었다.

“하나씩 감정을 해보자고. 늑대 가면, 늑대 메달. 얘네는 됐으니까……. 이거, 이 그림은 뭐인 거 같냐?”

“글쎄… 그냥 예술품 같소이만…….”

“마력 시약으로 보이지 않게 쓴 글귀라든가 그런 건 보이지 않습니다.”

“오케이, 그럼 다음. 이건 대체 뭐인 거 같냐?”

“이거… 여성 속옷 아닌가요……?”

“나만 그렇게 본 게 아니었군요…….”

“아오씨! 뭐 이딴 게 있어!”

집단 지성을 이용해 수상해 보이는 물건들을 하나씩 감정해나갔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양피지 하나가 나오기 전까진.

“이건 왜 여기에 분류가 된 거예요?”

“그냥 마법 주문서 아니오?”

마법에 문외한인 일반인이라도 그냥 찢기만 하면 마법을 쓸 수 있게 해주는 스크롤.한데 이게 어째서 여기에 들어왔을까.

“누가 넣었어 이건?”

“저입니다…….”

이백호의 질문에 GM이 다소곳하게 손을 든다.

“왜 넣었는데?”

그 질문에 파멸할배가 스크롤을 쓱 보다가 앞으로 나서며 대신 답했다.

“일반 마법 주문서가 아니기 때문일 걸세.”

“……?”

“이 주문서에는 고대 마법이 담겨 있네.”

“무슨 고대 마법인데?”

“공간 이동 계열인 거 같기는 한데, 그 외에는 저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혹시 아시겠는지요?”

이내 GM의 질문에 파멸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다마다. 어쩌면 우리의 동아줄이 될지도 모를 물건인데.”

“동아줄……? 그게 무슨 소리야. 얼른 말해봐.”

관심이 생긴 이백호가 재촉하자 파멸할배가 스크롤의 이름을 말했다.

“귀환 주문서.”

“……?”

“그게 바로 이 물건의 이름일세.”

처음 듣는 아이템이었다.***

귀환 주문서.[던전 앤 스톤]을 플레이하면서 단 한 번도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스크롤.다만 그럼에도 너무나 직관적인 네이밍 덕일까?

파멸할배가 ‘동아줄’이라고 한 말이 곧바로 이해가 된다.

“…그럼 이걸 쓰면 도시로 돌아갈 수 있는 건가요?”

“그건 아무도 알지 못하네. 이 주문서는 지정된 위치로 ‘귀환’을 시켜주는 효과만 갖고 있으니까.”

“사실이라면 정말로 놀랍군요. 고정 좌표 마법진도, 마력 변환기도 없이 단지 주문서 한 장으로 공간 이동을 가능케 하다니.”

“그러니까 고대 마법 주문서인 것 아니겠는가. 고대 시절에는 더 놀라운 마법들이 가득했다고 전해지네.”

예상과 달리 도시로 즉시 귀환할 수 있는 주문서는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일행들의 눈빛에는 짙은 기대감이 어렸다.그야 지금보다 최악일 건 없으니까.

“이 주문서를 사용하면 적어도 이 유적은 벗어날 수 있다는 거네요?”

“그렇네. 하나 최악의 경우도 생각해야 할 걸세. 만약 이 주문서를 타고 넘어간 곳이 ‘잿빗 세계’라면 큰일일 테니까.”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단 말씀이시군요.”

늘 그렇듯 파멸할배는 정보만을 뱉을 뿐, 결정은 우리 몫이라는 스탠스를 취했다.고로, 일행들의 시선이 나, 그리고 이백호에게로 모였다.

혹여나 이번에도 우리 둘의 의견이 갈리면 골치가 아파지리라 여기는 눈치였다.하지만…….

“난 일단 써보자는 쪽인데, 남작님은 어때요?”

“나도 같은 의견이다.”

이번에는 둘의 생각이 갈리는 일 없이 일치했다.귀환 주문서라고 안전하단 생각은 전혀 하지 않지만, 일단 무언가 위기라도 생겨야 그걸 돌파하든가 말든가 하지.

여기서 이렇게 몇날 며칠이고 갇혀 있는 건 질릴 만큼 했다.

“다만 그래도 귀환서를 찢기 전에 만반의 준비는 갖춰야겠지.”

“저도 어그리요.”

“…….”

“아하하, 동의한다는 뜻이에요.”

그렇게 의견 일치가 끝난 후에는 아직 감정하지 못한 남은 물건들을 살폈다. 하나 귀환 주문서처럼 특별한 물건은 찾을 수 없었다.따라서…….

“귀환 주문서가 총 여덟 장…….”

“이렇게 되면 각자 한 장씩 쓰고서도 두 장이 남네요.”

총 인원이 여섯이기에, 남는 두 장은 나와 이백호가 나눠서 가졌다. 참고로 브라이엇에게서 나온 장비와 소모품들을 적절하게 분배. 

이후로는 개인 정비 시간을 충분히 가지며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었다.

“다들 준비됐으면 그럼 찢는다?”

이내 이백호가 주문서를 들어 올리자 나머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주문서를 들어 올렸다.그리고 모두가 동시에.지이이이익-!주문서를 찢었다.***

「캐릭터가 [귀환 주문서]를 사용했습니다.」「캐릭터가 지정된 위치로 이동합니다.」***

또옥, 또옥, 똑-!어디선가 들려오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이를 들으며 눈을 뜬 나는 서둘러 주변을 확인했다.

“여긴… 수정 동굴?”

“아뇨, 조금 다릅니다.”

1층 수정 동굴을 떠올리게끔 하는 동굴 안.

“그래도 다행히 낙오자는 없네.”

우선 일행 모두 같은 공간으로 이동에 성공했으며, 주변에 마물이나 적은 보이지 않는다.다만…….

“조용.”

맞은편 통로에서 모닥불 특유의 붉은 조명이 일렁거린다.화르륵-!이를 확인한 이백호가 내게 눈짓을 보냈고, 나는 자연스레 일행의 선두에 섰다.

그리고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게 조용히 한 걸음씩 걸어나갔다.터벅, 터벅.뭐, 암만 조심히 걷는들 철갑을 걸친 이 거대한 몸뚱이에서 소리가 안 날 리 만무했지만.아무튼.

“…….”

이내 코너를 돌자 모닥불 앞에 앉은 정체불명의 인물이 눈에 들어온다.인기척을 느끼지 못하는 게 이상할 정도임에도 미동조차 없이 모닥불을 내려다보고 있는 누군가.

“자네들이 이곳에 왔다는 건… 브라이엇 군은 이미 죽었다는 뜻이겠군?”

그 누군가가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천천히 말을 잇는다.

“성실한 친구였는데 말이야…….”

“됐고, 누구냐 넌?”

경계를 하면서도 호전적인 말투로 묻는 이백호.‘뭔가… 목소리가 익숙한데……?’

그런 기시감이 들며 머릿속에서 위험하다는 경종이 울리기 시작하던 그때.

스르륵.정체불명의 사내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내리며 우리를 응시한다.“그래도 오랜만일세, 모두들.”자글자글한 주름.새하얀 백발과 수염

부드러운 인상과는 대비되는 강렬한 눈빛.“……!”[던전 앤 스톤]의 제작자, 아우릴 가비스였다.

아우릴 가비스.이 빌어먹을 게임을 만든 장본인이자, 아직까지도 대체 뭘 바라는 건지 알 수가 없는 수상한 늙은이.

현대로 귀환했던 꿈속에서 만난 걸 제외하면 이 할배와 마지막으로 만난 건 원탁에서였다.뜬금없이 나타나 

‘고스트 버스터즈’라는 커뮤니티 자체를 폐쇄하겠다 하더니…….마지막에는 의미심장한 조언까지도 남겼다.

[이백호, 그 친구와는 너무 친해지지 말게.]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그런 조언을 받은 내가 지금 이렇게 이백호와 함께 잠시나마 여정을 함께하고 있고, 그 여정에서 이 할배를 만났다는 게.

“…….”

“…….”

물론 묘한 감회가 느껴지는 것과 별개로 이 할배가 남긴 말에 대해서도 빠릿하게 분석했다.

‘조금 전에 분명 모두들이라고 했지……?’

그래도 오랜만일세, 모두들.심지어 그 말을 하면서 이 할배는 우리를 쓱 둘러보기까지 했다.

마치 전부 다 구면이었다는 것처럼.

‘설마 렉 아우레스, 제이나도 이 할배랑 인연이 있는 건가?’그런 생각을 하며 주변을 쓱 보던 때였다.

“다들 못 본 새 많이 과묵해졌군?”

이어지던 정정을 끊고서 한 번 더 말을 건네오는 할배.이백호가 으르렁거리듯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 늙은이. 찾으려 할 땐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만 같은 호전적인 눈빛.하나 이를 대하는 아우릴 가비스는 너털웃음을 흘리며 능청스럽게 넘어갈 뿐이었다.

“지금 시대를 이끌어가는 자네들 앞에, 나 같은 옛날 사람이 나타날 이유가 무엇 있겠는가?”

“…옛날 사람은 개뿔. 야, 늙은이. 옛날 사람들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흐음, 무엇인가?”

잘 모르겠다는 듯한 투로 되묻는 아우릴 가비스를 보며 이백호가 짧게 읊조렸다.

“다 뒈졌어.”

살아 있으면 옛날 사람이 아니라 말하고 싶은 걸까?정확한 의도는 불분명하지만, 적어도 하나는 확실했다.

“그러니까 옛날 사람이 되고 싶으면 말해.”

아우릴 가비스를 향한 이백호의 적대감.

“언제든 두 팔 걷고 도울 테니.”

이것 하나만큼은 진짜다.연기 같은 게 아니라.

까드득.하긴, 이백호 입장에서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존재일 터였다. ‘아우릴 가비스’는 우리들을 이 좆같은 세상으로 끌고 온 장본인이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며 쌓인 모든 증오가 자연스럽게 저 할배에게 모일 수밖에 없는 것인데…….

“어르신.”

그때 돌연 가만히 있던 GM이 대화에 껴들었다.이백호와 마찬가지로 십수 년 넘게 이 세상에 갇혀 있던 고인물 플레이어인 GM이지만, 목소리에 깔린 감정은 전혀 달랐다.

“드디어 다시 뵙게 되는군요, 어르신.”

눈빛과 목소리에서 호의와 존중이 물씬 묻어나는 GM. 딱 봐도 단순히 강약약강의 법칙 때문에 납짝 엎드린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때는 제대로 인사도 드리지 못했지요. 그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허허, 그게 어디 감사할 일인가?”

“둘은 대체 뭔 얘기를 나누고 있는 건데?”

이백호가 신경질적으로 껴들었으나, GM과 할배 모두 그 의문에 대한 답은 내놓지 않았다.다만 추측을 해보자면…….

‘커뮤니티 얘기를 하는 건가?’

대화의 흐름상 왠지 그것밖에 없어보인다.그도 그럴 게, GM이 초짜 시절일 때 고스트 버스터즈의 운영 권한을 넘긴 게 바로 이 할배였으니.

“오히려 자네라면 내게 더 속상하고 서운한 게 많을 터인데, 그리 말해주니 고마울 뿐일세.”

“미리 언질을 주시지 않아 조금 놀랐습니다마는……. 염치를 안다면 서운할 리가 있겠습니까. 빌려주셨던 걸 돌려받았을 뿐인데요.”

“허허,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구먼. 자네라면 분명 크게 될 줄 알았네.”

“…덕분입니다. 그런데 혹시 남작님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이신지…….”


21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96화 21

“글쎄, 어쩌다보니 이렇게 저렇게 인연이 있었네.”

“아… 그렇습니까?”훈훈한 분위기에서 하하호호 웃으며 서로에게 덕담을 날리는 GM과 할배.영 못마땅한 시선으로 둘을 지켜보던 이백호가 궁시렁거리기 시작한다.

“하, 저 간신배 새끼는 쓸개도 없나?”

사실 나도 비슷한 감정이다.어떻게 저리 멍청하게 웃을 수 있지?저 할배 새끼만 없었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

“흐음, 나는 똑똑한 친구라고 표현하고 싶네마는.”

“…응?”“이성적이고 젊은 친구가 예의도 알지 않나?”

그때 파멸할배가 GM을 비호하는 듯한 대사를 쳤다.늙은이들 사이에서 GM은 나름 잘 먹히는 인물상인 건가?알 수 없으나, 파멸할배도 아우릴 가비스 앞에서는 GM과 딱히 다를 바 없었다.

“오랜만이올시다, 마스터.”

“아, 루인제네스……. 반갑네. 잘 지냈나 그동안?”

“잘 지내고 못 지내고 할 게 뭐 있겠소이까?”

“잘 지냈다는 뜻으로 듣겠네.”

“그나저나 마스터는 그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구려. 어찌 된 게 나 혼자서만 세월을 맞은 것 같소이다.”

“허허, 자네도 여전히 젊네.”

오랜만에 만나 가볍게 스몰 토크를 나누는가 싶었으나, 그 시간은 얼마 이어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김에 혹시 하나만 물어도 되겠소?”

“해보게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파멸할배가 묵직하게 한 마디를 날린다.

“마스터는 이미 불멸을 이룬 것이오?”

“허허, 시작부터 아주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군.”

“답하기 곤란하다면 굳이 듣지 않아도—.”

“그래도 한 가지만 답해주자면.”

이내 아우릴 가비스가 파멸할배의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마치 어린아이에게 조언을 해주듯.

“그 어느 세상에서도 영원은 존재하지 않네. 루인제네스 군.”

“…….”

“무엇이든 언젠가는 변하기 마련이지. 설령 절대 변하지 않으리라 여겼던 것마저도.”

“……굉장히 철학적인 답변이구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인상 깊었다는 것처럼 가만히 고개를 주억이는 파멸할배.다만 이백호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철학은 무슨. 해석하자면, 때리다보면 뒤지긴 한단 거 아냐?”

“오늘따라 유달리 심술이 난 거 같군?”

“그럼 안 나겠어? 딱 봐도 우리를 거기다가 가둔 게 당신 수작인 걸 이렇게 알게 됐는데.”

더 스몰 토크를 이어나가고 싶지 않은지, 성난 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본론으로 들어가는 이백호.

“내가 당장 안 덤벼든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 해. 당신은.”

늘 그렇듯 강한 워딩을 사용하며 기싸움에 들어간 녀석이지만, 애석하게도 이번에는 상대도 만만치가 않았다.

“하하… 감사해야 할 쪽은 자네라네.”

“하! 감사?”

기도 차지 않는다는 것처럼 숨을 내뱉는 이백호를 보며 아우릴 가비스가 강렬한 안광을 흩뿌린다.

“그럼 감사해야 하지 않겠나.”

“…….”

“아직도 내가 자네를 ‘처분’할 이유를 찾지 못한 것에.”

말이 끝나는 즉시 공기가 뒤바뀐 게 온몸으로 느껴진다.

“…….”

부드럽던 공기에 강철로 된 가시가 돋아난 것만 같은 감각.이내 분위기만으로 모두를 압도시킨 아우릴 가비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말을 잇는다.

“백호군, 아직도 모르겠나? 자네를 방해한 것은 내가 자네를 ‘처분’하지 않기 위함이었다는 걸.”

덤벼드냐 안 덤벼드냐를 논하던 이백호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직접적이고 위협적인 워딩.

“하지만 자꾸 이렇게 엇나가면 나도 어쩔 수 없이 ‘재고’를 하는 수밖에 없네.”

딱 보니까 이백호도 살짝 기가 눌린 게 보인다.하긴, 아무리 얘라고 해도 이 할배한테는 한 수 접어주고 갈 수밖에 없겠지.

“……그래서 대체 뭘 하고 싶은 건데? 브라이엇, 걔는 또 뭐고. 보아하니 한참 전부터 내 옆에 심어둔 거 같은데.”

“브라이엇 군은 자네를 위한 길잡이였네.”

“뭐? 길잡이……?”

“자네는 요주의 인물이니까. 한 명쯤은 필요하지 않겠나. 엇나가지 않도록 옆에서 올바른 길을 제시할 길잡이가.”

옆에서 듣는 내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뻔뻔한 대사.다만 이쪽 세상이 원래 그렇다.

“…….”

힘이 없으면 목소리도 낼 수 없는 야만의 세계.심지어 오랜 시간 강자의 특권을 누려왔던 이백호인 만큼 이런 태도에 더욱더 할 말이 없었을 터.

“그냥 말해.”

한참이나 침묵을 이어가던 이백호가 어딘가 체념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나한테 뭘 원하는 건지……. 그냥 말해보라고…….”

그 짧은 물음에서 느껴진 감정은 울분 같은 게 아니었다.단지 강하게 느껴졌다.이백호, 이 녀석이 그 긴 시간 동안 얼마나 지치고 지쳤는지.

“흐음… 딱히 자네에게 원하는 건 없네마는.”

“……뭐?”

“이제는 자네도 알지 않나? 자네가 불량품이라는 것 정도는.”

이내 아우릴 가비스가 이백호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정확한 발음으로 말한다.

“단 한 번도 나는 자네를 원한 적 없네. 자네가 이곳으로 넘어오길 바라지도 않았고. 그러니 자네가 날 증오하는 것도 사실 이해가 되지 않네. 방향이 틀렸지 않은가?”

“…….”

“뭐, 굳이 바라는 게 있다면 딱 하나. 주제를 알고 조용히 좀 지내라는 걸세.”

“…….”

“조연이면 조연답게. 이야기를 바꾸려 하지 말고.”

아우릴 가비스의 날 선 말에 이백호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침묵했다.하나 핏줄이 선 눈이 말해주고 있었다.

녀석이 지금 얼마나 큰 모멸감에 시달리고 있는지.아, 물론 공감 수치가 제로인 파멸할배는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지만.

“이백호가 조연이라면… 우리 역시 조연이라는 뜻이겠구려?”

오로지 자신의 관심을 끈 부분에만 흥미를 보이며 눈을 빛내는 파멸할배.

“자네도 그 사실에 서운한가?”

아우릴 가비스의 물음에 파멸할배가 고개를 내저었다.

“딱히 그렇진 않소이다. 자신이 주인공이라 생각할 나이는 한참이나 지난 데다가…….”

“데다가?”

“남이 만든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서 뭐하겠소?”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말이로군?”

아우릴 가비스가 어딘가 찜찜하다는 눈으로 파멸할배를 흘겼으나, 파멸할배는 아무런 내색조차 하지 않으며 다음 얘기로 넘어갈 뿐이었다.

“한데 플라이어 양과, 아우레스 군도 구면이오?”

“흐음…….”

“저 둘과는 딱히 연관될 점이 있었을 거 같지가 않아서 말이오.”

그 물음에 아우릴 가비스는 고민하는 듯한 눈으로 제이나와 렉 아우레스를 번갈아 보았다.그리고…….

“전 예전에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어요.”

제이나가 먼저 솔직하게 인연이 있었음을 밝힌다.

“제물을 바쳐 카루이 님에게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을 수 있다는 걸 알려주셨죠. 바로 저분께서.”

“……그런 일이 있었군? 그럼 아우레스 군은?”

“어… 어……. 나, 나는 그때 왕가 놈들이 노아르크 도시를 침공했을 때를 시작으로 성주님 옆에서 몇 번 뵌 적이 있었소이만?”

누가 봐도 거짓말을 하는 듯한 말투.파멸할배는 물론이고 이백호까지 눈살을 좁히자, 아우릴 가비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소 충격적인 진실을 입 밖으로 꺼냈다.

“아우레스 군은 루인제네스 군과 같은 세상 출신일세.”

“……뭐?”“저, 정말이에요? 이 사람도 악령이었다고요……?”

보아하니 일행 중 아무도 알지 못하던 정보였던 거 같은데…….

‘같이 있는 여섯 명 전부 악령이라니…….’이건 뭐 악령 드림팀도 아니고.

공교롭다는 말로도 모자라다.예전에도 절반 이상이 악령이라는 사실에 신기해 한 기억이 있는데, 설마 절반이 아니라 전원이었을 줄이야.

“저… 혹시 브라이엇 씨도…….”

그때 제이나가 아우릴 가비스를 보며 말꼬리를 흐렸다.아무래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인데…….

“브라이엇 군은 이 세상에서 나고 자란 순혈 주민일세.”

음, 그럼 일곱 명 중 여섯 명이 악령이었던 거네.왠지 기분이 이상하다.그야 어느 집단을 가든 악령들은 극소수에 속하는 입장이었으니까.

유일하게 그 반대였던 고스트 버스터즈가 악령들 사이에서 특별했던 것도 바로 그 이유고.

“순혈 주민은 뭔 또 개같은 표현이야?”

특정 어휘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투덜거리는 이백호였으나, 아우릴 가비스는 대꾸조차 해주지 않았다.

“호오, 아우레스 군의 고향이 나와 같을 줄은 전혀 예상도 못했소이만. 왜 진작 말하지 않았나?”

“아하… 하하… 속이려 한 것은 아닌데……. 실은 고향이 같은 줄은 나도 지금 처음 알았소이다.”

“하긴, 먼저 꺼낼 이야기는 아니니… 자네와는 앞으로 얘기할 게 많겠군. 그쪽 세상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서 말일세.”

“아하하… 무엇이든 물어보시오. 솔직히 말해 나도 기억이 가물가물 하오이만, 떠오르는 것들은 전부 다 말해줄 테니.”

왠지 앞으로는 쉬는 시간만 되면 아우레스와 파멸할배가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울 것만 같은데…….

‘상상이 잘 안 된단 말이지…….’그렇게 아우레스가 악령이었다는 것에 내심 놀라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때였다.

“저… 어르신?”

GM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아우릴 가비스에게 말을 걸었다.

“한데 지금 저희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을는지요……?”

“성벽 밖인지, 안인지. 아니면 그도 아닌 또 다른 어딘가인지가 궁금한가?”

“예……. 아, 아무래도 저랑 남작님은 우연히 밖에 나왔다가 휘말린 것이다 보니…….”

“뭐… 자네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군.”

“……예?”

어딘가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대사에 GM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아우릴 가비스는 더 설명하지 않고 바로 아까 전 질문의 대답으로 돌아갔다.

“이곳은 성벽 바깥 어딘가일세. 내겐 아주 의미가 깊은 장소지.”

“아… 그렇습니까……?”

“그래서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려줄 수 없음을 양해해주게.”

“예…? 그렇다면—.”

“걱정하진 말게. 이곳에 계속 자네들을 잡아두겠단 뜻이 아니니.”

“아하하…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이렇게까지 긴 여정을 할 예정은 전혀 없었던지라…….”

진짜 쓸개도 없는지 이 상황을 만든 범인에게 웃으며 알랑방귀를 뀌어대는 GM.뭐, 그래도 저런 역할을 할 사람이 한 명쯤은 있던 덕분에 얘기가 잘 진행되긴 했지만.

“잡아두지 않겠다면? 이대로 보내주겠단 거야?”

불퉁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대화를 유심히 듣던 이백호가 툭 던지듯이 묻자, 아우릴 가비스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인다.

“물론일세. 단 한 가지 약속만 해준다면.”

“…말해봐.”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건 내 예정에 없었네마는. 이왕 이렇게 됐으니 속 시원하게 말하겠네.”

“아니, 그러니까 얼른 해보라니—.”

“다른 곳에서 답을 찾으려 하지 말게.”

아우릴 가비스의 말에 이백호는 잠시 움찔하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그건 또 무슨 엉뚱한 소리야? 약속을 해달라면서 좀 더 명확하게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럼 좀 더 직관적으로 말해주지.”

“…….”

“백호, 자네가 왜 왕궁을 목표로 하는지는 충분히 잘 알고 있네.”

“그런데……?”

“하지만 그곳엔 얼씬도 하지 말게. 어차피 그곳엔 자네가 바라는 답이 없으니까.”

아우릴 가비스는 이후 약속을 어긴다거나 했을 때를 대비한 패널티에 대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야 이미 앞에서 몇 번이나 말했으니까.저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백호는 ‘처분’을 당할 것이다.그리고 그것을 이백호도 알기에.

“……그럼 대체 어디에 답이 있는데?”

이백호는 오직 딱 한 가지만을 추가로 물었고, 아우릴 가비스는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들은 ‘탐험가’이지 않은가.”

이백호의 어깨를 토닥이며.

“미궁에서 답을 찾게.”

마치 악의 따위는 전혀 없다는 것처럼.

“자네들이 원하는 모든 답은 그곳에 있으니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아우릴 가비스를 보고 있자니 왠지 ‘카루이’가 떠오른다.그러고 보면 이 할배는 카루이와 닮았다.늘 사람을 갖고 논다는 점에서.***

말이 사라진 이백호에게 아우릴 가비스는 어떠한 보채는 말 없이 차분히 대답을 기다렸다.

“…….”

“…….”

편안한 듯하면서도 무거운 압박.이백호가 백기를 들어 올리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아, 오케이. 오케이. 알겠어. 뭔 말인지. 쉽게 말해, 왕궁은 건들지 말라는 거잖아? 안 건들게. 그럼 됐지?”

거, 백기를 들 거면 건들건들거리는 태도는 빼도 될 텐데.

‘뭐… 원하는 게 있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던 때, 이백호가 능청스러운 말투로 말을 잇는다.

“근데 당신도 만능은 아닌가봐? 이렇게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면서 뒷수습 하는 거 보니.”

“……?”

“왜 그렇잖아? 보아하니 그쪽은 미궁이 폐쇄된 것도 별로 마음에 안 드는 거 같던데. 사실 이게 다 그쪽이 전멸 위기에 처한 노아르크를 구해줘서 생긴 일이잖아?”

“그래서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아니, 뭐 따로 그런 게 있는 건 아니고……. 그냥 그렇다고. 이렇게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정도면 당신도 뭔가 일이 꼬이고 있겠구나 싶어서.”

해석하자면, 자기의 추측이 맞는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떠봤다는 뜻.

“근데 역시 반응을 보니 맞긴 한가 보네?”


39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97화 39

“하하… 자네는 여전하군. 걱정은 고맙네마는, 그럴 필요는 없네. 개미가 사람을 걱정한다고 해서, 뭔가 달라지는 게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인자하게 웃으며 뼈를 때리는 아우릴 가비스.그 말에 표정 관리 못하며 어색하게 입만 웃고 있는 걸 보니 이번 딜교환은 마지막까지 이백호의 완패였다.

“자, 그럼 오늘의 만남은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겠군.”

“저… 어르신?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오늘은 시간이 늦었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오늘 하려 했던 질문은 그때 듣지.”

“…또 만나뵐 수 있단 뜻일는지요?”

“물론일세. 자네는 모범생이니까. 항상 잘 지켜보고 있다네.”

“그, 그렇습니까……?”

또 기회가 있다는 말에 GM도 아쉬움이 덜어진 듯했고, 그런 GM을 보며 푸근한 미소를 내짓던 아우릴 가비스가 우리를 동굴 안쪽으로 이끌었다.터벅, 터벅.

한 1분 정도 걷자 나타난 널찍한 공동.

“와…….”

“몇 개야, 이게?”

공동에 도착하자마자 모두가 탄성을 흘린다.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축구를 해도 될 것처럼 널찍한 공동의 벽면에 차원 비석이 가지런히 세워져 있었거든.얼추 봐도 수백 개는 될 거 같은데…….

“자네들은……. 음, 이게 좋겠군.”

이내 아우릴 가비스가 우리가 이용할 차원 비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혹시 저게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있을는지요?”

“흐음, 마음 같아선 나중의 재미로 남겨두라 하고 싶네마는. 자네가 너무 불안해하니 말해주지. 이걸 타고 나가면 처음 그 장소로 가게 될 걸세.”

“처음 그 장소라 하심은……. 혹시 마법진이 파손된 그곳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그렇네.”

행선지를 알고 나자 마음이 놓인 듯한 표정을 짓는 GM.근데 이게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이건가?‘이상할 정도로 얘 질문엔 매번 대답을 잘 해준단 말이지.’

어쩌면 GM이 그걸 노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뭐, 내가 보기엔 쓸데없는 짓 같지만.암만 앞에서 하하호호 웃고 떠들어도, 이 음침한 할배는 웃는 얼굴로 뒤에서 침을 뱉어댈 것이다.

솨아아아아아-!이내 포탈이 열리자 아우릴 가비스가 어서 떠나란 듯한 시선을 보내고, 이에 이백호가 바닥에 침을 퉷 뱉는다.그리고…….

“재수 없는 망할 늙은이.”

더는 한 공간에 있기 싫다는 듯 첫 순번으로 포탈 안에 들어선다.

“다음은 내가 가지. 혹시 백호 군이 그새 사고를 칠 수 있으니.”

두 번째는 파멸할배, 세 번째는 아우레스…….이후 제이나와 GM까지 포탈을 넘어가며 어느새 나와 아우릴 가비스 단둘이 남게 됐다.

‘이제는 연기할 필요가 없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포탈 앞에서 멈추자 아우릴 가비스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왜, 얼른 갔으면 좋겠습니까?”

툴툴대듯 말하자 이번에도 인자하게 웃는 아우릴 가비스.

“허허, 그럴 리가. 내가 언제 자네에게 눈치라도 준 것처럼 말하는군? 단지 내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서 봤을 뿐이네.”

“…….”

“자네답지 않군?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해보게.”

거, 그래놓고 대답하기 싫은 것들은 절대 말해주지 않을 거면서.나는 주변을 쓱 둘러보다가 GM을 참고해 나름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어르신, 딱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자네는 항상 나만 보면 뭔가 물어보는 거 같군.”

“어르신께서는 그만큼 비밀이 많으시니까요.”

“허허… 한번 말해보게. 무엇을 물으려는 겐가?”

“여기는 대체 어떤 장소입니까?”

내 질문에 아우릴 가비스는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왜 하필 그게 궁금한 겐가? 다른 중요한 질문들도 더 있을 텐데.”

“다른 중요한 것들은 벌써 몇 번이나 물어봤지만, 제대로 답을 못 들었으니까요.”

헛물 켜는 건 이제 안 하기로 했다고 툴툴대듯 말하자 아우릴 가비스가 갑자기 빵 터졌다.

“……뭣? 하핫! 하하핫! 아하하하핫!”

…미친 늙은이인가?여기서 대체 어느 부분이 웃기다고?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이 늙은이의 기분이 좋아진 건 긍정적인 부분이었다.

“아하하… 미안하네. 갑자기 옛 기억이 떠올라서.”

“옛 기억……?”

“아무튼, 최근 들어 자네에게 미안한 일들이 여럿 있었으니, 물은 것에 답은 해주겠네.”

“오, 그렇다니 정말 너무나도 감사하군요.”

“비꼬지 말게.”

“예…….”

모처럼 답을 해줄 마음이 생긴 늙은이인 만큼, 더 신경을 긁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기로 했다.그야 이번 질문이 나름 중요해보였거든.

[이곳은 성벽 바깥 어딘가일세.]성벽 바깥 어딘가.[내겐 아주 의미가 깊은 장소지.]아우릴 가비스의 의미 깊은 장소.

심지어 이곳은 1층 수정 동굴과도 굉장히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대체 여기는 어떤 장소일까.

“잠시 걷겠나?”

의문이 점점 커져가는 가운데 아우릴 가비스가 산책이라도 가자는 듯 말했고, 나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앞서 나가기 시작한 아우릴 가비스의 뒤를 따르고 있자, 돌연 선문답 같은 말을 해왔다.

“진실이라 믿고 싶은 거짓과 거짓이라 믿고 싶은 진실.”

“예……?”

“자네는 이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무엇을 택하겠나?”

갑자기 이런 걸 왜 묻나 싶기도 하지만, 이 늙은이가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닐 터.나는 신중하게 고민했다.

그러고 보면 옛날에 인터넷에서 이것과 비슷한 주제의 밸런스 게임을 본 적 있었다.똥의 맛이 나는 카레.카레 맛이 나는 똥.

아, 물론 조금 전에 시작된 선문답 내용과는 명백히 다른 부분들이 있었다.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고르기가 쉬웠다.

“전 후자입니다.”

“거짓이라 믿고 싶은 진실 쪽이 좋다는 건가?”

“그래도 진짜이니까요.”

“흐음, 그렇군…….”

아우릴 가비스는 내 답변을 듣고서 애매한 반응을 보일 뿐, 더 이상 말을 해오지 않았다.거, 성심성의껏 답변을 해줬건만.

“도착했군.”

아우릴 가비스가 멈춰선 곳은 동굴 통로를 가로막은 석문 앞이었다.석문엔 마법적인 무언가가 잔뜩 발려있는지 손을 올리자마자 자동으로 열렸다.

그리고…….

“……?”

전혀 예상치 못한 구조의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마치 우주를 연상케 하는 공간.일직선으로 뻗은 계단이 저 위로 이어져 있다.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서 올라오게.”

늘 그렇듯 할배는 아무런 설명 없이 먼저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고, 나도 묵묵히 주변을 구경하며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터벅, 터벅.계단을 하염없이 올라가는 중에도 알 수 있었다.

저 계단 끝, 제단 위에 올려져 있는 저것을 보여주기 위해 날 이곳에 데려왔다는 것이.

“저게 뭡니까……?”

“가서 보면 자네도 바로 알아볼 걸세.”

이건 또 뭔 소리인가 싶었으나, 실제로도 계단의 끝에 올라선 순간 알 수 있었다.얇은 막으로 둘러 싸인 채 제단 위에 떠올라 있는 이 물건의 정체가 무엇인지.

“기록의 파편석…….”

심지어 하나도 아닌 수백 개가 허공에 떠오른 채로 돌아다니고 있다.

“이걸 전부 손수 모으신 겁니까?”

그런 내 물음에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 아우릴 가비스가 허공 위로 손을 뻗자, 은하수처럼 흩어져 천천히 공전하듯 부유하고 있던 파편석 하나가 서서히 이쪽으로 당겨졌다.

“읽어보겠나?”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군말없이 파편석에 적힌 고대어를 읽어내렸다.다만 문제는…….

“이계에서 온 악령……. 이건 어떻게 읽는 겁니까?”

해석이 되지 않는 것이 있다.

“이건 그냥 고대어가 아니라 그냥 무늬 같은데…….”

“해석하지 않아도 되네. 사람으로 치자면 이름 같은 것이니까.”

음, 그렇다면 일단 넘어가기로 하고…….남은 파편석의 내용을 전부 다 읽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그야 엄청 짧았거든.

“이계에서 온 악령 ‘————‘가 세 명의 동료를 잃고서 비로소 본인이 나아가야 할 길을 깨달았…….”

…어?아니, 잠깐만.

“혹시 이거 ‘————‘가 접니까……?”

황급히 옆을 보며 물었지만, 아우릴 가비스는 부드럽게 웃을 뿐 답하지 않았다.

“…….”

니미럴.

기록의 파편석.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통틀어 모든 시간을 적어 두었다는 ‘기록석’의 파편.

난 이 ‘기록’의 힘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그야 한 번 겪어보았으니까.두근-!기록의 파편석을 통해 가게 됐던 과거 시절.

그때부터 나는 한 사람이 죽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 온갖 난리를 쳤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기록석에 적힌 이야기들은 결국엔 완성된다.

물론 아멜리아처럼 ‘눈속임’을 이용하는 꼼수도 있긴 했지만…….

‘이번엔 그런 꼼수는 안 통하겠지.’

애초에 어떻게 하겠는가?내가 순진한 열살배기 꼬맹이도 아닐지언정.

동료들한테 죽은 척하며 날 속이라는 것도 불가능.게다가 그 시기조차 제대로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두근-!세 명…….‘세 명이라…….’

[던전 앤 스톤]을 하다보면 동료가 죽는 일은 일상다반사다.한데 어째서 이 작은 숫자가 이토록 크고, 절망적이게 느껴지는 걸까.두근-!

심장이 벌써 조여오는 것과 별개로, 머리는 차갑게 식으며 생각한다.그 세 명이 누구일까.아니, 정확히는 차라리 누구였으면 좋을까.

한 집단을 이끄는 사람으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될 생각마저 빠르게 스쳐지나가던 그때.

“결말을 알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지.”

내게 인생 최대의 고민거리를 던진 아우릴 가비스가 날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그 모습에 순간 머리에 피가 거꾸로 솟았다.

“…뭐?”

당장에라도 주먹을 휘둘러 저 늙어빠진 면상에 박아넣고 싶은 기분이었다.하지만…….

“…….”

참아야 했다.여기서 주먹을 박아넣어봤자 내 손해밖에 안 될 테니까.그래, 그러니까…….

“언제…….”

몸이 부르르 떨릴 만큼 이를 악 물고 버티며 그에게 묻는다.

“언제인지… 아십니까? 여기 적혀진 일들이 벌어지는 때가……?”

“알 수 없네. 기록석이 온전했다면 모를까. 떨어져 나온 파편만으로는 시기를 추측하기 어렵지.”

‘뭐야, 그럼 나한테 도움을 줄 게 하나도 없다는 거네?’순간 머리에서 실 같은 무언가가 픽 하고 끊어지는 감각이 듦과 동시, 아우릴 가비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기록석에 기록되는 방식을 보았을 때, 이 또한 분명 하나의 사건일 걸세.”

쉽게 말해, 오랜 시간 동안 한 명씩 죽어서 총 세 명이 되는 게 아니라, 한 ‘사건’이 이어지는 동안 무려 세 명이 죽는다는 뜻.

이내 나는 이를 악문 채로 그에게 물었다.

“……그 세 명이 누구인지도 알 수 있나?”

찰나 동안 물어볼까 말까 수백 수천 번을 고민한 말.하나 그런 내 고민을 알기나 하는지 이 할배는 정말이지 쉽게 즉답했다.

“알지 못하네.”

어떠한 변명도 설명도 없는 ‘모른다’.그런데 어째선지 그 말에 화가 나는 한편으로는 안도하기도 했다.만약, 그 이름들이 나왔다면 정말 미쳤을 테니까.

“심경이 복잡해보이는군. 동료들이 자네에게는 그토록 중요한가?”

“……긁지 마십시오. 지금 진짜 한계니까.”

“그렇다면야.”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며 한 말에 아우릴 가비스도 더 이상 뭐라 말을 걸지 않았고, 그 이후로 정적의 시간이 이어졌다.두근-!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심장은 쿵쾅거렸고, 발끝에 들어간 힘은 풀릴 기미가 없었다.하지만…….

‘정보.’그래도 조금은 이성이 돌아왔다.

“어르신.”

“조금은 정신이 돌아왔나보군.”

그야 어차피 ‘기록’ 된 일은 당장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지 않은가.

“어르신께서 이걸 제게 보여준 이유가 대체 뭡니까?”

일단 이걸 알아내는 게 먼저라 판단했다.사람 갖고 장난치는 게 특기이자 취미인 이 할배가 이유 없이 이걸 보여주진 않았을 테니까.

“이유라……. 솔직히 말하면 변덕에 가깝네. 실제로 아까 자네가 그대로 떠났다면, 또 이곳이 어디인지 묻지 않았다면 보여줄 일도 없었을 테니.”

“…….”

“한데, 믿기지 않는단 표정이군?”

당연히 그 말이 믿어질 리가.암만 내가 먼저 떠나지 않고 말을 걸었다 한들, 이걸 보여준 데는 어두운 꿍꿍이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하지만…….

“암만 봐도 자네는 전자일세.”

“……?”“아까 자네는 후자라고 말했지만, 그건 단지 자네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일 뿐. 자네는 전자일세.”

처음엔 무슨 말을 하려는가 싶었으나, 머지않아 이해가 됐다.아까 나눈 선문답의 연장선이었다.진실이라 믿고 싶은 거짓.그리고 거짓이라 믿고 싶은 진실.

“자네는 ‘변덕’이라는 내 말이 거짓이었으면 하지만, 이건 틀림없는 진실일세.”

논점 흐리기를 위한 억지 논리처럼도 들렸지만, 뭐라 날카롭게 반박할 만한 거리가 없었다.하나 그럼에도 어떻게든 거리를 찾던 중.

“물론 그렇다고 자네에게 실망하지 않네. 이 물음을 백 명에게 던지면 모두가 ‘진실’을 택하지만, 실제 그 상황에 처하면 상황이 역전되니……."

“…….”

“안 그런가 비요른 얀델… 아니, 이한수 군?”

씨바, 저러니까 할 말이 없네.이 할배를 말로 이겨먹는 건 깔끔하게 포기하자.

“……알겠습니다. 내가 괜히 말을 걸어서 일이 이렇게 됐을 뿐, 뭘 노린 게 아니란 뜻 아닙니까?”

체념하듯 말하자 아우릴 가비스가 어딘가 쓸쓸한 눈으로 은하수처럼 허공 위에 펼쳐진 기록의 파편석을 올려다본다.

“자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진 몰라도, 나는 괴물 같은 것이 아닐세. 또한 백호 군이 말했듯, 만능도 아니지…….”

“…….”

“단지 한 가지를 위해 열심히 발버둥치며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평범한 인간일세. 자네와 마찬가지로.”

음, 글쎄.진지한 와중에 미안한데,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내 눈엔 그냥 미친 늙은이처럼밖에 안 보인다.굳이 말해 산통 깰 필요는 없겠지마는.

“…이왕 온 김에 다른 것도 보고 가도 됩니까?”“동료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괜찮겠나?”

“…동료는 무슨.”

걔네들은 그냥 딱 ‘동행’ 정도면 충분하다.

“괜찮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26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98화 26

“흐음, 그렇다고 하면 딱 하나는 더 보여주겠네. 한데 뭐가 좋을는지……. 아, 아예 이번에는 자네가 한번 골라보겠는가?”

아우릴 가비스의 제안은 나쁘지 않았다.아까처럼 하나를 콕 집어서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고를 수 있다면, 이걸로 수작 부리려는 건 막을 수 있을 터.

“…….”

다만, 무엇을 골라야 할지 한참이나 망설이고 있자니 답답했는지 한마디를 옆에서 덧붙인다.

“뭘 그리 고민하는가? 어차피 무엇을 고르던 자네 운명대로일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 숨은 왜 쉬고, 생각은 왜 합니까?”

일단 쏘아붙이기는 했으나, 할배의 말을 듣고나니 이런 거로 고민하는 게 의미없다 느껴지긴 했다.따라서…….

“저기 저거. 저기 역삼각형 모양의 튼실한 놈으로 주십쇼.”

그나마 파편들 중에서 가장 커 보이는 것을 골랐다.크기가 큰 만큼 읽을 거리도 많을 거 같다는 판단.

한데 이 할배는 모든 파편석의 기록들을 외우고 있었을까?

“흐음… 하필 저걸 고를 줄이야.”

“왜요?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문제랄 건 없네마는……. 뭐, 이것도 자네의 운명이라면 운명인 거겠지.”

이후 아우릴 가비스가 정말 보겠냐고 한 번 더 물었고, 나는 고민 끝에 보겠다고 답했다.솨아아아아아아-!

이윽고 손을 뻗은 할배의 손을 향해서 천천히 하강하는 파편석.머지않아 글자가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가 되었다.

한데 내 선택이 틀렸을까.‘뭐 이리 빈 자리가 많아?’크기가 제일 커서 골랐는데, 막상 실제로 보니까 여기저기 부서지고 패여서 읽을 수 있는 글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나마 온전한 것만이라도 읽어보자면.

[………논이 불타오르던 날, 이……… … 악령 ‘————’가 믿…… 동료…게 배신……다.]

일단 이름을 상징한다는 그 무늬 자체는 아까 전의 보았던 것과 일치했다.

즉, ‘————’가 나라는 뜻인데…….

“황도 카르논이 불타오르던 날… 믿었던 동료에게 배신당했다……?”

파손 이슈로 읽을 수 없는 부분들을 문맥에 따라 끼워맞추자면 대충 이런 느낌이다.

“제가 올바르게 해석한 게 맞습니까?”

“그 어느 순간에서든, 해석은 본인의 몫인 법일세.”

“하, 쓰읍…….”

괜히 본다고 했던 걸까?안 그래도 복잡하던 머리가 더욱더 복잡해졌다.어떤 사고로 세 명의 동료가 죽고.

그다음인지, 이전인지 몰라도 동료 중 하나가 나를 배신한다 그러고.역시 바꿀 수 없는 미래를 알게 되는 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는 생각이 든다.

“흥미롭군.”

“……제가 괴로운 게 그리 즐거우십니까?”

“그것보단 그 많은 파편들 중에 딱 자네가 나오는 걸 고른 게 신기해서 말일세. 이게 운명의 힘이라는 거겠지.”

흥미롭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는지, 할배는 내친김에 하나 더 보지 않겠냐고 제안까지 해왔다.하지만…….

“아뇨, 됐습니다. 여기서 더 머리가 아파지는 건 사양이라서요.”

“흐음, 자네가 그렇다면 그렇게 되는 거겠지. 알겠네. 더 제안하지 않지.”

그렇게 기록석 투어는 이쯤에서 마무리를 짓고 다시금 계단을 타고 내려와 동굴로 돌아왔다.그 과정에서는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그럼 이제 가는 겐가?”

“예, 지금 이렇게 늦게 나온 것만으로도 이백호가 개지랄을 떨 테니까요.”

“그 친구는 자네와 닮았네. 무엇이든 알고 싶어한단 점에서.”

“언제는 친하게 지내지 말라면서요?”

“그 조언은 아직도 여전하네. 이백호와 친하게 지내서 좋을 게 없어.”

“그 말… 제 입장에서입니까. 아니면 어르신 입장에서입니까?”

“둘 다일세.”

오랜만에 느끼는 거지만 이 할배랑은 대화를 오래 해도 실속이 없게 느껴진다.하는 모든 말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서 더욱더 그렇다.

나눈 말들은 많아도 믿을 수 있는 게 없달까.

“……말이 나온김에 한 가지만 더 알려주겠네.”

“하… 해보십쇼.”

“이백호를 조심하게.”

“…그건 전에 했던 말 아닙니까?”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아우릴 가비스가 끝까지 들으라는 듯 말을 잇는다.

“조연이니 뭐니 말은 했지만, 이백호는 굉장히 특이한 존재라네. 저기 보이는가?”

이내 허공에서 천천히 공전 중인 수백 개의 파편석들을 가리키는 아우릴 가비스.

“이곳에 모인 것만이 아니라, 수많은 파편석의 기록을 직접 보았네마는, 그 어디에도 이백호에 대한 기록은 존재하지가 않네.”

“……?”

“이는 몹시 이상한 일일세. 그만큼이나 영향력이 있으며, 무엇보다 자네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자를 그 어느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저 말이 사실이라면, 확실히 좀 이상하긴 하다.이백호에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떠한 비밀이 숨겨져 있기라도 한 걸까?

알 수 없으나, 아우릴 가비스는 다시금 말했다

“그러니 이백호를 조심하게.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함은, 그만큼 기록에서도 자유롭다는 뜻이니. 아예 영향이 없진 않겠지만, 적어도 우리보다는 말일세.”

“……안 그래도 놈은 경계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 마십쇼.”

“그렇다면 다행일세.”

“이렇게 헤어져도 또 언젠가 만나겠죠?”

“그런 걸 필연이라고 하지.”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되도록이면 아주 늦게 만나도록 하고요.”

“나 역시 바라는 바일세.”

그 말을 끝으로 아우릴 가비스는 말 없이 나를 지켜보았고, 나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그저 한 번 더 할배를 위아래로 훑은 뒤, 눈인사 정도만 건네고 포탈을 탔다.

그리고…….

“오! 왔구려!”

“다, 다행입니다! 걱정했는데!”

“뭐야! 왜 이제야 왔어! 남작님! 그 늙은이랑 뭔가 대화했지? 어? 그렇지?”

포탈을 타고 눈을 뜬 즉시 사방에서 쏟아지는 여러 말들을 들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이백호.렉 아우레스.제이나 플라이어.벨베브 루인제네스.유르벤 하벨리온.

전원이 악령이라는 특이한 점은 둘째치고.나까지 합치면 딱 한 팀의 단위인 여섯 명으로 맞춰지는 구성.

“뭐예요? 그 눈빛은? 나 방금 뭔가 오싹했는데?”

이백호의 호들갑은 싹 무시하고서, 나는 아까 읽었던 기록을 떠올렸다.

문득 번개가 치듯 떠오른 게 있었다.

[이계에서 온 악령 ‘————’가 세 명의 동료를 잃고서 비로소 본인이 나아가야 길을 깨달았다.]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세 명의 동료.

“너희들, 내 동료가 돼라.”

어쩌면 뭔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즉흥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그도 그럴 게, 기록에는 ‘세 명의 동료’라고만 적혀 있었으니까.

‘이 녀석들을 동료로 만들어서 매일 함께 다니면……. 이놈들 중 세 명이 죽고 넘길 수도 있는 거잖아?’

얼핏 들으면 말도 안 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논리적으로 틀린 점을 찾아보긴 어렵다.

뭐, 암만 그래도 정말 그리 되겠냐는 의문이 남기는 하지만…….그래서 뭐 어쩌겠는가?일단 해볼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지.

“동료… 요?”

다만 그런 내 제안이 당혹스럽게 들렸을까.깜빡이도 없이 들어간 내 제안에 모두가 어벙벙한 표정을 짓는다.아, 그중 이백호가 압권이었다.

“와, 이거 더 궁금해지네. 그 늙은이한테 뭔 얘기를 들었기에 갑자기 저러는 거야?”

벙찐 표정을 짓기도 잠시, 금방 날카로운 눈빛을 되찾고서 나를 쳐다보는 이백호.그 반응에 나도 좀 급했구나 싶기는 했다.

아무리 동료 목숨이 걸린 상황이어도 침착하게 단계별로 진행을 했어야 했건만.

“남작님, 그 늙은이랑 뭐 했어요?”

“……딱히 별거 하지 않았다만.”

“에이, 그걸 누가 믿어요?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런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고?”

“단지 함께 여정을 이어나가다보니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너희랑 같이 미궁에 들어가면 든든하기는 하겠다고.”

물론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그 어느 곳에서보다 뒤통수를 조심해야 하는 곳이 바로 미궁인데, 이런 놈들이랑 어떻게 같이 들어가?

내가 없을 때도 서로가 서로를 대할 때 배 안에 칼 한 자루씩 숨기고 있던 놈들이건만.나까지 끼면 정말 대환장 파티가 열릴 것이다.

“흐음……. 근데 우리랑 다니면 남작님 클랜은 어쩌고요?”

이백호가 슬쩍 떠보듯이 묻는다.보아하니 꿍꿍이가 없다는 내 말은 전혀 믿지 않는 듯했지만, 일단 얘기를 들어보긴 하겠다는 눈치였다.

“글쎄, 그건 앞으로 생각을 해봐야지. 애초에 너네가 승낙을 한 것도 아니니까.”

따라서 아직은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상황을 넘겼다.하지만…….

“오! 거인, 얀델 남작이 우리 동료가 되겠다니? 이거 정말 우리도 진지하게 생각해봐야겠는 걸?”

이백호가 국어책을 읽는 톤으로 중얼거린다.누가 봐도 나를 비꼬고 있단 걸 알 수 있었으나, 단 한 명만은 그렇지 않았다.

“저… 백호……? 남작이 팀에 들어오면 내, 내가 있을 자리가 애매해지는데……?”

이백호 팀의 탱커, 렉 아우레스.그래도 탐험가라고 자기 밥그릇을 챙기는 본능은 남아 있는 듯한데…….약간의 눈치까지만 겸비했다면 훨씬 좋았을련만.

“아우레스… 부탁이니 가만 있어요 좀…….”

“…어, 어떻게 가만히 있소? 내, 내 자리가 위협을 받고 있는—!”

조용히 말리던 제이나의 노력도 통하지 않자, 이백호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아니, 그런 거 아니니까! 좀 가만히 있으라고! 진짜 강퇴당할래?”

“…….”“아, 진짜 짜증나네.”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는 아우레스 때문에 맥이 탁 풀렸는지 한숨을 푹 내쉬는 이백호.연기 톤의 국어책 말투는 없어진 지 오래였다.

“이봐요, 남작님.”

“듣고 있으니 말해라.”

“탐험가들이 제일 잘하는 게 뭔지 알아요?”

그게 뭐냐는 눈빛을 던지자, 이백호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알아보는 거요.”

“……?”

“내가 유리한지 불리한지, 저쪽이 센지, 내가 더 센지.”

두근-!뒷말을 듣지 않았음에도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그걸 알아야 제대로 할 수 있거든요.”

“……뭐를?”

“뭐긴요. 이미 알면서.”

그 말을 끝으로 이백호가 눈짓하자 파멸할배와, 렉 아우레스, 그리고 제이나까지 이백호의 옆으로 다가선다.그리고…….

“야, 너 거기 계속 있을 거야?”

GM에게까지 툭 던지듯이 말한다.

“그러고 있다가 괜히 불똥 맞고 뒈진다?”

등골에 소름이 쫙 끼칠 만큼 진하게 흩뿌려진 살기에 GM이 멈칫하며 나와 이백호를 번갈아본다.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갈등이 깊어지는 듯했다.

아, 물론 ‘인간’답게 선택까지 긴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탱커와 마법사.이 두 조합으로 저 네 명을 상대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죄, 죄송합니다…….”

그래도 양심의 가책은 있었는지, 내게 사죄의 말을 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이백호에게 향하는 GM.딱히 배신감까지는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이 새끼랑 나랑은 동료 같은 게 아니었으니.스윽…….무슨 짓이냐 묻는 대신, 방패를 들어 올리며 언제든 전투를 취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춘다.

그리고 그런 날 보며.

“너무 서운해하진 말아요. 솔직히 말하면 내가 더 서운하니까.”

이백호가 말한다.

“그도 그럴 게, 암만 봐도 그 늙은이랑 뭔가 얘기를 하고 나온 게 뻔하잖아? 근데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그 얘기가 뭔지는 꼭 좀 들어야겠거든.”

“…….”

“탐험가의 방식을 써서라도.”

이 새끼는 대체 탐험가를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그런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는, 저 말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나 자신이 있다.

힘이 없으면 억울해지는 수밖에 없다.이는 물건을 사기 위해선 돈을 지불한다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이 세계의 섭리였으니까.

터벅.언제라도 달려들 기세로 한 걸음 다가오는 이백호.다만 다가온 만큼 뒷걸음질치며 물러나지는 않는다.그도 그렇잖아?

‘도망치는 건 불가능.’

이 상황에서 도망을 치면 어디로 칠 것이며, 이렇게 둔한 몸뚱이로 도망쳐 봤자 얼마 못 가 따라잡힐 뿐이다.

다만 그런 내 결정이 의외였을까?

“이야, 여기서도 안 물러나?”

이백호가 조금 놀란 듯 중얼거린다.하나 내가 보기에는 전혀 놀랄 구석이 없었다.

그야 방패는 뒤가 아닌, 앞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니까.

“설마 내가 못 죽일 거 같아서 그런 건가?”

뭐, 그 생각도 사실 하지 않은 건 아니다.이백호는 내가 심연의 문을 열기를 바라고 있으니.절대 나를 죽일 수 없다.하지만…….

“근데 이걸 어쩌나? 죽이지 못해도 좆 같게 만들 방법이 벌써 수십 개는 떠오르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놈을 무시할 생각은 없다.방금 이놈도 직접 말했듯, 죽이지 않아도 나를 괴롭힐 방법은 차고 넘치니까.

브라이엇이 겪었던 ‘심문’까지 갈 것도 없다.

“예를 들면, 입고 있는 장비를 전부 빼았는다든가. 앞으로는 여색에 한눈 팔리지 않게 중성화 수술을 시켜버린다든가.”

아, 어…….음, 중성화는 전혀 예상 못 했는데.

“…….”

씨바, 그냥 다 솔직히 말해야 하나?“그도 아니면, 돌아가서 남작님 동료들을 전부 다 죽여버린다고 협박—.

”아니, 그럴 리가.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함성을 내지르며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는다.

“자꾸 뭐라고 짖는 거냐?”

이백호는 들개다.상대가 약해보이면 뼈에 살 한 점 남기지 않고 발라먹을 들개.그래, 그러니까…….

“잔말 말고 덤벼.”

물러나선 안 되는 자리다.***

여기서 더 말을 걸어봐야 짖는 소리만 우렁찬 개처럼 보인다 여겼을까?이백호가 입을 꾹 다물며 파생된 정적.

“…….”

“…….”


28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699화 28

정적 속에서 대치가 이어진다.그리고 그런 시간 속에서 이백호도 생각 정리가 다 끝났을까.

“뭔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 이렇게 세게 나올 수 있는 건가도 싶었는데… 뭐 어느 쪽이든 됐어. 일단 해보면 알겠지.”

“…….”

“우리 남작님 옷부터 벗자.”

“……?”

“그래야 중성화를 하든 뭘 하든 하지.”

그 말을 끝으로 이백호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진다.

“……!”

내 민첩 수치로는 쫓기 어려울 만큼 빠른 움직임.하나 수많은 역경을 넘은 전사의 본능이 놈의 공격을 캐치하고서 방패를 내밀었다.하지만…….

“PVP인데 되겠어 그게?”

주먹의 동선을 예상해서 내민 방패에선 어떠한 충격도 감지되지가 않고.

“딜 씹는 건.”

전혀 예상치 못한 뒤통수에서 충격이 발생한다.

“방패를 때렸을 때만이잖아.”

콰아아아아앙-!흡사 공성 병기에 때려맞은 듯한 충격.악 소리를 낼 새도 없이 [거대화]까지 쓴 몸체가 앞으로 젖혀진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어?’정신을 차렸을 땐, 턱주가리에서도 큰 충격이 발생하며 몸이 다시금 뒤로 젖혀진다.

뭐지? 어퍼컷인가?저 각도에서 어떻게 했는진 알 수 없지만, 하나는 확실하다.이번에는 대미지가 제대로 들어갔다.

속을 다 게워내고 싶어질 만큼.

“우욱…….”

“신기하지? 이렇게 치면 체감상 딜이 두 배는 더 들어가는 거 같더라고. 아, 참고로 게임엔 없던 추가 효과인데… 읏차!”

어떻게든 자세를 잡고 악마분쇄자를 휘둘렀지만 얄미울 정도로 민첩하게 점프로 회피하는 이백호.

“아, 준비 다 됐나보네.”

돌연 이백호가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린 그 순간.

“악감정은 없네.”

정신을 차려보니 주변이 붉었다.이에 멍하니 고개를 위로 드니, 태양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구체가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후우우우우웅-!불길할 정도로 검붉은 마력으로 뒤덮인 구체.애석하게도, 구체는 [거대화] 상태인 내 방패보다도 컸다.

한 수십 배는 더.‘완벽하게 가드는 불가능.’빠르게 판단을 마친 즉시.방패를 들어 하늘을 가림과 동시에 드래곤 모드를 활성화한다.

「캐릭터가 [탐욕의 비늘]을 시전했습니다.」「캐릭터의 항마력이 500 이상입니다.」「받는 모든 마법 피해가 50% 감소합니다.」

무적 바바리안(최종본)에서 ‘항마력’ 파트를 맡고 있는 벨라리오스의 액티브 스킬.

그 스킬을 쓰기 무섭게.번뜩-!소음마저 집어삼키는 강렬한 빛이 내 전신을 감싼다.그리고…….치이이이이이익-!

피부를 덮은 비늘 위로 팔팔 끓던 냄비의 뚜껑을 연 것처럼 피어나는 연기가 치솟는다.뜨겁고, 따갑고, 쓰라리다.하지만…….

“와, 저걸 맞고도 끄떡이 없네.”

치명상까지 갈 부상은 결코 아니다.그야 방패로 몸의 중요 부위는 전부 막아낼 수 있었으니까.

“우리 남작님 진짜 괴물이 됐구나?”

멀쩡하게 서 있는 날 보며 감탄하기도 잠시.이백호가 다시금 거리를 좁혀 날파리처럼 공격을 해온다.

콰앙! 콰앙!묵직한 잽을 연신 날려대고.콰아아아아앙-!그사이에 강렬한 일격을 한 방씩 섞어넣는다.

솨아아아-!파멸할배의 저주 마법, 제이나의 각종 디버프가 내 몸을 뒤덮고.후우우우우우웅-!

방패로는 막을 수 없는 파멸 할배의 마법이 중간중간 내리꽂힌다.하지만…….퍼억-!도리어 나를 복날에 개패듯 하던 이백호 쪽에서 고개를 갸웃한다.

“뭐야, 이제는 목이 돌아가지도 않네?”

그야 방패바바는 처맞을수록 단단해지는 성질을 가졌으니까.

「흡수한 마법 피해에 비례해 물리 내성 수치가 상승합니다.」지금까지 마법을 몇 대나 처맞았는데?

「캐릭터의 물리 내성 수치가 750 이상입니다.」「모든 물리 피해가 절반으로 감소합니다.」이미 [진화형 외피] 3단계가 활성화됐을 뿐만 아니라.

「캐릭터가 [철옹성]을 시전했습니다.」「[진화형 외피]의 효과가 1.5배 증가합니다.」이제 이것도 켤 거거든.

퍽-!아까에 비하면 간지러울 정도로 약해진 평타.숫적 4:1에 상황에서도 배짱을 부릴 수 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여기서 필살기들은 못 쓸 거 아니야.’[별의 소멸]이라든가.아니면 황금 유적에서 브라이엇을 잡기 위해 사용됐던 ‘그것’이라든가. 

주위에 아군들이 있는 이상 그것은 함부로 쓰기가 어렵다.뭐, 반대로 말하자면 주위에 아군만 없으면 그걸 서슴없이 쓸 수 있다는 뜻이지만…….

“이 정도면 걱정할 필요는 없었겠네. 남작님, 이제 진심으로 갈게요? 야! 너네 다 물러나!”

어찌 보면 아까 이백호가 내 방패의 특징을 알고서 영리하게 싸웠던 상황과 비슷하다.‘거, 내가 멍청한 몬스터인 줄 아나.’

나 역시 다 아는 상황에 거리를 벌리는 걸 기다려 줄 리 만무.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전투 함성을 내지르며 물러나려는 후열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한다.그도 그럴 게, 하루 온 종일 처맞기만 했는데.

“아우레스!!”

슬슬 하나쯤은 잡을 때도 됐잖아?타닷!내가 닥돌을 시작하자, 후열에서 대기하던 렉 아우레스가 방패를 치켜들고서 앞을 가로막는다.

탱커 대 탱커의 상황.일반적으로는 서로가 서로에게 치명타를 입히지 못하며 장기전으로 갈 수밖에 없는 구조였지만…….

“걱정 마시오! 루인제네스 공은 내가 지킬—.”

뭐래.내가 너 같은 퓨어 탱커인 줄 아나.No.87 크라울의 악마분쇄기.No. 687 공성 살육자.거기에 오우거의 [휘두르기].

이러한 공격기들은 사실 이제 평타에 가깝다.그도 그럴 게, 얼마 전에 필살기를 얻었으니까.「캐릭터가 [아이기스의 용갑]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백호의 평타에 처맞고, 파멸할배의 마법에 지져지고 하며 열심히 쌓아온 피해량.「누적된 피해를 반사합니다.」암, 이거면 충분하다.

No. ???? 아이기스의 용갑.이 아이템의 액티브 이펙트는 꽤 화려한 편에 속한다.아니, 정확히는…….

‘이건 볼 때마다 가슴이 웅장해지게 하네.’내가 가진 어떤 이능, 장비보다도 ‘압도적인’ 이펙트를 보인다.

바로 이렇게.솨아아아아아아아-!어느새 내 등 뒤로 소환된 영혼의 전사가 단칼에 성벽도 무너뜨릴 것 같은 거대한 대검을 휘두른다.

목표 대상은 파멸학자, 루인제네스다.그야 신관인 제이나는 둘째치고, 이 할배만 없어지면 훨씬 더 해볼 만한 싸움이 될 거 같거든.

다만, 문제는 그 앞을 지키는 문지기 렉 아우레스라 볼 수 있는데…….‘음, 문제까지는 아닌가?’

실제로 이후 상황은 내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초거대 방패를 들고서 파멸할배 앞에 선 렉 아우레스 위로 수십 장이 겹쳐진 두터운 마력 장벽이 형성된다.

‘마법사를 보호하는 탱커와 그런 탱커를 지키기 위해 마법을 쓰는 마법사라…….’

말만 들으면 어딘가 낭만적이게도 들린다.하지만…….‘지랄들을 하네.’암만 저래 봤자 변하는 건 없다.

그도 그렇잖아?둘이 힘을 합친들 어떻게 막겠어?실험을 할 때도 제대로 막지 못했던 걸.콰지지지직-!!

최상위권 마법사가 형성한 마력 장벽이 종잇장처럼 찢겨져 나간다.한 장, 두 장, 세 장, 네 장…….몇 겹을 쌓았든 의미는 없었다.

저 무자비한 전사의 대검은 그런 걸 전혀 가리지 않는 듯했으니까.콰지지지직-!

거침없이 휘둘러진 대검이 이윽고 마지막 마력 장벽마저 박살내고서, 최후의 벽 역할을 하고 있던 렉 아우레스마저 날려보낸다.

“커헉!”

오케이, 그러면 탱커는 이제 다운.퍽-!이백호가 열심히 뒤에서 평타를 넣어대고 있지만, 이거는 그냥 무시하면 그만.

‘GM은 방관 중에…….’

성벽 밖에선 제물을 바칠 수 없는 이상, 신관도 딱히 나를 막을 방법은 없어보인다

따라서 이제 내가 할 일은 ‘방어 계열 주문’을 모두 소모한 파멸학자를 조지는 것뿐인데…….

“……응?”

그때 나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터져나왔다.정말 놀랍게도 나에게는 ‘긍정적인’ 변수였다.처음에는 나도 잘 몰랐지만.

“왜… 안 사라지죠?”

아이기스의 용갑으로 소환된 영혼의 전사가 한 방을 때려놓고도 사라지지 않는다.아니, 사라지기는 커녕.

스으윽.한 번 휘두른 대검을 회수하고는 다시금 일격을 내리꽂을 자세를 취한다.한데 어째선지 그 짧은 순간들이 슬로우 모션처럼 선명하게 느껴진다.

“어어……?”

나를 견제하는 것도 잊고서 멍한 표정을 내짓는 이백호.

“……!”

걱정 어린 표정의 제이나.눈을 동그랗게 뜬 채 보고만 있는 GM.그리고…….

“이건 곤란하겠군.”

다급하게 마법을 영창하기 시작한 파멸할배까지.감각을 이용해 얻을 수 있는 모든 정보들이 실시간으로 뇌에 내리꽂히는 가운데.

나는 직감적으로 이게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처맞다보면 스택이 쌓이고, 그 스택에 비례해서 단계별로 물리 대미지를 입히는 매커니즘.]

실험의 한계로 인해, 우리는 아이기스의 용갑의 4단계 효과까지밖에 보지 못했다.따라서 이게 몇 단계 효과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누적된 피해가 일정 수치를 초과했습니다.」「사용 효과가 한 번 더 시전됩니다.」연타라니.

‘더 윗단계에는 또다른 추가 효과가 있으려나?’합리적인 추측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기로 했다.

그야 이거 하나로도 충분하니까.‘아이기스의 용갑’이 싱글 넘버스급이라고 평가를 하기에.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이윽고 느려졌던 시간이 확 가속하며 영혼 전사의 대검이 파멸할배를 향한다.그리고 그 순간.

“……라 에비에스투카 비에란.”

때마침 영창이 끝나며 검붉은빛의 장막이 구체의 형태로 파멸할배를 감싼다.

‘보호’가 목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불길한 느낌으로 일렁거리는 장막.

‘이건 처음 보는 건데?’딱 보니 이게 파멸할배가 숨겨두고 있던 패들 중 하나인 듯한데…….뭐, 성능이 어떤지는 곧 알 수 있겠—.

“……응?”

기대하는 마음으로 상황을 직관하던 중 나도 모르게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그도 그럴 게, 이런 상황은 전혀 생각 못했거든.

보호막이 부서지든가.그도 아니면 내리친 대검이 튕겨져나간다든가.그런 거라면 크게 놀랄 일도 없었을 것이다.다만…….후우웅-!

보호막에 닿는 대로 사라지는 대검.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통째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저 구체가 다른 세계로 이어진 통로라도 되듯.‘저 정도면 그냥 무적기 아닌가……?’

심지어 캐스팅 시간도 매우 짧았던 것을 감안하면 말도 안 되는 스킬이라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다.

다만 그렇다고 억울해하지는 않기로 했다.내가 아이기스의 용갑 같은 아이템으로 사기를 쳤던 것처럼, 이 할배도 그런 비장의 수가 하나쯤은 있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게다가 노코스트도 아닌 거 같고 말이지.’강한 힘엔 책임이 따른다는 건 영화 속 이야기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강한 힘엔 그만한 대가가 필요하다.저기 지금 파멸할배가 숨을 헐떡이는 것처럼.

“후우… 후우…….”

미래의 전력까지 다 끌어다 쓴 것처럼 거친 호흡을 내뱉는 파멸할배.새하얀 백발이 땀에 젖어 피부에 달라붙은 걸 보고 있자니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이 할배가 이 지경까지 몰린 걸 본 적이 있었던가?’문득 그런 생각이 들며 굉장히 이질적인 장면처럼도 느껴졌으나, 구경만 하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그야 이제 막 장막이 사라졌거든.타닷-!뛰던 걸음에 박차를 가하며 파멸할배와의 거리를 좁힌다.

그리고 막 망치를 휘두르던 찰나.이때 또 예상 밖의 상황이 연출된다.후웅-!허무하게 허공을 가르는 망치.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상황을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피했다고?’

파멸할배가 내 일격을 회피했다.내 민첩 수치가 아무리 낮아도, 마법사 따위가 결코 피할 수 있을 리 만무할진데.

심지어 운 같은 것도 아니었다.후우웅-!이어진 연타를 피하는 할배의 움직임은 어느 무술의 오묘한 한 동작처럼 부드러웠고, 이는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몰랐나 보군.”

“…….”

“마법은 전쟁 속에서 발달한 학문일세. 때문에 고대의 마법사들은 모두 다 근접 무술을 수련했다네. 난전 속에서도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게끔.”

니미럴.마법사가 무술까지 하면 우린 뭘 먹고 살라고?그런 생각을 하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거리를 좁히려던 때였다.

타닷.거리를 벌릴 거라 예상했던 파멸할배가 역으로 내게 다가오며 손을 뻗는다.그리고…….툭.손이 내 배에 살포시 얹어진 순간.퍼엉-!

안에서 무언가 폭발하는 듯한 충격이 전해진다.분명 영창을 하거나 큰 마력의 흐름이 느껴진 것도 아닐진대.

“커헉!”

대체 뭐지 이건?드래곤 모드까지 활성화한 내 항마력을 뚫는다고?‘…이렇게 쉽게?’순간 머리가 멍해졌으나 사태를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시간이 너무 오래 흘러 잠시 잊고 있었을 뿐, 분명 알고 있던 ‘기술’이었으니까.

[자네 정도면 아는 수법일 텐데? 일시적으로 몸이 닿지 않았던가. 그때 회로를 연결해 자네의 육신을 매개체로 마법을 완성했네.]

[아, 그래서 내 항마력이 안 통했구나.]저리 말해도 원리는 잘 모르겠다.하나 확실한 건 파멸할배는 이백호와의 전투에서 ‘항마력’을 무시하고 딜을 넣었다는 것인데…….

‘오케이, 마법사 주제에 근접전도 쉽지 않다 이거지?’목구멍을 타고 피가 흘러내리고 있지만, 이 정도면 그렇게까지 큰 사고도 아니다.

다만 정비를 위한 시간 정도는 필요하단 판단하에 거리를 벌렸다.

‘스택까지 다 써놓고 못 잡은 건 좀 아쉽긴 한데…….’그래도 급할 건 없었다.일단 렉 아우레스 한 놈은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지 않았던가.

“아우레스 씨……!”

뭐, 살아있긴 한 듯하니 힐을 받고 금방 복귀할 거 같긴 하지만.

‘첫 턴에 한 새끼는 잡았어야 했는데.’상황은 좋지 않다.그리고 그걸 아는지, 이백호도 잠시 평타를 멈추고 내게 말을 걸어온다.

“봤지? 암만 발악해도 안 된다니까?”

거, 기세등등하기는.아직 끝난 것도 아니건만.

“그러니까 그냥 이쯤에서 그만하자. 응? 말만 하면 되잖아. 그 늙은이랑 무슨 얘기를 했는지. 다른 사람도 아니야, 그냥 나한테만 말해주면 된다니까? 그럼 여기서 끝낼게. 응?”

이미 이긴 것처럼 구는 이백호를 보며 나는 씨익 웃었다.

“말이 길어지는 걸 보니…….”

“……?”

“좀 지쳤나 보네?”

난 아직인데.「캐릭터가 [영혼 잠수]를 시전했습니다.」「소모된 영혼력에 비례해 영혼력이 재생됩니다.」

동네 거리 싸움이든, 링 위에서의 싸움이든.정글이든, 바다든, 또 다른 어느 세상이든 변하지 않는 진리가 하나 있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결국엔 끝까지 서 있는 놈이 이긴 거다.***1분, 2분, 3분…….이후로도 전투가 이어진다.10분, 20분, 30분…….바닥을 구르고, 피를 토하고.1시간, 2시간, 3시간…….

잠시 기절했다가 불에 타는 듯한 격통을 느끼며 깨어나기도 하면서.4시간.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이미 지나간 10대처럼 느리면서도 너무나 빠르게 흘러간다.

“허억… 허억… 허억…….”

나뿐만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뜨거운 숨소리.

“나, 남작… 이제 그만하면 안 되겠소……?”

몇 번이나 전투에 이탈했다가 복귀한 렉 아우레스가 파멸학자의 앞을 지킨 채 내게 간곡히 부탁한다.

“남작도 한계이지 않소…….”

글쎄, 보통은 그런 말을 꺼내는 놈이 제일 한계에 몰린 거던데.멀리서 날 보며 제이나도 한 마디 곁들인다.

“………괴물.”

질릴 대로 질린 듯한 짧은 읊조림.

“아하… 하…….”

나와 대치 중이던 이백호도 구슬 땀을 닦아내며 입을 열어온다.

“확실히 믿는 구석이 있기는 했네. 설마 그게 자기 자신일 줄은 몰랐지만.”

놈은 이 상황이 되어서도 뭐가 즐거운지 자꾸만 헤실거리며 웃었다.

“이 정도면 그리 멀진 않았겠는데?”

아무래도 놈은 내가 이렇게 강해진 게 나름 마음에 들었던 모양.


22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700화 22

“컨트롤이 어려워진 건 아쉽긴 해도… 우리 남작님은 워낙 약점이 또렷하시니까.”

이제는 귀에 익은 걸까.저런 말을 듣고도 딱히 열불이 나지도 않는다.애초에 그렇게 잘 들리지도 않고.두근두근두근두근—!

고막을 가득 채우는 심장의 박동.피와 땀으로 젖어 흐릿한 시야.불에 구운 것처럼 달아오른 피부.

“크흐흐…….”

단지 그러한 감각들에만 집중하며 실없이 웃었다.웃겨서 웃은 게 아니라, 그냥 웃음이 나와서 웃었다.

“페브로스크 군이 쓴 책에 적힌 그것이로군. 전사는 힘들면 웃는다고 하던가…….”

파멸학자의 말에 이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뭔데 그 개떡 같은 소리는?”

“언젠가 저 친구가 한 말일세. 탐험가들 사이에서는 아주 유명하다고 하던데, 몰랐나?”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코웃음을 치며 피 섞인 침을 뱉는 이백호.

“아무튼, 그럼 남작님도 지금 힘들어 죽겠단 거네?”

나를 보는 이백호의 눈빛에서는 절대 물러나지 않겠단 의지가 묻어났다.내게는 안 좋은 소식이었다.

거, 진짜 이제 좀만 더 지나면 서 있을 힘도 없을 것 같은데…….

“크흐흐…….”

뭐, 그래도 어쩌겠어.해볼 수 있을 때까지는 해봐야지.살다보면 결과를 알고서라도 들이박는 패기가 필요할 때도 있으니까.

“어이, 할배. 준비 됐지?”

“아아, 끝났네.”

“그럼 이제 슬슬 끝내보자고.”

뭔 준비를 말하는진 모르겠지만, 내가 모르는 사이에 뭔가 비장의 수를 만들어온 듯한데…….솨아아아아-!

이내 파멸학자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거대한 마법진이 형성된다.딱 봐도 심상치 않았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약한 마음이 먼저 피어날 만큼.‘못 막겠다 싶으면 바로 피하자…….’그런 생각을 하며 억지로 눈을 뜨며 앞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

콰직-!어디선가 수박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며 바닥에 그려지던 마법진이 광채를 잃는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일까

서둘러 시선을 움직여 확인해본 결과, 나는 두 개의 시각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

무언가에 얻어 맞은 듯 허공을 날고 있는 파멸학자.그리고…….

「아멜리아 레인웨일즈가 [수라각]을 시전했습니다.」……

뭐야, 얘가 여기에 어떻게 있어?너무 힘들어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 무렵, 아멜리아가 나에게 말했다.

내가 아닌 이백호를 보며.

“단장, 이놈들 전부 죽이면 되는 건가?”

그 물음에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일단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당황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아멜리아 레인웨일즈.성벽 안에 있어야 할 나의 진짜 동료.제대로 말도 못 하고 몇 달째 돌아가지 못하는 바람에 나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반가움이 느껴지는 한편으로 의문도 든다.얘가 어떻게 이곳에 있는 것일까?‘하도 돌아오지 않으니까 직접 찾으러 온 건가……?’

음, 왠지 아멜리아라면 그랬을 거 같다.내가 뭔 사고를 또 치고 다니지는 않을까 백방으로 수소문해가며 밖에 나올 방법을 찾아냈겠지.

이런 쪽으로는 누구보다 믿음이 가는 여자니까.

“…죽여? 너 혼자서 우리를?”

아멜리아의 등장에 짐짓 당황했던 이백호가 평정심을 되찾고는 코웃음친다.그리고…….

“아우레스! 넌 할배만 지켜! 얘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아, 알겠소!”

이백호의 오더를 듣고서 파멸할배가 있는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한 아우레스.다만 아멜리아는 이를 보며 피식 웃을 뿐이었다.

“난 한 번도 말한 적 없는 거 같은데.”

“…….”“혼자라는 말은.”

이어진 읊조림에 모두의 시선이 순간이동 마법진이 숨겨진 동굴 입구로 향한 순간.번뜩-!어두운 동굴 안에서부터 짧은 섬광과 함께 무언가 쏘아진다.

일반적인 철제 화살 같은 게 아니라 빛.정확히는 정령의 힘을 이용해서 쏘아낸 ‘정령시’.후웅-!누구인지는 볼 필요도 없었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파열]을 시전했습니다.」

이윽고 눈으로 쫓기도 어려울 만큼 빠른 속도로 날아든 화살이 그로기 상태의 파멸할배를 향하고.타닷.

파멸할배에게 달려가던 아우레스가 황급하게 몸을 던져 화살을 방어한다.그리고…….콰아아아아아아앙-!

왼쪽 팔의 살점을 파고든 화살이 폭발한다.투두둑, 투두두둑.안에서부터 터진 것처럼 사방에 비산하는 살점과 핏물.

“…귀쟁이도 왔나 보네?”

이를 기점으로 일시 정지라도 한 것처럼 모두 움직임을 멈춘다.터벅, 터벅.화살이 쏘아진 동굴 입구에서부터, 내 동료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벨베브 루인제네스…….”

눈에 독기를 품은 에르웬.

“비요르으으으으은!! 이놈들 전부 다 쓸어버리면 되는 거냐!”

잔뜩 신이 난 아이나르.

“진정하세요. 만만치 않은 사람들이니까.”

어딘가 긴장한 표정의 베르실과…….

“또, 또 혼자서…….”

다친 날 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미샤.‘아우옌도 왔네.’심지어 멤버는 이게 끝이 아니다.

“그자는 보이지 않는군요. 실력 좋은 궁수가 있다고 들었는데.”

“여기가 성벽 바깥…….”

“그래도 다행이오. 나오자마자 우리 실종된 단장을 찾을 수 있었으니.”

“네. 위급한 상황 같기도 했고요.”

아나바다 클랜의 원년 멤버들뿐만 아니라, 제임스 칼라, 스벤 파라브, 멜란드 카이슬란, 리리스 마로네.아이스록 원정을 인연으로 비교적 최근에 합류한 정예 멤버들까지.

‘이렇게 보니까 우리 클랜도 장난 아니게 성장하긴 했구나…….’

전세를 완전히 뒤집어버리기 충분한 숫자.왠지 모를 든든함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반면, 이백호의 눈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아주 떼거지로 몰려왔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알아볼 수 있었다.그야 숙달된 탐험가라면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것이니까.아까 전에 이백호가 말했던 바로 그것을.

“유르벤 하벨리온.”

좀 더 확실히 ‘그것’을 느끼기 위해 방관자 포지션을 유지했던 기회주의자의 이름을 호명했다.

“…예?”

근데 마법사 출신이라 그런가?얘는 왜 이렇게 얼을 타?이미 상황은 180도 달라졌구만.

“계속 거기에 있을 건가?”

“…….”

“그러다 괜히 불똥 맞고 죽을 수도 있는데.”

“아아… 예……!”

아까 이백호가 했던 대사를 그대로 다시 날리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서 호다닥 달려오는 GM.‘얘도 진짜 웃기긴 하네.

’아우릴 가비스한테 하던 것도 그렇고, 아까 이백호한테 붙던 것도 그렇고.세상 순진한 척은 다 하더니 하는 짓은 아주 여우가 따로없다.‘

…뭐, 얘 입장에서는 당연한 건가?’사실 생각해 보면 나도 이백호도 GM의 동료는 아니다.

쉽게 말해, GM이 여기저기 붙는 것에 배신감을 느낄 처지는 아닌 것인데…….

“……죄, 죄송합니다.”

“됐으니까 빨리 꺼져.”

“예…….”

이백호는 GM을 막지 않았다.아니, 정확히는 막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와, 멤버가 무슨… 이 정도면 오르큘리스랑 맞짱 떠도 안 밀리겠는데?”

애써 태연한 척 말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 누구보다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이백호 이놈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큰 당혹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하기야 그럴 만도 하긴 하지.’아멜리아의 킥을 맞고 날아간 파멸할배는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있으며.

“…….”

탱커 렉 아우레스는 한쪽 팔이 날아갔다.또한 힐러 포지션인 제이나는 남은 MP도 얼마 되지 않을뿐더러…….

“어서 치료를 해야…….”

“난 괜찮으니, 저들을 자극하지 마시오.”

“…….”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 감히 힐을 넣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

“아하하… 이거 곤란하게 됐네…….”

“…….”

“남작님, 우리… 무승부로 하지 않을래요……?”

뭐래, 이 미친놈은.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내려 이백호의 신체 부위 중 한 곳을 바라보았다.

“중성화라고 했던가?”

“저기…… 남작님?”

“뭐, 망치가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그… 일단 대화로 해결을 해보는 게 어떨지……?”

뭐라 하건 말건 싹 무시한 채 한 걸음 다가서자 이백호가 ‘쳇’ 소리를 내며 땅이 꺼지랴 한숨을 내쉰다.

“하… 진짜 난 왜 이렇게 되는 게 없지? 어떻게 이 타이밍에 쟤네가 나타나는 거냐고.”

사실 얘 입장에선 억울할 만도 하다.여기는 다른 곳도 아니고 성벽 바깥이었으니까.나도 운이 좋았던 것은 인정한다.하지만…….

‘얘를 보니까 그냥 운 때문은 아닌 거 같네.’그동안 이백호 팀이 돌아가던 꼴을 내부에서 면밀히 관찰했던 나는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 이백호가 내 상황에 처했다고 한다면.과연 성벽 바깥까지 찾으러 오는 동료가 있었을까?‘한 명도 없었을 거 같네.’

그렇게 생각하니 오늘 이 순간이 단지 운처럼은 느껴지지 않는다.몇 번을 강조해도 모자라지만.

“비요르으으은!! 싸움은 대체 언제 시작하는 거냐!”

0과 1은 다르니까.***역으로 궁지에 몰린 이백호의 팀.물론 나도 여기서 이백호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놈이 작정하고 도망치면 절대 못 잡을 테니까.’다만, 그래도 기회인 것은 틀림없다.

렉 아우레스.제이나 플라이어.이백호가 모으고 기른 팀원들을 잡을 수 있는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언니의 원수…….”

어쩌면 정말로 그날의 복수를 하게 될 수도 있을 터.터벅.이윽고 한 번 더 걸음을 내딛자 이백호가 저자세로 웃으며 말을 걸어온다.

“하하, 남작님? 그만 다가오시고, 잠깐 얘기 좀 해보자니까요?”

터벅.

“아니, 안 들을게. 그 늙은이랑 뭘 했는지 이젠 궁금하지도 않다니까?”

터벅.

“아, 진짜… 오케이! 합의금! 원래 이럴 때 합의금 주고 원만하게 해결하는 거잖아? 얼마면 돼요? 내가 최대한 맞춰줄게!”

터벅.

“…진짜 꼭 피를 봐야겠어요? 우리 사이에? 응?”

터벅.무시하고 계속해서 걸어나가자 이백호의 표정이 굳어진다.터벅.더 이상 이백호는 내가 걸을 때마다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터벅.단지 내가 놈 앞에 설 때가 되어서야, 자그맣게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조금 전까지 저자세를 취한 게 전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남작님.”

“…….”

“진짜 나랑 끝까지 갈 생각?”

이백호의 말투 중 가장 익숙한 협박조로 내게 말한다.

“남작님은 어떨지 몰라도 나머지는 다 뒈질 텐데?”

제대로 된 설명은 없었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별의 소멸].이백호가 가진 최강의 필살기.

놈은 그걸 현대의 핵무기처럼 쓰려 하고 있었다.일종의 치킨 게임이라 해야 하나?

녀석이 전부 다 같이 뒈지잔 식으로 나오면 나 역시 감당할 수 없게 된다.이곳엔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니까.

“…….”

순간 말문이 막혀서 아무 말도 못하자 이백호의 입에 비열한 미소가 맺힌다.

“그럴 줄 알았어. 거, 마음씨가 참 약하시다니까? 생긴 것답지 않게.”

이백호가 몇 번이고 말했지만 고칠 수 없던 나의 약점이자 역린.터벅.이를 말하며 이백호가 역으로 내게 한 걸음을 내딛는다.

“남작님 제가 딱 하나만 조언해줄게요.”

왜 이렇게 다들 내게 조언을 해주지 못해 안달이 난 건진 모르겠지만.

“잃을 게 많은 놈은 날 절대 못 이겨.”

이백호는 말했다.내 두 눈을 정직하게 바라보며.

“난 전부 포기할 수 있거든.”

“…….”

“간절히 바라는 그 하나를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말을 하는 주체자가 이백호였기에 나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실제로 얘라면 그럴 테니까.

파멸할배든, 제이나든, 렉 아우레스든.자기 목적을 위해선 전부 뒈지든 말든,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놈이니까.그래, 그러니까…….

“……!”

겁도 없이 힘캐 앞에까지 다가온 이백호를 향해 손을 휙 뻗는다.꽈악-!순식간에 멱살이 붙잡혔음에도 이백호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여기서 정말 내가 뭔가 해를 끼칠 수 없을 거라 믿고 있는 듯한 눈빛인데…….

“해봐.”

“……?”

“해보라고 뭐든.”

내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이백호가 인상을 찌푸린다.거, 조금 전 말에 이해 못 할 게 뭐 있다고?이백호, 이놈은 뭔가 나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다.

소중한 무언가를 잃는 것.당연히 두렵고, 싫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꽉 조여와서 미칠 것만 같다.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콰직-!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끌어당기며 이마로 녀석의 이마를 들이박는다.

섬짓한 소리가 멀리까지 울려 펴졌으나 이백호는 신음 하나 뱉지 않으며 역으로 되물었다.

“…무슨 뜻인데 이게?”

허, 진짜 모르겠나?나를 얼마나 병신으로 보고 있었으면 이러지?콰직-!조금 짜증이 나서 한 번 더 이마를 들이박았다.

“…진짜 해보자는 거야?”

아니, 그러니까 내가 아까 말했잖아.콰직-!!!이전보다도 훨씬 더 섬짓한 소리가 피어나고, 이백호의 이마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소중한 동료들이 다 죽어도 정말 상관없어?”


36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701화 36

글쎄, 상관없지는 않다.단지 알고 있을 뿐이다.납치범의 요구를 다 들어준 이들의 말로가 대부분 어떠한지.이런 새끼들은 만족이란 걸 모른다.

하나를 내어주면 둘을 바라고, 둘을 내어주면 셋을 원한다.그렇기에…….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이런 새끼들을 이기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콰직-!!!!정말이지 온 힘을 다해 이마를 들이박고서, 이마를 떼지 않은 채 녀석을 응시한다.

“잃을 게 많은 놈은 못 이긴다고?”

그럴 리가.아무래도 이놈이 뭔가 단단히 착각한 듯한데…….

“애초에 난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어.”

“…….”

“아무것도 잃지 않고서.”

나는 이한수이며, 비요른 얀델이다.한 사람의 플레이어고, 동시에 삶을 위해 투쟁하는 전사다.

미궁에서는 방패를 들어 동료를 지키는 것이 내 역할이기에, 그 어느 상황에서도 도망치지 않았다.

내가 걸어왔던 길들이 알려주었으니까.도망치는 것으론 그 무엇도 지킬 수 없음을.

“…….”

어딘가 질린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이백호를 신경질적으로 밀쳐낸 뒤, 다시금 말을 이어갔다.

“이백호, 내가 무언가를 잃으면 너도 무언가를 잃을 거다.”

참고로 미리 말해두는데.

“잃을 게 없다는 말은 하지 마라.”

“…….”

“난 네가 가장 바라는 간절한 하나. 그걸 빼앗아 갈 거니까. 무슨 수를 써서든.”

이백호는 내가 말을 이어가는 동안에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단지 내 각오가 진심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왜 못 할 거 같아?’ 같은 말은 일절 뱉지 않으며 묵묵히 녀석을 노려보았다.

이 역시 치킨 게임이었다.서로가 서로를 파멸시킬 수 있는 상황에서 어느 쪽의 배짱이 더 좋은가.그 결과가 나오기까지 긴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이백호 이놈은 오히려 나보다 더 이성적이거든.

“……그래서 뭘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요.”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 이백호가 기가 꺾인 목소리로 물었다.

“합의금을 원해요? 아니면 피? 정 그러면 힐러나 탱커 정도는 내줄 수 있는데, 저 할배는 안 돼요. 만약 원한다고 하면 저도 끝까지 가는 수밖에 없고요.”

그래, 파멸할배는 어떻게 해서든 양보할 수 없다 이거지…….

“아! 중성화도 마찬가지니까 말도 하지 말고요!”

새끼, 끝까지 입은 살아가지고.한 걸음 물러선 이백호를 보며 나는 어찌할까 잠시 고민했고, 답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제안은 내가 하는 게 아니야.”

“……?”

“부탁하는 쪽에서 하는 거지. 엎드린 자세로.”

내 말에 이백호는 어딘가 자존심이 상한 듯 이를 악물었다.그러나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내 말을 따르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까?

“함부로… 남작님을… 겁박해서… 죄… 송합니다.”

이백호가 이를 악물고서 나오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끄집어내듯 말을 이어간다.

“오늘 제가 한 실수를… 이번 한 번만 봐… 주신… 다면……. 용서해주신 보답은 섭섭치 않게 치르겠… 습니다…….”

단 한 번도 사과라는 걸 해본 적 없는 아이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왠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일단 손바닥으로 뒷통수부터 후려쳤다.퍼억-!

“아니! 사과도 했구만 왜 때리는데요! 뭐 사과도 안 받아주겠다 이거예요?”

거, 적반하장은.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예?”

“그냥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휴, 속 시원해.

감회가 남다른 걸 넘어 새롭다.저 뚱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지난 날의 설움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달까.

[흐음, 이상하네. 네가 이름을 날리긴 했어도 GM놈이 관심을 가질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대답 안 하면, 그 적묘족 죽인다?][갑자기 되게 친절해졌네?]녀석이 내가 ‘이한수’인 걸 모르던 때부터 시작해.

[미안한데, 역시 냐옹이는 못 돌려주겠어요.][바바리안으로 살더니 귀까지 먹었어요?][혼자 정상인인 척하지 말라고. 역겨우니까.]

진실을 알고서도 서슴없이 꼴통을 깠던 일들까지. 

그 모든 사건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펼쳐지며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짜릿한 희열감이 전신을 뒤덮는다.

‘이놈에게 사과를 받다니…….’

물론 진심이 섞이지 않은 사과이긴 하지만… 애초에 진심 어린 사과를 받는 일이 어디 흔한가?나로서는 이 정도면 만족이다.

‘진정성’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그럼… 여기서 끝내는 거죠……?”

이내 이백호가 잘못을 저지른 강아지처럼 힐끔 쳐다보며 묻는다.뭐, 사실 내가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백호에게 이렇게 매번 휘둘릴 바에는 ‘잃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강경하게 나가는 게 옳다고 여겼지만.

나라고 이백호랑 끝까지 가는 게 좋을 리 없지 않나.

“사실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요? 그냥 좀 몇 가지 물어볼라고만 했지…….”

그 끝에 승자란 없다.오직 지옥 속에서 살아남은 패자만이 있을 뿐.‘그래도 오늘은 이놈이 먼저 물러났으니까…….’

여기서 한 번 더 욕심을 부리며 압박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좋은 판단이 아니다.지금부터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단 하나.

“그리고 사건의 발단은 남작님이잖아요? 애시당초 그 늙은이랑 그 안에서 뭔가 수상쩍은 짓거리를 하다 늦게 나온 것만 아니었으면—.”

“헛소리는 거기까지.”

습관적 남 탓을 시작한 이백호의 말을 끊으며 단호히 얘기한다.

“여기서 끝낼지 말지는 섭섭하지 않게 치른다고 했던 그 ‘보답’이 뭔지 확인한 후에 결정하겠다.”

쉽게 말해, 대충 넘어갈 생각 말고 내가 만족할 만큼 합의금을 내놓으라는 뜻.

“얼마면 되는데요? 아, 현물로도 지급 돼죠? 현금은 제가 많이 안 들고 다녀서.”

이백호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지만, 나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야 선제시는 아쉬운 쪽에서 하는 거잖아?

“…….”

그렇게 입을 꾹 다물고서 빤히 쳐다보고 있자니, 이백호가 조심스럽게 먼저 제안을 해온다.

“…인당 2억 스톤 어때요?”

새끼가 이 상황에서도 아끼고 싶나.

“인당 3억 스톤.”

어림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하자 이백호가 땅이 꺼지랴 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요. 3억 스톤.”

“아, 너랑 저 할배는 7억 스톤이다.”

파멸할배를 가리키며 말하자 이백호가 말도 안 된단 것처럼 발끈했다.

“……뭐요? 아니, 대체 왜?”

진짜 이유를 몰라서 묻나?

“저자를 여기서 죽이지 않는 건, 우리로서 엄청나게 양보를 하는 것이니까.”

“…….”

“돈이 부족하면 차라리 저 둘을 포기해라. 다른 건 몰라도 이 부분에서는 타협할 생각이 없으니.”

협상의 여지가 없도록 통보하듯 말하자 이백호도 별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단지 저 뒤에 있는 에르웬을 한 번 쳐다본 뒤, 내심 납득한 것처럼 힘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알았어요. 내면 되잖아요. 20억 스톤.”

“그럼 얘기는 끝이군.”

“할배! 반은 내가 낼 테니까, 반은 할배가 내!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패자를 우두머리로 둔 구성원에게 무슨 권리가 있겠나? 마음대로 하게.”

“아, 진짜 내가 이러고 싶어서 이랬어?”

리더로서 현 상황을 모두 책임질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이는 이백호.파멸할배와의 대화도 참 꼴불견이었으나, ‘진짜’는 그 뒤에 남아 있었다.

“맞다, 그리고 너희 둘 목숨값은 그냥 너희가 내라?”

“……그, 그게 무슨 말이오? 백호?”

이백호의 지시에 팔 한쪽까지 버려가며 몸 바친 아우레스가 배신감에 찌든 목소리로 반문했으나, 이백호의 뻔뻔함은 세계 제일이었다.

“그럼 뭐? 내가 내? 너희도 다 어른이잖아? 자기 목숨은 자기가 알아서 챙겨야지?”

“…….”

“응? 그리고 머리가 있으면 생각이란 걸 좀 해봐. 나는 지금 너희 다 버리고 도망치려고 하면 도망칠 수 있는 입장이라니까?”

“…….”

보고 있는 나조차 할 말이 없게 만드는 기적의 논리를 펼치는 이백호.저딴 걸 리더라고 둔 제이나와 아우레스의 심정이 어떠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한데 막상 저 둘에겐 익숙한 상황이었을까.

“…됐어요. 바랄 걸 바라야지. 내 건 내가 낼게요. 저 인간한테 빚지는 것도 사양이니.”

“…그, 그럼 나도 내가 내겠소이다.”

단지 체념한 기색으로 별말 없이 수긍하는 둘.그렇게 일행 간의 의견 조율이 끝난 후에는 본격적으로 합의금을 받았고, 이 과정에서 베르실과 GM의 도움을 적잖게 받았다.

“아니, 오우거 가죽 갑옷이 어떻게 2천만 스톤이야! 거래소에 떨이로 올려도 4천만엔 팔릴 텐데!”

“거래소 수수료, 그리고 팔리길 기다리기까지의 수고 비용 등등을 포함해서 책정했어요.”

“뭐? 장난쳐? 수고 비용이 대체 얼마인데!”

베르실과 GM은 합의금으로 지급되는 현물들을 후려쳤고, 이에 이백호가 반발하거나 하면 즉시 나를 호출했다.

“저… 단장님?”

“남작님 잘 왔어요. 남작님도 말이 안 된다 생각 하죠? 오우거 가죽 갑옷이 어떻게—.”

“우리 가격 책정이 맘에 들지 않으면 그건 나중에 직접 팔든가 하고, 오늘은 현금으로 지불해라.”

“…….”

“현금으로 지불할 능력이 안 되면 그냥 잠자코 있고.”

“아, 어쩐지 2억 스톤 불렀을 때 1억 스톤밖에 안 올리더라니…….”

그제서야 내가 가격을 더 높이지 않은 진짜 이유를 깨닫고서 궁시렁거리는 이백호.다만 후려치는 것까지 가격에 포함되어 있다는 걸 인지하고서는 더 이상 불만을 내뱉지 않았다.‘

……어마어마하긴 하네.’그렇게 합의금 정산이 끝나고 최종 집계를 해보자면.‘현금이 7억 스톤.’의외로 현금이 엄청나게 들어왔다.

현물을 내놓아봤자 헐값으로 감정된다는 걸 깨닫고, 있는 현금 없는 현금을 싹 다 끌어모은 것인데…….‘몬스터 부산물이 4억 스톤.’

부산물의 경우에도 말이 4억이지, 천천히 시중가로 다 처분을 한다면 최대 2배까지도 더 이익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진짜 소득은 따로 있겠지만.‘장비가 9억 스톤.’물론 장비의 경우엔 부산물만큼 후려치는 건 할 수 없었다.다만 세상에는 존재하는 법이다.

단순히 돈이 있다고 구할 수 없는 귀한 장비들이. 

‘No. 696 레인드리스의 황궁.’이거는 ‘신목궁’을 요정족에 반납하고서 대충 아무 활이나 끼고 있던 에르웬에게 주면 될 거 같고.

‘No. 989 순환의 보주.’부상을 입지 않은 상태에서 자원 회복 속도를 크게 높여주는 이건 마법사인 베르실이 차면 될 거 같다.

사실 신관이 꼈을 때 가장 높은 효율이 나오는 아이템이긴 하지만, 우리 클랜엔 신관이 한 명도 없으니까.

이건 나중에 신관 영입이 끝나면 그때 넘겨줘도 되는 거니까.

‘No. 1001 알론소의 여행 가방.’사실 이게 나는 제일 의외였다.앞에 장비들보다 번호는 낮을지언정, 어찌 보면 이게 더 희귀하다고 봐도 무방하니까.

“가방? 허리끈에나 달아 놓을 정도로 작은 크기인데. 아공간 가방 같은 건가요?”

“아니, 이건 부적형 아이템이다.”

가방 형태의 장비라서 헷갈리는 일이 있지만, 알론소의 여행 가방은 부적이다.정확히는 인게임에서 ‘Charm’이라는 영문명으로 표기가 되던 파츠.

“부적이라면… No.9999 초심자의 행운 같은 거네요?”

“그래.”

참고로 우리 클랜 중에 부적형 아이템을 소유한 것은 아이나르뿐이다.

처음 사냥한 마물에 한해서 정수가 나올 확률을 늘려주는 부적인데, 귀속템이라 앞으로 영원히 빼거나 다른 걸 끼는 건 불가능하다.

No. 1001 알론소의 여행 가방과 달리.

“그럼 이건 효과가 뭐죠? 솔직히 말해서 짐작이 가는 게 없어서…….”

베르실의 물음에 답한 것은 아멜리아였다.

“마물들에게 공격받지 않을 확률을 올려주고, 반경 내에서 마물이 사망 시 추가 마석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거로 알고 있다.”

의외로 아이템 쪽으로는 얘가 박사란 말이지.그 있지 않은가?어린애들이 발음하기도 어려운 공룡 이름들을 척척 외우는 거.딱 그런 느낌이다.

다만, [던전 앤 스톤]의 전문가로서 설명에 추가를 좀 하자면…….‘공격받을 확률을 낮춰준다기보다는 위협 수치 자체를 내려주는 식이지.’

따라서 탱커인 나는 절대 낄 수 없는 부적이다.심지어 하락하는 수치가 고정 값이 아니라 퍼센테이지를 쓰기도 하고.

‘위협 수치가 40% 정도 감소했었지 아마?’여하튼 팀 내에 하나쯤은 있으면 좋은 아이템을 얻었다.

위협 수치야 어쨌든, 앞으로는 미궁에서 몬스터를 잡을 때마다 추가 마석이 드롭되는 것이니.

‘영구적으로 마석 소득이 1.5배 증가한 셈인가.

’이건… 누구에게 줄지 나중에 한 번 더 생각을 해보긴 할 테지만, 당장은 제일 약한 아우옌한테 주는 게 나을 거 같다.

“자, 그럼 된 거죠? 오늘 실수는 이거로 끝인 거예요? 서로 뒤끝 하나도 없이?”

“물론이다.”

“하… 진짜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그럼 저희는 이만 갑니다?”

“잠깐, 어디로 가려는 거냐?”

합의금 정산이 끝나자마자 자리를 뜨려는 걸 황급히 붙잡자, 이백호가 뭐가 문제냐는 표정을 짓는다.

“왜요? 우리 일은 다 끝난 거 아니였어요?”

“그래도 물어볼 수는 있는 거 아니냐?”

“저도 몰라요. 원래 계획은 저 마법진을 고쳐서 도시로 돌아가는 거였는데……. 어쩌겠어요? 어차피 지금 돌아가봤자 할 수 있는 것도 없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원래 계획’을 실행하려 한다면 그 늙은이가 이놈을 ‘처분’하려 들 게 분명하단 거지만.그건 중요한 건 아니니까 둘째치고.

“그래서 어디를 가려는 거냐?”

“아무 데나요. 여기서 남작님이랑 같이 하하호호 웃으며 같이 돌아다닐 순 없잖아요?”

음, 사실 나는 그것도 염두에 두고 있긴 했는데.그도 그렇잖아?

[이계에서 온 악령 ‘————’가 세 명의 동료를 잃고서 비로소 본인이 나아가야 할 길을 깨달았다.]

이놈들을 동료로 만들어서 데리고 다니면 제물로 바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러니까 잡지 마십쇼. 뭔 말을 하든 남작님이랑 같이 다닐 일은 없으니.”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저놈이 나랑 같이 다닐 거 같지는 않고…….

‘오케이, 이건 깔끔하게 포기.’어차피 잘 될 거라고 생각도 안 했다.애초에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이놈들을 진짜 ‘동료’라 여길 거 같지도 않을뿐더러…….

진짜 ‘동료’라 여기게 되면 의미가 없어질 테니까.

“카악! 퉷! 그럼 이만 가요.”

이후 이백호는 재수 옮붙은 사람처럼 가래침을 뱉으며 동료(?)들을 이끌고 사라졌다.그리고…….


22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702화 22

“갔군…….”

그제야 왠지 모를 긴장이 탁 풀리기 무섭게 나의 동료들이 다가온다.

“아저씨, 괜찮으세요……?”

“사, 상당히 지쳐보이시는데 말입니다…….”

바닥에 대자로 뻗은 내 얼굴 위로 걱정기가 가득한 동료의 얼굴들이 둘러쌓여지고.

“비요른 얀델.”

그 가운데로 아멜리아가 보인다.그것도 어딘가 좀 화난 얼굴의.

“대체 어쩌다가 여기까지 나오게 됐고, 왜 돌아오지 못했는지. 저놈들이랑은 어째서 싸우고 있던 건지.”

에휴, 그래 궁금하긴 하겠지.몇 달이나 소식도 없이 사라진 격이니까.

“그건—.”

설명을 하기 전에, 어떻게든 힘을 내서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였다.

“묻고 싶은 건 많지만, 지쳐 보이는군.”

아멜리아가 피식 웃으며 내 어깨를 사뿐히 밀어 다시금 바닥에 눕혔다.

“일단은 쉬어라. 얘기는 쉬고 난 다음에 들을 테니.”

그 말에 어딘가 마음이 탁 놓이며 눈이 사르르 감긴다. 금방에라도 의식의 끊을 잃고서 잠에 들 것만 같은 기분.하나 한편으로는 머리가 복잡했다.

두근-!때마침 동료들이 성벽 밖으로 나오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또한 역으로 이백호를 몰아붙이며 많은 이득도 취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결국 만나버리고 말았네…….’과연 이걸 잘 됐다고 볼 수 있을까?

몇 달 후에나 볼 수 있으리라 여긴 동료들과 성벽 밖에서 재회할 수 있던 것.[이계에서 온 악령 ‘————’가 세 명의 동료를 잃고서 비로소 본인이 나아가야 할 길을 깨달았다.]

정말 이걸 우연이라 봐도 되는 걸까?

힘 없는 걸음걸이.적막한 분위기.

어둡다 못해 무섭게 느껴질 만큼 굳은 표정.여러 조건들이 갖춰지며 왠지 모르게 패잔병의 뒷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네 명의 남녀가 숲속을 걷기 시작하고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터벅…….선두에 서 있던 백금발의 사내가 돌연 걸음을 멈춰 세우며 작게 읊조린다.

“엿같네.”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 소리가 작았고, 몇 음절도 되지 않는 짧은 읊조림이었으나 세 명의 남녀는 어떠한 말도 하지 못했다.

그야 아는 것이다.지금 그가 얼마나 분하고 화가 났으며 자존심이 상했는지.

“…….”

그렇게 침묵의 시간이 이어지기도 잠시.눈치를 쓱 보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던 거구의 사내가 뭐라도 말을 해봐야겠다는 듯한 느낌으로 입을 연다.

“저… 백호……?”

“…….”

“이제 와서는 의미 없는 질문일지도 모르지만… 어째서 끝까지 가지 않은 것이오……?”

“왜 끝까지 가지 않았냐니?”

이백호가 차가운 목소리로 되묻자, 아우레스는 괜히 말을 꺼냈나 싶은 기색을 보이다가도 이내 궁금증은 풀어야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

“얀델 남작 말이오. 그가 동료들을 끔찍이 아낀다는 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이야기 아니오. 분명 끝까지 갔다면 꼬리를 내리는 건 남작이었을 거요.”

아우레스로서는 당연히 궁금했을 부분이었다.그야 얀델 남작과 이백호는 전혀 다른 인물이니까.비요른 얀델은 동료들을 끔찍이 아끼지만 이백호는 그 반대다.

누가 뒈져나가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냉혈한.그게 이백호에 대한 아우레스의 평가였고, 실제로도 그 평가는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 차이를 생각해보면 암만 봐도 조금 전의 ‘기싸움’에서 유리한 것은 이백호였다.한데 어째서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것일까.

그 대답은 침묵을 지키는 이백호를 대신해서 입을 연 제이나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못 보셨나 보네요.”

“못 봤다니?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눈이요.”

“눈… 말이오까?”

잘 이해가 되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하는 아우레스. 이에 제이나가 부연 설명을 덧붙인다.

“눈을 봤으면 아우레스 씨도 그런 질문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대체 무슨 소리요 그게? 눈이 어땠기에? 뭔가 이능 같은 걸 쓰기라도 한 거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 눈을 본 순간 알 수 있었어요. 얀델 남작은 절대 꺾이지 않을 사람이에요. 그 수단이 협박 같은 거라면 더욱더.”

아우레스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눈치였고, 이에 옆에서 듣던 파멸학자도 한마디 거들었다.

“단순히 생각이 짧아 만용을 부리거나, 그릇된 선택을 하는 이들은 세상에 많지. 하나 오늘 얀델 남작은 달랐네.”

“어떻게 달랐단 거요?”

이에 파멸학자가 손바닥 위로 자그마한 불꽃 하나를 일으켰다.

“보통의 사람들은 불을 향해 손을 가져다대지 않네. 그 불이 얼마나 뜨거운지를 알기 때문이지. 그러나 불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어떨 거 같나?”

“글쎄… 잘 모르겠지만, 나였다면 호기심에 손을 대봤을 것도 같소.”

“무지란 그런 것이네. 누군가는 무지로 인해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무지하기에 용기를 얻기도 하지.”

“아니,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것이오?”

“얀델 남작은 불이 얼마나 뜨거운지, 그 불에 손을 가져다대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분명히 알고 있었네. 하지만 그럼에도 물러나지 않았지.”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으니까.”

마지막 말을 이은 것은 이백호였다.다만 파멸학자는 말이 끊긴 것에 전혀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며 생뚱맞게 느껴지는 말을 뱉을 뿐이었다.

“그들은 두려움을 모르는 존재가 아니다. 단지, 이를 이겨내고 나아가는 방법을 배웠을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전사’라고 불렀다.”

“……?”

“페브로스크 군이 쓴 자서전에 적힌 내용일세."

“…….”

“오늘 보니, 왜 바바리안들이 얀델 남작을 위대한 전사라 부르는지 알 거 같더군.”

“아니, 그래서 할배는 누구 편인 건데?”

“현재로서는 자네의 편이지. 그래서 자네가 실패의 이유를 알 수 있게끔 조언을 하는 것이고. 조금 전, 남작의 눈은 각오한 자의 눈이었네. 하나 자넨 그렇지 못했지.”

“그럼 뭐 어떻게 하라고? 끝까지 서로 다 죽자고 싸웠어야 한단 거야? 고작 의문 하나 풀겠다고?”

“단지 지금부터는 주의하란 뜻일세. 자네가 꽉 붙잡고 있다고 생각한 ‘목줄’로는 이제 그자를 통제할 수 없으니.”

“알아, 안다고……. 그러니까 그만 얘기해. 사람 긁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어느 정도 감정이 정리되었는지 평소의 말투를 되찾은 이백호.이내 이백호가 과장스럽게 한숨을 내쉬며 툴툴대듯 중얼거렸다.

“하, 진짜 고민이네 고민. 동료로 협박하는 것도 안 되면 이제는 대체 뭐로 컨트롤을 해야 하지?”

어느덧 분한 감정은 지나갔을까.이제 그것만이 지상 최대의 난제인 듯 이백호는 말없이 생각에 잠겼고, 잠시 눈치를 보던 세 명의 남녀는 자기들끼리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나저나… 참으로 강하더구려.”

“남작이요?”

“그렇소. 설마 우리가 전력으로 합공을 펼쳤음에도 몇 시간이고 버틸 줄이야……. 이 세상에 그런 괴물이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소.”

“자네가 알지 못할 뿐 아예 없는 건 아닐 걸세.”

“저런 괴물들이 세상에 더 있단 말이오?”

“물론 손에 꼽을 만큼 적긴 할 테지만 말일세.”

파멸학자가 저리 말하니 아우레스도 막상 떠오르는 인물들이 있는지 손가락을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접히는 속도는 느렸으며, 전부 끝나고 나서도 접힌 손가락은 많지 않았다.하지만…….

“어쩌면 몇 년 내로 두 손까지 갈 일도 없어질지 모르겠군.”

“응? 그게 무슨 말이오?”

“얀델 남작은 앞으로 더 강해질 걸세.”

그 말에 제이나와 아우레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에는 한 가지 의문이 실려 있었다.

여기서 더 강해지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이에 파멸학자가 쓰윽 시선을 돌렸다.그리고…….

“잃을 게 없는 자는 단지 독해질 뿐이지만…….”

고민에 잠겨 이쪽 대화는 들리지도 않는 듯한 이백호의 등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킬 게 많은 자는 강해지는 법이니.”

오랜 세월을 살아가며 자연스레 알게 된 이 세상의 섭리였다.***

눈을 떴을 때, 나무가 보였다.하늘에 닿을 것처럼 높이 솟아난 거대한 나무.그 틈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에는 별들이 은하수처럼 펼쳐져 있다.

그리고…….타다다닥.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려오고.‘쌀쌀하네.’그제서야 맨바닥에서 전해져 올라오는 냉기, 그리고 수풀에 맺힌 습기가 느껴진다.

‘덮어준 건가?’동료들이 덮어준 것인지 몸 위로는 담요가 덮어져 있었다.

신장 2m가 훌쩍 넘는 바바리안의 몸 전체를 덮을 수 있는 내 전용 특대 사이즈 담요.

‘내가 깰까 봐 옮기지는 않고 담요만 덮어준 건가?’그렇다고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훈훈해진다.

그야 이백호네 팀이었다면 수십 년을 함께해도 못 느낄 감성 같았거든.

“깼군.”

담요 안에서 부스럭거리고 있자 깬 걸 눈치챘는지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상체를 살짝 일으켜 세워서 확인해보니 모닥불 앞에 앉아 있는 아멜리아가 보였다.

“얼마나 지났지?”

“네가 기절하듯 잠들고 나서 이틀째다.”

“…뭐?”

그럼 내가 이틀 동안 맨바닥에서 자고 있었단 거야?어쩐지… 어깨가 많이 결린다 싶더라니.

“다른 애들은?”

“자고 있다. 나는 보초를 서는 중이었고.”

보초를 서고 있었단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신체가 아닌 거 같은데?”

[자가복제]로 소환한 분신체를 자는 중에 보초로 쓰는 게 아멜리아의 특기다.한데 왜 얘는 본체로 이러고 있는 걸까.

“……깨어났을 때 옆에 누가 있는 쪽이 좋겠다 생각했으니까.”

크… 내가 진짜 동료 하나는 잘 뒀단 말이지.

“마공학자에게 그간의 이야기는 대략적으로 들었다. 이번에도 또 멋대로 행동하다가 사고를 쳤더군.”

“사고?”

“애시당초 마공학자만 데리고 단둘이서 밖에 나오지 않았다면 이럴 일도 없었지 않나?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철부지 어린애를 혼내는 듯한 말투로 질책을 시작한 아멜리아.

“우리에게 상의를 한다는 선택지는 아예 머릿속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건가? 만약 밖에서 네가 죽기라도 했다면, 우리들은 어떡하라고 그렇게 무책임하게 행동하는 거냐?”

딱히 할 말이 없었다.나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을 리 없지만, 결과적으로 나뿐만 아니라 얘네까지 고생을 시켰으니까.

“얀델의 아들 비요른. 나는 너를 믿고 내 인생을 네게 맡겼다.”

“…….”

“부디 그 선택을 후회하게 만들지 마라.”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일 없도록 하겠다.”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아멜리아가 이마를 누르며 숨을 길게 토해냈다.그리고…….

“…혼내는 건 여기까지.”

이내 평소의 목소리로 돌아온 아멜리아가 나를 보며 말한다.

“너도 궁금한 게 많을 테니 우선은 우리 쪽에서 있던 일부터 말하지.”

이후 아멜리아는 내가 사라진 후 도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간결히 정리해주었다.

뭐, 그것도 몇 달치가 되다보니 길어졌지만.일단 13월 축제에 열린 일종의 클랜전 대회.

원래 우리 아나바다 클랜도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나의 부재로 인해 불참하게 됐다.

“왕가에서 우승 클랜 멤버 10인에게 금혼보고를 개방했다고……?”

“단장의 경우에는 금혼보고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성혼보고를 개방했다.”

이런 니미럴.성혼보고면 2등급 정수에 더블 넘버스까지 보관 중인 데잖아?왠지 배가 살살 아파오지만 그래도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도 성벽 밖을 탐험하며 이것저것 많이 얻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결국 마지막엔 이백호에게 합의금을 받는다는 잭팟도 터졌으니.

아무튼.이후로도 얘기를 계속 들어보니, 내심 불안했던 것과 달리 큰 사건들은 없었다.

내 부재로 몇 번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도시에서 벌이고 있던 내 사업도 무난하게 굴러가는 거 같고…….

“내 실종에 대해선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고……?”

이 부분은 나로서도 참 신기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지?”

“네가 하던 업무들 대부분은 우리가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많았을 텐데?”

“그런 이들에겐 네가 새로운 정수를 손에 넣어서 칩거하며 연구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래도 이미 내가 사라졌다는 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보는 편이 낫겠군.”

“아무래도 그럴 거다. 그런 도시이니까. 우리가 딱 잡아떼니 뭐라 말은 못해도, 의심하는 중이겠지. 심지어 우리가 이렇게 한 번에 사라지기도 했고.”

“……아! 맞다! 너희는 어떻게 나올 수 있던 거냐? 마법진이 고쳐진 거냐?”

이제 집에 돌아갈 수 있는 건가 싶어 기대하는 마음으로 물었지만, 아멜리아는 고개를 내저었다.그리고 나올 수 있던 이유를 막 설명을 해주는데…….

‘귀환하는 것만 막힌 거지, 도시에서 밖으로 나오는 건 가능하단 거구나.’새삼 가슴이 따뜻해진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냐?”

그냥 고마워서 그렇지.나랑 다르게 얘네는 돌아가는 방법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날 찾겠다고 ‘미지의 땅’ 그 자체인 성벽 밖으로 나온 거니까.

“그래서 너는 어떻게 된 거지?”

내가 말없이 웃고 있자 어딘가 멋쩍은 듯한 기색으로 아멜리아가 주제를 돌렸다.

“아, 나? 음, 이걸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

“아까 말했듯 대략적인 이야기는 마공학자에게 들었다. 내가 궁금한 건 다른 부분이다.”

“다른 부분이라니?”

“나름 잘 공존하고 있던 이백호와 대립하게 된 진짜 이유.”

아, 그거…….

“아우릴 가비스와 만난 것. 그리고 네가 마지막에 늦게 나온 것까지는 들었다.”

뭐, 그 정도면 이미 다 알고 있는 게 아닌가도 싶지만…….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불리한 상황에서 이백호와 싸우면서까지 숨겼던 거지?”

어딘가 심각한 표정인 아멜리아를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이백호에게 숨긴 이유는 다른 거다.”

솔직히 말해, 이백호에게 비밀로 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실제로도 만약 놈이 먼저 대가를 제시하며 예의 바르게 물었다면 알려줬을 수도 있다.하지만…….

“놈이 강압적으로 나오니까. 여기서 절대 굴복해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랬군.”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나고 자란 아멜리아는 다행히 긴 설명 없이도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 듯했다.

한데 그래도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을까?


30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703화 30

“아무튼, 그래서 그자와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다시금 묻는 그 질문에 나는 잠시 주저했다.과연 내가 거기서 본 기록들을 얘한테 말하는 게 옳을까?어차피 바꿀 수도 없는 거.

괜히 얘까지 심란하게 만들기만 하는 건 아닐까.그런 생각이 들어 처음엔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마음가짐이 바뀌기까지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그야 이백호를 보면서 배운 게 딱 하나 있거든.

“에밀리. 네가 들어야 할 얘기가 있다.”

세상 모든 걸 혼자 떠안을 필요는 없다.

결국 아멜리아에게 말했다.아우릴 가비스가 나에게 보여 준 ‘기록’에 대해서.

[이계에서 온 악령 ‘————’가 세 명의 동료를 잃고서 비로소 본인이 나아가야 할 길을 깨달았다.]

세 명의 동료를 잃는 미래.아멜리아는 이 얘기를 듣고서 ‘기록’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그런 것에 대해서는 일절 묻지 않았다.

그야 얘는 나랑 직접 경험을 해보았으니까.과거 시대에 떨어져 역사를 바꾸기 위해 직접 발로 뛰며 온갖 고생을 다 했었다.

“그때처럼 비트는 방식은… 아무래도 어렵겠군.”

얘기를 듣고서 잠시간 생각 정리를 하듯 침묵하던 아멜리아가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그 방식을 쓰려면 나 자신을 속여야 하는 거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가 아니라.”

나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아멜리아가 아주 작게 투덜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는 아니었다마는.”

뭐라는 거야.나이에 비해 똘똘하긴 했지만, 지금에 비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 맞구만.

오랜만에 귀여웠던 응애 시절 아멜리아가 떠올라 피식 웃고 있자니, 아멜리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한 가지를 물어왔다.

“그런데 미래의 기록이 확실한 건가?”

“무슨 뜻이냐 그게?”

“정확한 시기가 언급되어 있던 게 아니라고 했으니까. 어쩌면 이미 벌어진 ‘기록’일 수도 있단 생각을 했다.”

오?“리올 워브 드왈키. 그 마법사를 시작으로 지금껏 여러 동료들을 잃지 않았나. 물론 그들 전부를 합치면 세 손가락으로는 어림도 없겠지만……. 

어쩌면 그들 중 네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던 세 사람을 말한 걸지도 모른다.

”제법 그럴듯한 가설이었다.아우릴 가비스가 남긴 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기록석에 기록되는 방식을 보았을 때, 이 또한 분명 하나의 사건일 걸세.]

쉽게 말해, 한 명씩 카운트 되는 게 아니라 한 ‘사건’ 속에서 세 명이 죽게 된다는 뜻.물론 지금까지의 패턴을 보자면 그렇다는 것일 뿐.

세상에 100%는 없다고 생각한다.하지만 수백 개의 파편석을 모은 늙은이가 한 말인 만큼 한 귀로 흘려듣는 건 쉽지 않았다.

보아하니 그 말을 들은 아멜리아도 마찬가지인 듯하고.

“…그렇다면 아직 벌어지지 않은 기록일 가능성이 높겠군.”

다시금 심각한 눈빛으로 고민을 시작한 아멜리아는 계속해서 이런저런 추측들을 내놓았다.그중 가장 참신한 의견은 이거였다.

“분명… 잃는다고 적혀 있다고 했지? 그런 거라면 해석의 여지가 있다.”

정말 말 그대로 동료를 잃는 걸 뜻하는 경우.이 경우에는 결국 그 어느 누구도 죽지 않고 끝날 수 있단 것인데…….

‘진짜 저 말처럼 되면 얼마나 좋을까…….’암만 희망 회로를 굴려봐도 불길한 예감이 뇌리에서 떠날 기미는 없다.

과거에 겪은 수많은 경험들이 직감의 형태로 이미 나에게 답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그럴 리가 없다는 걸.불길한 예감은 항상 들어맞는다는 걸.

“……얀델?”

“아, 미안하다. 잠깐 생각 좀 하느라. 의견 말해줘서 고맙다. 전부 다 일리가 있더군. 하지만 그래도 최상의 상황보다는 최악을 가정하고 움직이는 게 나을 거 같다.”

“세 명이 죽는다는 가정하에 대책을 마련하잔 말이군.”

“그래, 대책이 있을는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 내 부정적이고 체념적인 말에 아멜리아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그도 그렇잖아?암만 발버둥치고 뭔 짓을 해봤자 결국에 ‘기록’은 이루어진—.

퍽-!그때 아멜리아가 내 이마에 딱밤을 놓았다.딱히 아프지는 않았고, 오히려 날 때린 저 손가락이 더 아프지 않을까 싶었지만…….

‘얘가 갑자기 왜 때린 거지?’얼떨떨한 감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자 어딘가 화난 듯한 표정의 아멜리아가 보인다.

“대체 왜 벌써 포기를 하는 거지?”

“…응?"

“비요른 얀델, 너였지 않나.”

“…….”

“나조차 나를 포기했던 그때.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서 어떻게든 방법을 만들어냈던 건.”

이내 아멜리아가 내 한쪽 어깨를 부여잡고서 얼굴을 가져다댔다.그리고…….

“그러니 다신 그런 표정 짓지 마라, 비요른 얀델. 아무것도 몰랐던 그 꼬마 아이에게 너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영웅이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왠지 모르게 몸이 떨려왔다.참 희한한 감각이었다.

도시 사람들이 영웅이라 부르고, 어려울 때마다 내게 무언의 기대를 해오고 그럴 때면 늘 부담스럽기만 했었는데.

“…….”

영웅이라는 그 단어가 오늘만큼은 부담스럽게 들리지 않는다.물론 어딘가 굉장히 낯간지럽기는 하지만.

내가 영웅이 아니란 걸 나부터가 잘 알고 있기도 하지만.

“…….”

하지만.그래도.무언가.내 비루한 말솜씨로는 잘 설명하긴 어렵지만.두근-!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며.

“…….”

무엇이든 해도 괜찮을 것만 같은 기분.하나 애석하게도 그 기분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으음… 아저씨……? 일어나셨어요……?”

“……크흠흠!”

어휴, 큰일 날 뻔했네.***

에르웬을 시작으로 다른 동료들도 하나둘 깨어나며 아멜리아와의 대화는 잠정 중단.결국 두 번째 기록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논이 불타오르던 날, 이········· ··· 악령 ‘————’가 믿······ 동료···게 배신······다.]

황도 카르논이 불타오르던 날, 믿고 있던 동료에게 배신당한다는.내가 그런 해석을 하게끔 만들었던 바로 그 기록.

‘…차라리 말 안 하는 게 나으려나?’오늘은 타이밍이 어긋나 미처 말하지 못했지만, 그냥 이것 하나는 나 혼자만 알고 있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애초에 내 해석이 맞는지도 알 수 없을뿐더러…….‘맞다고 해도 이걸… 바꾸는 게 가능한가?’오히려 전자의 경우보다 이게 더 힘들어보인다.

설령 누가 배신을 하는지 알고 있다고 한들 뭐 어떻게 하겠는가. 암만 미리 잘해주고, 설득을 한다고 해서 마음이 바뀔 리 없을 것이다.

그렇게 쉽게 풀리는 문제였다면 ‘기록’이 되지도 않았을 테니까.‘앞서 얘기한 것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할 텐데, 이것까지 더할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지금 당장 말할 만한 타이밍도 아닌 터라, 솔직히 터놓고 상의를 해볼지 말지는 좀 더 시간을 두고 고민하기로 했다.

그야 모든 일엔 우선 순위가 있는 거니까.

“어쩌다 보니 내가 다 깨워버린 격이 됐군…….”

에르웬이 깨어난 나를 발견하고 호들갑을 떤 덕분에 어느덧 정신을 차려보니 자고 있던 동료들이 모두 다 깨어난 상태였다

.“비요르으으으은—!!!”

“그래, 그래 아이나르. 나도 반갑다.”

“몸은 좀 괜찮소? 코도 안 골고 죽은 듯이 자서 다들 걱정 많았소.”

“이제 괜찮다. 좀 피곤했을 뿐이니 걱정 마라, 카이슬란.”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단장님. 마님들……. 아니, 다들 단장님을 많이 걱정했습니다.”

“근데, 아우옌. 너는 좀 살이 찐 거 같군?”

“그, 그렇습니까? 죄송합니다…….”

“뭐, 죄송할 것까지야. 지금이 훨씬 더 보기 좋군. 앞으로도 잘 챙겨먹고 다녀라.”

“예!”

그렇게 정신없이 한 명씩 안부 인사를 나누고, 덕담을 나누기도 잠시.나는 일단 주변을 조용히 시켰다.

그야 아무리 친한 사이어도 이런 건 확실하게 말을 해야 하는 법이니까.나는 우리 아나바다 클랜의 단원들 모두를 상대로 말했다.

“일단 미안하다는 말부터 하겠다! 괜히 나 때문에 이 위험한 성벽 바깥까지 나오게 해서, 정말 진심으로 미안하다!”

진심을 다한 사과에 기사 출신 탐험가, 카이슬란이 피식 웃었다.

“미안할 게 뭐 있소? 우리 모두 탐험가인데.”

“성벽 바깥을 탐험할 기회가 있다는데, 당연히 냉큼 달려가야지요.”

카이슬란의 말에 능청스럽게 맞장구를 치는 제임스 칼라.둘 다 한 조직의 지휘관 출신이라 그런가?

이럴 때 어느 말을 해야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는 듯했다.뭐, 그래도 할 말은 계속 해야겠지만.

“그리고 고맙다! 너희가 아니었으면 정말로 위험할 수도 있었을 텐데, 덕분에 살았다!”

그 말과 함께 허리를 숙이자, 어째선지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음, 날 놀리는 거 같진 않은데…….

“…왜 웃지?”

내 물음에 리리스 마로네가 어깨를 으쓱했다.

“덕분에 살았다고 말한 거치고는 그때 봤던 상대들 표정이 죽을 맛이었어서요.”

“맞소이다! 다들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던데?”

“마공학자에게 듣기로, 몇 시간을 넘게 싸우고 있었다 하던데…….”

“비요른은 무적 최강의 위대한 전사다아아아!!”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가?얼굴에 금칠을 해주는 단원들을 보고 있자니, 왠지 뭔가 멋쩍으면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다들 주목! 아직 말 안 끝났다!”

이내 한 번 더 주변을 조용히 시키자 베르실이 사람들을 대표해 내게 말해온다.

“그만하셔도 돼요. 미안할 것도 감사할 것도 없어요. 당연한 일인 거니까.”

어…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긴 한데.

“사죄하거나 감사인사를 하려는 게 아니다.”

그건 아까 다 끝냈잖아?구태여 또 할 필요가 뭐 있어.

“네? 그럼……. 아, 앞으로에 대해서 회의를 하려고 하는 건가요?”

음, 그것도 하기는 해야 하는데.

“틀렸다.”

회의를 지금 당장 시작할 생각은 없다.그야 위험한 성벽 바깥까지 날 찾겠다고 와준 사람들이잖아?암, 말 몇 마디로 넘어가는 건 염치가 없지.

“그럼 뭘 하시려고요……?”

“전리품 정산.”

“……?”

“이번에 잔뜩 뜯어내지 않았나! 게다가 이것 말고도 이것저것 얻은 것들이 많다! 쫙 늘어놓을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말만 해라!!”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 쓰는 것.

그것이 우리 클랜의 정신이다.***

전리품 정산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그도 그럴 게, 이번에 얻은 전리품들 대부분이 현물이었을뿐더러…….

“저도 안 쓰는 물건들이 있는데, 공동 재산으로 내놓고 싶습니다. 혹시 필요한 분들이 있으면 쓰시라고…….”

“어? 그러면 저도요!”

“나도 몇 개 있기는 한데…….”

이번에 얻은 물품만이 아니라, 단원 개개인들도 안 쓰는 물건들을 하나둘 꺼내며 규모가 점점 커졌다.

물건을 전부 쭉 정리했을 때는 작은 시장통이 떠올랐을 정도.

“특이하긴 하네요…….”

“뭐가 특이하단 거냐?”

“그냥 이 모습들이 전부 다요. 세상 어느 클랜에서 단원들이 자기 물건들을 저렇게 서슴없이 내놔요? 다 팔면 비싼 값을 받을 물건들인데.”

음… 그건 그렇지.나야 클랜 생활을 한 적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베르실 얘는 나름 중대형 클랜에서 오래 지냈으니 더욱 이상하게 느껴지긴 할 거다.

“아, 단장님부터가 특이하니까 당연한 건가?”

“뭐라는 거냐. 너도 가서 필요한 게 있는지 찾기나 해라.”

“안 그래도 그럴 예정이었어요.”

이후 베르실까지 시장통으로 들어가 물건을 고르기 시작하고, 그런 동료들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때였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지?”

에르웬이 깨어나며 대화가 끊겼던 아멜리아가 내 옆으로 다가와 다시금 말을 걸어온다.

“음, 당장은 너도 물건 구경이나 하는 게 어떠냐?”

“그런 얘기를 들어버렸는데 눈에 들어올 거 같나?”

어… 그것도 그렇긴 하지.

“혹시 짐작이 가는 상황이 있나? 세 명이 죽을 정도라면, 보통 위험한 상황이 아닐 텐데. 너와 달리 난 아직 성벽 바깥에 대해 잘 모르니까.”

다행인지 아닌진 알 수 없지만, 그 질문을 듣자마자 사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있기는 했다.

[진짜 진짜 무시무시한 괴물이요.]이백호가 말했던, 성벽 바깥에서 나타난다는 바로 그 괴물.

[딱히 서식지는 없는 거 같아요. 어디로 가든 결국 나타났거든요. 한 번 등장할 때마다 아무것도 못하고 수천 명씩 죽는데······.]

그 무시무시함을 제외하고서 내가 그 괴물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딱 하나다.

그 괴물은 주변에 사람이 많을수록, 그리고 성벽 바깥에 오래 머무를수록 나타날 확률이 높아진다.

솨아아아아아아아-마치 조건이 충족되면 나타나는 계층군주처럼.

오밤중에 열렸던 ‘아나바다 장터’는 생각보다 훨씬 오래 이어져 아침이 밝아올 때쯤에야 끝났다.

‘이런 방식도 나쁘진 않네.’

장터에서 전원이 코어 아이템을 얻는다든가 하는 그런 건 아니었으나, 그래도 모든 단원의 장비가 적어도 한두 개는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었다.

‘장터 한 번에 클랜의 전력이 5% 정도는 상승한 셈인가…….’자율 분배 같은 느낌인지라 처음엔 좀 고민이 됐는데, 이 방식을 택하길 잘했다.

이 정도면 나중에 또 장터를 열어도 될 거 같달까.

“후후… 처음 보는 방식의 분배지만, 마음에 드는구려.”

“그보다 일단 재밌지 않습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물건을 나눈다는 발상이. 왠지 더 끈끈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나중에는 이게 우리 클랜만의 전통이 될 수도 있겠네요.”

모두가 호평 일색인 걸 보니 앞으로도 아나바다 장터를 계속 열어도 문제는 없을 듯하다.

뭐, 대형 클랜의 부단장이었던 제임스 칼라의 조언은 명심하고 있어야 하겠지만.

“그래도 규모가 더 커지면 조심해야 할 겁니다. 지금 우리들이야 딱 필요한 물건만 가져갔지만, 언젠가 욕심 많은 사람이 들어올 수도 있으니.”

사실 인지만 하고 있을 뿐 벌써부터 크게 걱정이 되거나 하진 않는다.그런 놈이 활개를 치게 둘 만큼 내가 호락호락한 사람도 아닐뿐더러…….

애초에 그런 놈들을 받을 일 자체가 없을 거 같거든.

“자! 피곤할 수도 있겠지만, 다들 모여봐라!”

모두 오밤중에 깨어나 아침까지 밤을 샌 격이지만, 이 정도 피로야 탐험가에게는 일상다반사인 법.날도 밝았겠다 바로 다음 일정을 시작했다.

“다 같이 의논할 사항이 있다!”

일종의 수뇌부 회의였다.물론 우리 아나바다 클랜은 숫자가 적어 수뇌부랄 게 없지만.

“너희들도 알고 있겠지만, 성벽 안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마법진은 파손이 된 상태다.”

아무튼, 본격적인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단원들에게 현재 상황에 대해 브리핑하는 시간을 가졌다.

마법진이 파손 된 것.성벽 바깥에 존재하는 마물의 특징.

그리고 드넓은 세상으로 떠났던 노아르크 놈들이 제발로 도시로 돌아오게끔 만든, 그 ‘괴물’의 존재까지.

알아야 할 사항들을 쭉 설명하고 있자니, 자연스레 재료만 있으면 GM이 귀환 마법진을 고칠 수 있단 것까지 얘기가 됐는데…….


24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704화 24

“혹시… 재료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걸까요?”

“아, 여기 남은 재료들을 정리해둔 글이 있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네. 한번 봐볼게요.”

이후 GM이 수첩을 건네자 손을 들었던 리리스 마로네가 이를 넘겨 받아 한참을 읽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이러면 재료는 걱정 안 해도 되겠는데요?”

“예? 그게 정말입니까?”

“네. 마법진이 파손된 걸 미리 알고 있어서 나올 때 가능한 많이 챙겨서 나왔거든요. 적힌 항목들 중에 유일하게 없는 게 폼푸라의 포자인데……. 

마력안정화 성질 때문에 포자가 필요하신 거라면, 라피온의 바람 결정으로 대체할 수 있잖아요?”

“예, 예! 맞습니다! 바람 결정이면 됩니다!”

오호라, 이건 예상 못했는데.들어보니 지금 당장이라도 마법진 복구 작업을 시작할 수 있을 듯하다.

다만 문제는…….‘어떻게 해야 하지?’선택지가 늘었을 뿐, 무엇을 택해야 할지 결정이 쉽지가 않다.

그야 도시라고 해서 안전하게 느껴지진 않거든.이백호가 한시라도 빨리 도시로 돌아가려고 왜 노력한 건지 나는 그 이유를 아니까.

[노아르크 쪽에서 하고 있는 준비만 끝나면, 황도 카르논으로 진격해 라프도니아 왕을 죽일 거예요.]

이백호가 도시에 있든 없든, 무언가 ‘이벤트’는 발생할 것이다.‘아홉 달도 더 전에 1년 뒤라고 했으니…….’

지금부터는 한 3개월 정도 남았으려나?아무튼, 그러한 것들 때문에 막상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도시로 간다는 선택을 내리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그렇다고 여기 남아 있는 것도 꺼려진단 말이지.’어느 면에서 성벽 바깥은 도시보다도 더 위험하게 느껴진다.

노아르크 측에서 손도 쓰지 못하고 수천 명을 잃을 만큼 위험한 괴물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성벽 밖에 있을 것인가.

아니면 도시로 들어갈 것인가.결국 이 두 선택지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단 건데…….

“하벨리온, 마법진 복구 작업을 바로 시작하면 얼마나 걸리지?”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 자연 복구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이기도 한지라.”

“정확한 시기를 말해라.”

“일주일 안에 끝낼 수 있습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그럼 바로 시작해라. 베르실이나 마로네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도움을 청하고.”

“예, 알겠습니다.”

그래도 일단 마법진 복구 작업은 바로 시작하도록 지시했다.도시로 향하든 성벽 바깥에 남든, 일단 마법진은 고쳐두는 게 옳다는 판단.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할 테니, 다들 자유롭게 쉬어라!”

예상보다 이르긴 했지만, 서둘러 회의를 끝냈다.그도 그럴 게, 이미 선택지가 두 개로 좁혀졌잖아?

어느 것을 고를지 선택하기 전에 최우선적으로 대화를 나눠봐야 할 사람이 있었다.

“스벤 파라브.”

레아틀라스교 출신 성기사이자, 고블린 가면.

“예……? 전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내가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자마자 습관처럼 자기 변호부터 하는 녀석.이 모습을 보면 대체 뭐 하는 놈인가도 싶지만…….

놀랍게도 이 녀석에게는 아주 유니크한 특기가 하나 있다.

“탓하려고 온 게 아니니 걱정 마라.”

“그러면… 혹시 ‘그것’ 때문입니까?”

“그래. 혹시 그 ‘감각’은 아직인가?”

스벤 파라브에겐 ‘예지력’에 가까운 ‘직감 능력’이 있다.물론 무조건적인 직감 능력은 아니다.

본인이 겪는 ‘미래의 위기’에 한해, 이 녀석은 신기에 가까울 만큼 정확하게 감지할 수 있다.하면, 이번에는 어떨까.

“그…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은 아무것도 발동하지 않아서…….”

“…그런가.”

“혹시 뭔가 그런 기분이 들면 바로 달려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래, 알았다.”

선택을 하는 데 있어 직감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단 것에 아쉬운 마음이 드는 한편, 조금은 안심이 되기도 한다.‘아직은…….’

그래, 적어도 아직은 아닌 거구나.그 기록에 적힌 일들이 벌어질 때가.***

하루, 이틀, 사흘, 나흘…….시간은 빠르게 흘러 그날로부터 딱 7일 차가 되는 날.

“전부 끝났습니다. 이제 마법진만 활성화하면 당장이라도 도시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GM으로부터 마법진 복구가 끝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참고로 그 소식을 전하는 GM의 표정은 몹시나 격앙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이 긴 여정을 끝내고 마침내 돌아갈 수 있게 됐단 사실에 감격하는 듯한데…….

“예……?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방금 들은 대로다. 우리는 바로 도시로 돌아가지 않는다.”

“……예?”

은둔형 외톨이처럼 지내던 GM을 성벽 밖으로 끌어낸 장본인으로서 미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테지만.그래도 어쩔 수 없다.

“돌아가지 않으신다면… 어쩌시려는 겁니까?”

“이곳에서 계속 대기한다.”

“이유를 들을 수 있을는지요?”

“아직은 말할 수 없다. 좀 더 확실해지면 답해주지.”

나는 이유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채 그대로 ‘대기’ 상태를 이어나갔다.하루, 이틀, 사흘…….일주일, 이 주일, 삼 주일……정말이지 그 무엇도 하지 않고 ‘대기’만 할 뿐인 지루한 시간.

하나 내게는 그 시간들이 폭풍전야처럼 느껴졌다.스벤 파라브 만큼 정확하진 않을지라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두근-당장 내일이라도.솨아아아아아아아-!무언가 벌어질 것만 같은 불길한 기분.그런 상태로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째에 이르렀을 때쯤.

솨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잔잔하게 불어오던 바람이 돌연 거칠어진다.또한 그와 동시에 하늘이 어두워지고.후우우우우웅-!

종말의 날이 다가온 것처럼 먹구름이 뭉쳐지며 거대한 구름을 형성한다.

“비, 비라도 내리려나 보구려?”

“…그런 게 아닌 것 같습니다마는…….”

“혹시 저 기후 변화에 대해 아는 분 있나요?”

그러한 갑작스러운 변화에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진 주변. 나는 막사 밖으로 나온 단원들 사이로 한 명을 찾았다.스벤 파라브.

녀석을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막사를 열고 들어가 보니, 감기라도 걸린 사람처럼 이불을 뒤집어 쓰고 발발 떨고 있는 녀석이 보였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나, 남작님…….”

마침내 스벤 파라브의 ‘직감’이 발동했다.다만, 문제는…….

“여,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아, 아니… 여기서 벗어나면 어디로……? 도, 도망칠 곳이 없는데……?”

이 녀석이 이렇게 멘탈이 나간 모습을 보이는 건 이번이 처음인 거 같다.

“진정하고, 말해라.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게 무슨 뜻이냐?”

“주, 죽을 겁니다! 여기 있어도……! 여기서 떠나 도시로 향해도……!”


70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705화 70

너무 정신없는 상태에서 하는 말이었으나, 그래도 요지는 간단했다.성벽 바깥이든.성벽 안이든.어디를 가든 위험하다 이거구나.

쉽게 말해, 온 사방에 빨간불이 들어온 상황.두근-!대체 뭐가 터지려는 걸까.아니,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면.

대체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걸까.답답한 마음에 속에서부터 울분이 치솟아오르는 한편으로.

“그래…….”

순순히 순응하는 나 자신이 있다.

“내 팔자가 그렇지 뭐.”

애초에 이런 식으로 피하는 건 불가능했단 거다.성벽 바깥에서 대기할 만큼 대기하다가, 만약 그 전에 계층군주가 나오면 도시로 넘어가고, 나오지 않으면 그냥 밖에서 존버를 할 생각이었건만.

그런 식으로 피해갈 수 있는 폭풍이 아니었던 거다.

“아, 아……! 아……!”

바들바들 떠는 걸 넘어 경기를 일으키기 시작한 스벤 파라브를 보며 나는 조용히 각오를 다잡았다.

“얀델……!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다! 나와봐라!”

폭풍이든, 벼락이든, 물난리든.그 외에 내가 상상도 못할 온갖 개지랄이든.

“밖에서 뭔가 다가오고 있… 파라브 씨! 괘, 괜찮으세요?”

올 테면 오라고 해라.꽈악.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단장! 지시를……!”

이윽고 나를 찾아 막사까지 들어와 지시를 요구하는 카이슬란.

“스벤 파라브를 부탁하지. 아무래도 혼자 이동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듯하니.”

“알겠소이다.”

이내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떠날 채비를 전부 끝내고서 대기 중인 단원들이 보인다.

“에밀리, 현재 알아낸 것은?”

“거대한 마력 반응이 저 너머에서 관측되고 있다. 마력 파장 자체는 마물들과 동일하다고 하는데, 확신을 하진 못하겠더군.”

“어째서?”

“마물이라고 하기에는 그 파장이 너무 거대해서. 1등급 마물조차 이 정도는 아니라고 하더군.”

“그렇군…….”

“이쪽을 향해 빠르게 접근 중이라 하니, 서둘러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

나는 내 결정을 기다리며 대기 중인 단원들을 쓱 둘러보았다.늘 느끼지만, 이 순간이 가장 부담스럽고 거북했다.

무엇이 옳은 선택이며 그릇된 선택인지.그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두근-그럼에도 나는 결정을 해야만 하니까.

그리고 그 결정으로 인해 날 따르는 이들의 운명이 정해지니까.

“…우선 동굴 안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포탈을 활성화한 뒤, 언제든 도시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하겠다.”

결정을 끝마친 즉시, 클랜원 전원이 신속하게 이동 대열을 구축하며 동굴 안을 내달렸다.타다다닷-!빠른 이동속도 만큼이나 금세 좁혀지는 거리.

머지않아 복원이 끝난 귀환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냈고, 내 지시를 받은 GM이 신속하게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3분.’미리 준비를 다 해뒀기에 포탈이 열리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3분 안팎으로 짧았다.하지만…….솨아아아아아아-!

이 3분이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 걸까.

“다가오는 속도가 빠, 빨라졌어요!”

군영지 주변에 마력 감지 레이더를 쫙 깔아둔 리리스 마로네가 다급하게 소리치고.

“…….”

“…….”

수많은 역경을 넘어서며 생존 본능이 극으로 발달한 최정예 탐험가들은 표정을 굳힌 채 언제라도 전투를 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한다.

그리고 억겁과도 같은 1초가 몇 번이나 반복됐을까.

“다 됐습니다……!”

마침내 빛을 뿜어내던 마법진 앞으로 세찬 광채의 포탈이 열린 순간.

“왔다…….”

동굴에 있던 누군가가 한 마디를 중얼거렸고,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모두가 숨 죽인 채 정면을 바라보고서 귀기울이고 있었다.

드르륵, 드르륵.무언가가 바닥을 긁는 소리.철퍽, 철퍽…….질척이는 걸음 소리.끼이이이이이이이—왠지 모르게 누군가의 비명처럼 들리는 바람 소리.

“시야.”

짧게 오더를 내린 즉시, 옆에 있던 베르실이 빛 구체 마법을 활성화하며 어두운 통로 저편을 쭉 비췄고, 그 덕분에 우리는 몇 가지를 알 수 있었다.

드르륵, 드르륵.양발에 채워진 족쇄에서 나는 소리였다.철퍽, 철퍽…….질척한 발소리가 아니라, 수없이 꿈뻑이는 눈알에서 난 소리였으며.

끼이이이이이익-녀석이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주위로 고통스러워 하는 것 같은 영혼들이 휘몰아치고 있었다.또한…….

“……얀델, 저놈과 싸워선 안 된다.”

마물의 위험 정도를 알 수 있는 [위기감지]를 지닌 아멜리아의 조언이 아니더라도.

“아, 아……! 아아……! 아아악……!!!”

얼굴이 새하얗게 변한 채 이도저도 하지 못하는 스벤 파르브가 아니어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이놈이 바로 ‘그 괴물’이라는 걸.그리고…….

두근두근두근두근-!저놈은 위험하다고.지금까지 싸웠던 그 어떠한 적들보다도 더.

“하…….”

그래도 덕분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주저함을 집어 던질 수 있었다.도시로 돌아가지 말고 이놈이랑 싸워볼까도 싶었건만.그건 깔끔하게 포기.

“전원 포탈을 타고 도시로 귀환한다!”

내 외침이 떨어짐과 동시에 포탈 가장 앞에 있던 GM이 먼저 포탈 안으로 들어섰고, 그후로도 한 명씩 빠르게 포탈로 들어갔다.

“따라오는 거 맞지……?”

불안한 눈빛의 미샤.

“아저씨, 전 아저씨랑 같이 갈래요.”

억지를 부리는 에르웬.

“비요른……! 그냥 싸워보면 안 되냐? 잡으면 뭔가 귀한 걸 줄지도 모르는데…….”

아직 사태 파악 못 한 아이나르까지.

“뭣들 하나! 얼른 포탈을 타지 않고!”

이윽고 화난 기색으로 소리치자 에르웬과 아이나르가 화들짝 놀라며 포탈로 향한다.다만 문제는…….

[캬아아아아아아아아악—!!!]내 외침 소리가 ‘저놈’을 자극했을까.멀리서부터 걸어오던 녀석이 급작스럽게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한다.

한데 그런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아아……! 시, 싫습니다! 싫어요! 싫다고……!”

포탈 앞에서 공황장애라도 온 듯이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 스벤 파라브.

“저, 저기로 가면 죽는다고! 나, 난 안 갈 거야……!”

“뭐라는 겐가! 그럼 여기 혼자 남기라도 하겠다고?”

“아아……! 아아! 아아악!!”

“젠장! 무슨 힘이……!”

아무리 카이슬란이라도 성기사 출신인 스벤 파라브를 강제로 이끌고 나가는 게 쉽지 않아 보인다.

“됐다, 카이슬란! 넌 먼저 떠나라!”

“하지만……!”

“저놈은 내가 챙겨서 갈 테니 걱정 말고.”

따라서 카이슬란을 먼저 내보내고 스벤 파라브를 인도받았다.그리고 쓱 뒤를 확인해보니…….

[캬아아아아아아아아악—!!!]그래도 그리 빠르진 않네.나랑 얘만 빼면 다들 포탈을 타고 나간 상황이고.

이윽고 남은 시간을 얼추 확인한 나는 녀석의 턱주가리를 잡아 고정해 강제로 내 눈을 보게끔 만들었다.그리고…….

“징징대는 건 그만해라. 가기 싫은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에?”

“다 들었으면 얼른 들어가라.”

거, 한시가 급한 상황에 바바리안 귀찮게 하고 있어.

“아! 아아악!!”

이내 그 말을 끝으로 스벤 파라브를 휙 들어서 포탈 안으로 집어 던졌다.‘그럼 나만 남은 건가.’이로써 이제 나만 포탈을 타고 넘어가면 끝.

그래도 다행히 마지막에 와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거나 하지는 않았다.단지…….타닷-!점프 하듯 포탈 안으로 몸을 내던지며 생각했다.

아니, 땅의 마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당신은 그곳에서 더 힘들고 슬픈 일을 겪게 될 거예요.][그래도 돌아가고 싶어요?]

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지금도 같다.‘그래.’이제 낯설 것도 없잖아?「캐릭터가 라프도니아로 이동합니다.」가보자.폭풍 속으로.


20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706화 20

706화 소집령 (1)

포탈을 타고서 노아르크 지하 요새로 돌아오고서의 첫 감상은 ‘조용하다’였다.

“…….”

“…….”

긴박한 상황을 지나오며 격해진 단원들의 숨소리를 제외하면, 주변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했다.

요새의 광장을 점거 중이라던 왕가군은커녕 쥐새끼 하나 보이지가 않는 주변.

솔직히 조금 예상외의 상황이었다.

포탈을 타기 전에 인간 운명 추적자나 다름없는 스벤 파라브가 그 난리를 쳐대기에 도착하자마자 뭔가 터지진 않을까 내심 걱정했건만.

“아아… 으어… 아…….”

그나저나 얘는 아직도 이러고 있네.

“정신 차려라, 스벤 파라브.”

앞으로 다가가 말을 걸어봤지만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몸은 멈출 기미가 없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하지 지켜보던 때.

“…괜찮으세요? 파라브 씨, 정신 좀 차려보세요. 네?”

아이스록 원정을 인연으로 우리 클랜에 합류하게 된 군부 출신 마법사 리리스 마로네가 녀석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잡는다.

“뭐 때문인지는 몰라도 괜찮을 거예요. 무서워 하지 마세요. 제가 지켜드릴 테니까.”

내가 보기엔 헛수고였다.

거, 그런다고 얘가 정신을 차릴 거 같진—.

“아, 아… 마, 마로네 양?”

응?

“저, 저… 마, 마, 마로네 양? 일단 손은 좀 노, 노, 놓고…….”

…이게 된다고?

나랑 대체 뭔 차이인데?

“앗! 죄송해요……. 파라브 씨가 추워 보이셔서…….”

“아, 아니! 사, 사과하실 일은 아닙니다. 제, 제가 더 죄송합니다……!”

마로네가 화들짝 놀라 손을 떼며 생겨난 기묘한 정적.

“…….”

“…….”

대체 뭔데 얘네들은?

로트밀러랑 샤빈 에무어처럼, 뭔가 썸이라도 타고 있는 사이인 건가?

‘음… 마로네를 보면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잘 모르겠다.

남녀 관계라는 게 참 어렵기도 하고, 솔직히 말해 얘네가 어떤 사이인지 중요한 것도 아니니까.

중요한 건 녀석이 이제야 정신을 차렸다는 것.

그것 하나뿐이다.

“파라브, 정신 차렸으면 일어나라. 꼴불견처럼 계속 그러고 있지 말고.”

“예? 아, 아! 예……!”

이내 어깨를 잡아 강제로 일으켜 세우자, 그래도 정신이 들었다고 자기 힘으로 서 있는다.

오케이, 이 정도면 대화는 될 거 같고.

“그 직감은 아직도 그대로냐?”

“예…….”

후… 그러면 진짜 머지않아 뭔가 ‘사건’이 터지긴 할 거란 건데…….

“…알겠다. 혹시 뭔가 변하는 게 생기면 바로 내게 말하고. 정신 없을 테니 너는 뒤쪽에서 좀 추스리면서 천천히 따라와라.”

“…죄송합니다.”

파라브와의 대화는 이쯤에서 끝내고 아멜리아와 베르실을 불러냈다.

“주변에 왜 아무도 없는지 아는 게 있나? 너희가 나올 땐 왕가군이 점거 중이라고 했었던 거 같은데.”

“그랬지. 그래서 몰래 마법진을 활성화해 나가려고 고생도 했었고.”

“저도 뭐 때문에 왕가군이 철수했는지는 모르겠어요. 짚이는 게 없네요.”

흐음, 그렇단 말이지…….

돌아왔을 때 왕가군이 있으면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지까지 미리 준비를 했건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단 것 하나는 그래도 맘에 든다.

왕가군이 왜 철수한 건지를 알 수 없는 게 조금 많이 찝찝하긴 하지만.

“얀델, 그래서 지금부터는 어쩔 예정이지?”

아멜리아의 질문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번에도 역시나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그냥 아무도 없는 여기 이 지하 요새에서 숨 죽인 채 기다리며 숨어 있거나.

그도 아니면, 일단 도시로 올라가서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을 해보거나.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내릴 결정은 정해져 있었다.

“…우선 도시로 돌아간다.”

눈을 감는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다.

아무리 겁이 난다 해도 억지로 눈을 떠서 앞을 내다보아야만 한다.

그럼 적어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두려워 해야 하는지.

물론 지하실에 들어가 눈을 닫고 귀를 막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으나, 그것은 모든 상황을 알고서 내린 결단이어야 한다.

마냥 겁이 나서 숨어든 게 아니라.

“몇 구역으로 갈 거지?”

“일단은 7구역으로 가면서 상황을 보고 유동적으로 정하겠다.”

그렇게 우리는 적막한 지하 도시를 떠나 노아르크와 라프도니아의 경계선이라 할 수 있는 하수도로 올라왔다.

순수하게 이동 속도에만 집중한 진형이 아니라…….

미궁에서 처음 발을 딛거나, 극도로 위험하다고 알려진 지역을 이동할 때와 같은 경계 대형.

“…….”

“…….”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단원들 대부분이 의문인 표정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의문이었다.

그야 얘네들 입장에서는 단순히 성벽 밖으로 나왔다 이제 돌아온 것뿐이잖아?

마치 뭔가 위험한 상황이 펼쳐졌다고 확신하듯 움직이는 내가 이상해보였겠지.

뭐, 그래도 신뢰작을 잘해둔 덕에 어떠한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으리라고 여기는 듯하지만.

쿠우우우우우웅-!

그렇게 앞장 서서 길을 찾는 아멜리아를 따라 하수도를 걷고 있을 때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바닥과 천장이 흔들렸다.

막 그렇게 엄청 세게 흔들린 건 아니고, 미세한 진동이었으나 경계 중이던 단원들의 표정에 긴장감이 더 어리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굉장히 멀리서부터 전해진 진동이었소.”

“…정말로 도시 위에서 뭔가 벌어지고 있는 건가?”

처음엔 조금 긴가민가 했다면 이제는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한 듯한 얼굴들.

그게 더 심해지기까지 많은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피?”

하수도의 구정물 위로 시뻘건 핏물이 보인다.

그리고 이를 따라 좀 더 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시체군.”

하수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시체가 보인다.

딱 봐도 사망한 지 그렇게까지 오랜 시간이 흐른 건 아닌 듯한데…….

신원 파악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시간이 없어 대충 비싼 장비들만 챙겨서 갔는지, 남은 장비들이 제법 됐거든.

“이 사람들… 왕가군이네요.”

왕가군이 죽었다.

아무리 인적이 드문 하수도라고는 하나, 엄연히 라프도니아의 영역인 이곳에서.

“단순히 부랑자들한테 약탈을 당했다거나 했을 가능성은… 없겠죠?”

그럴 리가 있나.

감히 왕가군을 공격하는 부랑자가 하수도 안에 있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

따라서…….

“에밀리, 계속 안내해라. 어서 위로 나가봐야겠다.”

왕가군의 시체를 지나쳐 속도를 조금 더 높였다.

그리고 바깥으로 이어진 출구에 도착할 때까지 몇 번이나 더 되는 왕가군 시체를 보았다.

다만 아까처럼 지진이 난 듯 하수도가 흔들리는 일은 그때 그것을 마지막으로 한 번도 없었는데…….

흐음, 대체 무슨 일인 걸까 이게.

“……의외로 조용한데요?”

하수구 출구에 도착한 우리는 섣불리 나가지 않고 안에서 밖을 관찰했다.

각도가 한정적이라 시야에 제약은 있었지만, 그래도 정면으로 보이는 거리는 아주 조용했다.

물론 그렇다고 안심할 수 있었단 건 아니었다.

아무리 하수도 입구가 있는 외곽이라 한들, 이렇게 거리에 아무도 없는 게 정상은 아니잖아?

그것도 대낮 시간에.

“……어쩔 거지?”

“일단 이곳에서 대기한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움직이면 바로 눈에 띌 테니까. 에밀리, 몇 명을 데리고 나가서 몰래 상황을 보고 돌아와 줄 수 있겠나?”

“몇 명도 필요 없다. 이런 건 나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하니.”

“아무리 그래도 위험할 수—.”

“차라리 혼자인 게 더 안전하다. 발각이 됐다고 위험할 상황이면, 몇 명 더 있다고 달라질 것도 없으니.”

음… 암만 그리 말해도 걱정이 되는데.

그래도 얘가 전문가니까, 저게 더 안전한 게 맞겠지?

“알겠다. 부디 몸조심 해라. 많은 정보를 바라는 게 아니니까 절대 무리는 하지 말고.”

“…다녀오지.”

그 말을 끝으로 아멜리아가 약간의 준비를 거친 뒤 하수도 문을 열고 거리로 나갔다.

어찌나 움직임이 기민하고 은밀한지 거리로 나간 순간부터 뒷모습을 놓쳤을 정도.

무리하지 말란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은 것은 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일단 믿고 기다리며 할 일들을 하고 있기로 했다.

그야 시간은 효율적으로 써야 하는 거잖아?

“클랜 하우스에 있는 메시지스톤 좌표로 마력 송신을 넣었는데 반응이 없어요.”

“그럴 겁니다. 확인을 해보니, 도시 전역에 마력 송수신을 막는 파장이 쫙 깔려져 있더군요. 저도 제 연구실에 있는 원격 영상기록구와 연락이 되지 않는 중입니다.”

“어쩐지! 마력이 중간에 흩어지는 느낌이더라니…….”

“아! 군 내에도 그런 마도구들이 있다고 들었소. 하나 전시에나 사용되는 것이라 알고 있었소만……. 허… 정말 도시에 뭔가 일이 나긴 한 모양이구려.”

“밖에 나가 있던 2달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생겼던 걸까요?”

아멜리아가 밖에 나가있는 동안,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알아낼 수 있는 정보들을 최대한 정리했다.

그리고 그렇게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끼이익.

아멜리아가 하수도 철창을 열고 복귀했다.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 표정일 뿐, 다치거나 전투가 있었던 흔적은 옷차림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다친 곳은?”

“…없으니 걱정 마라.”

내 물음에 피식 웃으면서 답한 아멜리아는 그동안 밖에 나가서 알아온 정보들을 우리들에게 공유했다.

“성벽 쪽은 군인들이 쫙 깔려서 탐지 계열 마도구 및 이능들을 상시적으로 쓰고 있는 탓에 가까이 가지 못했다. 다만, 일단 한 가지 확실한 건 노아르크 놈들이 점거한 비프론 쪽에서 사건이 터졌단 거다.”

“비프론……?”

“이따 밖에 나가보면 알겠지만, 비프론을 뒤덮고 있던 결계는 사라진 이후였다.”

“정말로… 전쟁이 터지긴 한 모양이군.”

“아마 그럴 거다. 이런 게 우리 클랜 하우스 우편함에 들어있던 걸 보면.”

이내 아멜리아는 우리가 거처로 쓰고 있던 클랜 하우스에서 찾았단 우편을 내게 건넸다.

인장을 보니 왕가에서 온 우편이었고, 아멜리아는 이미 열어서 내용을 확인한 듯 밀랍은 뜯겨져 나가 있었는데…….

“이건…….”

우편 내용을 확인해보니 왕가에서 보낸 공문답게 서론이 길었다.

다만 이걸 짧게 정리하자면…….

“소집령이군.”

“그래, 보아하니 우리만이 아니라 도시 내에 있는 모든 클랜들이 소집된 듯하다.”

“원래 도시 법률 내에도 전시에 탐험가 및 전투가 가능한 인원을 강제로 군부에 편입시킬 수 있다는 법률이 있긴 하오.”

뭐, 그거야 그렇겠지.

어느 나라가 전쟁이 났는데 정규 군인들만 데리고 싸우겠어?

그런 생각을 하던 때 군부 출신인 카이슬란이 옆에서 무거운 표정으로 숨을 토해냈다.

“하나 사태가 정말로 심각하긴 한 듯하오. 약 1년 전 노아르크인들이 침공해왔을 때도 소집령은 발동되지 않았소이만…….”

“어째서였지?”

“소집령을 발동하면 결국 왕가의 권위가 떨어지기 때문이오. 왕가의 힘은 절대적이어야 하는데, 이렇게 소집령을 뿌렸다는 건 도움이 필요하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으니까.”

오, 그래?

“쉽게 말해, 왕가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소집령’은 절대 뿌리지 않았을 거란 뜻이군?”

“…나는 현 상황에 대해 그렇게 해석해도 무방하다 판단하오.”

카이슬란의 말을 들었더니 생각이 많아진다.

그래서 가만히 말 없이 턱만 매만지고 있던 때였다.

“그나저나 이거 상황이 골치 아프게 됐구려……. 그… 레인즈 양? 혹시 우편 중에 클랜이 아니라 단장에게 온 공문은 없었소이까?”

“없었다마는……. 뭐가 골치 아프단 거지?”

“그야 우리 단장은 작위 귀족이지 않소이까. 소집 명령이 떨어질 시, 모든 작위 귀족들은 ‘군사령부’로 소속이 전환되오.”

“군사령부……?”

“흐음, 조금 복잡한 개념이라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소만…….”

이내 난색을 표하던 카이슬란은 천천히 머릿속을 정리하는가 싶더니 이내 최대한 간결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이후 우리가 도시로 복귀하는 즉시, 우리 단장은 ‘군사령부’에 소속되어 황도에서 대기하게 될 거요.”

“그럼 아나바다 클랜은?”

“윗선에서 부여한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오. 높은 확률로 가장 위험한 최전선에서. 그것도 단장 없이 우리끼리만.”

해석하자면, 공석인 부단장부터 먼저 뽑아야 한단 뜻이다.

도시로 돌아가기 위해선.

29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707화 29


707화 소집령 (2)

카이슬란의 얘기를 듣고 나니 생각이 많아진다.

그도 그럴 게,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순간 나는 군사령부로 끌려가고, 우리 클랜은 나 없이 혼자서 위험한 최전선으로 갈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냥 이대로 지하 아래에 숨어 있어야 하나?’

세 명의 동료를 잃는다.

그런 기록을 보았던 만큼, 내 동료들과 떨어져 있는단 선택지 자체가 너무나도 불안하다.

하지만…….

“가야하오, 단장.”

내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내심 짐작이 가는 듯 카이슬란이 설득하듯 말을 걸어온다.

“…가야하다니?”

“공문을 보아하니 소집령이 떨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듯하더구려. 아직은 소집 기한이 지나지 않아 문제 될 게 없지만, 기한이 지나고서도 소집에 응하지 않을 시 추후 큰 문제로 불거질 수도 있소.”

“예를 들면?”

하나하나 다 말해보라는 듯 쳐다보자, 카이슬란이 조심스레 말문을 뗐다.

“우선 단장의 명성에 아주 큰 오점이 생길 것이오. 우리 속사정이야 어쨌든, 남들이 보기에는 탈영 행위나 다름없으니. 전쟁이 무서워 도망친 것처럼 보일 거요.”

축약하자면, ‘거인’ 비요른 얀델 남작이라는 네임 밸류가 시궁창에 처박힐 거란 뜻인데…….

옛날부터 명성의 도움을 적잖이 받았던 나였기에 명성의 가치를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딴 건 전혀 상관 없으니 다음.”

한치의 고민도 없이 즉답하는 날 보며 카이슬란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참으로 단장다운 대답이구려.”

“아무튼, 됐으니까 다음.”

“…두 번째는 클랜 자체가 입게 될 피해요. 아까도 말했듯 ‘탈영’ 행위로 구분되기에 전쟁이 끝나면 우리 모두 재판대 위에 서게 될 거요. 그리고 엄벌을 받게 되겠지. 탈영은 군사법에서 몹시나 큰 죄로 취급되니.”

“엄벌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된다는 거지?”

“사형이오. 군사법은 본보기가 가장 큰 목적이니.”

이전처럼 단순히 스쳐 들을 수는 없는 이야기였다.

이 많은 인원들이 평생 신분을 숨기고 하수도 아래에서 살아갈 게 아니라면.

“만약… 노아르크가 승리한다면? 그땐 탈영으로 처벌 받을 일도 없지 않나?’

“그거야 그렇겠지만…….”

만약을 논하는 내 말에 카이슬란은 나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왕가가 패배할 일은 없을 것이오.”

“어떻게 그리 확신하지? 애초에 소집령을 내렸단 것 자체가 탐험가의 손을 빌려야 할 정도로 왕가가 내몰렸단 뜻 아닌가?”

“글쎄… 본인들 피해를 줄이기 위해 손을 빌렸을 뿐, 정말로 내몰렸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구려.”

이후 카이슬란은 자신만의 의견이니 감안하라고 선을 그었지만, 그렇다고 흘려 들을 수는 없었다.

이 녀석은 군에 몸을 담았던 녀석이니까.

왕가의 힘은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터.

“혹시 세 번째도 있나?”

“세 번째는 단장이오.”

“…나?”

“그렇소. 우리처럼 ‘사형’까지는 가지 않겠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탈영’을 명분 삼아 작위를 회수할 수도 있단 말이오.”

날 보면서 하도 심각한 눈빛을 쏘아내기에 뭔가 싶었는데.

“작위 회수라…….”

사실 작위 회수 자체는 아무래도 좋다.

다만, 문제는 단원들이다.

만약 나라도 작위가 멀쩡하다면 어떻게든 손을 써서 ‘사형’을 막는 게 가능했을 테니까.

“무얼 그리 걱정하는지 모르겠소만, 내 단장에게 한마디만 올려도 되겠소?”

이내 고민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이자, 카이슬란이 ‘군인’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당신을 따르기로 한 건, 당신 애새끼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오.”

“…….”

“단지 당신과 같은 길을 가고 싶어서지.”

카이슬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변에서 공감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속시원하게 해주는군.”

아멜리아의 경우엔 정말 사이다를 마신 것처럼 흡족한 표정을 지었을 정도.

“가야 하오, 단장. 결코 왕가가 패할 리는 없으니.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지금이라도 가야 하오.”

그 상황에서 다시 이어진 직언에 나 역시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알겠다. 나가겠다. 하지만 그전에 할 게 있다.”

“할 것이라면……?”

그야 뭐겠어.

나가면 나랑 너희랑 헤어져야 한다며?

“지금부터 부단장을 뽑겠다.”

그동안 무리를 이끌 사람은 있어야지.

***

창설 후 현재까지 공석이었던 부단장 자리.

사실 일부러 비워둔 건 아니고, 진작에 채워두고 싶긴 했지만…….

‘어쩌다 보니 이제서야 이렇게 뽑게 됐네.’

뭐, 뽑는 걸 미뤄둔 이유야 많다.

애시당초 다들 그 자리를 부담스러워했을뿐더러.

부단장이 없어도 각자 한 분야씩 도맡으며 잘 굴러가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단원들끼리 좀 더 수평적인 분위기를 원하기도 했고.

그러나 이제부터는 다르다.

“부단장… 말씀이십니까?”

“그래.”

세간에는 그런 말이 있다.

양이 이끄는 사자 무리보다, 사자가 이끄는 양 무리가 더 강하다고.

그만큼 리더의 역할은 중요하다.

따라서…….

“혹시 입후보 하고 싶은 자가 있나?”

우선 단원들에게 넌지시 물었지만, 섣불리 손을 들어오는 이는 없었다.

그나마 카이슬란은 좀 욕심이 나는 듯한데…….

‘쟤네 둘은 좀 의외네.’

중대형 클랜의 부단장 출신인 베르실 고울랜드와 제임스 칼라.

어찌 보면 누구보다 이 자리에 제격일 이 둘은 아예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한 번 해본 만큼 힘든 자리라는 걸 알아서 그런가?’

하긴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다.

우리 클랜은 다른 클랜들과는 좀 다르니까.

부단장이 되어봤자 권력을 누린다든가 하는 혜택보단 ‘의무’가 더욱 클 게 뻔하다.

‘흐음… 그럼 누가 적임자려나?’

그런 의미에서 주변에 서 있는 단원들을 한 명씩 한 명씩 살펴보았다.

과연 누가 부단장에 가장 적합할까.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딱 한 가지는 확실했다.

부단장 자리는 내가 직함을 내려준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게, 여기서 내가 아우옌한테 부단장 직을 준다고 하면 애들이 말을 듣기야 하겠는가?

스스로의 힘으로 클랜 내에서 권위를 만들 수 있는 인물이어야지만 그 자리를 맡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멜란드 카이슬란.

얘 정도면 일단 최소 기준은 충족됐다.

집단을 이끈 경험도 있고, 군인 출신이라 나름 카리스마도 있을뿐더러…….

‘무엇보다 전략, 전술에 능하지.’

단점으로는 정보력이 부족하고, 자기만의 신념이 있어 능동적이지 못하다.

쉽게 말해, 임기응변이 좀 떨어진단 건데…….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아멜리아는 딱 그 반대다.

언제나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온갖 일들을 겪은 만큼 임기응변에도 능하다.

다만 카이슬란보단 집단의 이해도가 낮다.

카리스마가 없는 건 아니지만, 혼자 움직이는 걸 더욱 선호하는 것인데…….

‘원년 멤버인 만큼 부단장 자리를 맡는다 해도 다들 그러려니 할 거 같긴 하네.’

그래도 이건 매우 큰 장점이었다.

당장 나와 떨어져서 클랜을 이끌어야 하는데, 얘라면 다들 군말없이 인정할 거 같달까.

‘베르실 고울랜드.’

…얘도 괜찮은 선택지 중 하나이긴 하다.

아이스록 원정이 끝나고 가장 먼저 합류한 멤버라 클랜에 있던 시간도 비교적 길며, 전직 부단장이라는 경력도 있으니까.

‘뭐, 둘보단 카리스마가 부족한 거 같긴 한데…….’

그건 일반 단원으로 지내서 그렇고, 부단장이 되면 다르게 행동할 것이다.

‘전략, 전술도 나름 능한 거 같고……. 평소 말하는 걸 들어보면 그렇게 고지식하거나 고집이 센 것도 아니었지…….’

이렇게 정리를 해보니 베르실은 아멜리아와 카이슬란을 섞은 듯한 느낌이었다.

딱 그 중간이랄까?

‘아무튼, 이 셋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후보가 없네.’

이후 남은 단원들까지 쭉 훑어본 나는 이렇게 세 명으로 후보자를 좁혔다.

그야 에르웬과 미샤는 원년 멤버이긴 하지만 누군가를 이끌 만한 그릇이 안 되니까.

“저기… 부단장!! 혹시… 내가 해도 되나?!”

아이나르는 말할 것도 없고.

“넌 가만 있어라.”

“왜! 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나서랬지 않나!!”

“……넌 제외다.”

“너무하다! 비요른!! 어떻게 네가 나를 이렇게 푸대접할 수 있—.”

“프넬린, 단장이 말하는 중이다. 조용히 해라.”

이내 아멜리아가 눈을 세모나게 뜨며 말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해진 아이나르.

“…….”

후, 이런 걸 보면 역시 아멜리아가 제격인 거 같기는 한데…….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할 생각이 없다.”

“…응?”

“나와는 절대 어울리지 않을 테니까.”

글쎄,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뿐인 거 같은데.

얘도 가만보면 자기 스스로를 낮게 평가하는 버릇이 있다.

에르웬이나 미샤처럼 치마나 화사한 옷을 절대 입지 않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뭐든 자기랑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긴달까?

입어보지도 않았으면서.

“그래도 걱정하진 마라. 누가 부단장이 되든 네게 했던 것처럼 열심히 도울 테니까.”

뭐, 그래도 저렇게까지 말하는 애한테 억지로 시키는 것도 못할 짓일 터.

아멜리아 부단장 만들기는 이쯤에서 깔끔하게 포기.

“입후보하는 자가 없으니 내가 알아서—.”

“나! 내가 한다고 했… 아악! 왜, 왜 꼬집나!”

이내 한 번 더 말을 끊으며 포기하지 않는 의지를 내비치던 아이나르의 허리를 미샤가 꼬집으며 상황은 마무리.

“입후보자가 없으니 내가 정하겠다. 멜란드 카이슬란, 그리고 베르실 고울랜드. 나는 너희가 부단장 자리에 적임이라고 생각하는데.”

“맡겨준다면 그 의무와 무게를 피하진 않겠소.”

“저도요… 결국 누군가 한 명은 해야 하는 자리일 테니까.”

오케이, 그럼 이 둘은 입후보가 끝났고…….

남은 과정은 딱 하나다.

둘 중 하나가 또 포기한다고 하면 남은 한 명한테 시킬 생각이었는데, 둘 다 할 수 있단 의지를 내비쳤으니…….

“지금부터 투표를 시작하겠다. 전 단원은 내게 와서 귓속말로 말해라. 누가 더 부단장에 어울린다고 생각을 하는지.”

“귓속말… 말입니까?”

“걱정 마라! 비밀은 지켜주겠다!”

“…….”

제임스 칼라는 어딘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으나 더 이상 이견을 내뱉진 않았다.

그리고…….

“자, 시작하겠다!”

그렇게 시작된 바바리안식 비밀 투표.

첫 번째로 스타트를 끊은 건 내가 지목한 에르웬이었다.

“아멜리아 레인웨일즈요.”

…응?

내가 뭘 잘못 들었나?

“그냥요. 전 그 여자가 제일 잘 할 거 같아서.”

“아니, 그래도 둘 중 하나를 뽑아야 하는데…….”

“그럼 그냥 기권표로 해주세요. 누가 하든 상관이 없어서.”

“알겠다.”

그럼 시작부터 기권표(아멜리아)가 하나.

“나는 고울랜드 씨로……. 카이슬란보다는 조금 더 착해보여서…….”

두 번째인 미샤는 베르실을 택했다.

……착한 게 부단장이랑 뭔 상관인진 의문이지만.

‘……무슨 초등학교 반장 뽑는 것도 아니고.’

지금 내가 하는 게 인기투표인가도 싶었지만, 그래도 이후 투표들은 좀 나았다.

“베르실 고울랜드.”

딱 한 마디만 하고 돌아간 아멜리아.

“저는… 고울랜드 양에게 한 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부단장 출신의 제임스 칼라.

“둘 중 한 명에게 목숨을 맡겨야 한다면 전 고울랜드 양을 뽑겠습니다.”

남다른 생존 감각을 지닌 스벤 파라브.

“전 베르실 고울랜드 씨로 할게요.”

별다른 이유 없이 투표만 한 리리스 마로네가 베르실에게 한 표씩 던지며 총 다섯 표.

“나는 카이슬란으로 가겠다! 마법사보다는 기사가 낫지!”

“저기… 여기까지 다 들리는데요?”

비밀 투표가 뭔지 모르는 듯한 아이나르가 한 표를 더 던지며 카이슬란도 첫 득표를 했는데…….

‘그럼 이미 결과가 정해졌네.’

입후보자들은 투표를 하지 않기로 했기에 사실상 이미 투표가 끝났다.

하지만 그래도 의견은 듣고 싶었기에 마지막 한 명도 불러내서 투표를 하게 시켰다.

“저, 저는…….”

약탈자 출신 항해사 아우옌 록로브.

과연 이 녀석은 누구를 뽑을까.

“저는… 역시 마님이 아니면 안 될 거 같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대사였다.

“마님……?”

“아, 아니… 레인즈 님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단장 자리에 가장 어울리는 분은 그분밖에 없는 거 같습니다…….”

허허…….

“알겠으니, 돌아가라.”

“예… 괜한 소리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다, 의견을 내는 건 너의 자유지.”

아무튼, 그렇게 아우옌까지 투표를 끝내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며 부단장 선거는 끝이 났다.

“…….”

“…….”

어딘가 긴장한 표정인 카이슬란과 베르실.

또한 다른 단원들도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자뭇 궁금해하는 눈치다.

“걱정마라! 카이슬란! 다들 너를 뽑았을 테니까! 마법쟁이보단 기사가 낫지! 당연히 네가 될 거다!”

“하하, 너무 띄워주지 마시오. 고울랜드 양도 아주 유능한 사람이니. 결과를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소.”

음… 갑자기 저러니까 발표하기가 꺼려지는데.

뭐, 그렇다고 안 할 생각은 없지만.

“결과 발표를 하겠다. 베르실 고울랜드가 다섯 표를 얻으며 오늘부로 우리 아나바다 클랜의 부단장직을 역임하게 됐다.”

이내 1등을 발표하자 카이슬란은 어딘가 아쉬우면서도 후련한 표정이었다.

“고울랜드 양이 다섯 표면 나는 세 표였겠구려. 이 정도 차이면 그리 아쉽지도 않—.”

“에밀리 레인즈가 두 표, 멜란드 카이슬란이 한 표로 이상이다.”

좀 전에 지었던 카이슬란의 표정만큼이나 깔끔하게 정리된 투표 결과.

그래서인지 카이슬란도 한참이나 텀을 두고서 반응을 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요?”

“말 그대로다마는?”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하자 카이슬란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소리친다.

“하지만 레인즈 양은 부단장 경쟁에 참가하지도 않았잖소!”

음, 그건 그렇지.

나도 그래서 그냥 나 혼자만 알고 있을까도 싶었다.

근데 그랬다가는 신성한 비밀 투표의 공정성에 흠이 생기잖아?

“걱정 마라. 레인즈에게 간 표는 전부 기권 처리를 했으니까.”

그러니까 힘내.

“카이슬란, 2등은 엄연히 너다.”

27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708화 27

708화 소집령 (3)

부단장 선출이 끝난 후, 베르실 고울랜드를 따로 불러내 독대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야 명색이 단장인데 해줄 말이 있잖아?

“후후, 축하한다. 마침내 권력을 손에 넣었군.”

“…장난치지 마시고요.”

거, 단지 부단장 자리를 너무 부담스럽게 여기는 거 같아서 분위기 좀 풀려 한 거구만.

뭐, 원래 2인자는 좀 진중한 맛이 있긴 해야지.

“베르실 고울랜드.”

“네, 말씀하세요.”

“오늘부터 네가 우리 클랜의 부단장이다. 내가 없을 때는 네가 나를 대신해서 클랜을 이끌어야 한다. 모두 너를 돕겠지만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너여야만 하고, 그 결과 역시 네가 책임져야만 한다.”

“알고 있어요…….”

뭐, 표정을 보니까 대충 답하는 건 아닌 거 같네.

덕분에 한결 마음이 놓인다.

얘라면 절대 타협하지 않고 성실하게 부단장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그래, 그러니까…….

‘긴 말은 필요 없겠지.’

미리 준비한 조언의 말들은 전부 도로 집어넣는다.

이미 그 무게를 아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믿음과 격려일 테니.

“너라면 잘할 수 있을 거다.”

“…….”

“가자,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

그 말을 끝으로 어깨를 몇 번 툭툭 치고서 독대를 끝냈다. 그리고 다시 단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본격적인 회의를 시작했다.

아니, 회의라고 하기엔 좀 그런가?

솔직히 말하자면 범죄자들이 경찰 조사 전에 입을 맞추는 행위에 가까웠다.

“그래도 미리 준비를 해두고 가서 이 부분은 크게 문제 없을 거예요.”

“준비?”

“돌아오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몰라서 성벽 밖으로 나가기 전에 일부러 말을 흘려놨었거든요. 단원들 전부 모여 특훈을 하러 간다고.”

클랜원 전원이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 특훈을 한단 것.

누가 봐도 수상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그렇다 하는데 뭐 어쩌겠나?

실제로 꽤 많은 클랜들이 지하에 마련된 사설 훈련장에서 비슷한 걸 하는 경우가 있다.

비록 도시의 허가를 받아 합법적으로 ‘스킬’을 쓸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 공식 훈련장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이 되니까.

대부분의 클랜들이 전략, 전술 같은 걸 연습할 때 사설 훈련장을 이용하며, 도시에서도 암암리에 묵인을 해주는 것이 불문율인데…….

“사실 뭐라 변명을 하든 크게 상관은 없을 거예요. 소집령에만 제때 응하면 추궁할 명분이 없으니까. 우리가 두 달, 세 달 동안 어디에 있었든 그게 불법은 아니잖아요?”

뭐, 이게 정론이긴 하지.

세금만 내고 법만 지키면 안에서 뭘 하든 자유를 존중해주는 게 이 도시였으니.

핵심은 성벽 밖으로 나간 걸 들키지 않는 것이다.

‘오케이, 그럼 이 부분은 이만하면 될 테고…….’

이후로는 향후 계획에 대해 얘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여기서부터는 단장님의 역할이 중요해요.”

“내가?”

“군사령부 내에 우리 클랜의 발언권이 생기는 거니까요.”

“안전한 후방에 배치하거나 그럴 수 있도록 힘을 써보란 뜻이군.”

“네, 맞아요. 물론 단장님의 성향이 가장 중요할 테지만요.”

“성향이라니……?”

나는 그냥 평범한데?

굳이 따지면 맞는 것보단 때리는 쪽이 좋기는 한—.

“이 전쟁을 기회로 보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아, 그 말이었구나.

“전공을 세우기 유리한 곳에 저희를 배치할 수도 있으니까요. 비록 후방보다는 조금 위험할지라도—.”

더 들을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됐다, 그런 욕심은 추호도 없으니.”

나는 단호하게 말을 자르며 말했다.

“아무도 크게 다치지 않고 살아남는 것. 난 그거면 충분하니, 절대 무리하지 마라. 알겠나?”

몇 번이나 주의를 줘도 모자란 부분이었던지라, 나는 그말을 끝으로 단원들과 한 명씩 눈을 맞췄다.

그리고…….

“걱정 마세요. 단장님 뜻은 제가 확실하게 이해했으니까.”

마지막으로 시선 교환을 한 베르실이 결의에 찬 눈으로 그렇게 말해왔다.

“그래, 그거면 됐다.”

그래도 조금은 마음이 놓이네.

***

그렇게 얼추 계획에 대한 가닥이 잡힌 후, 우리는 비로소 하수도에서 나와 도시에 입성했다.

피난 작업이 끝난 텅 빈 길거리.

다만 비프론과 맞닿은 성벽 쪽으로 향하고 있자니 점점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

“…….”

과일을 사고 팔거나 하는 일반인들이 아닌, ‘투쟁’을 업으로 삼은 탐험가, 혹은 병사들.

그들이 우리를 보며 수근거리기까지 오랜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아나바다 클랜이다…….”

“소문에 의하면 합숙 훈련 같은 걸 하러 갔다고 하던데…….”

“그럼 이제서야 소집령을 확인하고 참전한 건가?”

섣불리 다가와 말은 걸어오지 않고 길을 내어주며 조용히 속닥이는 탐험가들.

대부분은 호의적인 시선이었다.

“배치된 곳이 7구역이라 다행일세.”

“암, 저들과 함께 전선을 지킨다고 하면 벌써부터 든든해지니 말일세.”

이런 위급한 전시에 가장 든든한 건 ‘강한 동료’인 법.

평소였으면 질시의 시선을 보내왔을 사람들조차 이번만큼은 반기는 눈초리였다.

“…동료들을 버리는 법이 없다지?”

“부디 그 명성이 사실이었으면 좋겠구려.”

“윗놈들은 우리 같은 놈들 천 명이 죽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놈들이니 말이오.”

“그래도 얀델 남작이 있으니 안심이 되는구려.”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현역 탐험가 출신인 작위 귀족은 현 세대에서 내가 유일무이하며, 그런 내가 내 클랜원들이 있는 7구역에 신경을 쓸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

든든한 후견인이 생긴 기분이겠지.

“니아 라프도니아!”

그렇게 성벽 쪽으로 걸어가고 있자니, 저 멀리서 기사 무리가 소식을 들었는지 다급하게 달려와서 경례를 취한다.

“얀델 남작 각하를 뵙습니다!”

“소속은?”

“제4 왕실기사단 칠외벽수호대 조장 무엘른 바일입니다.”

소속을 밝힌 기사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가타부타 따지며 이것저것 물어오지 않았다.

“실례가 안 된다면, 잠시 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남작님이 나타났단 소식에 군단장님께서도 몹시 기뻐하셨습니다.”

“군단장이라면 누구지?”

“제3 군단장 엘토라 테르세리온 님이십니다.”

그래, 그 후작 아들내미구나.

아니, 정확히는…….

[내 아들··· 엘토라 테르세리온은 이미 죽었네. 지금 내 아들놈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건 이름도 모를 어느 악령이지.]

그 아들내미 몸을 차지한 악령이자, 지난 아이스록 원정 때 우리를 버림패로 삼은 그 장본인.

‘이딴 새끼가 아직도 군단장 자리에 앉아 있으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 있나.’

“저… 남작 각하?”

“알겠다. 안내해라.”

사람들 시선이 쏠리는 길 한복판에서 얘기를 나눌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일단 기사의 안내를 받아 성벽 아래 주둔지 중심부에 위치한 지휘부로 향했다.

보아하니 성벽 쪽에 있던 가장 큰 여관을 통째로 쓰는 모양이었는데…….

“다른 분들께서는 1층에서 대기해주시겠습니까?”

“베르실, 너는 이리로 와라. 같이 올라갈 테니.”

“저기… 그…….”

우릴 안내한 기사는 베르실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싶은 눈치였으나, 이어진 내 뒷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우리 클랜의 부단장이다. 같이 얘기를 나누는 편이 더 좋을 텐데?”

“예, 그러면 이리로…….”

이내 기사는 우리를 3층의 객실로 안내했고, 그 안엔 오랜만에 보는 그 녀석이 있었다.

“반갑소이다, 얀델 남작.”

허, 새끼.

못 본 사이에 뭔가 거들먹거리는 게 심해졌네?

“앉으시오.”

작위도 없는 게, 군단장이라는 직위 하나 얻었다고 으스대기는.

콰직-!

왠지 짜증이 나서 그냥 푹 소파에 앉았더니, 소파가 그대로 내리앉았다.

“전… 그냥 뒤에 서 있을게요.”

그리 말하며 실제로 뒤에 선 베르실.

한데 그제야 그 존재를 인지한 듯 후작의 아들내미.

…줄여서 후레자식이 우릴 안내한 기사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린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 했을 텐데?”

“그… 아나바다 클랜의 부단장이라 하셔서…….”

“흐음, 부단장이라…….”

처음엔 당장에라도 내쫓을 듯하던 후레자식이 턱을 매만지기 시작한다. 중소 기업 영업사원들의 승진이 빠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허울뿐인 직함이라도, 있는 것과 없는 건 확연히 다르거든.

“어차피 부단장과 나는 숨기는 게 없는 사이이니, 신경 쓰지 말고 말해라.”

“숨기는 게 없는 사이라……?”

이내 내 말에 나와 베르실을 번갈아보던 후레자식이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흐음, 그럼 알겠소이다. 고울랜드 양? 이 자리에 계속 있어도 좋소.”

“배려, 감사드립니다.”

“그나저나… 힘드시겠소?”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은.

지난번에 나한테 처맞았던 기억이 다 삭제됐나?

권력 좀 얻었다고 뻐드럭거리는 꼴을 보는 게 같잖았기에 나는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우리는 왜 불렀지?”

“어디로 사라졌는지 종적을 알 수 없던 남작께서 나타났으니 어찌 부르지 않을 수가 있겠소. 아니, 그리고 애초에 남작도 소집령에 응해 온 것 아니오?”

“뭐, 그건 그렇긴 하지. 소식이 단절된 곳에 있다가 이제서야 소집령을 확인해서.”

“단절된 곳이라 함은 무엇인지 들을 수 있겠소?”

“별건 아니고 사설 훈련장에서 합숙 훈련을 하고 있었다.”

누가 들어도 수상한 답변이지만, 여기서 대놓고 의심의 말을 하는 것은 귀족계에서 엄청나게 큰 실례인 법.

“……하하, 그랬소이까?”

예상대로 후레자식놈도 별말은 하지 않고 넘어갔고, 그럼 이 주제는 여기서 마무리.

“그나저나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서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들어볼 수 있겠나?”

“아, 확실히 남작께서는 좀 상황이 특이하겠구려.”

“대강 들어보니 그렇다고 하더군.”

“우선 탐험가 특별법에 의해 아나바다 클랜은 전원 우리 3군단 소속으로 임시 편입이 되어 우리들의 지시를 받게 될 것이오.”

“내 경우엔?”

“일단 황도 카르논의 군사령부로 편입된 후, 배치될 곳이 정해질 것이오. 뭐, 대부분의 작위 귀족들은 후방 전략부 소속으로 전향되오만……. 간혹 최전방으로 배치되는 일도 있긴 하오.”

“오, 그렇게도 할 수 있었나?”

“당사자가 원할 경우, 혹은 그 작위 귀족의 능력이 최전방에 필요할 경우에는 그렇소.”

카이슬란에게는 미처 듣지 못했던 디테일한 정보였다.

“그럼 나도 여기 3군단에 남을 수 있단 뜻인가?”

“흐음, 그럼 남작께서 내 지시를 따라야 하는데 괜찮겠소?”

“상관없다.”

“그렇다면 나야 반길 일이오만……. 일단 군사령부로 가서 직접 얘기를 나눠보는 게 낫겠소. 내게는 작위 귀족인 얀델 남작을 멋대로 편입시킬 권한이 없으니.”

후, 그럼 결국 일단은 잠시 황도 카르논에 들러야 한단 거구나.

“이미 군사령부에도 연락이 전해졌을 터이니, 바로 그리로 가시면 될 것이오.”

“알겠다. 근데 대체 무슨 일이 터진 거냐?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바람에 아직 아무런 정보가 없는데.”

“후우… 이걸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간략하게 말하자면, 비프론을 점거했던 노아르크 무리들이 제 발로 밖으로 다시 나왔소. 그들은 황도가 목적인 것처럼 진군했고, 전 병력들이 동원되어 저지에 성공. 마도병기까지 동원해 그놈들을 다시 비프론까지 몰아붙이는 데 성공한 게 바로 오늘이오.”

“마도병기……?”

“아, 얀델 남작은 군에 머무른 적이 없어서 모를 수 있겠구려. 어찌 보면 우리 왕가의 진정한 힘이지. 한 번 쏘아지면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흔들린다는 이야기가 있는 병기요. 실제로 보니 그 말이 과언이 아니더구려.”

뭐, 왕가에서 갖고 있는 핵미사일 같은 건가?

얘기만 들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아까 지하에서 느껴졌던 그 진동이 바로 그 ‘마도병기’ 때문인 건가?’

왠지 모르게 뭔가 답답함이 느껴진다.

까도 까도 계속 뭔가 나오는 양파 같달까?

왕가를 ‘적’이라 규정한다면 참으로 막막해지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인데…….

물론 그래도 하나는 긍정적이었다.

‘이렇게까지 강하면 노아르크 놈들도 잘 막아낼 수 있겠지.’

어쩌면 기록석에 적혀 있던 ‘그 사건’이 지금을 말하는 게 아닐지 모른다.

어쩌면 왕가에서 쉽게 노아르크 무리를 이겨내고, 소탕해내며 다시금 평화로운 정세로 이어질지 모른다.

‘…라는 건 너무 희망적이려나.’

하, 고블린의 그 직감만 아니었으면 나도 희망 회로를 굴리며 조금이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을 텐데.

“아, 군사령부에서 연락이 온 모양이구려. 서둘러 남작을 카르논으로 부르라는 듯하오. 군용 마법진을 타고 넘어가면 바로 사람이 있을 것이오.”

“그렇군.”

이내 그 말을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후레자식 놈이 마치 윗사람처럼 내게 말해온다.

“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묻고 싶거나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오?”

아, 그거.

“없을 리가.”

안 그래도 가기 전에 꼭 한마디 해주고 가야겠다 싶었다.

그래, 그러니까…….

“엘토라 테르세리온.”

녀석에게 다가가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아이스록 원정에서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이놈은 당시 후작의 명령이든 뭐든 최전방 사령관으로서 우리를 버렸다.

“……!”

다만 면전에다 대고 그 사실을 언급할 줄은 몰랐는지 당황해서 어깨를 움찔하는 녀석.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 잘해라.”

“…….”

“두 번째는 없으니.”

25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709화 25

709화 소집령 (4)

7구역 성벽 주둔지를 나와 군용 마법진을 타고 도착한 황도 카르논. 눈을 뜨기 무섭게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 무리가 보인다.

조금 놀랐다.

“모시러 왔습니다, 얀델 남작님.”

전시여서 그런가?

일반 병사도 아니고, 그 콧대 높은 왕실 기사들이 이렇게 마중까지 나올 줄이야.

“마차에 오르시지요.”

이내 왕실 기사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 타 작위 수여부터 개선식, 그리고 승작식까지 치루며 벌써 몇 번이나 방문한 ‘영광의 궁’으로 직행.

‘확실히 전시라는 느낌이 확 들긴 하네.’

도착한 영광의 궁은 평소와는 전혀 달랐다.

분위기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비요른 얀델 남작의 신원이 확인되었습니다.”

성문을 넘으며 행하는 신원 조회만 해도 몇 배는 더 꼼꼼했으며, 성문을 넘고 들어가자 그 넓은 공터에 군주둔지가 형성되어 있는 게 바로 보인다.

아, 물론 일반 군둔지와는 좀 달랐다.

‘장교만 모인 거 같은 느낌이네.’

최전선부가 아닌 만큼, 통신 설비 같은 것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고, 그 앞에는 칼보다는 펜을 더 잘 휘두를 거 같은 군인들이 서 있다.

또한 그런 군인들이 지도 하나를 펼쳐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뭐라뭐라 토론을 나누는데…….

“사령부는 이쪽입니다.”

이내 기사들의 안내를 받아 영광의 궁 내부로 들어서자 그제야 익숙한 얼굴들이 곳곳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페르데힐트 백작.

뮐바르크 자작.

알미너스 백작…….

멀리서 눈인사를 건네오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왠지 기분이 또 이상해졌다.

이제는 기사들이나 장교, 탐험가 길드 지부장이나 고위 공무원들보다도 이쪽 사람들이 훨씬 더 낯이 익고 자주 보는 듯하달까?

‘저기 저 페르데힐트 백작만 하더라도 첫만남은 연회장이었지…….’

거기서 나는 바바리안 전사가 되어 기사들이랑 치고받고 싸웠고, 끝내 ‘기사분쇄자’란 이명과 ‘가르파스 목걸이’를 전리품으로 획득했다.

‘그게 벌써 몇 년도 더 전의 일이구나…….’

지금은 일반 법률에는 면책 받으며 오로지 ‘귀족법’만으로 처벌을 받는 작위 귀족 신분이 되었다.

또한 도시를 이루는 여섯 종족 중 하나의 족장이자 탐험가로서는 하나의 클랜을 이끌고 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역시 그때가 제일 즐거웠던 거 같네…….’

6등급 몬스터를 우당탕탕 공략하고, 매번 3층의 마력 과포화 현상을 함께 구경하고, 미궁에서 만난 탐험가들과 신경전을 하며 하루하루 먹고 살던 그때.

정신적으로 힘들 때면 늘 그때가 떠오른다.

남이 본다면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입지가 올라가고 상황이 좋아졌을 텐데.

“현재 총사령관님께서 회의를 진행 중인지라, 잠시 이곳에서 대기해주시겠습니까? 군사령부 내에서라면 어디든 자유롭게 계셔도 괜찮습니다.”

“그러지.”

그말을 끝으로 여기까지 날 안내한 기사가 떠났고, 이후 남은 시간 동안 대강 주변을 둘러보며 분위기 파악이나 하려던 때.

“대체 훈련을 어디서 얼마나 오래 한 거예요?”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웃는 상의 백토족 여성이 다가온다.

“아, 리리비아 남작.”

이종족 귀족 연합 멜베스의 일원이자, 그중에서도 내게 가장 우호적인 가주.

일명 토끼 남작.

“대체 거기서 얼마나 더 강해지려고?”

나름 친분이 깊은 만큼, 형식적인 인사보다는 장난스럽게 농을 던져오며 말을 걸어오는 토끼 남작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잘 지냈나?”

“잘 지내기야 잘 지냈죠. 이 일이 터지기 전까진.”

“그러냐? 아무튼 잘 만났다. 지금 뭐가 어떻게 돼가고 있는 거냐? 혹시 내가 꼭 알아야 할 얘기가 있나?”

내 질문이 조금 밑도 끝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토끼 남작은 잠시 고민했다.

“음… 이걸 뭐라 말해야 할지… 얀델 남작은 어디까지 알고 계신데요?”

“급하게 오느라 잘은 모른다. 그러니 그냥 다 모른다고 생각하고 말해줘라.”

그런 내 말에 토끼 남작은 정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현 사태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그리고 여기서 내가 처음 알게 된 사실만 정리를 해보자면…….

“놈들이 황도까지 침입을 했었다고……?”

“본대는 아니고 소수 정예로 이뤄진 병력이요.”

비프론의 결계가 사라진 날, 밖으로 나온 노아르크 놈들은 특수 부대를 꾸려 황도까지 진입했다.

다만 별다른 피해는 없었고, 딱 한 번 수색 병력에 의해 발각된 것을 끝으로 이후 아무런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하는데……

“여기까지 오면서 보시지 않았어요? 도시 전체에 수색 병력들이 쫙 깔려 있던 거.”

음, 확실히 군인들을 보긴 했다.

근데 그땐 그냥 수비용 병력인 줄 알았지.

“무얼 목적으로 침입한진 알 수 없지만, 아직까진 별다른 피해가 발견된 건 없다고 해요.”

아무튼, 쉽게 말하자면 황도까지 침투한 노아르크의 특수부대가 아직도 카르논 내부에 숨어 있을 가능성도 있다는 뜻.

“그래도 너무 걱정은 마세요. 그 정도 병력으로는 왕궁에 발을 들이밀 엄두도 내지 못할 테니까. 이곳은 안전해요.”

토끼 남작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듯한 말투였다.

물론 생각해보면 이상한 믿음 같은 건 아니었다.

지금 왕궁에 배치된 병력을 보면, 서른 명도 안 되는 특수부대가 쳐들어와봤자 몇 분 내에 정리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 새끼들이라고 생각이 없겠냐고…….’

놈들이 뭘 노리고 침투한 건지 모르는 만큼 괜스레 불안감이 커진다.

따라서…….

‘일단 왕궁도 안전지대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편이 옳겠지.’

마인드 세팅은 이쯤에서 종료.

이후로도 계속해서 얘기를 듣고 있자니,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이 많았다.

그야 토끼 남작도 명색이 작위 귀족이니까.

당연하게도 일반인들이 접하기 어려운 고급 정보도 알고 있는 게 많았다.

“마도병기까지 써가며 다시 비프론으로 몰아넣긴 했지만, 군사령부에서는 놈들이 그 틈을 타 첩자들을 심어놨으리라 예상 중이에요.”

첩자들을 우려한 왕가에서 피난민들을 수용 중인 여러 구역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색출 작업을 하고 있단 사실이라든가.

“들리는 소문으로는 곧 군사령부에서 전 병력을 이끌고 비프론으로 넘어가 싹 소탕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해요.”

앞으로의 전황에 대한 정보라든가.

“남작님의 클랜은 지금 7구역에 있다고 했죠? 만약 그렇게 되면 그쪽에서도 피해가 생길 수도 있겠네요.”

절대 스쳐 들을 수 없는 그러한 중얼거림까지.

“…무슨 뜻이지?”

“이건… 남작님만 알고 계셔야 해요?”

“물론이다.”

이내 시작 전에 입막음까지 미리 시킨 토끼 남작이 주변을 쓱 보더니 목소리를 확 낮춰서 속삭이듯이 내게 말했다.

“노아르크의 침공과 별개로 왕실에서는 지금 탐험가들의 세력이 너무 커졌다고 판단 중이에요.”

“……뭐?”

“그렇잖아요? 7층 암흑 대륙에서부터 시작된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탐험가들도 눈에 띄게 성장했으니까요.”

아, 그 말이구나.

확실히… 어느 정도 공감은 됐다.

왕가에서는 전쟁 내내 탐험가들에게 ‘보상’을 해줘야 했으니까.

격변의 시대를 넘기 위해 중소 클랜들은 합쳐져 큰 세력을 이루었고, 그들은 용병단처럼 전쟁에 참가하며 하사 받은 정수와 장비들을 토대로 급속도로 성장했다.

“그렇다면 미궁 폐쇄라는 초강수를 쓴 것도 단순히 노아르크 놈들을 견제하기 위함은 아니었겠군.”

“예. 왕가의 공식 입장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다들 내심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근데 왜 왕가에서 탐험가 세력을 견제하는 거지?”

나는 늘 품고 있던 의문을 밖으로 꺼냈고, 토끼 남작은 이렇게 답했다.

“그야 당연하지 않나요? 그 어느 세력이든 힘이 강해지면 목소리가 높아지잖아요. 더욱 많은 걸 바라고, 욕심은 늘 피를 만들죠. 이 도시를 통치하기 위해선 절대적인 권력이 필요해요.”

음, 정치적으로만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긴 한데……. 왠지 단순히 그런 이유는 아닐 것만 같단 직감이 든다.

탐험가들이 강해져서 목소리를 내는 것.

지금까지 겪은 바로는 이걸 견제하는 게 아니라, 마치 ‘탐험가들이 강해지는 것’ 자체를 신경 쓰고 있는 것 같달까.

‘마치 미궁 깊숙한 곳에 닿지 못하게 막으려는 것처럼…….’

유연하게 흘러가던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였다.

두근-

아니, 잠깐만.

“…….”

만약 조금 전에 내가 한 생각이 사실이라면.

“저기 보시오, 얀델 남작이오.”

“남작이 등장했다는 건 그가 이끄는 클랜도 전선에 도착했단 뜻이겠구려.”

“참으로 잘 됐소. 대형 클랜들에 비하면 숫자는 적을지언정, 그 하나하나가 일당백이라 하지 않소이까.”

“세간에서는 그런 말도 있더구려. 수천 년 만에 10층에 도달하는 탐험가가 생긴다면 얀델 남작과 그의 동료들일 거라고.”

이거, 우리 클랜이 가장 위험한 거 아닌가……?

***

7구역 성벽 근처 건물 중 가장 큰 건물을 급조해 만들어진 제3 사령부.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경직된 표정의 기사가 안으로 들어선다.

“군단장님, 군사령부에서 급보가 도착했습니다.”

“말하라.”

이내 커다란 지도가 올려진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사내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을 열고 들어온 기사가 천천히 보고하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하달 받은 첫 번째 소식은 비프론 소탕 작전에 대한 건입니다. 보안 등급이 허락되지 않아 서류는 열람하지 못했으니, 군단장님께서 직접 확인해보셔야 할 듯합니다.”

“알겠다. 그럼 두 번째는?”

“얀델 남작이 군사령부에 도착했다는 연락입니다.”

“……그렇군.”

하급자의 보고를 받은 사내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내 서류를 넘겨 받고서 기사를 내보냈다.

그리고…….

치이익.

봉인되어 있던 서류를 뜯어서 우선 내용물부터 확인했다.

소탕 날짜, 시각, 병력 배치도 등등.

전쟁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가치가 있으며 절대로 적에게는 넘어가선 안 될 정보들.

세세한 항목들을 쭉 읽어내리던 사내는 병력 배치도를 확인하고서 흠칫 굳었다.

‘다 죽으라는 거군.’

군의 최정예들은 후방에, 그리고 탐험가 병력들은 가장 위험한 최전방에 보내버리라는.

그 의도가 너무나 명확한 배치도.

심지어 서류 가장 마지막에는 한 줄짜리의 문장도 덧붙여져 있었다.

[비요른 얀델 남작은 현 시간부로 군사령부에 편입되어 추후 소속 변경 될 계획이 전혀 없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윗선에서 무엇을 바라는지, 숨은 의미가 있는 건 아닌지 따로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후우…….”

이내 사내는 서류를 내려놓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잘해라.]

[…….]

[두 번째는 없으니.]

그 야만인이 남기고 간 그 섬뜩한 경고의 말이 귓가에서 맴도는 것과 별개로.

“마음에 들지 않는군.”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가 너무도 불편했다.

그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역시 결국에는 한 명의 사람이니까.

‘대체 왕가는 무슨 생각인 건지…….’

이내 사내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서류를 내려 놓으며 아까 떠난 하급자를 다시금 호출했다.

“상부에서 내려온 병력 배치도다. 각 부대의 최고참 장교들에게만 조용히 공지하도록.”

“저, 이건…….”

하급자 역시 보자마자 의도를 꿰뚫어보고서 말꼬리를 흐렸다.

그 심정을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사내 역시 서류에 적힌 내용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여전했다.

하지만…….

“윗선에서 내려온 지시이니 이견은 허락하지 않겠다.”

이 도시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니아 라프도니아!”

그는 야만인이 아니니까.

21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710화 21

710화 스페셜 포스 (1)

영광의 홀 안쪽에 위치한 커다란 방.

“뭐라고? 다시 한 번 말해봐라.”

책상을 거칠게 내리치며 묻는 내 말에 재상이자 현 총사령관인 테르세리온 후작이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답한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하지. 총사령관으로서 자네의 소속 변경은 허락할 수 없네.”

우리 클랜이 있는 최전방으로 보내달란 요구에 돌아온 답변.

당연한 말이지만, 납득하기는 어려웠다.

그야 이유들도 전부 납득이 안 됐거든.

“소속 변경이 불가한 이유는?”

“자네는 작위 귀족일세.”

“당사자가 원할 경우 소속이 변경되는 일도 있다고 들었는데?”

“군에서는 개개인이 아닌 집단의 이익을 위해 판단하고 행동하네.”

“내가 그곳으로 가는 게 어째서 집단의 이익이 아닐 수 있지?”

조금은 바바리안답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번만큼은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 최대한 논리정연하게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자네는 군사령부 내에서 해야 할 일이 있네. 그리고 나는 그 ‘임무’가 최전방에 가서 직접 싸우는 것보다 중요하다 판단했네.”

“해야 할 일……?”

“자네에게만 말하는 것이네만. 이곳 황도 카르논도 안전하지 못하네. 무도한 노아르크인들이 그날 이곳에 숨어들었고,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지 아직 정보부에서도 밝혀내지 못한 상태지.”

“……그래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

“아무리 튼튼한 건물이라도 기둥이 무너지면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네. 그리고 이곳에 모인 작위 귀족들은 이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들일세.”

“아니, 그래서 그게 뭔 상관이냐고 물었는데.”

“이 도시에서 자네만큼이나 ‘지키는 것’에 특화된 사람은 없지 않은가. 자네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네. 단지 이곳에 머무르며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주게.”

“하…….”

한숨이 나오는 것과 별개로, 저렇게까지 말하니 왜 나를 이렇게 붙잡는지는 이해가 됐다.

아, 물론 그렇다고 수긍했단 뜻은 아니다.

‘어차피 난 바바리안이잖아?’

싸우는 것 말고는 할 줄 모르는 단순무식한 전사.

법률과 도리에 얽매이지 않는 이 시대의 야만인.

‘그래도 뒷일이 조금 걱정되긴 한단 말이지…….’

후,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냥 싹 무시하고 꼴통을 까?

‘아니면…….’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였다.

내가 뭔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느꼈는지, 후작이 나를 달래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글쎄… 자네를 보낼 수 없는 건 모두 다 이 도시에 숨어든 노아르크인들 때문이니……. 만약 자네가 그들을 모두 다 색출해 낸다면 또 모르지. 그땐 자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을지.”

그 말에 왠지 모르게 머릿속에서 ‘띠링!’ 하는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

‘일종의 선행 퀘스트인가…….’

그래, 이것만 해결하면 된다 이거지?

***

게임을 하다보면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

출입 금지 팻말이 붙어 있어서 원래는 진입을 할 수 없지만, 특정 퀘스트를 깨거나 하면 열리는 지역.

어느 면에서 보면 지금 상황이 딱 그랬다.

[황도 카르논에 숨어든 노아르크 특수부대를 전부 색출하시오.]

이 퀘스트를 깨면 나는 황도를 벗어나 합법적으로 내 동료가 있는 최전방에 갈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좀 아쉬운 점은…….

“그렇다면 우리 클랜을 이쪽으로 불러줘라. 그럼 내가 책임지고 그들을 찾아내겠다.”

“불가일세.”

“그럼 나보고 혼자서 다 찾아내라는 거냐?”

“그렇게 말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걸세. 자네 클랜만 특혜를 봐주면 다른 탐험가들이 어떻게 생각을 하겠나? 그 누구도 왕가를 위해 진심으로 싸우려 하지 않을 걸세.”

꼼수를 부려볼까도 싶었으나 역시나 단칼에 쳐내는 후작.

“물론 자네도 사람이 필요하긴 하겠지. 내 따로 적당한 이들을 붙여주지.”

그래도 인력을 얻어냈으니 무의미한 시도는 아니었다 생각하기로 했다.

“미리 말해주지만, 자네와 자네에게 붙여줄 인력은 특수한 임무를 위해 따로 편성되었을 뿐, 소속은 군사령부일세.”

“알겠다.”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해서 하는 말일세. 다시 말하지만, 절대 멋대로 황도 카르논을 벗어나지 말게. 그랬다간 ‘탈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으니.”

“……그러니까 알겠다고 하지 않나.”

“좋네. 그러면 나가보게.”

그렇게 후작과의 독대가 끝나고서 다시금 영광의 궁 메인 홀로 나와서 다른 작위 귀족들과 노닥거리면서 이런저런 정보 수급 시간을 보냈다.

“하하! 걱정할 필요가 뭐 있소? 이번 사태는 저들의 마지막 발악이나 다름없소. 왕가의 힘은 절대적이란 말로도 모자라니.”

“근시일 내에 싸그리 ‘소탕’할 거라는 얘기가 있긴 하던데, 어찌 될지는 모르겠구소이다.”

“그나저나 국왕 폐하께서 이런 사태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걸 보니, 정말로 용체가 회복될 기미가 없는 듯하구려.”

뭐, 대부분은 쓸모없는 얘기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얀델 남작님, 총사령관님께서 말씀하신 부대원이 모두 도착했습니다.”

후작이 말한 ‘인력’을 생각보다 빠르게 직접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인원은 총 19인.

여기에 나까지 합쳐서 총원 20인은 이후로 군사령부 소속 ‘특수 수색대’로 편성되어 움직이게 될 거라고 하는데…….

이건 아무래도 좋다.

내가 놀란 점은 딱 하나였다.

“…얀델 씨?”

“레이븐……?”

허허, 설마 후작이 얘를 같이 편성해서 보내줄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설마 얀델 씨가 이번 특수 수색대의 책임자인 거예요……?”

마찬가지로 나에 대해 미리 듣고 온 것이 아닌지 크게 당황하며 놀라는 레이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당분간 잘 부탁하마.”

레이븐이 유능한 인재라는 건 잘 알고 있기에, 오히려 잘 됐다는 마음으로 손을 내밀었다.

하나 레이븐은 악수를 하면서도 찝찝한 표정이었다.

“……아, 진짜 갑자기 확 불안해지는데.”

“불안해지다니?”

“별거 아니에요. 그냥 아주 아주 위험한 임무가 되겠구나 하고 지금 막 깨달았을 뿐이니까.”

“걱정 마라. 사고 칠 생각은 없으니까.”

“언제는 그런 생각이 있어서 사고를 쳤나?”

…거, 듣는 바바리안 섭섭하게.

“아무튼,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정확히 뭘 하면 되는데요?”

“응? 오기 전에 아무것도 못 들었나?”

“네. 그냥 무언가를 찾는 일을 하게 될 거라는 것 말고는 못 들었어요. 하도 급하게 소집된 터라 꽤나 중요한 사안이겠구나 싶기만 했지. 그래서 뭔데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 채 끌려온 것 같았기에 나는 이후 우리가 해야 하는 임무에 대해서 설명했다.

“쉽게 말해, 맨땅에서 시작해 왕실 정보부에서도 찾지 못한 그 사람들을 색출해 내야 한단 거네요?”

벌써부터 한숨이 나오는 듯 표정이 좋지 않은 레이븐. 좀 미안하긴 했지만, 나는 자존심을 버리고 허리를 숙였다.

“잘 좀 부탁하겠다.”

“아니, 그렇게 말하셔도… 제가 뭐 초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걸 해야지만, 동료들 곁으로 갈 수 있다.”

이내 그리 말하며 절실한 눈으로 응시하자, 한참 동안 침묵하던 레이븐이 참아왔던 숨을 토해냈다.

“하… 알겠어요. 저도 최대한 노력은 해볼게요.”

“그래, 그거면 충분하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저 약속 정도면 충분하다.

나랑 얘랑 지낸 시간이 얼마인데?

얘 성격상 이렇게까지 말했단 건, 진심으로 두손 두발 다 걷어붙이고서 돕겠단 뜻이다.

‘그래도 후작이 나름 신경 써서 보내줬네.’

항상 맘에 들지 않는 짓을 하던 후작이 웬일로 맘에 드는 짓을 했을까? 신기함을 느끼면서도 일단 레이븐 외의 처음 보는 부대원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알겠지만, 나는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거기 너, 너는 이름이 뭐냐?”

“마커스 베이틀란입니다.”

“오, 베이틀란 남작가 출신인가 보군?”

“직계는 아니고 방계입니다. 남작님.”

조금 시간을 들여서라도 한 명씩 신상 조사는 물론이고 특기가 무엇인지까지 파악해 나갔다.

정리를 해보자면 기사가 열 명, 마법사가 세 명에 군 내에서도 특수 보직으로 취급받는 ‘수색 대원’이 무려 다섯이었는데…….

“수색 대원이면, 이능도 탐지 계열로 개화했나?”

“예. 그렇습니다. 남작님.”

“능력은 얼마나 되지?”

“반경 20m 내라면 그 어느 누구도 저희의 눈은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리 답하는 수색대원들의 목소리에서는 진심 어린 자부심을 한가득 느낄 수 있었다.

뭐, 근거 없는 자부심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아실지 모르시겠지만, 왕실 기사들이 성문 경계를 설 때도 저희 수색대원들이 반드시 한 명씩은 참가합니다.”

그 왕가에서 성문 경계에 쓸 정도면 능력 하나만큼은 증명됐다고 봐도 무방할 터.

이내 나는 수색대원들에게서 관심을 접고서 마지막 한 명을 바라보았다.

일반적인 군복이 아니라, 아무런 문양도 무늬도 없는 흑색의 제복을 입은 사내.

“너는 정보부 출신이라고?”

“그렇소이다, 남작.”

“이름은?”

“정보부 규정에 의해 밝힐 수 없음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길 바라겠소.”

“그럼 이거 하나만이라도 답해줘라. 이름이나 성이 혹시 ‘한스’냐?”

“……?”

“중요한 거니까 얼른. 만약 답을 못 하면 정보부고 뭐고 너를 내칠 수밖에 없다.”

“왜 그런 걸 묻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한스가 아니오.”

“왕가의 이름에 맹세하고?”

“…맹세하리다.”

오케이, 그럼 한스는 아예 없다는 거네.

정보부 출신이라는 놈이 왕가의 이름을 걸고서 구라를 칠 리 없으니.

“그럼 너를 뭐라 부르면 되지?”

“무명이라 불러주시오.”

거, 저 말투며 복장에 이름은 또 무명?

딱 봐도 친구가 몇 명 없을 듯한데…….

좋아, 정했다.

“무명은 너무 길군.”

“무명이 길다니 그게 무슨—.”

“앞으로는 줄여서 무무라 부르겠다.”

새로운 이름을 받은 ‘무무’는 당췌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대체 그게 어떻게 줄였단 거요?”

“무무, 그리고 무명. 발음이 줄어들었지 않나.”

“……?”

“싫으면 본명을 말해라. 그럼 이름으로 불러주지.”

이내 은근슬쩍 그리 말하자, 무무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고개를 저었다.

“됐소이다. 호칭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시오.”

“알겠다, 무무.”

“…….”

막상 허락을 하고서도 ‘무무’란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똥 씹은 표정을 짓는 녀석.

뭐, 내가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딱 봐도 후작 놈이 한 명 심어둔 거 같은데 잘 대접해 줄 이유가 뭐 있겠는가?

“아무튼, 그러면 본격적으로 수색하기 전에 정보부에서 알아낸 것들을 공유 받고 싶은데.”

“그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해왔소이다.”

이후 정보부 출신인 무무에게서 현재 군대가 어느 구역들을 어떻게 수색했는지, 그리고 무엇을 발견했고 어떤 단서를 얻었는지 등등.

그러한 것들을 공유 받는 시간을 보냈다.

아, 물론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쉽게 말해, 샅샅이 다 뒤져봤음에도 불구하고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단 거군?”

“굳이 말하자면 그렇소이다…….”

“흐음, 그렇다면 숨어든 노아르크인들 전부가 머리털이 없을 가능성도 있겠군.”

“……진심으로 하는 소리요?”

“아니, 농담이었는데?”

얘는 무슨 바바리안이 진짜 뇌 없는 종족인 줄 아나.

“좋다, 일단 밖으로 나가자.”

“짚이는 곳이라도 있는 것이오?”

“그런 건 아니고, 일단 돌아다니다 보면 생각이 날 거 아니냐?”

“…….”

무무는 그런 날 보며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지만, 꾹 참아 넘기는 표정이었다.

그냥 대충 시간이나 때우면 그만이라 생각하는 눈치라 해야 하나?

“그래도 너 덕분에 어느 정도 좁혀지긴 했다.”

“……?”

“노아르크인들이 일반적인 장소에는 숨지 않았단 거 아니냐.”

그 말에 혹시나 하는 표정이던 무무가 다시금 뭔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눈빛을 보냈지만, 사실 이 점은 중요하다.

“보아하니 귀족가의 저택은 수색하지 않은 듯한데.”

이내 정보부가 수색하지 않은 지역을 콕 짚어서 말하자 무무가 움찔하며 다급히 입을 연다.

“남작? 남작께선 설마…….”

말을 하면서도 설마 그러겠냐는 눈치였으나, 나는 이 부분에 대해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

“어쩌면 노아르크인들과 내통을 한 가문이 있을 수도 있는데 뭐가 이상하지?”

“우, 우리라고 그 가능성을 몰라서 내버려 둔 줄 아시오?”

“레이븐, 우리 특수 수색대에 귀족가 저택 내부를 수색할 권한이 있나?”

“글쎄요? 그건 모르겠는데요?”

“그럼 지금부터 있는 거로 하지.”

천연덕스러운 내 대답에 무무가 화들짝 놀라며 레이븐을 쳐다보았지만, 막상 레이븐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네. 어차피 이 조직을 만든 게 후작이니, 뒷감당은 그쪽에서 알아서 해줄 거예요. 게다가 가주들은 전부 영광의 궁에 모여 있으니, 사용인들은 감히 우리를 막지 못할 테고요.”

“지금 둘이서 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오!”

“좋아, 그럼 다 끝났군. 서둘러라. 가주들이 눈치채고 손을 쓰기 전에 최대한 빠르게 많은 가문들을 압수 수색해야 하니까.”

“네, 근데 압수 수색은 뭔 뜻이에요……?”

“혹시 모르지 않나. 수상한 물건들이 있으면 가져와서 확인을 해봐야지.”

“아…….”

경멸하는 듯한 표정을 보니 가문을 뒤지다가 쓸모 있는 걸 몰래 챙기겠단 뜻을 제대로 이해한 모양.

다만 나를 말리는 것도 지쳤을까?

레이븐은 그냥 체념 어린 눈을 하고서 내게 물었다.

“그럼 어느 가문부터 시작하게요?”

아, 그거?

당연하잖아.

“첫 목적지는 테르세리온 후작가다.”

과연 재상놈 집구석엔 뭐가 숨겨져 있을까?

59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711화 59

711화 스페셜 포스 (2)

귀족 가문 중에 내통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이건 그냥 했던 말이 아니라 진심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고, 천에 달하는 수많은 귀족가 중 하나쯤은 다른 마음을 품어도 이상할 게 없다.

“저, 정말 후작가로 가려는 것이오?”

“그래, 어쩌면 후작이 내통했을 수도 있으니까.”

아, 물론 이 말은 그냥 하는 말이었다.

후작이 미친놈도 아니고, 사실상 왕의 대리 역할을 수행하며 왕국의 1인자 역할을 하고 있는데 굳이 왜 그놈들이랑 손을 잡아?

그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고 생각한다.

‘음… 그래도 아예 없는 건 아니려나?’

솔직히 아예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후작, 그놈한테 수상쩍은 부분이 어디 한두 개인가?

녀석에게는 무언가 비밀이 있다.

그래서 이 기회에 한번 집을 뒤져 보려는 거고.

“그… 자, 잠시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되겠소이까?”

어허, 새끼 딱 봐도 뒤에 빠져서 연락을 주려는 건가 본데…….

“안 된다.”

“하, 하지만 정말 급하단 말이오.”

“대소변을 가리는 게 이 나라를 구하는 것보다 급하단 거냐?”

“…….”

역시나 그렇듯 ‘국가’의 이름을 팔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는 무무.

“바지에 싸라.”

“…….”

그 말을 끝으로 화장실에 가겠단 말은 쏙 들어갔다.

다만, 무무가 일탈하려는 징조가 보였기에 나도 미리 한 가지 준비는 해 뒀다.

“레이븐.”

“네?”

“외부와 연락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 파장을 뿌리는 마법도 있다고 들었는데, 이동 중에도 가능한가?”

“보조 마도구가 있는 게 아닌 이상 넓게는 못해요. 한 반경 3M 정도?”

“외부에서 오는 걸 막을 필요가 없고, 내부에서 밖으로 가는 것만 막는다 하면?”

“음, 그럼 좀 더 넓게 쓸 수 있겠네요.”

오, 그래?

“당장 실행해라. 우리 이번 임무는 극비 임무니까.”

이후 레이븐이 곧바로 마법을 사용하고, 그렇게 외부와 연락할 방법이 사라진 무무는 아주 경직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었다.

“뭘 혼자 쪼개고 있냐? 어서 가자.”

특수 부대의 보안을 점검한 뒤에는 곧바로 후작가 저택으로 향했다.

근데 척이면 척이라 해야 하나?

내가 따로 언질을 준 게 아님에도 레이븐은 굳이 무무의 바로 옆자리에 딱 붙어서 이동했다.

“그… 얀델 남작 옆으로 가는 게 좋지 않겠소?”

“아뇨? 저는 여기가 편한데요? 왜 제가 저리로 갔으면 좋겠어요?”

“…….”

거, 그냥 포기하고 따라오면 될 걸 끝까지 미련을 보이네.

보통 저런 애들은 오래 못 살던데.

그도 그렇잖아, 도마뱀이라고 어디 꼬리가 하나도 아깝지 않아서 포기하는 거겠어?

“…….”

그렇게 무무가 조용해지자, 이번에는 다른 대원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그… 정말 이래도 되는 거요?”

“그럼 자네가 말려 보시게.”

“근데… 남작님 말도 일리가 있지 않소? 재상님이 만든 부대이니 뒷감당은 걱정하지 않아도—.”

“아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지금 재상 각하의 자택을 헤집으러 가고 있는데!”

“아, 맞다. 그랬지.”

“……이거 잘못되면 우리 다 재판소로 끌려가는 거 아니오?”

그들은 라프도니아의 1인자나 다름없는 후작의 집을 털러 간다는 것에 아주 큰 저항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일단 갑시다.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소.”

“…그것도 그렇지요.”

법은 멀어도 바바리안은 가깝다는 말을 잘 알고 있는지, 그들은 자기들끼리 수군대며 불안을 표할 뿐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저… 얀델 남작님께서 여기는 어쩐 일이신지……?”

그렇게 도착한 후작가의 자택.

어쩌다 보니 이제 완전히 낯이 익어 버린 후작가의 집사장이 나를 보며 의문을 표한다.

“후작 각하께는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했습니다만. 혹 약속을 잡고 오신 게 아니라면—.”

“오늘 나는 비요른 얀델로 온 게 아니다.”

“……예?”

“오늘 나는 군사령부 소속 ‘특수 수색대’의 대장으로서 이곳을 찾았다.”

오늘부로 얻게 된 새 신분을 밝히자, 집사장은 더욱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야 그렇겠지.

애시당초 ‘특수 수색대’가 어떤 집단인지도 모르고 있을뿐더러…….

“그… 특수 수색대가 대체 여기엔 어쩐 일로……?”

집사장으로선 상상도 못할 것이다.

콧바람을 불면 호랑이도 납작 엎드릴 위세를 지닌 후작가의 집사장으로 살아가며 상상력이 많이 부족해졌을 테니까.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는 간단하다.”

“…….”

“잠깐 수색 좀 하지.”

“……예?”

이내 그 말을 끝으로 집사장이 의문을 표하건 말건 무시하고서 내부로 진입했다.

뭐, 비록 중간에 대원들이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하고 주저하는 일이 있긴 했지만…….

“뭣들 하나? 얼른 들어가지 않고?”

“……예.”

뒤돌아 쳐다보기 무섭게 후다닥 내 뒤를 따르는 대원들.

당연한 말이지만, 이에 처음엔 뭔가 싶던 후작가의 병사들도 어정쩡한 자세로 우리 앞을 가로막는다.

다만, 지난번에도 여기서 깽판을 친 전적이 있기 때문일까?

“그… 나, 남작 각하?”

“여,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후작 각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무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날 막기보다는 대화로 사태를 해결해 보려는 병사들.

거, 말로 해결될 거면 오지도 않았지.

“나는 군사령부 소속 ‘특수 수색대’의 대장 비요른 얀델이다! 모두 비켜라! 만약 우리 길을 막거나, 우리가 하려는 일을 방해한다면 노아르크인들과 내통 중인 반역도로 간주하고 처단하겠다!”

무단 침입을 한 내가 후작의 이름에 쫄기는커녕 도리어 강하게 나서자 병사들을 포함해 집사장까지도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정말 뭔가 사건이 터진 건가?

그래서 내가 뭔가 알고 온 거고?

딱 그런 느낌으로 모두가 이도 저도 못하며 서 있던 때.

‘역시 똑똑한 놈들이 있기는 하네.’

병사들 중 판단이 남다른 몇몇이 내게 달려든다.

“이곳은 이 나라의 재상이신 테르세리온 후작님의 저택이오!”

“이 저택을 수호하는 것이 나의 임무.”

“우와아아아아아아!!”

물론 덤벼드는 즉시 내게 꿀밤을 맞고 전부 기절했다.

이리 허무하게 당할 거면 뭐 하러 덤벼든 건지 싶을 수도 있지만, 나는 이들을 높이 샀다.

그야 그렇잖아?

어차피 못 막을 거면 차라리 싸우다가 기절하는 편이 낫다.

적어도 일자리는 지킬 수 있을 테니까.

저 어리벙벙한 녀석들과는 다르게.

“어어…….”

“어…….”

내가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뒤로 물러서는 병사들.

얘네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떠나고 나면 후작가에 실직자가 수십 명은 족히 나오지 않을까.

아, 물론 내가 신경 쓸 사안은 아니었다.

요즘 세상에 평생 직장이 어디 있어?

“저, 저, 저, 정말 자택 안까지 들어왔소이다…….”

나를 따라 건물 내부로 들어온 대원들은 뒷일이 걱정되는지 바들바들 떨기도 했다.

슬슬 나도 리더십을 발휘할 때였다.

“걱정 마라. 모든 건 내가 책임질 테니. 너희에겐 절대 피해가는 일 없도록 하겠다.”

뱉은 말은 무조건 지키는 영웅.

거짓말 같은 건 전혀 할 줄 모르는 전사 중의 전사.

그런 이미지가 있는 탓인지, 그래도 대원들의 표정도 조금 나아졌다.

“지금부터 너희가 할 것은 단 하나다. 나를 따라 이 자택을 샅샅이 뒤지며 뭔가 수상한 게 없는지 찾아내는 것.”

“…….”

“자, 뒤져보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니!”

짧게 사기 진작을 위한 시간을 가진 후에는 본격적으로 자택 수색을 시작했다.

쨍그랑!

혹시 ‘노아르크인’이 숨어 있을지 모르는 조각상을 망치로 박살내고.

드드득.

혹시 ‘노아르크인’이 숨어 있을지 모르는 액자를 우악스럽게 뜯어낸다.

“흠, 이곳에도 없군.”

“그……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이래도 되는 게 아니라, 원래 이렇게 하는 거다. 수색이란 건.”

바바리안에게 ‘수색’이 무엇인지에 대해 강의받는 왕실 수색 대원들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으나, 내가 과감하게 첫발을 내딛어서일까.

“아! 나는 모르겠다!”

“뜯어! 귀족가 저택인 만큼 비밀 통로가 하나쯤은 있을 거다!”

어미새를 보고 자라는 아기새처럼.

나를 뒤따르던 수색 대원들도 뒷일 생각 따위는 집어 던지고서 내 방식대로 수색을 이어나간다.

콰지직-

쨍그랑.

드드드드드득.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가는 후작가의 자택.

처음 날 반겨 준 집사장은 번개라도 맞은 사람처럼 경기를 일으키며 수색 과정을 지켜봤다.

반응은 참 재밌었다.

“으윽! 저게 얼만데……!”

자기 돈이 사라지는 것처럼 움찔하는 것부터 시작해.

“없어! 없다고! 그 액자 뒤엔 아무것도 없으니 뜯지 마시오!”

“저러니 더 수상하군. 얼른 뜯어…… 진짜 없군?”

“아아아아아아아악!!”

분노에 찬 함성을 터뜨리기도 하다가.

“나는 끝이야… 끝이라고…….”

자신의 미래를 직감한 듯 고개를 떨구고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는데…….

“빨리 빨리! 세세히 볼 여유는 없으니 빨리 해라!”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왔으니, 이미 우리가 하고 있는 짓이 후작의 귀에 들어갔을 테니까.

그래, 그러니까…….

1층, 2층, 3층…….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테르세리온 후작가의 자택을 초토화시킨다.

한데 후작이 나고 자라고, 후작의 할애비도 나고 자랐을 소중한 자택임을 알기 때문일까?

‘이거…….’

스트레스 풀리는 게 장난 아니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아!”

그렇게 더욱 신나서 이것저것 부수고, 보는 눈이 없을 때는 눈보다 빠르게 손을 움직여 비싸 보이는 걸 주머니에 욱여넣는 등.

수색을 이어나간 지 얼마나 흘렀을까.

“드디어 찾았군.”

후작의 서재로 추정되는 공간.

벽에 붙은 책장을 그대로 뜯어냈더니, 그 안에 숨겨진 비밀 철문이 나타났다.

“그래, 숨겨진 방이 하나쯤 있을 줄 알았지.”

“어쩌려고요? 제법 단단해보이는데.”

“어쩌긴.”

어디 이런 상황이 한두 번인가?

「캐릭터가 No.687 공성 살육자를 착용했습니다.」

신속하게 스왑 무기로 교체한 뒤.

콰아아아앙-!

철문을 향해 철퇴를 휘두르고, 또 휘두른다.

다만 문짝이 어찌나 두꺼운지 철퇴를 휘두를 때마다 음푹 패이기만 할 뿐 부서질 기미는 없었다.

‘이대로면 시간이 꽤 걸릴 거 같은데…….’

어떡하지?

그런 고민을 하던 때, 우리 수색 대원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그… 제가 해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중에 기사들도 꽤 있었지.

“해봐라.”

이내 자리를 비켜주자 기사들이 오러를 뿜어내며 철문을 칼질하기 시작했다.

무슨 금속인진 몰라도 오러에도 나름 저항하는 문짝이었으나, 결국 조금씩 썰리더니 결국 잠금 장치가 잘려나가며 문이 개방됐다.

“재상의 비밀 공간이라…….”

과연 저 계단 아래엔 뭐가 숨겨져 있을까?

이에 호기심을 키우며 아래로 내려가려던 찰나.

“남작님, 저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택 수색도 열심히 해냈던 우리 용감한 대원들이 이제 와서 뒤로 뺀다.

이유는 참으로 간단했다.

“저희도 저희 목숨 귀한 줄은 압니다.”

“보지 말아야 할 걸 보지 않을 줄도 알아야 오래 살아남는 법이지요.”

쩝, 하긴.

얘네들 입장에서 이건 진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네.

후작의 ‘비밀’을 엿보려 하는 거니까.

“알겠다. 그럼 여긴 나 혼자서만 갔다 오지.”

“…네? 혼자서요?”

레이븐은 함께 따라오려는 듯했지만,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이를 막았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이 아래는 나 혼자서만 얼른 보고 오는 게 나을 거 같았다.

따라서…….

“금방 오지. 누가 오려고 하면 막는 것만 해줘라.”

그 말을 끝으로 혼자서 철문 너머에 숨겨져 있던 계단 아래로 향했다.

계단은 생각보다 깊지 않았고, 머지않아 사람이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나타났다.

다만 불을 켜는 방법은 알지 못했기에 가방에서 양초를 꺼냈다.

그리고…….

화르륵-!

오랜만에 바바리안 캔들 모드를 활성화하기 무섭게 환하게 밝혀지는 석실.

주변을 확인한 나는 흠칫 굳고 말았다.

벽 양 옆에 위치한 책장.

자그마한 집무용 책상과 의자.

이것만 보면 그냥 평범한 비밀 서재(?)처럼도 보이지만…….

“와, 씨발…….”

오랫만에 육성으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설령 여기에 날 죽이기 위한 비밀 계획서 같은 게 숨겨져 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책장에도, 책상에도, 벽에도, 심지어 고개를 들어봐야 하는 천장까지도.

“……대체 뭐야 이게?”

한 여자의 그림이 온 사방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마치 어느 스토커의 방처럼.


28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712화 스페셜 포스 (3) 28

712화 스페셜 포스 (3)

책장에 붙어 있는 그림 하나를 들어 살펴보았다.

그림은 얇았고 액자에 들어 있지 않았다.

하나 뭔가 마법적인 처리를 한 것인지 코팅이라도 된 것처럼 얇은 막이 그림을 덮고 있다.

마치 현대의 사진이라도 보는 것 같달까.

아무튼, 이건 중요한 게 아니고…….

‘……누구지?’

사진처럼 생동감 넘치는 그림 속 여자는 고급스런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절세미녀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으나, 해맑게 웃는 모습이 굉장히 매력적인 여성.

특이한 점으로는 이 세계에선 보기 어려운 흑발에 흑안을 동시에 지니고 있단 점일까.

‘그나저나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데…….’

어디서 자주 보던 얼굴 같다 해야 하나?

이유 모를 기시감에 한참이나 그림을 들여다보던 나는 몸매가 강조된 복장을 입은 다른 그림을 보고서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라그나랑 똑같이 생겼잖아?’

흑발에 흑안.

이 두 특징을 떼고 본다면 이목구비나 그러한 것들이 라그나와 아주 똑 닮았다.

‘그럼… 이 여자가 라그나의 친모인 건가?’

딱히 명확한 물증이라든가 그런 게 있는 건 아니나, 합리적으로 그런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도 그렇잖아?

라그나의 미들 네임에 붙은 ‘리타니옐’은 친모가 아니라 길러준 보모의 이름이다.

[그럼 어머니는? 어떻게 됐는지도 아나?]

[저를 낳은 날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거기에 후작의 사생아인 라그나.

그리고 그런 후작의 비밀 서재에서 발견된 똑닮은 여성.

‘근데 이런 방을 만들 정도면……. 라그나의 친모를 진짜 좋아하긴 했었나 보네…….’

한 번 더 방 안에 그림들을 쭉 둘러보던 나는 이내 그림에서 관심을 거두고 다른 부분들도 수색했다.

책상 쪽에는 글을 쓸 수 있는 도구들을 제외하면 볼 게 없었기에 책장을 위주로 살폈는데…….

[왕실회의록 17~18]

[02년도 탐험가 실태 보고서]

[제 11회 종족 회의록]

[117년도 미궁 진척 계획 초안 IV.]

[제 217회차 차원 붕괴…….]

[…….]

뭐지 이 책들은?

딱 봐도 일반적인 책들은 아닌 거 같은데…….

실제로 책을 열어서 읽어보니 출간을 위해 만들어진 책이 아니라 공공 기록물에 가까운 느낌이 났다.

회의록 같은 경우에는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 그런 것들이 한 권 전부를 채우고 있었으며, 계획서나 보고서 역시 실근무자들이 상관에게 제출하는 형식을 갖고 있었다.

‘근데 후작은 이런 걸 왜 여기에 모아둔 거지?’

알 수 없지만, 책을 촤라락 넘기며 쓱 훑어보고 있자니 간간이 밑줄을 친 부분들이 존재했다.

예를 들면, ‘제 11회 종족 회의록’에서는.

[불멸왕의 위엄 앞에서 모든 종족의 수장들이 납작 업드려 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이 부분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으며.

[현 탐험가들의 성장 추세가 예상보다 무척이나 가파르기에 미궁 관리부에서 별도의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117년도 미궁 진척 계획 초안 IV.’에는 저 부분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흐음…….”

그렇게 대충 책들을 읽으며 밑줄 쳐진 부분들만 확인하던 때, 책상과 연결된 하단부에 있는 작은 사이즈의 책들이 눈에 띄었다.

‘…일기장인가?’

한눈에 보자마자 일기장이 떠오른 이유는 간단했다.

일단 여타 책들과 다르게 굉장히 작았고, 그 숫자도 굉장히 많았으며…….

무엇보다 책에 연도가 써져 있었다.

‘진짜 일기장인 거면 대박인데…….’

설레는 마음으로 가장 빠른 연도의 일기장부터 꺼내서 펼쳐보았다.

하지만, 이게 어찌된 영문일까.

“……?”

첫 장부터 글자들이 빼곡하게 적혀있음에도 도무지 그 내용을 읽을 수가 없다.

단순히 악필이라는 문제를 떠나서.

‘이건 라프도니아어도 고대어도 아닌데……?’

난생처음으로 보는 글자다.

그렇다고 한글이나 영문인 것도 아니고.

이게 대체 어디 문자인 거지?

그런 의문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암호문 같은 건가?’

현대만 보아도 2차 세계 대전 때 각 참전국들은 자기만의 암호문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라프도니아군 내에서 해당 부대만의 ‘암호문’을 쓰는 일도 있다고 들었고.

‘일단 챙겨가자.’

이건 나중에 시간을 들여 해독을 해볼 요람으로 얼른 아공간 가방에 챙겼다.

그리고…….

‘더 볼 건 없네.’

이내 챙길 게 없음을 확인한 나는 마지막으로 방 안에 유일하게 액자 형태로 된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거기에는 여성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메이린 휜베니아 —————.]

어째선지 성에 해당하는 라스트 네임은 날카로운 무언가로 박박 긁은 듯 파여져 읽을 수 없었고, 이름 아래에는 생년월일과 사망일시로 추정되는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이건 무슨 문양이지?’

그림 왼쪽 하단 모서리 부분에 ‘태극 문양’과 비슷한 문양이 그려져 있다.

빨강색과 파란색이 합쳐진 구체의 형태.

‘……설마 후작 이 새끼도 악령인 건 아니겠지?’

불현듯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정말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봤다. 애초에 색 구성이 일치한다 뿐이지 내가 아는 태극 문양이랑은 좀 차이가 있었으니.

“후우…….”

아무튼, 이제 그럼 볼 건 다 본 거 같고.

슬슬 나가볼까 싶어 등을 돌리려던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앙-!

뭐지? 이 소리는?

설마 소식을 들은 후작이 벌써 군부대를 보낸 건가?

알 수 없지만, 이건 분명히 들었다.

“아아아악!”

비명 소리다.

그리고 이런 소리가 났다는 건 위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뜻.

타다다닷-!

나는 서둘러 비밀 공간에서 나와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탓-!

이내 마지막 계단을 박차고 오른 그 순간.

난 비밀 공간을 등진 특수 부대원들과 대치 중인 열댓 명의 인물들을 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중엔 아는 얼굴들이 꽤 있었다.

“어디서 변수가 생겼나 싶었건만.”

무심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무미건조한 음성을 뱉는 사내.

“또 비요른 얀델이로군.”

오르큘리스의 부단장.

마안, 롤런드 바노잔트.

그리고 그 옆에 위치한.

“진짜 신기하다. 남작 오빠는 어떻게 알고 우리가 여기 숨은 걸 찾았대?”

오르큘리스의 단원.

절규의 마녀, 리란느 비비앙.

그리고 또 그 위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이것 참 곤란하군요.”

단원이자 원탁의 멤버였기도 한.

“피시싯…….”

시체 수집가, 아벳 네크라페토까지.

‘보아하니 다른 애들도 오르큘리스 멤버인 거 같은데…….’

혹시나 후작가에 숨어 있을 노아르크인들을 찾기 위해, 후작가를 초토화 시키란 지시를 내렸던 나는 진심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 새끼들이 왜 여기서 나와?’

이게 진짜 된다고?

***

나의 등장을 기점으로 소강 상태가 된 대치 구도.

“아아악…….”

계단 아래 내려갔다 왔을 뿐인데 어느새 팔 한쪽이 사라진 우리 대원 한 명의 비명 소리를 제외하면 너무도 조용하다.

“레이븐.”

이내 속삭이듯 짧게 읊조리자, 레이븐이 신속하게 상황 설명을 끝마쳤다.

“내려가 계신 동안 방을 조사하다가 바닥에 숨겨져 있는 홈을 발견, 바로 열었더니 그 아래 숨어 있던 저자들이 나타났어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내가 부재 중이던 때의 사건들이 이제 머릿속에 그려지긴 하지만, 여전히 현실감은 없게 느껴진다.

합법적으로(?) 후작가를 털어 볼 수 있겠다 싶었을 뿐, 진짜 얘네들을 찾아낼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거든.

뭐, 당황한 건 얘네도 마찬가지 같지만.

“란돌프 군, 후작가는 수색에서 멀쩡할 거라 하지 않았나?”

부단장이 문책하듯 말하자, 그 옆에 서 있던 안경잡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인다.

“하하하… 예, 그러게 말입니다. 분명 제가 계산을 했을 때, 이런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은 0%였는데 말이지요…….”

거, 0%는 무슨.

세상에 그런 게 없다는 건 알 나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던 때.

“이건…….”

우리가 아니라 자기 동료들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부단장이 살기를 뿜어낸다.

“내부에서 정보가 흘러나갔다고 볼 수밖에 없겠군.”

어…….

그게 그렇게 되나?

“배신자에겐 죽음뿐.”

현 상황이 얼떨떨하게 느껴지는 한편으로, 수많은 역경을 임기응변으로 헤쳐간 나는 하나의 각이 보였다.

그래서 생각도 다 정리하기 전에 입에서 먼저 말이 튀어나왔다.

“뭐 하나? 네크라페토.”

“……피싯?”

“어서 이리로 와라, 지금부턴 우리가 지켜줄 테니.”

그때까지만 해도 녀석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하지만…….

“정말로 옳은 정보였군. 너 덕분에 저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 공이면 너도 도시에서 새 신분을—.”

내가 빠르게 말을 이어가던 그 순간.

“무, 무, 무, 무, 무, 무슨 소리입니까 그게!!”

그제야 사태 파악을 끝낸 녀석이 크게 당황하며 손사래를 치기 시작한다.

“아, 아니야! 나는……! 부단장! 저놈이 그냥 헛소리를 하는 겁니다! 서, 설마 저 말을 믿진 않겠지요? 진실을 꿰뚫어 보는 눈을 지닌 마안께서?”

하나 부단장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녀석은 더욱더 다급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애, 애초에 나한테 저놈은 몇 번을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인데! 예……? 지, 진짜로 미, 믿는 건 아니지요……?”

“…당연히 믿지 않는다.”

“휴우…….”

“근데 그렇게 당황해 횡설수설하는 걸 보니,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

빈말이라고 하기에는 뼈가 실린 말.

“예, 누군가 정보를 흘리지 않았다면 현 상황이 설명되지 않기도 하고 말이지요.”

부단장 옆에 있던 안경잡이까지 합세해 한마디를 덧붙이자 녀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미리 말하지만, 저는 네크라페토 씨랑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

평소 오빠라 부르던 비비앙마저 깔끔하게 선을 긋자 녀석은 미쳐 팔짝 뛰겠단 표정이 되었다.

너무 억울해서 죽을 것 같다 해야 하나?

물론 내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었다.

‘거, 그러게 평소에 잘 살았어야지.’

암, 나만 해도 그렇다.

노아르크 쪽에서 저딴 말을 한다고 우리 동료들이 눈 하나 깜빡할 거 같은가?

그래, 그러니까…….

“뭐 하나? 빨리 와라.”

“내, 내가 거길 왜 갑니까?”

“왜 그러는 거냐? 어차피 더 이상 속일 필요도 없는데.”

“그러니까 헛소리 말라 하지 않습니까!”

“아, 동료들을 눈앞에서 배신하려니 마음에 걸리는 거냐?”

“이… 무슨!”

거듭된 몰아가기에 흥분하며 내게 달려들 것처럼 앞으로 걸음을 내딛는 녀석.

다만, 내가 막을 필요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게, 한발 빨리 나선 사람이 있었거든.

차차찻.

부단장의 옆에 있던 안경잡이.

녀석이 기민하게 움직이며 나를 향해 다가오던 녀석의 앞을 가로막는다.

“……어?”

동료의 길막에 적잖이 당황한 눈치인 녀석.

그런 녀석을 보며 안경잡이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돌발 행동은 멈춰 주시지요. 갑자기 그러면 자연스레 이탈하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

“어… 아니, 그, 그게 아니라……. 내가 앞으로 간 건…….”

“전투를 위해서라면 네크라페토 씨가 적들에게 다가갈 이유가 더더욱 없을 텐데요.”

“그… 지, 진짜 싸우려고 한 게 아니라…….”

“아하… 싸울 생각이 없으셨다 이 말이지요?”

“아니, 그런 뜻은 또 아닌데…….”

“부단장님?”

이내 안경잡이가 의견을 구하듯 짧게 묻자, 부단장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스런 정황이 있는 자를 등 뒤에 두고 싸우는 것보단 낫겠지. 아벳 네크라페토를 구속해라. 딴짓하지 못하도록.”

“들으셨지요? 그러니까 순순히 이리 오시지요.”

“아, 아니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예예. 그러니까 그건 나중에 얘기하시고, 일단 이리 오십쇼. 어차피 지금 네크라페토 씨 한 명 빠진다 해도 큰 문제는 없잖아요?”

오케이, 그럼 일단 한 명 컷인가?

23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713화 스페셜 포스 (4) 23

713화 스페셜 포스 (4)

어디 보자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열일곱.’

총 17인으로 이루어진 노아르크 소속의 특수 부대.

그중에 이름과 얼굴을 아는 건 딱 세 명뿐이지만, 그 셋 덕분에 남은 14명의 수준도 가늠이 된다.

아니, 애초에 세 명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오르큘리스의 부단장.

마안, 롤런드 바노잔트.

이놈이 지휘관으로 있다는 것만 봐도 다른 대원들 수준이 어떨지는 충분히 예상이 가니까.

하나하나가 일당백이 가능한 노아르크의 최정예.

당연한 말이지만, 이 자리에서 쾅 하고 붙어서는 승산이 없다.

우리 클랜원들을 전부 데리고 있다면 모를까.

지금 멤버 중에 믿을 만한 동료는 기껏해야 레이븐 정도.

심지어 20명 중 다섯 명은 전투력이 다소 떨어지는 대신 ‘탐색’ 쪽에 특화된 특수 인력이다.

하지만…….

툭툭.

그럼에도 내가 바로 도망갈 생각부터 하지 않은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그도 그렇잖아?

우리가 이 후작가에 들어온 지도 벌써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 정도면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수갑이 채워지는 시체수집가를 보며 그런 생각을 속으로 하던 때.

“비요른 얀델……! 이 망할 자식아……!”

이내 녀석이 증오로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본다.

거, 나를 욕하기라도 하면서 결백함을 증명하려는 건가?

혹시 그럴 가능성도 있기에 나는 돌연 날아든 쌍욕에도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언젠가 네 눈알을 직접 뽑아서 잘근잘근 씹어먹고, 내장은 모조리 갈아서 고블린 밥으로 던져주겠다! 그리고 그 상태로 방부제를 뿌려 썩지도 못하게 한 채—.”

“이해했다, 그쪽에서 좀 더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거군.”

“……응?”

“들었나? 바노잔트. 방금 보았듯이 시체수집가는 나 비요른 얀델과 내통하지 않았다. 녀석은 정말로 결백하다. 그러니 풀어줘라.”

물론 부단장이 내 말을 듣고 녀석을 풀어주는 일은 없었다.

내가 부린 수작에 완전히 넘어간 건 아닐 테지만, 지휘관은 책임을 지는 자리니까.

만에 하나를 대비해 변수를 차단하고 싶은 듯했다.

그리고 그 결과.

“이, 이, 이, 이……!!”

이젠 약간의 언어 능력 장애라도 온 듯 부들부들 떨 뿐, 말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는 시체수집가.

그 순간이었다.

타다다닷-!

문 바깥에서 무장한 병력들이 분주하게 달려오는 특유의 소리가 들려오고.

“이건… 좀 곤란하게 됐군요. 부단장.”

지능캐로 보이는 안경잡이가 뱉은 중얼거림에 부단장이 나를 응시한다.

“…시간 끌기였던 건가.”

다만 그리 말하는 바노잔트의 눈에는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진 않았다.

분한 것도, 짜증난 것도, 당황한 것도 아니다.

단지, 나를 그냥 바라만 보고 있다.

그래서 처음엔 저 무미건조한 눈에 담긴 한 줄기의 이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나, 머지않아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호기심.’

나란 인물을 파악하기 이전에 순수하게 데이터를 모으는 것 같달까.

실제로도 이후 반응을 보니 나에 대한 데이터도 어느 정도 모인 듯했다.

“실로 까다로운 상대로군.”

“…….”

“아벳 네크라페토를 풀어줘라.”

“…예?”

“변수는 사라졌다.”

어떠한 설명도 없는 말이었으나, 안경잡이는 어떠한 반문도 없이 지시를 이행했다.

마치 부단장이 보는 눈에 대해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처럼.

“그, 그러니까 아니라 했지 않습니까!”

이내 동료들의 손에서 풀려나며 그동안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시체수집가.

하나 그래도 일단 풀려나니 기분은 좋아졌을까?

“하… 정말로! 저런 야만인 놈의 혓바닥에 놀아나는 꼴이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당황해서 사라졌던 컨셉 말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저 기세등등한 꼴을 보니 당장 달려가 꿀밤이라도 놔주고 싶었지만…….

콰앙-!

그때 닫혀 있던 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백발의 노기사 한 명이 부하들을 이끌며 안으로 들어선다.

“여기까지네, 얀델 남작! 총사령관께서 당신의 직위를 해제하고 월권 행위로 처벌하란 지시가—.”

영장을 들고 찾아온 경찰처럼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뭐라뭐라 소리치던 노기사.

그 노기사가 이내 방 안의 상황을 확인하고 굳는다.

“……응?”

약간 정신이 나간 듯한 저 표정을 보고 있자니,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들이 대체 왜 여기에……?”

아까 나도 분명 저런 얼굴이었겠지?

***

온갖 곳을 수색해도 나오지 않던 노아르크의 특수 부대가 후작가에서 발견됐다.

그것도 ‘월권’ 중이라 확신했던 나, 비요른 얀델과 대치 중인 상태로.

‘이렇게 성과가 났으니 처벌 같은 건 일절 없을 테고.’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은 격이지만, 원래 세상은 결과만을 보는 법.

이제 뒷일은 아예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따라서 남은 문제는 이제 저 기사들과 함께 여기 이놈들을 싹 쓸어버리는 것뿐인데…….

“오랜만입니다. 모건 카리투무어.”

“그대는… 마안?”

아무래도 부단장과 저 기사는 구면인 듯했는데, 부단장이 뱉은 이름에 주변이 술렁거렸다.

“카리투무어라면…….”

“제2 왕실기사단장……?”

“저 사람이 그럼 그 유명한 ‘왕의 기사’……?”

후작이 날 잡으려 보낸 인물인 만큼 잔챙이는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더 거물이 왔다.

‘모건 카리투무어.’

‘왕의 기사’란 이명으로 더욱 유명한 개벽왕의 전대 호위기사이자 오른팔.

개벽왕이 건강 문제로 들이눕고서 정치적인 문제로 은퇴했다가, 얼마 전에 공석이 된 제2 왕실기사단의 단장으로 취임을 했다고 하는데…….

“……피싯, 이거 참 보기 힘든 분이 왔군요.”

그의 등장에 이렇게 모두가 놀라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오르큘리스의 부단장도 충분히 거물이긴 하지만, 저 노괴도 이름값으로는 절대 안 밀리거든.

은퇴하기 전까지만 해도, 도시 사람들 백 명 중에 아흔 명은 저 양반을 ‘최강’이라 꼽았을 정도이니.

“마안, 바노잔트. 그대가 이곳에 있다는 건… 얀델 남작이 정말로 임무를 성공했단 뜻이겠구려.”

어…….

“……그렇게 됐다.”

“얘기를 들어보니 후작가로 무작정 찾아갔다고 하던데, 실상은 그게 아니었단 거로군. 어쩐지 자네 정도 되는 인물이 그런 행동을 한 게 이상하다 생각했네마는.”

“…….”

“도대체 어떻게 한 건가? 왕실 정보부에서조차 파악하지 못한 정보였건만.”

“비결은… 합리적인 추론과 의심이다.”

“후후, 정보원은 밝힐 수 없다는 뜻인가?”

어…….

“…….”

굉장히 유능한 후배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에 왠지 모를 압박감을 느낀 나는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늘 그렇듯, 이러면 절반은 가거든.

“아무튼, 상황이 급박하니 이야기는 나중에 하세. 이야기는 저 무도한 반역도들을 모두 포박한 뒤에 해도 늦지 않으니.”

“나도 돕겠다.”

그러한 대화를 끝으로 왕의 기사.

아니, 부르기 불편하니 줄여서…….

‘성기사가 아니라 다행이네.’

이내 왕기사 할아버지가 칼을 뽑아 들었고, 이에 따라 나도 전투 태세를 갖췄다.

병력의 숫자는 우리가 압도적이었고, 지형지물조차 우리에게 유리했다.

그야 후작의 집무실엔 창문이 없는 탓이다.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안 달아둔 거겠지.’

심지어 후작의 저택은 ‘내구성’으로 유명하다.

왕의 거처와 완벽하게 같은 방식으로 건축됐다고 하던가?

외벽 자체도 일반적인 소재가 쓰인 것이 아니며, 온갖 마법이 떡칠되어 있어서 세상이 멸망해도 1분은 버틸 거란 말이 있을 정도인데…….

“순순히 무기를 내려놓고 자비를 구하시게.”

유일한 탈출구인 출입문은 왕기사가 막아서고 있는 상황.

“오늘 자네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그것뿐이니.”

하나 위엄 있게 검을 겨누는 왕기사 할아버지를 보며 부단장 바노잔트는 어떠한 내색도 하지 않았다.

단지, 조용히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좋습니다. 항복하지요.”

……응?

“……지금 뭐라 했는가?”

나만 잘못 들은 게 아닌지, 오히려 당황하며 다시 되묻는 왕기사 할아버지.

그 말에 부단장은 무표정하게 다시 말했다.

“항복하겠다 했습니다마는.”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

모종의 목적이 있어서 이곳까지 침투했을 게 분명한 오르큘리스의 특수 부대.

한데 이놈들이 이렇게 맥없이 항복을 한다고?

곧 죽어도 최후의 최후까지 항전하는 게 아니라?

그 누가 봐도 수상하고 기분 나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걸 알기 때문에 왕기사 할아버지도 직접 전두지휘하며 꼼꼼하게 그들을 체포했다.

하지만…….

“…….”

“…….”

정말로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그들은 어떠한 반항도 하지 않으며 순순히 체포에 응했으며 그것으로 상황은 종료.

“…커, 커다란 공을 세웠군요. 축하드립니다, 남작님.”

“저희도 열심히 했다고 후작님께 말씀 좀…….”

후작이 붙여준 대원들은 현 상황에 대해 의문을 느끼는 한편으로는 기뻐했다.

또한, 기쁜 감정의 뒤편에 숨어든 불안을 지우기 위해서인지 열심히 희망 회로를 돌려댔다.

“처음엔 저들이 왜 저러는지 이상했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 대응입니다.”

“암, 왕의 기사가 직접 행차를 하였는데 저들이 뭘 어쩔 수 있겠소이까.”

“항복하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다고 판단했을 테지.”

글쎄, 확실히 저놈들 입장에선 불리한 상황이 맞긴 했다.

근데 나는 도무지 그럴 거란 생각이 안 든다.

심지어 이번엔 직감에 의한 것도 아니며, 근거가 있다.

‘아무도… 반항을 안 했다는 건 말도 안 돼.’

부단장이 항복을 선언한 후, 그 어느 누구도 ‘항복’하는 것에 이견을 달지 않았다.

시체 수집가도, 절규의 마녀도.

충실한 오른팔처럼 보이던 저 안경잡이를 포함해 다른 대원들도.

‘부단장! 항복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끝까지 싸웁시다!’

‘이대로 잡혀가면 고문을 당해 죽는 것밖에 더 있습니까?’

‘난 차라리 싸우다 죽겠소!’

이런 반응을 한두 명은 보일 법도 한데, 그러한 것이 일절 존재치 않았단 것은 너무도 이상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도 계획을 세우고 미리 말을 나눴던 게 아니라면 말이다.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건 분명한데.’

문제는 그 꿍꿍이가 무엇인지 전혀 짐작 가는 게 없으며,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전무하다는 것이다.

“……카리투무어, 이들을 어떻게 할 거지?”

“자네의 임무와는 관계없네만, 그래도 이들을 잡는 데 큰 공을 세운 자네이니 답해주겠네. 지금부터 이들은 왕실로 이송될 걸세. 그리고 투옥되어 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알고 있는 모든 걸 토해내게 되겠지.”

그래, 역시 그렇게 되는 거구나…….

“…그냥 이 자리에서 전부 죽이면 안 되나?”

이후 이놈들의 위험성에 대해 얘기하고, 이놈들이 일부러 잡혀 준 걸 수도 있단 가능성까지 제기를 했지만, 왕기사 할아버지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제대로 듣고서 거절했다.

“자네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건 알고 있네. 하나 현재 우리는 전쟁 중이고,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이들이 가진 정보가 필요하네.”

“명분이 없다는 뜻이로군.”

“그렇네. 먼저 항복까지 하고 포박을 당한 이들을 죽여버리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

“단순히 직감만으로 그러한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걸 이해해주기 바라네.”

왕기사 할아버지는 단호하게 내 요구를 거절했다.

하나 불안하기는 한지 직접 궂은 일까지 해가며 몇 번이나 포로가 된 그들의 포박 상태를 점검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지금부터 이들을 왕실까지 이송하겠다. 최중요 인물인 만큼, 도착하여 임무가 완수되기 전까지 해이한 태도를 보이는 자가 있다면 엄벌할 것이다.”

이후 왕기사 할아버지는 그들을 직접 이끌고 정원으로 나갔고, 미리 연락을 받고 도착한 죄수 이송을 위한 특수 마차에 한 명씩 노아르크 놈들을 태웠다.

한데… 이건 또 뭘까.

“얀델의 아들 비요른.”

기사들에게 붙들린 채 특수 마차로 끌려가던 부단장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다음에 또 보세.”

그 말과 함께 의미심장한 미소가 입가에 걸쳐진 것은 덤.

누가 봐도 죽으러 끌려가는 놈의 얼굴은 아니었고, 그것이 내게 확신을 주었다.

역시 이대로 보내면 후회할 거 같다고.

“…쪼개?”

어이가 없다는 투로 말을 뱉자, 부단장이 특유의 기분 나쁜 눈깔을 뜨고서 나를 응시한다.

“그랬다면? 날 해코지라도 할 텐가? 자네처럼 잃을 것도 많은 인물이?”

“…….”

“자네는 보기와 다르게 몹시 이성적인 인물일세. 그리고 그런 자들을 대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

나는 놈의 말을 끊으며 짧게 답했다.

“어.”

“……?”

다만 녀석은 내가 무슨 의미로 ‘응’이라 답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눈치였다.

하나 내심 짚이는 게 있었을까?

“지금 그 말은, 날 건드리겠단 뜻인가?”

부단장이 ‘호기심’에 찬 눈으로 나를 보며 물었고, 나는 대답했다.

어느새 망치를 꺼내 든 손과 입을 사용해 동시에.

“어.”

콰직-!!!

이로 인해 귀찮은 일이 생길 게 분명하긴 하지만.

콰직-!!!

암, 후환을 남겨 두는 것보단 낫지.

지금을 놓치면 죽일 기회가 또 올 거 같지도 않고.

그래, 그러니까…….

콰직! 콰직! 콰직!

‘마안’이라고 했던가?

콰직, 콰직, 콰직—!!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다.

25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714화 감옥 (1) 25

714화 감옥 (1)

수도 없이 망치로 사람 머리빡을 깨본 사람으로서 말해보자면, 망치로 사람을 내려칠 때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 하나가 있다.

아니, 정확히는 ‘표정’이 있다.

‘어?’

내가 맞은 건가?

‘어?’

몸에 힘이 안 들어가네?

‘…어?’

이대로… 죽는 건가……?

이렇게.

허무하게……?

콰직-!!!

망치로 대가리를 후려맞은 놈들은 대부분 이런 눈빛을 지으며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인지 아닌지를 헷갈려 한다.

콰직-!!

실시간으로 자기 머리통이 박살나는 것을 보고 느끼면서도 제대로 실감하지는 못한다 해야 하나?

하기야 이놈은 그게 더할 것이다.

싸우다가 대갈통을 처맞은 것도 아닐뿐더러.

[그랬다면? 날 해코지라도 할 텐가? 자네처럼 잃을 것도 많은 인물이?]

이상한 확신까지 갖고 있던 놈이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머리통이 깨진 게 더욱더 현실성 없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 그만! 뭘 하시는 거요!”

이곳은 라프도니아다.

“얀델 남작이 난동을 피운다!!”

한순간의 실수가 죽음으로 이어지는 냉혹한 세계.

그래, 그러니까…….

콰직-!

오판의 대가는 치러야지?

“마, 막아라!!”

기사들의 제지고 뭐고 계속해서 망치로 머리를 내리쳤다.

콰직-! 콰직-!

오르큘리스의 멤버들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고, 우리 수색대원들도 얼굴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계속.

콰직, 콰직, 콰직-!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심정으로 몇 번이고 내리쳤다.

그리고…….

“…….”

더 이상 옅은 비명조차 흘러나오지 않고, 진흙을 때린 것처럼 뭉개지는 소리만이 들리는 그때.

콰짓!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특유의 그 손맛을 느끼며 제지하던 병사들의 손에 못 이긴 척 뒤로 물러났다.

“남작…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왕기사 할아버지는 부단장의 상태를 확인하지도 않고 내게 달려오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숱한 경험을 통해 보자마자 알아챈 것이다.

머리통이 저렇게 아작나면 대신관이 코앞에 있어도 살아나긴 글렀다는 걸.

“포로들 중에서도 가장 귀중한 포로를 어떠한 절차도 없이 참살하다니, 관점에 따라 반역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단 말일세.”

“아, 미안하다. 갑자기 나를 보고 모욕적인 말을 한 탓에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군.”

“모욕적인 말……?”

“저놈은 나를 보고 비웃으며 겁쟁이라 말했다.”

“사실인가?”

내 변명을 듣고서 주변에 있던 기사에게 사실 확인을 하는 왕기사 할배.

이내 기사는 좀 애매하다는 눈치로 고민하더니,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를 말했다.

“겁쟁이란 말은 없었습니다. 단지… 보기와 다르게 이성적이라고—.”

오케이, 거기까지.

“그게 겁쟁이라는 뜻 아닌가!!”

기사의 진술을 끊으며 노발대발하며 소리치자, 왕기사 할배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됐네. 이유야 상관없으니.”

“오, 그럼 봐주겠단 건가?”

“내가 봐주고 말 게 뭐 있나. 하나 아까도 말했듯 책임은 져야 할 것이네. 안 그래도 성이 잔뜩 난 후작이 자네의 이번 ‘실수’를 어떻게든 물고늘어질 게 분명하니.”

그리 말하는 왕기사 할아버지는 정말로 내가 후작에게 뭔가 해를 입을까 걱정하는 눈치일 뿐, 내가 한 짓 자체를 탓하고 싶진 않아 보였다.

아니, 오히려 호감도는 조금 더 올라가 보였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알았군.”

“……?”

“솔직히 이종족 출신이라 걱정했네마는, 자네의 애국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네.”

아, 나라를 위해 조진 거라 생각한 건가?

알 수 없지만, 나도 딱 하나는 확실하게 알았다.

“후작이 나라를 휘어잡고서 흔드는 판국이지만, 내 어떻게든 힘을 써 보겠네.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자네 같은 충신들이 바로 서야 이 나라도 바로 서지 않겠나?”

왕기사 할아버지는 대리국정을 하는 중인 후작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의외의 곳에서 든든한 뒷배가 생겼네.’

어쩌면 오늘 사건이 생각보다 별탈 없이 끝날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막 하며 망치에 묻은 피와 살점을 바닥에 툭툭 털어내고 있던 그때였다.

“다, 단장님!”

시체를 수습하고 있던 기사가 다급하게 달려와 충격적인 소식을 입에 담았다.

“사, 살아 있습니다!!”

“……응?”

“마안, 바노잔트가 아직 살아 있습니다!”

아니, 이런 미친.

“정말인가!”

……그걸 산다고?

***

간혹 미디어를 보면 그런 경우가 있다.

‘해치웠나?’ 싶던 찰나, 죽은 줄 알았던 적이 멀쩡히 일어서며 더욱 강해진 상태로 2차전을 시작하고 그런 거.

물론 지금은 그런 경우와는 달랐다.

“……커허, 커허헉.”

더욱 강해져서 달려들긴커녕, 겨우 죽다 살아난 것처럼 피를 토하며 바닥을 뒹굴고 있을뿐더러.

당연히 2차전 같은 것도 없다.

단지, 또 사고를 칠까 싶어 내 앞을 가로막은 왕기사 할아버지만 있을 뿐.

“거기까지.”

“…….”

“한 걸음이라도 뗀다면 베겠네. 자네를 위해서.”

후… 이걸 어떡하지?

잠깐 고민하며 멈춰 있는 사이에, 왕기사 할배의 눈짓을 받은 기사들이 부단장을 마차에 싣고서 신속히 출발했다.

이미 이 둔한 몸으로는 따라가기 늦은 상황.

‘…제기랄.’

결국 나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래,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거지.

저렇게 얻어맞고도 살아 있다면, 이건 내가 못한 게 아니라 적이 잘한 거다.

그렇게 마음 먹는 편이 옳을 터.

다만 이것 하나는 궁금했다.

“……대체 어떻게 살아난 거지?”

“이후 조사를 통해 알게 되면 전달해주겠네. 그러니 자네는 이곳에 머물며 좀 진정하고서 군사령부로 복귀하게. 내 후작에게 말은 해둘 터이니.”

그래, 이 왕기사 할아버지도 모르는 거구나.

대체 부단장놈이 어떻게 살아남은 건지.

뭐… 보나마나 아이템이나 정수 중 하나겠지만.

‘나중에 알려준다고 하니 이건 그때 듣기로 하고.’

“부디 다시 봤을 때는 진정을 한 이후였으면 좋겠군.”

그렇게 왕기사 할아버지까지 떠나갔고, 이후 나는 후작가 정원에서 잠시 생각 정리를 하다가 한 번 더 후작가를 살폈다.

노아르크인들이 숨어 있던 그 피난처를 한 번 제대로 확인해 보려는 게 이유였는데…….

‘이렇게 생긴 구조였구나.’

비밀 서재가 작업을 위한 공간이라면, 이곳은 말 그대로 피난처 같은 곳이었다.

그 있잖아?

외국 주택들을 보면 강도 침입을 대비해서 만들어 둔다는 ‘패닉룸’ 같은 거.

‘딱히 별건 없네…….’

대충 쓱 들러본 후 병사들에게 마저 조사를 하라고 말하고서 밖으로 나와 대원들과 함께 왕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총사령관님께서 부르십니다.”

역시 아니나 다를까 도착을 하자마자 후작에게 호출을 받았다.

“모두 나가 있게.”

“하지만…….”

“괜찮으니,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게.”

“알겠습니다.”

호위 기사까지 전부 밖으로 물리며 독대 자리를 만들어 낸 후작.

이내 자리에 앉자 후작은 잠시간 나를 노려보다가 말문을 뗐다.

“그래… 우리 가문을 수색하다가 정말로 그들을 발견해냈다고?”

“운이 좋았다.”

100%의 진실이 담긴 말이었으나 후작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어디서 정보를 얻었지? 정말로 시체수집가가 자네 정보원이었던 건가?”

“그건 그냥 시간을 끌기 위해 했던 말이다.”

이번에도 진실만을 말했으나, 후작은 귓등으로 듣지도 않았다. 그저 날 꼬나보며 내 말 중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를 구별하려 했다.

거, 믿을 생각도 없으면서 뭣하러 물어보는 거야?

입만 아프게.

“됐고, 그러면 이제 약속이나 지켜라.”

의미없는 문답을 하며 시간 낭비할 생각이 없기에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네가 말한 대로 도시에 숨어든 노아르크인들을 모두 색출했다. 심지어 그중에는 오르큘리스의 부단장도 껴있지. 이 정도면 임무는 초과 달성한 거 아닌가?”

“자네가 기습적으로 죽여버리려 했다는 바로 그 ‘마안’ 말인가?”

“……우발적인 행동이었다.”

“흐음, 그런 것치고는 계획적인 사고로 해석할 여지가 없지 않네. 예를 들면 ‘입막음’을 해야 할 것이 있었다든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가만 있을 순 없었다.

탱커가 할 말은 아니지만, 최선의 방어는 공격인 법이니.

“글쎄, 그런 면에서 본다면 제일 수상한 건 너 아닌가?”

“……?”

“부단장의 대가리를 깨뜨린 나보단, 노아르크의 특수 부대를 가문에 숨겨 준 네가 더 수상하게 보이는데 말이지.”

사실 이는 공격하려고 그냥 없는 말을 만들어 내서 한 게 아니라, 정말로 진심으로 수상하게 여겨지는 부분이었다.

물론 나도 처음엔 그냥 노아르크 놈들이 후작도 모르게 후작 가문에 숨어들었다고 생각을 했지만…….

[좋습니다. 항복하지요.]

암만 생각해도 그 대응은 왕실 높은 곳에 배후가 있는 게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짓이었거든.

정황상 가장 유력한 건 역시 이놈일 테고.

“…난 숨겨 주지 않았네.”

“그럼 잡혀온 그놈들은 어떻게 됐지?”

“현재 왕실 지하 감옥에 투옥되었네. 곧 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강도 높은 조사가 시작되겠지.”

“흐음… 그렇단 말이지……?”

다만 이 화제는 여기까지만 하고서 아까 얘기하던 주제로 다시 얘기를 돌렸다.

“아무튼, 약속은 지켰으니 이제 날 7구역으로 보내줘라.”

“……그건 불가하네.”

“어째서?”

“오해하지 말게. 아예 보내주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니까.”

“그럼 제대로 말해봐라.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자네가 우리 가문을 멋대로 수색한 것? 이건 그럴 만한 결과가 나왔으니 그냥 넘어갈 수 있네. 하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중요한 포로를 죽이려 한 것은 좀 다르지.”

쉽게 말해서, 공은 공이고 실책은 실책이라는 뜻.

“그러니까 딱 잘라서 말해보라 하지 않나.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다는 거냐?”

“카리투무어 경의 말도 있고 하니, 많이는 바라지도 않겠네. 군기를 어지럽히지 않기 위해서라 생각하고 이틀, 딱 이틀만 징계를 받게.”

징계에 대해 물어보자, 후작은 ‘금고형’이라 답했다.

하나 왕실 지하 1층에 위치한 귀족들이 머무는 감옥에 갇힐 거라고, 어지간한 여관들보다 훨씬 더 시설이 좋으니 쉰다 생각하면 될 거라고 설득했다.

뭐, 환경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건 시간.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이 후작 놈의 ‘의도’다.

‘이틀이라…….’

하, 어떡하지?

일단 이 양반이 허락 안 해주면 7구역으로는 절대 못 돌아갈 텐데.

“마지막 제안이고 타협은 없네. 설령 자네가 탈영을 할지라도 말일세.”

합법적으로 7구역에 가기 위한 유일한 선택지.

이내 고민하던 나는 끝내 결정을 내렸다.

당장 여기서 탈영을 하든가 징계에 불복했다가는 오히려 더 상황이 안 좋아질 수도 있을 테니까.

심지어 구속구도 안 차도 된다 하지 않았던가.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면 바로 철창을 깨부수고 밖으로 나가면 될 것이다.

그래, 그러니까….

“이틀. 딱 이틀이다.”

“…잘 생각했네.”

잠시만 상황을 지켜보자.

‘후작, 이 새끼가 아주아주 수상하단 말이지.’

후작 놈이 원하는 대로 굴러가게 둘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21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715화 감옥 (2) 21

715 감옥 (2)





아주 오랜만에 감옥에 갇혔다.

아니, 감옥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런가?

엄청난 괴물이 갇혀 있다든가, 미궁에서 죽은 줄 알았던 초대형 범죄자들이 고문을 당하고 있다든가.

그런 온갖 루머가 가득한 왕실 지하 감옥.



‘……온수가 우리 집보다 더 빨리 나오네?’



감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설비가 호화롭다.

5성급 호텔 스위트룸에 온 것 같달까.

방만 해도 무려 세 개고, 침대는 내가 옆으로 두 바퀴를 굴러도 남을 정도로 크다.

또한 화장실에는 대형 욕조까지 있었는데…….



“……나쁘지 않네.”



물론 지하 감옥의 전부가 이런 식인 것은 아니다.

그야 내가 위치한 곳은 지하 1층에서도 한쪽 구석에 따로 마련된 특수 수감실이니까.

죄인이기는 하여도 왕실의 존중을 받는 이들이 투옥 생활을 하는 장소.

뭐, 사실 투옥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단 보여주기 식으로 가두는 거겠지만.

아무튼.



“얀델 남작,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겠는가?”



투옥 생활이 시작되고서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면회객이 방문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만났던 바로 그 왕기사 할아버지였는데…….



내 애국심을 보고서 놀랐다든가.

투옥 생활이 불편하지는 않냐고 묻는다든가.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든가.

현재 노아르크인들은 지하 5층에 투옥되어 정보부 요원들에게 심문을 받고 있고, 그러던 중 부단장이 살아남을 수 있던 게 ‘정수’ 덕분임이 밝혀졌다든가.



나를 호의적으로 대하며 스몰 토크나 조금 나누다가 마지막에 조금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떠났다.



“……이만 가보겠네. 아까도 말했지만 이틀간은 딴생각 말고 쉬게. 후작이 자네에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이 다른 의도일지도 모르니.”



“…응? 그게 무슨 소리냐?”



“오히려 자네가 탈옥하기를 바란 것일 수도 있단 뜻이네. 기간이 고작 이틀에 불과할지라도, 탈옥의 죄가 덜어지는 것은 아니니.”



왕기사 할아버지는 일이 있다며 그 말을 끝으로 돌아갔고, 나도 좀 생각이 많아졌다.



‘확실히 일리가 있긴 하단 말이지.’



그도 그럴 게, 후작은 감옥에 갇힌 나를 과할 정도로 잘 대접해줬다. 내 성격을 안다면 탈옥할 수 없게끔 훨씬 더 많은 제약을 걸 수 있었을 터임에도.

특수 수감실에 가뒀고 구속구도 채우지 않았다.

솔직히 맘만 먹으면 지금 당장 문짝을 뜯고서 밖에 나가는 게 가능할 정도였는데…….



“……계세요?”



어찌된 영문인지 왕기사 할아버지가 떠나간 후로 얼마 되지 않아 두 번째 면회객이 방문했다.

여긴 뭐, 아무나 오고 싶으면 올 수 있는 곳인가?

그런 생각이 들어 좀 웃기긴 했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아무나가 아니긴 하지.’



단지 내 주변에 왕실 지하 감옥에 출입할 수 있을 만큼의 위치를 가진 이가 많았을 뿐이다.

지금 도착한 두 번째 면회객처럼.



“라그나…….”



“오랜만입니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신가요? 제가 생각하는 감옥과는 다르다 들었지만, 여기서는 안에가 잘 보이지 않아서…….”



“아마 네가 들었던 대로일 거다. 딱히 불편한 건 없다. 이 정도면 식사도 잘 나오는 거 같고.”



“아…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 여긴?”



이내 찾아온 목적을 묻자, 라그나가 머뭇거리다가 식사를 넣어주는 틈새로 포장된 상자 하나를 집어 넣는다.



‘뭐지?’



비밀 서류라든가, 은밀히 전해야 하는 편지라든가.

그런 걸 생각하며 말없이 포장을 풀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한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



“…쿠키?”



자그마한 상자에는 빼곡하게 쿠키가 채워져 있을 뿐, 별다른 건 보이지 않았다.

아, 쿠키 안에 쪽지 같은 걸 집어 넣은 건가?

문득 든 그 생각에 얼른 하나를 집어 입에 씹던 차.



“들어보니까 식사 때 디저트 같은 건 나오지 않을 거라 들어서……. 직접 구워 봤는데 어찌… 입에는 맞으십니까?”



“어… 어? 어, 맛있다!”



“후후, 그렇게 소리 지르지 않아도 잘 들립니다.”



“…….”



후작이 뭔가 시켜서 온 건 아닌가 했는데, 정말로 그냥 먹을 거나 챙겨주고 얼굴이나 보려고 했던 모양.

따라서 그냥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 사소한 잡담이나 나누던 중, 문득 만난 김에 그거나 물어볼까 싶었다.



비밀 서재에서 보았던.

라그나의 친모로 추정되는 여성의 그림.



과연 얘는 그 여성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을까?

한번 물어봐볼까도 싶었지만, 그냥 하지 않기로 했다. 후작이라면 도청 장치를 여기저기에 숨겨뒀을 거 같—.



“아니, 잠깐만.”



불현듯 뇌리에 벼락이 친다.



“……왜 그러세요?”



그러고 보면 후작이 나한테 말은 했던가?

조금 미안하게 됐지만, 라그나의 물음은 무시하고서 후작과의 대화를 복기했다.



‘안 했어.’



차차 돌이켜보니 확실해졌다.

그때의 후작은 하지 않았다.



[그래… 우리 가문을 수색하다가 정말로 그들을 발견해냈다고?]



분명 가문 내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 모든 소식을 들었을 터임에도.



[이틀, 딱 이틀만 징계를 받게.]



후작은 떠보기는커녕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멋대로 들어간 그 ‘비밀 서재’에 대해서.

정말 단 한 마디도.

그냥 스쳐 지나가는 말로도 한 번쯤 얘기가 나올 법도 한데.



‘……그렇게까지 중요한 비밀이 아니었던 건가?’



누가 알아채든 크게 숨길 일은 아니라서.

그래서 후작은 그렇게 별 반응을 보이지 않은 걸까?

아예 말이 안 되는 가정은 아니지만, 내가 밟아온 지난 삶들이 말해주었다.



‘아니, 그럴 리가.’



오히려 그 반대다.

후작이 이것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은 그 ‘비밀’이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가정이 맞는다고 한다면.



‘…제일 위험한 건 나일지도.’



어쩌면 지금 당장은 7구역에 있는 동료들을 걱정할 때가 아닐지도 모른다.



“…대체 뭐 때문에 그러시는 건지요?”



아, 물론 후작의 딸이기도 한 라그나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는 망상이었다.

따라서…….



“…배가 아프다!”



“……예?”



“어서 화장실에 가야겠다! 아, 그리고 이 쿠키는 잘 먹겠다! 고맙다!”



“예? 아…. 예……….”



바바리안식 회피 기동술을 사용하여 이쯤에서 라그나와의 대화를 종료.

라그나가 떠난 후에는 실제로도 배가 조금은 아파 화장실에 가 변기에 앉았다.

그리고 또 얼마나 흘렀을까?



데구르르.



밖에서만 열 수 있는 배식구를 통해 무언가 수류탄 비슷하게 생긴 게 굴러들어오더니.



번뜩-!



그대로 폭발하며 세찬 빛을 내뿜는다.



‘섬광탄……?’



처음엔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눈이 멀 정도로 세찬 빛은 아니었으며 빛이 맞닿은 피부에도 딱히 대미지는 느껴지지 않았다.



‘누구지……?’



공격은 아닌 거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망치를 꺼내 들고 출입문으로 다가가던 때, 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있는가?”



제1 왕실 기사단장, 제롬 세인트레드.

아니, 정확히는 그의 몸을 차지한 고대의 노괴.



“자네에게 급히 전할 말이 있어 찾아왔네.”



촌장이었다.





***





왕실 감옥이 무슨 애들 놀이터도 아니고.

하루에 대체 몇 명이나 방문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세 번째 면회객은 촌장이었다.



“너는 또 무슨 일이냐? 아까 그건 뭐고?”



“왕실 정보부에서 사용하는 마도구일세. 일순간 강력한 마력 파장을 퍼뜨려 통신 계통의 마도구를 무력화 시켜주지.”



음, 쉽게 말하자면 EMP 수류탄인 건가?



“듣는 귀가 있을지 몰라 행한 조치이니 자네가 이해해주게.”



그거야 뭐, 나도 도청 장치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긴 했으니까 상관없는데.



“됐고, 급히 전해야 한다는 사안이 뭐냐?”



이내 본론으로 들어서자, 정말로 급하다는 말이 사실인지 촌장도 즉시 핵심만을 얘기했다.



“곧 시작될 걸세.”



……아니, 그래도 이건 너무 핵심만 얘기한 거 아닌가?



“시작되다니? 뭐가 말이냐?”



“모든 게 불타오를 날이.”



“아니,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



불안하게 뛰는 심장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최대한 차분하게 되묻던 그 찰나.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지상에서부터 전해진 진동이 수십 초가량 동안 이어지더니.



드드드드드드-!!



이윽고 감옥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천장에 금이 가고, 천장을 지탱하던 벽면이 파이며 파편을 떨어뜨린다.

이에 당황해 철문을 잡고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거냐고 촌장에게 물으려던 순간.

촌장이 한발 먼저 입을 열었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게. 더 이상 이곳은 안전하지 않으니.”



“아니, 그러니까 설명을 좀—!”



“당장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네. 살아남게. 그러고 나면 나도 자네에게 해줄 말이 있으니.”



“해줄 말이고 뭐고 상황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말을 해줘야 내가—!”



“슬슬 시간이 됐군. 이후 상황은 뒷사람에게 듣게.”



이내 그 말을 끝으로 촌장이 떠나는 기척이 철문 너머에서 느껴졌다.

그리고…….



타다다닷-!



굉장히 다급한 걸음 소리가 빠르게 내가 있는 곳으로 가까워지는 게 느껴진다.

촌장이나 왕기사 할아버지는 아니었다.

그야 딱 봐도 무술과는 연관이 없는 일반인의 걸음 소리였거든.



‘라그나인가……?’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그녀였으나, 놀랍게도 이번 방문객은 어느새 네 번째나 된 새로운 면회객이었다.



쾅쾅쾅!



“얀델 씨!! 얀델 씨!!”



“레이븐……?”



“아, 계셨구나! 다행이에요! 지금 열어드릴 테니—.”



“필요 없다.”



나는 애초에 아무런 의미도 없던 문짝을 잡아뜯으며 밖으로 나갔다.



“어……?”



“서둘러 본론만. 지금 위에서 무슨 일들이 펼쳐지고 있는 거지?”



“아, 아……!”



이내 내 음성을 듣고서 정신을 차린 듯한 레이븐이 서둘러 브리핑을 시작했다.



“우레! 우레가 영광의 궁에 떨어졌어요!”



‘우레’.

왕실에서 보유 중인 세 개의 ‘마도병기’ 중 하나의 공식 명칭.



“얀델 씨한테 오는 길에 통신으로 들었는데, 영광의 궁이 무너졌고, 총사령관인 재상도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이래요! 지금 다들 공황 상태에 빠져서 피난을 가고 있다는데……!”



나는 레이븐의 어깨를 짓누르듯 잡았다.

도대체 위에서 뭘 본 것인진 몰라도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이,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얼른 피해야 해요! 만약 그게 하, 한 번 더 떨어지면 여기도 멀쩡하지 못—!”



“진정해라, 레이븐.”



“하지만……!”



“진정하래도.”



“…….”



강하게 말하자 레이븐도 입을 꾹 다물었다.

뭐, 그런다고 몸의 떨림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패닉에 빠진 조금 전보다는 훨씬 나았다.



“7구역은… 7구역 쪽은 어떻게 됐는지 소식이 있나?”



“모, 모르겠어요. 우, 우레가 떨어지기 전에 비프론 소탕 작전을 시작한단 말이 있기는 했는데…….”



음,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이후 나는 마지막으로 하나만 확인했다.



“재상이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 정보가 더 있나?”



“네? 아뇨!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통신으로 들은 소식에 따르면 우레가 떨어질 때 분명히 영광의 궁에 있었다고 해요!”



“그렇군.”



그리 대답하면서도 직감… 아니, 확신했다.

후작은 살아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우레’를 터트린 게 후작일지도 모르지. 노아르크놈들과 뭔가 공모를 꾸몄을 수도 있는 정황이 있는 놈이니까.



“잠깐만, 시간을 줘라.”



“네? 시간이라니요?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어서 밖으로 나가야—!”



“잠깐, 아주 잠깐이면 된다.”



이내 그 말을 끝으로 레이븐이 뭐라 하건 입을 꾹 다물고서 생각을 이어나갔다.

일분일초가 다급한 전시.

고민을 끝마치고 결론을 내리기까지 긴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도망치는 것은 최악의 수다.

지금 당장 도망치는 것도, 밖으로 나가 7구역의 동료들과 합류하는 것도 혼란에 빠진 현 상황에선 전부 가능할 테지만.

상식적으로 그게 훨씬 더 안전한 선택일 테지만.



툭.



모든 일에는 ‘골든 타임’이라는 게 있잖아?

초기 대응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뒤따르는 결과는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그래, 그러니까…….



“먼저 가라, 레이븐.”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미쳤어요? 얀델 씨가 지금 위에 상황을 몰라서…… 아니, 어디를 가는 거예요!”



이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날 보며 레이븐이 기겁했다.

그야 그럴 것이다.

지금 내가 가는 복도를 따라가면 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온다.

그리고…….



“지하 5층이랬지…….”



“지하 5층요……? 거기는 왜 가려는 건데요!”



왕기사 할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거기에 갇혀 있다.

항복한 ‘마안’과 함께 붙잡혀 온 노아르크 특수 부대가.

구속구를 차고 모든 능력이 봉인 된 채.

52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716화 감옥 (3) 52

716화 감옥 (3)

레이븐에게서 지상의 소식을 들은 직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늦진 않았겠지?’

물론 그 거대한 진동이 들리고서부터 아직 3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하나 그럼에도 지금이 정말로 ‘골든 타임’인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야 놈들의 ‘계획’이 뭔지는 몰라도 아까 들었던 그 폭발음이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계획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어쩌면.’

‘골든 타임’은 계획이 시작되기 이전까지를 뜻하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이미 탈출이 시작됐고, 내려갔을 때는 아래에 아무도 없을 수도 있다.

아니, 오히려 올라오는 놈들과 마주쳐서 곤란한 상황에 빠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다다닷-!

오히려 그렇기에 전력을 다해 계단을 뛰어내리고 있다.

콰지지직-!

층마다 있는 두꺼운 철문을 뜯어내며.

‘아직은.’

철문이 멀쩡한 것을 보며 아직 녀석들이 감옥에 갇혀 있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더욱 키우며.

타다다다닷-!

지하 2층, 지하 3층, 지하 4층…….

빠르게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그야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하는 거잖아?

아직 ‘골든 타임’을 놓치지 않았을.

“허억, 허억……!”

그렇게 빠른 속도로 층을 내려가고 있던 중에 저 멀리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야, 얀델 씨……!! 잠깐만……!”

당장 도망쳐야 한다더니, 막상 걱정이 되는지 뒤를 따라오고 있는 모양.

지금이라도 혹시 모르니 먼저 올라가라고 말할까도 싶지만…….

‘어차피 다 내려왔으니까.’

이제는 이 아래만 확인하면 된다.

놈들이 아직 구속구를 찬 채 갇혀 있다면 그 안으로 들어가 빠르게 ‘처리’만 하면 될 것이고.

이미 풀려났다면…….

‘뭐, 그래도 얘가 도망칠 시간은 벌 수 있겠지.’

판단을 끝마친 나는 레이븐을 돌려보내는 대신 지하 5층과 연결된 마지막 철문을 잡아뜯었다.

이 너머가 어떻게 되어 있든.

고민 따윈 하지 않고, 바바리안답게 과감하게.

콰지직-!

압도적인 근력 수치에 의해 종잇장처럼 뜯겨져 나가는 철문.

그 너머는 조용했다.

“…….”

바둑판 배열식으로 이뤄진 지하 5층 감옥.

지속적으로 관리가 필요한 횃불 대신, 은은한 빛을 뿜는 마도구가 천장에 박혀 주변을 밝힌다.

그리 밝지는 않고 딱 사람이 우울해질 정도의 밝기.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왼쪽, 오른쪽, 직진.

지금 당장의 선택지는 세 가지다.

노아르크놈들이 지하 5층에서도 정확히 어느 곳에 수감됐는지 모르기에 직접 발로 뛰어 찾아야 한—.

툭.

아, 찾을 필요는 없겠구나.

‘니미럴.’

정면부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황급히 앞을 확인해 보니, 저 멀리 코너를 돌아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이 보인다.

철컥, 철컥.

안내를 하듯 선두에서 쇳소리를 내며 걸어오는 이름도 소속도 모를 왕국의 기사가 둘.

그리고.

“…역시 자네라면 올 줄 알았지.”

보좌를 받듯 그 뒤를 따르는 마안, 바노잔트.

“피싯…….”

그외 등등 졸개들까지.

생각처럼 좋게 풀리지 않는 상황일지라도 나는 보자마자 인정하고 납득했다.

그래, 이미 늦은 거구나.

‘딱 보니까,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바로 풀어준 거 같은데…….’

다만 이 사실이 아주 치명적으로 다가오진 않는다.

그도 그럴 게, 오면서도 크게 기대하진 않았거든.

경험상 이미 늦었단 생각이 들었을 땐 정말 늦었을 확률이 높을뿐더러…….

‘역시 그래도 오길 잘했네.’

다시 생각해도 일단 오긴 해야 하는 자리였다.

그야 저놈들이 바깥으로 나가면 뭔가 골때리는 일이 생길 게 분명하잖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단지 날먹할 타이밍을 놓쳤을 뿐.

아직 ‘골든 타임’을 놓친 건 아닐지도 모른다.

툭, 툭…….

때마침 지형도 나쁘지 않고.

꽈악.

지금이라면 막는 게 가능하다.

저놈들이 도시로 올라가 ‘계획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알다시피 우리 임무는 여기까지요.”

그런 결의를 속으로 다잡고 있던 때, 그들을 안내하듯 선두에 서 있던 기사 두 놈이 부단장에게 말했다.

“이후로는 마안, 당신이 해결해야 하오.”

말을 들어보니 감옥에서 꺼내주는 것만 돕기로 했을 뿐, 그 이상까지 도울 생각은 없는 모양인데…….

“하아, 하아… 야, 얀델 씨?”

딱 타이밍 좋게 그 순간 레이븐이 도착한다.

음, 타이밍 좋게는 아닌가?

“하아, 하아… 멈추신 건… 이제야 돌아갈… 마음이 생긴……. 히익!”

이내 멈춰 있던 날 보고 희망을 품기도 잠시, 내 커다란 몸뚱이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정면부를 확인한 레이븐이 까무라친다.

“저, 저 사람들이 어, 어떻게 밖에……?”

뭘 어떻게긴 어떻게야.

왕실 권력 깊숙한 곳까지 손이 닿는 누군가가 풀어줬으니까 밖에 있지.

‘보니까 장비들도 전부 챙겨와서 돌려줬나본데…….’

어쩐지 아직까지 지하 5층에 남아 있더라니.

뺏긴 장비들을 입으며 정비하느라 약간 시간이 걸렸던 거구나.

툭.

이내 옆으로 물러난 두 명의 기사 사이로 마안, 바노잔트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오더니 이내 나를 보며 조용히 묻는다.

“막을 셈인가? 혼자?”

글쎄.

“어쩔 것 같나?”

피식 웃으며 되묻자, 녀석이 가만히 나를 응시한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듯한 기분 나쁜 동태 눈깔.

한데 지난번에 내가 해준 과외 덕분일까?

“흐음, 내가 보기에 자네는…….”

그래도 이번엔 정답을 맞혔다.

“이번에도 어리석은 선택을 할 거 같군.”

뭐, ‘어리석은’ 선택이란 단어에 동의할 수 없기는 하지만.

일단 이후 내 행동을 맞힌 거긴 하니까.

그래, 그러니까…….

“…….”

대답 대신 ‘아이기스의 장벽’을 들어 올린다.

그리고 [거대화]까지 활성화하며 지상과 이어진 유일한 통로인 출입문을 몸으로 틀어막는다.

그리고…….

“얀델 씨… 이건 너무 무모한 거—.”

염려의 감정을 드러내는 레이븐의 말을 끊으며.

“너는 먼저 올라가라. 여기는 내가 막고 있을 테니. 너까지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다.”

그렇게 딱 잘라 말하자 약간의 텀을 두고서 대답이 돌아온다.

“……아, 진짜 계속 서운하게 그런 말 할 거예요? 애초에 그럴 거였으면 여기 내려오지도 않았지.”

“어…….”

“버틸 생각인 거죠? 저 사람들이 위로 올라가서 뭔가 못된 짓을 할 수 없게끔.”

“그건…….”

“도와드릴게요. 이 상황에 큰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저 이래 봬도 군에 있는 동안 보조 주문도 많이 익혔다고요?”

“음…….”

망설임 따위는 일절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왠지 모르게 가슴에 뭔가 채워지는 듯한 느낌이 피어나는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이럴 때는 뭐라고 해야 하는 걸까.

그럴 필요까진 없다고 사양을 해야 할까? 아니면 나중에 갚겠다고 약속을 해?

고민은 길지 않았다.

“레이븐.”

“네?”

“항상… 고맙다.”

“…….”

진심 어린 감사 인사에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굳이 답변을 요구하진 않았다.

답이 돌아오면 괜히 더 멋쩍어질 거 같았거든.

게다가 상대도 우리를 보며 저게 뭐지 하는 눈으로 보고 있고.

“…다 끝났습니까? 피싯.”

거, 실실 쪼개기는.

이내 앞을 바라보자 노아르크 놈들이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게 보인다.

시체 수집가.

절규의 마녀.

마안.

그리고 그외의 안경잡이를 비롯해 이름은 알 수 없지만, 딱 봐도 한 실력 할 거 같은 단원들까지.

‘얼마나 오래 붙잡고 있을 수 있으려나?’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은 그냥 스쳐서 지나치게 내버려 두었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와라.

뭘 꾸미는지는 몰라도 절대 너희가 원하는 대로 두지는 않—.

콰아아아아아앙-!

그때 다시 한 번 지상 쪽으로부터 굉음과 함께 지하 공간 전체가 세차게 흔들린다.

드드드드드……!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격한 흔들림.

안 그래도 일전의 충격으로 위태롭던 기둥 부위의 손상이 심해지고,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는데…….

드드드드드……!!

사실상 언제 붕괴가 이뤄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란돌프 군, 다중 순간이동 마법은 준비 됐나?”

…응?

“예. 현 시간부로 마력 소멸진도 해제가 됐고, 당장에라도 발동 가능합니다.”

……뭐라고?

“실행해라.”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다른 죄수들을 풀어준다는 계획은 못 쓰게 될 텐데요.”

“이곳에서 시간을 더 빼앗기는 게 전략적으로 손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둘이서만 착착 대화를 나누더니 어느 순간 놈들 발 아래쪽에서 푸른색 빛이 뿜어져나온다.

무슨 상황인지는 명명백백했다.

‘아니, 장비 때문에 지하 5층에 남아 있던 게 아니었어?’

알 수 없지만, 이대로면 두 눈 뜨고 놈들을 놓칠 수밖에 없다.

메스 텔레포트의 약점은 발동하기까지 오래 걸리며 방해가 쉽다는 것인데…….

보아하니, 이미 준비가 다 끝난 거 같거든.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으니…….

타닷.

황급히 지면을 박차며 앞으로 대시.

탱커라고는 하나 최상위권 탐험가의 육체는 이 정도 되는 짧은 거리를 신속하게 좁히기에 충분했다.

아, 물론 방해가 없다면 말이다.

「롤런드 바노잔트가 [녹색 마안]을 시전했습니다.」

탱크 크기의 바바리안이 달려오는 와중에도 미동 없이 서 있던 부단장의 홍채가 녹색으로 물든다.

그리고 그 순간…….

후우우웅-!

반투명한 녹색의 장벽이 둘 사이에 세워지며 앞을 가로막는다.

콰앙-!

망치를 내려쳐봐도 실금 하나 가지 않는 벽면.

이는 No.687 공성 살육자로 무기를 스왑해도 마찬가지였는데…….

콰아아아아앙-!

꿈쩍도 않는 벽면을 내려치는 것을 기점으로 위태롭던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하며 건물 붕괴의 조짐을 보인다.

하나 그러든 말든 철퇴를 내려쳤다.

솨아아아아-!

마법의 완성이 임박함을 알리듯 점점 더 진해져가는 벽면 너머의 푸른 광채.

콰아아앙-!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철퇴를 내려치는 나를 보며 마안은 말했다.

마치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청년에게 조언하듯이.

“얀델 남작,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나. 쓸데없는 곳에 힘 쓰지 말고 서두르게.”

이내 녀석의 멍한 동태 눈깔이 내가 아닌 내 어깨 너머로 향한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동료를 끔찍이 아낀다고 하던데.”

쿠우우우웅-!

본격적으로 붕괴가 시작됐다.

***

천장이 무너지며 거대한 파편이 내 어깨를 때린다.

그걸 기점으로 나도 철퇴를 휘두르는 걸 멈췄다.

이제는 인정을 해야 했다.

지금 당장 이놈들이 빠져나가는 걸 나로서는 막을 수 없다.

하지만…….

“너희가 뭘 꾸미고 있는진 모르겠는데.”

이 말은 해줘야 했다.

“절대 원하는 대로는 안 될 거다.”

바바리안은 뭔가를 망치는 데 특화된 종족이거든.

“…기대하지.”

거, 쿨한 척은.

‘뭐, 됐나.’

어차피 할 말은 다 끝났으니까.

타닷-!

이내 용무가 끝난 즉시 나는 뒤돌아 레이븐이 있는 계단부로 대시.

번뜩-!

중간에 뒤에서 한 차례 강한 빛이 점멸했지만, 굳이 뒤돌아 보지는 않았다.

그래 봐야 이미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

일단은 레이븐을 데리고 지상으로 대피하는 게 급선무—.

“얀델 씨! 위로 가는 계단이 막혔어요!”

“…뭐?”

일단 레이븐을 안아 들고서 계단 위를 확인하니 정말로 올라가는 길이 완전히 무너졌다.

‘하, 그럼 이걸 하나하나 뚫어가며 올라가야 하는 건가?’

딱 보자마자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법.

생각할 시간도 아깝기에 그 즉시 계단 위로 향했다.

그리고 곧바로 길을 가로막은 파편들을 맨손으로 치우기 시작하려던 그때.

“얀델 씨, 이미 늦었어요!”

늦었다라…….

뭐,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

“그래서 그냥 여기서 죽자는 거냐?”

자고로 K-바바리안에게 있어 포기란 김치를 셀—.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요! 우리도 다중 순간이동 마법으로 탈출하면 되잖아요!”

아……?

그런 방법이?

“마법이 완성될 때까지 시간만 벌어주시면 돼요!”

왜 이걸 생각 못하고, 바로 몸부터 쓰려 했지?

왠지 진짜 뇌까지 바바리안이 된 느낌이 들어서 머쓱해졌지만, 일단 최적의 방법임에는 틀림이 없다.

따라서…….

드드드드드-!

무너지는 지하 계단을 역으로 내달리며 아래로 진입해 그나마 버틸 만한 공간을 찾던 그때.

“저쪽이요!”

레이븐이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모퉁이 부분을 가리킨다.

확인해 보니 두꺼운 기둥들이 서로 맞물리며 무너진 덕분에 사람 둘이 몸을 숨길 만한 공간이 확보되어 있는 상황.

‘오케이, 아래에서 딱 받치고 있으면 마법이 완성될 때까진 쉽게 버틸 수 있을—.’

그런 판단을 하며 통로를 내달리던 그때.

“……응?”

“……어어? 꺄아아아악!!”

바닥이 무너졌다.

그리고…….

쿠웅-!

정신을 차렸을 땐, 낯선 천장이 보였다.

음, 정신을 차렸다라고 표현하기엔 좀 그런가?

달리다가 바닥이 무너져서 아래로 추락한다고 해서 기절할 만큼 바바리안의 몸이 약하진 않다.

내딛은 묵직한 발걸음이 바닥에 닿고.

실금이 가 있던 바닥이 부서지고.

그 아래로 추락하던 와중에도 끌어안고 있던 레이븐이 다치지 않도록 몸을 틀며 등으로 떨어진 것까지.

느리게 재생한 영상처럼 전부 다 생생히 보았고, 기억하고 있다.

다만 의문점이라고 한다면…….

“여긴…….”

딱히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이곳은 안전하단 걸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위층은 전부 다 무너지고 있는 와중에도 내가 추락한 이 아래 공간은 흔들림 없이 멀쩡했다.

그나마 무너진 곳을 찾는다고 하면 내가 떨어지며 생긴 자그마한 천장면 정도인데…….

“지하… 6층이라고……?”

분명 왕실 지하 감옥은 5층이 끝이다.

게임에서도 그랬고, 실제로도 5층부터는 내려가는 계단도 없었다.

왕실 감옥이 증축됐다는 소식 또한 들어 본 적 없고.

‘아니, 그보다 애초에.’

…여기를 감옥이라고 해도 되는 걸까.

정육면체 구조의 거대한 공간.

철창살은커녕 이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한 입구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공간 중심부에는 정육면체 형태의 구조물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마치 마트료시카처럼 상자 속에 상자가 자리하고 있는 형국.

“…….”

대체 뭐지 여긴?

분명 의미도 없는 공간을 이렇게 숨겨두듯이 만들어 두진 않았을 텐데.

“레이븐, 일어나라. 어서.”

그 답을 얻기 위해 나는 신속하게 마법사를 깨웠다.

다행히 추락하며 잠시 정신만 잃었는지, 몸을 흔들기 무섭게 의식을 되찾은 레이븐.

“여, 여긴…….”

“떨어져보니 여기였다. 내가 알아야 할 부분이 있나?”

내 요구에 멍한 눈빛으로 주변을 쓱 둘러보던 레이븐이 중심부에 있는 정육면체의 구조물에 시선을 고정한다.

“저게 뭔지 알겠나?”

이내 한 번 더 어깨를 흔들며 묻자, 레이븐이 본인도 확신이 없는 목소리로 답을 들려주었다.

“뭐, 뭔진 잘 모르겠는데…….”

“근데?”

“저… 안에 포, 포탈이 있는 거 같은데요……?”

이 공간은 도대체 뭘까.

17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717화 감옥 (4) 17

717화 감옥 (4)

세상에는 그런 말이 있다.

죄수 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죄수들끼리 서로의 족쇄를 자랑하기 시작한다고.

누구의 것이 더 크고, 무겁고, 단단한지.

이걸 차고 다니는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얼핏 들으면 에이, 설마 진짜 그런 걸 자랑하겠느냐 싶지만, 사실 그 말은 진실일지도 모른다.

그야 자신만 해도 딱히 다르지 않으니까.

좋은 장비.

신분.

돈.

기술과 경험 등등…….

피땀 흘려 얻어낸 결과에 뿌듯함을 느끼고, 타인이 인정해 줬으면 하는 욕구를 느끼는 한편, 가끔씩은 공허함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간다.

암만 부와 명성, 권력을 얻는들 무슨 소용일까.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동시에 무의미한 헛고생이 될 터.

고로, 남자는 생각했다.

좋은 장비.

신분.

돈.

기술과 경험 등등…….

이에 대해 아무리 떠들어봤자, 결국 누군가에겐 족쇄 자랑으로만 들릴 것이다.

“하, 빅맥 먹고 싶다.”

이 세상은 감옥이니까.

***

가만히 거울을 들여다보는 남자가 있다.

두근-

나름 준수하다 여겨지는 외모.

거기에 걸쳐진 백색의 전신 갑주.

두근-

거울 너머의 본인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남성은 왠지 모를 어색함을 느꼈다.

아, 왠지 모를은 아닌가?

스윽.

남자는 흉갑의 좌측 상단 부분을 매만졌다.

검지가 닿는 부분은 텅 빈 채 자세히 살펴봐야만 보이는 미세한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그 있지 않은가?

스티커 같은 걸 아주 오래 붙여놨다가 떼어내면 자국이 남는 그런 거.

툭.

남자는 자국을 만지던 손을 떼어냈다.

더 이상 그는 교단 소속의 성기사가 아니다.

공식적으로 교단에서 나오며 그는 외인이 되었고, 더 이상 ‘성기사’라는 이름도 쓸 수 없게 됐다.

그 증거로 갑주에 붙어 있던 휘장 역시 반납했다.

더 이상 새벽 기도도, 식전 기도도, 자기 전에 모두 모여서 행하던 심야 기도도 의무적으로 참석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두근-

그럼에도 거울에 비친 남자는 카펫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눈을 감고 약식으로나마 기도를 올렸다.

교단에서 나온 이후에도 매일 아침마다 이어온 행위였다.

“황혼에 뜬 별이 우릴 인도할지니…….”

사실 남자는 기도를 아주 싫어했다.

교단에 있을 때도 뭐 이리 기도를 자주 하냐며 속으로 불만을 품었고, 가끔씩은 핑계를 대며 불참한 적도 있었다.

하나 그럼에도 아직까지도 아침 기도만큼은 꼭 이어가는 이유는 단 하나.

어찌 보면 모든 인간들이 신에게 비는 이유와도 같은 맥락이었다.

“당신의 종이 간곡히 비나이다, 부디 당신의 권능을 제게로부터 앗아가지 마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저를 위기 속에서 구해주소서.”

그야 불안하니까.

신성력을 메인으로 쓰는 탱커 캐릭터를 육성했는데 어느 날 하루아침에 신성력이 사라지기라도 하면, 그냥 바로 똥캐가 되는 거니까.

실제로 교단에서 떠난 뒤 신성력을 모두 잃게 되는 사례가 꽤 많이 있기도 하고.

뭐, 솔직히 말하면 기도를 하면 마음도 편해진다.

무언가에 기대고 싶은 마음은 한낱 돌덩이에게도 있을 터이니.

두근-

그렇게 잠시 묵념하듯 무릎을 꿇고 있던 남성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제발 좀 부탁드립니다. 가만 보니까 여신님도 남작님을 아끼는 거 같던데, 앞으로도 제가 옆에서 잘 보필하고 그럴 테니까요. 예?”

신에게 하는 말투라기에는 참으로 경박하기 그지없었으나, 그에게 있어선 그리 낯선 일도 아니다.

애초에 교단에서 생활할 때도 입으로는 경건하게 기도를 올려도 속으로는 이런 말투를 썼고, 그럼에도 신성력은 착실하게 쌓여갔다.

어쩌면 여신님도 이런 편한 사이를 선호하는 것일지 모른다.

……아니면 말고.

똑똑.

그렇게 슬슬 나가볼까 하려던 차,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파라브 님, 안에 계신가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익숙한 얼굴의 여성이었다.

자그마한 체구.

동글동글한 눈.

전체적으로 순한 인상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고집이 셀 것만 같고 정의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여성.

“마로네 양? 무슨 일이십니까? 집합 시간은 아직 남았을 터인데…….”

“그냥요. 큰 갑주 같은 건 혼자서 입기 불편하다고 들어서… 혹시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 싶어서 왔어요. 뭐, 벌써 혼자 다 입으신 거 같지만요!”

“아하하… 처음에는 저도 혼자 어려웠는데, 결국 시간이 지나니 요령이 붙더군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끝나셨으면 같이 가실래요? 이제 곧 집합 시간이긴 한데.”

“아, 좋습니다.”

그렇게 둘은 숙소를 떠나 집합 장소로 향했다.

이미 그 앞에는 여럿이 모여 있었고, 어딘가 심각한 표정의 부단장이 보였다.

베르실 고울랜드.

자신 못지않게 자랑스러운 족쇄를 지닌, 이 드넓은 감옥 안의 또 다른 죄수.

참고로 그녀에겐 최근에 새로운 족쇄가 하나 더 생겼다.

“처음엔 몰랐는데 요즘따라 얀델 님의 빈자리가 많이 느껴지더라고요. 고울랜드 씨도 힘드시겠어요…….”

“아하하… 그렇겠지요. 아무래도…….”

파라브는 어색하게 웃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두근-!

딱히 격한 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일어난 순간부터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 도시로 돌아온 날부터 생긴 증상.

벌써 며칠이나 지났으니 이제는 좀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이놈의 것은 도무지 익숙해질 것만 같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여전히 불안해서 미칠 것만 같고, 가끔은 숨이 쉬기 어려울 정도의 공황이 찾아온다.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를 바로 그 직감 때문에.

‘제발, 오늘 하루도 무사히 넘어가게 해주십쇼.’

돌연 증세가 심해진 그는 눈을 감고 한 번 더 이세계의 여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피슈우우우우우우웅-!

전투기가 이륙할 때 날 것만 같은 소리가 고막을 강타한다.

이에 공터에 모여 있던 클랜원들 모두가 소리가 들린 하늘을 바라보았고, 동시에 넋을 잃었다.

“어?”

로켓처럼 하늘 위로 쏘아진 무언가가, 포물선을 그리며 도시의 중심부로 나아간다.

저 하늘 높은 곳에서, 느린 듯하면서도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하늘에 선명한 궤적을 남기며 빛나는 무언가가 쏘아진다.

그리고…….

대앵! 대앵! 대앵! 대앵-!

성벽에 구비된 경종이 일제히 울리기 시작하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머지않아 도시 전체가 흔들렸다.

***

드드드드드-!

미약하게나마 진동이 느껴지는 지하 6층.

나는 레이븐을 보며 가만히 생각을 정리했다.

“포탈이 있다라…….”

바바리안은 허황된 말을 들었을 때, 절대 말도 안 된다며 상상을 제한하지 않는다.

뭐, 정작 마법사 본인은 긴가민가 하는 듯했지만.

“그… 아닐 수도 있고요……! 그냥 포탈 특유의 마력 파장이 저 너머에서 어렴풋이 느껴져서…….”

저 멀리서도 본능적으로 포탈의 존재를 느끼는 ‘인도자’가 아닐지언정, 그 누구보다도 마력에 민감한 마법사의 말이다.

그러니 저 너머엔 정말로 포탈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예전에 이에 대한 이야기를 스치듯이 들은 적도 있고.

툭, 툭…….

20년 전 원탁.

아니, 이제는 그로부터 시간이 훨씬 지났으니 이십 몇 년 전의 원탁이라 해야하겠지만 아무튼.

그곳에서 ‘카구레아스’라는 이세계 출신 악령은 말했다.

[왕궁 지하에 포탈이 있소.]

차원 광장 외에도 왕궁 지하 어딘가에는 포탈이 존재한다.

어쩌면 그게 바로 이곳일지도 모른다.

“설마 미궁과 연결된 포탈은 아니겠죠……?”

글쎄, 자세한 건 확인해봐야 알겠지만 아마 미궁과 연결된 건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야 ‘카쿠레아스’는 이렇게도 말했거든.

[나도 우연히 알게 된 것이라 잘은 알 수 없으나, 미궁과 이어진 포탈은 아닌 거 같소.]

뭐, 이것도 ‘카더라’에 가까운 말이긴 했지만.

최초의 발견자가 한 말이니 어느 정도는 신빙성이 있을 터.

“포탈 말고는 뭐 더 없나?”

“그건 자세히 좀 살펴봐야 할 거 같은데요…….”

“얼른 해봐라. 어쩌면 우리는 엄청난 발견을 한 걸지도 모르니까.”

‘엄청난 발견’이라는 워딩이 마음에 들었을까?

레이븐은 단순히 내 요구를 따라주는 게 아니라 열성적으로 포탈이 들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상자(?)를 조사했다.

한 바퀴를 쭉 둘러보고.

홈 같은 곳이 있는지 자세히 보며 또 한 바퀴를 돌고. 위에가 궁금하다며 부유 마법을 써서 위에도 올라가고.

콰아앙-!

철퇴로 벽면을 쳐보기라든가, 삽이 있으면 아래도 한번 파보라고 내게 지시까지 내리는 등등등…….

할 수 있는 걸 전부 해본 결과, 알아낼 수 있는 건 딱 하나였다.

포탈의 존재 외에는 알아낼 수 있는 게 없다는 것.

아, 이제 하나가 더 있나?

물론 이건 조사 과정에서 알게 된 건 아니긴 하지만.

“어? 얀델 씨! 저기 좀 봐 봐요! 우리가 떨어진 천장이 복원됐어요!”

우리를 이곳으로 떨어지게끔 했던, 지하 5층의 바닥 부분이 어느샌가 말끔하게 고쳐졌다.

보아하니, 그로 인해 미약하게나마 들리던 진동도 전혀 느껴지지 않게 됐고.

이렇게 되니까 마치 외부와는 완전히 단절된 공간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어 확 다급해졌다.

“순간이동은? 순간이동은 쓸 수 있는 거겠지?”

“네? 아아… 자, 잠시만요!”

그제야 레이븐도 이 공간에 갇혀 영영 빠져나가지 못할지 모른단 공포심이 생겼는지, 신속하게 마법진을 땅에 그리고 무언가 실험을 했다.

그리고…….

“저 얀델 씨……?”

“어서 말해라.”

“그… 나쁜 소식이랑 좋은 소식이 있—.”

“나쁜 소식부터.”

“여기서 다중 순간이동 마법은 쓸 수 없을 거 같아요…. 자꾸만 마력이 흩어져서…….”

미친, 그럼 진짜 여기 갇혔다고?

이게 말이나 되는가 싶지만,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럼 좋은 소식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공간 이동 계열의 마법진이 여기 바닥 아래에 매립되어 있어요. 아마 이거 때문에 자꾸 마력이 흩어지는 듯한데… 그래도 이걸 발동하면—.”

“짧게.”

“탈출은 할 수 있는데, 어디에 도착할지는 몰라요.”

…아예 영영 갇힐 걱정은 안 해도 된단 거구나.

그래도 한결 마음이 놓인다.

“군용 마법진은 이용해 봤으니 아시죠? 그거랑 거의 똑같은 방식이에요. 지정 좌표에 마법진을 만들어두고 마력만을 소비해서 간단하게 왔다 갔다 할 수 있게 해주는 건데…….”

“핵심만.”

“이 마법진 같은 경우에는 회로가 하나예요. 딱 양방향으로만 왔다 갔다가 가능하단 거죠.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거예요?”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여기서 더 알아낼 수 있는 게 없단 건 확실한가?”

“네. 연구 설비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맨몸으로는 이게 한계예요.”

“알았다. 그럼 바로 마법진을 활성화 해라.”

“네.”

내가 이런 선택을 내릴 거란 걸 이미 알고 있었는지 아무런 토도 달지 않고 바로 활성화 작업을 시작한 레이븐.

“아마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뭔가 위험한 게 있는지 확인 작업을 해보려 해서. 다 끝나면 말해드릴 테니 쉬세요.”

꽤나 시간이 걸린단 말에 나는 중심부에 위치한 정육면체 구조물을 향해 다가갔다.

까맣지도, 그렇다고 하얗지도 않은 회색 빛깔의 구조물.

겉면은 손을 가져다대면 자국이 남을 정도로 말랑하나, 철퇴로 수십 번을 후려쳐도 흠집 하나 나지 않을 정도의 내구성을 지녔다.

‘안에 정말로 포탈이 있는 거라면, 분명 들어갈 방법이 있을 텐데…….’

음, 마법 같은 걸 쓰거나 카드키를 갖다대면 입구가 생기는 그런 식이려나?

근데 마법이었으면 레이븐도 뭔가 알아챌 수 있었을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을 이어나가던 나는 시간이 아깝단 생각에 다른 화두를 떠올렸다.

‘노아르크.’

어쩌면 저 의문의 상자보다 훨씬 중요할지도 모르는 문제. 이놈들은 누구와 손을 잡았고,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 걸까.

마냥 왕가를 무너뜨리려 한다고 하기에는 조금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7구역.’

그리고 7구역은 괜찮은 걸까.

상황을 보니까 붕괴 직전에 ‘우레’가 한 번 더 터진 거 같던데…….

부디 무사했으면—.

“……응?”

사고가 거기까지 이어진 찰나, 상자(?) 앞에 서 있던 나는 어깨를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까 내가 만지고 있던 벽면 아래쪽에서부터 사람 손자국으로 보이는 게 생겼거든.

스으윽.

이내 손자국을 향해 천천히 손을 가져다대자 건너편에서 찍힌 듯한 손자국이 꿈틀거린다.

또한, 희미하게나마 목소리도 들려온다.

[꺼내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으나, 그래도 덕분에 이 상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제발.]

이 상자는 감옥이었다.

17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718화 알현 (1) 17

718화 알현 (1)

순간이동 마법진을 이용하는 것 외에는 출입 방법이 전무한 왕실 감옥의 지하 6층.

그리고…….

‘어렸지.’

그곳에 갇혀 있는 것으로 추정이 되는 ‘어린 여성’의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고 손바닥이 찍힌 위치를 다시금 살펴보니 위치가 상당히 낮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한 열 살배기 꼬맹이가 서 있는 상태에서 손을 뻗으면 닿지 않을까 하는 정도였는데…….

‘아니, 잠깐만.’

욕조에 몸을 웅크린 철학자처럼 머리에 번개가 쳤다.

‘땅의 마녀…?’

땅의 마녀.

이 세계를 멸망으로 몰아넣은 메인 빌런이자, 최후의 성채 라프도니아란 이름의 기괴한 도시가 탄생하게 된 원인.

하나 상자 안에 갇힌 의문의 소녀(?)와 마녀를 연관 짓는 게 터무니없는 비약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그야 여긴 ‘왕궁’ 지하잖아?

수많은 비밀을 지닌 왕가의 특징을 미루어 볼 때, 마녀가 아니라 마녀의 할아버지가 숨겨져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또한, 무엇보다…….

—땅의 마녀는 정말로 죽었나?

언젠가 이런 질문을 아우릴 가비스에게 던졌을 때, 그는 분명히 이렇게 대답했다.

—그녀는 살아 있네.

땅의 마녀는 살아 있다.

환각일 가능성도 있지만, 실제로 스스로를 ‘앨리스 그라운디아’라 주장하는 소녀를 몇 번이나 미궁 안에서 만난 적도 있고.

때문에 지금까진 마녀가 미궁 안에서 몸을 숨긴 채 살고 있다든가 하는 걸 생각했다.

뭐,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닐 테지만.

쾅쾅쾅!

수박만 한 주먹으로 벽을 노크하며 소통을 시도했다.

“안에 넌 누구냐? 뭐라 말 좀 해 봐라. 정말 그 안에 갇혀 있는 거냐? 응? 말해 봐라! 구해 달라면서?”

하나 어찌 된 일인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 목소리가 이쪽에서는 건너가지 않는 건가도 싶어 벽면에 손을 대 보기도 했지만 반응은 없었다.

심지어 어느샌가 안쪽에서 찍은 듯한 손자국도 흔적 없이 사라진 상태.

“얀델 씨, 누구 있어요 거기?”

“어… 그게…….”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냥 대놓고 레이븐에게 부탁했다.

“레이븐, 이 안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 볼 수 있나?”

“음… 없을걸요?”

“…시도해 보지도 않고?”

“굳이 시도할 이유가 있나요? 마력량으로 보건대, 저 안에 들어 있는 포탈의 부피는 저 정육면체 구조물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거예요.”

“…….”

“쉽게 풀어 말하면, 물리적으로 저 안에 생명체가 서 있을 수가 없단 거죠! 모서리에 쪼그려 앉아 있는 게 아니라면, 이미 진작에 포탈로 빨려 들어갔을 테니까!”

오, 그렇단 말이지.

레이븐의 논리정연한 말에 일순간 귀신에게 홀려 환청을 들은 건 아닌가도 싶었으나, 그런 의심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야 여기는 현대가 아닌 판타지 세상이니까.

마법이 있고, 초능력이 있고, 신성력이 있고. 그 능력들을 사용해 실제로 유령들을 때려잡기도 하는 등 지평좌표계 같은 말로도 논파할 수 없는 신비한 현상이 실존하는 세상.

“…그래서 어떻게 할 거예요? 이제 언제든 마법진을 발동시킬 수 있는데.”

레이븐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서 저 상자에 대해서 더 조사를 해야 할까?

“얀델 씨가 항상 우리한테 했던 말이 있죠?”

“……응?”

“우선 순위를 정하세요. 호기심이 먼저예요? 아니면 다른 게 먼저예요?”

그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호기심…….’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호기심’만은 아니다.

저 상자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나는 이유 모를 운명적 무언가를 느꼈다.

저 안에 갇혀 있는 ‘누군가’가 나를 이곳으로 부른 듯한 느낌이라 해야 하나?

“레이븐, 지하 5층 통로를 내달리다가 우연히 바닥이 무너져 아래로 떨어질 확률이 얼마나 될 거 같나?”

“지극히 낮겠죠. ‘우뢰’가 두 발 연속으로 터져서 지하 감옥이 붕괴하는 상황만 아니었다면요.”

거, 비꼬기는.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아예 눈치채지 못한 것도 아닐 거면서.

스윽.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원래 저쪽에는 우리가 떨어진 구멍이 하나 있었다.

다른 곳은 멀쩡했지만, 어째선지 딱 우리가 뛰어가던 그 부분에만 생겨난 구멍.

심지어 그 구멍도 불과 몇 분도 채 안 돼서 복원이 됐다.

그리고 이후로는 돌 부스러기가 떨어지긴커녕, 과학적인 침대처럼 흔들림 하나 느껴지지 않는 실정이고.

“얀델 씨가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진 알겠어요. 뭘 하려고 하든 별로 막고 싶은 생각도 없고요. 하지만 얼른 정해야 되지 않을까요?”

다시금 이어진 레이븐의 재촉에 나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었다.

“이거… 양방향 마법진이라고 그랬지?”

“네. 이 마법진을 타고 도착할 곳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거기에도 동일한 마법진이 존재할 거예요. 아마 원한다면 다시 돌아오는 것도 가능하겠죠.”

그래, 그렇단 말이지…….

덕분에 한결 쉽게 고민을 끝낼 수 있었다.

“마법진을 발동해라.”

이곳에 무언가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조사할 시기가 아니다.

일단 이번엔 길을 알아낸 것에 만족하고, 추후 만반의 준비를 하고 다시 찾아와 조사를 하는 게 옳다.

방금 레이븐도 말했듯.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는 법이니까.

그깟 조사보다는 이번 사태를 나와 동료들이 얼마나 무사하게 넘길 수 있는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

따라서…….

“그럼 할게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묻는 레이븐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의사를 전달.

잠시 기다리자 머지않아 마법진이 발동했다.

번뜩-!

일순간 눈앞을 가득 채우는 광채.

이내 빛이 서서히 잦아들며 시야가 회복된다.

“여긴…….”

새하얀 벽, 새하얀 천장.

주광등을 켜 둔 것처럼 밝은 조명이 내리쬐는 사방이 가로막힌 밀실.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레이븐이 한쪽 벽면을 가리킨다.

그리고…….

“왜 이쪽 벽면만 금속 재질일까요?”

“…….”

“어? 보니까 금속 사이에 미세하게 틈이 있어요. 아무래도 옆으로 열리는 구조인 거 같은데…….”

“…….”

“저기 얀델 씨? 얀델 씨? 제 말 들리세요?”

“……듣고 있다.”

잠시 머리가 멍해졌을 뿐, 감각 기관에 오류가 생긴 건 아니거든.

터벅, 터벅.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문으로 추정되는 금속 재질의 벽’ 앞으로 다가갔다.

레이븐은 혼잣말을 뱉으며 ‘그것’에 대한 이런저런 추측을 내놓고 있었다.

“마법적인 무언가가 필요한 걸까요? 하지만 그렇다 하기에 마력은 느껴지지 않는데…….”

마법적인 무언가, 마력 등.

문고리가 없는 ‘문’을 봤을 때, 마법사가 가장 먼저 떠올릴 만한 합당한 가능성.

대체로는 마법사들의 추론이 가장 정확하다.

하지만…….

“비켜 봐라.”

“…네? 아, 혹시 힘으로 열려는 거면—.”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마라.”

이내 ‘그것’ 앞에 선 나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것’이 대체 왜 이 세계에 있는지는 여전히 짚이는 게 없지만.

나는 ‘이것’의 사용법을 알고 있다.

딸깍.

고로, 독일 소시지만 한 검지를 뻗어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머지않아.

띵-!

이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소리가 함께.

드르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

레이븐은 이 ‘기계 장치’의 원리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딱 두 가지에만 신기해할 뿐이었다.

버튼을 누르면 문이 열린다는 허술한 보안.

그리고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단 점.

그것 외에는 딱히 별 반응이 없었다.

“아, 이제 보니 마력 승강기랑 비슷한 장치였나 보네요. 저희 마탑에도 비슷한 게 있는데.”

그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확신했다.

이 ‘기계장치’는 마력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뭐, 레이븐은 여전히 느껴지지 않는 미세 회로가 존재한다 믿는 듯하지만…….

‘그럴 리가.’

마탑이 아니더라도 마력 승강기는 몇 번인가 타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탄 이것과는 전혀 달랐다.

철창에 가까울 만큼 안전성도 떨어지며, 달려 있는 도르래를 마력으로 움직이는 형식이었다.

하지만 이건 어떤가.

“……얀델 씨?”

전력인지, 마력인진 겉으로 봐서 알 수 없지만.

아니, 겉으로 보면 알 수 있긴 한가?

‘씨발, 이게 왜 여기에 있냐고…….’

딱 봐도 디자인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하룻밤에 수백만 원을 하는 호텔에 설치되어 있어도 아무런 위화감이 들지 않을 만큼 고풍스러우며…….

드르륵.

몹시도 현대적이다.

천장에 달린 전등도, 문 옆에 달린 버튼도, 벽면에 위치한 거울까지도.

거울 너머에는 바바리안과 마법사가 풀 장비를 입은 채 서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 엘리베이터에 들어와 있는 순간만큼은 이곳이 현대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을 정도.

“근데 이런 승강기는 어떻게 해야 작동이 될까요? 보통은 음성을 전달해서 관리인에게 작동을 부탁하는 식인데…….”

의문을 표하는 레이븐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자연스럽게 버튼을 눌렀다.

그야 열림 닫힘 외에는 버튼이 하나였거든.

“어! 우, 움직인다!”

이내 층수가 눌리자 작동을 시작한 엘리베이터.

느낌상 아래가 아니라 위로 올라가는 거 같은데…….

“…야, 얀델 씨,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자꾸 그러고 있으니까 무섭잖아요.”

“…….”

“장치가 멈추고 문이 열리면 뭐가 나올지도 모르는데…….”

확실히… 그건 나도 두렵긴 하다.

대체 이 문이 열리면 그 너머에 뭐가 있을까?

현재의 상태로는 전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후우우우웅…….

그래서 그냥 가만히 기다렸다.

언제든 무기를 휘두를 수 있게 준비는 했으나, 과하게 긴장하지는 않은 채.

1초, 2초, 3초…….

조용히 시간을 세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렇게.

‘50초.’

약 50초가 지나간 때.

후웅…….

올라가던 속도가 늦춰지는 느낌이 들며 부드럽게 움직임이 정지하더니 천천히 열리는 문틈 사이로 그토록 궁금했던 문 너머의 모습이 펼쳐진다.

일단.

호텔 로비 같은 공간이었다.

중앙에 위치한 샹들리에와 소형 분수대.

반들거리는 대리석 바닥.

그리고…….

터벅.

그 앞에 서 있는 한 명의 기사.

“…….”

기사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방문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리를 지키는 왕실 근위병이 근무를 서는 듯한 자세로 정면에 위치한 채 무엇도 묻지 않았다.

‘……무슨 시작부터 중간 보스냐.’

게임으로 치자면 던전에 들어오자마자 중간 보스가 나온 느낌이었다.

그야 한눈에 보자마자 알았거든.

만만치 않은 놈이라는 걸.

‘뭐, 애초에 이런 공간을 지키고 있는 놈이면 말 다 했지.’

물론 그렇다고 위축이 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내가 누군가?

‘오러’를 쓰는 놈에게라면 절대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초강력 바바리안.

그게 바로 나다.

그나마 유일한 문제는 뒤에 있는 레이븐을 잘 지킬 수 있느냐 이건데…….

스윽.

그런 생각을 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레이븐을 좀 더 지키기 수월한 공간을 점유하려던 그때.

기사가 부드럽게 검을 뽑아 내며 나를 겨눈다.

그리고…….

‘…어?’

그게 상황의 전부였다.

서걱-!

정신을 차렸을 땐, 뺨에 가느다란 실선이 그어지고.

주르륵.

뒤늦게 아릿한 고통과 함께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베였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물론 이 기사놈이 엄청난 쾌검의 고수라서, 내가 보지도 못하는 사이에 나를 베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니었다.

또한 저 기사놈과 나 사이에 이십 보가 넘는 거리가 존재했다는 것도 이 세상에선 절대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재밌군.”

그딴 일격이 내 물리 내성을 뚫고 피를 보게 만들었다면 전혀 다른 얘기로 변한다.

심지어 방금, 이 새끼는 오러를 쓰지도 않았다.

‘오러가 아니라면…….’

베인 상처 따윈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최대한 차분히 놈을 노려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녀석이 들고 있는 검을 보았다.

‘역시 검이려나……?’

조금 전 일격의 비밀은 저 검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아, 물론 검 자체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내 머릿속 데이터베이스를 뒤져봐도 저딴 넘버스 아이템은 존재치 않는다.

하나,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떻게든 검을 빼앗거나, 활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식으로 전투를 유도해야—.’

이후 어떻게 싸울 것인지 머릿속으로 가닥을 잡아 가던 그때.

철컥.

방금 것은 기선 제압을 위함이었단 것처럼 기사가 냅다 검을 집어넣고는 등을 돌린다.

그리고…….

“따라와라.”

터벅터벅 소리를 내며 등을 돌려 대리석 바닥을 걸어가기 시작하는 놈.

날 대신해서 뒤에 있던 레이븐이 고개만 빼꼼 내민 채 조심스레 물었다.

“어, 어디로 가는 건데요……?”

잔뜩 겁에 질린 초식동물과도 같은 목소리.

이에 기사는 무방비하게 등을 보인 채 걸어가며 질문에 답했다.

“알현실.”

“…예?”

조금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개벽왕께서 그대들의 알현을 허하셨다.”

……설마 왕을 만날 기회가 이렇게 생길 줄이야.

53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719화 알현 (2) 53

719화 알현 (2)

이 세상 사람들은 바바리안을 대할 때 흔히들 벽에 대고 말하는 거 같단 표현을 쓴다.

차분히 논리정연하게 설명을 해 줘도 제대로 이해를 못 하기에 그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인데…….

내가 보기에 그 표현은 바바리안보다는 이 기사 놈에게 더 어울렸다.

진짜 벽에 대고 말하는 기분이거든.

“기사, 넌 이름이 뭐지? 너 같은 인물에 대해서는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

“따라가면 진짜 개벽왕을 만날 수 있는 건가?”

“…….”

“소문을 들어 보면 아파서 드러누웠다던데? 사실은 건강한 상태인가 보군?”

“…….”

쩝, 기사라고 무게 잡기는.

아까 레이븐이 어디 가냐고 물어봤을 때는 착실히 대답을 해 주더라니.

혹시 여미새인가 싶어 레이븐에게 말을 걸어 보라고 시키기도 했지만, 애석하게도 결괏값은 동일했다.

“저… 외람된 말씀이지만, 국왕 폐하께서는 정말로 옥체가 강녕하신지요…? 아! 그… 안 좋았으면 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죄송합니다.”

“…….”

“거봐요. 아, 안 되잖아요…. 이제 시키지 마요.”

그렇게 이후로도 기사는 말 한마디 없이 먼저 앞장서 걸었고, 우리도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물론 말만 없었을 뿐 머리는 시끄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창문 하나 나 있지 않은 걸 보면 일단 지하인 거 같고.’

‘알현실’이라고 했으니, 장소는 흔히 말하는 12궁 중 왕이 기거한다고 알려진 ‘불멸궁’일 가능성이 높다.

도시의 중심 카르논.

카르논의 중심 왕성.

그리고 왕성에 존재하는 12개의 궁 중에서도 가장 가운데에 위치한 바로 그 불멸궁.

아, 지금은 개벽궁이라 부른댔나?

‘지하에 이런 장소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기사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주변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길을 외우고, 만에 하나를 대비해 탈출 루트를 탐색하려는 의도였으나, 딱히 소득은 없었다.

이렇다 할 게 아무것도 없었거든.

터벅, 터벅.

그냥 아무것도 없는 통로를 계속해서 걷는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이 몇 가지 있기는 했다.

‘나선 구조네.’

처음에는 몰랐지만, 우리는 직진으로 걷고 있지 않다. 통로는 미세하게 휘어져 있으며 결과적으로 원을 그리고 있다.

쉽게 말해, 나선 계단을 올라가는 식인 건데….

“이 정도 거리면 그냥 승강기를 하나 두는 게 좋지 않나? 아까 보니까 승강기도 좋은 걸 쓰던데.”

“…….”

두 번째로, 이곳에는 승강기 따위가 없다.

쉽게 말해 아까 우리가 나온 그 엘리베이터가 있는 장소까지 가기 위해선 이 기다란 통로를 무작정 걷는 것 외에 방법이 없는 셈.

하면 왜 이렇게 불편하게 설계를 했을까.

왕가에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닐진대.

아니, 오히려 승강기 하나를 더 놓는 게 훨씬 더 경제적으로 이득이 컸을 텐데.

잠시 고민을 해 보니 답이 나왔다.

‘……방어 목적이구나.’

만약 외부의 누군가가 침입했다고 가정했을 때, 이 길다란 통로는 그 어떤 함정이나 장애물보다 확실하게 시간을 끌어 줄 것이다.

때론 원시적인 방법이 가장 안전하기도 하니까.

“…….”

그렇게 무려 세 시간이 넘게 어떠한 대화도 없이 통로를 걷다 보니 길고 길었던 나선 통로가 끝나며 커다란 공동 하나가 나타났다.

“여긴….”

레이븐이 넋을 잃고 고개를 치켜든다.

공간 자체는 특이할 게 없었으나, 그 중심부에 놓인 구조물 하나가 우리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시험관.

지하 1층 ‘판텔리온 연구소’에서 보았던 시험관과 매우 유사한 형태의 투명한 시험관이 공동 중심부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연구소의 것과의 차이점은 딱 한 가지였다.

어지간한 계층군주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압도적인 크기.

그 외에는 대체로 연구소에서 본 것과 비슷했다.

수백 개의 배선들이 시험관 하단부와 연결되어 있고, 시험관 내부에 의문의 액체가 가득 차 있는 것까지.

“따라와라.”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자 우리를 안내하던 기사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말은 저리했지만, 결국 쓸데없는 곳에 관심을 갖지 말란 의미를 함유한다.

따라서 이게 뭐냐는 무의미한 질문은 스킵.

띵-!

이내 기사를 따라가자 공동 반대편 벽에 위치한 엘리베이터 한 대가 나타났고, 우리는 그걸 타고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띵-!

다시금 소리가 나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나는 비로소 도착했음을 깨달았다.

“…미천한 종이 새 시대의 주인을 뵙나이다.”

수천 번의 트라이 끝에도 발길 한번 닿을 수 없었던 바로 그 ‘알현실’에.

***

단차가 있는 부분에 위치한 옥좌.

그 옥좌를 보고 있자니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 든다.

“…….”

“…….”

작위 수여식부터 승작식 등의 수많은 공식 행사에 참여하면서도 늘 빈자리만 보아 왔던 옥좌.

왕국의 이인자라 불리며 왕을 대리하며 국정을 보던 그 재상조차 감히 앉을 엄두도 내지 못했던 바로 그 옥좌.

그 옥좌에 처음으로 누군가가 앉아 있다.

그래서일까?

두근-!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산전수전을 다 겪은 전사의 심장이 긴장감으로 꽉 조여 온다.

뭐, 옆에 있던 레이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구, 구, 구, 구, 구….”

“…….”

“국왕 폐하를 뵙나이다…! 미천한 종이… 아, 아니 미, 미, 미천한 종이 국왕 폐하를 뵙나이다…!”

레이븐은 옥좌에 ‘누군가’ 앉아 있다는 것을 확인한 즉시 카펫이 깔린 바닥에 납짝 엎드렸다.

비록 배는 땅을 향했지만, 강아지가 배를 보이며 뒤돌아 누은 것과 다를 바가 없는.

나는 당신에게 반항할 의사가 없으며 복종합니다.

이 짧은 문장을 그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표현하는 몸짓.

“야, 얀델 씨…! 뭐 해요…!”

가만히 있는 날 보며 레이븐이 바닥에 이마를 붙인 채 작은 외침으로 나를 다그친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내 ‘무례’를 깨달았다.

그야 그동안은 바바리안으로 스타팅을 한 탓에 겪을 일이 없었지만…….

스윽.

바바리안이 귀족이고 뭐고 반말을 뱉고 예식을 지키지 않아도 용서받는 이유는 딱 하나다.

예전에 조상님이 아주 큰 공을 세워서 허락을 받아 냈거든.

바로 옥좌에 앉은 왕한테.

“어, 어서요!”

당연한 말이지만, 왕에게 반말을 쓰면 바바리안도 뒈진다.

따라서…….

“……미천한 종이 국왕 폐하를 뵙나이다.”

그동안 해 보진 않았지만 눈으로는 수 없이 보았던 예식을 직접 취하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

그야 나는 작위 귀족이니까.

레이븐처럼 납작 엎드릴 필요까지는 없는 것인데….

덕분에 시야각이 높은 만큼 곁눈질로나마 알현실 내부 구조를 탐색할 수 있었다.

옥좌 주변에는 두꺼운 실크 천이 내려와 있어 왕의 얼굴을 가리고 있다.

암살이나 외부 관찰을 우려했는지 창문은 존재치 않으며, 우리가 타고 올라온 엘리베이터를 제외하면 출입구는 단 한 개.

참고로 그 앞은 두 명의 기사가 기립해 있다.

이곳까지 안내한 무명의 기사와 달리 갑옷에 문양을 통해 어느 소속인지 분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수호기사단.’

오직 불멸궁 내부에서만 볼 수 있는 개개인이 최소 3등급 몬스터 이상의 전투력을 지닌 최정예 무력 집단.

꽉 찬 옥좌가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그럴까?

수호기사단을 보고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그래, 진짜 불멸궁에 온 거구나….’

이를 깨달은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단 하나였다.

무력을 사용한 탈출 및 모든 무력 충돌 계획의 우선 순위를 가장 아래로 내린다.

정말 이곳이 ‘불멸궁’ 내부인 거라면 ‘무력’을 사용하는 건 정말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아껴야 한다.

그야 [던전 앤 스톤]을 플레이 할 때 불멸궁에 들어온 적이 꽤 있거든.

그 경험의 99%가 바로 반역 루트를 탈 때였는데….

‘그래도 결국 왕 얼굴 한번 못 봤었지….’

수호기사단의 미친 스펙은 둘째 치고, 이 불멸궁에는 외부의 적을 상대하기 위한 온갖 기믹들이 존재하며, 그게 본격적으로 발동되면 그냥 게임 오버라 보면 된다.

인게임 내에서 지금보다 더 좋은 스펙, 수많은 동료들을 이끌고서도 전멸을 면치 못한 게 바로 여기 불멸궁이었으니까.

어느 면에서는 10계층보다도 난이도가 높은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무슨 수를 써서도 클리어 하지 못했단 점에서 특히.

물론 코앞에 왕이 있는 만큼 왕을 인질로 잡으면 어떻게든 활로가 열릴지도 모르지만…….

전대 부족장이 남긴 한마디가 뇌리를 스친다.

[이 세상에 그자를 두려워하지 않을 존재가 어디 있을까. 만약 네가 그자를 만나는 날이 온다면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역시 아무래도 왕을 인질로 잡는 것도 쉽진 않을 것 같다. 그도 그럴 게, 우리를 안내한 기사도 어느샌가 왕의 앞에 호위를 하듯 딱 서 있는 상태이지 않—.

“고하라.”

그때 긴 정적을 끝내며 왕의 음성이 들려왔다.

조금 의외인 목소리였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느 나이대였는지, 여자였는지 남자였는지, 내 귀에 파고들었던 그 목소리조차도….]

분명 전대 부족장은 그렇게 말했을 터인데.

“그대들이 어찌하여 금지된 비처에 들어갈 수 있던 것인지.”

들려온 것은 명명백백한 ‘젊은 남성’의 목소리였다.

늙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으며, 아프거나 힘이 없는 울림도 아니다.

“낱낱이 고하라, 나의 종들이여.”

머릿속에 복종 외에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게끔 하는 지배자의 목소리.

이에 레이븐이 빠르게 답을 올렸다.

“저희는 그곳이 금지된 비처인지도 몰랐으며, 고의적인 의도를 갖고 들어선 것도 아니옵니다. 저희가 그곳에 들어서게 된 경위는…….”

레이븐의 설명은 길고 장황했으나 포인트 하나가 정확히 잡혀 있었다.

황도가 공격받음을 인지한 즉시, 무도한 노아르크 놈들을 잡기 위해 지하 5층으로 향한 것. 그들이 도망쳤고, 붕괴에 휩쓸려 ‘비처’에 들어서게 된 것.

그 모든 설명에는 우리가 얼마나 신하의 도리를 다하려 했는지에 대해 과할 정도로 많은 설명이 들어가 있었다.

뭐, 내가 보기엔 무의미한 짓이었지만.

“…….”

“…….”

레이븐의 설명이 끝난 뒤에 생겨난 불편한 정적.

개벽왕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진 것은 약간의 시간의 흐른 뒤였다.

“나의 종 비요른 얀델 준남작이여.”

……준남작이 아니라 남작이지만, 굳이 정정하진 않으며 잠자코 들었다.

그야 나도 그 정도 분위기 파악은 할 줄 아는 바바리안—.

“그대의 왕으로서 명하겠다.”

……응?

“옆에 있는 계집을 죽여라.”

……뭐라고?

***

갑자기 내려온 왕의 명령.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그 명령에 따를 일은 없었다.

설령 저자가 내가 가진 모든 직위, 이 세계에서 이룬 것,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동료들을 전부 앗아 갈 능력이 충분한 존재라는 걸 알고 있지만.

“…….”

그게 될 리가 있나.

그저 어쩔 줄 모르며 주변을 살폈다.

한데 왕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을까?

“계집을 끌어내라.”

그 한마디가 떨어짐과 동시에 출입문에 있던 수호기사단원들이 우리에게로 다가온다.

이에 내가 반사적으로 일어서자 왕 앞에 서 있던 기사가 짧게 경고했다.

“가만있어라. 폐하께선 단지 그대와의 독대를 바라실 뿐이니.”

그 말에 레이븐을 힐끗하자, 레이븐이 미친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는 괜찮으니 괜히 사고 치지 말라는 절실한 애원이 담긴 의사 표현.

“…….”

결국 어정쩡한 자세로 가만히 있자 기사단원 두 명이 레이븐을 이끌고 알현실 밖으로 나섰고, 그로써 마침내 왕과의 독대 자리가 만들어졌다.

아, 물론 저 호위 기사 놈이 있긴 하지만…….

어차피 벽 같은 놈이니까.

저 정도면 그냥 독대 자리라고 여겨도 무방할 터.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왕은 어떠한 말도 안 하고 천 너머에서 나를 쳐다볼 뿐이었으나, 뭔가 좆된 거 같다는 감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하, 그냥 명령에 따르는 척해야 했나? 지금 생각해 보니 왠지 테스트를 해 본 거 같은데.’

그렇게 뒤늦은 후회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그때.

“하하, 너무 겁먹지 마.”

왕의 말이 이어지며 나는 머리가 멍해졌다.

“넌 그녀의 선택을 받았잖아? 널 죽이면 그녀가 화낼 게 빤한데 내가 어떻게 그러겠어.”

아까와 다르게 훨씬 편하게 들리는 말투도.

‘그녀’나 ‘선택’이라는 의미심장한 워딩도.

아무래도 좋았다.

“얀델의 아들 비요른.”

‘언어’ 자체가 문제였다.

“만난 김에 그냥 툭 까놓고 얘기나 해 보자고.”

개벽왕은 한국말을 하고 있었다.

21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720화 알현 (3) 21

720화 알현 (3)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다.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표정 관리를 할 생각도 못한 채 멍하니 굳었고, 그다음에는 생각했다.

‘개벽왕이 어떻게 한국말을 할 줄 아는 거지?’

열심히 그 의문의 해답을 궁리했으나, 너무 놀라서 그런지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았다.

천장과 벽에서 수십 명의 닌자가 튀어나왔다고 한들 이 정도는 아니었을 듯한데…….

‘정신 차리자.’

어떻게든 집중력을 끌어올리며 현 상황에 대해 집중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가능성은 이것이었다.

개벽왕은 한국인 출신 악령이다.

물론 이는 가장 먼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을 뿐, 이어진 개벽왕의 말에 의해 금방 파훼가 됐다.

“뭐 그리 굳었어?”

다시 들어보니 한국인이라고 하기에는 발음이 굉장히 어눌하다.

마치 화장실에서 페이퍼 타올을 찾는 백인 남성이 할 것만 같은 발음이랄까.

덕분에 그나마 그럴듯한 두 번째 가설이 완성됐다.

개벽왕은 한국인도, 악령도 아니다.

단지 한국말을 배워서 구사할 수 있을 뿐이다.

게임을 하다가 이 세계에 끌려온 어느 ‘누군가’에게.

이 가설이 완성된 순간, ‘엘리베이터’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아니, 정확히는…….

“흐음, 이 정도는 예상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것이 어떻게 이 세상에 만들어지게 됐는지를 이해했달까.

개벽왕은 어눌한 한국 발음을 버리고 본토어로 말했다.

“보아하니 생각보다 순진한 모양이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데. 왜 너희들도 비약적인 기술의 발전을 이룬 기업을 보고 외계인을 고문했단 표현을 하듯이.”

“…….”

“우리도 그러했을 뿐인데.”

어쩌면 저 말대로 내가 순진했던 걸지도 모른다.

야만적인 세계라고 해서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지능이 낮은 것도 아닐진대.

단지 먼 차원에서 온 ‘악령’이라고 해서 마녀를 불태우듯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처형했을 리가 없다.

그건 결코 합리적이지 않으니까.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았겠지.’

악령들의 커뮤니티 ‘고스트 버스터즈’.

여기에 소속된 악령만이 악령이 아니다.

내가 받은 편지의 첫 문장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편지는 플레이어로 추정되는 탐험가에게 무작위로 보내지는 편지다.]

이들은 훌륭하게 이 세상에서 살아남고, 나름대로 어떠한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기에 초대장을 받아 커뮤니티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소수’다.

빙산의 일각이란 말도 있듯.

이 세상엔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의 현대인들이 끌려왔을 것이며, 분명 전문적인 지식을 지닌 이들도 있었을 터.

그중엔 전력, 혹은 증기를 이용한 기계 장치를 만들 줄 아는 자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들 입장에선 정체가 탄로날 위험에 그런 물건을 막 만들어 세상에 내놓을 수 없겠지만…….

‘다르지.’

비밀치안청 등을 이용해 그 악령들을 수십 년 동안 수없이 잡았을 왕가는 대체 얼마나 많은 지식들을 습득할 수 있었으며.

또 얼마나 그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었을까.

그 결실을, 나는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딸깍.

이내 옥좌에 앉아있던 개벽왕이 무언가를 쥐고서 버튼을 누른 순간, 귀에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비록 반주는 내가 알던 그것과는 미묘하게 차이가 났지만, 무슨 노래인지 알아 듣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모든 게 순리대로 흘러가길 바라던, 유명한 영국 밴드의 노래.

“……!”

그 노래가 알현실 구석에 있던 ‘스피커’를 통해 출력되는 걸 인지한 즉시 나는 그대로 굳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보며.

“왜 그런 표정을 짓나?”

개벽왕은 조용하게 물었다.

“무슨 마법이라도 본 사람처럼.”

니미럴.

***

뒤통수가 얼얼하다.

그런 표현으로는 현재 내 상태를 표현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바람을 피운 영상 증거물을 보고 있는 기분이랄까.

절대 그럴 리 없다던 믿음이 배신당했다.

‘……아니, 판타지에서 과학이 나오는 게 어딨냐고.’

심지어 그것도 내가 십 년 동안 즐겨온 [던전 앤 스톤]이 배경인 세상에서.

“표정을 보니 아는 음악인가 보군?”

“…….”

“이 노래를 부르고 녹음한 건 미국인이었지. 그래서 원곡과는 느낌이 다르겠지만……. 뭐 어쩌겠어? 그래도 들은 사람들은 원곡 느낌을 잘 살렸다고 하니 그러려니 해야지.”

잠시 침묵을 지키던 나는 아까 개벽왕이 말했듯, 그냥 툭 까놓고 물었다.

“……그 미국인은 어떻게 됐지?”

어차피 이놈 앞에서 야만인인 척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그야 이놈은 내가 ‘악령’인 걸 넘어 ‘한국인’이라는 것까지도 파악을 마친 상태였으니까.

“그사이 말이 짧아졌군.”

“툭 까놓고 얘기하잔 건 그쪽 아니었나?”

“하하핫! 그러니 정말 뇌까지 바바리안이 된 거 같군?”

“대답해라…….”

“흐음… 글쎄, 어떻게 됐더라…….”

이내 녀석이 말꼬리를 흐리자 앞에 있던 호위 기사가 대신 답변을 내놓았다.

“차원기술부로부터 대상에게 남은 유효 정보가 없단 보고가 올라온 즉시 폐기 처리했습니다.”

“아, 그랬다는군.”

그 태연한 중얼거림을 들으며 나는 새삼 깨달았다.

다른 매체, 소설과 만화를 포함한 모든 미디어.

그 속에서는 이 세계에 소환된 현대인이 중심이며 원주민들은 현대인을 빛내는 단역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달랐다.

이 세계의 주인공은 바로 저놈들이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그저 아주 작은 세상의 일부일 뿐이며, 하나의 ‘이벤트’에 불과하다.

그걸 오늘 뼈저리게 깨닫는다.

“…설마 악령을 척살하는 것도 그래서였나? 붙잡아서 기술을 빼앗으려고?”

내가 이를 악물고 묻자, 실크 너머에서 비웃는 듯한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답변이 돌아왔다.

“그럴 리가. 악령이 이 세계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란 건 불변의 진실. 단지, 우리는 그 과정에서 부수적인 이득을 취했을 뿐이지.”

“…….”

“아, 물론 호랑이를 등에 업은 여우가 잔뜩 화가 난 것도 이유이긴 할 테지. ‘악령’이란 존재에 대해.”

……호랑이를 등에 업은 여우?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모를 말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린 차였다.

“오호라, 아직 그 이야기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것이로군?”

“…….”

“그렇다면 내가 이 자리에서 말해줄 수는 없다. 자고로, 이야기란 본인에게 들었을 때 가장 즐거운 법이니.”

그래, 이건 말할 생각이 없단 거구나.

뭐, 정황으로 추측해보자면 여우가 ‘재상’을 뜻하는 거 같긴 한데.

일단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나는 ‘여우’에 대해 묻는 대신 다른 화제를 꺼냈다.

“아까 말한 ‘그녀’가 ‘마녀’를 말하는 건가?”

“정답.”

“선택을 받았다는 건 무슨 뜻이지?”

“땡.”

“……?”

“답해 줄 이유가 없으니 오답이야, 야만인.”

“솔직히 까놓고 말하자고 한 건 그쪽이었을 텐데?”

“이 정도면 까놓고 얘기하는 중인 거 아닌가? 나, 이래 봬도 한 나라의 왕인데.”

“…….”

개벽왕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설마 왕이라는 자가 이렇게까지 경박할 줄은 몰랐다. 음, 그래도 무게 잡으면서 고압적이게 말하는 것보다는 낫나?

‘아니, 이백호처럼 그냥 상대를 방심시키는 걸지도.’

아무튼, 말투야 어쨌든 명색이 ‘왕’이다.

손짓 한 번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무로 돌려 버릴 수 있는 힘을 지닌 존재.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위기란, 때론 기회가 되기도 한다는 걸.

‘어쩌면…….’

오늘 나는 그동안 품어왔던 이 세계의 비밀에 대해 한 발 크게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넌 그녀의 선택을 받았잖아? 널 죽이면 그녀가 화낼 게 뻔한데 내가 어떻게 그러겠어.]

아까 했던 이 말이 사실이라면, 내 안전 하나만큼은 보장된 셈이기도 하고.

따라서, 조금 더 적극적인 스탠스를 취하기로 했다.

“왜 그동안은 병세를 핑계로 숨어 지낸 거지?”

일단 이 기회를 이용해 계속해서 질문을 던져보자.

답을 얻지 못해도 손해 볼 건 없고, 하나라도 건진다면 이득이니까.

“응? 딱히 숨은 건 아닌데? 그냥 잠을 많이 자는 편이라서 나가지 못했을 뿐.”

“잠……?”

“그런 게 있어.”

개벽왕은 비밀이라기보다 답하기 귀찮다는 듯 답했고, 나도 깊이 캐묻진 않았다.

그래도 하나 짚이는 게 있었거든.

아까 이놈은 날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나의 종 비요른 얀델 준남작이여.]

남작이 아닌 준남작.

만약 이게 단순히 기억 문제라거나 말실수가 아니라면 어떨까.

만약 정말로 ‘잠’을 자느라 과거의 정보밖에 알지 못했던 거라면, 그건 비약일까?

‘……깨 있는데 어떠한 제약이 있는 걸지도.’

아직 추측에 불과할지라도, 그 대상이 대상인 만큼 소중하고 귀중한 정보였다.

“나를 이곳에 부른 건 어째서지?”

“이상한 질문이네. 보통 뒷문으로 들어온 도둑놈이 그런 말도 하나?”

“하지만 결국 알현실로 부른 건 그쪽이었을 텐데.”

“아? 그것도 그러네? 근데 솔직히 좀 궁금하잖아. 어쩌다 너희가 거기에서 나오게 됐는지.”

“그것 말고는 어떤 의도도 없나?”

“확인해보고 싶던 게 하나 있었는데, 그건 이미 끝났어.”

“…….”

“그럼 이제 남은 용무가 아예 없다는 뜻인가?”

“아니, 그렇지는 않지.”

“…그럼 말해봐라.”

“그건 조금 이따가. 원래 음식을 먹을 때도 가장 맛있는 부분은 나중에 먹는 법이잖아?”

글쎄, 딴 건 몰라도 저 말엔 동의하기 어렵다.

나는 무조건 맛있는 걸 먼저 먹는 편이거든.

나중에도 그 맛있는 게 남아 있을 거란 보장이 없으니까.

아무튼, 이건 됐고.

“지금 벌어진 전쟁의 배후가 너냐?”

“아니, 나는 그냥 피해자. 전혀 몰랐다고는 하지 않겠지만, 내가 주도한 건 절대 아니야. 답변이 됐어?”

“그럼 배후가 누구지?”

“이건 맛있는 부분이랑도 연관이 있으니까 나중에.”

내 질문 폭격을 빠르게 답해주던 개벽왕이 돌연 내 말을 끊으며 단호히 말했다.

“그보다 질문이 너무 많은 거 아닌가?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대답해 줄 거니까 그런 줄 알아. 아, 물론 너무 양심을 팔아먹은 질문은 대답 안 할 거고.”

그래, 마지막 질문이라…….

뒤에 말을 들어보면 진짜 중요한 정보들은 물어도 절대 답을 해주지 않을 거 같다.

하면, 마지막 질문으로는 뭐가 좋을까.

그나마 선을 넘지 않는 것들 중에, 과연 어떤 질문이 가장 합리적일까.

툭, 툭…….

짧은 고민을 끝낸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해 주는 이유가 뭐지?”

마녀라든가, 전쟁이라든가.

어쩌면 그런 먼 나라 얘기보다 훨씬 더 지금 당장 가치가 있을지 모를 그 질문.

“아, 그거?”

그 질문을 받은 개벽왕은 실크 너머에서 답했다.

무척이나 천연덕스러운 목소리로.

“아무래도 협박보다는 회유가 낫잖아?”

예상은 했지만 이 왕이란 새끼도 나사가 단단히 빠진 놈이었다.

“그래서 한번 회유부터 해보려고.”

“…….”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네가 아는 모든 사람을 폐기 처리하겠다고 말하기 전에.”

웃으며 말한다고 협박이 아닌 건 아닌데 말이지.

20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721화 알현 (4) 20

721화 알현 (4)

개벽왕과 대화를 나눈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왠지 자꾸만 익숙한 느낌이 든다.

대체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금방 답이 나왔다.

‘뭔가 말하는 게 이백호랑 닮았네.’

딱 말로 정리하기는 어렵지만 둘은 닮았다.

싸가지 없고 경박한 말투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듯한 그 특유의 눈빛이.

어쩌면 ‘목표’가 뚜렷한 사람은 이런 눈빛을 하는 걸지도 몰랐다.

지금 내가 개벽왕을 보며 짓고 있을 눈빛이 그렇듯.

“그 불손한 눈빛을, 대답이라 해석하면 되나?”

그 말에 나는 억지로 고개를 내리며 눈을 깔았다.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

이 진리는 여전히 내 가슴속에 새겨져 있으나, 애석하게도 이번엔 이백호 때처럼 강하게 나갈 수는 없었다.

그야 난 이 새끼의 ‘목적’이 뭔지 모르니까.

기싸움도 서로의 패가 뭔지 알고 난 다음에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 그러니까…….

“…내게 뭘 원하는 거냐?”

일단 들어보자.

이 녀석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갖고 있는 패는 뭔지 조금이라도 알 수 있게끔.

“재미없네.”

한데 내심 내가 반항적으로 나오는 상황을 기대하고 있었을까?

한 발 물러서며 꼬리를 내리는 모습을 보여 주자 비단 너머의 녀석이 옥좌를 툭툭 두드린다.

“뭐, 좋아. 나도 똑똑한 놈은 싫어하지 않으니까.”

암만 봐도 저 말투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이건 한 나라의 왕이라기보다는 그냥 뒷골목 양아치 같지 않은가.

물론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긴 하지만.

“그래서 뭘 하면 되는 거지? 내가 ‘심연의 문’을 열지 않으면 되는 거냐?”

이내 나는 툭 던지듯이 물었다.

그야 나도 ‘왕’의 목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짚이는 게 있었으니까.

살짝 떠보기 위함이었는데…….

“뭐? 푸하핫! 푸하하하하하!”

뭘까 이건.

면전에 대고 이렇게 박장대소하는 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

정색한 채 실크 너머를 노려보자 개벽왕이 진심이 조금도 담기지 않은 사과의 말을 던져온다.

“아, 미안 미안.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게 너무 웃겨서. 근데 생각해 보니 너는 항상 이런 식이었을 거야.”

“…….”

“아무것도 모르니까. 살아남기 위해 그런 식으로 눈알 굴리면서 한 걸음씩 내디뎠겠지. 때로는 실수를 해서 무언가를 잃은 적도 있을 테고. 그러다가 어느새 모르는 것에 대해 강박증이 생기도 했을 거야.”

어느 정도는 수긍이 되는 얘기였다.

다 아는 듯이 말하는 건 짜증 났지만.

아, 개벽왕 이놈도 이런 기분이었으려나?

음… 방금 웃은 걸 보면 짜증난 거 같진 않던데.

‘됐고, 본론만.’

그 말을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뱉고 싶었지만, 일단 겨우겨우 참아냈다.

보아하니 이 녀석은 말이 참 많은 편이었거든.

아니면 오늘만 유독 텐션이 높은 거든가.

어느 쪽이든 말을 끊어서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없었다.

“비요른 얀델. 너는 아무것도 몰라. 이 세상이 어떤 식으로 살아남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그런 세상을 위해서 얼마나 큰 희생을 하고 있는지.”

그저 말하는 걸 들으면서 머릿속으로 개벽왕에 대한 캐릭터 정보창을 하나씩 만들어 갈 뿐이었다.

‘오케이, 인정 욕구 +7.’

처음엔 +6을 주려고 했다가, 처음 보는 사람한테 저런 말을 하는 걸 감안하고서 +7을 줬다.

그리고…….

“…희생이란 게 정확히 뭘 뜻하는 거지?”

이쯤에서 한 번 맞장구 치듯 되물으며 대화를 경청하고 있단 걸 어필.

솔직히 그 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참지 못하고 물은 것도 있지만, 애석하게도 녀석은 단칼에 쳐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더라도, 먹지 못할 부분은 있는 법이지.”

그래… 신비 주의라 이거지?

나는 더 캐묻지 않고서 조용히 캐릭터 정보창에 스탯을 하나 더 삽입했다.

[개벽왕]

인정 욕구 +7, 중2병 +4

음, 왠지 벌써 똥정수의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듯한데, 분명 기분 탓일 거다.

그야 최종보스의 정수가 똥맛일 리 없잖아?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쁜 눈빛이로군.”

거, 갑자기 목소리 깔기는.

아무튼, 이러면 눈치도 +3 정도는 넣어줘야 할 거 같은데…….

“난 아무 생각도 안 했다!”

개벽왕이 가진 의혹을 빠르게 해명하면서도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저 녀석이 내가 쓰고 있는 정보창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사형이겠지.’

암, 더 볼 것도 없이 사형이다.

보통 쿨병에 걸린 애들이 이런 거에는 바로 발작을 하는 법이니.

[개벽왕]

인정 욕구 +7, 중2병 +4, 쿨병 +4

오케이, 그럼 벌써 스탯이 세 개나 체크 됐고…….

“뭐 됐다…….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니. 네 입장에서는 내가 모든 일의 흑막이나 다름없어 보이겠지.”

“…아니라는 뜻인가?”

“의미 없는 질문이다. 아니라고 하면 믿을 건가?”

어딘가 자소적이게 느껴지는 한마디.

이에 나는 그동안 작성한 스탯창에 의거해서 대사를 날렸다.

“물론 바로 믿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만약 정말로 네가 이 세상을 위해 희생하고 있던 거라면…….”

“…거라면?”

“그건…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그 방식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누구나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니까.”

인정 욕구 +7을 자극할 만한 회심의 대사.

이에 대한 반응은 약간의 텀을 두고서 돌아왔다.

“……쯧, 누군가에게 인정받고자 한 일이 아니다.”

거, 누가 봐도 기분 좋아하고 있구만.

‘이거 +7이 아니라 +8로 했어야 했나……?’

그런 고민을 하던 차, 개벽왕이 입을 열었다.

“잠시 이야기가 돌았군.”

아무래도 대화가 삼천포로 빠진 걸 본인도 인지했던 모양인데…….

“말을 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어도 물을 마실지 말지는 말에게 달려 있는 법.”

“…….”

“얀델의 아들 비요른. 네게 제안 하나를 하겠다.”

아니, 왜 자꾸 말 한 마디 할 때마다 기다리는 건데.

그냥 쭉 이어서 하면 안 되나?

“제안을 들어보겠다.”

이내 내가 답하자 실크 너머로 보이던 형체가 움직이며 손바닥을 펼친다.

“다섯 번.”

“…….”

“딱 다섯 번만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네가 뭘 하든 개입하지 않겠다.”

허…….

‘다섯 번이라…….’

뭐, 영원히 노예가 되라는 것보단 훨씬 더 의욕이 생기긴 하는데…….

두근-!

딱 봐도 독이 든 성배였다.

***

신중하게 던진 주사위가 펼쳐진 판 위를 구른다.

묘사가 아니라 정말로.

데구르르르-

멈춰진 주사위 두 개의 총합은 12.

이를 본 실크 너머의 개벽왕은 전혀 흥분하지 않고서 천천히 읊조렸다.

마치 주사위의 숫자를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더블이군.”

“……또?”

이거 뭐 조작이라도 있는 거 아닌가?

“말을 움직여라.”

“예.”

이내 개벽왕의 재촉에 나와 마주보고 앉아 있던 기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움직인다.

“이로써 다시금 나의 영토에 도착했군. 호텔을 짓겠다. 그리고 더블이니 한 번 더 나의 차례.”

이후 개벽왕은 기사가 주워온 주사위를 다시금 바닥에 뿌렸고, 총합 7이 나와 서울에 도착했다.

내가 나고 자란, 호텔이 가득한 나의 고향 서울에.

“어디보자, 통행료가…….”

“우대권을 쓰겠느니라.”

“아…….”

이 새끼, 이거 진짜 게임 개같이 하네.

‘여기서 우대권이 나온다고?’

나도 모르게 억울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나 자신을 보며 현자 타임이 밀려든다.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사실 정말 몰라서 스스로에게 되묻는 말은 아니다.

지금 나는 개벽왕과 보드게임을 하고 있다.

그야 독이 든 성배를 마시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딱 다섯 번만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네가 뭘 하든 개입하지 않겠다.]

그날 개벽왕은 내게 그런 제안을 했고, 나는 이를 승낙했다.

어차피 부탁 다섯 개를 한 번에 하진 않을 테니, 일단 부탁을 들어주는 척하다가 나중에 뒤통수쳐도 된다는 판단.

하나 애석하게도 개벽왕은 말이 끝나자마자 첫 번째 부탁(?)을 해왔다.

[그럼 일주일간 이곳에 머무르며 말동무나 해줘.]

첫날엔 정말로 말동무였다.

개벽왕은 내 이세계 탐방기에 강한 흥미를 보였고, 나도 뺄 건 빼고 하면서 적당히 이야기를 들려줬다.

한데 금방 관심이 식었을까?

개벽왕은 이야기는 재미없다며 어디선가 보드게임 하나를 구해왔다.

보아하니, 이곳에 끌려온 악령들을 고문해서 제작한 현대 문물인 듯한데…….

“이것도 이제 질리는군. 그것을 내와라.”

“원하시는 책자가 있으신지요.”

“손님이 뭘 좋아할지 모르니 전부 내와라.”

3일 차가 되자 개벽왕은 보드게임들을 집어넣고서 ‘만화’를 가져왔다.

딱 보니 이것도 현대인들을 조져서 만들어 낸 현대 문물인 듯한데, 얼마나 고혈을 짠 것인지 보이는 것만 얼추 수백 권은 됐다.

‘근데 내용이 뭔가 미묘하게 다르네.’

그중엔 처음 보는 만화도 있었고, 내용을 아는 만화도 있었다.

뭐, 후자의 경우엔 그림체도 엉성하고 내용도 설정만 참고한 것처럼 조잡했다.

아무래도 잡혀온 만화 지망생이 유명 만화를 대충 모작해서 그렸던 모양.

여기까지는 가슴 아프지만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수백 권의 만화책 중 ‘그것’을 발견했을 때였다.

“이 그림체는…….”

너무나도 눈에 익은 그림체.

하나 모작이라고는 도무지 생각하기 어려워서 더욱 믿기 어려웠던 바로 그 그림체.

심지어 제목도 내용도 완벽하게 내가 알고 있던 그 만화와 일치한다.

“오? 알고 있나? 다른 악령들에게 들어보니 굉장히 유명한 만화가였다고 하던데.”

“이런 미친……!!!”

이번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이거 그린 사람! 이거 그린 사람은 어떻게 됐지?”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감추지 않으며 물었지만, 실크 너머의 개벽왕은 아무렇지 않게 코를 후비적거리며 대답할 뿐이었다.

“주인공이 형제처럼 여겼던 사내가 주인공이 사랑하던 여인을 강제로 범하는 걸 보고 그 자리에서 찢어죽였다만?”

아… 그 파트…….

솔직히 화가 나는 건 인정하긴 하는데…….

하, 그 작가 양반은 어쩌다 이딴 게임에 손을 대서.

‘만약 지구로 돌아가도 결말은 못 보겠네.’

여하튼 그렇게 3일 차는 하루 종일 만화나 보면서 시간을 때웠고, 배가 고프면 기사에게 시켜서 음식을 내오게 했다.

“슬슬 허기가 지는군.”

“상을 내오겠습니다.”

“소면 두 그릇에 어향육사 하나, 술은 죽엽청으로.”

“예.”

잘은 모르겠지만, 점소이가 까르보나라를 내오거나 장로님이 점프를 뛸 때 무협 팬들이 이런 심정으로 ‘갈’을 외치지 않았을까 싶다.

‘판타지에서 죽엽청이라니…….’

하, 내가 아는 [던전 앤 스톤]은 이렇지 않았는데.

뭐, 됐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서 보드게임까지 했는데 더 이상 이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고 싶진 않다.

애초에 지금 신경 쓸 부분들도 아니고.

“하루 종일 웃고 떠들며 놀았더니 피곤하군. 내일 보지.”

그렇게 3일 차가 끝나자 개벽왕도 잠에 들러 떠났고, 나 혼자 그 방에 홀로 남게 되었다.

1일 차엔 이야기.

2일 차엔 보드게임.

3일 차엔 만화.

얼핏 보면 도무지 알 수 없는 행보를 이어나가는 듯한 개벽왕이었지만, 사실 그 속내를 읽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중요한 건 시간이겠지.’

말동무는 그냥 구실일 뿐이다.

필시 개벽왕의 진짜 목적은 나를 이곳에 붙잡아 두고 시간을 끄는 것일 터.

여기서 포인트는 하나다.

어째서 개벽왕은 시간을 끌려는 것인가.

그 의문의 답은 다음 날이 되어서 알게 되었다.

“자, 벌써 4일 차로군.”

아침 식사로 베이컨, 계란, 토마토가 들어간 머핀을 먹으며 개벽왕은 말했다.

“심심한데 오늘은 TV나 보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르르 몰려들어와 한쪽 벽면에 커다란 스크린을 펼치는 기사들.

삑-!

이내 개벽왕이 리모컨 버튼을 누르자 스크린에 빛이 들어오며 영상이 재생됐다.

콰아아아아앙-!

핏물이 강줄기처럼 흐르는 무너진 도시.

수많은 사람이 칼을 휘두르고, 활과 마법을 쏘며 싸우는 전쟁터.

[아아아아아아악-!]

[사, 살려 줘…….]

비명이 가득한 그 혼란의 틈바구니 사이로.

[정신 차려라, 고울랜드! 이러고 있으면 모두 다 죽는단 말이다!!]

나의 동료들이 보였다.

18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722화 시한부 (1) 18

722화 시한부 (1)

나는 누구인가라는, 고리타분하다 못해 식상한 질문.

최근 베르실 고울랜드는 자기 스스로에게 그러한 질문들을 던지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야, 진짜 헷갈렸으니까.

‘나는…….’

누구인가.

이곳에 끌려온 초창기엔 스스로에게 던질 필요도 없을 만큼 쉽게 답할 수 있는 물음이었다.

다만, 이 이름을 갖고 살아온 지 이제 십 년도 훌쩍 넘었다 보니 도무지 쉽게 답할 수가 없다.

‘나는…….’

뉴욕 금융가에서 일하던 백인 여성인가.

그도 아니면, 미궁 도시에서 살아가는 마법사인가.

‘…모르겠어.’

솔직히 말하자면 잘 모르겠다.

그래서 그녀는 소거법을 썼다.

일단 전자라면 납득되지 않는 점들이 꽤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아이스록에서 얼마나 많은 ‘NPC’가 덧없이 목숨을 잃었든, 금융가에서 일하던 그 여성은 결코 분노하지 않을 것이며…….

지금만 봐도 그렇다.

자기밖에 모르던 이기적인 여성은, 이렇게 절실하게 고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가 아닌 ‘우리’의 생존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지?’

고울랜드의 시선이 습관처럼 한곳으로 향한다.

하나 그녀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며칠째 그대로인 빈자리의 존재감뿐이었다. 어느 상황에서도 명쾌하게 길을 찾아낼 것만 같은 그는 이곳에 없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정신 차려라, 고울랜드! 이러고 있으면 모두 다 죽는단 말이다!!”

공황 상태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복잡한 머릿속을 깔끔하게 비워낸다.

“정 못하겠다면 내가 지휘를—.”

“걱정 마세요.”

“…응?”

“이제 정신이 들었으니까요.”

어찌보면 그리 복잡한 상황은 아니다.

전쟁 중 본대가 최전선에 서 있던 탐험가들을 버리고 퇴각했고, 그로 인해 자신들은 적진 한복판에 덩그라니 남게 됐다.

“이탈자는요?”

“스벤 파라브, 리리스 마로네, 아우옌 록로브, 에밀리 레인즈……. 지금까진 이렇게 네 명이오.”

난전 중에 떨어지게 된 동료들의 안위가 미칠듯이 걱정되나, 냉정히 말해 당장 그들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다.

따라서…….

‘무사하기를 비는 수밖에…….’

이내 베르실 고울랜드는 결심을 다잡았다.

“아아아아악……! 사, 살려 줘……!!”

“전선이 밀리고 있소이다! 이대로는 얼마 못 버틸 거요!”

“원군은! 정말 원군은 없는 거야?”

“멍청이들아! 도, 도망치지 마! 끝까지 싸워!!”

최전선으로 차출된 각 탐험가 클랜들이 서로의 등을 맞대며 버티고 있지만, 이대로 가면 결국 무너지게 될 게 분명하다.

그래, 그러니까…….

“카이슬란 님, 현재 주변에서 항전 중인 클랜의 마스터… 아니, 마스터가 아니어도 되니까 결정권자를 불러 주세요.”

“어쩔 생각이오?”

“단 한 번……. 모두 함께 힘을 합쳐서 활로를 열 생각이에요.”

물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이 따르리라는 것은 그녀 역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이대로 있으면 전부 죽을 뿐인데.

“그렇구려…….”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카이슬란이 날카롭게 한 가지를 짚었다.

“한데 과연 그들이 우리 말에 따르겠소?”

확실히 이 부분은 그녀도 염려하는 부분이었다.

하나 의외로 이에 대한 해답은 아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 바바리안이라면 분명 이렇게 행동했을 테니까.

“우리 아나바다 클랜이 선두에 서겠다고 하세요. 그럼에도 참여하지 않는다면 두고 간다고도 전하고요.”

그 말에 카이슬란은 누군가가 떠오른 듯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하나를 더 물었다.

“그럼 포위망을 뚫고 황도 쪽으로 가는 게 목적인 것이오?”

정말 몰라서 묻는다기보다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하는 것에 가까운 말투였다.

그야 황도에는 왕이 있으니까.

당연히 전쟁통에도 황도가 가장 안전하다.

하지만…….

“아뇨. 저희는 황도로 향하지 않을 겁니다.”

베르실은 단호히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성지로 향할 겁니다.”

“……성지로?”

그 말에 카이슬란은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도 반대 의견을 꺼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납득한 얼굴로 피식 웃었다.

“얀델이 왜 그대를 부단장 자리에 앉혔는지 알 것도 같구려.”

“그거… 칭찬인가요?”

“물론이오.”

그 말을 끝으로 카이슬란은 전장을 뛰어다니며 각 클랜들에 말을 전했고, 베르실은 그 뒷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의지를 다잡았다.

본인에게 이런 열정적인 모습이 있었나도 싶어 조금 낯설긴 하지만.

‘……반드시.’

반드시 살아서 돌아갈 것이다.

최대한 많은 이들을 살려서.

***

벽면을 가득 채운 스크린.

전혀 모자람 없는 음향 설비.

보는 것만으로 손이 땀으로 젖을 만큼 생동감 넘치는 영상까지.

여기에 팝콘만 있으면 딱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저 영상 속에 내 동료들이 나오는 것만 아니었다면.

삑-!

베르실과 카이슬란이 낯간지러운 대화를 나누던 순간, 개벽왕이 재생되던 영상을 정지시킨다.

그리고…….

“아랫사람들에게 평이 좋은 듯하군?”

아랫사람들이라…….

그 단어에 뭐라 말을 덧붙이고 싶었지만 이내 꾹 참아냈고, 그런 날 보며 개벽왕은 피식 웃었다.

“참으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아보이는 표정이야.”

결코 부정할 수 없었다.

왜 영상을 틀어줬는지.

그리고 왜 지금 멈췄는지.

또 이런 영상을 대체 무슨 방법으로 촬영했는지.

그 외에도 묻고 싶은 것은 너무나도 많다.

하나 수많은 궁금증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걸 하나 꼽자면…….

“이건…….”

그래, 역시 이거겠지.

“…지금인가?”

이 영상이 실시간인가, 그도 아니면 한참 전에 녹화된 것인가.

어찌 보면 현재로서 가장 핵심일 수도 있는 부분.

“예리한 질문이로군. 훌륭해.”

흡족한 목소리로 칭찬사를 뱉는 개벽왕.

그러나 칭찬하는 건 칭찬하는 거고, 이건 또 별개라는 걸까.

“하나 그래도 벌써 말해주면 재미가 없지.”

망할 쾌락주의자 새끼.

속으로 왕을 씹고 있자니, 녀석이 내게 툭 던지듯 물어온다.

“너는 어느 쪽인 거 같나?”

어…….

“아니, 질문을 바꿔야겠군. 어느쪽이기를 바라나?”

차라리 실시간이기를 바란다.

그리 솔직하게 답하자 개벽왕은 또 한 번 옅은 조소를 터트리며 되물었다.

“하하하! 과거의 일은 바꿀 수 없으니까?”

“……그래.”

잠깐의 텀을 두고 답한 말에 개벽왕은 뜬금없이 웃어젖혔다.

“하하핫! 흐하하하하핫!”

조소라는 표현은 아득히 넘어선 폭소.

면전에 대고 저러고 있으니 당하는 입장에서는 기분이 참 더럽지 않을 수 없었지만…….

뭐, 어쩌겠어.

까드득…….

완벽한 을인 이상 참아야지.

“…아하핫. 실례를 했군. 이렇게 웃긴 얘기는 너무 오랜만이다보니.”

그래도 다행히 폭소 시간은 길지 않았다.

머지않아 웃음을 갈무리한 개벽왕이 목을 풀며 내게 말했다.

“자, 어쩔까……. 오랜만에 진심으로 웃게 해줬으니… 이걸 그냥 넘어갈 수도 없고. 아, 보답으로 정답을 말해주면 되려나?”

어…….

‘진짜?’

나도 모르게 기대하며 실크 너머의 녀석을 바라보던 그때.

녀석이 아무렇지 않게 ‘정답’을 공개한다.

“조금 전 보여 준 건 녹화된 영상이다.”

“시기는……?”

“글쎄……. 언제였더라?”

이내 개벽왕이 중얼거리자, 앞에 기립해 있던 기사가 정중하게 답했다.

“폐하께서 얀델 남작과 ‘보드게임’을 즐기고 계실 때였습니다.”

“아, 그랬나?”

“…….”

내가 녀석과 히히덕거리고 있을 때, 내 동료들은 최전선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그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한편으로는 빠르게 날짜를 계산했다.

‘보드게임을 2일 차에 했고, 지금이 4일 차니까…….’

이틀 전에 이 영상은 촬영됐다.

쉽게 말해, 저 영상에서 누가 죽어나가든 나로서는 어떠한 개입도 할 수 없다는 뜻.

“아쉽고, 분해보이는 표정이로군?”

“…….”

“그래도 하나 위로해주자면, 어차피 저 영상이 녹화된 게 아니라도 별반 다를 건 없었을 거다.”

“…뭐?”

“어차피 넌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을 테니까.”

그 말에 내가 어떠한 답도 하지 않자 개벽왕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 위로의 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직설적이었나? 하하, 내가 T라서.”

열이 뻗쳐오른다.

이세계인 주제에 자연스레 성격 유형을 말하는 뻔뻔함부터 시작해 하나부터 열까지 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바바리안에 빙의해 달려들기엔 무리가 있는 상대. 이번에도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있자 지루해졌는지 개벽왕이 다시 영상을 재생했다.

삑-!

잠시간 멈춰 있었던 영상 속 인물들이 다시금 다급하게 움직이고, 살아남기 위해 피땀을 흘려가며 투쟁한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니, 사실 아까 전부터 그랬다.

두근-!

영상 속에 보이는 동료들에게 눈 먼 화살, 마법이 날아들지는 않을까. 갑자기 전선이 무너지며 최악의 상황으로 빠지진 않을까.

선두에서 길을 뚫다가 누가 다치거나 죽진 않을까.

그리고…….

[스벤 파라브, 리리스 마로네, 아우옌 록로브, 에밀리 레인즈…. 지금까진 이렇게 네 명이오.]

난전 중에 실종됐다는 저 네 명은 무사한 것일까…….

꽈악-

이에 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양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그야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부분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나저나 이제 4일 차이니……. 3일만 더 있으면 되겠군.”

약속 된 일주일까지는 이제 3일.

하나 남은 시간은 중요치 않다.

개벽왕은 어째서 다섯 번의 ‘부탁’까지 소모해가며 일주일간 말동무를 해달라 하였을까.

단지 나를 묶어두고 괴로워 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툭, 툭…….

글쎄,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만…….

짧은 시간이나마 내가 직접 겪은 이 녀석의 성격이라면 절대 그러진 않을 거 같다.

뭔가 더 이유가 있다.

하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툭, 툭…….

개벽왕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니 그럴듯한 가설이 하나 떠올랐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영 집중을 못하는 모습이로군? 아, 재미가 없는 부분이라서 그런가?”

이내 개벽왕이 리모컨을 조작하더니 다시금 영상을 멈춘다.

“보기 싫으면 지금이라도 말해라. 짐이야 얘기나 나누며 게임을 해도 상관없으니.”

나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은 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금까지… 제 동료들 중에 죽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게 궁금하면 그냥 보면 되지 않나?”

“대답해주십시오.”

이내 한 번 더 강하게 말하자, 개벽왕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실크 너머로 실루엣만 보이는 상황이라 표정을 읽을 수는 없는 상황.

하나 개벽왕이 흡족해하고 있으리란 건 예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실제로 그 예상이 빗나가는 일도 없었고.

“말이… 전보다는 좀 길어졌군?”

예상외이긴 하지만 나쁘지는 않다, 라는 감정을 엿볼 수 있는 목소리. 덕분에 좀 전에 생각했던 가설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지금까지 죽은 자가 있나?”

“…없습니다. 아직까지는.”

일종의 길들이기다.

이 녀석이 지금 내게 하고 있는 짓은.

“그렇다는군?”

“그렇군요.”

이 상황을 즐기는 듯한 개벽왕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꼽추처럼 허리를 낮춘 뒤 고개를 들며 내가 올려다보는 듯한 모습을 형성한 뒤.

한 번 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국왕 폐하,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동료들 곁으로 갈 수 있을는지요?”

태어나서는 물론, 바바리안이 되어서는 더더욱 해볼 일이 없었을 연극톤의 대사.

“…….”

“…….”

개벽왕의 대답이 돌아온 건 약간의 정적을 텀으로 두고난 다음이었다.

“흐음, 나는 5일 차를 예상했는데.”

나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까와 딱히 말투가 바뀌거나 주변에 뭔가가 바뀐 것도 아닐진대.

“이거 참… 똑똑한 놈이란 말이지……?”

어째서 이 말을 듣자마자 등줄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는 걸까.

스윽.

알 수 없으나, 그 말을 끝으로 4일 내내 한 번도 펼쳐진 적 없던 실크 천이 옆으로 밀려난다.

그리고…….

터벅.

실크 천 사이로 걸어서 계단을 내려오는 개벽왕.

이내 그가 어깨가 뻐근하다는 듯 팔을 휘휘 돌리며 문가로 향했다.

“후… 계속 방 안에 있으려니까 갑갑하네. 뭐 해? 안 따라나오고?”

“어…….”

“잠깐 걸으면서 얘기나 좀 하자. 보여줄 것도 있고.”

“아, 아… 예…….”

나는 뭐라 대답하는지도 잘 모르겠는 상태로 말하며 멍하니 그 뒤를 따랐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게… 개벽왕이라고……?’

그는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내가 아는 어느 한 사람과.

24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723화 시한부 (2) 24

723화 시한부 (2)

내가 아는 어느 한 사람…….

사실 그렇게 말하기에는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하 1층의 ‘균열’을 공략할 때 한 번 봤을 뿐이니까.

그것도 ‘복제’된 형태로.

[아, 처음 뵙는 분들도 있으니 소개부터 먼저 해야겠군. 라비기온 컴멜비 라프도니아일세.]

균열 속에서 만난 라프도니아의 건국왕.

백성들에게 ‘불멸왕’이라고 불리며 수 천 년을 넘는 아득한 세월 동안 이 도시에 군림했던 현군이자 폭군.

당시 균열 속에서 그를 보았을 때, 우리들은 아주 크게 놀랐다.

그야 그런 역사 속 거물을 만났다는 것부터가 잘 실감이 나지 않았을뿐더러…….

‘라프도니아에서 왕은 항상 가면을 쓰고 등장을 하니까…….’

국가의 심장인 왕궁에도, 선전을 위해 뿌린 책자에도 왕은 가면을 쓰고 등장한다.

보안, 암살 방지를 위함이니 뭐니 말은 많았지만 진짜 이유가 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오직 하나.

라프도니아의 왕들은 전통이라도 되는 것처럼 공식 석상에 나설 때 늘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단 것뿐—.

“왜? 생각보다 젊어서?”

개벽왕의 말에 나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서 답을 골랐다.

“…예, 아무래도.”

균열 속에서 보았던 ‘불멸왕’에 대한 이야기는 굳이 할 이유가 없다는, 순간적인 판단이었다.

언급했다가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것 같달까.

“하핫! 아무리 그래도 내 목소리가 쭈글쭈글한 늙은이처럼 들리진 않았을 텐데?”

다행히 내가 수긍하고 넘어가자 개벽왕은 별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동안 소리를 들은 40대 남성처럼 웃었다.

그리고…….

“그럼… 그곳에 가기 전에 잠시 바람이나 쐐지.”

“모시겠나이다.”

이내 개벽왕의 말을 들은 기사가 안내를 시작하고, 나는 개벽왕과 함께 그 뒤를 따랐다.

터벅, 터벅…….

천천히 걷고 있자니 정원으로 향하는 길이 나오며 정말이지 오랜만에 하늘을 보게 됐다.

‘얼마 만이지?’

며칠 넘게 방 안에만 갇혀 있어 하늘도 보지 못했구나.

아, 물론 하늘은 평소와 같이 흐렸—.

“넌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 거 같냐?”

뜬금 없는 타이밍에 날아든 뜬금없는 내용.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냥 말 그대로인데?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이상한가? 불멸왕조차 결국 영원을 이루지 못했는데.”

음,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은 없지.

불멸에 가까운 삶을 살아갔으나, 결국 그 역시 영생을 이루지 못한 필멸자였다.

“……뭐, 그래도 아직 정정하시지 않습니까? 들리는 소문과 달리.”

“들리는 소문이라…….”

별 기대 없이 툭 던진 말에 돌아온 반응.

이내 개벽왕이 은근한 말투로 내게 질문을 해온다.

“궁금하지 않나? 내가 왜 밖으로 나오지도 않으면서 왕궁에 틀어박혀 있는지.”

여기서 고개를 끄덕이는 건 하수였다.

“궁금하긴 한데……. 반드시 알아내야겠다까지는 아닙니다.”

“어째서? 이래 봬도 한 나라의 왕인데?”

“그야 제 알 바 아니지 않습니까?”

“…뭣?”

예상치도 못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개벽왕이 껄껄 웃었고, 나는 그냥 무안하게 서 있었다.

진심으로 재밌어 하는 그에겐 미안하지만, 당연히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

애초에 내 알 바가 아니라 생각하지도 않을뿐더러.

‘분명 이러고 있는 이유가 있을 테니 말이지…….’

나 역시 그 숨은 이유가 미칠 듯이—.

‘궁금하다.’

라고 생각하던 찰나.

번쩍-!

일순간 온 세상이 점멸한다.

그리고…….

쿠쿠쿠쿵-!

몇 초가 지나 천둥 소리가 들려오고서야 무슨 상황인지를 정확히 인지했다.

“…어?”

벼락이 떨어졌다.

그것도 바로 우리가 서 있던 위치에.

“폐하, 옥체는 괜찮으신지요?”

물론 벼락이 떨어졌다고 다친 이는 없었다.

어느샌가 개벽왕 주위로 반투명한 보호막이 쳐져 있었으니까.

“신경 쓸 필요 없느니라. 쯧, 그나저나 밖에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바로 시작이군.”

하나 개벽왕의 넋두리에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뭔가 말하는 것에서 위화감이 든달까?

‘갑자기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는데 이렇게 아무렇지 않아 한다고……?’

뭐, 보호막 덕분에 누구 하나 다치지 않긴 했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혹시… 이런 게… 자주 있는 일입니까?”

이내 내가 조심스레 묻자, 개벽왕이 껄껄 웃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글쎄, 하늘조차 나를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났는가 보지.”

“…….”

“걱정 마. 앞으로 잠시간은 조용할 테니.”

음…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해지는데 말이지.

혹시 저번에 말했던 ‘잠이 많다’는 것과도 연관이 있는 걸까?

“여기도 참 오랜만이로군.”

그렇게 정원을 한참 걸어서 도착한 곳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마련된 공터였다.

눈을 씻고 둘러봐도 피크닉을 하기 딱 좋아 보인단 것 외에는 별다른 특징을 찾을 수 없는 장소.

“여기가 아까 말한 그곳입니까?”

“뭐? 아핫! 그럴 리가. 여기까지 따라오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거야?”

“…….”

“그나저나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건만 이곳은 여전하군. 어쩌면 영원이란 바로 이곳을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어.”

“추억이 많은 곳인가 봅니다?”

“……뭐, 그렇지. 많은 일들이 있기도 했고. 이왕 온 김에 잠시 쉬었다 가지.”

“예…….”

그리 답한 나는 잔디 밭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혹시 내가 앉았다가 왕의 추억이 담긴 의자가 파손될까 걱정된 게 첫 번째 이유였고, 이렇게 앉아도 눈높이가 맞는다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

“…….”

하나 자리까지 잡고 앉았음에도 개벽왕은 그저 회상에 잠긴 듯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이에 별다른 대화 없이 정적의 시간이 이어졌다.

한 5분 정도.

“이번 전쟁을 일으킨 건 재상이다.”

“……예?”

“앞에선 노아르크인들을 적대하는 척하며, 뒤에선 그들과 손을 잡고 이 나라를 뒤삼킬 계획을 짰다는 게 그렇게 놀랍나?”

아니, 그러면 안 놀라겠어?

그런 얘기를 갑자기 아무런 빌드업도 없이 툭하고 뱉는데.

제발 깜빡이라도 좀 켜줬으면 좋겠다.

“흐음, 정말 예상도 못했나? 정보부에서는 네가 내심 예측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던데.”

“어… 솔직히 말하자면, 아예 염두에 두지 않은 건 아닌데……. 예측했단 것보단 단지 그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단 것에 가까운데요.”

“그 몸뚱이로 그렇게 논리정연하게 말하는 걸 보니 참 낯설단 말이지. 원래는 어떤 사람이었나?”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었습니다.”

“오호라, 너 같은 놈이 노예 출신이라고? 그쪽 세상 군주들은 눈이 썩었나보군?”

“그… 회사원은 노예가 아닌데…….”

“음? 분명 나한테는 그리 설명했었는데?”

아무래도 개벽왕에게 ‘회사원’이란 직업을 설명해 준 현대인은 몹시나 비관적인 사람이었던 거 같다.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닐 테지만.

“저… 근데 혹시 재상이 왜 그런 짓을 꾸몄는지도 압니까?”

“이 세상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건 없다.”

…스탯에 자기애 +7을 넣어 줘야 하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자기애가 아니라 그냥 재수가 없는 것에 가까울 확률이 높았다.

그야 진짜 쟤는 모르는 게 없을 거 같거든.

“그래서… 왜 그런 겁니까? 재상이 갑자기 미친 것도 아니고.”

“짐작 가는 게 있나?”

“그걸 진짜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재상네 집에서 노아르크 놈들이 튀어나오고서도 재상이 정말 배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어째서였지?”

“그럴 만한 동기가 떠오르지 않았으니까요. 그나마 굳이 꼽자면 권력을 탐냈다가 있는데……. 이것도 조금 애매했습니다. 제가 본 재상은 그렇게까지 욕심을 부릴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하핫! 그건 그렇지. 내가 보기에도 재상은 간이 작고 소탈한 성격이다. 하지만…….”

장난스러운 말투를 이어가던 개벽왕이 진지한 투로 말을 이었다.

“간혹 사람들에게는 있는 법이다. 세상 전부를 다 버려도 도무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가슴에 깊이 박히는 한마디.

그 말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거울이었다.

그 거울 너머에는 내가 있었고, 더욱 멀리 보면 이제 너무나도 소중해진 동료들이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궁금해졌다.

과연 후작의 거울 속에 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후작에겐 그게 뭐였습니까?”

왠지 모르게 긴장이 돼서 침까지 꿀꺽 삼키며 물었으나, 돌아온 대답은 김이 빠진다는 말로도 모자랐다.

“글쎄… 후훗, 그때도 말했듯 그 이야기는 본인에게 듣는 편이 좋을 듯하군.”

에라이.

나도 모르게 속에서 욕지거리가 튀나왔지만…….

그래도 소득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그럼… ‘호랑이를 등에 업은 여우’가 역시 재상을 말한 건 맞나 보군요?”

은근슬쩍 확인하듯 묻자 긍정의 답이 돌아왔다.

“그럼? 재상 말고 이 나라에 다른 여우가 있을 거 같나?”

“음, 저야 잘 모르죠?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데면데면한 사이어서.”

“데면데면한 사이라… 으하핫! 이거 정말 재밌는 놈이란 말이지?”

그리 말하면서도 개벽왕은 시종일관 웃음기를 얼굴에서 지우지 않았다.

거, 대체 이 대화에서 뭐가 그리 재밌단 거지?

그냥 사람이랑 대화를 하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런 건가?

‘일단… 그래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계속 이러한 식으로 대화를 이어나가면 될 거 같다.

그런 생각을 하던 때였다.

“그럼 본론은 가서 얘기하도록 하지.”

“이번엔 아까 말했던 ‘그걸’ 볼 수 있는 겁니까?”

“그래.”

이후 개벽왕이 눈짓을 주자 기사가 먼저 앞에서 안내하듯 걸었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 개벽궁으로 향했다.

‘다시 돌아올 거면 왜 나갔던 거야?’

심지어 개벽궁의 다른 곳으로 간 것도 아니고, 계속 틀어박혀 있던 그 알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처음 이곳에 올 때 사용했던 예의 엘리베이터를 타고서 다시금 아래층으로 직행.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땐 판텔리온 연구소에서 봤던 시험관과 유사한 형태의 초거대 시험관이 보였다.

쩝, 보여 주겠단 게 뭔가 했더니.

‘…이거였구나.’

이럴 거면 뭘 그리 숨겼나도 싶지만, 이번에도 말은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여기까지 데려온 걸 보면 굳이 묻지 않아도 이게 뭔지 설명해 줄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

“그래서… 이게 뭡니까?”

“생명 유지 장치.”

“…예?”

“이미 수명이 다한 이라도 이곳 안에만 들어가면 세계의 눈을 피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지.”

“……그렇군요.”

“아, 참고로 불멸왕이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과거엔 이 장치를 이용해 수명을 늘리는 것도 가능했다고 하더군. 끝까지 말하지 않고 가버린 바람에 영영 실전됐지만.”

“…….”

“그거 아나? 사실 나는 이 장치를 쓰게 되는 날이 올 줄 몰랐다. 영원히 주인이 바뀌지 않을 거 같던 그 옥좌에 앉는 순간 이렇게 결심도 했었지. 나는 그자와 다를 거라고. 반드시 인간으로 살다가 인간으로 죽을 것이라고.”

“…지금은 아니란 뜻이겠군요.”

“아까 봤지 않나? 단죄라도 하듯이 벼락이 떨어지는 걸. 이미 오래전 내 수명은 다했고, 이 세계는 순리를 거스른 나를 제거하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지.”

“그래서 계속 저 안에 숨어 계시느라 밖에는 나오지 못했던 겁니까?”

“굳이 설명하자면 그런 셈이지. 왜? 추해보이나?”

“음, 딱히 그렇진 않습니다. 그냥 클리셰 같다고 해야 하나?”

“클리셰?”

“예. 이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조차 본심으로는 살고 싶어 합니다. 단지 상상한 만큼 잘 살지 못하니까 그런 선택을 하는 거지.”

“흥미롭군. 계속 해봐라.”

“그리 말씀하셔도 딱히 더 말해드릴 게 없습니다. 단지 가질 거 다 가진 사람이라면 오죽 살고 싶어 할까 싶었을 뿐이니까요.”

실제로 지구에서도 권력의 끝을 본 이들이 마지막에 찾는 것이 영생이었고, 나는 그것을 추하다 여기지 않았다.

살기 위해 태어난 생물로서 살기 위해 발악하는 게 왜 욕 먹어야 한단 말인가.

뭐, 그 과정에서 일어난 비인도적인 사건들은 백번 비난받아도 모자랄 테지만.

“오히려 그 욕구 자체는 그 누구보다도 인간답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신기하군.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란 점이 특히나 더.”

“그럼 일주일 동안 감금시키겠단 건 철회해 주시는 겁니까?”

“글쎄, 그건 이후 네 대답 여부에 따라 달라지겠지.”

“그럼 속 시원하게 말해보십쇼. 피차 하루하루가 귀한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점점 말이 편해지는 내가 웃기면서도 신기했는지 개벽왕은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하나 다행히 그런 내 당돌한 모습을 밉게 보진 않았는지 머지않아 다시금 입꼬리가 올라갔다.

“참으로 오랜만이군. 다시 만나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 자가 나타났고, 그게 다른 이도 아니라 바로 너라니.”

“어…….”

칭찬하는 말 같긴 한데…….

‘……왜 이렇게 눈길이 음흉한 거 같지?’

나도 모르게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나든 말든 개벽왕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는 왕궁을 떠나 자유롭게 행동해도 좋다. 죽어야 할 자를 살리든, 살아야 할 자를 죽이든 네 멋대로 해도 된다.”

물론 공짜일 리는 없었다.

“그 대신에 제가 해야 할 건 뭡니까?”

계약서에 사인을 하기 전에 조건을 물었고, 개벽왕은 딱 한마디로 답했다.

“재상을 죽여라.”

앞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기 때문인지, 그 조건 자체는 놀랍지 않았다.

단지 그럼 그렇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해도 되는 걸 나한테 시킨다라…….’

뭔진 몰라도 더러운 꿍꿍이가 숨겨져 있겠구나.

18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724화 시한부 (3) 18

724화 시한부 (3)

개벽왕은 대체 무슨 꿍꿍이로 재상을 죽이란 조건을 내걸었을까.

‘왕가의 힘만으로는 재상을 죽이는 게 불가능해서?’

아니, 그럴 리 없다.

인게임에서 수 천 번 반역 루트를 진행해 본 나는 그 누구보다 왕가의 힘이 얼마나 강대한지 알고 있으니까.

‘그럼 단지 내게 하청을 넣고 본인들은 전력을 아끼고 싶어서?’

음, 이전 것보단 낫지만 여전히 현실성은 떨어진다.

내가 뭐 왕가와 여러 번 일을 진행한 믿음직한 해결사도 아니고, 왕가 입장에서는 굳이 그런 번거로운 수를 둘 연유가 없을 터.

‘심지어 나를 일주일 동안 묶어 두면서까지 이런 일을 꾸몄지…….’

단순히 재미를 위해서 했다고 하기엔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개벽왕은 그 누구보다도 ‘시간’이 귀한 사람이잖아?

그러니 일단은 이렇게 정리하는 편이 옳다.

개벽왕이 이런 지시를 내린 이유는 둘 중 하나다.

‘직접 재상을 해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든가.’

그도 아니면.

‘내가 재상을 죽여야지만 발생하는 ‘이득’이 존재한단 거겠지.’

물론 이는 내 짐작일 뿐이며, 아직 그 ‘사정’이나 ‘이득’에 대해서는 전혀 짚이는 것도 없—.

“갑자기 생각이 많아진 표정이로군?”

그때 개벽왕이 대답을 재촉하는 듯한 말을 해왔고,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서 입을 열었다.

그야 할 수 있는 대답은 딱 하나였으니까.

“하죠, 뭐. 어차피 그 새끼도 마음에 안 들었고.”

“아, 그 사건 때문에 말이지……?”

음, 그 사건이라면…….

“미리 말해두지만, 그 일에 나는 어떠한 관여도 하지 않았다. 재상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지.”

아무래도 아이스록 원정을 말하는 거 같기는 한데, 역시 왕가에서도 우리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는 대충 알고 있었구나.

“그러니 네가 가진 복수심은 올바른 곳에 건전하게 풀도록.”

이후 개벽왕이 그런 말을 해왔지만, 왕가에 대한 마음이 풀어지거나 하는 건 없었다.

설령 재상이 혼자 꾸민 일이라고는 해도 결국 그놈에게 그만큼의 권력을 부여한 건 왕가 아닌가.

나는 묵인과 방관 역시 기여라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도 저 말이 진짜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는 건 사실이긴 하네.’

기여를 했다고 한들 기여도에서 차이가 나니, 그래도 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해야 하나?

목숨을 걸고 들이받을 정도의 증오는 아니다.

뭐, 어쩌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왕가’에 대한 증오란 하등 도움이 되지 않기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걸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자, 그러면 얘기는 여기서 끝이—.”

“잠깐만!”

이쯤에서 얘기를 끝내고 등 돌려 ‘생명유지장치’를 향하려는 개벽왕을 다급하게 불러세웠다.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물론 이 아저씨가 대답을 해줄지는 모르겠지만.

“저 아래에.”

“…….”

“저 아래에 갇혀 있는 건 뭐였지?”

내 질문에 개벽왕은 잠시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용건이 끝났다고 그새 또 말이 짧아졌군.”

어…….

딱히 의도하고 한 건 아니었지만, 일단은 뻔뻔하게 침묵하며 대답을 바라는 눈빛을 쏘아냈다.

대답이 돌아온 것은 잠시간의 정적이 이어진 후였다.

…엄밀히 말하면 대답도 아니었지만.

“무언가가 그곳에 갇혀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나?”

질문에 질문으로 돌아온 답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그곳에서 제발 꺼내달라는 말을 들었다. 애원을 했던 건 열 살쯤 될 거 같은 어린 여자였고.”

따라서 나는 합리적으로 추론했다.

그 열 살배기 여자는 ‘땅의 마녀’일지도 모른다고.

“……그런가.”

“그래서 대답은?”

개벽왕은 이번에도 약간의 텀을 두고서 깊이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던 건가?

아무래도 그런 거 같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정확한 답을 주지 않는 걸 보면.

“…비요른 얀델.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이 세상이 어떤 식으로 살아남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런 세상을 위해서 얼마나 큰 희생을 하고 있는지.”

“…….”

“이야기는 여기까지. 남은 대화는 이번 일이 모두 끝난 다음에 새롭게 나누도록 하지.”

하, 이게 전부라고?

허무한 마음에 뭐라 말이라도 다시 한번 걸어볼까 싶었으나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 게, 딱 한 발만 앞으로 내딛으려는 차.

“…이야기는 여기까지라 하셨다.”

기사놈이 칼을 뽑아들어 내 앞을 막아세웠거든.

“…….”

개벽왕이 저 기사의 행동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걸 보면 정말 대화는 여기까지인 거 같고.

그래서 그냥 닭 쫓던 개처럼 앞을 바라만 보았다.

스르륵.

개벽왕은 내가 보고 있는 앞에서 서스럼없이 옷을 벗었고, 이내 완전한 알몸이 된 상태로 익숙하게 장치 안에 들어섰다.

위이이이잉.

머지않아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의문의 용액이 기포를 자아내기 시작하고, 그 안에 들어선 개벽왕이 천천히 눈을 감는 것으로 모든 상황은 종료.

‘진짜 자는 거 같네…….’

짧은 듯하면서도 너무나 길었던 알현이 끝났다.

***

“따라와라.”

개벽왕이 장치에 들어가 잠에 든 것까지 지켜본 뒤에는 고압적인 기사를 따라서 다시금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뭔가 텅 빈 느낌이 드는 알현실에서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개벽왕께서 미리 말씀해두셨다. 그대가 앞으로 무엇을 요구하든 최선을 다해 들어주고 협력하라고.”

오, 그렇단 말이지…….

이제 보니 아예 맨땅에서 나 혼자 재상을 잡으라 했던 건 아니었던 모양.

“무엇을 원하나?”

기사의 요구에 내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아까 보던 걸 마저 보겠다.”

“…준비하도록 하지.”

이후 나는 아까 보다 말았던 영상을 다시금 시청했다.

아, 물론 시간을 아껴야 하니…….

“혹시 넘기면서도 볼 수 있나?”

“배율 조정을 해주지.”

무려 8배속 속도로 재생되기 시작한 영상.

하나 영상은 내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끝나고 말았다.

애초에 영상 자체가 짧던 것인데…….

“2편은……?”

“없다.”

“그럼 이게 끝이라고……?”

최전선에 남겨진 탐험가들을 이끌고 길을 뚫던 아나바다 클랜의 매드 무비는 내 동료들이 전선을 돌파하며 바바리안의 성지에 도달하는 장면을 끝으로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의 적은 그 누구보다도 왕가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까.”

“아니, 그게 뭔 상관인데?”

“우리의 ‘눈’을 피할 방법 정도는 미리 준비했으니 이런 같잖은 일을 벌였겠지.”

이후 설명을 들어보니, 이 영상을 찍을 수 있던 게 왕가가 가진 어떤 전략 병기를 사용했기 때문이고, 저 시점에 재상이 뭔가 수를 써서 그것을 무효화했다는 거 같은데…….

“개벽왕께서는 여기까지만 봐도 그대가 무릎을 꿇을 거라고 하시더군.”

아, 참고로 그 예상은 시원하게 빗나갔다.

나는 거기까지 보지도 않고 무릎을 꿇었거든.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려나…….’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일단 기사의 이름부터 물었고, 이에 기사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대와 내가 통성명을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 뭐지?

그냥 앞으로 ‘기사놈’이라 부르기는 좀 그래서 물었던 건데.

씨익.

이렇게 나오면 바바리안 전사로서 그냥 놓아줄 수 없지.

“어허! 어명을 어길 셈이더냐!”

‘갈!’을 외치는 무협 고수처럼 불호령을 내리자 기사놈의 눈이 미친놈을 대하듯 변했다.

이젠 딱히 신경 쓰이지도 않는 익숙한 시선.

다만 이번만큼은 조금 억울하긴 했다.

“네가 말했지 않나. 자비롭고 현명하신 폐하께서 내가 뭘 요구하든 최선을 다해 들어주고 협력하라 했다고.”

이내 친절하게 설명하자, 처음엔 기도 차지 않는단 것처럼 헛웃음을 터뜨리던 기사놈도 서서히 혼란에 빠진 눈빛으로 변해갔다.

‘어? 근데 생각해보니 그런 말씀을 한 건 맞는데? 그럼 이 요구에 따르지 않으면 어명을 어기게 되는 건가?’

왕에 대한 과도한 충성심이 만들어낸 오작동.

끝내 기사놈이 한숨을 내쉬며 스스로의 이름을 밝혔다.

“……아스타롯타 베룬이다.”

음, 예상과 달리 평범한 이름인데?

통성명을 하고 싶지 않아 하는 거 같기에 혹시 나도 알 만큼 유명한 이름이어서라든가 그런 이유가 있나 싶었는데.

‘그럼 조금 전 그 반응은 뭐지?’

단지 나 같은 바바리안이랑은 통성명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건가?

“아스타롯타라… 어감도 좋고 예쁜 이름이군.”

혹시나 해서 칭찬하듯 툭 던져본 미끼.

다만, 잭팟이었는지 곧장 반응이 돌아왔다.

“내 이름은 결코 계집애 같지 않다.”

“계집애 같단 말은 안 했는데?”

“…….”

본인 입으로 자백한 것이나 다름없단 걸 뒤늦게 깨달았는지 조용해진 아스타롯타.

“아무튼,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앞으로 잘 부탁한다.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가 아니라 아스타롯타다.”

“아, 미안하다. 착각했군.”

내가 놀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더 이상 반응을 하지 않으며 침묵하는 녀석.

물론 큰 의미는 없었다.

이러한 사소한 약점들로도 충분히 주도권을 잡아갈 수 있는 게 바바리안의 장점이라서 말이지.

“……됐고, 그래서 앞으로는 어쩔 거지?”

녀석은 누가 봐도 티나는 태도로 대화 주제를 돌렸고, 나도 여기서 더 괴롭히지는 않았다.

그도 그렇잖아?

내가 사이코패스인 것도 아니고.

이 녀석을 괴롭히는 건 이유가 있을 때만이다.

그래, 그러니까…….

“잘 모르겠는데, 네가 해야 할 건 있다.”

“말해라.”

“레이븐부터 데려와.”

걔 성격상 지금쯤 간이 여기까지 내려와 있을 테니까.

***

리카르도 뤼헨프라하.

오르큘리스란 집단의 수장이자, 통칭 ‘반역자’라 불리는 사나이.

정보부에서 올린 보고서나 이야기를 통해서 밖에 듣지 못했던 그 사내를 얼마 전에서야 직접 두 눈으로 마주하게 된 후작은 참 오묘한 기분이었다.

‘……반역자라.’

필시 저 남자에게 붙은 무시무시한 이명은 이번을 끝으로 사라지리라.

성공으로 끝나든, 실패로 끝나든.

그 이명의 주인은 그가 아닐 테니까.

‘……아니지.’

성공으로 끝났을 땐 그런 이명으로 불릴 일이 없으려나?

감히 국가 권력에 도전할 이는 없을 테니—.

‘……생각이 많아지긴 했나보군.’

이내 후작은 눈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집중했다.

원대한 계획의 첫걸음이 시작되는 시점에 갑자기 자신을 찾은 것일까.

“듣기로 독대를 청했다고 하던데, 할 말이 있으면 시원하게 해보게나.”

후작이 먼저 물꼬를 트자 그 앞에 서 있던 남성도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평소 말이 없는 그의 성격처럼 아주 짧고 간결하게.

“최전선에서 비요른 얀델이 목격됐다.”

“……그렇군. 알려 줘서 고맙네. 남은 건 내가 따로 알아보겠네.”

너무나도 직관적인 정보 전달에 후작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고, 이에 용건이 없다는 듯 사내가 등을 돌려 방에서 나갔다.

툭, 툭.

후작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으나, 연신 움직이는 손가락이 그의 초조한 심정을 대변했다.

“비요른 얀델…….”

감옥이 붕괴하며 죽지는 않았을까 기대했는데.

역시 아무렴 그럴 리가 없지.

“결국 또 그놈인가…….”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그냥 귀찮은 놈 정도였지만, 사실 어쩌면 그때부터 내심 느끼고 있던 걸지도 몰랐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대업을 이루는 데 있어 가장 방해되는 게 이놈일지 모른다고.

두근-!

이내 후작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변하는 건 없었다.

결코 오지 말았으면 했던 때가 결국 오고야 말았으니.

“모든 것은 순리대로.”

이제는 운명에 맡길 뿐이다.

15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725화 시한부 (4) 15

725화 시한부 (4)

레이븐을 데려오란 ‘부탁’을 받은 아스타롯타는 알현실 바깥에 있던 다른 수호기사단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어찌 보면 하청의 하청이라 볼 수 있는데…….

“멀지 않은 곳에 머무르는 중이었으니 금방 올 거다.”

뭐, 나야 아니꼽게 볼 이유가 없었다.

하청이 하청을 주고, 그 하청의 하청이 하청을 또 준다 한들 가장 윗사람은 변하는 게 없을뿐더러…….

‘이러면 얘기를 좀 더 나눌 수 있겠네.’

남는 짜투리 시간이라고 해서 무의미하게 허비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즉시 호구조사에 들어갔다.

“아스타롯타, 네 공식 직책이 뭐냐?”

“…….”

“그걸 알아야 나도 앞으로 계획을 짤 수 있어서 그렇다. 근데 설마 네게 무조건 협력하라는 폐하의 말을 어길—.”

“…수호기사단장이다.”

오, 역시 그랬구나.

그럼 얘가 왕기사 할아버지 다음 세대 ‘왕의 기사’인 거네.

“궁금증이 풀렸다면—.”

에이, 여기서 끝날 리가.

“네가 차고 있는 그 검은 정체가 뭐지? 보아하니 아주 예리한 거 같던데.”

“…….”

거, 또 눈알 굴리기는.

“네 능력을 정확히 알아야 나도 계획을 세우는 데 도움이—.”

“……수호기사단장에게 주어지는 검이다.”

“성능은?”

“창세보구에도 밀리지 않는다. 아, 부족장이라고는 해도 너는 창세보구를 잘 모르겠군?”

거, 그럴 리가.

내가 창세보구를 전부 모은 게 몇 번인데.

당연히 그 성능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럼 수호기사단원은 몇 명이나 있지?”

여하튼 이후로도 천천히 단계를 올려가며 왕궁의 주요 정보들을 캐냈다.

아스타롯타는 이래도 되는가 싶어 하는 눈치면서도 내가 왕을 거론할 때마다 한숨을 푹 내쉬며 술술 불었다.

“자식은? 있나?”

“우리 수호기사단은 가족을 가질 수 없다.”

“오, 그럼 피임을 더 잘해야겠군?”

“…….”

“너, 설마… 태어나서 단 한 번도……?”

“…….”

그렇게 게임에서도 알지 못했던 정보를 하나씩 알아가며, 이제 슬슬 레이븐이 도착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

대충 들을 건 다 들었고, 문득 궁금해졌다.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왕의 이름으로 어디까지 통하려나?’

이 녀석이 이렇게 고분고분해진 건 왕을 향한 과한 충성심 때문에 생긴 오작동.

즉, 일종의 버그다.

그래서 호구조사를 하면서도 선을 지켰다.

왕궁 지하에 있는 생명유지장치라든가.

거기서 더 아래 가면 나오는 감옥이라든가.

그도 아니면 왕의 수명과 관련된 얘기라든가.

암만 어벙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라고 해도, 이런 질문에는 답하지 않을 게 분명하니까.

분명 거절할 것이고, 한 번 ‘거절’을 해보게 되면 알고 만다.

거절이라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암, 버그를 이용하는 것도 플레이어의 덕목이지.’

그런 이유에서 절대 선을 넘지 않도록 노력했다.

망가진 기계 장치도 때리면 작동하는 것처럼, 너무 충격을 줬다가 정상화 되어버리기라도 하면 나만 손해란 판단이었다.

하지만…….

‘궁금하단 말이지.’

왕에 대한 정보는 절대 말하지 않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디까지 가능할까.

내 앞에서 바지를 벗어보라 지시하면 과연 할까?

‘궁금하긴 한데…….’

뭔가 아쉬우면서도 다행인 일이지만, 그 궁금증을 직접 풀게 되는 일은 없었다.

“야, 얀델 씨!!”

레이븐이 도착했거든.

***

들어보니 레이븐은 그동안 갑갑하고 마음이 불편할지언정 무척이나 잘 지내고 있던 모양이었다.

뭐, 따져보면 나도 별반 다를 건 없겠지만.

한창 전쟁이 벌어지는 시국에 이 정도 호사면 아마 도시 전체를 뒤져봐도 최상위권에 들지 않을까.

“살이 쪘군.”

“무, 무슨 소리……! 쪄, 쪘어요?”

“조금.”

“읏… 방 안에만 있으니까 당연한 일이잖아요……!”

알현실로 돌아온 레이븐과는 간단하게 안부 인사를 나눈 뒤, 단도직입적으로 현 상황에 대해 말했다.

바바리안답게 구구절절하게 설명한 것은 아니지만, 함께 지낸 시간이 길기 때문일까?

레이븐은 그조차도 한 줄로 요약해버렸다.

“그… 재상을 죽여야 한다고요……? 우리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그리고 우리끼리만은 아니다. 왕가의 지원이 있을 거니까.”

“그, 그렇게 생각하면 그나마 다행인데요……. 근데 정말 반역의 주동자가 재상이었어요?”

“그렇다는군.”

쉽고 명확하게 목표가 정해지자, 레이븐은 현 상황에 대해서 이런저런 질문을 쏟아냈다.

당연하게도 내가 답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야 나도 계속 방 안에 갇혀 있었으니까.

“바깥 상황은 지금부터 저기 엘리자베스가 말해 줄 거다. 애초에 같이 들으려고 널 기다렸던 거기도 하고.”

“엘리자베스… 님이요?”

“아스타롯타 베룬. 베룬이라 불러라.”

“아… 네… 베룬 님. 안녕하세요…….”

아스타롯타는 레이븐의 인사는 들은 체 만 체 하며 브리핑을 시작했고, 바깥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던 우리들로서는 매 설명마다 깜짝깜짝 놀라야 했다.

“네? 도시 중 절반이나 빼앗겼다고요?”

“빼앗긴 게 아니라 반역 세력들이 무단으로 점거 중인 것뿐이고, 절반이 아니라 3분의 1 정도다. 기껏해야 라비기온 중엔 13구역, 7구역, 8구역이 전부고, 컴멜비 중엔 4구역 딱 하나뿐이니까.”

전혀 위급한 기색이 없던 왕의 반응과 달리 도시의 상황은 심각하다는 말로도 모자랐다.

재상이 전쟁의 주동자라는 건 이미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으며, 재상 역시 아예 적진으로 넘어가 진두지휘를 하고 있다던가?

사실상 이쯤이면 내전이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으며, 그 내전조차도 장기화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 내 동료들은 지금 적진이 된 7구역에 있다는 거군…….”

“정확히는 바바리안족의 성지다. 마지막으로 받은 정보에서 변한 게 없다면.”

“생각보다 훨씬 골치 아픈 상황이군.”

“얀델 씨는 우선 동료 분들과 합류할 생각이신 거죠?”

“그래.”

다만, 동료들이 있는 7구역까지 가는 것만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려면 7구역과 맞닿은 5구역이나 8구역을 반드시 지나쳐야만 하는데…….”

아스타롯타의 말에 의하면 그곳들은 현재 최전선이란 말에 걸맞게 치열한 전투가 밤낮없이 이어지는 듯했다.

“어렵네요. 5구역이나 8구역을 지나친다 해도 7구역은 완전히 적진 한복판인 거니까.”

“아무래도 그렇지…….”

그렇게 둘이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중, 아스타롯타가 뜬금없이 껴들었다.

“비요른 얀델, 내가 조언 하나를 하지.”

“…해봐라.”

“뭐가 먼저인지를 생각해라.”

허, 조언이라기에 한번 들어는 봤더니만.

누가 왕의 졸개 아니랄까 봐, 동료들을 챙기기보다는 왕의 명령을 우선하란 조언이었다.

‘아까 어벙하게 굴던 것도 그렇고, 얘 머리에 문제가 있나?’

들을 가치도 없는 조언이었다.

애초에 그럴 거였으면 알현실에서 일주일 동안 짱박혀 있었지. 내가 왜 그 조건을 승낙했는데?

따라서 조언은 쿨하게 스킵.

“그보다… 일단 밖으로 나가봐야겠군.”

말로만 들어서는 알 수 없는 것도 있기에 곧바로 외출 계획을 세웠고, 이에 또 레이븐과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아스타롯타가 대화에 껴들었다.

“그 상태로 나가면 금방 알려질 텐데? 아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네가 붕괴로 인해 큰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 그랬구나.

“투구라도 써서 모습을 감추는 건 어떻지?”

이번 조언은 그래도 날 생각해 준 듯했지만, 내 대답은 ‘NO’였다.

애초에 이 거대한 몸뚱이는 투구를 써서 감출 수 있지도 않을뿐더러, 철가면을 쓰고 다니는 건 인생에서 두 번이면 충분하기도 하다.

게다가 무엇보다…….

“그냥 이대로 가겠다.”

“어째서?”

“동료들에게도 내가 무사하단 소식이 전해질 수 있으니까.”

다만 아스타롯타는 이런 내 결정이 이해가 안 되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한심하게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대보고 자유롭게 행동하라 한 것이 폐하이니 별말은 하지 않겠다.”

“그럼 하지 마.”

“근데 그런 마음가짐으로 정말 재상을 죽일 수 있겠나?”

걱정기는 전혀 묻어나지 않는 무미건조한 목소리.

다만 그 물음에 숨겨진 의미를 알아듣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만에 하나라도 왕이 내건 조건을 지키지 못하면 더 최악의 상황이 올 텐데 감당할 수 있겠냔 거겠지.

하나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걱정 마라.”

기록의 파편석, 과거로의 시간 여행, 그 외 등등등.

지금의 나는 운명을 믿는다.

“이미 후작은 뒈진 목숨이니까.”

아이스록 원정 때부터 정해진 운명이었다.

***

개벽궁을 나서며 처음으로 든 감상은 웃기다였다.

정문을 향하면서야 처음으로 이 궁전의 외관을 볼 수 있었으니까.

“와……. 말로만 들었지 정말 으리으리하네요…….”

어찌 보면 모든 역사를 통틀어 봐도 지하에서 들어와 정문으로 나간 인물은 우리가 최초이지 않을까.

“왕궁에서 나갈 때까지는 창을 닫고 조용히 있어라. 너희가 개벽궁에서 나왔다는 건 알려져서 안 되니.”

“…알겠다.”

그렇게 개벽궁을 나가는 마차에는 나와 레이븐, 아스타롯타가 탔고, 마부는 수호기사단원 중 한 명이 맡았다.

“근데 너는 이렇게 왕궁을 벗어나도 되는 건가?”

“같이 가달라 한 건 그대였을 텐데?”

음, 뭐 그건 그렇지.

정확히는 개벽궁 내에 있는 모든 수호기사단원을 차출할 수 있냐고 물어봤더니, 자신밖에 안 된다고 말한 거긴 하지만.

“신경 쓰지 마라. 폐하의 명이었으니까.”

“음… 그래도 전쟁 중인데 수호기사단장이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건가?”

내 질문에 녀석이 시크하게 웃었다.

“그깟 반역도들에게 발을 허락할 만큼 쉬운 곳이 아니다.”

“뭐, 그렇다니 나야 좋기는 한데…….”

사실 아직까지도 얘랑 같이 다니는 게 올바른 선택인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일단 전투력 하나는 확실할 거 같긴 한데…….

얘랑 다니면 내 행적 모든 게 왕에게 바로 전달될 것 아닌가. 혹시 모를 상황에서 능동성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래도 아직 현 상황에 대해 모르는 게 많으니까. 얘가 있으면 훨씬 수월하겠지.’

이내 개벽궁에서 출발한 마차는 개벽궁 주위에 위치한 12궁들을 지나쳐 황도로 들어섰고, 그 과정에서 나 역시 그 현장을 볼 수 있었다.

“전쟁 중이라는 게 확 실감이 나네.”

작위 수여식, 승작식, 개선식 등의 행사로 인해 몇 번이나 방문한 이력이 있으며, 그로 인해 내게는 12궁 중 가장 익숙한 ‘영광의 궁’.

“이. 이게 우레…….”

그 커다랗고 웅장하던 궁전은 온데간데없고, 그 잔해만이 산처럼 수북히 쌓여 있다.

또한, 수많은 병사들이 잔해들을 치우고 있으며 바위 하나를 들어 올릴 때마다 시체가 나타났다.

“신원은?”

“자세한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일단 입고 있던 복장에서 나르튈 백작가의 인장이 발견됐습니다!”

“나르튈 백작이실 수도 있으니 최대한 정중하게 모시도록!”

“예!”

마차를 타고 잔해 사이에 만든 비좁은 길을 지나고 있자니 들려오는 생생한 현장의 대화.

“……이번 사태로 귀족들이 많이 죽었나?”

“당시 군사령부다 뭐다 해서 수많은 귀족들이 모여 있던 상황이었으니까. 민간에서는 우스갯소리로 귀족 중 절반이 죽었다는 얘기도 도는 모양이더군.”

귀족 중 절반이라…….

엄밀히 말하자면, 작위 귀족 중 절반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하나 그것만으로도 현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어쩌면 후작이 그것까지 계산하고 전부 불러모은 걸 수도 있겠군.”

“있겠군이 아니라, 정보부에서는 그럴 거라 확신하고 있다.”

음, 근데 그렇다면 여기서 또 한 가지가 의문이다.

후작이 모든 일의 주동자란 건 알겠는데, 그럼 왜 나보고 이틀 동안 감옥에서 지내라 했던 걸까.

후작 입장에선 차라리 내가 저기에 휘말려 죽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런 내 의문을 들은 아스타롯타는 이렇게 답했다.

“글쎄, 재상도 그대가 저기에 깔려도 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거겠지.”

어, 확실히… 나 스스로도 내가 저기 휘말려서 죽는 모습은 상상이 안 가긴 하는데…….

‘작위 귀족이 저만큼 죽었으니 난리도 아니겠네. 아예 없어지는 귀족가도 있을 거고… 근데 계승식은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한 번에 하려나? 그래도 좀 나이대가 젊어지긴 하겠네.’

살짝 벌어진 창틈으로 무너진 궁전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레이븐이 중얼거렸다.

“……없겠네요.”

“응? 뭐라고 했나? 못 들었다.”

“그냥요……. 이번 전쟁이 어떻게 끝나든, 우리가 알던 세상과는 전혀 다를 거 같아서요.”

어딘가 두려움에 젖은 듯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15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726화 시한부 (5) 15

726화 시한부 (5)

드르륵, 드륵…….

황도 카르논의 도로에 들어선 마차가 덜컹이며 앞으로 나아간다.

평소 현대만큼이나 깨끗하고 잘 관리되어 있던 카르논의 도로는 평소와 달랐다.

파손되어 깊게 패인 도로.

굴러다니는 돌과 부서진 목재들.

물론 암만 어수선해도 진짜 전쟁터가 되었을 여타 구역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카르논의 도로야 무거운 군 보급 물품과 공사 자재들이 매일 왔다갔다 하는 반면 도로를 관리할 인력이 없어서 이렇게 됐을 뿐이니까.

전쟁이 끝나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깔끔해질 것이다.

여타 구역… 아니, 정확히는…….

‘7구역과는 다르게.’

아직 직접 본 건 아니고 상황을 말로만 들었을 뿐이지만, 나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내 본거지나 다름없는 7구역이 지금 어떤 꼴을 하고 있을지.

‘……이건 나중에 생각하자.’

7구역에 들어간 내 자금과 여러 노력들이 떠올라 속이 쓰려왔으나, ‘손실’에 관한 건 모든 게 끝난 후에 정리해도 늦지 않을 터.

“어디로 갈 거지?”

“5구역으로.”

이내 카르논 군용 승강장에 도착한 나는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5구역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니아 라프도니아!”

아스타롯타의 왕실 문양을 보자마자 바짝 얼어붙은 병사들을 지나쳐 밖으로 나간 순간.

콰아아앙-!

꽤나 멀리서 폭음이 들려온다.

하나 놀랍게도 승강장 앞을 지나다니던 병사들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아니, 여유롭다고 하는 건 좀 그런가?

“…….”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퀭한 눈으로 제 할 일을 하기 바쁜 병사들.

덕분에 한 줄의 설명보다도 명확하게 이해가 됐다.

퍼어어어엉-!

여기는 이게 일상인 거구나.

“어디로 갈 거지?”

“일단 좀 둘러보고.”

말로 백번을 들어도 한 번 보지 못하면 알지 못하는 것도 있는 법.

나는 우선 주변을 돌아다니며 전쟁터가 되어버린 5구역을 눈에 담았고, 가끔 궁금한 게 생기면 아스타롯타에게 질문했다.

“여기는 그래도 꽤 안전한 모양이군. 보아하니 뭐 터지는 소리도 저 멀리서만 들리고.”

“아무래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장소니까. 다른 지역에 비하면 몇 배는 더 진형 구축에 공을 들였을 거다.”

“아, 군용 승강장 때문에?”

“그렇지.”

하긴, 내가 사령관이었어도 군용 승강장만큼은 어떻게든 지키려 했을 거 같다.

이거만 있으면 노아르크에게 점거당하지 않은 모든 구역에서 보급과 지원을 받을 수 있으니까.

‘최악의 경우엔 도망치는 것도 가능하고 말이지.’

어쨌든, 그렇게 마실 나온 귀족처럼 주변을 구경하고 있자니 곳곳에서 나를 알아보고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야, 얀델 남작이다…….”

“건물이 무너진 걸 마지막으로 실종됐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남작이 왔다는 건… 이제부터 뭔가 전황을 바꾸려는 징조일 수도 있겠구려.”

“윗사람들 생각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나. 그냥 우린 우리 일만 하면 그만인 것을.”

쩝… 그냥 얼굴 좀 가리고 나올 걸 그랬나?

‘…그래도 알아볼 애들은 다 알아봤을 거 같긴 하지만.’

여하튼 이후로도 계속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니 군용 승강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진지의 최외곽부에 도착했다.

‘마르타 형제 무구점.’

첫 탐사를 끝내고 장비를 처분할 때 에르웬의 소개로 왔던 장소.

당연한 말이지만 늘 사람이 붐비던 가게는 어둡게 불이 꺼진 상태로 문이 닫혀 있었고, 이는 도로도 비슷했다.

5구역의 수많은 유동 인구를 감당하던 드넓은 도로에는 높게 바리게이트가 쳐져 있으며 그 위에는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다.

‘저 너머부터는 노아르크 놈들 땅이란 거지?’

듣자 하니 노아르크 놈들의 공세가 하도 좋아서 이 바리게이트가 점점 뒤로 밀려나고 있다는 모양.

“밖으로 나갈 건가?”

“그건 아직 생각 중이다.”

어느 정도 시찰을 마치고서는 마지막으로 하수도를 확인했다.

노아르크 측에서 하수도를 통째로 무너뜨려서 여길 통로로 쓸 수는 없단 말을 듣긴 했지만, 그래도 한 번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못 쓰겠네.’

하수도 입구를 타고 얼마 내려가지도 않았는데 계단이 잔해들로 막혀서 더 진입할 수가 없다.

뭐, 잔해를 치우면서 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기는 할 테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흠, 그러면 결국 동료들에게 가려면 적진 한복판을 돌파할 수밖에 없다는 건데…….

“아스타롯타, 지금 4구역은 상황이 어떻나?”

“그 어느 구역들보다 치열하다고 들었다. 사실상 노아르크의 본대가 주둔 중인 상황이니까. 오르큘리스의 단장도 그곳에서 계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더군.”

오우… 그 새끼가 저기 있다고?

‘얘는 좀 까다로운데.’

20년 전 과거에서 만났을 때야 꼼수를 써서 어떻게 비벼보긴 했지만, 걔도 병신이 아니라면 똑같은 방법에 또 당해주진 않을 터.

‘게다가 본대도 있다고 하니까…….’

오케이, 4구역은 얼씬도 하지 말아야겠네.

“그럼 8구역은?”

“반역도 무리들이 점거한 후 잠잠한 상태다. 며칠간 왕가군이 탈환을 시도했지만 오르큘리스의 핵심 멤버들이 지키는 탓에 번번이 실패했다더군.”

“핵심 멤버?”

더 자세한 정보를 요구하자 아스타롯타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들이 쏟아져 나왔다.

혈기사, 검은 발톱, 절규의 마녀.

그리고 시체 수집가 등등…….

‘뭐야, 핵심 멤버라기에 누군가 했더니만.’

일전에 저기에 ‘등대지기’까지 껴서 전투를 해본 적이 있던 나로서는 8구역이 가장 만만해 보인다.

뭐, 얼마 전에 데뷔해서 아직 이명도 받지 못한 ‘루키’들이 있다고 하니 생각만큼 쉽지는 않겠지만.

“그럼 5구역에서 7구역으로 가는 길은 어떻지?”

“5구역의 최전선은 마안이 지휘 중이고, 7구역에는 제3군이 주둔하며 지원을 해나가는 중이다.”

“제3군이라면……? 엘토라 테르세리온이 사령관으로 있던 거기를 말하는 거냐?”

“정보 통제로 인해 민간에서는 제3군이 궤멸한 줄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며칠 전 재상과 함께 반역 무리에 가담했다.”

얘기를 마저 들어보니, 제3군의 대부분은 엘토라 테르세리온에 의해 강제로 반역 세력에 가담했기에 상황만 주어지면 그 안에서도 내분이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모양.

“또한 정보에 따르면 엘토라 테르세리온은 이 계획을 알지 못했고, 사건이 터졌을 때도 거절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엥? 근데 그런 놈이 저기 있다고?”

“재상이 뭔가 강압적인 수를 쓴 것이겠지.”

하긴… 생각해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야 재상 아들내미는 ‘악령’이니까.

진짜 핏줄이 이어진 부친도 아니고, 재상이 볏짚을 둘러메고 불 속으로 뛰어드려는데 기꺼이 함께할 리가.

‘……어쩌면 이게 나중에 키가 될지도.’

이후로는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생각을 정리했다.

7구역을 지나쳐 내 동료들이 있는 바바리안의 성지에 도착하기까지, 최적의 동선은 무엇인가.

그 답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9구역으로 가야겠군.”

단순 거리로만 따지면 5구역에서 출발을 하는 게 가장 짧지만, 그만큼 위험도가 높았다.

5구역에서 지휘 중이라는 마안은 그렇다 쳐도, 5구역은 노아르크 본대가 있는 4구역과 맞닿아 있으니까.

‘혹시 그 단장놈이 튀어나올 수도 있고 말이지.’

그런 판단으로 내린 결정에 아스타롯타는 어깨를 으쓱했다.

“9구역으로 가겠다는 건 8구역을 지나쳐서 가겠단 뜻이겠군.”

“그런데 왜 문제라도 있나?”

내 물음에 아스타롯타는 피식 웃으며 한마디를 뱉을 뿐이었다.

“시체 수집가를 주의해라. 이번 전쟁을 위해 아주 오랜 기간 준비한 모양인지 활약이 엄청나다고 하더군.”

어…….

진짜 날 생각해서 하는 말인 거 같긴 한데…….

피식.

딱히 도움은 되지 않는 조언이었다.

“그래 봤자 그놈이 그놈이지.”

이미 상성상 독 네크 따위에게는 지고 싶어도 질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

군용 승강장을 타고 9구역으로 이동하기 전.

나는 ‘계획’에 필요한 몇 가지를 아스타롯타에게 미리 요구했고, 녀석은 과할 수도 있는 모든 요구를 흔쾌히 들어주었다.

고로, 모든 준비는 끝.

‘이제 신호만 오면 되는데…….’

굳게 닫힌 성문 앞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자니 긴장한 표정의 레이븐이 보인다.

“레이븐, 뭘 그렇게 초조해 하는 거냐?”

“그럼 안 초조하겠어요? 저는 이렇게 막무가내일 줄은 몰랐단 말이예요.”

아무래도 레이븐은 내가 뭐 군대라도 동원해서 싹 밀고 들어갈 줄 알았던 거 같았다.

거, 그러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 줄 알고.

“너무 걱정 마라. 어중간하게 사람이 많은 것보다는 아예 소수로 움직이는 편이 나을 때도 있으니까.”

“하… 그걸 지금 위로라고…….”

“정 불안하면 그냥 따라오지 않고 남아도 되는—.”

“됐어요. 안 따라가면 더 불안할 거 같으니까. 게다가 다들 모르는 사람인 것도 아니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정이 많은 녀석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고 있자니 아스타롯타가 다가온다.

왠지 모르게 즐거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뭐, 할 말이라도 있나?”

“새 소식들이 있어서. 5구역의 사령부에서 연락이 왔다. 네 요구들은 내일 오전쯤에 이행될 거다.”

“…꽤 늦군?”

“땡깡부리지 마라. 그쪽도 그 정도의 준비 시간은 필요할 테니까.”

음… 그건 그렇긴 했지.

“아무튼… 소식들이라고 했단 건 더 말할 게 있단 뜻인 거 같은데?”

“아, 이걸 깜빡할 뻔했군. 실종됐던 네 동료들 중 두 명이 발견됐다.”

그 말을 듣자마자 심장이 크게 일렁였다.

“누구지?”

현재 성지에 들어가 있는 클랜 단원들과 떨어져 소식을 알 수 없는 인원은 총 네 명이었다.

스벤 파라브, 리리스 마로네.

그리고 아우옌 록로브와 아멜리아.

“…빨리 말해라.”

“진지하기는. 발견된 2인은 아우옌 록로브와 에밀리 레인즈다.”

“지금 둘은 어디 있지?”

“4구역에.”

“……4구역에 있다고?”

“세작이 전해온 보고에 따르면. 4구역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하는 사건이 있었다는데, 그 범인이 바로 그들이라더군.”

“그래서 그 둘은 어떻게 됐지?”

“그건 우리도 모른다. 하나 다행히 그 자리에서 무사히 도망쳤다고 하는군.”

후…….

7구역에서 무리와 떨어진 걔네가 어쩌다가 4구역까지 가 있는 걸까.

그 사정이 궁금하면서도 너무나 걱정된다.

“…너무 걱정 마세요. 그분이라면 분명 자기 한 몸은 알아서 잘 챙기실 테니까.”

“……그렇겠지.”

당장 4구역으로 달려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최대한 이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을 하면 최악의 경우만 떠오르니까.

늘 그랬듯, 불안한 예감은 씨가 되어 싹을 틔운다.

“레이븐, 내일 아침에나 시작된다고 하니 그동안 아무 데나 들어가서 잠깐 눈이라도 붙여라.”

이런 휴식도 오늘이 마지막.

내일이 되면 아침부터 고된 나날들이 시작될 터.

그 전까지 나도 휴식이나 좀 취하려 했으나, 모든 사건 사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때 터진다던가?

드르르륵, 드르르륵, 드르르르륵.

절대 나서는 안 되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온다.

드르륵, 드르르륵.

도르레가 작동하며 닫혀 있던 성문이 열리는 소리.

“뭐, 뭐죠? 갑자기 성문이 왜 열리는 거예요? 혹시 쳐들어오는 건 아니겠죠? 이, 이렇게 되면 계획이 시작부터 어긋날 텐데…….”

에이, 설마.

아닐 거다.

뭔가 병사가 실수한 거겠지.

이쪽 성벽에서는 아직 전투 한번 펼쳐진 적이 없다던데. 애초에 황도를 향해야 할 노아르크 놈들이 옆으로 세력을 확장할 이유가 없기도 하고.

그런 긍적적인 생각들은 스쳐간 순간 바로 집어 던졌다.

그야 내 팔자에 그럴 리 없으니까.

“준비해라.”

실제로 내가 말을 끝냄과 동시에.

툭-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진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툭, 투툭. 툭-!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묵직한 소리.

콰직-!

“꺗!”

이내 그것이 눈앞에 떨어진 후에야 나는 정체를 깨달았다.

“사람 시체……?”

시체 골렘에서 떼어낸 것처럼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시체. 그런 시체가 저 높디 높은 성벽을 넘어 이곳에 떨어졌다.

그리고…….

“레이븐, 뒤로!”

콰지지지짓-!

땅에 떨어진 시체들이 일제히 터지며 독액을 흩뿌리는 걸 기점으로.

“습격이다!!”

성벽에 서 있던 병사들의 외침과 함께 곳곳에 설치되어 있던 경종이 크게 울리기 시작한다.

대앵-! 대앵-! 대앵-! 대앵-!

종소리를 듣고 나온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 한복판에서 나는 조용히 장비를 점검하며 반쯤 열린 성문 쪽을 확인했다.

[그르르르륵!!]

마차 하나는 충분히 지나갈 만큼 열린 성문 아래로 나름 익숙한 시체 군단이 들어서고 있었다.

“마, 막아라!!”

“니아 라프도니아……!”

성벽 주둔군이 즉각 대응하기는 했으나, 시체 군단을 막아서기엔 역부족이었다.

애초에 조심해야 할 건 시체뿐만이지 않았고.

콰아아아아아앙-!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이 병사들 한복판에 내리꽂히며 순식간에 전선이 와해된다.

또한 그와 동시에.

[그르르르륵—!]

막혀 있던 둑이 무너지듯 해일처럼 밀어닥치기 시작한 시체 군단.

“야, 얀델 씨?”

“너는 여기 있어라. 아스타롯타, 너는 얘를 지키고.”

“그러지.”

레이븐을 안전한 곳에 맡긴 후, 나는 망치로 시체들의 뚝배기를 깨가며 성문으로 향했다.

그야 완전히 개방된 성문 너머로 ‘키메라’ 위에 올라탄 채 위풍당당하게 도시에 들어서는 녀석이 보였거든.

“이거야 이거야 원! 그깟 성문 하나 열렸다고 이렇게 사족을 못 쓰다니! 어지간히 방심을 했던 모양이군요! 피시시싯!”

이 새끼는 혼자서도 저러고 다니네.

“오늘부로 9구역 역시 우리 오르큘리스의 지배를 받는 것을 공식 선포하는 것……!”

응?

“……어어?”

갑자기 왜 말을 하다가 말아.

“비요른… 얀델……?”

아, 눈이 마주쳐서 그렇구나.

19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727화 배신자 (1) 19

727화 배신자 (1)

‘네가 여기 왜 있어?’

라는 대사를 오로지 눈만으로 표현하는 녀석.

어쩌면 이 녀석에게 ‘연기’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한편으로는, 녀석의 심정도 이해가 됐다.

본의 아니게 왕한테 붙잡혀 있느라 며칠 동안 밖에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던 게 나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겠지.

뭐, 여기 오기 전에 5구역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걸 얘네가 어떻게 정보를 얻었을 수도 있긴 하지만…….

‘그랬으면 오히려 더 놀랐으려나?’

음, 그랬을 거 같다.

5구역에 있어야 할 새끼가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냐는 느낌으로.

“아, 오랜만이다.”

피식 웃으며 말하자, 녀석도 정신이 들었는지 굳은 입가 근육을 겨우 움직여 답했다.

“…피시싯. 최근에 지원을 많이 받아서 말이지요.”

평소처럼 여유롭게(?) 답하는 녀석이었지만, 속은 그렇지 않다는 걸 훤히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일정 수준에 도달한 소환수들은 따로 명령을 하지 않아도 소환사의 의지에 따라서 반응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피, 피시싯…….”

녀석이 어색한 웃음 소리를 뱉기 무섭게 녀석이 타고 있던 키메라가 기세 좋게 내뻗던 앞발을 회수하며 뒷걸음질치기 시작한다.

“어디 가게?”

주변에 가득한 시체 병사들을 망치질 한 번으로 싹 박살 내며 묻자 녀석이 말까지 더듬으며 답한다.

“그… 역시 밤에 기습하고 그런 건 비겁한 거 같아서 말입니다… 피싯……. 다, 다음에 또 보지요!”

얘는 지금 자기가 뭐라 하는지 알고 있기는 한 걸까.

알 수 없으나, 기회를 놓치지 않는 전사의 직감은 포착했다.

제일 후방에 있어야 할 ‘네크로맨서’가 최전선에 모습을 드러냈다.

솔직히 말해 이유는 모르겠다.

뭐, 굳이 꼽자면 그냥 허세 부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한데…….

아무튼, 이건 중요한 게 아니고.

두근—

만약 여기서 이놈의 뚝배기를 깨버릴 수 있다면.

‘음, 그것도 나쁘진 않겠는데?’

아니, 정정하겠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최상의 상황이다.

안 그래도 이놈 역시 내 살생부에 이름을 올린 녀석이니까.

“그냥 가는 게 어디 있어? 잠깐 이리 와봐라.”

쭉 뻗은 망치를 까딱이며 부르자 아예 등까지 돌리고 달아나기 시작한 키메라.

“아니, 잠깐이면 되니 이리 와보라니까? 그냥 얘기 좀—.”

거듭된 설득의 말에도 반대편으로 등을 돌린 4족 보행 키메라의 발은 점점 가속할 뿐이었다.

“바,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거, 말만 좀 하자니까.

진짜 눈치는 빨라 가지고.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이내 [거대화]로 몸집을 키우며 앞으로 달려나간다.

뭐, 내가 성문 밖으로 나간 바람에 시체 군단을 막을 사람은 사라지겠지만…….

‘알아서 잘 막겠지. 이 정도면 대비할 시간은 충분히 벌어줬으니까.’

게다가 아예 기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보폭을 늘리기 위해 사용한 [거대화]였지만, 의외의 효과도 있었으니까.

쿠웅! 쿠웅!

묵직한 발소리를 내며 달리기만 해도 전투용으로 개조된 시체들이 짓밟히며 터져 나간다.

바로 이렇게.

콰직-!

아, 물론 그럼에도 거리는 쉽사리 좁혀지지 않았다.

[도약] 같은 이동 스킬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큰 도움이 됐을 테지만, 애석하게도 내 방패바바의 이동 기제는 맞추지 못했으니까.

쿠웅-! 쿠웅-!

그래서 우직하게 커다란 몸을 이끌며 녀석을 뒤따랐고, 녀석은 나를 떨어뜨리기 위해 온갖 수를 다 써댔다.

「아벳 네크라페토가 [시체폭발]을 시전했습니다.」

개조된 시체들을 터뜨려 독액을 분출하거나.

「아벳 네크라페토가 [돌의 저주]를 시전했습니다.」

CC기를 걸고.

거대한 시체 괴물을 앞에 세워 가로막거나.

별 이상한 연막 같은 걸 피워서 시야를 교란하는 등.

제 딴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지만 전투 관련으로는 거의 70% 이상 완성된 방패 바바를 막기란 불가능.

“이익……! 이건 반칙 아닙니까!!”

어찌 보면 이렇게 극찬이 터져 나오는 것도 전부 다 정해진 수순이었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저지할 수 없는 탱커라는 건, 원거리 계열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었으니.

“이만 포기하고 멈춰라! 지금이라도 멈추면 대화로 해결하겠다! 전사의 명예를 걸고 맹세—.”

“거짓말 마십쇼! 몸의 대화라도 하려는 거겠지!”

쓰읍, 어떻게 알았지?

쿠웅-! 쿠웅-!

결국 나도 대화를 이용한 회유(?)는 포기하고서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사실 급할 건 없었다.

그냥 이대로 뛰고만 있어도 천천히 거리가 좁혀지긴 했거든. 아무래도 저쪽도 나만큼이나 이동 기제가 부실했던 모양인데…….

‘좀 웃기긴 하네.’

쟤도 옛날엔 훨씬 더 포스가 넘치는 놈이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바로 등 돌려 도망치게 됐다니.

그때 이후로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구나.

쿠웅-! 쿠웅-!

아무튼, 그렇게 대화가 끊긴 상태가 이어지며 서서히 거리가 좁혀지고 있자, 녀석의 입을 통해서 불평의 말이 터져 나온다.

“아악! 비요른 얀델……! 애초에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냔 말입니다!”

“…응?”

이건 또 뭔 소리래?

그냥 당황스러워서 하는 말은 아닌 거 같은데.

“다들 뭐라도 좀 해보십쇼! 저 괴물이 날뛰게 그냥 둘 겁니까?”

동료들에게 말하듯 소리치는 시체 수집가.

하나 그럼에도 지원 마법이 날아들거나 누군가가 영웅처럼 등장해 그를 구원하는 일은 없었고, 이에 녀석의 목소리에 담긴 울분도 커졌다.

“자꾸 무시할 겁니까! 당신들 잘못이잖아! 비요른 얀델이 5구역에 있으니, 9구역을 건드려서 신경을 분산시키자고 한 건!”

오, 그런 사정이 있었어?

소 뒷걸음질치다가 쥐 잡은 격이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5구역에 모습을 드러냈던 게 놈들의 계획에 초를 치는 것으로 작용—.

“오빠, 그게 왜 우리 잘못이야? 탓할 거면 단장이나 부단장 오빠한테 해야지.”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익숙한 얼굴의 여자가 빗자루 하나를 타고서 낮은 고도로 날고 있다.

절규의 마녀, 리란느 비비앙.

“그리고 우리는 처음부터 말했잖아. 나대지 말고 뒤에 있으라고. 근데 굳이 선봉을 맡겠다고 나간 건 오빠였던 거로 기억하는데!”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애초에 왜 이제서야 나타난 거고! 아무 마법이든 좋으니 어서 저놈을—.”

“엑……? 그건 싫은데.”

절규의 마녀가 질색하는 표정으로 거절했다.

“……예?”

“그때 기억 안 나? 마법을 쓰는 족족 반사해대는 괴물을 대체 나보고 어떻게 막으라고?”

아무래도 이미 사라진 ‘가챠본의 정수’를 말하는 듯했지만, 사실 큰 의미는 없었다.

그것보다 훨씬 좋은 방어 스킬이 생겼으니까.

「캐릭터가 [탐욕의 비늘]을 시전했습니다.」

고로, 만에 하나를 대비해 미리 드래곤 모드를 활성화했다. 물론 이 스킬에는 ‘반사’ 매커니즘이 없기는 하지만…….

사실 그건 큰 의미가 없다.

누적된 피해량에 비례해 스택을 쌓다가 한 번에 터트릴 수 있는 [아이기스의 용갑]의 사용 효과가 새로 생겼으니까.

‘아쉽게 됐네.’

차라리 좀 때려서 스택 쌓는 거나 도와주지.

물론 날 상대하는 적들 입장에선 소름이 돋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이게 팩트인—.

“그러니까 손 잡아요, 오빠.”

응?

“손을 잡으라니?”

“둘이서 타려면 좀 무리하긴 해야 하는데……. 그런 걸 가릴 상황이 아니잖아요?”

듣고 있던 바바리안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대화였다.

‘니미럴.’

명색이 오르큘리스 정예라는 놈들이 도망칠 생각부터 한다고? 이대로면 닭 쫓던 개처럼 지붕이나 쳐다보게 될 판이었다.

따라서…….

‘아, 그게 있었지.’

아공간에서 꺼낸 손도끼를 있는 힘껏 앞으로 던진다.

실전에서 쓸 일이 거의 없어서 곧장 생각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틈틈이 연습을 했던 덕분인지 원하는 지점으로 힘차게 날아가는 손도끼.

“꺄앗!”

손을 맞잡으려던 비비앙이 황급히 방향을 틀며 겨우 손도끼를 피한다.

그리고…….

“어서!”

시체 수집가의 재촉에 다시금 손을 뻗으며 접근하는 비비앙.

이에 나 역시 한 번 더 손도끼를 투척했고, 저쪽도 대비를 했는지 곧바로 보호막이 켜진다.

아, 물론 큰 의미는 없었다.

스킬의 도움을 받지 않은 평범한 도끼 투척이지만.

후우웅-!

과도하게 발달한 근력은 스킬과 분간을 할 수 없으니까.

콰지지직-!

역시나 예상대로 손도끼에 맞자마자 허무하게 깨져 나가는 보호막.

“꺗!”

이내 보호막을 깨뜨리며 날아간 손도끼의 자루 부분이 관자놀이에 적중한 비비앙이 비명을 내지르며 빗자루에서 떨어져 바닥을 구른다.

그리고…….

“이런, 젠장!”

욕지거리를 뱉을 뿐, 자신을 구하려다 낙오한 동료를 수습하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시체 수집가.

“어, 어디 가!!”

“……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마법사는 대체가 돼도 나는 대체가 안 되니까!”

“지랄 말고 와! 와서 태워가라고! 개자식아!!”

“살 사람은 살아아지요……! 피싯……!”

열심히 쫓아가던 나조차 머리가 멍해질 정도로 졸렬한 대사.

“야! 이 개씨발 호로 자식아!!!”

끝내 비비앙이 절규하며 원망의 말을 토해냈지만 시체 수집가가 키메라의 머리를 돌리는 일은 없었다.

***

이대로 시체 수집가를 쫓을까.

아니면 얘 하나라도 확실하게 잡아야 할까.

잠시 고민이 됐지만, 결국 나는 한쪽 발목이 부러진 채 주저 앉은 비비앙의 앞에서 멈추었다.

“하, 어이가 없네.”

너무 충격적인 장면을 봐버렸더니,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쫙 풀렸달까?

“…항복.”

뭐래, 항복이 아니라 패배지.

터벅.

아무 말없이 다가가는 날 보며 비비앙이 까드득 소리를 내며 이를 갈기 시작한다.

놀랍게도 그 증오의 주체는 내가 아니었다.

“……오빠, 나 좀 그냥 살려보내주면 안 돼? 저 새끼는 내가 반드시 죽일 테니까……. 응?”

진심 100%가 느껴지는 눈빛.

이에 그냥 풀어주는 게 나한테 이득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응, 안 돼.”

단호하게 거절하며 망치를 들어 올린다.

“아니, 진짜로……! 오, 오빠가 해달라는 건 전부 다 해줄 수 있는데……. 응?”

본인의 외모와 성별을 무기처럼 이용하려 드는 비비앙이었으나, 애석하게도 상대가 잘못됐다.

그야 나는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라 진짜 남녀평등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K-바바리안.

여기서 내가 망치를 거두면 지금까지 죽어간 남자들이 억울해 할 것 아닌가.

스르륵.

남녀는 평등하다.

그 증거로, 망치로 후려치면 남자든 여자든 똑같이 머리가 박살 난다는 점에서 특히나—.

“동료들!!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가려는 거지!!”

응?

내가 망치를 든 채 멈칫하자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나를 바라보는 비비앙.

“…아, 아니예요?”

거, 이 상황에서도 떠보기는.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해라. 시간이 없으니까.”

“제, 제가 동료들이 있는 곳까지 제가 데려다줄 수 있어요! 아, 안전하고 편하게!”

흐음…….

“그 아니어도 여러 방면에서 도와드릴 수도 있어요! 마, 마법사 안 필요하세요?”

마법사는 있는데 이미.

“특히 그 개씨발 새끼를 잡는 거라면 내, 내 영혼도 바칠 수 있으니까……!”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지금 얼른 머리만 쪼개고 시체 수집가를 쫓아가면 어떻게 따라갈 수도 있을 거 같긴 한데…….

‘딱 10초만 더 생각해보자.’

그렇게 주어진 시간 동안 고민을 거듭하던 때였다.

“……배, 배신자!”

비비앙이 냅다 지른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응?”

“그쪽 동료들 중에 누가 배신자인지도 말해드릴 수 있어요!”

……이거 일단 들어는 봐야겠네.

22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728화 배신자 (2) 22

728화 배신자 (2)

언젠가 혼자서 몇 번인가 방문했던 4구역의 미술관.

노아르크의 침공으로 관리인 없이 버려진 그곳에서 한 여인이 벽에 걸린 그림들을 아공간에 집어넣고 있다.

“저… 에밀리 님?”

“훔치는 게 아니다.”

“…예?”

“이대로 내버려 두면 가치도 모르는 이들이 함부로 훼손할 수도 있으니까…….”

“아, 아… 예… 그렇군요.”

“절대로 내가 갖고 있다가 나중에 우리 집에 걸어 둘 생각으로 가져가는 게 아니다. 돌려달라고 하면 바로 돌려줄 생각이니까. 알겠나?”

“……예, 잘 알겠습니다. 한데 제가 말씀드리려던 건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부분이었는데…….”

아우옌의 말에 아멜리아가 무안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흘렸다.

“…말해봐라.”

“그… 별건 아니고… 아! 그리고 당연히 재촉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앞으로 계획이 어떻게 되는가 해서…….”

그 물음에 아멜리아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으로 턱을 짚었다.

그리고…….

“생각 중이다.”

“……예?”

“일단은 버틸 만하니까. 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지 않나. 답답해도 좀만 더 참아라.”

“아뇨, 아뇨! 전혀 답답하거나 그런 건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이후로도 아멜리아는 불 꺼진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미술품들을 아공간에 담았고, 아우옌도 옆에서 보조하며 이를 도왔다.

그리고…….

“저건 안 가져가시려는 겁니까?”

“저 작품들은 쓰레기다. 작가가 살아 생전 그렇게 어린 여자애들을 데리고 못된 짓을 일삼았다더군.”

“…불태워버리죠.”

그렇게 남아 있던 작품들을 불쏘시개로 쓰는 것을 마지막으로 아멜리아는 등을 기대고 휴식했고, 아우옌도 더 말을 걸며 귀찮게 하지 않았다.

“…….”

“…….”

그렇게 이어진 정적.

한참이나 시간이 흘러 창문 밖이 어두컴컴해질 시기.

아우옌이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에밀리 님.”

주어가 빠진 물음.

하나 그 뜻을 곧바로 이해한 아멜리아가 피식 웃었다.

“떨어지게 된 그때를 말하는 거냐?”

“예……. 만약 그때 제가 낙오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둘이서 떨어져 숨어 지낼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본대가 자신들을 버리고 퇴각한 날.

최전선에 있던 아우옌은 난전 중 날아든 화살을 피하지 못했고, 그대로 낙오했다.

아멜리아는 이를 보자마자 바로 구하러 등을 돌렸고, 구해내긴 했지만 클랜 단원들과는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여차저차 최대한 적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이동하다보니 도착한 곳이 바로 여기 4구역 미술관이었고.

“…죄송합니다. 제가 발목을 잡아서…….”

“죄송합니다가 아니다.”

“…예?”

“그럴 땐 고맙다고 하는 거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멜리아는 왠지 조금 우스워서 웃음이 나왔다.

‘미안하다가 아니라 고맙다라…….’

예전에 독기만 가득하던 자신이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대사.

그리 생각하니 문득 오묘한 외로움이 피어났다.

단지 사람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특정 누군가를 대상으로 시작된 감정.

‘…그사이에 뭔가 또 사고는 안 쳤을는지.’

그런 걱정을 하면서도 아멜리아는 깨달았다.

이게 바로 ‘보고 싶다’는 감정이며, 그 ‘보고 싶다’는 자신이 친언니에게 느끼던 것과는 조금 다르다는 걸.

스윽.

본능적으로 빛이 가장 적게 닿는 벽 뒤에 웅크리고 있던 아멜리아는 몸을 일으켜 창가로 향했다.

밝게 뜬 달빛이 가장 잘 들어오는 창가 자리.

원래 그녀는 이런 자리를 선호하지 않았다.

어릴 때 버릇은 평생 간다고, 어두운 곳이 심적으로 편했고 밝은 곳에서는 알 수 없는 거슬림을 느꼈다.

하지만…….

‘나쁘지 않군.’

포근한 달빛을 내리받으며 아멜리아는 조용히 읊조렸다.

“에밀리 레인즈.”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새롭게 만든 이름.

처음엔 그 이름으로 양지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만족스러웠는데.

내가 이렇게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던가?

“아멜리아 레인웨일즈.”

그녀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자신의 본명을 자기 입으로 내뱉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어쩌면 그림자 속에 숨어서 살아가는 삶은 이제 끝낼 때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신체에 생긴 이상 징후를 눈치챈 그녀는 빠르게 이능을 발현했다.

‘자가 복제.’

오랜 시간 동안 제 몸처럼 써왔던 그 이능이 발현되지 않았다.

그리고…….

“…욕심을 부린 벌인가.”

그녀는 그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

「캐릭터가 [불언령]의 범위 내에 들어섰습니다.」

「모든 정수의 스킬이 봉인됩니다.」

***

배신자.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몸이 굳으며 귓가가 쫑긋 세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회’를 이룰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능이랄까.

‘……어차피 지금 쫓기에는 살짝 늦기도 했으니까.’

시체 수집가를 추격하는 것은 그냥 여기서 쿨하게 포기. 다만 혹시 수작질에 당했을 가능성도 있기에 경고는 해두었다.

“만약 허튼 소리면, 꽤 아프게 끝날 거다.”

빈말로 하는 경고는 아니었고, 다행히 그 진심은 상대에게도 닿은 듯했다.

“…다, 당연하죠. 그래도 괜찮아요! 거짓말 같은 게 아니니까!”

“그럼 해봐라.”

가타부타 긴 말 할 것 없이 즉시 본론으로 들어가자 비비앙도 내 성격을 아는지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뒤 곧장 핵심부터 얘기했다.

“아루아 레이븐! 당신 옛 동료였던 그 마법사가 배신자예요!”

허허, 레이븐이 배신자였다라…….

듣자마자 망치를 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당연한 말이지만, 배신감을 느꼈다거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시간 낭비를 했군.”

이딴 개소리나 들으려고 내가 추격을 포기한 줄 아나?

그래, 지금이라도 얼른 해결하고 뒤따르면—.

“제가! 제가 직접 봤다니까요!”

보기는 뭘 봐.

저 헛소리를 더 들어봤자 시간 낭비란 생각이 들었으나, 놀랍게도 내 망치가 움직이는 것보다 저 여자의 입이 움직이는 속도가 더욱 빨랐다.

“황도 카르논이 불타고 있을 때! 그쪽이 분명 그 여자를 보면서 말했다니까요? ‘이렇게 배신 당할 줄은 몰랐는데…….’ 라고!”

“…혹시 약 같은 걸 하나?”

“아, 아니! 이상하게 보일 건 알아요! 그런데… 꺅! 잠깐만요! 망치 좀 내려놓고! 설명할 수 있으니까.”

“10초.”

“…네?”

“9초, 8초…….”

싹 무시하고서 초를 세기 시작하자 그 뜻을 이해한 비비앙이 다급하게 최종 발언을 시작했다.

“오, 오빠가 알진 모르겠는데, 1등급 흑마법인 [미래시]를 썼어요. 아! 무, 물론 저 혼자서 할 수 있던 건 아니고, 다른 흑마법사들도 많고 엄청난 지원까지 받아서 겨우 성공할 수 있던 건데…….”

“핵심만 말해야 할 텐데.”

“이번 일의 성패를 예언하기 위해 사용된 마법이었고, 그 마법은 실패로 끝났어요! 카르논이 불타는 건 봤지만, 가장 중요한 국왕 시해 장면은 보지 못하고 엉뚱한 장면만 봐버렸으니까!”

“……그게 레이븐이 날 배신하는 장면이었다는 거냐?”

“네! 맞아요! 제가 직접 봤다고 한 것도 그래서고요!”

흐음…….

이 정도면 조금은 더 들어봐도 될 거 같긴 한데.

“30초 추가.”

“……아니, 진짜라니까요?”

“그러니까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 설득할 수 있는 시간을 준 거다.”

“……30초 동안 내 말이 진짜인 걸 증명하라고요? 대체… 무슨 수로……?”

음, 글쎄?

“그건 네가 생각해봐야지.”

나야 뭐 그냥 시간이 지나도 답이 안 나오면 망치로 남녀평등을 증명하면 그만.

그런 마인드로 천천히 숫자를 세고 있자니 잠시간 침묵이 이어진다. 아무래도 30초 만에 어떻게 설득해야 할 지가 막막했던 모양인데…….

“15초 지났다.”

비비앙의 입이 열린 것은 제한 시간이 반을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증명할 수는 없어요.”

“십.”

“시간을 준다면 모를까.”

“구.”

“30초 안에는 절대 못 해요.”

“팔.”

“그러니까 그 시간에.”

“칠.”

“말해보려고요.”

“육.”

“그냥 절 죽이면 안 되는 이유를 말할게요.”

“오?”

이야, 마법사라 그런지 판단이 기가 막히네.

“인상 깊은 판단이군. 15초 추가다.”

매초 숫자를 세는 것도 귀찮았기에 이후로는 속으로만 시간을 쟀고, 그사이 비비앙의 승부수는 빠르게 이어졌다.

“지금 바바리안 성지로 가려는 거죠? 제가 거기까지 어떤 잡음도 나지 않게 데려다 줄 수 있어요.”

“나 혼자서도 갈 자신 있는데.”

물론 그 과정에서 조금 시끄러울 수는 있겠지만.

굳이 변수까지 만들어가며 적이었던 여자의 도움을 받을 이유는 없는 것.

그런 태도를 고수하자 비비앙도 예상한 듯이 바로 다음 제시안을 내놓았다.

“통신.”

“……?”

“제가 있으면 수뇌부들의 통신을 엿들을 수 있어요.”

“흐음…….”

“전체적인 움직임만 알아도 도움이 될 텐데요? 단순히 전략적인 부분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쪽 동료들한테 뭔가 일이 생겼을 때, 바로 알 수 있게 되는 거니까.”

“…….”

“여기까지 이상이에요. 이것도 필요없다고 하면 더 제시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까.”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래서… 어쩔 거예요?”

나름 당돌하게 말하던 그녀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잔뜩 겁에 질렸다는 게 느껴졌다.

하긴, 죽음 앞에 초연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그걸 알기에 나도 당시 그 녀석의 선택에 그렇게 많은 영향을 받았던 거고.

“일단 보류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도 없기에, 일단은 비비앙을 짐짝처럼 들고서 성벽으로 향했다.

우선 돌아가서 레이븐과도 상의를 해볼 생각이었다.

다만, 그 전에 이건 확실하게 말해둬야겠지.

“그 배신자 이야기.”

“네?”

“그 얘기는 누구한테도 하지 마라. 알겠나?”

“네, 네! 물론이죠! 제 입이 얼마나 무거운데요!”

무겁기는.

죽을 위기에 처하자마자 묻지도 않은 기밀을 술술 불더만. 이내 돌아가자 살짝 열린 성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레이븐과 아스타롯타가 보였다.

“얀델 씨!”

“여기는 그새 얼추 정리가 됐군?”

“그럴 수밖에요. 얀델 씨가 쫓아나가기 무섭게 시체들 대부분이 힘을 잃었거든요.”

음, 도망가느라 바빠서 컨트롤을 할 수 없던 건가?

알 수 없지만, 짧게 안부 인사를 끝내자마자 레이븐의 시선이 내 어깨로 움직였다.

“근데 그 여자분은……. 그 사람 맞죠?”

“아, 구면이지?”

“구면이 아니어도 알았을 거거든요.”

“아하하…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언니…….”

“……언니?”

“어? 아닌가요? 얀델 오빠보다 나이가 많은 거로 아는데……?”

당돌한 되물음에 잠시간 말을 잃은 레이븐.

“……성으로 부르세요. 저는 그런 호칭으로 부르는 걸 허락한 적 없으니까.”

“아하하… 알겠어요. 레이븐 씨.”

주변이 훤히 노출된 곳에서 나눌 말은 아니었기에 자세한 얘기는 근처 건물에 들어가 나누었다.

별로 길게 설명할 것도 없었다.

시체 수집가를 추격하다 얘를 잡은 것.

얘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며 날 설득한 것.

배신자에 관한 스토리를 빼면 결국 이 두 줄로 짧게 정리가 되니까.

“그래서 고민이란 거네요? 이 여자를 이용할지, 아니면 그냥 깔끔하게 처리할지.”

“어. 네 의견도 궁금해서 일단은 살려 데려왔다.”

“흐음… 그러면 일단 조건으로 내민 것부터 좀 확인을 해볼까요?”

레이븐이 비비앙에게 다가갔다.

“노아르크 측 상위 통신망에 접근할 수 있댔죠? 봐 봐요. 어쩌면 이미 접근 권한을 상실했을 수도 있으니까.”

“…헤헤, 그럴 일은 없을 걸요?”

“그러니까 확인시켜달라고요. 얼마나 중요한 정보가 오가는지도 알아야겠으니까.”

“좋아요.”

레이븐의 요구에 비비앙은 별말 없이 흑색 수정구를 꺼내 통신망에 접속했고, 통신망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다만…….

[지브네, 테르아, 디디바르.]

“지금 얘네들이 뭐라 하는 거냐?”

“군용 암구호예요. 아직은 정보부에서조차 제대로 해석하지 못할 걸요?”

“어쩐지… 너무 쉽게 통신망에 접속하더라니. 바로 보여 줘도 못 죽일 거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 정도 바보는 아니니까요?”

“됐으니까, 해석 좀 해봐요. 뭐라고 하는 거예요?”

“5-3 지점, 왕가 병력, 집결 낌새, 관측… 이라고 하네요?”

비비앙의 말과 동시에 레이븐과 나의 시선이 조용히 맞닿았다.

그야 5-3이 어디인지 듣자마자 알았거든.

내일 아침에 병력을 움직여서 시선을 끌어달라고 부탁한 게 나니까.

‘도청이라니… 나름 쓸 만할지도?’

그래도 성능 점검을 해야 하기에 계속해서 들리는 무전들을 해석할 것을 요구했다.

“13-2 지점, 소규모 전투 발생, 지원 요청.”

“5-1 지점, 경계 강화, 병력 지원 요청.”

“13-2 지점, 소탕 완료, 적 처치 31.”

“4-7 지점…… 어?”

무전이 들리는 대로 번역기처럼 내용을 해석하던 비비앙이 갑자기 움찔했다.

“무슨 내용이지?”

딴생각 하지 말라는 뜻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묻자, 비비앙이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4-7 지점, 엘, 침입자 2인 발견.”

“무슨 뜻이지? 조금 전에는 왜 움찔한 거고?”

내 질문에 비비앙이 조심스레 답했다.

“4-7이면 4구역이란 건데… 그… 침입자 2인이 아무래도… 얀델 씨 동료들인 거 같거든요.”

“…그럼 엘은?”

“리카르도 뤼헨프라하. 우리 단장 오빠를 뜻하는 단어예요…….”

니미럴.

17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729화 배신자 (3) 17

729화 배신자 (3)

오르큘리스의 단장, 리카르도 뤼헨프라하.

[불언령]이라는 특이한 능력을 가진 계층정수의 보유자.

PVP에서 매우 사기적인 성능을 지닌 만큼, 나조차 녀석과 마주치는 것은 아주 큰 부담으로 여겨진다.

물론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강해지긴 했지만…….

‘그때는 꼼수가 통했던 게 크니까.’

다시 만나면 진짜 죽을 힘을 다해 싸워야 할 거란 그런 생각이 바로 들 정도의 까다로운 상대.

‘그런데…….’

지금 그놈이 아멜리아랑 있다고……?

아니, 심지어…….

[브레트 치, 엘, 디에스 데트란]

“지금 뭐라고 한 거냐?”

“4-7 지점… 엘… 전투 시작…….”

전투가 시작됐다고……?

두근-!

심장 부근의 근육이 꽉 조여오며 일순간 숨이 막혀온다. 지금 당장이라도 군용 승강장을 타고 4구역으로 달려가고 싶은 기분.

그러나 한편으로 머릿속에서는 현실적인 부분을 따졌다.

‘군용 승강장을 타고 3구역으로 가고, 거기서 또 4구역까지 가려면…….’

3시간은 족히 걸린다.

그것도 전투 하나 없이 뛰기만 했다는 가정하에 나온 최소값이다.

물론 희망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때까지 아멜리아가 잘 도망치며 버텨 준다거나 할 가능성도 존재할 테지만…….

두근-!

이미 나는 알고 있다.

그건 내 희망 사항일 뿐이라는 걸.

현실적으로 적진 한복판인 장소에서 그런 괴물까지 상대해가며 그 오랜 시간을 버티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그렇기에 나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직접 갈 수는 없어.’

지금 출발을 해봐야 어차피 늦는다.

포기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게 팩트다.

그래, 그러니까…….

“4-7 지점… 침입자 2인, 도주 시작.”

생각해보자.

“4-7 지점, 추격대 지원 요청.”

내가 직접 가지 않고서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뭐지?

“아스타롯타.”

“말해라.”

“제5 성벽주둔군에게 요청할 수 있나? 아침까지 기다릴 수 없으니 최대한 빨리 시작해 달라고.”

“……전달은 하겠지만, 좋은 대답이 돌아오기는 어려울 거다.”

“그래도 괜찮으니 최대한 일찍 시작해달라고 해줘라.”

“그러지.”

그 말을 끝으로 아스타롯타는 5구역 주둔군에 연락을 취하러 잠시 건물을 나섰다.

그리고…….

“어떡하시려고요……?”

바짝 굳은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묻는 레이븐.

나도 이게 잘 통할지 확신은 없지만, 일단 생각하고 있는 것을 짧고 명확하게 말했다.

“시선을 끌 거다.”

“어떻게요?”

“바바리안식으로.”

“……마음 준비, 제대로 해야겠네요.”

너무나도 추상적인 설명이었으나, 레이븐은 그것만으로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대충 감을 잡은 듯했다.

“그래, 잘 해둬라. 어쩌면 그 어느 때보다 힘들어질 수도 있으니까.”

“……하아.”

내 경고에 한숨을 내쉬면서도 결의에 찬 눈빛을 짓는 레이븐.

이후 노심초사하며 통신을 도청했고, 아스타롯타가 돌아온 다음에는 녀석에게도 내가 하려는 걸 말했다.

“재상을 죽이기 위한 계획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단 게 맘에 걸리지만……. 내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겠지. 책임은 너의 몫이니까.”

“도와주겠단 뜻이냐?”

“나는 명을 따를 뿐이다.”

친구도 동료도 아니지만, 저 짧은 말이 굉장히 큰 심리적 안정감을 선사했다.

후, 그래도 개벽왕이 큰 선물을 주고 가긴 했달까.

“그래서 이 여자는 어쩌려고요?”

“흐음…….”

어째야 하나 이걸.

“…아이, 오빠! 또 또 그런다! 그렇게 겁 안 줘도 이상한 생각은 절대 안 할 테니까. 응?”

이 와중에도 저런 말투를 고수하는 비비앙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데리고 간다. 상황을 계속 들을 필요가 있으니까.”

“그럼 최소한의 안전 장치는 해둬도 돼죠?”

“으응……? 언니……?”

“언니 아니라니까, 자꾸 그러시네?”

“아아! 레, 레이븐 씨! 안전 장치라뇨? 헤헤헤… 지, 진짜 그런 거 할 필요 하나도 없는데!”

“걱정 마요. 위험한 건 아니니까. 딴생각을 품지만 않으면.”

그 말을 끝으로 레이븐이 아공간에서 엄지 손가락만 한 알약(?) 하나를 꺼냈다.

“자, 물이랑 같이 삼켜요.”

“이게 뭔지는 알아야…….”

“일단 먹으면 알려 줄게요.

“아, 아니, 그래도 사람이 먹는 건데… 뭔지는 알—.”

“얀델 씨, 이 사람 딴생각 하고 있는 거 같은데요?”

레이븐이 눈짓을 보내는 게 적당히 지원 사격을 해줄 타이밍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그런 거 같군.”

“아아! 알았다고요! 먹을게요! 먹는다고요!”

위협적으로 다가가자 발작을 일으키며 레이븐이 건넨 알약을 삼키는 비비앙.

꿀꺽-!

잘 된 일이긴 한데 뭔가 찝찝했다.

‘얘는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하지?’

딱히 그렇게 겁을 준 거 같지도 않은데.

“마, 망치 좀 내려놔요! 제발! 무서워 죽겠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얘 앞에서 ‘등대지기’인가 뭔가 하는 놈 뚝배기를 깨부쉈었지.

스르륵.

이내 망치를 내리자 조금은 진정이 됐는지, 비비앙의 목소리가 원래 텐션을 되찾았다.

“…자, 됐죠? 먹었으니까 이제 말해줘요. 이게 뭔데요? 독약 같은 거예요?”

“에이, 설마요. 제가 독약처럼 고리타분한 걸 먹였을 줄 알고요?”

음, 나는 무조건 독약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야 클리셰잖아?

악의 집단이 고독 같은 걸 먹여서 무림 고수들을 세뇌 지배하는 건.

“그냥 평범한 마도 장치예요.”

“마도 장치……?”

“마공학자 알죠? 그 사람이 만들어서 군납했던 만큼 안전성은 걱정 안 해도 돼요.”

“……아니, 그러니까 무슨 마도 장치인 건데요…….”

갑과 을이 명확한 상태에서 대화를 이어나가다보니 아예 레이븐의 기에 눌렸을까.

아까보다 확연히 움츠러든 목소리.

다만 레이븐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리모컨 같은 걸 꺼내며 말했다.

“자, 보이죠? 이 버튼.”

“네…….”

“이 버튼을 누르면 아까 삼킨 게 터져요. 뱃속에서.”

친절하고 간단한 설명에 비비앙은 말을 잃은 반면, 나는 납득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독약이 고리타분하단 말도 일리가 있다.

그야 인질에게 폭탄 조끼를 입히는 건 현대에서나 쓰이는 전략이니까.

훨씬 더 세련 됐달까.

“음… 이해가 안 돼요? 이상하네. 그러니까 그냥 여기 이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이해했어요! 그니까 그것 좀 얼른 아공간에 넣어 봐요!”

나는 조용히 비비앙의 반응을 지켜봤다.

저 표정이 연기일 거 같지는 않으니, 레이븐의 말을 100% 믿은 듯한데…….

‘그나마 배신 걱정은 좀 덜해도 될 거 같고…….’

그렇게 깔끔하게 뒤통수 걱정까지 해결한 나는 레이븐과 아스타롯타에게 앞으로의 상세 계획 내용을 공유했다.

다행이도 아스타롯타의 반응은 무난한 편이었다.

“난장판을 만들겠다는 말을 길게도 하는군.”

“그럼 왕가 입장에서는 허락인 거냐?”

“폐하의 지시가 있었으니까. 허락은 아니지만, 말릴 생각도 없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혹시나 한 아스타롯타에게서도 흔쾌히 받아낸 OK 사인.

이내 나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건물을 나섰다.

그리고…….

터벅, 터벅.

8구역과 이어진 성문을 넘으며 생각했다.

‘이번 건 나라도 좀 떨리네.’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좀 더 좋은 계획을 세웠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당장 생각난 게 이것밖에 없었단 말이지.

“레이븐, 준비해라.”

“네? 아, 네……!”

내 지시에 레이븐이 거대한 화염구를 허공에 띄워내는 것으로 첫 준비는 끝났다.

그래, 그러니까…….

화르륵-!

한번 제대로 난장판을 만들어보자.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전부 이곳으로 튀어나오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

나는 살면서 불에 타는 중세 도시를 두 번 보았다.

몇 년 전, 황도 카르논에서 오르큘리스의 테러로 한 번.

그리고…….

화르르륵-!!

지금 또 한 번.

타다다닷-!

불타는 도시.

정확히는 불타는 8구역 거리를 내달리고 있다.

불길이 번지는 속도는 빠르다는 말로도 모자랐다.

촤아아아아아아-!

비유가 아니라 정말 불난 집에 기름까지 뿌리고 있었으니까.

「아루아 레이븐이 4등급 공격 마법 [물대포]를 시전했습니다.」

소방차가 뿌려대는 것처럼 굵은 물줄기.

「아루아 레이븐이 6등급 보조 마법 [성질 변환]을 시전했습니다.」

그 물줄기는 연계 마법으로 인해 기름으로 성질이 변환되고.

거기에.

「아루아 레이븐이 4등급 보조 마법 [풍향 제어]를 시전했습니다.」

적당한 바람까지 만들어 내고 있으니, 온 거리가 순식간에 화마로 뒤덮인다.

뭐, 그 탓에 살갗이 익을 듯이 데워졌지만…….

「불의 보주를 활성화했습니다.」

「반경 15m 내에서 파생된 모든 화염 계열 지속 피해가 50% 감소합니다.」

가만 보면, 이것도 옛날부터 유용하게 잘 쓰고 있단 말이지.

“달려라!!”

이제는 기름칠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주변으로 불길이 번질 만큼의 규모가 되었기에, 꼼꼼히 기름을 뿌리는 것보다는 이동 속도를 올렸다.

‘좋은… 선택이었던 거 같네.’

노아르크가 점거 중인 8구역에 불을 질러 시선을 끌겠다는 작전. 이 작전이 잘 되고 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그래도 한 가지 장점은 있었다.

[그르르륵…….]

[그륵…….]

그야 시체들의 카운터가 불이거든.

이번 전쟁을 위해 노아르크의 집중 투자를 받은 시체 수집가는 8구역 전체에 시체 군단을 흩뿌려 둔 상태였고, 단지 불을 지른 것만으로도 그 오랜 시간 준비한 시체들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뭐, 상위 개체들이야 불길에 내성이 있고, 8구역에 상주 중이던 노아르크인들이 화재를 진압하려 나서긴 했지만…….

콰직-! 콰직-!

그런 건 그냥 직접 물리력을 행사해서 치우면 그만.

상황이 이렇게 흐르자 오히려 의문이 들 정도였다.

“…왕가에서는 왜 진작에 불을 안 지른 거냐?”

“그걸 몰라서 묻는 거냐?”

“그럼 알면 물어봤겠나?”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불을 질러서 탈환해 봤자 남는 게 없다는 걸 알지.”

“아…….”

뭐, 그렇게 말하면 이해가 되긴 하네.

8구역이 전략적 요충지인 것도 아니고, 왕가 입장에서는 도시 구역 하나를 불태우면서까지 탈환하고 싶진 않았을 터.

‘하긴… 나도 이런 상황만 아니었으면 불지를 생각은 안 했을 테니까.’

아스타롯타에게 허락을 받았다고는 해도, 추후 도시에 불을 지른 책임을 물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비비앙을 이용해 조용히 적진을 지나쳐 동료들과 합류하는 게 베스트였던 것.

하지만…….

‘아쉬워해서 뭐 하냐.’

언제는 세상 일이 원하는 대로 굴러가던가?

콰직-!

그렇게 불에 탄 시체와, 시체 지망생인 노아르크 병력들을 박살 내며 나아가고 있자, 뒤에서 비비앙이 무전을 듣고 외쳤다.

“5구역에 위치한 병력들이 소식을 듣고 이쪽으로 지원을 온대요! 아, 부단장 오빠는 전선을 지켜야 해서 안 오는 거 같고요!”

쓰읍… 어느 정도 어그로는 끌렸지만, 다 제쳐 두고 올 정도는 아니라 이거지?

“됐고, 4구역 소식은?”

전황 파악을 하면서도 아멜리아의 관한 최신 뉴스도 틈틈이 체크했다.

“전투가 끝났다는 얘기는 없고, 아직 추격 중인 거 같아요!”

후… 그렇구나.

근데 그래도 아직도 추격 중인 걸 보면…….

‘아직 이 정도로는 어그로가 부족하다는 거지?’

물론 그래도 크게 걱정하진 않는다.

어그로를 끈다.

다행히 이 분야는 바바리안 전사로서 내가 가장 잘하고, 가장 많이 해왔던 분야였으니까.

“저… 얀델 씨? 왜 그렇게 웃고 계세요?”

어딘가 불안하게 들리는 레이븐의 질문에 나는 씨익 웃으며 답했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45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730화 배신자 (4) 45

730화 배신자 (4)

영감.

창조적인 일의 계기가 되는 기발한 착상이나 자극.

“좋은 생각요……? 뭔데요?”

어딘가 불안한 듯 묻는 레이븐을 보며 나는 씨익 웃었다.

유레카를 외친 한 철학자의 경우에는 욕조 물에 들어서는 것이 시작이었듯, 이러한 영감들은 예상치 못한 어느 순간 갑자기 훅 찾아온다.

바로 지금처럼.

[투르아, 피아레, 부아미느 얀델, 하르푸.]

“8구역, 방화, 범인은 얀델, 지원 요청.”

목표는 간단하다.

어그로를 끌어 4구역에 있는 아멜리아가 좀 더 편하게 도망치든가 할 수 있게 하는 것.

그리고 어느 면에서 어그로를 끈다는 행위는 비요른 얀델만이 아니라, ‘이한수’에게도 자신 있는 분야였다.

게임에 10대 20대를 갈아넣었던, 대한민국의 평범한 남자라면 전부 다 갖고 있는 소양이랄까?

[투르아 노, 텟카이, 지거누, 렘가크.]

“8-2 지점, 접근 금지, 지원 병력, 이동 중.”

게다가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니다.

물론 지금에야 몸이 좋아져서 머리가 고생하는 일이 줄어들긴 했지만. 바람 불면 쓰러질 만큼 허약했던 그 시절엔 쓸 수 있는 ‘이한수’의 지식까지 써가며 어그로를 끌어야 했다.

그래, 그러니까…….

“비비앙.”

나는 마지막으로 하나만 확인했다.

“그 무전은 우리가 보낼 수도 있는 거겠지?”

“네. 이목을 끄는 만큼 제 회선이 차단될 가능성도 높아지긴 하겠지만요.”

그래, 역시 되는구나?

혹여나 안 된다고 할까 봐 내심 걱정했는데, 마지막 걸림돌마저 사라졌다.

“그래서… 뭐라고 보내게요?”

비비앙은 내 ‘좋은 생각’이 자못 궁금하단 듯이 물었고, 이내 나는 말했다.

“들으면 안다.”

“…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암구호로 번역해라.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고.”

“아! 잠시만요!”

이후 비비앙은 뭔가 조정을 하듯 수정구를 매만졌고 준비가 끝났다고 말해왔다.

따라서 이제 내 말을 노아르크의 모든 지휘관들에게 전달할 차례.

“리카르도 뤼헨프라하.”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엄마.”

“…에?”

“없음.”

초심으로 돌아갈 때다.

***

치지지직-!

허리에 찬 통신용 수정구로부터 여러 무전들이 오갔지만, 사내는 듣는 둥 마는 둥 한 귀로 흘렸다.

[8구역, 방화, 범인은 얀델, 지원 요청.]

8구역에서 ‘그 녀석’이 나타나서 깽판을 치고 있고.

[8-2 지점, 접근 금지, 지원 병력, 대기.]

그 상황이 제법 심각해 보이기는 하지만.

타닷-!

자신이 관여할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위치부터가 8구역과는 꽤 거리가 떨어진 4구역이기도 하고.

혹여나 자신을 콕 짚어서 지원을 바란다거나 하는 게 아닌 이상, 그쪽은 그쪽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그래, 분명 그랬었다.

[리카르도 뤼헨프라하.]

귀에 익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진.

‘리란느 비비앙……?’

딱 듣자마자 누구의 목소리인 줄 알았다.

그야 세상에 독기만 가득하던 어린 소녀를 직접 데리고 와 ‘절규의 마녀’란 이명을 갖게 될 때까지 성장시킨 게 바로 그였으니까.

‘8구역에 있을 그녀가 나를 부른다라…….’

아무래도 지원 요청인 거 같은데.

‘설마 목숨이 위험한 상황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만약 그 생각이 맞는다 한들 지원을 갈 수는 없었다.

지금은 전쟁 중이니까.

또한 애초에 한 명 한 명 모아가며 ‘오르큘리스’를 만든 것은 모두 오늘을 위해서였으니까.

[어, 엄마…….]

…설령 엄마를 찾을 만큼 다급한 상황이라 해도 변하는 건 없다.

타닷-!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게 있으니까.

이 요청은 못 들은 척 무시하는 게 좋겠—.

[어, 없음……!!]

……?

“…….”

일순간 사고가 정지하며 잠시나마 발이 멈춘다.

다만 뭔가 잘못 들었거나, 저쪽에서 말이 헛나왔을 거라 생각하며 다시금 멈췄던 발을 빠르게 움직였다.

하나 그 발이 다시 멈추기까지 오랜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그야 목소리가 또 흘러나오기 시작했으니까.

[리, 리카르도 뤼헨프라하! 엄마, 없음!]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듯 한 번 더 반복되는 무전.

생전 처음 겪어보는 경험에 사내는 진심으로 혼란스러웠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거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으나 무전은 계속됐다.

[장미기사단이…….]

“…….”

[자, 잡아 죽임! 그래서 엄마 없음!]

그 내용이 충격적이다 못해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질 정도였으나, 한편으로는 머리가 차가워졌다.

그 정도의 눈치는 있었으니까.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있군.’

리란느 비비앙이 원해서 무전을 보낸 게 아니다.

아마 높은 확률로 누군가에게 잡혔고, 강제로 이런 무전을 보내고 있는 것일 터.

다만 문제는 다른 것이다.

‘……누구지?’

대체 누가 어떤 이유로 이런 무전을 보내는 것이며, 그 누군가는 대체 어떻게 자신과 장미기사단 사이의 은원을 알고 있는 것일까.

분명 아는 사람이 몇 없는 이야기일진데.

툭.

사내의 머릿속에서 우선 순위가 뒤바뀌었다.

비요른 얀델의 동료이자, 장미기사단과 매우 유사한 오러를 쓰는 여자를 추격하는 것도 충분히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단장님……?”

“에밀리 레인즈를 추격하는 일은 너희에게 맡기겠다.”

“아, 예……!”

추격은 잠시 다른 부하들에게 맡기기로 결정한 사내는 멈춰선 자리에서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리카르도 뤼헨프라하 특징1, 시체 수집가보다… 자, 작음!]

비비앙에게 시켜 저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껄이는 녀석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직접 말을 걸어보는 것.

[…누구냐, 넌.]

사내는 수정구를 활성화 한 채 낮게 말했다.

하나 돌아온 대답은 오직 조롱뿐이었다.

[리카르도 뤼헨프라하 특징2, 그리 말해봤자 하나도 안 무서운데 무, 무게 잡음!]

암구호로 번역하기에 불편했는지, 이제는 암구호는 생략하고서 라프도니아 말로 이어지는 조롱.

왠지 모르게 한 인물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용살자, 리갈 바고스도.

시체 수집가, 아벳 네크라페토도.

마안, 롤런드 바노잔트도.

직접 겪었던 모든 이들이 말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조심하라’ 조언했던 바로 그 인물.

“비요른 얀델…….”

정말 그 녀석이 맞다면 저 행동도 납득이 된다.

때마침 그의 동료를 추격하고 있었으니까.

내부 정보가 새어 나갔고, 이를 들은 녀석이 자신의 이목을 끌기 위해 이런 짓을 벌였다면 충분히 설명이 되는 상황인 것인데…….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장미기사단과 내 사이에 있었던 일을 어떻게 아는 거지?’

알 수 없기에 사내는 다시 한 번 수정구를 쥐었다.

[리카르도 뤼헨프라하 특징 3, 부들부들 떨려서 아무 말도 못 함!]

이 순간에도 조롱은 이어지고 있었으나 사내는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평소보다 훨씬 더 평온했다.

단지 오랜만에 뛰었더니 숨이 거칠고 몸이 떨렸을 뿐.

[…어디냐, 넌.]

이내 상대방이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서 한 번 더 물었고, 다행히 그 대답은 즉시 돌아왔다.

이번엔 비비앙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8구역.]

듣기만 했을 뿐인데도 다부진 몸집이 연상되는 굵은 음성.

[꼬우면 오든가.]

남자인 것도 그렇고, 얀델이 목격됐다는 8구역이란 것도 그렇고.

‘역시 내 예측이 맞았군.’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어이가 없기는 했다.

[리카르도 뤼헨프라하 특징 4, 어디냐고 묻기만 하고 쫄아서 못 옴.]

어딜 봐서 이게 도시의 영웅이자 한 종족을 이끄는 수장, 거기에 남작 감투까지 쓰고 있는 자가 뱉을 말인가.

그렇다기엔 너무나도 경박하고 천박하다.

하나 그렇기에 상대의 의도는 더욱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필시 나를 이리로 불러내려는 게 목적이겠지.’

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은 짧았다.

[리카르도 뤼헨프라하 특징 5, 아빠도 없음]

훤히 보이는 수작질에 넘어가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곱게 죽을 생각은 하지 마라.]

한 번은 넘어가줘 볼까.

그 얘기를 어디서 알게 된 건지 궁금하기도 하니까.

[아, 너희 부모님처럼?]

이내 조롱의 말이 한 번 더 이어진 순간, 사내가 쥐고 있던 수정구가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깨져 나갔다.

“불량품이었나 보군.”

사내는 8구역으로 가기 위한 가장 빠른 동선을 머릿속에 그렸다.

다만 어째선지 자꾸만 아까 그놈이 했던 말들이 귓가에 맴돌았다.

아니, 정확히는 ‘목소리’가 맴돌았다.

[8구역, 꼬우면 오든가.]

그동안 ‘비요른 얀델’이란 남자에 대해서 수많은 얘기를 들었지만, 분명 직접 대화를 나눈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데 어째서일까.

‘뭔가… 익숙하단 말이지…….’

알듯 말듯한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언젠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오래 전에, 이것과 똑같은 목소리를 들어본 것만 같았다.

‘언제였지……?’

기억을 되짚으려 인상까지 찌푸리고 있던 사내의 발걸음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위화감이 무엇이든지 간에.

타닷-

직접 만나보면 알 것이다.

***

장롱 속에 들어가 본 적 있는가?

라프도니아의 (전)성기사 스벤 파라브는 있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장롱 속에 들어갔던 건 ‘스벤 파라브’가 아니라 원래의 몸이긴 했지만 아무튼.

“…….”

“…….”

장롱 안에 들어가면 몸은 구부정하게 구부려야 하고, 목도 제대로 펴지 못하며, 침대처럼 바닥이 푹신하지도 않다.

하지만 의외로 그 안은 편안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몸은 불편해도 마음이 편하다고 해야 하나?

그야 여기 있으면 아무도 자신을 찾지 못하니까.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무섭거나 하면 항상 장롱 안에 들어갔다.

‘이 나이를 먹고 다시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지.’

워낙 몸이 커진 탓에 우겨넣듯 몸을 집어넣든 들어온 장롱 안.

심지어 혼자도 아니다.

“죄, 죄송해요… 많이 무거우시죠?”

룸메이트도 있으며, 그 룸메이트한테서 나는 향긋한 체향 때문에 안 그래도 비좁은 장롱 속에서 허리를 더 뒤로 빼야만 했다.

하나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

근처에 몸을 숨길 만한 곳이 여기뿐이었으니까.

“아, 아뇨… 오히려 제가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사과하지 마세요. 아직은 무사하니까요 둘 다.”

그 말에 스벤 파라브는 엄청난 고마움을 느꼈다.

이 좁은 장롱에 갇히게 된 원인은 전부 자신에게 있었다.

동료들과 난전을 펼치던 중요한 순간에 발작이 왔고, 리리스 마로네는 그런 자신을 구하려다가 함께 낙오했다.

“그래도 신기하네요……. 어떻게 여기 안에 들어오자마자 싹 나으셨는지.”

“아하하… 그, 그러게 말입니다.”

스벤 파라브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끼는 건 맞지만, 그럼에도 절대 그녀에게 밝힐 수 없는 속사정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일부러였단 말은 죽어도 하면 안 되겠지.’

사실 그 발작은 과장된 행동.

정확히는 연기였다.

자연스럽게 무리에서 이탈하기 위한.

‘대체 이 장롱이 뭐기에…….’

스벤 파라브는 의문을 가지며 장롱의 벽면을 쓰다듬었다.

사실 외관상으로는 특별할 게 전혀 없었다.

어느 곳을 둘러봐도 보이는 평범한 폐가.

그리고 깨져 있던 2층 창문 너머로 희미하게 상단부만 보였던 장롱.

하나 그는 난전 중에 이 장롱을 본 즉시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직감’에 사로잡혔다.

‘가야 한다.’

저 장롱은 안전하다.

저 장롱 안에만 들어서면 나는 절대 죽지 않는다.

‘가야 한다.’

스벤 파라브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무리에서 이탈했다.

그걸 보고 따라온 리리스 마로네 때문에 발작이 온 척 한바탕 연기를 해야 했지만 아무튼.

이 장롱은 그렇게 해서까지 들어올 가치가 있었다.

무슨 만병통치약 같다고 해야 하나?

두근-!

도시로 돌아온 순간부터 온몸을 지배하던 만성 불안이 한 번에 싹 나은 것은 물론, 여기 안에만 있으면 세상이 무너져도 안전할 거란 확신이 들었다.

‘……동료들에겐 미안하지만.’

어찌 보면 동료들에 대한 배신이라고도 볼 수 있는 행위.

마음이 무겁지 않다면 거짓말일 터이나, 지칠 대로 지친 스벤 파라브는 이 장롱 밖으로 나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여기 장롱 안에만 있으면 살 수 있다……!’

스벤 파라브에게 있어 직감은 따라야만 하는 것이었다.

반드시.

23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731화 배신자 (5) 23

731화 배신자 (5)

리카르도 뤼헨프라하.

녀석과의 대화는 애석하게도 짧게 끝났다.

[곱게 죽을 생각은 하지 마라.]

그 대사에 한 번 더 조롱을 던지는 것을 끝으로, 그 어떤 말을 하든 녀석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혹시 ‘병먹금’을 시전한 건가도 싶었으나,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건 또 아닌 듯했다.

‘차라리 분에 못 이겨 무전기를 박살 냈다고 보는 편이 옳지.’

암, 몇 번을 생각해도 이쪽이 더 합리적이다.

그때 그 치를 떠는 목소리는 연기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진짜였거든.

아, 그리고 이 추측에는 근거도 하나 있다.

그도 그럴 게, 녀석이 어떤 녀석인가?

과거에는 ‘검호’라 불렸고, 지금은 오르큘리스라는 초유명 테러 단체의 수장으로 있는 놈이다.

당연히 그만큼 강하며…….

‘역시 이런 놈들 머리 구조야 다 똑같지.’

외유내강의 정반대라고 할까?

통계상, 이런 거물들은 이런 쪽에 내성이 없다.

그야 이렇게 꼴통 까는 애들을 만날 일이 없을 테니까.

아, 물론 이백호는 제외다.

시대의 강자인 건 맞지만, 걔는 한국인 출신이니까.

‘지금쯤 부들부들대면서 달려오고 있으려나?’

물론 이는 희망 사항일 뿐, 확신할 수 없다.

뭐, 그렇다고 해서 방금 한 짓이 무의미했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 나한테 말을 거는 것까지는 유도해 낼 수 있었잖아?

이것만으로도 아멜리아의 숨통이 트이게 하는 데는 일단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을—.

치지지직-!

그때 돌연 무전기에 잡음 노이즈 소리가 들리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재상……?’

다만 암구호로 말한 탓에 나로서는 이해가 불가. 얼른 해석하란 눈짓을 보내자 비비앙이 빠르게 번역을 시작했다.

“…재상이에요. 각 지휘관들에게 기존 회선에서 나가라고 전하고 있어요.”

음, 그럼 무전 도청은 여기까지인 셈인가?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사실상 내가 어그로를 끌기 시작했을 때부터 예상된 수순이었으니까.

다만 이후 빠르게 이어진 무전은 좀 의문이었다.

[브레트 치에, 사엘라 사.]

[티리 비, 사엘라 사.]

[티리 에이, 사엘라 사.]

“지금 다들 자꾸 뭐라고 하는 거냐?”

“그냥 단순한 절차예요. 구역 명을 말하고 통신 종료를 말하는…….”

“저희도 나갈까요……? 앞으로 딱히 쓸모 있는 얘기가 나오진 않을 거 같은데……. 보니까 통신망에 접속된 사람 숫자도 빠르게 줄어들고 있고…….”

“아니, 일단 그대로 있어봐라. 혹시 모르니까.”

비비앙은 ‘혹시 모르다니요?’라는 눈빛을 지었지만, 내 요청을 군말 없이 들어주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조용해졌군.”

“그야 통신망에 접속한 인원이 이제 두 명밖에 안 되니까요.”

그럼 이제 우리를 빼면 한 명 남았단 거구나.

“줘봐라.”

나는 비비앙에게서 다시금 무전기를 빼앗아갔다.

“네? 뭐 하시게요?”

“슬슬 말을 걸어올 거 같아서.”

“……누군지 알고요?”

수정구 파손이 아니더라도, 얘네 통신망은 권한을 가진 자가 사망 시 자동으로 회선에서 떨어져나가며 보안을 유지한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한 명이 남았다.

이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누구일지는 뻔하지.’

실제로도 2명이 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무전기 너머로 소리가 들려왔다.

[쯧.]

시작은 뭔가 여러 생각이 들게 하는 혀차는 소리.

“오랜만이다, 재상. 아, 이제는 재상이 아니라 반역군의 수장이라 해야 하나?”

상대가 소개하기도 전에 먼저 인사를 건넸지만, 놀랍게도 상대 역시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한동안 잠잠하더라니, 나타나자마자 이런 사고를 치고 다니는 게 여러모로 자네답군.]

마치 며칠 전까지 친근하게 대화를 나눴던 사이 같은 대화.

‘아, 틀린 말은 아닌가?’

감옥에 갇히기 전까지만 해도 재상이랑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뭐, 그때는 라프도니아의 재상일 때긴 했지만.

“사고 친 거로 보면 네가 할 말은 없지 않나?”

[음, 그것도 그렇긴 하겠군. 이번만큼은.]

서로가 적인 상황이지만, 왠지 모르게 피식 하고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사소한 잡담이나 나눌 시간은 아닐 터.

“왜냐?”

[자네는 늘 정답부터 찾는군.]

“시간 낭비를 즐기는 성격이 아니라서.”

[그런 식으로는 정답에 다가갈 수 없네. 정답이란, 미궁 속 깊은 곳에 숨겨진 보물과도 같아서 아주 오랜 시간 헤매고 헤맨 다음에나 발견할 수 있는 것이지.]

오, 확실히 나보다 늙어서 그런가?

뭔가 있어 보이는 말이긴 했다.

하지만…….

“뭐라는 거냐? 평생 미궁엔 들어가본 적도 없을 놈이.”

그런 말도 좀 경력 있는 탐험가가 해야 멋있지.

예를 들면, 나라든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왜 회유라도 해볼 셈이냐?”

그런 내 물음에 녀석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단지 성질 급한 사업가처럼 곧바로 조건부터 늘어놓았다.

[자네 동료들의 무조건적인 안전을 보장하지.]

“우리 죽이려고 칼든 놈을 어떻게 믿고?”

[실제로도 나는 전군에 명해놓은 상태였다네. 비요른 얀델의 동료들은 무조건 최우선순위로 ‘생포’를 하라고.]

뒤에 있던 비비앙에게 사실이냐는 눈짓을 보내자, 비비앙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선지 항상 자네가 걸렸어. 그래서 동료들을 생포해 두면 언젠가 쓸 일이 있겠다 싶었지.]

음…….

적이 나를 과대평가 해주는 건 좋지 않은 신호인데…….

그래도 덕분에 하나는 알았다.

아직까지 내 동료들 중 그 누구 하나 반역도들에게 잡히지 않았다는 걸.

만약 잡혔다면 회유가 아니라 협박을 했을 테니까.

[그래서 대답은?]

후작의 물음과 동시에 아스타롯타의 눈초리가 날 향한다.

어떤 간섭을 하려는 건 아니고, 그저 내가 무슨 선택을 할지 관찰하는 듯한 눈초리.

‘에휴…….’

내가 할 수 있는 답은 정해져 있었다.

“거절이다.”

[왜지?]

좀 전의 나처럼 곧바로 정답을 물어오는 후작.

그러나 나는 후작처럼 잡소리를 늘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참 오랜 시간 동안 참아왔거든.

면전에 대고 이 말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까지.

“아이스록에서 다짐했었으니까.”

[…….]

“이 일을 꾸민 새끼의 모가지를 따버리겠다고.”

생긴 건 이래도 난 사실 속이 좀 좁은 편이다.

그러다 보니 살생부에 적힌 이름을 아직까지 한 번도 지워 본 적이 없다.

[그래… 그렇군.]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후작은 어딘가 시원섭섭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는 결국 첫 단추부터 잘못 꿰인 거야.]

변명도 자기 합리화도 아닌 체념의 말.

그 목소리에서는 자그마한 후회의 감정까지도 느껴졌고, 왠지 모르게 짜증이 피어났다.

이렇게 결국 후회할 일이었다면.

꽈악.

그러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알다시피 첫 단추를 꿴 건 너다.”

나도 모르게 다소 공격적인 목소리가 튀어나왔지만, 후작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피식 웃었다.

[큭, 낯선 일도 아니군. 내 인생은 풀어내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꼬이는 실과도 같았으니.]

거, 이제 와서 인생을 돌아보기라도 하는 건가?

하긴, 나라도 왕가랑 싸우고 있으면 그럴 거 같기는 하다마는.

아무튼, 더 얘기를 나눠봤자 잡담에 불과하기에 나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었다.

“라그나 페프로크는 어떻게 됐지?”

어찌 보면 가장 사적일 수도 있을 질문.

하나 녀석은 의외로 착실하게 대답해주었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자고 있네. 이 세상 가장 안전한 곳에서. 깨어났을 땐 어떤 식으로든 매듭이 지어져 있겠지.]

“이 세상 가장 안전한 곳이라… 어딘진 몰라도 아들내미한테 하는 대접이랑은 아예 딴판이군?”

[자네라면 알고 있지 않나?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뭐, 그렇긴 하지.

후작 아들내미는 악령이니까.

애초에 그러니까 도서관에서 짱박혀 살던 라그나를 데려온 거였을 테고.

아, 그러고 보니 이것도 묻고 싶었는데 안 할 뻔했네.

“……네 집무실에 숨겨진 방에 있던 그 초상화 속 여자가 라그나의 친모인가?”

[맞네, 참 착한 여인이었지.]

이 양반이 웬일로 이렇게 잘 대답해준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애석하게도 이게 끝이었다.

[아무튼, 이제 상황이 명료해졌군.]

“언제는 아니었나?”

[하하, 그래도 내게는 의미가 깊네. 혹시나 하는 그 생각… 그 생각이 지금까지도 나를 이도저도 아닌 사람으로 만들었으니까.]

늙은이의 헛소리라 치부할 수도 있지만, 무슨 각성 직전에 내뱉는 말 같아서 딱히 반갑진 않았다.

[이 대화가 끝나면 나는 전군에 내려져 있던 생포 지시를 철회하고 척살을 지시할 걸세.]

이제 진짜로 무언가 시작되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그 과정에서 자네가 그토록 아끼는 동료들 중 어느 누군가가 죽을 수도 있을 걸세. 아니, 반드시 죽을 걸세.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협박하려는 거라면 순서가 잘못된 거 같은데.”

[그야 당연한 것 아닌가.]

“……?”

[협박이 아니니까.]

정말로 협박이 아니라 사실만을 말하는 듯한 말투.

[나는 단지 자네에게도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이네. 나 또한 자네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는 걸.]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난생처음으로 후작과 대화를 하며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자네 같은 족속들을 앞에 두고 웃느라, 그동안 내가 얼마나 고역이었는지 아나?]

“…….”

[너희도 느껴봐야지. 내가 느꼈던 고통을.]

허, 이런 상남자 같은 면모가 있을 줄은 또 몰랐네.

***

마지막 한마디를 끝으로 후작과의 무전은 끝.

“나갔어요…….”

통신망에 접속한 인원이 1로 변한 걸 확인한 나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무전기를 불 타는 주택 안으로 집어 던졌다.

“너무 신경 쓰지 마라. 배신자가 내뱉는 저주의 말일 뿐이니.”

그런 날 보며 위로하듯 말하는 아스타롯타.

“너는 옳은 선택을 했다.”

옳은 선택이라…….

그래, 분명 그럴 것이다.

후작의 회유에 넘어갔다면 이번 전쟁 중엔 누구도 죽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더 큰 후폭풍이 몰려왔을 테니까.

“그럼 상으로 이제는 좀 말해 주면 안 되나? 후작이 왜 전쟁을 일으킨 건지.”

“불가. 폐하께서 직접 들으라 하셨다.”

하… 진짜 사람 미치게 만드네.

무슨 이게 하나하나 모험을 통해 알아내야 하는 게임도 아니고.

‘……아, 맞긴 한가?’

이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던전 앤 스톤]은 망할 놈의 똥겜이다.

“벌써 많이도 모였군.”

속으로 궁시렁거리고 있자니 아스타롯타가 주변을 보며 혼잣말을 내뱉는다.

해석하자면 슬슬 움직여야겠지 않냐는 뜻이었다.

따라서 나도 재상에 대한 생각은 그만두고서 현재 상황을 간단하게나마 정리했다.

불타는 도시.

반군들은 ‘접근 금지’ 명령을 받고서 나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중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지원군이 도착하며 병력이 늘어나고 있다.

‘여기에 뤼헨프라하는 나한테 오는지 안 오는지 알 수 없고.’

4구역에 있다는 아멜리아는 물론, 성지에 몸을 숨긴 클랜 멤버들이 무사한지도 미지수.

설상가상으로 여기에 후작이 뜬금없는 각성 이벤트를 거치며 내 동료들을 전부 죽여 버리겠다고 선포하기까지 했으며…….

[이계에서 온 악령 ‘————’가 세 명의 동료를 잃고서 비로소 본인이 나아가야 할 길을 깨달았다.]

기록에서 봤던 그 이벤트가 이 전쟁 중에 발생하는 것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상황.

한데 또 이것만이 아니다.

[아루아 레이븐! 당신 옛 동료였던 그 마법사가 배신자예요!]

비비앙은 황도가 불타는 날 나를 배신하는 인물이 레이븐이라고 지목하기도 했다.

‘…아니, 왜 정리가 안 되지?’

간단하게 정리만 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도무지 쉽게 정리가 안 된다.

“…….”

머리가 터질 거 같다.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다.

차라리 그냥 미궁에서 생각 없이 하루하루 살아남던 때로 돌아가고 싶단 생각이 들 정도로.

두근-!

극도의 스트레스가 발생하며 심장 부근이 꽉하고 조여온다.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머리를 비웠다.

바바리안답게.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게다가 아까 후작도 말하지 않았나.

아주 오랜 시간 헤매고 헤매다 보면, 결국엔 찾아낼 수 있는 게 정답이라고.

그러니까 이 순간만을 생각하며 헤쳐나가자.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가진 게 몸뚱이 하나뿐이던 그 옛날처럼.

20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732화 광대 (1) 20

732화 광대 (1)

배수의 진.

물을 등 뒤에 두고 싸운다는 뜻으로,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난 이 말을 굉장히 좋아한다.

그야 그렇잖아?

나름 진리가 담겨 있는 말이거든.

사람들은 절박할 때 모든 전심전력이 나온다.

또한 이러한 정신론만이 아니더라도, 등 뒤에 물이 있다면 등 뒤 걱정은 하지 않고 정면의 적에게만 모든 신경을 들이부을 수 있으니까.

나름 실리적인 면이 있다.

바로 지금처럼.

콰직-!

정면에는 무찔러야 할 적들이 있으며.

화르르륵-!

등 뒤로는 활활 타오르는 도시가 있다.

덕분에 적들이 뒤에서 나타날 일은 없으나 우리 역시 퇴로가 막힌 것은 매한가지.

하나 이 역시 별다른 의미는 없다.

애초에 도망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콰직-!

어찌 보면 이한수가 살아온 방식도 항상 그랬다.

늘 도망칠 곳 없는 막다른 길에서 투쟁해야만 했다.

그야 선택지가 그것 말고는 없었거든.

‘소아병동.’

죽을 힘을 다해 병과 싸웠고.

‘놀이공원.’

버려지는 아픔과 싸웠다.

‘내 방.’

그 이후로는 끝없는 외로움과 승자 없는 싸움을 계속 이어나갔다.

[우리들은 전사로 태어났다. 싸우지 못하면 죽는다.]

어느 면에서 바바리안과도 비슷한 삶.

다만 실상을 놓고 보면 나와 그들 사이에는 아주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도망가는 그 버릇은 아직도 못 고쳤네.]

선택지가 없다면 싸웠다.

그리고 그 말은 늘 도망쳤다는 뜻도 된다.

실제로도 선택지가 있다면 난 언제나 도망치는 걸 택했으니까.

콰직-!

투쟁이 싫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무엇보다, 그렇게까지 싸워서 얻어내고 싶은 게 많이 없었으니까.

콰직-!

지금과는 다르게.

“레이브으으으은!!”

크게 이름을 부르자마자 내 바보 같은 계획을 따라와 준 동료가 마법을 시전했다.

「아루아 레이븐이 4등급 공격 마법 [물대포]를 시전했습니다.」

「아루아 레이븐이 6등급 보조 마법 [성질 변환]을 시전…….」

더욱 세차게 번지는 도시의 불길.

후우우우웅-!

날 뒤따르는 아스타롯타는 매 검격마다 세찬 오러를 흩뿌리며 본인이 왜 왕의 호위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괴, 괴물!”

“제기랄, 저런 괴물이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인원 차이가 무색할 만큼 압도적인 전투.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시체 수집가 정도로만 캐릭터를 키워도 일인군단이란 말을 듣게 되는 게 이 세상이니까.

‘왕의 최측근인 이놈 실력이야 말할 것도 없겠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방패바바가 어느 정도 완성된 지금, 누굴 데려오든 딱히 꿇릴 게 없다 생각하거든.

‘구도도 좋고 말이지.’

무엇보다 후방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게 좋았다.

쿠웅-! 쿠웅-!

땅을 울리는 발소리를 퍼뜨리며 탱크처럼 달려들어 적진을 와해하면, 뒤따르는 아스타롯타가 믹서기처럼 전부 다 갈아버린다.

“베헬—라아아아아아아!!”

“너무 신나지 마라. 병사급들만 있는 걸 보니 진짜는 저 뒤에 있을 테니까.”

거, 조언인 척 초치기는.

내가 왕이었으면 찍소리도 못했을 놈이.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놈들은 시간 벌이일 뿐, 진짜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시체 수집가도, 혈기사도, 그 밖에 다른 오르큘리스 멤버들도.

아직 어느 하나 모습을 내비치지 않고 있다.

그래, 그러니까…….

콰지지지지직-!

이 기회에 더 많이 이동을 해둬야겠지.

저쪽의 준비가 끝나면 길을 뚫는 게 확연히 어려워질 테니.

타다다다닷-!

조금 더 속도를 올린다.

콰직-! 콰직-!

더 빨라진 팔과 다리만큼 더 많이 울려 퍼지는 타격음. 다만 어느 순간부터 적 병력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뒤로 물러서라!”

“거리! 거리만 유지해!”

우리가 달려가는 만큼 뒤로 물러나는 병력.

아, 물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등까지 보이며 도망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그야 우리도 전력으로 달리고 있었으니까.

“아, 아아악!!”

콰직-!

“사, 살려—!”

서걱-!

그렇게 낙오자들의 머리통을 깨부수며 뒤쫓는 게 얼마나 이어졌을까.

‘그럼 이제 절반 정도 지났으니…….’

지금까지 한 걸 한 번만 더 하면 내 고향이나 다름없는 7구역에 입성할 수 있다. 아, 근데 그럼 벌써 8구역의 절반을 넘게 불태운 셈인가?

“아, 아… 안—!”

콰직-!

온 거리를 불지르며 죽음의 술래잡기를 하고 있자니 문득 내가 악당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딱히 가책은 느끼지 못했다.

이곳은 적을 ‘사람’으로 보는 자가 오래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일뿐더러.

지잉-!

아무래도 날먹은 여기까지인 거 같거든.

번뜩-!

일순간 주변을 뒤덮는 세찬 섬광을 뿜어내며 저 멀리서부터 직선부로 쏘아지는 압도적인 마력의 파동.

「방어 성공.」

「아이기스의 장벽이 모든 피해를 흡수합니다.」

다행히 내 방패보다 작았기에 가드는 성공했다.

다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놈들이 정예 병력을 투입했다는 건, 이제 나를 막을 준비가 됐단 것과 같은 의미였으니.

‘이제 나도 슬슬…….’

전력으로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지.

「캐릭터가 [철옹성]을 시전했습니다.」

「캐릭터가 [탐욕의 비늘]을 시전했습니다.」

기사 분쇄 모드와 마법사 분쇄 모드를 모두 다 활성화 시키기 무섭게 정면부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약 스무 명의 무리.

장비 빨을 받아야 하는 게임인 만큼, 당연히 복장의 통일성은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 개성 넘치는 모습들에서 왠지 모를 정예의 포스가 느껴진다.

뭐, 그렇다고 긴장되거나 하지는 않았다마는.

“여기까지입니다.”

정예로 보이는 그들 사이로 보이는 아주 익숙한 얼굴. 그 얼굴이 보이자마자 무리의 격이 확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이 인원을 상대로 버티는 건 불가능하겠지요. 피싯…….”

거, 아까는 동료까지 버려가며 꽁지 빠지게 도망치더라니.

친구들 생겼다고 바로 어깨 펴진 거 보—.

“아벳 네크라페토! 야, 이 망할 새끼야!!”

그때 녀석을 발견하고는 발작하듯 고성을 내지르는 리란느 비비앙.

“피, 피시싯… 비비앙 양, 오랜만입니다? 무사해 보이니 다행이군요! 제가 구하러 돌아왔으니 이제 그만 이쪽으로—.”

“뭐라는 거야! 넌 뒤졌어, 이 개새끼야!!”

“피시시싯… 그 말은 오르큘리스를 배신하고 그쪽에 붙겠단 뜻으로 이해해도 될는지요?”

“배신은 네가 먼저 했잖아!”

“제가 왜 배신입니까? 결과적으로 비비앙 양은 죽지도 다치지도 않았고, 저는 이렇게 원군까지 이끌고 구하러 왔는데.”

“…뭐? 얀델 님!! 아니, 얀델 오빠!! 제발, 저 새끼는 내가 죽일 수 있게 도와줘요! 앞으로 하라는 건 전부 다 할 테니까……!”

분노에 눈이 아예 돌아갔는지, 내가 먼저 바라지도 않은 공수표를 뿌리기 시작한 비비앙.

그런 그녀를 보며 시체 수집가가 혀를 찼다.

“이런 이런……. 이미 늦었나보군요. 바바리안에게 간 여자는 되찾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더니…….”

“아아아아아악!!”

애석하게도 저렇게 치를 떨며 소리를 내지르는 걸 보니 말싸움은 비비앙의 완패였다.

다만 일단은 당장 같이 싸워야 할 흑마법 싸개가 흥분으로 눈이 돌아버리는 건 좋지 않은 상황.

“추하군.”

따라서 툭 던지듯이 말을 뱉으며 대화에 개입했다.

“작은 남자의 질투란.”

“………예?”

아니나 다를까, 던지기 무섭게 바로 긁히는 녀석.

“지, 지금… 뭐라 그랬습니까……?”

“작은 남자의 질투가 추하다고 했다.”

“…뭐, 뭐라는 겁니까! 그, 그때는 싸우는 상황이니 다, 당연히……!”

“나는 키를 말한 것이었다마는.”

이내 말을 끊고 키 얘기를 꺼내자 예상치 못한 상황인 듯 얼음이 된 녀석.

게임으로 치면 그로기 상태랄까.

“추하군.”

“…….”

“변명하는 것조차.”

이내 결정타를 날리자 아니나 다를까 얼음이 된 상태 그대로 아무 말 못 하는 녀석.

“와…….”

그 압도적인 딜교에 치를 떨며 고성을 내질렀던 비비앙조차 감탄한 듯 입을 떡 벌렸다.

한순간에 뼈와 살이 발라지는 모습을 보니 어느 정도 분노가 식으며 흥분이 가라앉은 모양인데…….

“대화는 여기까지.”

적측 현장 지휘관으로 보이는 한 사내가 시체 수집가를 뒤로 물리며 앞으로 나선다.

음, 얘는 처음 보는 얼굴인데…….

“비요른 얀델, 네 무용담은 여기서 끝이다.”

“응?”

“그래도 걱정 마라. 네가 쌓아 올린 명성은 이 몸이 이어받아 줄 테니.”

뭐야, 생긴 거 보고 좀 치는 놈인 줄 알았더만.

대사는 완전 엑스트라네.

후우웅-!

나는 피식 웃으며 손도끼 하나를 내던졌고.

“기억해라, 널 죽일 남자의 이름을. 내 이름은 노르티아—!”

“오, 그래도 역시 이건 막는구나.”

“……으읏! 놈을 죽여라!”

말이 끊긴 녀석이 지시를 내리며 전투가 시작됐다.

***

특별해지고 싶다.

과연 이러한 욕망이 없는 사람이 존재할까?

아니, 그럴 리가.

무릇 인간이란 모두 자신이 특별해지기를 바란다.

그것은 미국에서 태어난 한 백인 아이도 그랬다.

백인 아이는 어려서부터 만화를 좋아했다.

영웅이 나오는 클리셰 범벅의 미국식 카툰.

다만, 아이가 가장 애정하는 캐릭터들은 늘 만화 속에서 깊은 인상을 남기고 퇴장하는 ‘빌런’이었다.

운 좋게 힘을 갖게 된 게 전부인 주제에 입 발린 말들만 뱉는 히어로보다, 하고 싶은 건 전부 해내며 그런 히어로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그들이 훨씬 더 특별해보였다.

아이는 빌런들을 동경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나는 특별하지 않다.

평범한 이들이 자라며 평범하게 깨닫는 그 진리를 아이도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인정했다.

아이는 그렇게 사내가 되었고.

나는 평범하다.

그 사실은 본인이 아무리 애써도 평생 바뀔 리가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극악의 난이도로 도중에 포기했던 게임의 치트판을 다운로드 받고, 클리어하기 전까지는.

「전송을 시작합니다.」

만화, 소설, 영화에서나 보던 일이 사내에게 펼쳐졌다.

눈앞에 펼쳐진 게임 속 세상.

‘아벳 네크라페토.’

못생기고 뚱뚱했던 사내에게 새 이름이 생겼다.

이곳에서 사내는 더 이상 평범하지 않았다.

사내에게는 NPC들이 알지 못하는 지식들이 있었고, 더욱더 특별해질 수 있는 미래가 반기고 있었다.

비록 ‘악령’이라 불리며 배척 받는 존재이긴 했지만.

그것조차도 사내는 본인을 특별하게 만드는 부분이라 여겼다.

실제로도 사내는 제법 특별했다.

사내는 재능이 있었고, ‘악령’들 중에서도 빠르게 치고나가며 강해졌다.

명성이 생겼고, 질시의 시선도 받았다.

다만 그럴수록 사내는 점점 더 거침이 없어졌다.

하고 싶은 건 전부 해야만 직성이 풀리던 어느 카툰 속 빌런처럼.

[당신이 왜 죽어야 하냐고요? 약하니까요!]

[아, 때마침 적당한 시체 한 구가 필요하기도 하고!]

사내는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결국 이에 발목이 잡혀 조사를 받았고 그러던 중 ‘악령’이란 것까지 들통났다.

그렇게 죽을 날만 기다리던 어느 날.

[이 도시에서 네가 살아갈 수 있는 곳은 없다.]

그는 운명적인 만남을 경험한다.

[날 따라와라, 아벳 네크라페토. 네가 살아갈 세상을 만들어주지.]

오르큘리스.

감히 이 도시에서 왕가에 대항한다는 이념을 세운 미친 테러 단체.

그 손을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것만이 유일한 살길이라는 게 아니더라도, 그의 눈엔 저 집단 자체가 멋져보였으니까.

그는 단장을 따라 지하 도시로 향했고…….

[시, 시체 수집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전의 명성을 뛰어넘는 악명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피시시싯-!!]

날이 갈수록 그의 웃음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다들 왜 그리 울상이십니까? 웃으세요!]

그는 즐거워서 참을 수 없었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의 시선이 주목되는 것도.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에 울고 웃고 한다는 것도.

22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733화 광대 (2) 22

733화 광대 (2)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아벳 네크라페토는 비교적 안전한 후방으로 이동했다.

관심을 추구하는 타고난 본성 탓에 조금 전 9구역 침공 때야 감히 겁도 없이 선봉에 서기도 했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그야 근접전도 나름 자신 있는 편이긴 하지만…….

‘……저딴 괴물이랑 싸우는데 어떻게 앞에 섭니까?’

사실상 그의 근접 전투 능력은 호신술 정도나 될 뿐이었고, 그마저도 저들 앞에서는 호신술조차 되지 못한다는 걸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아, 물론 실력도 실력이지만 아무래도 직업적 차이가—.

“숨지 말고 이리 와! 이 개새끼야!!

그때 후방으로 이동하는 그를 보며 전 동료였던 여자가 소리를 내지른다.

물론 저 정도의 욕지거리는 타격조차 오지 않았다.

우리 같은 사람들의 특성상 오히려 극찬이랄까?

“피싯! 이상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사령술사가 뒤로 가는 게 왜 숨는 겁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소리였으나, 그 당연한 짓을 하지 않아서 적에게 사로잡힌 장본인은 기도 차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

“그런 새끼가 그때는 왜 그랬던 건데……! 그것만 아니었어도 내가……! 내가……!”

“피시싯, 그래도 덕분에 좋은 인연을 맺지 않았습니까?”

“그, 그걸 말이라고……!”

둘의 언쟁은 시간만 충분했다면 며칠은 이어 나갈 수 있을 잠재력을 품고 있었으나, 애석하게도 당장 그러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서로가 양측 진영의 후방에 위치하며 거리도 멀었을뿐더러.

“잡담은 그만하고 마법이나 쓰세요!”

“…아, 알았어요!”

“네크라페토!”

“피시싯…….”

둘 역시 후방에서 전투 지원에 참여하며 자연스레 언쟁은 끝났다.

그로서는 참 다행인 일이었다.

「리란느 비비앙이 4등급 흑마법 [썩은 땅의 저주]를 시전했습니다.」

「반경 내 모든 적의 방어 수치가 크게 감소합니다.」

저 멍청한 여자야 저주 싸개에 불과하지만, 자신은 다르니까.

“피싯… 하찮은 짓을.”

「아벳 네크라페토가 [군단의 축복]을 시전했습니다.」

「반경 내 모든 아군들이 받는 해로운 효과가 50% 감소하며, 가장 높은 능력치가 20% 상승합니다.」

비교적 최근에 2등급짜리 광역 버프도 새로 얻었을 뿐만 아니라.

“……제기랄! 레이튼이 죽었다! 네크라페토!”

“피시싯, 맡겨 주시지요!”

저주 외에는 전부 애매한 흑마법사와 다르게 네크로맨서에겐 소규모 전투에서도 사기적인 성능을 뽑아내는 스킬이 있다.

「아벳 네크라페토가 [꼭두각시]를 시전했습니다.」

그야 네크는 사망한 소모품을 다시 일으켜 세워 싸우게 할 수 있거든.

물론 살아생전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버프를 둘둘 둘러주면 그럭저럭 쓸 만해진다.

「아벳 네크라페토가 [핏줄화]를 시전했습니다.」

「시전자가 지닌 모든 패시브 스킬이 권속에게 부여됩니다.」

피에 독극물이 흐르게 하고, 뼈의 강도를 높이며, 모든 공격에 디버프가 묻는다.

한데, 이것조차 전부가 아니다.

「아벳 네크라페토가 [개조]를 시전했습니다.」

「권속 하나를 무작위로 개조합니다.」

이 자리에 불려올 만큼의 실력을 지닌 오르큘리스의 정예.

그런 이들이 죽자마자 부활하며 무작위의 특성까지 부여된다.

예를 들자면…….

「대성공.」

「권속: 코랄 레이튼이 [대괴수] 특성을 획득합니다.」

육탄계 전사 포지션이었던 코랄 레이튼은 부활과 동시에 저 바바리안에게 밀리지 않을 만큼 거대한 괴물로 변했다.

“피시싯… 시작부터 대성공이라니, 운이 좋군요.”

콰아아아앙-!

오히려 살아생전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지닌 채, 거대 바바리안에 맞서는 새로운 소환수(코랄 레이튼).

“피시시싯……. 저 무식한 바바리안을 막아 낼 정도의 근력 수치라니!”

네크라페토는 진심으로 방금 제작한 소환수가 무사하기를 바랐다.

그야 저 정도 개체값이라면 그의 아공간 컬렉션 중에서도 충분히 상위권에 들어갈—.

서걱-!

“……응?”

후방에서 전투를 참관하던 그는 눈을 비볐다.

쿠웅-!

……저게 칼질 한 방에 죽는다고?

‘…대, 대성공작이었는데? 그것도 최상의 베이스를 가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바바리안 옆에 딜러 하나가 있고, 꽤 강하다고 듣기도 했으며, 레이튼을 단칼에 쳐죽이는 걸 보고서도 곁에 가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 저, 저 기사놈은 대체 뭐란 말입니까……!”

사실 그가 대표해 말했을 뿐이지, 현재 이곳에 자리한 모든 오르큘리스 단원들이 갖고 있는 생각이었다.

그야 당연했다.

반사 신경도 느리고 근접전에 조예도 없는 네크 따위도 느낄 정도인데 앞에서 직접 싸우고 있는 이들은 오죽하겠는가.

서걱-!

저 이름 모를 기사는 위험하다.

어느 면에서가 아니라, 모든 방면에서.

쿠웅-!

‘거인’이라 불리는 저 바바리안보다도.

퓨슈우우웃-!

칼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어김없이 터져 나오는 피분수.

기세 좋게 기다리고 있던 스무 명의 정예 병력.

그리고 그 주변에 자리하던 수백의 지원 병력들까지.

“…….”

“…….”

어느샌가 그들은 뒤로 물러나고 있었으며, 이전처럼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다들 몸을 사리기 바쁘달까?

패색이 짙은 전투가 있을 때면 흔하게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퇴각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눈치 게임을 하며 싸우는 시늉만 하는 것인데…….

‘……주, 준비를 해야겠군요.’

평생 강약약강의 삶을 살아온 아벳 네크라페토는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그 ‘분위기’를 느꼈고, 튀어야 할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하지만 물론 이대로 당장 도망치는 건 불가능했다.

그야 아직은 퇴각해도 좋다는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어느 정도 돕는 척만 하다가…….’

각이 보이면 그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자.

아, 혹시 모르니 일단은 좀 더 뒤로 물러나도록 하고.

「아벳 네크라페토가 [꼭두각시]를 시전했습니다.」

지원 스킬도 아끼지 않았다.

일단 1인분은 해야 퇴각을 하고서도 할 말이 생길뿐더러, 이것도 하지 않으면 전선이 바로 무너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

그의 판단은 합리적이었으나, 동시에 아주 큰 실수이기도 했다.

새로운 [꼭두각시]가 몸을 일으킨 순간.

기사의 시선이 네크라페토를 향했다.

기계처럼 무심하면서도 사냥꾼처럼 빛나는 눈.

‘왜, 왜 날 보는 겁니까……!’

불안한 마음에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으나, 사실 그는 기사의 시선이 왜 자신을 향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보자마자 알 수 있었으니까.

기사가 자신을 보며 품은 생각을.

‘아, 쟤를 빨리 죽여야 하겠구나.’

기사의 눈빛에서 악감정이라거나 짜증 같은 감정은 일절 묻어나지 않았다.

하나 그렇기에 오히려 그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따라서…….

툭.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쳐버렸고.

타닷-!

그게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기사의 몸이 위로 솟구친다.

“뭐냐?”

“잠시 빌리지.”

위로 크게 도약한 기사는 초거대 바바리안의 어깨를 사뿐히 즈려밟았고, 그 도약력을 이용해 단숨에 자신을 향해 날아들었다.

“…….”

굉장히 신기한 감각이었다.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달까?

기사가 자신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그 와중에도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돌아갔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찰나의 불멸.’

일단 이건 좋은 생각 같지 않았다.

물론 이걸 쓰면 뭔 짓을 해도 1분 동안 죽지 않기야 하겠지만…….

그다음에라고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여, 여기 오는 게 아니었는데! 저 바바리안만 만나면 대체 왜 이렇게 되는 겁니까!’

왠지 모를 억울함과 설움이 솓구치는 그였지만, 그는 빠르게 잡념을 비워 냈다.

이런 생각은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 그러니까…….

‘……제기랄!’

이내 네크라페토는 찰나 동안 생각해 낸, 가장 살 가능성이 높은 방법을 실천으로 옮겼다.

「아벳 네크라페토가 [명계의 지팡이]를 사용하였습니다.」

명계의 지팡이.

No. 17로 더블 넘버스 중에서도 최상위 넘버에 속하는 보구이자, 명실공히 ‘네크로맨서’의 졸업 무구로 여겨지는 바로 그것.

여러모로 리스크가 있는 무구이긴 했지만…….

‘명계의 부름.’

네크라페토는 망설이지 않고 지팡이의 사용 효과 ‘명계의 부름’을 시전했다.

아, 물론 저 넷 중에서도 제일 만만하고 괴롭히는 맛이 날 듯한…….

‘리란느 비비앙!’

이내 눈에 힘을 빡주며 ‘대상 지정’까지 완료한 순간,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온 오러가 사라지며 녹색빛이 휘몰아친다.

「캐릭터와 지정한 대상이 명계의 부름을 받습니다.」

외부의 그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죽은 자들의 세계.

‘피시싯… 제가 생각해도 현명한 수였군요.’

이젠 이곳에서 버티고 버티기만 하면 된다.

뭐, 그 과정이 조금은 무료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리란느 비비앙이 죽지만 않도록 괴롭히며 달래면 될 일.

……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야… 여기 경치가 죽이긴 하네.”

태평하게 주변을 구경하는 한 바바리안을 보기 전까지는.

***

「캐릭터가 [아이기스의 장벽]을 사용하였습니다.」

「지정 대상 효과를 대신해서 받습니다.」

***

세 개로 나뉘어진 녹색의 달이 하늘 위에 떠 있다.

마치 우주에 온 것처럼 너무나도 선명하고 가깝게 보이는 세 개의 달들. 하나 자세히 보면 그 달들이 꿈틀거리는 시체들로 이뤄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어어어어어…….]

사방에서 좀비 같은 소리가 BGM처럼 들리는 것은 덤.

아, 참고로 위에만 그렇다 뿐이지 그 아래로는 음산하게 느껴지는 메마른 평원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을 뿐—.

퍼엉-!

갈라진 땅의 틈새에서 마그마가 분출하듯 녹색의 무언가가 위로 솟구친다.

‘저걸 맞으면 디버프가 중첩됐지? 조심해야겠네.’

그나저나 이런 느낌이구나.

게임에서 보던 거랑은 확실히 느낌이 다르네.

뭔가 하늘에서 내리쬐는 조명 자체가 녹색빛이라서 그런지, 정말 다른 세계로 온 거 같다 해야 하나?

‘아무튼, 구경은 여기서 끝.’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해야 할 일들도 미뤄 두고서 팔자 좋게 경치 구경이나 할 생각은 없었다.

따라서…….

스윽.

주변 탐색을 끝마친 시선을 정면으로 옮기자, 눈이 마주친 녀석이 어깨를 움찔한다.

“비, 비요른 얀델! 어째서 다, 당신이 여기에 있는 겁니까……!”

그야 [아이기스의 장벽]의 액티브 스킬을 쓰면, 원래 파훼나 대신 맞기가 불가능한 ‘대상 지정’ 형태의 즉발 스킬 같은 걸 대신 맞을 수 있거든.

뭐, 실전에서 써본 건 이번이 처음이긴 하지만.

“글쎄?”

굳이 얘한테 설명해 줄 이유는 없겠—.

“부, 분명 나는 비비앙 그년을 지정했는데……!”

아… 레이븐을 지정한 게 아니었어?

난 그런 줄로만 알고 진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방패를 사용한 건데.

‘하긴 둘 다 비슷한 자리에 있었으니까.’

오해로 시작된 사건이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시체 수집가, 아벳 네크라페토.

이놈은 내가 직접 죽이고 싶었거든.

씨익.

웃으며 나는 망치를 치켜들었다.

18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734화 광대 (3) 18

734화 광대 (3)

예상외의 돌발 상황.

그런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지만, 그래도 모든 걸 포기하고 절망할 정도는 아니다.

적어도 아벳 네크라페토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야 그렇지 않은가!

「필드 효과 - 명계가 부여됩니다.」

이곳은 명계다.

네크로맨서들의 졸업 무기나 다름없는 지팡이를 써야지만 들어올 수 있는—.

「해당 지역 내 모든 비생명체의 육체 수치가 200% 증가합니다.」

「모든 생명체들의 육체 수치가 20% 감소합니다.」

네크로맨서의 천국이나 다름없는 장소.

「해당 지역 내의 불사자들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소환된 언데드는 타격을 입고 쓰러져도 약간의 시간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부활하며.

「캐릭터가 상징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캐릭터에게 명계의 축복이 부여됩니다.」

‘명계의 지팡이’를 보유한 캐릭터는 ‘비생명체’ 판정을 받으며 절대 죽지 않는다.

뭐, 이것도 파훼법이 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피시싯…….”

그래, 여기서까지 쫄 이유는 없다.

터벅.

물론 다가오는 저 거인의 모습이 전차와도 같은 포스를 뿜어내고.

터벅.

실제로도 자신이 저 지랄맞은 방어력을 뚫고 치명타를 입힐 수 있을 거 같진 않지만…….

‘…버티기만 하는 거라면야!’

도망다니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

그도 그럴 게, 저 바바리안은 괴물 같은 방어 능력과 달리 기동성 면에서는 부족하다.

얼마 전에 추격전에서 그걸 여실히 느꼈다.

물론 자신도 기동성은 부족하기에 결국에는 잡힐 뻔하기도 했지만…….

“오, 웃어?”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다르다.

육체 수치도 크게 증가하고, 소환수들도 훨씬 더 세졌다.

냉정하게 현 상황을 분석하자면, 지금 자신이 저 바바리안을 상대로 절대 쫄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왜, 웃으면 안 됩니까? 피싯…….”

솟구친 자신감만큼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뭐, 안 되는 건 아닌데… 조금 전까진 죽을상이었던 게 그러니까 신기해서.”

“죽을상은 무슨… 단지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피시싯…….”

몸은 마음을 따라간다고, 잔뜩 움츠려져 있던 그의 어깨가 어느새 활짝 펴졌다.

긍정은 긍정을 낳는단 말도 있듯.

한번 좋게 생각하니, 자신이 유리한 점들이 속속들이 떠올랐다.

‘24시간이면… 충분하겠지요.’

어느 누구도 죽지 않은 채 24시간이 지나면, 현 장소에서 쫓겨나며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간다.

그러나 걱정할 건 없었다.

‘단장님이 도착하시기까지.’

비요른 얀델의 앞을 막아세우기 전, 4구역에서 대기 중이던 단장이 8구역으로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무리 늦어도 그때까진 단장이 도착할 것이며, 그 괴물 같은 단장이라면 그 의문의 기사 역시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이 미궁 속 괴물을 이길 수는 있어도.

사람이 단장을 이기는 건 거진 불가능하니까.

어떻게든 잘 버텨서 돌아가기만 하면 기사는 이미 죽든가 도망치든가 했을 것이고, 자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포위 진형을 갖추고 있을 터였다.

그러면 아무리 이 끈질긴 바바리안이라 할지라도—.

타닷-!

거, 사람이 생각 중인데.

역시 예의 없는 바바리안들이란.

후우웅!

품위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무식한 일격.

“피싯.”

살짝 뒤로 물러서는 동작으로 가뿐히 피해낸 그는 피식 웃으며 읊조렸다.

“느리군요.”

바바리안 입장에서는 꽤나 당황스러울 터였다.

어떻게 이리 쉽게 피하지? 예전이었으면 분명 맞았을 일격이었는데……!

‘후훗,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군요.’

저 무식한 바바리안은 ‘명계’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그런 정보 우위까지 생각하면 유리한 건 배가 된다.

그래, 그러니까…….

‘흐음… 그냥 한번 잡아보는 것도 괜찮을지도?’

딱 한 번, 공격을 피한 것에 불과했지만 그 한 번이 아벳 네크라페토에게 아주 큰 자신감, 그리고 약간의 욕심을 선사했다.

그도 그럴 게…….

시체 수집가, 아벳 네크라페토가 거인, 비요른 얀델을 일대일로 무찌르다니?

이 얼마나 멋있는 이야기란 말—.

피슈우웃-!

그때 사내와 바바리안 사이에 위치한 지면에서 녹색 가스가 솟구쳤고, 바바리안은 뒤로 물러나며 녹색 가스를 피했다.

여기까지는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갑자기 정체 불명의 가스가 바닥에서 솟구치면 일단 피하고 보는 게 정상적인 반응이니까.

근데, 이건 또 뭘까.

“뭐야, 너는 왜 안 맞냐?”

……응?

뒷말을 이해할 수 없던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지금?”

“뭐야, 너 설마 모르는 거야? 이거 참 그럼 내 입으로 말해주기도 뭐하고…….”

마치 저 가스에 대해서 아는 게 있는 듯한 말.

사내는 왠지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확인 차 다시 물었다.

“…설마 당신은 이곳이 어딘지 아는 겁니까?”

“그럼 왜 모르냐? 네 지팡이로 불러온 곳이잖아. 명계. 저 가스는 내가 맞으면 저주에 걸리고, 네가 맞으면 축복이 강해지고.”

“…….”

바바리안의 간결한 설명에 아벳 네크라페토는 말을 잃었다.

“뭐야? 진짜 몰랐던 거냐?”

당연히 알지 못했던 사실인 건 아니다.

다만, 저 바바리안이 그걸 너무나도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게 놀라웠을 뿐.

그래서 순간 입이 얼었지만, 생각해보니 일희일비할 이유가 없었다.

“…그, 그럴 리가 있습니까? 명계에 대해서 ‘조금’은 알 수도 있지요. 워낙에 유명하니까.”

“오, 그럼 다시 시작한다?”

길게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듯, 이후 바바리안은 노이로제에 걸릴 거 같은 전투 함성을 뱉으며 다시금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르르르륵-!]

아벳 네크라페토 역시 아공간에 보관 중이던 시체들 중 가장 자신 있는 시체를 꺼냈다.

처음 저 바바리안을 봤을 때만 해도 도망치는 것을 먼저 떠올렸지만, 일단 조금은 수를 나눠보며 비빌 언덕인지 아닌지 갸늠해 볼 계획이었다.

하지만…….

“와, [방벽] 특성이네? 개조를 얼마나 한 거야?”

바바리안은 수만 번은 넘게 [개조]를 해서 딱 한 번 나왔던 No.3의 특성을 보자마자 알아챘다.

그리고…….

“얘는 여기가 약점이니까 쉽지.”

콰직-!

피해 면역을 지닌 No.3가 유일한 약점을 얻어맞고 그대로 힘없이 쓰러진다.

물론 필드 효과 덕분에 얼마 안 있으면 다시 부활을 하긴 하겠지만…….

‘…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아벳 네크라페토는 치솟던 자신감이 소폭 감소하고, 불안감이 소폭 상승했다.

물론 그럼에도 최대한 희망을 가져봤지만…….

“…[천벌자] 특성은 그냥 맞아도 되겠고.”

콰직-!

“암, [음악가] 특성은 제일 먼저 처리해야지.”

콰직-!

저 바바리안은 이 세상 모든 진리에 통달한 사람처럼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오, ‘명계불이’네? 개꿀.”

바바리안은 처치 시 일시적으로 어둠 내성이 상승하는 필드 몬스터는 보이는 족족 망치로 때렸다.

또한, 느닷없이 볼록 튀어나온 지면을 때리기도 했다.

‘……저건 왜 때리는 거지?’

“아, 모르냐? 이거 치면 내성 수치가 오르는데.”

명계에 수없이 방문해 본 그조차 모르는 히든 피스.

쿠웅-!

직접 해보니 왠지 정말로 살짝 피부가 질겨진 거 같기도 하고…….

두근-!

점점 강해지는 ‘뭔가 잘못됐다’라는 감각.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던 그가 비장의 수를 꺼냈다.

“그, 그래도 이건 막지 못할 겁니다!”

“오, 이제 슬슬 소환각이 나왔나보네?”

“……예?”

“뭐야, 지금 명왕 뽑으려던 거 아니었어?”

“…….”

맞다.

명계의 지팡이를 보유한 자가 명계에 들어섰을 때, 특정 조건을 만족시키면 소환할 수 있는 필드 보스.

지금 그는 그걸 소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두근-!

근데 이 바바리안은 대체 어떻게 이것까지 알고 있는 걸까?

마치 명계에 수없이 많이 와본 사람처럼…….

“아, 알아도 소용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이내 그가 지팡이를 높이 들었다.

그리고 저 하늘 높이 뜬 달을 대상으로 ‘지정’하며 ‘명계의 부름’을 다시 한 번 시전했다.

그리고…….

[산 자의 냄새가 느껴지는구나.]

명계 전역에 울려 퍼지는 초월자의 목소리.

아군이란 걸 알고 있음에도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네크라페토는 등골이 오싹했다.

일전에 오르큘리스의 ‘서열전’에서 감히 자신에게 도전했던 놈을 일격에 참살해 버린 명왕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했기 때문이다.

하나 그럼에도 확신까지는 들지 않았다.

비요른 얀델.

라프도니아 역사를 뒤져봐도 누구나 한 손에 꼽을 만한 실력을 지닌 ‘수호자’.

아무리 ‘명계의 지팡이’라 해도 그런 놈을 일격에 죽이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큰 타격은 입힐 수 있겠지.’

네크라페토는 이번 일격까지만 직접 확인해보고서 최종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만약 큰 피해를 입는다면, 그땐 더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하며 놈을 죽이기 위해 노력해 볼 것이다.

하나 반대로 경미한 피해로 끝이 난다면…….

‘그런 놈을 어떻게 죽입니까?’

처음부터 안 되는 일이었다는 걸 인정하고서, 깔끔하게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며 시간만 끌 것이다.

후우웅-!

하면, 과연 결과는 어떨까.

[산 자여, 묻겠다.]

거대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명왕이 아래…….

아니, 행성을 내려다보며 하문한다.

[어찌 하여 불멸의 땅에 발을 들였는가.]

그가 보기에는 쓸데없는 이벤트였다.

저기서 산 자가 무슨 대답을 하든 명왕은 분노하며 손바닥을 내리치니—.

피슈우우웃-!

…까?

‘뭐지?’

그때 돌연 바바리안이 땅에서 분출되는 녹색 가스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저기에 들어가면 저주에 걸리는 걸 알고 있으면서 왜 자기 발로 저기를……?

그 의문이 풀리기까지 오랜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내가 잘못 보았나 보구나.]

그 말을 끝으로 스르륵 사라지는 명왕.

“아, 아닙니다! 명왕 님! 여, 여기 있습니다! 여기 산 자가 있으니 얼른 돌아오십시오! 돌아오라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네크라페토가 하늘에 대고 소리를 내질렀으나, 어느덧 모습을 감춘 명왕이 다시 소환되는 일은 없었다.

“…….”

그렇게 찾아온 허무의 정적.

피슈우웃-!

이내 지면에서 솟구치던 가스의 분출이 멈추며, 그 안에 몸을 숨기고 있던 바바리안이 씨익 웃으며 모습을 드러낸다.

“몰랐나 보네?”

너무나도 태연자약한 물음.

네크라페토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뒷골이 땡길 정도였다.

‘…그럼 이걸 어떻게 안단 말입니까!’

오히려 아는 쪽이 이상하다.

지금까지 명왕을 소환했을 때 이런 식으로 피한 놈을 본 적도 없을뿐더러…….

이전에 ‘명계의 지팡이’를 보유했다고 알려진 어느 사령술사의 수기도 마찬가지다.

거기에도 이런 얘기는 적혀 있지 않았다.

“……다, 당신은 어떻게 전부 알고 있는 겁니까?”

네크라페토는 체념하듯 물었고, 바바리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렸다.

“내가 왜 알려 주냐?”

평소 바바리안이 자주 쓰던 사람을 놀리는 말투.

“원래 모르는 건 맞으면서 배우는 거다.”

다만 이어진 말에 네크라페토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두근-!

뭔가 잘못된 거 같은 느낌이 아니다.

이건…….

두근-!

그냥 잘못돼도 이미 한참 잘못됐다.

***

녹색빛 하늘 아래.

타다다닷-!

메마른 벌판을 내달리고 있다.

타다닷-!

앞에서는 개조된 4족 보행 키메라가 시체 수집가를 태운 채 나를 피해 달아나는 상황.

‘쩝, 너무 몰아세웠나?’

일단 전투 자체는 굉장히 쉬웠다.

명계 버프를 받은 시체고 뭐고, 일단 네크로맨서는 물량전을 하는 포지션이니까.

당연히 최정예라 해봤자 개체 하나하나의 공격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런 타입으로는 절대 나를 잡을 수 없다.

방패바바는 평타를 맞으면 맞을 수록 강해지는 매커니즘을 갖고 있으니까.

또한, 나는 네크로맨서를 직접 플레이해봤기에 직업에 대한 이해도도 높았고, 현재 자리한 명계에도 수없이 와봤기에 변수도 없었다,

「누적된 피해가 일정 수치를 초과했습니다.」

문제는 명왕까지 카운터 치고나니 기가 꺾였는지 그대로 도망치기 시작했다는 거지만.

‘슬슬… 해볼까.’

물론 스택이 얼마나 찼는지는 모르겠다.

나를 방해하는 시체 군단들 사이를 다 처맞아가며 달린 덕분에 제법 쌓이긴 했을 거 같은데…….

‘뭐, 확인해 보면 알겠지.’

「캐릭터가 [아이기스의 용갑]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내 갑주의 액티브 효과를 쓰기 무섭게, 내 등 뒤에서 나타난 영혼의 전사가 앞으로 달려나간다.

좀 전에 봤던 명왕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현실감이 없어지기엔 충분한 크기.

때마침 고개를 돌아본 녀석이 학을 떼기 시작한다.

“……뭐, 뭡니까 저건!”

거, 얘는 진짜 애새끼도 아니고.

뭐 하나 할 때마다 자꾸 떠먹여달라는 듯 물어보는 걸까.

‘모르면 맞으면서 배우라니까.’

후우우우웅-!

이내 한 걸음을 내디디며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는 영혼의 전사.

그 압도적인 크기의 대검에게 있어 녀석과 나 사이에 떨어진 거리 따위는 어떠한 문제도 되지 않았다.

콰아아아아아앙-!

땅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자욱한 연기가 치솟는다.

「아벳 네크라페토가 [찰나의 불멸]을 시전했습니다.」

오케이, 그럼 이거로 무적기는 뺐으니…….

씨익.

다음번엔 죽일 수 있겠네.

20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735화 광대 (4) 20

735화 광대 (4)

솨아아아아아아-!

스산한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며 자욱한 흙먼지를 밀어내고, 그 너머로 불타는 스켈레톤이 모습을 드러낸다.

화르륵-!

흑색의 불길에 뒤삼켜진 채 뼈만 남은 상태의 시체 수집가.

그런 와중에도 불길에 영향을 받지 않은 명계의 지팡이는 사골뼈 같은 손으로 꽉 쥐고 있었는데…….

‘…왜 이렇게 없어 보이냐?’

고블린 숲에서 저 무적기를 처음 선보였을 때의 포스는 더 이상 없었다.

몹시나 간단한 이유였다.

1분의 무적 시간.

그리고 이능 및 정신 수치가 전환되며 폭증한 육체 수치.

스킬의 성능 자체는 이전과 다름이 없었지만.

아니, 오히려 명계의 축복까지 받아 그때보다도 훨씬 더 스펙업이 짱짱하게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다른 선택을 내렸다.

1분이란 시간 동안, 날카롭게 내 역린을 찌르려던 그때와는 다르게.

타다다닷-!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내게 등을 보이고 부리나케 달아나는 녀석.

그 모습을 보니 왠지 익숙한 벌레가 떠올랐다.

예전에 반지하에 살 때 부엌불을 키면 바퀴벌레가 저렇게 후다닥 도망쳤는데.

‘……빠르긴 하네.’

명계의 축복에 찰나의 불멸까지 합쳐지며 스탯뻥이 상당했는지, 이동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고로, 나도 서둘러 추격을 시작.

쿠웅-! 쿠웅-!

길쭉하고 두꺼운 다리를 땀나도록 움직였으나, 녀석과의 거리는 점점 더 벌어졌다.

거, 저 자그마한 다리 뼈로 얼마나 잘 뛰는 건지.

‘그래 봤자 결국 뒈질 텐데.’

빠르게 거리가 벌어지는 상황이었으나 나는 조급함을 느끼거나 하지 않았다.

숨을 곳 하나 없는 드넓은 벌판.

놈이 얼마나 멀어지든 말든 나는 우직하게 녀석이 도망친 방향으로 따라갔다.

그리고…….

‘1분.’

1분이 지나 [찰나의 불멸]이 끝나며 뼈밖에 없던 녀석의 몸체에 살점이 차오른다.

타다다닷-!

이제 녀석은 자연의 상태로 돌아간 채 지팡이 하나만 들고서 도망치고 있었다.

‘…그래도 거리가 안 좁혀지네.’

[찰나의 불멸]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빠른 도주를 이어나가는 녀석을 보니 조금 귀찮게 됐다 싶기는 했지만, 여전히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명계가 닫히려면 아직 한참 남았으니까.

‘최대 지속 시간이 24시간이었지 아마?’

이곳에 온 지 아무리 많이 쳐줘도 30분 안팎.

쉽게 말해, 시간이 아직 23시간도 넘게 남았다는 뜻인데…….

쿠웅-! 쿠웅-!

일정한 속도로 다리를 뻗으며 나는 씨익 웃었다.

‘언제까지 도망칠 수 있는지 보자고.’

바바리안은 포기하지 않는다.

***

술래잡기를 해본 적 있는가?

있다면 알 것이다.

고작 놀이에 불과한 행위란 걸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쫓긴다는 것은 높은 긴장감과 아찔한 스릴을 선사한다.

하면, 놀이도 그럴진데 진짜 술래잡기는 어떨까.

사실 그동안의 네크라페토는 잘 알지 못했다.

그야 그는 항상 ‘술래’인 쪽이었으니까.

타다다닷-!

쉬지 않고 움직이는 다리가 뻐근하다.

심리적인 압박 때문인지 평소보다도 더 빠르게 지치는 느낌이 들며.

“허억, 허억……!”

이를 반증하듯 숨이 턱까지 걸쳐진다.

‘……제, 제발 포기하란 말입니다!’

‘술래’와의 거리는 한참이나 벌어져 있었으나, 그는 조금도 안심할 수 없었다.

쿠웅-! 쿠웅-!

저 멀리서 일정하게 들려오는 걸음소리에서조차 느껴졌으니까.

절대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집념이.

‘아예 따돌리려면 더 거리를 벌려야 하는데…….’

조급해진 사내는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했다.

계속해서 아공간에서 시체들을 꺼냈고, 조금이라도 바바리안의 동선에 방해가 되도록 하였다.

[그르르르륵-!]

거대한 시체로 벽을 세웠고.

[캬아아아악-!]

썩은 발톱을 휘두르게 하며 조금이라도 바바리안의 신경이 거슬리게 했다.

“오, 스택 개꿀.”

뒤에서 바바리안이 흡족한 미소를 머금은 것은 전혀 알지 못한 채.

타다다닷-!

그렇게 시간이 흐른다.

1분, 2분, 3분, 4분…….

쿠웅-! 쿠웅-!

10분, 20분, 30분, 40분…….

‘1시간…….’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으나 체감상 그 정도가 흘렀다 생각했을 무렵.

상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사내는 가장 이동속도가 빠른 소환수를 꺼내서 탄 상태였고, 바바리안은 쿠웅 쿠웅 소리를 내며 시체 군단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거리는…….

‘…왜, 더 벌어지지 않는단 말입니까!’

비슷했다.

문제는 총 두 가지였다.

첫 번째로, 시체들을 그렇게 소환해서 방해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 탱크 같은 바바리안에게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으며…….

‘거대화.’

저 놈의 [거대화]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보통 저런 변신 계통 이능들은 매초 MP를 소모하기 때문에 오래 켤 수 없는 게 상식일진데.

‘저, 저것만 아니어도 확 거리를 벌릴 수 있는데!’

대체 저 스킬은 언제 꺼지는 걸까.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얼마 남지 않았을 거라고.

곧 한계가 찾아오면 [거대화]가 풀리며 거리를 확 벌릴 수 있을 거라고 그는 희망을 품었다.

무지를 근원으로 한 헛된 희망이었다.

아벳 네크라페토는 몰랐다.

「비요른 얀델이 변신계 이능을 사용하였습니다.」

「[태초의 세포] 효과에 의해 해당 스킬의 영혼력 소모가 절반으로 감소하며, 가장 높은 능력치가 1.5배 상승합니다.」

방패 바바가 이미 70% 정도 완성이 되었다는 걸.

「비요른 얀델이 [영혼 잠수]를 시전했습니다.」

「소모된 영혼력에 비례해 영혼력이 재생됩니다.」

다른 쪽에서 MP 소모를 유도하지 않는다면, 평생 [거대화]가 풀릴 일이 없다는—.

후우웅-!

그때 등 뒤에서 피어난 오싹한 감각에 서둘러 등을 돌린 네크라페토는 보았다.

「캐릭터가 [아이기스의 용갑]을 사용하였습니다.」

원근감 따위는 가볍게 무시할 정도로 거대한 영혼의 전사를.

‘……무, 무슨 스킬이기에 벌써 쿨타임이 돈단 말입니까!’

스킬이 아니고 아이템의 사용 효과지만, 아벳 네크라페토가 전혀 아는 게 없는 것도 당연했다.

아이기스의 용갑은 게임에도 존재하지 않은 ‘시크릿 넘버스’이니까.

자신이 소환한 시체 군단 때문에 스택이 빠르게 다시 쌓였단 걸 알고 있을 리 만무.

‘……저, 저것 때문에 어떻게든 거리를 벌리려고 했던 건데……!’

그는 너무 억울했다.

탱커인 주제에 저런 사기적인 스킬을 연속해서 사용하는 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아, 물론 그런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새는 없었다.

타닷-!

그는 하늘의 천벌처럼 떨어지는 거대한 도끼를 피해 소환수에서 다이빙하듯 점프했다.

그리고 그 결과.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도끼질은 겨우 피했으나, 타고 있던 소환수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명계의 필드 효과 덕분에 천천히 복원되기야 하겠지만, 저 정도면 원상태로 돌아오기까지 최소 몇 시간은 걸릴 터.

“쩝, 이번엔 터트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예리한 청각에 저 멀리서 바바리안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잡힌다.

이에 정신이 번쩍 든 네크라페토는 얼른 몸을 일으켜 자기 두 발로 뛰기 시작했다.

타다다닷-!

몸의 이상을 감지한 것은 그렇게 두 발로 뛰기 시작하고서 한 5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윽!”

도끼의 직격타는 피했지만,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던 걸까?

‘다… 다리가…….’

한쪽은 괜찮은데 왼쪽 다리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억지로 힘을 줘서 움직이고 있기는 하지만, 그때마다 지끈거리는 통증이 스멀스멀 올라오며…….

우득-!

그 통증은 점점 더 심해져갔다.

그 결과, 이동 속도가 점점 떨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

네크라페토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럴 시간도 아낀 채 그저 열심히 뜀박질을 이어나가는 것에 집중했고, 그럼에도 뒤에서 들리는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쿠웅! 쿠웅!

한 걸음, 한 걸음.

필사적으로 뛰고 있음에도 점점 더 가깝게 들리는 소리.

쿠웅-!

이내 그 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렸을 때였다.

“윽!”

머리끄댕이가 잡아뜯기는 느낌과 함께 몸이 위로 붕 떴고.

“드디어 잡았네.”

눈을 떴을 땐 바바리안이 보였다.

자신을 놀리기라도 하듯.

“피싯.”

소리를 내며 웃는.

***

마침내 추격전이 끝났다.

소요 시간은 약 1시간 조금 넘는 듯한데…….

‘다 마무리만 되면 이동기부터 빠르게 수급해야지.’

이렇게 결국 추격을 무사히 끝마쳤으나, 나는 내 부족한 점을 반성하며 보완할 생각을 먼저 했다.

그도 그럴 게, 최근 들어 이동기의 부재로 인해 아쉬운 상황들이 너무 많았다.

이번만 해도 그랬다.

하다못해 [도약]만 있었더라도 훨씬 더 수월하게 이번 추격전을 끝마칠 수 있었을—.

“하, 하하하…….”

그렇게 잠시 딴생각을 하던 때, 녀석이 돌연 어색한 웃음을 흘린다.

“혀, 협상을 해보는 건 어, 어떻습니까?”

하, 이놈의 것들은 왜 다 궁지에 몰리기만 하면 이 지랄이지?

“응, 안 돼.”

“그, 그래도 대화를 하다 보면 서로 윈-윈 할 수 있는 게 있을지 모를—.”

“응, 없어.”

“…….”

“그럼 이제 죽자.”

아기와도 같은 상태의 녀석을 이제 슬슬 재워 주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그때.

“……응?”

“이, 이대로 죽기엔 억울하단 말입니다……!!”

머리끄댕이가 붙잡힌 녀석이 아공간에서 단검을 꺼내 휘두른다.

휘이이익-!

당연한 말이지만, 녀석의 단검이 노리는 지점은 내 몸이 아니었다.

녀석은 단검질을 해봤자 흠집도 나지 않을 내 피부가 아니라, 잡혀 있던 본인의 머리카락을 잘라 냈다.

그리고…….

툭.

낙법을 펼치듯 바닥을 구르며 나와 빠르게 거리를 벌린다.

‘거, 이 상황에서도 탈출각을 보네.’

저번에 비비앙을 버리고 도망친 것도 그렇고, 역시 삶에 대한 열망이 강한 놈이다.

뭐, 그걸 탓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게 살고 싶었으면 죽을 만한 짓은 안 하고 다녔어야지.”

그 말을 끝으로 망치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었다.

하지만…….

콰아아아앙-!

잽싸게 옆으로 구르며 회피하는 놈.

다만 피할 걸 내심 예상했기에 즉시 놈의 머리통을 향해 킥을 날렸다.

근데 이건 또 뭘까.

타닷.

그 자세에서 백덤블링을 하며 킥을 피하는 녀석.

다리가 다친 거 같은데도 상당히 날쌔다.

‘딱 한 대만 제대로 때리면 될 거 같은데…….’

그걸 본인도 아는지 녀석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후웅-!

망치를 휘두르고.

후우웅-!

손을 뻗어보기도 하며.

콰아아아앙-!

다시 한 번 망치를 내려찍어 보기도 했지만, 닿지 않는 공격들.

‘하, 진짜 더럽게 안 맞네.’

마치 날파리를 잡는 기분이었다.

딱히 위협이 되는 건 아닌데, 맨손으로는 더럽게 잡기 힘든 그런 느낌이랄까.

이제 막타만 치면 되는데 그 중요한 막타가 자꾸 빗나가고 있다.

“그냥 좀 죽으면 안 되냐?”

조금 짜증이 날 정도지만, 그럴수록 상황을 냉정히 봐야 하는 법.

“……후우, 후욱.”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보고서도 배울 점이 있다고.

짜증이란 감정을 내려놓고 나니, 거의 무아지경에 빠진 듯한 집중력을 보이며 내 공격들을 피해 내고 있는 녀석이 보였다.

그리고 이를 보자 작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후우우웅-!

내 공격이 맞지 않는 것은 마음가짐의 문제였다.

녀석은 한 방 한 방을 피하기 위해 온몸의 감각을 모두 깨운 반면, 나는 어땠는가.

과연 전심전력으로 모든 수를 썼던가?

답은 ‘아니오’였다.

그래, 그러니까…….

‘암, 이럴 땐 정신 공격이지.’

나는 허공을 가를 뿐인 망치질을 그대로 이어나가며 말했다.

나 스스로 판단하기에 지금 이 상황에서 놈의 집중을 방해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될 법한 말.

“알고 있나? 아벳 네크라페토.”

“…….”

“사실 나는 악령이다.”

“……?”

녀석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지만, 녀석은 이번에도 허리를 뒤로 꺾으며 망치를 피했다.

흠, 이거로는 부족하다 이거지?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랐고.”

정신을 차릴 틈이 없도록 빠르게 말을 잇는다.

“스톤 아이벤에서는 ‘Elfnuna’라는 닉네임을 사용했다.”

“…뭣?”

오, 드디어 제대로 반응했네.

하긴, 엘프누나가 나름 네임드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영어로 제대로 발음했으니까.

후우우웅-!

“읏!”

집중이 흐트러졌는지, 한 끗 차이로 녀석의 콧등 위를 쓰윽 지나치는 망치.

하, 이래도 피한다고?

“광대, 아벳 네크라페토.”

이내 원탁에서만 썼던 이름을 꺼내자 녀석의 동공이 크게 확장된다.

녀석의 눈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 이름을 어떻게!’

거, 어떻게긴 어떻게야.

씨익.

왠지 모를 해방감을 느끼며 나는 말했다.

“내가…….”

언젠가 꼭 녀석 앞에서 말해 주고 싶었던 진실.

“수사자 가면이다.”

“……!!!!!!”

후, 속시원하네.

현실을 부정하는 듯한 저 시선을 보니 스트레스가 쫙 풀린다.

“…다, 당신이?”

이내 녀석은 어느덧 움직이는 것도 멈춘 채 내게 물었고.

“수사… 자?”

나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그래, 내가 수사자 가면이다.

그러니까…….

「캐릭터가 [휘두르기]를 시전했습니다.」

이제 그만 뒈져.

콰직-!!!

벌레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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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6화 광대 (5)

수사자 가면이 원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아벳 네크라페토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날 이곳에 추천해 준 사람은 당신 엄마다. 근데 뭐, 문제라도 있나?]

날고 기는 플레이어들이 모인 집회에서도 거침없는 언행.

그리고…….

[그만, 해주세요. 더 이상은, 나도 위험…….]

이를 뒷받침할 실력.

[……!]

[……!]

수사자 가면은 숨 막힐 듯한 살기로 한순간에 원탁을 장악했고, 그 누구도 감히 그의 의견에 토달지 못했다.

실로 폭력적인 존재였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서역을 유린한 몽골군처럼, 수사자 가면은 순식간에 원탁을 정복했다.

다만, 그의 진짜 무서움은 ‘무력’만이 아니었다.

[반데몬은 세 명이서 잡으면 확정적으로 정수가 드랍된다.]

[별의 여신이 내린 신탁으로 새로운 성물이 세상에 나왔다.]

[소생의 돌은 실존한다.]

수사자 가면은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정보들을 당연하다는 듯 알고 있었다.

어느 정도 규모의 집단을 이끌어야 그러한 정보를 별거 아니라는 듯 알고 있는지가 의문이 들 정도로.

신비 속에 가려진 존재.

‘……멋있어.’

아벳 네크라페토는 그런 그를 흠모했다.

어찌 보면 동경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도 그렇지 않은가?

짓밟고 싶으면 짓밟고.

하찮은 벌레를 바라보듯 모두를 대한다.

그러다 간혹 심심해지면 먹이를 던진 뒤, 그 반응을 보며 유희한다.

네크라페토의 눈엔 어려서 좋아했던 어느 빌런보다 그가 더 멋있어 보였다.

[만약에… 만약에 말입니다…….]

[제가 모든 걸 버리고 수사자 씨 아래로 들어가고 싶다고 한다면… 받아 주시겠습니까?]

최후의 원탁 집회에서 그 말을 한 것도 그래서였다.

오르큘리스도 괜찮은 집단인 건 맞지만, 수사자 가면에 비하기엔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으니까.

만약 그의 아래로 들어갈 수 있다면, 정말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 같았다.

뭐, 그 제안에 돌아온 대답은 거절이었지만.

[벌레라니! 푸흐흐흐……! 분명 수사자 씨 눈에는 모든 이들이 그런 존재로 보이는 거겠지요?]

그렇게 실망스럽진 않았다.

아직은 내가 그의 눈에 차지 않았을 뿐이니까.

더 악명을 쌓고, 더 나쁜 인간이 된다면 자신에게 먼저 손을 뻗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비요른 얀델이…….’

하려는 일들을 사사건건 방해한 것도 모자라, ‘장난감 수집가’란 이상한 이명까지 갖게 만든 그 씹어죽여도 시원찮을 바바리안 놈이.

‘…수사자 가면이라고?’

처음에 피어난 감정은 ‘부정’이었다.

그럴 리 없다.

어디서 이상한 소리를 듣고 와서 저런 얘기를 하는 게 분명하다.

삐이이이이이이-!

그리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납득해 버렸다.

흐린 눈을 뜨고서 외면해 왔던 진실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달까?

[수사자는 비요른 얀델이다.]

2년 6개월의 공백을 깨고서 원탁으로 복귀했던 수사자 가면에게 ‘여왕’이 하였던 말.

결과적으로 적색불이 켜졌지만, 이는 그만큼의 심증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별의 여신이 내린 신탁으로 새로운 성물이 세상에 나왔다.]

수사자가 레아틀라스교의 정보를 그 누구보다 먼저 알고 있었던 것.

비요른 얀델이기 때문이라면 설명이 된다.

그야 신탁의 당사자가 바로 그였으니까.

[광대는 시체 수집가다.]

이것도 마찬가지다.

비요른 얀델과 처음 대적했을 때, 가면을 쓰고서 대놓고 자신이 ‘광대’임을 드러냈었다.

[혹시 어딘가…… 읍!]

그날 집회에서 느닷없이 자신에게 살기를 흩뿌린 것도, 무료한 절대자의 유희가 아니라 복수였으며.

툭- 툭-

다 필요없이 그냥 저 내려다보는 눈빛을 보는 순간 납득해버렸다.

“질기군.”

그가 동경했던 수사자 가면은, 비요른 얀델이었다.

***

녀석의 표정은 딱 내가 기대했던 대로였다.

처음에는 현실을 부정하고, 그다음엔 그럴듯한 정황들에 배신감을 느끼다가…….

“…….”

결국엔 곧 다가올 죽음을 두려워한다.

꾸욱-

[거대화]를 풀고서 가슴 상단부를 발로 짓누르자, 녀석이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다가도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헤실헤실 웃는다.

내가 수사자 가면이라는 충격적인 진실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그야 머리통이 절반만 남았는데 정신이 멀쩡할 리 없지 않은가.

‘으… 징그러워.’

그래도 마지막에 힘 조절을 한 탓에 한 방에 즉사하진 않았다. 뭐, 원래는 그냥 한 방에 깔끔하게 보내 줄까도 싶었지만…….

‘암, 아무리 바빠도 루팅은 해야지.’

이대로 이놈을 죽이면 얻는 게 별로 없다.

기껏해야 지금도 손에 꼭 쥐고 있는 저 ‘명계의 지팡이’ 정도랄까?

‘이래서 최상위 탐험가들이 귀찮다니까.’

미궁 저층을 돌아다닐 땐 그냥 일단 죽이고서 가방을 뒤지거나 장비를 벗기면 끝이었지만, 상위 탐험가들은 어지간하면 다들 아공간을 갖고 있다.

이놈의 경우엔 네크로맨서라는 특성상 아공간도 훨씬 클 테고.

“야, 듣고 있냐? 어? 들리냐고.”

몇 번이나 말을 걸었으나, 대답이 돌아오기는커녕 허공만 보며 실실 쪼개는 녀석.

“쩝.”

어쩔 수 없이 나는 아공간에서 포션 하나를 꺼내 녀석의 머리에 부었다.

치이이이이이익-!

뭐야, 이 새끼 고통도 못 느끼나?

포션이 부글부글 끓으며 수증기를 발생시키고 있음에도 아무런 미동도 없이 허공을 바라보는 녀석.

녀석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은 깊게 파인 머리통이 반쯤 회복되었을 때—.

“피시시시시싯! 피시시시시시시시싯!! 피싯, 피싯, 피시시이이이이이잇!!!!”

놈이 발작을 일으키듯 몸을 위아래로 튕기며 비명을 내지르듯 웃음소리를 내뱉는다.

‘……뭐야, 이거?’

전혀 예상치 못한 기괴한 광경에 순간 오싹함을 느낄 정도였으나, 단순히 머리가 정상으로 돌아오면서 생긴 해프닝이었다.

“끄으, 끄으으! 끄아흐… 흐으으!!”

단순히 뇌의 오작동이었음을 증명하듯 어느새인가 정상적으로 뒤바뀐 비명 소리.

‘오케이, 이 정도면 되겠고.’

툭툭.

녀석의 빰을 망치로 살살 치며 말했다.

“이제 들리냐?”

“……어, 아, 으으.”

음, 뇌가 말을 할 정도로 회복된 건 아닌가.

“들리면 눈 한 번 깜빡.”

…깜빡.

“왜 한쪽 눈만 깜빡이냐? 기분 나쁘게.”

깜빡, 깜빡.

“네 의지가 아니라고? 흐음… 오케이.”

뭐, 이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자, 그럼 지금부터 아공간의 주인 각인을 해제한다. 실시.”

휴식이 간절해 보이는 녀석을 위해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갔지만, 애석하게도 녀석은 눈으로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깜빡, 깜빡, 깜빡, 깜빡.

빠르게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는 왼쪽 눈꺼풀.

“줄 바에 그냥 죽겠다고?”

“어, 아어… 어, 어으……!”

“뭐라는지 하나도 모르겠으니까 눈으로 말해.”

내가 신경질적으로 말하자 녀석의 눈이 미친듯이 깜빡였다. 일단 그냥 죽을 생각이 아니라는 뜻인 듯한데…….

“그럼 뭔데?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거냐?”

…깜빡.

“오케이, 그럼 포션 좀 더 뿌려 줄 테니까. 대신에 말할 수 있게 되면 포션값으로 군말 없이 아공간은 넘겨주는 거다?”

어허.

“대답.”

…깜빡.

왠지 모르게 살짝 늦게 눈을 한 번 깜빡이는 모습을 보니 내 제안이 내키지 않는 듯했지만, 기분 탓일 거였다.

벙어리에게 말을 할 수 있게 해준다면 그 벙어리는 천금을 내줘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할 테니까.

암, 이건 합리적이고도 정당한 거래다.

콰직-!

혹시 머리가 나으면 또 도망칠지도 모르기에 양쪽 발을 한 번 더 짓뭉개준 뒤.

치이이이이이익-!

계약 이행을 위해 고등급 포션을 조금 더 머리에 부어주자 녀석의 비명이 더욱 격해진다.

다만 깨진 머리가 점차 봉합되고 있었을까?

“……아아아아악! 끄으흐흣… 아아악!!”

아까보다도 훨씬 더 정석적인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한 시체 수집가.

치이이이이익-!

한 10분 정도 시간이 흐르자, 녀석도 어느 정도 진정하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

“아공간.”

“……?”

“약속은 지켜야지. 대화를 하기 전에 아공간부터 내놔라.”

“아, 아니 그런 게 어디—.”

“시간 낭비만 했군.”

무감정하게 말을 뱉으며 슬며시 망치를 치켜들자, 녀석이 격하게 손사레치며 소리친다.

“드, 드리겠습니다!”

거, 진작 그럴 것이지.

“대, 대신 잠깐이라도 대화를 해주겠다는 약속은 꼭 지켜 주셔야…….”

“그 부분은 걱정 마라.”

정말로 순순히 아공간을 내어준다면 유언을 남길 시간 정도는 기다려 줄 아량이 내게는 있었다.

“끄, 끝났습니다.”

주인 각인 해제와 동시에 놈의 심장부에서 빛이 뿜어지며 반투명한 구슬이 빠져나왔다.

겉보기엔 평범하지만, 자세히 보면 아주 작은 마법진이 수십 겹으로 겹쳐져 있는 구슬.

와, 팔찌도 아니고 체내에 이식하는 아공간이면 꽤 비싼 거로 아는데…….

“좋은 걸 갖고 다니는군.”

“……우, 운 좋게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역시 나쁜놈이 잘 먹고 잘 사는 게 세상의 진리인가?

“아, 아공간을 열려면 나중에 마법사를 통해 재이식을 하셔야 할 겁니다…….”

“알고 있으니, 설명할 필요 없다.”

“…….”

“자, 그럼 지금부터 10분 주지.”

딱 잘라서 시간을 정해주면서도 궁금했다.

과연 이 녀석은 주어진 10분 동안 무슨 얘기를 할까.

반성하는 척하며 목숨을 구걸할까.

그도 아니면, 무언가 거래 제안을 할까.

정답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입을 열기 전, 스탠바이를 기다리는 방송인처럼 잠시 정신 집중을 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던 녀석은.

“피시싯…….”

광대 가면을 썼을 때처럼 웃었다.

그리고…….

‘……웃어?’

내 속마음이 들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이었다.

“왜, 혹시 제가 발발 떨며 목숨 구걸이라도 할 줄 알았습니까?”

어…….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긴 한데, 인정하기엔 뭔가 자존심이 상한다.

그래서 가만히 있자니 녀석이 또다시 웃었다.

“피시시싯…….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비요른 얀델, 당신이 플레이어인 것도 모자라 설마 수사자 가면이었을 줄이야!”

“…대체 뭐 하자는 거냐?”

연극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에 내가 참지 못하고 묻자 녀석은 또다시 피시싯 웃었다.

“예? 그저 죽을 순간이란 걸 깨닫고서 마지막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겁니다마는?”

와… 얘는 진짜 컨셉에 제대로 잡아먹혔구나.

솔직히 그동안에는 가짜 광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이놈은 그런 게 아니라 진짜였다.

그리고 진짜 광기를 보자 나도 뭐라 할 말을 잃었다.

“…목숨에 미련이 없나?”

“없을 리가요! 하지만 그런 걸 토로한다고 당신이 절 살려 줄 리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그래도 시도는 해보는 게 보통 사람의 심리 아닌가?

“피싯, 저는 그런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뭐가 다르지?”

“약육강식은 자연의 섭리니까요. 그것에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래서? 대화할 시간은 왜 달라 한 건데?”

“그냥, 그게 더 재밌지 않겠습니까?”

오, 그렇구나…….

보아하니 아직 머리가 다 낫지 않은 듯했다.

그래, 그러니까 죽기 10분 전에 이런 헛소리나 뱉는 거겠—.

“피시시싯…….”

그때 헤실거리는 광대의 눈빛에서 익숙한 감정이 느껴졌다.

‘……응?’

공포, 절망, 후회, 아쉬움…….

죽음을 목전에 둔 생명체라면 무릇 피어날 수밖에 없는 그런 어두운 감정들.

“왜? 실망했습니까? 울고 불며 빌지 않아서?”

자세히 보니 미세하게나마 몸도 떨리고 있다.

그제야 나도 깨달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저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데. 나는 약했고, 반면 당신은 강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승자의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솔직하게 가는 편이 좋지 않나?”

죽여 마땅할 놈이긴 했지만, 나는 그런 녀석을 보며 진지하게 조언했다.

사람이라면 모두 가면을 쓴다.

그게 잘못된 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지막은 가면을 벗는 게 좋지 않을까. 그게 나의 생각이며 지금 상황에서 놈에게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온정이었다.

하지만…….

“피, 시싯…….”

그런 내 조언에도 녀석은 애써 거짓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하나 그래도 내 조언이 조금은 마음에 닿았을까.

“…솔직하게 살기에는 너무 벅찬 세상이지 않습니까. 아! 물론 당신처럼 강한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피싯!”

약육강식이니, 자연의 섭리니, 불응할 생각은 없느니 하는 말보다는 훨씬 더 진실되게 들리는 말.

‘하, 미치겠네…….’

그냥 아까 죽일 걸.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녀석에게 묻고 말았다.

“…야, 넌 본명이 뭐냐?”

시체 수집가, 아벳 네크라페토.

“피시싯, 갑자기 저에 대해 궁금해진 겁니까?”

“그래.”

이 녀석이 궁금해져버렸다.

44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737화 광대 (6) 44

737화 광대 (6)

갑자기 나에 대해 궁금해졌다는 질문.

그 질문을 받고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자, 역으로 녀석은 당황한 표정을 내지었다.

내 입장에선 왜 저러나 싶었다.

‘그럼 궁금해졌으니까 묻지.’

궁금하지도 않은 걸 귀한 시간 써 가며 물었겠어?

왜 당황하는지 이해되지 않았으나, 그 뒤에 이어진 표정만큼은 아니었다.

“…….”

눈이 마주치자 어딘가 쑥스러운 듯 시선을 피하는 녀석.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냐?”

나도 모르게 질색하는 표정을 짓자, 이를 본인도 느꼈는지 황급히 변명의 말을 내뱉는다.

“…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제 보, 본명을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마치 ‘네, 네가 처음이란 말이야!’ 같은 느낌의 대사.

나도 모를 역함에 곧장 망치를 내리칠 뻔했지만, 일단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겨우 참아 냈다.

“그래서 본명은?”

“…….”

“대답하지 않을 건가?”

“…혀, 협박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저는 이미 죽음을 각오했으니까요!”

하, 이 새끼 또 귀찮게 하네.

그런 생각을 속으로 품으며 녀석을 보고 있자, 녀석이 또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다.

“그러니까… 이건 협박에 굴해서 말하는 게 아닙니다. 알겠습니까?”

뭐야, 결국 말할 거면서.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자니 녀석의 입에서 영발음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제스터 아를레키노.”

“미국인이냐?”

“예. 아버님이 이탈리아 출신 이주민이셨습니다.”

아버님 출신까지 말하는 건 TMI이긴 했지만, 뭐… 입이 트였다는 건 나쁘지 않으려나?

“그렇군. 여기 온 지는 얼마나 됐고?”

“……이제 19년 차겠군요.”

“오래도 있었군.”

“피싯… 동정하지 마십시오. 애초에 저는 이 세계가 마음에 드니까! 누군가 돌려보내 준다고 해도 저는 돌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어… 동정 같은 거 진짜 하나도 안 했는데.

애초에 돌아갈 생각이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고.

그래도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물었다.

“이 세계의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

“이곳에서 저는 강합니다. 그리고 이곳은 약자들을 상대로 뭐든 할 수 있는 꿈만 같은 세계이지요.”

암만 저리 말해도 딱히 와닿지는 않았다.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사이코패스를 코스프레하는 중2병 어린애가 하는 말 같달까.

“들어 보니까 현실이 비루했던 모양이군.”

정곡이 찔린 듯 아무런 답변도 하지 못하는 녀석.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놀리는 게 아니다. 나라고 딱히 다르진 않았으니까.”

공감대도 형성할 겸 솔직하게 말하자, 녀석의 눈에 의문이 맺혔다.

“…예? 당신이요?”

말도 안 된다는 듯한 물음에 나는 또 피식 웃었다.

“그럼 9년 동안 2D 게임이나 하고 있던 놈 현실이 안 비루했겠냐?”

“아….”

납득한 것처럼 작게 숨을 내쉬던 녀석은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근데 정말 당신이 ‘Elfnuna’인 겁니까…? 스톤 아이벤에 수많은 공략 및 정보글을 올렸던?”

“그래, 맞다. 그게 그렇게 유명해진 줄은 여기에 와서야 알았지만. 근데 대체 그게 왜 그렇게까지 유명해진 거냐?”

“그, 그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던전앤스톤]을 했던 사람 중에 당신 글을 안 본 사람이 어디 있다고!”

“어… 그러냐…?”

사실 그렇게 말해도 실감은 안 난다.

능력치 정리본이라거나, 스킬 정리본, 드랍율 같은 건 그냥 내 플레이를 위해 통계를 냈던 것이고, 들어간 시간이 아까워 남들도 보라고 공유를 했을 뿐이다.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랄까?

“애초에 내가 올렸을 땐 조회 수도 엄청 낮았는데?”

“그만큼 유저 수 자체가 적은 게임이었지 않습니까.”

“그래도 여기 사람들은 다 알고 있던데?”

“여기에 끌려왔다는 건 그만큼 그 게임에 진심인 사람이었단 뜻이니까요.”

아, 그것도 그렇긴 하네.

치트판으로라도 게임을 클리어 했단 건, 그래도 어느 정도 이 게임을 즐긴 고인물들이라는 거니.

정보를 찾다가 내 글을 한 번쯤은 봤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게다가 ‘Elfnuna’라는 닉네임이 이렇게 유명해진 건 환경 탓도 있습니다.”

“환경 탓?”

“모두가 치트판을 플레이 하고 온 상황이니까…. 만약 오리지널 모드를 클리어 하고 이 세계에 들어서는 유저가 나온다면, 모두가 입을 모아 ‘Elfnuna’밖에 없다고 말했지요.”

“…….”

“그나저나… 결국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군요.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까지 강해질 수 있었던 걸 보면.”

뭐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딱 잘라 말했다.

“그 소문은 절반만 사실이다.”

“…예?”

“오리지널 난이도를 깨고 넘어온 건 맞지만, 특전 같은 건 단 하나도 받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그야 9년이나 오리지널 모드를 했으니까?”

아무래도 치트판을 플레이 한 유저들보다는 훨씬 더 아는 게 많을 수밖에 없던 것인데….

이는 자연스레 얻은 지식의 영역이지, 특전이라 말할 종류의 것은 아닐 터.

“내 얘기는 됐으니, 네 얘기나 계속 해 봐라.”

“……제게 그럴 의무는 없을 텐데요? 피싯.”

아, 요놈 또 이러네.

그래 봤자 결국 알아서 입 열 거면서.

“스타트 지점이 노아르크였나?”

“아니요, 5구역이었습니다. 어느 잡화상의 아들이었지요. 피싯… 아들 몸을 잡아먹은 악령이란 것도 모르고 아들, 아들 하는 게 얼마나 우습던지!”

어휴, 말 많은 거 봐.

“됐고, 탐험가가 된 시기는?”

“한 달쯤 됐을 때였습니다. 부모의 도움을 받아서 간단하게 장비를 마련해 미궁에 들어갔지요.”

한 달이라….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나보단 사정이 좋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피비린내 나는 성인식을 끝내고 바로 미궁에 들어가야만 했는데.

‘……뭐, 노아르크 스타트보단 나을 테지만.’

아무튼, 이제 대답의 물꼬는 확실하게 트인 것 같았기에 나는 중요한 질문들만 빠르게 짚었다.

“첫 살인은 언제였지?”

“흐음… 글쎄요? 언제쯤이었더라…? 아! 다섯 달쯤 됐을 때겠군요!”

“무슨 관계였지?”

“탐험가 길드를 통해 만난 첫 팀원이었습니다! 아아, 정말 착한 친구였는데….”

“그런데 왜 죽였나?”

“미궁에서 저를 강간하려 했으니까요.”

……응?

“어…?”

생각지도 못한 충격적인 살해 동기에 나도 모르게 일순간 넋이 나가 버렸다.

***

잠깐 동안 이어진 정적.

한데 그 기묘한 적막이 웃음 버튼을 눌렀을까?

“피시싯, 뭡니까 그 얼굴은? 피시시싯!”

“확인 차 묻는데, 상대가 여자였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보다 훨씬 힘이 센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무력하게 당하는 척하고 있다가 단검으로 잽싸게 목을 찔렀지요! 참 아쉬운 일입니다. 지금이라면 언데드로 만들어 평생 똥이나 닦게 만들었을 텐데요!”

“…….”

“뭐, 그래도 그때 녀석을 죽인 덕분에 한 가지를 확실하게 배우긴 했습니다.”

“…뭐지?”

“정답은 바로…! 사람을 죽이면 돈이 된다입니다, 피싯!”

시련이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고.

보아하니 내가 한스 A에게 배운 진리를, 녀석도 5개월 차에 학습했던 모양이었다.

“뭐, 그 이후로는 간단했습니다…. 누구나 빼앗고 싶어 할 만한 것들을 자랑한 뒤, 탐욕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렸지요. 그러다가 방심했을 때… 콱!”

“…….”

“덕분에 저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고, 강해진 후로는 굳이 그런 귀찮은 방법을 쓸 필요가 없었지요. 그냥 죽이면 됐으니까요!”

이놈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알 것도 같다.

그야 처음부터 이런 그런 놈이었다면, 5개월 차까지 살인을 하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

녀석의 첫 동료는 강한 충격과 계기를 주었고, 그 이후 함정에 넘어가 탐욕을 드러냈을 수많은 이들은 ‘확신’이 되었으리라.

“…….”

하나 불쌍한 놈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단지 속으로 한 번 생각이나 해 봤을 뿐이다.

만약 이 녀석의 첫 동료가 그런 놈이 아니었다면.

에르웬이나 난쟁이 놈, 레이븐처럼 좀 더 제대로 된 인간이었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피시싯….”

무의미한 가정이었다.

과거를 따져서 뭐 하나?

역사에 남은 연쇄 살인범에게도 벌레 하나 잡지 못하던 갓난아기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정리해 보자면 그러다 악령인 걸 들켰고, 그다음에는 오르큘리스에서 영입 제안이 왔다는 거군.”

“피시싯, 뭐! 그렇게 요약할 수도 있겠군요!”

처음에는 부끄러워 하는가 싶더라니, 의외로 녀석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 즐거워했다.

묻지 않았던 부분을 상세히 들려줄 정도였고, 그 덕분에 나는 이 녀석에 대해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 개같은 말투는 언제부터 쓰게 된 거냐?”

“흐음… 원래는 원탁 안에서만 썼습니다. 제 정체를 가리기 위해서였지요.”

“근데 지금은 밖에서도 쓰잖냐.”

“아…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렇게 됐더군요. 글쎄, 밖에서도 쓰게 된 게 언제부터였더라….”

잠시 고민하던 녀석이 생각이 난 듯 말한다.

“아! 당신이 원탁에 나타난 때부터인 거 같군요!”

생각지도 못한 시기에 나는 말을 잃었다.

“…….”

아무래도 수사자의 등장이 이 녀석의 중2병 버튼을 눌러도 제대로 눌렀던 모양인데….

“그럼 네 목표는 뭐냐?”

“목표… 말입니까….”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들었다는 듯 말꼬리를 흐리는 녀석.

“집으로 돌아가는 건 원치 않는다 했고… 그렇다고 네가 단장 놈처럼 왕가에 원한을 품은 건 또 아닌 거 같고…. 근데 딱히 지금에 만족하는 것도 아닌 거 같아서 말이지.”

이어진 내 말에도 녀석은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없습니다.”

“없다고?”

“뭐, 있다면 멋지게 죽는 것 정도가 있겠군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마지막 질문이다.”

“피시싯… 벌써 마지막입니까? 처음에는 좀 그랬는데 이제는 뭔가 좀 아쉽군요.”

“아까 했던 말의 의미가 뭐였냐?”

“아까 했던 말이라면 뭘 말하는 겁니까?”

“솔직하게 살기에는 너무 벅찬 세상이라고 했던 거, 그걸 말하는 거다.”

“……글쎄요? 말 그대로입니다마는? 워낙 팍팍하고 흉흉한 세상 아닙니까!”

잠시 굳은 듯하던 녀석은 마지막 질문을 장난스럽게 넘겼고, 나도 굳이 다시 캐묻지는 않았다.

‘일종의 방어기제일지도….’

사실 기가 세고, 자존감도 높고, 개성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멘탈이 약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놈이 바로 그 부류 같았다.

삐에로가 웃는 분장을 하는 건, 그 속에 감춰진 슬픔을 감추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듯이.

“후! 그래도 다행입니다! 관객이 없는 건 조금 많이 아쉽지만… 나를 죽이는 사람이 도시의 영웅이며, 악령이고, ‘Elfnuna’이며, 오리지널 모드를 클리어 한 사람이라니!”

이 녀석은 광대 가면에 숨어 마지막까지 당당하게 미소 짓고 있다.

그리고 난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 그러면 어떡할까…. 이대로는 좀 아쉬운데….’

잠시 고민하던 나는 녀석에게 제안했다.

“멋지게 죽는 게 목표라고 했지? 여기서 이렇게 엑스트라처럼 죽는 건 좀 아쉽지 않나?”

“…뭘 말하고 싶은 겁니까?”

“네가 바라는 최고의 무대를 만들어 주겠다. 그러니 나를 따라와라.”

“……하하하, 회유를 하는 겁니까?”

“어차피 오르큘리스에는 딱히 의리 같은 게 없는 거로 아는데?”

“…피시싯, 그건 그렇습니다마는.”

내 제안을 받은 녀석은 과할 정도로 눈썹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물론 의미는 없었다.

어차피 놈의 답변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뭐… 좋습니다! 당신인 걸 알고 조금 맥이 빠지긴 했지만, 수사자 가면 아닙니까!”

“답은 승낙인가?”

“…배신하고 적으로 돌아선 저를 봤을 때 단장이나 다른 단원들의 표정이 궁금하기도 하니까요!”

쾌락주의자처럼 말했으나, 나는 그 목소리에서 인간이라면 내뿜을 수밖에 없는 감정을 느꼈다.

안도.

희망.

살아남았다는 것에서 오는 짙은 희열.

그리고…….

“그것도 참 나름 재밌겠—.”

그것이 헛된 희망이었음을 알았을 때의 배신감.

콰직-!

“……엑?”

망치를 맞고서 머리통이 반쯤 짓이겨진 녀석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그동안은 가면으로 가려져 있던 연약한 표정.

“후, 손맛 죽이는 거 보소.”

그래, 역시 이거지.

“대… 체… 왜….”

이내 필사적으로 이유를 묻는 녀석을 보며 나는 대답했다.

“재밌잖아.”

조금도 멋있는 죽음이 아니란 점에서 특히나 더.

20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738화 뒤바뀐 운명 (1) 20

738화 뒤바뀐 운명 (1)

평소에도 상상을 자주 한다.

대부분은 최악의 경우의 수를 떠올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일반적인 상상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예시를 들 필요도 없이 이번만 해도 그랬다.

“……으어, 어…….”

발작이라도 온 사람처럼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이 녀석.

이 녀석의 이야기가 문득 궁금해지며 그런 상상을 해버렸다.

혹시 내가 이야기를 듣고 동정심을 품게 된다거나, 혹은 다른 이유가 생겨 이 녀석을 살려야 하게 되면 어쩔까.

순식간에 여러 경우들이 떠올랐다.

그래도 능력이 쓸 만하기는 하니까 어떻게든 제약을 걸어서 노예처럼 부린다거나.

그러다가 녀석이 완전 개과천선해서 조금씩 우리의 신뢰를 얻는다거나.

‘…뭐야, 이거 완전 아우옌인데?’

문득 약탈자 출신 항해사가 떠올랐지만 아무튼.

언젠가 아주 중요한 순간에 오늘 베푼 자비가 나비의 날갯짓처럼 나를 구원하는 그런 장면까지도 떠올랐으나, 결과적으로 무의미한 상상이었다.

[…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제 보, 본명을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의외로 녀석에게 귀여운(?) 면이 존재했고.

[미궁에서 저를 강간하려 했으니까요.]

타락의 과정에서 어느 정도 동정할 만한 사연이 있었으며.

[··솔직하게 살기에는 너무 벅찬 세상이지 않습니까. 아! 물론 당신처럼 강한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피싯.]

설령 이렇게까지 망가진 게, 오히려 스스로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가설이 맞는다고 한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으, 어… 아?”

안 했잖아 결국.

네 중2병 때문에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들한테.

“사죄.”

만약 그것만 했어도 조금은 다시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뭐, 있다면 멋지게 죽는 것 정도가 있겠군요?]

이딴 말이나 지껄이고 있으니, 나도 딴생각을 품지 않고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하지 말고 그냥 쓰레기처럼 죽어. 그게 제일 진심 어린 사죄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발가벗은 추레한 몰골로 머리가 반 이상 짓이겨져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으, 어…….”

가래가 끓는 듯한 신음 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기침할 때마다 울컥울컥 쏟아져 나오던 핏물 역시 서서히 빈도가 줄어들었다.

몸이 낫고 있어서는 당연히 아니었다.

그 반대라면 모를까.

“…….”

이윽고 몸의 떨림이 잦아들며 녀석의 시선이 텅 빈 허공을 향한다.

한데 무언가 보이기라도 하는 걸까?

“어… 아…….”

잘 움직이지도 않는 입술을 겨우 움직이며 뭐라 말을 뱉는 녀석.

무슨 말을 하는가 싶어 귀를 기울여보니 대충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워낙 발음이 많이 뭉개져서 확실하진 않지만.

“어… 마…….”

신기할 정도로 마지막엔 다들 똑같단 말이지.

“엄… 마…….”

물론 그렇다고 동정심이 생기는 일은 없었다.

날 죽이려던 한스 A에게도 가족이 있었듯이.

꾸욱.

이런 거로 마음이 약해지면 이 세상은 살아갈 수 없으니까.

“후…….”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어어어어어어…….]

시체들로 형성되어 꿈틀거리는 세 개의 달.

지옥이 있다면 저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땅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드드드드드듯-!

이에 고개를 내리고서 지평선 쪽을 바라보자, 저 멀리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초록빛 세계가 보인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몹시 간단했다.

「상징을 소유한 캐릭터가 사망했습니다.」

그래, 죽은 거구나.

어쩐지 아까부터 아무 소리도 안 들리더라니.

“…….”

지난번에 용살자를 죽였을 때와 같았다.

내가 느끼기에도 이상할 만큼 무덤덤했다.

감정이 격해지지는 일도, 뿌듯함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허무한 감정이 피어난 것도 아니었다.

하면, 이게 대체 무슨 기분일까.

이에 대해 고민하는 대신 나는 머릿속으로 선을 지익 그었다.

시체 수집가, 아벳 네크라페토.

이렇게 또 살생부에서 한 놈의 이름이 지워졌지만, 아직도 명단에 적힌 이름은 한가득이었다.

‘갈 길이 멀구만.’

뭐, 하나씩 해치워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

「캐릭터가 라프도니아로 이동합니다.」

***

명계에서 돌아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불길이었다.

화르르르륵-!

왼쪽, 오른쪽, 앞, 뒤.

방향을 가릴 거 없이 사방이 불길이며, 숨을 쉴 때마다 뜨겁게 달궈진 매캐한 연기가 코를 타고 폐부를 휘감는다.

「불의 보주를 활성화했습니다.」

「반경 15m 내에서 파생된 모든 화염 계열 지속 피해가 50% 감소합니다.」

후, 이거라도 켜니까 좀 살 거 같네.

‘적은…….’

불의 보주를 켜고서 신속하게 주변을 탐색했으나, 느껴지는 인기척과 기운은 없다.

‘없군.’

뭐, 사방이 불타고 있는 중이니 당연한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적들에게 포위당해 있는 것보단 좋은 상황이었다.

문제는 동료들도 어디 갔는지 알 수 없단 거지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야 내가 거기 명계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노아르크 병력들과 싸우고 있었으니까.

‘내가 안에 있던 건 기껏해야 2시간 정도…….’

한데 나오자마자 거리는 불로 뒤덮였고, 그 외에 누구 하나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게, 노아르크가 이겼다면 이 장소에서 대기하며 포위 진형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스타롯타나 레이븐의 머리를 전리품처럼 든 채.

‘이를 반대로 해석하면, 그 둘이 무사할 가능성이 높다는 거겠지.’

그래, 그러니까…….

화르르르륵-!

후, 일단 여기부터 벗어나자.

온 사방이 불이고 시커먼 연기가 시야까지 방해하고 있었으나, 방향을 확인하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나는 그냥 바바리안이 아니라, 로트밀러에게 길잡이 교육을 받은 엘리트 바바리안이니까.

‘저쪽이군.’

방향을 확인한 후에는 망설임 없이 [거대화]까지 써가며 불길 속을 내달렸다.

한데 이게 어찌된 걸까?

1분, 2분, 3분…….

아무리 뛰어도 불길 바깥이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대체 불이 어디까지 번진 거야?’

알 수 없으나, 그럴수록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딱 하나였다.

내 고향이기도 한 7구역을 향해 뛰는 것.

10분, 20분, 30분…….

다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 초인과도 같은 육체도 빠르게 한계를 향해 다가갔다.

화르르륵-!

뜨거운 불길 자체는 괜찮았다.

불의 보주도 있고, 내 육체 수치가 워낙 높다보니 살갗이 살짝 타는 것 외는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하지만, 매연이 문제였다.

‘니미럴.’

원래 화재가 발생하면 불에 타죽는 것보다 질식해서 죽는 사람이 더 많다는 말처럼.

나 역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니 죽을 거 같았다.

뭐, 초인적인 폐활량으로 거의 숨을 참아가며 여기까지 오기는 했지만…….

쿠웅-! 쿠웅-!

전력으로 뛰면서 숨까지 참으려니 죽겠네 진짜.

삐이이이이이-!

실제로 한계가 다가왔음을 의미하듯 어느 순간 귓가에서 이명이 들려온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들리던 묵직한 발소리도, 화르륵 불이 타오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세찬 이명.

삐이이이이이이-!

동시에 앞이 흐려지고, 1분 1초가 너무나도 길게 느껴진다.

또한 멀미라도 난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는데…….

‘……씨발, 이렇게 죽는다고?’

건강한 육신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도 있듯.

한계까지 내몰린 육신은 부정적인 생각을 자꾸만 떠올렸으며, 그냥 포기하면 편해진다는 듯 움직이는 걸 거부하려 했다.

하지만…….

‘…지랄 마라 진짜.’

내가 여태까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검에 목이 베이는 것도, 마물한테 잡아먹히는 것도 아니고.

단순하게 산소가 부족해서 죽는다고?

삐이이이이이-!

억울해서라도 그렇게는 못하지.

짜악-!

머리통을 후려쳐서라도 꺼져가는 정신을 일깨운다.

그리고…….

쿠웅-! 쿠웅-!

계속해서 다리를 내뻗는다.

쿠웅-! 쿠웅-!

그렇게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시간 개념이 모호해지며, 내가 제대로 앞을 향해 뛰고 있는지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그때.

스르륵.

다리에서 힘이 풀리며 몸이 앞으로 기운다.

그리고…….

쿠웅-!

균형을 잃고 앞으로 쏠린 몸이 딱딱한 무언가와 부딪치며 정신이 확 깨어났다.

“성… 벽?”

성벽이다.

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났기에 여기까지 도착한지는 모르겠지만.

“성… 벽…….”

이내 무엇에 부딪쳤는지 확실하게 인식하자 신기할 만큼 몸에서 기력이 샘솟았다.

성문이 어딨는지 찾을 시간은 없었다.

자고로 바바리안이란 길을 찾아내는 것보다 길을 만드는 것에 특화된 종족인 법.

나는 뜨겁게 달아오른 벽돌의 틈새를 잡아가며 바퀴벌레처럼 성벽을 타고 올랐다.

그리고 이윽고 도착한 성벽 위에 다다른 순간.

‘…살았다.’

생존을 인지한 신체가 축 늘어진다.

물론 성벽 위에서도 숨을 쉬기 불편했다.

하나 사막을 헤메던 사람에겐 한 방울의 물도 생명수처럼 느껴지는 법.

“하아… 하아… 하아…….”

매캐한 연기 때문에 자꾸 기침이 나왔음에도 나는 최대한 열심히 숨을 들이켰고, 그런 시간이 이어지자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됐다.

‘…겨우 살았네. 진짜.’

그제야 성벽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주변을 크게 둘러보았다.

맑은 날엔 온 도시의 전경을 볼 수 있을 만큼 높게 지어진 성벽이었던 만큼, 현재 이 도시가 얼마나 크게 불타고 있는지가 확 느껴졌다.

“장난 아니긴 하네…….”

이제 보니 8구역 전체가 불에 타며 엄청난 연기를 내뿜고 있었을뿐더러…….

“…7구역까지 불이 번졌구나.”

비슷한 사정인 것은 7구역도 매한가지.

위에서 보니 7구역 또한 3분의 1 이상이 화마에 뒤덮인 상태였다.

“니미럴.”

불현듯 내가 투자한 돈들이 떠올라 속이 쓰리기도 했으나, 나는 빠르게 머리를 비웠다.

돈이야 언제든 벌 수 있는 거니까.

위급한 상황일수록 우선 순위를 명심해야 한다.

지금의 최우선 순위는 ‘돈’이나 ‘뒷일’ 같은 건 생각하지 말고 이번 전쟁을 어떻게든 무사히 잘 마무리하는 것.

‘후… 그럼 이제 어떡하지.’

생각하지도 못한 죽을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나니, 다시금 현실적인 문제들이 머릿속을 괴롭힌다.

사라진 아스타롯타와 레이븐.

바바리안 성지에 숨어 있다는 클랜 멤버들.

4구역에서 쫒기는 중이란 무전이 마지막 소식이었던 아멜리아와 아우옌…….

‘레이븐이 걱정되긴 하는데…….’

그래도 일단 1차 목적지는 성지로 정했다.

그야 망망대해나 다름없는 불바다를 헤집고 다니며 찾아다니는 건 효율적이지 못하니까. 차라리 성지로 가서 클랜 멤버들과 합류한 뒤 함께 수색하는 쪽이 합리적일 터.

‘아스타롯타도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겠지…….’

결정을 내린 이상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나는 빠르게 성벽을 타고 내달렸다.

굳이 불타는 도시로 뛰어내리는 것보다 성벽을 타고 이동하는 게 훨씬 더 동선도 짧고 편하다는 판단.

쿠웅-! 쿠웅-!

그렇게 정신 없이 성벽 위를 내달리며 성지 쪽으로 향하던 때였다.

“……?”

나는 바짝 긴장하며 걸음을 멈췄다.

시야를 방해하는 검은 연기 사이로 한 인물이 나타났다.

아니, 정확히는…….

“…왔군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색 늑대 가면…….’

이백호의 전 동료 ‘브라이엇’이 갖고 있던 것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디자인.

덕분에 나는 놈의 정체를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히르쿠무타.

최후의 대현자, 디플런 그라운델 가브릴리우스를 추종하는 이들이 모여서 만들어졌다는 ‘고대’의 집단.

그 집단의 일원으로 추정되는 늑대 가면이 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오랜만이오, 비요른 얀델.”

“……?”

“아, 수사자 공이라 해야 하나? 하하핫!”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하, 안 그래도 신경 쓸 게 많은 와중에.’

이 새끼는 또 뭐야?

24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739화 뒤바뀐 운명 (2) 24

739화 뒤바뀐 운명 (2)

잿빛 구름이 위로 보이는 공터.

원래 이곳은 바바리안들이 평소에 여럿이 모여 의논할 일이 있거나 공지할 일이 있을 때 쓰이는 장소였다.

뭐, 다른 종족들이야 격식이나 보안을 따진다고 보통 실내에 이런 공간을 만들지만…….

바바리안들이 느끼기에는 비효율적인 짓이었다.

얘기를 나누는데 뭣하러 실내에 모이고, 단단한 두 다리로 그냥 서서 들으면 되는데 어찌 의자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런 이유로 바바리안족 성지에는 회의실 역할을 할 수 있을 만한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고, 베르실 또한 수십 명이 모여 얘기를 할 공간을 빌려달라 했을 때 행정사무총장에게 이 공터를 안내받았다.

물론 이 정도 규모가 되는 집단에 그런 건물이 하나도 없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지만…….

[하나하나 이해하려 하지 마세요. 그냥 그렇구나 하는 게 훨씬 더 정신건강에 이로우니까.]

해탈한 듯한 행정사무총장의 말을 듣고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듣자마자 진심 어린 조언인 게 느껴졌을뿐더러…….

애초에 생각해 보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사실 수십 명이 모여 대화를 나눈다면 거대한 회의실은 오히려 의사소통이 어려웠으니까.

‘이렇게 모여놓고 보니 자연스레 수평적인 분위기가 될 수밖에 없고 말이지…….’

어쩌면 이게 바로 바바리안의 장점일지도 몰랐다.

납득을 하고 보면 의외로 장점이 보인다.

공터로 불려 나온 각 클랜의 수뇌부들은 아직 납득을 못한 모양이지만.

“크흠…….”

“아침부터 공터로 불러낸 이유가 무엇이오?”

“이런 데서 어떻게 중요한 얘기를 한다는 건지… 바바리안족엔 회당 같은 곳도 없단 말이오?”

“없어요.”

“허허……. 많이 발전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그만하세요.”

베르실이 보기에 이들은 현재 처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야 자신들은 손님이 아니니까.

따라서…….

‘이것부터 말해야겠지.’

베르실은 본격적인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이것 하나부터 짚고 넘어갔다.

“다들 모르고 있나 본데, 우리는 전쟁통에서 도망쳐 온 피난민 입장이에요. 바바리안들은 그런 우리들을 받아 준 주인 입장이고요.”

“……크흠.”

“그런 의미에서 안전하게 머물 공간과 식량을 나눠주신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하는 시간을 가져볼까 하는데 어떠세요?”

“…….”

“혹시 모르잖아요? 그분들이 우리를 추방하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저 7구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그 말을 끝으로 베르실이 아이나르를 힐끗하자, 아이나르도 씨익 웃으며 앞으로 나왔다.

“그래, 식충이들아! 살려줘 재워줘 먹여줘. 너희가 사람이면 존경과 감사의 의미로 전투 함성이라도 한 번 크게 외치는 게 도리 아니냐!”

“…저, 전투 함성?”

“그… 베, 베헬라를 말하는 건가?”

“물론!! 싫으면 거절해도 된다! 우리 바바리안들은 자유 의지를 존중하니까!”

“아… 그, 그렇다면 나는 종교적인 이유로 거절을—.”

“오! 그럼 지금 바로 성지에서 나가면 되겠군!”

“아까는 자유 의지를 존중한다고 하지 않았소!”

“자유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인데, 그것도 모르나?”

이내 아이나르가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내자, 거절을 표하려던 남성이 꿀 먹은 벙어리로 변했고, 이는 다른 클랜의 수뇌부들도 마찬가지.

베르실이 보기에 슬슬 당근을 줄 타이밍이었다.

“아이나르 씨, 그만하세요. 아까 말씀하신 저분도 종교적인 이유로 거절하려 했을 뿐, 바바리안족에게 감사하는 건 분명할 테니까요.”

“오, 그러냐?”

“무, 물론이오. 사람이라면 당연하지 않소?”

사내가 이때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 앞에서 전투 함성을 외치는 것보단 고맙다는 말로 넘어가는 게 훨씬 이득이었고, 그 생각은 모두 동일했는지 다른 클랜 수뇌부들도 한마디씩 치사의 말을 해왔다.

“프넬린 양.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우리 파르티아 클랜 역시 마찬가지오. 이번에 받은 은혜는 평생 잊지 않으리다.”

그 장면을 보며 베르실은 아무도 모르게 흡족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얼핏 보면 당연하게 ‘감사 인사’를 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런 사소한 게 쌓여 갑을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었다.

“고울랜드 부단장.”

“말씀하세요. 에르타 단장님.”

“한데 아침부터 우리를 이곳에 불러모은 연유를 들을 수 있겠소? 설마 이 많은 사람들한테 감사 인사를 하라고 부른 건 아닐 테고.”

“아, 그거요?”

마침 말을 잘 꺼냈다는 듯 베르실이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듯 큰 소리로 대답했다.

“1시간 전부터 성지와 7구역 사이를 막아 주던 결계가 약해지고 있어요.”

툭 던진 그 말에 담긴 내용은 성지에 오고서부터 마음 놓고 있던 탐험가들의 머릿속에 벼락이 치기에 충분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요?”

“성지에 결계를 쳐서 가둔 건 노아르크 놈들 소행 아니오! 왕가와 싸우며 우리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으니까!”

정확히는 우리가 아니라 성지에 주둔 중인 바바리안들이지만 아무튼.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한데 왜 이제 와서… 대체 무슨 연유로—.”

“이유는 중요하지 않아요.”

베르실은 단호하게 말을 끊으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결계가 약해지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확인해보니 마력 공급이 끊기며 자연적으로 해제가 되는 중인 것 같더라고요.”

“부단장,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오?”

베르실의 물음에 한 인물이 차분히 되물었다.

라브라임 클랜의 단장이었던가?

한 대씩 때려주고 싶던 여타 수뇌부들과 다르게 성지에 오기 전에도 온 후에도 항상 이성적인 모습만 보여 줬던 인물이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저는 약 1시간 정도로 보고 있어요.”

“1시간이라…….”

“아무튼, 일이 그렇게 됐으니 우리도 준비를 해야 해요. 제가 생각했을 때 저 결계가 갑자기 해제되고 있을 이유는 두 가지뿐이니까요.”

“들어볼 수 있겠소이까?”

“첫 번째는 정말로 뭔가 문제가 생겨 마력 공급이 끊긴 것.”

“하면, 두 번째는?”

그 물음에 베르실은 좀 전에 소리쳤던 한 남자를 보며 말했다.

“이제 노아르크 측에서도 생겼다는 거겠죠.”

“……?”

“우리를 처리할 여력이.”

사실 베르실은 이 가능성을 가장 높게 보고 있었고, 그게 목소리에서부터 느껴졌을까?

“…….”

“…….”

무거운 침묵이 이어진다.

수십 명이 모였다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조용한 공터.

정적을 깨고 입을 연 것은 한 여성이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글쎄.

마음만 같아서는 베르실 역시 나도 모르겠다고 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부터 네가 우리 클랜의 부단장이다.]

그래서는 안 되겠지.

이내 베르실은 눈을 감고 한 번 심호흡을 한 뒤, 다시 눈을 떴다.

“모두 싸울 준비를 해야겠죠.”

“전략이 어떻게 되는지 들을 수 있겠소?”

“일차적으로는 수비에 전념할 거예요. 성문 앞에 진지를 구축하고 막으면 적들도 쉽게 뚫지는 못할 테니까요.”

“일차적으로라면 그다음도 있다는 뜻이겠구려?”

“예. 전황을 보다가 틈이 생긴다면, 그대로 밀고 나가야 하지 않겠어요?”

“미, 밀고 나간단 말이오……?”

생각하지도 못한 전략을 들었다는 듯 눈을 크게 뜨는 각 수뇌부들이었으나, 베르실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비록 포지션은 ‘마법사’, ‘원거리 공격수’였지만, 이제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네. 공격이야말로 최선의 방어니까요.”

정말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선 때릴 줄도 알아야 한다.

***

바바리안족의 행정사무총장, 샤빈 에무어.

그녀는 현재 부족 내 어느 누구보다도 바빴다.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이놈의 성지는 터가 좋지 않은지 또다시 전란에 휩쓸렸고, 애석하게도 그녀는 성지 내의 모든 업무의 책임자(대리)였으니까.

그러니까, 어떻게든 정신을 바짝 차리고서—.

“에무어 양, 차를 가져왔으니, 잠시 목이라도 축이고 하시오.”

“…네, 네? 하지만 그럴 시간이—.”

“차 한 잔 할 시간은 있지 않소이까? 혼자서 너무 많은 부담을 느낄 필요 없소.”

“…마, 말뜻은 알겠어요. 근데 이제 곧 적들이 들이닥칠 거라는데 어떻게 쉬어요……!”

에무어는 미칠 거 같았다.

그도 그럴 게, 그녀의 전문 분야는 행정에 치우친 사무 계열이었으니까. 전쟁이 아니라.

“그렇다면야 더 권하지는 않겠소만… 옆에 두고 갈 테니, 타 온 성의를 봐서라도 중간중간 마셔주시구려. 일의 능률을 위해선 때론 일부러라도 차분해질 필요가 있는 법이니.”

“아… 네… 고마워요, 로트밀러 씨.”

정말 차 한 잔을 타주기 위해 온 것인지 로트밀러는 그 말을 끝으로 차를 내려놓고서 등을 돌렸고, 그제야 샤빈 에무어도 로트밀러의 변한 점을 깨달았다.

“로, 로트밀러 씨? 지금 그 복장은 뭐예요?”

늘 깔끔한 평상복 차림이던 로트밀러가 어째선지 장비들을 두르고 있다.

당장에라도 미궁에 들어가기라도 할 사람처럼.

“아… 그러고 보니 에무어 양은 처음 보겠구려? 혹시나 해서 예전 장비를 처분하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참 다행이오.”

“혹시… 참전하시려는 거예요……?”

“그래야 하지 않겠소? 한 사람의 손이라도 더 필요한 상황이니.”

“하지만 로트밀러 씨는 탐색꾼이었잖아요!!”

어찌 보면 무례하다 느껴질 수도 있는 말.

하나 로트밀러는 전혀 그런 기색 없이 부드럽게 웃었다.

“하하,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탐색꾼이긴 해도 나 역시 탐험가였소이다.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 미궁에 들어갔던.”

로트밀러를 보며 샤빈 에무어는 말을 잃었다.

그야 냉정히 생각해보면 자신이 말릴 수 있는 관계인 것도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그래서 인사라도 할까 왔소이다. 이제 전선으로 향하면 일이 끝날 때까지는 보기 어려울 테니.”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몸 조심하세요.”

그녀는 마음속에 있는 진심을 담아 짧게 말했고, 이에 로트밀러 역시 짧게 답했다.

“…무사히 다녀오리다.”

그 말을 끝으로 로트밀러는 방을 나섰고, 이에 혼자 남은 샤빈 에무어는 얼굴을 붉혔다.

‘다, 다녀오리다… 라니……!’

향긋한 찻물을 들이켜도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

수사자 공.

원탁에서 그런 호칭을 사용하는 인물은 딱 하나뿐이다.

아우릴 가비스의 대변자라도 된 것처럼 원탁에서 나대던 게 특징이었던 인물.

‘늑대.’

공교롭게도 상대가 쓴 ‘히르쿠무타’ 가면 역시 검은 늑대였다.

다만 이게 우연이라기보다는…….

‘원래부터 저 집단이었던 거겠지.’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런 이유로 가면을 골라야 했을 때 늑대를 고르지 않았을까.

“하하, 경계하지 마시오. 나는 당신의 적이 아니니.”

“그럼 왜 길을 막았지?”

“나는 막은 적 없소이만?”

“그래? 그럼 비켜라.”

이내 차갑게 말하였으나, 녀석은 옆으로 길을 터줄 생각이 없었다.

“너무 경계하지 말라니까. 난 단지 어르신의 명으로 한 가지 조언을 드리려 왔을 뿐이오.”

어르신이라면 분명 아우릴 가비스 그 할배를 말하는 걸 테고…….

“조언이라…….”

한자로는 도울 조에, 말씀 언을 쓴다.

직역하자면 도움이 되는 말이라는 뜻이다.

근데 왜 저 말을 듣자마자 더 의미심장하게 느껴지고 경계가 되는 걸까.

알 수 없으나, 들어보겠다는 뜻으로 이해했는지 녀석이 내게 ‘조언’했다.

“이쪽으로 왔다는 건 성지로 향하시는 거겠지?”

“…….”

“성지 말고 저리로 가시오.”

그리 말한 녀석은 손가락으로 불타고 있는 7구역을 가리켰다.

하도 기가 차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막지 않겠다더니, 개소리였군.”

“막을 생각이 없다는 건 진심이오. 수사자 공이 이 길을 타고 성지로 간다고 하면 나는 비켜드릴 것이오.”

“그래? 그럼 비켜라.”

“원하신다면야.”

전혀 기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실제로 성벽 가장자리에 바짝 붙으며 길을 내주었다.

따라서…….

터벅, 터벅.

혹시 놈이 딴짓을 하진 않을까 속으로 경계하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터벅.

이내 놈의 앞을 딱 지나치려던 때.

“아, 그리고 하나 더. 광대를 죽인 건 좋지 않은 선택이었소.”

“내 선택이 의미가 있나?”

“있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수사자 공에게는. 어르신께서는 광대가 살았다면, 당신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됐을 거라 하시더군.”

“도움이 됐을진 모르겠고, 네 어르신 오지랖이 넓단 건 알겠군.”

“자비롭고 고결하신 분이니까.”

거, 누가 아우릴 가비스 열혈팬 아니랄까 봐.

더 대화를 나눌 가치를 느끼지 못한 나는 다시금 멈췄던 걸음을 옮겨 녀석의 앞을 지나쳤다.

그리고…….

터벅.

한 걸음.

터벅.

두 걸음.

터벅-

많은 생각을 참아가며 세 걸음을 더 걸어서 나아갔을 때.

‘하, 진짜 돌겠네…….’

결국 나는 등을 돌려 묻고 말았다.

“……대체 왜.”

입을 열자마자 가면 너머로 보이는 눈깔이 휘어지는 게 마음에 들진 않지만.

“성지에 가지 말라는 거냐?”

끝내 참지 못하고 의문을 토해내자,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당신이 어딜 가느냐에 따라 죽는 사람이 달라질 테니까.”

“…….”

“그러니 성지 말고 7구역으로 가시오. 그게 그나마 수사자 공을 위하는 선택이 될 터이니.”

“나를 위한 선택이라…….”

나는 피식 웃으며 한 가지만 더 확인했다.

“그건 됐고, 혹시 네가 말하는 그 어르신이 이 미래도 말해 줬나?”

“뭘 묻는진 몰라도 내게 허락된 조언은 이게 끝—.”

거, 더 조언해달라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꽈악-!

나는 휙 뻗은 손으로 녀석의 모가지를 잡아 성벽 끝으로 밀어넣고서 말했다.

“네가 여기서 살까, 아니면 뒈질까?”

맞히면, 믿어 줄 수 있을 것도 같은데.

223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740화 뒤바뀐 운명 (3) 223

740화 뒤바뀐 운명 (3)

카산드라라는 예언가가 있다.

그녀는 트로이의 멸망을 예언했으나, 트로이의 왕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고 끝내 트로이는 멸망한다.

물론 왕에게도 변명할 말은 있었다.

카산드라에게 차인 아폴론이 찌질하게 그녀에게서 ‘설득력’을 빼앗아갔으니까. 사람들이 예언을 믿지 않던 것에는 그 ‘저주’의 영향이 분명하게 있었다.

하지만…….

‘글쎄.’

‘설득력’이 있었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다.

그야 불길한 예언을 믿고 싶은 자가 어딨겠는가?

본인이 돈 주고 찾아간 점집에서도 안 좋은 말을 들으면 선무당이네 마네 하고 뛰쳐 나오는 마당에.

과연 트로이의 왕이라고 그 예언을 듣고 ‘음, 우리가 멸망하는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을까.

‘아니겠지.’

지금 내가 그러한 것처럼.

“하하… 조, 조금 진정하는 게 어떻소? 나는 수사자 공과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오.”

“싸우자는 게 아니라, 확인하는 거다. 네놈 말을 믿을 수 있는지 아닌지를.”

내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자, 처음엔 당황한 듯한 기색을 보이던 녀석이 피식 웃는다.

마치 당황한 척 했던 것이 연기였던 것처럼.

“당신이라면 이미 알고 있지 않소? 어르신의 능력을.”

“암, 그 늙은이의 능력이야 잘 알지. 사람 갖고 장난치는 거에는 완전히 도가 텄으니까.”

내 비아냥거리는 말에도 녀석은 별다른 반응 없이 조용히 이렇게 되물을 뿐이었다.

“그럼 왜 멈춘 거요?”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그냥 나를 지나쳐 성지로 향하면 될 것을, 도대체 어떤 연유로 멈추었소?”

“…….”

“수사자 공도 속으로는 알고 있던 것 아니오? 어르신의 조언을 듣지 않으면 후회할지 모른다는 걸.”

마음 같아선 부정하고 싶었다.

단지 그 늙은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려 했을 뿐이라고. 거짓 정보도 정보는 정보니까. 이를 통해 그 늙은이의 의도를 파악해 볼 생각이었다고.

그리 말하고 싶었으나, 녀석이 조금 전에 한 말처럼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진짜 이유는 그런 게 아니라는 걸.

“그나저나 아까 내가 여기서 죽을지, 살지 물었소?”

“…….”

“어르신에게 딱히 언질을 받은 건 없소이만……. 글쎄, 딱히 오늘 여기가 내 묫자리가 될 일은 없을 듯하구려. 아직도 대화가 이어지는 걸 보면.”

“…….”

“그러니 이것 좀 풀어 주겠소? 이제 슬슬 갑갑한데.”

하…….

“지랄.”

나는 멱살을 잡지 않은 다른 손을 이용해 녀석의 가면을 벗겨냈다.

촤악-!

드러난 가면 너머의 얼굴은 몹시나 평범했다.

도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30대 중반의 수인족…….

쩝, 혹시나 아는 얼굴일까도 싶었는데.

“하하… 내 얼굴이 그렇게 궁금하셨소?”

얼굴이 드러났음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 녀석을 보며 나는 조용히 물었다.

“한 가지만 묻자.”

“무엇이든지.”

“너도 그 늙은이 아래에서 일했으면 기록에 대해 알겠지?”

“물론이오.”

“근데 왜 자꾸 선택에 따라 미래가 바뀌니 마니 하는 거냐? 어차피 변하는 게 없다는 게 너희들 입장이면서.”

여기서 내가 운명을 믿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이 빌어먹을 진성 운명쟁이들이 왜 이러는지가 궁금할 뿐.

“흐음… 아주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구려. 조금 길어도 괜찮겠소?”

“상관없으니까 해라.”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지금 술집에서 다른 취객들과 카드를 치고 있소. 그런데 카드를 나눠주는 사람이 실수로 순서대로 카드를 나누지 않았지.”

뭔 개소리를 하는가 싶었지만 일단 잠자코 들었다.

“순서대로 카드를 나눴다면 그에게 아주 약한 패가 들어왔을 테지만, 순서대로 카드가 나뉘지 않은 덕분에 그에게는 아주 좋은 패가 들어왔소. 다른 사람들은 취해서 실수가 있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상태지. 그래서 그는 조용히 입을 다문 채 이득을 보기로 했소.”

여전히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기는 하였으나.

“그럼 이제 물으리다.”

녀석은 물었다.

“여기서 약한 패를 받는 게 그의 원래 운명이었을까, 아니면 좋은 패를 받는 게 그의 원래 운명이었을까?”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했을 뿐, 답변을 하는 것에 있어서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좋은 패를 받는 쪽이겠지. 패를 나눠주는 사람이 실수를 한 것까지가 운명이었을 테니까.”

“하하, 좋은 대답이오. 이해가 빠르군.”

녀석은 그리 말했으나 솔직히 말해 나는 조금도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수사자 공이 말했듯, 뒤바뀐 운명도 운명이오.”

“그리고…….”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은 카드를 실수로 나눠주려는 것이지. 어느 누군가가 ‘아주 작은 한 판’에서 조금 더 좋은 패를 받을 수 있게끔.”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한 것과 다르게, 이놈이 뭘 말하고 싶은 것인지는 이제 얼추 감이 왔다.

따라서 나는 이것을 물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됐지?”

그 질문에 녀석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도,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결국 그 도박판에서는 엄청나게 크게 잃었소. 다만, 좋은 패를 받았던 덕분에 조금이나마 손실을 줄일 수 있었지.”

“뒤바뀐 운명으로도 ‘잃는다는 것’ 자체는 바꿀 수 없었다는 거군.”

“그렇소.”

녀석이 모법생에게 칭찬 스티커를 주는 선생처럼 웃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잃고 따고를 반복하던 그 남자는 결국 먼 미래에 더욱 큰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그 말이 위로가 될 리 없었다.

단지 이번 일을 계기로 한 번 더 굳게 결심했다.

“자, 결정하시오. 이미 수사자 공에겐 카드가 주어졌으니까.”

이 빌어먹을 운명쟁이 새끼들과 다시는 이런 주제로 얘기를 나누지 않기로.

***

뜨거운 열기와 새까만 매연이 올라오는 성벽 위.

“…….”

“…….”

오랜 침묵이 이어지자, 결국 기다리다 못한 녀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결정을 내리기가 그리 어렵소?”

“…….”

“간단하게 생각하시오. 차와 집 중에 무엇을 잃을 거냐 묻는다면, 모두 다 차를 선택하지 않겠소.”

뭐, 그렇겠지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차보다 집이 더 귀할 테니까.

하지만 넓은 세상엔 그 반대인 부류도 있는 법.

무엇이 더 귀할지 정하는 것은 나다.

그래, 그러니까…….

“결정했다.”

긴 고민 끝에 나는 결정했고, 이에 녀석의 동공에도 짙은 호기심이 어렸다.

“어찌할 것이오?”

거, 다 아는 듯 말할 땐 언제고.

녀석의 눈을 보던 나는 왠지 모를 통쾌함을 느끼며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왜 알려 줘야 하냐?”

“……?”

“이만 꺼져라.”

“그게 무슨—.”

나는 이제 용무가 사라진 녀석을 불 타고 있는 7구역 아래로 던져 버렸다.

“읏……? 읏! 으아아아아아!”

거, 여기서 떨어진다고 죽는 것도 아닐 거면서.

진심으로 놀라서 까무라치는 걸 보니 이렇게 되는 미래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게 분명했다.

콰앙-!

불바다 속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 나니 몇 년 묵은 체기가 내려가는 기분이었으나, 그런 속시원한 감정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후…….”

몇 년 묵은 체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돌덩이가 가슴에 내려앉은 듯한 기분.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

녀석을 성벽 아래로 떨어뜨린 후에도 한참이나 성벽 위에 멍하니 서 있던 나는 다시금 달리기 시작했다.

성지와 7구역.

고민 끝에 내가 정한 목적지를 향해.

***

몸은 조금 불편하지만, 그래도 바깥 그 어디보다도 안락한 장롱 속에 들어오고서 얼마나 흘렀을까.

스벤 파라브는 바지에 똥을 지리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이 장롱 속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저기…….”

그런 결심을 동거인에게까지 바라는 것은 무리였을까.

“아…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그… 자, 잠깐만 나갔다 오면 안 될까요?”

“예……? 장롱 밖은 위험합니다만……?”

“그건 알겠는데… 지, 진짜 잠깐이면 되거든요?”

그 말을 하는 동안에도 동거인, 리리스 마로네는 정서가 불안한 사람처럼 쉬지 않고 다리를 떨어댔다.

덕분에 평소 눈치 없단 소리를 자주 듣던 스벤 파라브도 동거인이 장롱을 벗어나려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얼른 다녀오시지요.”

장롱 문이 열리는 잠깐조차도 불안한 그였지만, ‘여성’의 ‘생리 현상’을 막을 만한 이유를 댈 수도 그럴 자신도 없었기에 최대한 잽싸면서도 은밀하게 장롱 문을 열었다.

그리고…….

“여, 옆방에만 금방 다녀올게요……!”

이내 마로네가 생리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옆 방으로 떠났고, 그 잠깐 동안도 스벤 파라브는 장롱 문을 닫고서 기다렸다.

스르륵.

장롱문이 열린 것은 약 4분 정도 흘렀을 때였고, 예상보다 늦게 돌아온 리리스 마리네의 표정은 어딘가 다급했다.

“파라브 씨……! 불이에요, 불!”

“예……?”

“7구역 동부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어요!”

7구역 동부라면 8구역이 있는 방향인데… 그쪽에서 뭔가 ‘사건’이라도 발생한 것일까?

“파라브 씨도 어서 나와서 한번 봐보세요!”

“…예?”

“와서 보시라니까요? 심상치가 않은 게… 어쩌면 여기까지 불길에 다 뒤덮일지도 몰라요.”

“아…….”

“아… 가 아니라, 어쩌면 자리를 피해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할지도 모른다니까요?”

“그… 그렇군요……?”

리리스 마로네의 말에도 그는 장롱에서 떠날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 불안하긴 했기에…….

“혹시 잠깐 장롱 문 좀 닫아 주시겠습니까……?”

“……네?”

“정말 잠깐이면 됩니다.”

그 말과 동시에 그는 직접 장롱 문을 닫았다.

두근-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다시금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얌전해졌다.

덜컥-!

비록 리리스 마로네의 손에 의해 금방 장롱 문이 열렸지만, 그 짧은 시간 느꼈던 평온함만으로도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동부에 불이 크게 났든 안 났든 상관없다.

나는 이 장롱 안에만 있으면 안전하다.

그런 직감을 넘어선 절대적인 확신이 온몸을 지배했다.

물론 누군가에게 이 말을 한다면 정신병자처럼 여길 터이나…….

‘암, 직감은 따라야지.’

스벤 파라브는 그동안 이 직감에 의해 여러 번 구원을 받았고, ‘거인’이라 불리는 얀델조차도 이 직감을 인정하고 때론 의지까지 했었다.

따라서…….

“괜찮습니다, 마로네 양. 여기라면 안전할 겁니다.”

“어떻게 확신하시는 건데요?”

“마로네 양은 마법사고, 저는 성기사이지 않습니까. 번갈아서 능력을 쓰면 도시 전체가 불타더라도 이 장롱 하나 정도는 불에 타지 않게 지킬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도 말이 안 되는 억지가 아니었다.

성기사에게는 보호막이나 결계, 신성 인챈트 같은 이능이 여럿 있고 이는 마법사 또한 매한가지.

“으음…….”

‘직감’이라는 말보다는 훨씬 그럴듯하게 들렸을까?

리리스 마로네 역시 그 말에 수긍하려는 듯한 기색을 보였고, 스벤 파라브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바깥에 노아르크인들이 한가득이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 이동하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만약 이동을 한다고 해도 차라리 불길이 여기까지 덮친 다음에 해도 늦지 않고요. 그땐 놈들도 불 때문에 정신이 없을 테니까요.”

“아… 그것도 그렇긴 하네요. 그럼 일단은 지켜보는 거로…….”

그렇게 리리스 마로네도 고개를 끄덕이며 장롱 안에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자는 결론이 나려던 때였다.

“…….”

돌연 리리스 마로네의 고개가 창가로 향한 채 굳는다.

처음엔 왜 저러는가도 싶었으나…….

“……꺄아아아아악!”

창밖 지상에서 세찬 비명이 들려오며 그 역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대장! 여기 숨어 있던 년 하나 찾았어!”

“아아아악! 사, 살려 주세요……!”

“하하하! 살려달라는데? 어떡할까?”

그 대화가 들려온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두근-!

아니겠지, 아니겠지, 아니겠지……?

속으로 빌고 또 빌었으나…….

“파, 파라브 씨……!”

두근-!

“…저, 저희가 구해야 해요!”

늘 그렇듯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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